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8)
두 번 사는 미대생 18화(18/93)
*
약속을 마친 우리는 다시 한예원 주변으로 복귀했다.
자취방이 전부 이 인근이기 때문.
집에 들어가기 전에 헤븐즈 도어에 방문해서 사장님에게 오늘 있던 말을 전해주는데, 그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프랜차이즈를 내고 싶다 하셨다고?!”
“네. 아직 결정된 건 아닌데요, 사장님이랑도 따로 말씀을 나누고 싶으시대요.”
“······ 세상일 진짜 모르겠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손님도 특이하네. 대학 신입생을 데려다가 카페를 설계하게 한다니, 이게 말이 되나.”
“사장님도 그러셨잖아요.”
“그거야 나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그렇고.”
사장님이 뻔뻔하게 웃으며 반박했다.
“왜 내가 아니라 너한테 상의를 바로 하셨데. 이것도 신기하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기를 잠시.
이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네가 능력이 있기는 했지. 보는 사람 눈에는 보인다고 그 손님이 옥석을 알아봤나 보다. 나도 최근 들어서 다른 카페를 가 보니까, 네가 얼마나 일을 잘해준 건지 알겠더라.”
그도 최근 이곳저곳을 다닌 모양이었다.
이 가게에 눈이 익었으니, 어느 카페를 가든 단점만 잔뜩 보였겠지.
“기념으로 맛있는 커피 한 잔 뽑아주마.”
사장님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그러길 잠시.
나는 곧 나머지 세 사람과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비록 사장님은 저한테 일감을 맡기셨지만, 저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에이.”
주지훈 선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혼자서도 잘할 것 같은데.”
“아뇨.”
나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제 머릿속 계획을 현실로 꺼내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현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난번 전디전에 내놓았던 모형 같은 걸 또 만들 거예요.”
“······!”
“가능하면 가구도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서 보여드릴 거고요.”
딱 설계도만 가져다가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오경진 회장이 내게 바란 건 그게 아닐 터.
천만 원을 주기로 했다.
그러니 나도 천만 원어치 일을 할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야지.’
나는 추가로 말을 이었다.
“옷을 만들어야 하고,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어야 해요. 게다가 이런저런 소품까지 만들려면 저 혼자서는 죽어도 소화 못 해요.”
“어렵겠네.”
“그러니까 규태, 그리고 형이랑 누나가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공짜로 해달라고는 안 해요.”
“나는 그냥 최저시급만 주면······.”
규태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받은 돈은 정확하게 사람 수만큼 나눌 겁니다.”
“······ 오우.”
규태가 숨을 삼켰다.
“천을 넷이서 나누면 각자 얼마야.”
이백오십.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회사원들이야 한 달이면 벌 돈이라지만, 이 시기의 대학생들에게는 방학을 꼬박 아르바이트에만 불살라야 간신히 만질 수 있는 돈.
전공을 살려 일하면서도 그만한 금액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만한 일감은 없었다.
“하지만 옵션을 드리기는 힘들어요. 이건 제가 설계를 맡았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아니, 거기까지 요구하면 우리가 양심이 없는 거지.”
규태가 손을 저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때? 같이 할래?”
“시켜주십시오.”
규태는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 없는 듯했고, 지훈 선배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돈도 돈인데, 이거 취업할 때 포트폴리오로 써먹을 수 있겠다.”
승낙과 같은 의미였다.
그다음으로 한설 선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방학은 일만 하면서 보내겠네.”
“끝내고 다 같이 어디 놀러 가요.”
“그럼 좋아.”
세 사람한테 동의를 얻어낸 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만 원짜리 디자인이 뭔지 제대로 보여줍시다.”
나무와 벽돌과 빙수
회의가 시작됐다.
‘프랜차이즈에는 어떤 디자인이 먹히는가.’
전생에 수도 없이 했던 고민이었다.
이 고민이 필요한 순간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헤븐즈 도어를 기반으로 프랜차이즈를 차리고 싶다고 했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오경진 회장의 혜안이 느껴진다.
카페 프랜차이즈 시장을 선점하기에는 지금이 딱 적기일 터.
지금 이 순간조차도 스타벅스는 100번째 가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도 이 시장은 전쟁터가 된다.
시작한다면, 지금이다.
“냉정하게 말할게요.”
나는 입을 열었다.
“헤븐즈 도어를 지금 상태 이대로 프랜차이즈로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왜? 지금도 장사 잘되지 않나?”
“매출과는 조금 별개의 문제예요.”
한설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나는 말했다.
“아직 헤븐즈 도어에는 딱 뭐라 할 정체성이 없거든요.”
이게 문제였다.
프랜차이즈를 설립할 때, 다른 요소들을 전부 제쳐 두고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게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전국 어느 지점이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체성부터 만들어야 했다.
인테리어가 되었든 메뉴가 되었든, 시작은 결국 브랜드다.
‘스타벅스도 브랜드 마케팅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지.’
스타벅스의 브랜드 집착은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산하 매장을 전부 직영으로 꾸리고, 지구상의 어느 지점을 가든 같은 경험을 누릴 수 있게 만들 정도.
도시적이고, 세련됐고, 고급스럽다.
이 강력한 브랜드를 기반으로 스타벅스는 세계 커피 시장을 점령했다.
“헤븐즈 도어를 크게 키우려면, 헤븐즈 도어 만의 고유 브랜드가 필요해요.”
인테리어는 브랜드 컨셉이 잡힌 다음에 할 이야기겠지.
결론을 내린 나는 입을 열었다.
“의견을 듣고 싶은데, 헤븐즈 도어의 특징이라고 하면 어떤 게 떠오르세요?”
처음으로 입을 연 건 규태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툭툭 두드리다가 말했다.
“으음······ 사장님이 디저트를 잘 주시는 거?”
“좋아. 우선은 킵.”
솔직히 말해서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사장님이 디저트를 잘 주시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라서 그런 거니까.
하지만 회의에서 면박을 줘 봤자 상대를 위축시키기만 할 뿐이다.
입은 자유로울수록 좋다.
“형이랑 누나는요?”
“내 생각에는.”
지훈이 형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의자가 편한 거. 나 원래는 도서관만 다녔는데, 여기에 버릇 붙이니까 못 돌아가겠더라고.”
편안함이었다.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하자가 있는 아이디어였다.
‘애초에 가게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규태 때와 마찬가지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음으로 설이 누나에게 물어봤다.
“누나는 우리 카페에서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드세요?”
“나? 여기저기 내 작품 많이 보이는 거.”
자기중심적이리만치 솔직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지금까지의 대답 중 가장 정답에 근접했다.
‘맞아. 이런 전시품이야말로 다른 카페에서는 아직 찾아볼 수 없는 문화지.’
아니, 미래에도 이런 공간은 잘 없었다.
갤러리 카페야 가끔 생겼지만, 프랜차이즈 중에서는 전무하다.
아무튼.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이 카페의 정체성은 디저트를 잘 주시는 사장님과 편안한 가구, 그리고 전시품이다.’
크게 나누면 이렇게 셋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들 셋을 잘 조합해 우리 가게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런데 앞의 둘은 하자가 있다.
‘그럼 남는 건 전시품밖에 없는데, 이걸 살릴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였다.
규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여기에다가 설이 누나 조각만 두는 건가?”
“그건 왜?”
엉뚱한 이야기에 내가 되묻자, 규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아니 왜. 매일 같은 것만 보니까 좀 그렇잖아. 벌써 몇 주 되지 않았나?”
“시간이 그렇게 지났네.”
“그렇지? 이제 슬슬 새 걸로 가져다 두면 어쩔까 싶어서.”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한설 선배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지금 뭐라고? 내 조각이 뭐? 좀 그렇다고?”
“아, 아뇨, 누나 조각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규태가 움찔 떨고는 변명하듯 말하는데, 한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럼? 나쁘지 않은데 왜 새 걸로 가져다 놔?”
“맨날 같은 것만 보니까······.”
“응 그래. 보다 보면 물리는 조각이다. 이 말이지? 우리 한 번 물리적인 대화를 나눠볼까?”
“허허허. 그냥 절 죽여주시옵소서.”
“그래. 오늘 한 번 죽자.”
둘은 기다렸다는 듯 말장난을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대학생들 회의답네.’
조금만 농담할 구석이 나오면 이렇게 흘러가 버린다.
그런데, 생각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찰나였다.
‘잠깐. 아까 규태가 뭐라고 했더라?’
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시물을 새 걸로 교체한다고? 이거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둘러봤다.
한설 선배가 가져다 둔 조각품이 대충 스무 점가량.
여기에 내 레트로 텔레비전이 한 대.
보기에는 좋다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에 두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가구와는 달리 사장님이 돈을 주고 매입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또 아예 치워 버리면 심심하겠지.’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다른 사람들의 작품으로 바꾼다면?’
그것도 생각날 때 한 번씩 바꿔주는 게 아니라, 일정 주기마다 신작으로 교체해 가면서 건다면 어떨까.
‘예술가들이 거절하지는 않겠지. 오히려 줄을 설 거야.’
당장 한설 선배만 해도 저렇게 좋아하지 않는가.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오히려 이쪽에서 돈을 받아도 될 일이었다.
나중에는 유명 작가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도 좋고.
만화 작가라던지.
내 작품을 걸어둘 수도 있다.
아니, 걸 거다.
‘이거 좀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내친김에 지훈이 형에게 의견을 물었다.
“형은 여기 전시품을 주기적으로 바꾸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나는 좋을 것 같은데?”
“그래요?”
“매일 같은 것만 보면 질리잖아. ······물론 설이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튼. 나라면 전시품 바뀔 때마다 올 것 같은데.”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
그의 말을 듣자 확신이 들었다.
‘수요는 있다.’
사실, 주기적으로 상품을 교체해서 손님을 유치한다는 발상 자체는 꽤 흔했다.
오히려 해외에선 흔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한설 선배도 거들었다.
“예전에 일본 여행 갔을 때 봤던 건데, 가게마다 시즌 한정 메뉴인가. 그런 게 많더라.”
“아. 그러고 보니까 저도 자주 봤어요.”
시장 조사차 자주 갔었다.
그런데, 내 말에 한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너 일본 가봤어?”
아차.
나 지금은 국내 여행도 못 다녀본 대학교 신입생이지.
“인터넷에서 다녀왔습니다.”
아무튼, 한설 선배의 말마따나 일본에서는 계절마다 가게의 컨셉을 갈아엎는 경우도 흔했다.
식당에서 시즌 한정 메뉴를 판매한다거나.
심지어 편의점마저 거의 매달 시즌 상품을 내놓고는 했다.
‘이걸 확대해서 카페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카페의 존재의의를 감성 장사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카페의 주력 상품은 감성이다.
이 감성을, 전시품을 통해서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거다.
‘인테리어를 통째로 갈아엎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히겠지.’
좋다.
안 보이던 퍼즐 조각을 찾아낸 듯 발상이 이어졌다.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헤븐즈 도어의 브랜드는, 전시공간과 휴식공간의 결합이에요.”
“······!”
지훈 선배가 살짝 놀라고는 말했다.
“전디전 때랑 비슷하네.”
“네. 그때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면 편할 것 같아요.”
그래.
여기까지 왔으면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다.
남은 건 행동뿐.
*
“어차피 자잘한 예산은 오경진 회장님이 내주시겠다고 하셨으니까, 이번에는 돈을 크게 아낄 필요는 없어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예산과 마감 걱정이 사라진 디자이너는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상상을 풀어놓기만 하면 된다니, 이 얼마나 편한가.
“그럼 우선 소재부터 정할 건데요. 나무 괜찮아요?”
“어째 너랑 만나고부터 나무랑 많이 얽히네.”
지훈 선배가 의아한 듯 웃었다.
나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나무가 여러모로 좋더라고요. 다루기 쉽고 저렴하고, 무엇보다도 보기 편하잖아요.”
인테리어 소재로서 나무의 가장 큰 장점은 시각적인 편안함이었다.
특유의 옅은 갈색과 노란색이 눈의 피로를 낮춰주었다.
“게다가, 나무 같은 갈색 소재는 범용성도 좋아요. 어디에 내놔도 무난하죠.”
“그렇지. 같은 공간이어도 색깔 하나에 분위기가 확확 변하더라.”
지훈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과이니만큼 공감하는 바가 있는 모양.
“가게를 흰색으로 도배하면 회전율이 올라간다잖아.”
손님들이 가게를 쉽게 떠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태가 갑작스레 물었다.
“파란색이나 빨간색은 안 돼?”
“그건 금기야.”
“왜?”
“지나치게 자극적인 색깔은 손님들에게 불편함을 주거든.”
“오······ 그럼 검은색은?”
“검은색이나 은색은 전문성을 강조하는 색깔이야. 그래서 기술력을 내세우는 업체들이 많이 쓰고는 하지.”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럼 우린 편안함이 메인이니까 갈색으로 미는 게 좋겠다.”
“바로 그거야.”
“음, 그럼 아예.”
규태가 의견을 냈다.
“유니폼도 살짝 갈색으로 할까?”
“좋은데.”
이건 둘러대기로 말하는 게 아니다.
진짜로 좋다.
통일성이 느껴진다.
커피 프랜차이즈는 브랜드 컬러도 잘 정해야 하는데, 아예 갈색으로 밀어도 될 것 같다.
‘이제야 회의가 생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
이런저런 사항을 고려해 볼 때, 나무만 한 소재는 없었다.
‘그럼 나무를 베이스로 잡았을 때 그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서브 소재라면······ 역시 벽돌이 최고지.’
벽돌 베이스 인테리어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유지비용이 거의 안 든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멋이 붙는다.
둘째. 공사 기간을 확연히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세 번째.
‘이게 제일 중요하지.’
구하기 쉽다.
‘이 시기에는 소재 문제로 못 다루는 디자인이 좀 많아.’
아직 카페 문화가 덜 발전한 시기다.
어지간한 인테리어용 소품은 없다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벽돌은 달랐다.
‘시대를 막론하고 돈만 주면 언제든 얼마든지 사올 수 있다. 가공도 쉽지.’
그뿐이랴.
알아서 습기조절까지 해준다.
카페 내부에 미술품을 걸어둬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이보다 완벽한 소재는 없을지도 몰랐다.
“좋아. 이번 작품은 나무와 벽돌의 조화 어떨까요.”
“벽돌 좋지.”
지훈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컨셉이 잡히자, 그림을 그릴 때 거칠 게 없었다.
사사삭.
내 팔이 움직일 때마다 종이 위로 강렬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것을 본 지훈 선배가 물었다.
“어? 이거 벽돌 아니야?”
“네. 벽돌 맞아요.”
“뭐야. 벽돌을 내장재로 쓴다는 말이었어? 외장재가 아니라?”
그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모험이지 않나?”
어쩔 수 없다.
실내 벽돌 인테리어가 유행을 타기 시작한 건, 빨라도 10년 뒤부터의 이야기다.
하지만, 괜찮다.
“자신 있어요. 결과물로 보고 말해줘요.”
나는 그림에 집중했다.
이 그림 하나로 우리 조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오경진 회장을 설득하는 게 본선이라면, 이건 아직 예선에 불과했다.
그렇게 10분쯤이 지났을 때.
종이 위에는 세 가지 구도로 바라본 카페 인테리어 투시도가 그려져 있었다.
“어때요?”
내가 그 그림을 셋에게 보여주며 물었을 때, 규태는 이미 놀라길 포기했는지 허허 웃기만 했다.
“못하는 게 없네. 괴물이다. 괴물이야.”
규태가 이마를 탁 쳤다.
리액션이 풍부하다.
“너 그림 그리는 거 볼 때마다 자퇴하고 싶다. 같은 신입생 맞아?”
“뭐래.”
한설 선배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재하가 이상한 거야. 당장 지훈이 오빠네 과 동기 중에서도 이만큼 그리는 사람은 잘 없을걸?”
“그건 그렇지. 한예원 신입생들이 다 얘 같았으면 나는 입학도 못 했다.”
지훈 선배가 피식 웃었다.
대충 분위기는 정리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훈이 형. 이걸로 진행해도 될까요?”
“모형으로 만들 생각이지?”
“네. 지난번 전디전에 내놓았던 거 절반 크기로요.”
“음······.”
지훈 선배가 잠시 우물거리는데, 한설 선배가 끼어들며 말했다.
“오빠가 무슨 요리대회 심사위원이에요? 분위기 잡지 말고 얼른 말해요.”
“아 좀. 알았어.”
지훈 선배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벽돌이라길래 조금 걱정했는데, 해 보면 또 어울릴 것 같네. 나는 찬성. 할만할 것 같아.”
그의 인정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다.
대충 기획 회의가 끝났다.
그다음으로, 어디서 본격적인 작업을 진행할지를 상의하려는 찰나였다.
“열심히 하네.”
사장님이 트레이에 뭔가를 들고 오더니 말했다.
“이거 먹으면서 천천히 해.”
트레이 위에 뭔가 커다란 그릇이 담겨 있었다.
한설 선배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이거 빙수 아니에요?”
말 그대로 빙수였다.
새하얗게 간 얼음 위에 팥 토핑.
“저 빙수 무지 좋아하는데. 갑자기 왠 빙수예요?”
“이제 곧 여름이잖아. 아까 너희가 계절 메뉴 이야기 나누는 거 듣고 생각나서.”
사장님은 부끄러운 듯 웃다가 말했다.
“아무리 그대로 카페에서 빙수를 파는 건 조금 이상한가?”
“으음. 아무래도 조금 안 어울리기는 하네요. 카페에서 빙수 파는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렇지? 내가 이래서 망할 뻔했나 보다. 그냥 하던 거나 잘해야지.”
사장님이 자조적으로 웃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떠올랐다.
‘디저트 잘 주는 사장님이 한 건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구석에서 뭐가 하나씩 튀어나왔다.
돈 드립니다
기본적인 기획 회의가 끝났다.
다음날.
나는 팀원들을 어느 장소로 초대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이종이 교수님 작업실······.”
규태가 놀란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그렇다.
내가 팀원들을 데리고 온 곳은 이종이 교수님의 작업실.
교수님에게 허가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습니다.]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다.
“이야.”
지훈 선배는 차분한 걸음으로 작업실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진짜 넓네. 좋겠다······ 재하야. 여길 너 혼자서 쓰는 거야?”
“네. 원래는 같이 쓰는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요즘은 어디 갔는지 안 보여요.”
그 사이 규태가 끼어들었다.
“서지은?”
“서지은이 아니라 서지원.”
“아무튼, 걔 어디 갔대?”
“몰라.”
그냥 둘러대는 말은 아니다.
진짜로 모른다.
1학기도 다 안 채우고 어디로 간 걸까.
‘설마 했더니 기말고사 시험에도 안 나올 줄이야.’
미대에는 워낙 개성 있는 사람이 많다 보니, 1학년 때 두문불출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흔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특히 한예원은 갑자기 자기 예술 하겠다며 실종되는 사람이 잦았다.
‘서지원도 그런 부류였나?’
이종이 교수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모를 노릇이다.
“교수님한테 여쭤봤는데, 여기서 다 같이 작업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난 여기 마음에 든다.”
설이 누나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학교 작업실에서는 누가 내 물건 슬쩍할까 봐 좀 불편했어. 그렇죠, 오빠?”
“가끔 손버릇 나쁜 애들이 있지.”
“솔직히 그런 거 아니더라도 작업실 자체가 좋아요.”
“응. 우리 과 동기 중에서도 이만큼 좋은 작업실 가진 애들은 한 명도 없을걸.”
쓰다 보니까 적응해서 살짝 잊고 있었는데, 여기가 좋긴 한가 보다.
그렇게 짐을 풀고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을 무렵, 나는 지훈이 형에게 말했다.
“우선은 큰 틀에서 인테리어 모형부터 만들 거예요. 형은 많이 만들어 보셨죠?”
“내가 또 건축과잖아.”
지훈 선배가 자신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과에서 일 년 내내 하는 게 뭔데? 인테리어 모형 만드는 거다. 이 말이야. 셀 수도 없이 해 봤지.”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맴돌았다.
그동안 우리 중 최연장자임에도 은근 끌려다니기만 했는데, 마침내 활약할 기회가 와서 기쁜 모양.
“재하가 디자인을 짜고, 내가 큰 틀에서 모형을 만든 다음에 한설이가 디테일한 소품 만들면 되겠다.”
“전디전 때랑 비슷한 구성이네요.”
“그럼 저는요?”
규태가 끼어들었다.
내가 말했다.
“너는 옷 만들어.”
“넵.”
대강의 역할 분담이 끝났다.
그리고,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정작 주도자인 나는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필요한 설계도며 스케치며 어제 이미 다 마쳤기 때문.
그렇다고 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고민으로 바빴다.
‘오경진 회장을 놀라게 할 만큼 훌륭한 한 방이 필요해.’
그냥 괜찮은 정도로는 모자라다.
이 프랜차이즈의 브랜드, 갤러리 카페의 승패는 전시품에 달려 있다.
확실하게 살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만한 전시품이 필요했다.
‘헤븐즈 도어처럼 해 달라고 했지만, 그 이상을 보여줘야겠지.’
그걸 위한 천만 원 아니겠는가.
오경진 회장에게 이 프랜차이즈가 어떤 브랜드를 지향하는지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또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도.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작업은 내 디자이너로서의 출사표다.
‘익숙한 나무 조각으로 갈까? 그런데 또 나무 조각은 너무 뻔하지 않나?’
나무 조각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어디에나 잘 어울린다는 무난함이 여기에서는 독이 됐다.
눈에 띄지 않기 때문.
‘적당히 도전적이면서도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한데.’
답이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서두르지는 않았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천천히 가야 하는 법.
중간중간 설계도를 다듬고 시제품을 만들고, 다른 팀원들의 작업을 보조하며 천천히 고민했다.
그렇게 분주하게 며칠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덜컹.
갑작스럽게 작업실 문이 열렸다.
‘누구지? 교수님인가?’
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머리를 길게 기른 여성.
겉모습으로 추측하건대 아마 20대 초반, 그런 학생.
그녀가 우리에게 물었다.
“어? 누구세요?”
······ 그거 우리가 할 말인데.
왠지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