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9)
두 번 사는 미대생 19화(19/93)
*
“왜 사람이 많은가 했더니.”
갑작스럽게 작업실에 찾아온 여성이 밝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구들이랑 같이 작업하러 온 거였구나.”
김연우.
그녀는 이종이 교수님 작업실에 다녔던 학생으로서, 한예원을 이미 옛적에 졸업한 선배였다.
처음에는 우리를 보고 놀랐던 것 같았는데, 상황을 설명하자 이내 긴장을 풀었다.
“교수님 만나러 오신 거네요?”
“응. 최근에 작업하는데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상의 좀 드리려고.”
“아······ 어쩐지. 깜짝 놀랐네요.”
“나도. 심심하면 들렸는데 이렇게 사람 많은 건 처음 봤거든.”
연우 선배는 붙임성이 썩 좋았다.
우리를 처음 만났음에도 후배라는 걸 알자, 오랫동안 알았던 사이인 것처럼 이런저런 사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잘 들어. 3학년쯤 되면 그때부터 슬슬 교수님들이 먹을 걸 사주기 시작하거든? 그때 절대로 따라가지 마.”
“왜요?”
“그거 다 대학원 데려가려고 그러는 거야. 밥 사주신다고 마음을 열면, 거기서부터 인생이 점점 꼬이기 시작하는······.”
이야기가 무르익어 딴 길로 샐 무렵, 나는 물었다.
“그럼 선배님은 취업 안 하고 바로 예술 쪽으로 트신 거예요?”
“뭐, 그렇지.”
그녀가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졸업하고서는 계속 작품 준비에만 미쳐 살았어.”
연우 선배의 표정에서 예술가 특유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 가슴속에서도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종이 교수님 작업실에서 졸업까지 한 사람이야. 그럼 실력은 이미 보장됐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카페에 어떤 전시품을 세워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혹시 연우 선배의 작품만 괜찮다면, 우리 작업에 한 번 꼬드겨 봐도 좋지 않을까.
나는 그런 희망을 품으며 말했다.
“그럼 선배님은 전시도 많이 해 보셨겠네요.”
“그게······.”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자신만만했던 어깨가 구멍 난 풍선처럼 사그라들었다.
“우리나라 전시 문화가 그렇게 발달하진 않았더라······.”
“······.”
자세히 안 들어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안 풀렸군.’
야심 차게 전시로 나간 건 좋은데, 막상 생각대로 되진 않았던 모양.
그래도 섭외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작품만 좋으면 장땡이지.’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혹시 어떤 작품 하시는지 보여주실 수 있어요?”
“그거야 못 보여줄 건 없지. 잠깐만. 이거 원래는 교수님한테 보여드리려고 가지고 온 거긴 한데.”
연우 선배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화통 하나를 끄집어냈다.
뽁.
뚜껑을 따자, 그 안에서 하늘하늘한 무언가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길쭉한 막대기 밑으로 그림이 붙은 게, 마치 족자 같은 형태.
그런데, 그림의 질감이 좀 독특했다.
단순히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 어?”
눈에 익었다.
‘이거 섬유 예술이잖아.’
그렇다.
실 형태의 섬유를 치밀하게 엮어 만드는 예술이었다.
이걸로 그림을 짜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입체 모형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연우 선배가 만든 것은 그 중간 지점의 무언가였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느낌이 조금씩 다르네.’
비단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작품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치밀한 입체감이 있었다.
“어때? 예쁘지?”
옆에서 연우 선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기 작품에 큰 자신감을 가진 모양.
실제로, 자신감을 가져 마땅한 완성도였다.
‘훌륭해. 역시 이종이 교수님 작업실 출신이다.’
섬유 예술 분야에서 이만한 솜씨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한국 전체를 뒤적여도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그녀가 최고 아닐까.
아님 말고.
그보다 이 작품의 스타일,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선배 이름이······ 잠깐.’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눈이 크게 뜨였다.
‘김연우가 그 김연우였어?’
김연우.
근미래 예술의 전당에 개인전을 수차례 가지게 되는 섬유 예술가.
이름이 미묘하게 중성적이다 보니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봤는데 작품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섬유로 모든 질감을 표현하는 예술로 유명했지. 회사 사람들이랑 다 같이 전시전 보러 갔었는데, 이걸 까먹고 있었네.’
지금 그 김연우가 내 옆에서 깔깔 웃으며 말했다.
“괜찮은 것 같은데 왜 안 팔리지? 내 눈에만 괜찮게 보여서 그런가? 일이 년만 더 해 보고 안 되면 취업이나 알아봐야겠다.”
어디까지나 농담조로 뱉은 말.
하지만, 내 귀에는 그 밑에 숨겨진 한탄이 들렸다.
안 팔리는 예술가 중에서 자주 봤다.
얼핏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적인 그런 성격.
‘아마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거겠지.’
자기 작품을 사랑하는 예술가일수록 이런 상태에 빠지기 쉬웠다.
작품에 품은 자부심과 세상의 평가 속에서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
그런데, 한설 선배는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작품 진짜 괜찮은데 이게 왜 전시가 안 돼요?”
“그게 그렇게 되더라.”
연우 선배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나도 진짜 진짜 열심히 만들었거든. 근데 좀 큰 전시관에서는 신인 주제에 너무 시험적이라서 안 받아준다더라. 이게 말이나 돼?”
“안 되죠. 신인이면 무난한 거만 하라는 거예요. 뭐예요?”
“맞아.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커리어라도 쌓으면 된다는데, 신인이 어디서 커리어를 쌓아?”
“언니, 그럼 차라리 작은 전시전은 어때요? 전시하는 사람이 없어서 텅텅 빈 곳들도 많잖아요.”
“그게 또 아니더라.”
연우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작은 데는 전시하는 사람만 없는 게 아니라, 보러오는 사람도 없더라. 하루 대관에도 십만 원 가까이 드는데, 그렇게 돈 써도 하루에 10명 오면 많이 온 거야.”
“아······.”
“그렇게 빈 전시장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으려면 세상만사가 다 허무해진다? 내 몸값보다 대관료가 비싸구나 싶고.”
그녀야 농담을 섞어 웃으며 말하지만, 실태는 처참한 현실이었다.
예술가란 이렇게 아득바득 버텨 운 좋게 빛을 본 사람이 대성하는 직종.
실력만으로는 안 됐다.
“그렇다고 지인들 끌어모아서 사람 채우잖아?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제자들한테 작품 강매하는 교수님들처럼 되어 있는 거지.”
“으······.”
한설이 소름 돋는다는 듯 양팔을 감싸 안았다.
“저도 나중에 전시 쪽으로 나가고 싶은데······.”
그녀도 졸업 후에는 예술가를 지향하는 만큼, 눈앞의 실패 사례에 은근히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녀는 졸업 직후 작품 하나를 1억에 팔아 재낄 예정이다.
또 연우 선배도 언젠가 예술의 전당에 입성할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까 지훈이 형도 부자가 될 예정이지.’
생각해 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잘났다.
그런데 박규태, 이놈은 나중에 커서 뭐가 될까.
슬쩍 바라보려니 규태가 흠칫 떨었다.
“······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머리카락에 먼지 묻어서.”
“어? 응? 어.”
그렇게 잠시.
한설 선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예술로 밥 먹고 살기가 쉽지가 않네요.”
“원래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먹고 사는 게 제일 힘들지. 후우. 어디 내 작품에 돈을 턱턱 내줄 부호 없나 몰라.”
연우 선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이미 그녀의 가치를 꿰뚫어 본 사람이 있다는 걸.
그것도.
바로 코앞에.
“선배님.”
나였다.
“혹시 저희랑 일 하나 하실래요?”
“일?”
연우 선배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
구체적인 사업 설명을 들은 그녀는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너희가 프랜차이즈를 준비하고 있다고? 돈이 어디서 나서?”
“바깥에서 투자금을 받기로 했어요.”
내 대답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학부생이 투자금을 받았다고?”
“원래 사업은 남의 돈으로 해야 제맛이라잖아요.”
“······ 와.”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나 신입생 때는 술밖에 안 마셨는데, 요즘 애들은 이러고 사는구나. 이러니까 나 같은 사람은 자연 도태되는 거지.”
“아녜요. 언니.”
설이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냥 얘가 이상한 거예요.”
“맞습니다. 재하만 이럽니다.”
“저희 과에서도 다 미친놈 취급해요.”
지훈이 형과 규태도 한마디씩 보탰다.
슬쩍 째려보자 규태만 움찔했다.
아무튼,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연우 선배에게 물었다.
“작품 전시라고 해서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카페 벽에 선배님 작품을 걸어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족자 형태의 섬유 예술품이라.
딱 좋다.
공간 차지도 안 하고, 예술품 느낌도 팍팍 난다.
심지어 주변 인테리어와의 궁합도 좋다.
‘카페에 두기에 이만한 전시품이 또 있을까.’
그런데.
정작 연우 선배가 내 제안에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눈치였다.
“음······ 그래도 지금은 사정이 좀 그런데.”
“사정이요?”
갑작스러운 말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말 하긴 좀 부끄러운데. 카페 전시도 돈이 좀 들지 않니?”
아.
무슨 말인가 했더니마는.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에이, 저희는 돈 안 받아요.”
“······ 뭐?”
연우 선배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묻는데,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돈 드립니다.”
우드 슬랩
“진짜로 돈을 준다고?”
설명을 들은 연우 선배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줄 수도 있지, 왜 그래요.”
“아니, 내 작품을 거는데 왜 내가 돈을 받아?”
그녀는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지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저희 프랜차이즈니까요.”
“······.”
“구체적인 계획은 더 세워봐야 알긴 하겠는데, 그냥 전시품을 진열해 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교체할 생각이에요. 구매자가 나오면 판매도 할 거고요.”
사실, 연우 선배를 보고 확실하게 방향성을 잡았다.
‘이런 사람들을 계속 발굴해야겠다.’
재능이 넘치면서도 기회가 없어 못 뜨는 사람이 많다.
이걸 내가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창작자와 작품명을 적어두고, 필요하다면 구매까지 이어지도록 서비스하는 거야.’
선금을 지불하고, 작품이 팔리거든 최소한의 수수료만을 받는다.
예술가는 대관료를 저렴하게 때울 수 있고, 프랜차이즈는 인테리어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윈윈이다.
물론, 이건 오경진 회장과 상의해 봐야 할 일이긴 했다.
‘생각대로만 풀린다면 우리 측에 작품을 출품하려는 개인 예술가들이 제 발로 찾아올 테고,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겠지.’
그야말로 선순환이다.
전시공간과 휴식공간의 결합이라는 발상에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장기적으로 우리 프랜차이즈 자체를 하나의 플랫폼화 시킬 수 있다면 또 어떨까.
‘이 프랜차이즈가 전국적으로 퍼진다면, 자기 하고 싶은 예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지 않을까.’
무궁무진한 상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은 설레발이다.
나는 수많은 생각들을 뒤로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많이 챙겨 드리지는 못해요. 아직은 기획 단계이기도 하고, 회장님에게 따로 상의를 드려서 통과시킨 뒤에 확답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상관없어.”
연우 선배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내 돈이 나가는 건 아니잖아.”
자기 돈 내고 전시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기쁜 모양.
돈이라는 게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
‘아니, 가난한 예술가를 웃게 만든다.’
나는 피식 웃은 뒤 말했다.
“매장 크기를 생각해 보면, 선배님 작품만 해도 열 개는 필요한 데 시간 괜찮아요?”
“없어도 만들어와야지.”
그녀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잠깐.”
한설 선배가 끼어들더니 말했다.
“그럼 내 작품도 걸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작은 억울함이 보였다.
남한테는 권유하면서, 왜 자기한테는 안 물어봤냐는 듯한 얼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럼 안 걸려고 그러셨어요?”
“오······.”
한설 선배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너 순발력 되게 좋다.”
“이게 처세술이죠.”
“좋아. 아주 좋아.”
그녀가 킥킥 웃었다.
나도 좋다.
이만하면 전시품은 충분히 갖춰졌다.
‘메인은 연우 선배의 섬유 예술로 두고, 여기저기 한설 선배의 조각을 둔다.’
연우 선배가 특별함을, 한설 선배가 무난함을 담당한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내 작품 하나만 걸어볼 생각이었다.
‘······ 뭐가 좋을까.’
가능하면 카페와 어울리는 물건을 두고 싶었다.
그것도 크게 실용적이고, 또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을.
내가 설계하는 작품인데 이 정도 권리는 누려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고민하기를 잠시.
이내 한 가지 물건이 떠올랐다.
‘역시 프랜차이즈 카페 하면 그게 있어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지훈이 형.”
“응?”
“내일 저랑 어디 좀 다녀와요.”
*
인천의 목재단지.
차를 타고 달리는데 지훈 선배가 아련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여길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네.”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게 학기 초였으니, 벌써 두세 달이나 흘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소장님한테 명함 받으셨잖아요. 그때 또 찾아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말은 그랬는데 학교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좀 멀잖아. 학기 중에는 좀 그렇지.”
이 사람, 은근 성실하다.
역시 성적 우수자 주지훈이다.
“그건 그렇고, 이 트럭은 누구한테 빌렸어요?”
“이거? 학과 동기.”
트럭을 대뜸 빌려주는 친구라니.
‘역시 친구가 많다.’
아무튼, 차를 타고 달리려니 슬슬 익숙한 광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서 성준 목재라고 적힌 간판이 우리를 반겨줄 무렵, 곧 털북숭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성준 소장이었다.
차를 멈춰 세우고 창문을 열자, 그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또 왔네.”
“소장님 보고 싶어서 왔죠.”
이번에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대신, 유성준 소장이 우리 차에 타고는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학생들도 참 이상해.”
“왜요?”
“내가 이 일 하면서 이런 주문을 받는 건 또 처음 본다. 왜 그런 매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보통은 없지.”
“그래서 제가 소장님에게 연락을 드린 거 아니겠습니까.”
“음?”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리는데, 내가 말했다.
“소장님이 못 구하는 거면 어디에도 없는 거죠.”
“······ 크흠.”
성준 소장이 헛기침을 뱉었다.
“아부 잘하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린 물건은 있을까요?”
“그건······.”
그가 뺨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있더라. 업장 비워두기 좀 그러니까 얼른 가자.”
“옙.”
우리는 성준 소장님을 태우고 곧 어느 창고로 향했다.
넓고 넓은 인천 목재단지에서도 상당히 외곽으로 빠진 어딘가.
덜컹.
차에서 내린 성준 소장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창고 문을 땄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나무 냄새가 먼지와 섞여 훅 풍겨왔다.
“우와······.”
지훈 선배가 감탄을 뱉었다.
창고의 내부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목재가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이 근방에서 처분 곤란한 물건들이 전부 여기로 오지. 그러니까, 보통 여기 물건을 찾는 사람은 없단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성준 소장은 창고 불을 켜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보물찾기를 하듯 이곳저곳 뒤적거렸다.
그렇게 몇 분.
곧 묵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찾았다!”
“오.”
그제야 그의 옆으로 가서 보자, 말 그대로 내가 바랐던 물건이 있었다.
성준 소장이 그 물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뉴질랜드산 라디에타 소나무. 이거 맞지?”
“네. 정확히 제가 찾고 있던 그거예요.”
무식하게 큰 나무 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뉴질랜드 소나무, 일명 뉴송.
그것이 이대로 어떻게 써야 하나 싶을 정도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범용성이 좋고 가성비도 좋다 보니, 국내에 들어오는 족족 팔려나가는 물건이다.’
그런데, 내게 필요한 건 뉴송 중에서도 특별한 물건이었다.
가공이라고는 거의 안 거친 통짜 원목.
보통 뉴송이 한국에 들어올 때는 거의 반가공 상태로 들어와서 찾기가 힘들었다.
혹여 들어오더라도 금방 가공해 버리고는 했다.
그래도 정 필요하다면야 해외에서 주문하면 되겠다만, 아무래도 산지에서 여기에 오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
‘빨라도 한 달. 그럼 이미 마감이 끝난 뒤겠지.’
못 구한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구석 창고에 남아 있었을 줄이야.
“좋은 게 널렸는데, 왜 하필 이런 물건이 필요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유성준 소장이 툴툴거렸다.
“이걸 통째로 다듬어서 책상으로 만들 거예요.”
“책상?”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혹시 이거 적당한 크기로 잘라 주실 수 있으세요?”
“보통 재단은 목공소에서 하는데.”
“예쁘게 다듬을 필요는 없어요. 대충 크기만 맞추면 돼요.”
“음, 견적을 봐야 알겠다.”
“잠시만요. 이렇게 자르면 되는데······.”
나는 그에게 미리 준비해 온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나무를 한 토막 잘라내기만 한 것 같은 형태였다.
만들었다기보다는 잘라냈다는 말이 어울릴 책상.
우드 슬랩 테이블이었다.
“보통 이런 책상을 쓰나?”
유성준 소장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지금 이 시기의 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극히 일부 작가들이나 목공소 사람들만 만들어서 쓸 정도.’
미래에는 스타벅스 책상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져서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라면 어디서나 심심찮게 보이게 된 물건이었다.
‘여기저기서 인기를 끌면서 매년 수입량이 두 배로 늘더니, 결국에는 대형 카페의 필수요소가 돼 버렸다.’
문제는 지금이 과거라는 것.
매년 수입량이 두 배로 늘었다는 건, 그 전년에는 절반도 안 됐다는 말과도 같았다.
하물며 지금 같은 시기에는 아예 유통 자체가 안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쁘죠?”
내 말에 유성준 소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예술 한다는 양반들 생각은 이 나이를 먹고도 모르겠네.”
“소장님.”
주지훈이 그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
*
우드 슬랩을 작업실로 들고 와서 책상으로 다듬기까지는 이후로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참고할 물건이 없다 보니 기억과 감각에 의존해야 했는데, 가구 제작이라기보다는 조각에 가까운 느낌으로 진행됐다.
그럼에도 결국 기나긴 노가다 끝에 결과물이 완성됐을 무렵.
“대체 뭘 만들려는 건가 했더니.”
지훈 선배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완성된 걸 보니까 그럴듯하기는 하다.”
“멋있죠.”
내가 큭큭 웃었다.
우드 슬랩 테이블.
어지간한 책상 서넛을 합친 만큼 거대한 면적에, 가장자리는 조선시대 산수화마냥 울퉁불퉁하게 가공했다.
또 상단부에는 여기저기 칼집을 넣어 포인트를 새겼다.
“진짜 이대로 써도 되나?”
한설 선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그야······ 만들다가 만 것 같아서.”
“그래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제대로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왜?”
“그 만들다가 만 것 같은 게 이 테이블의 진면목이거든요.”
자연에서 갓 채집한 것만 같은 느낌.
이게 바로 우드 슬랩 테이블의 알파이자 오메가이고, 또 빛과 소금이었다.
그것도 히말라야 핑크 소금.
‘이 테이블을 합석용 테이블로 둔다.’
이게 내 계획이었다.
카페 중앙에 두고 합석용으로 써먹는 것.
단순히 사이즈 때문에 우드 슬랩 테이블을 고른 건 아니었다.
우드 슬랩 테이블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일반적인 테이블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값어치가 떨어지기 마련이지.’
그런데.
우드 슬랩 테이블은 그 반대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가치가 올라간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상처와 세월의 잔향이 우드 슬랩 테이블을 명품으로 승화시켰다.
이게 내 목적이었다.
‘시간을 선점한다.’
다른 카페들의 인테리어가 아무리 상향 평준화되더라도, 시간의 격차만큼은 따라잡을 수 없다.
이 테이블이야말로 내 작업물로서 우리 카페의 정체성을 말해줄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모서리에 이 테이블을 제작한 날짜와 내 이름을 양각으로 새겨두었다.
[2002.7.05 / JH Design]JH는 내 이름 재하에서 이니셜을 따왔다.
손으로 상판을 천천히 쓸자 나무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솔직하게 다가왔다.
‘이거 하나로 우리 카페는 다른 카페들의 인테리어에서 영원한 우위를 얻는 거야.’
카페는 감성 장사고, 감성에는 세월만 한 게 없었다.
그 외에도 우드 슬랩 테이블에는 천연 방향제 효과가 있다는 소소한 장점까지.
‘완벽해.’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지훈 선배와 한설 선배가 만든 인테리어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저쪽도 완벽하다.’
일반적인 모형과는 다르게 빌드 퀄리티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조금 멀리서 사진을 찍는다면, 실제 매장이라고 봐도 속을 정도.
사이즈만 조금 작다뿐이지 전디전 때 그것보다도 훨씬 나았다.
‘역시 돈이 많이 들어가면 다르구나.’
오경진 회장이 말한 책임감이 이런 게 아닐까.
여기에 한설 선배와 연우 선배가 만든 조각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주인공만 등장하면 된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곧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뚜루루.
딸칵.
“네. 지금 바로 오시면 됩니다.”
오경진 회장이 작업실로 방문했다.
레시피는 비밀입니다(수정)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작업실의 팀원들이 차례차례 오경진 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시 뵙게 돼서 기쁩니다.”
오경진 회장은 전과 마찬가지로 한 명 한 명에게 악수하더니, 연우 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런데, 혹시 지난번에 뵈었던가요?”
“최근에 참가했습니다. 김연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아예 먼저 걸어 나와서 악수를 신청했다.
역시 붙임성이 좋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가서 말했다.
“연우 선배는 이번 저희 작품에서 전시품을 담당하셨어요.”
“전시 말씀입니까?”
그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되묻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프랜차이즈로서의 헤븐즈 도어를 기획할 때, 저희는 카페의 정체성으로 갤러리 카페를 구상했습니다.”
“갤러리 카페······.”
오경진 회장이 그 이름을 몇 번 반복하며 중얼거리고는 물었다.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지금부터 나는, 우리 팀원들을 대표해 우리가 어떤 상품을 기획했는지 이 사람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잔뜩 했다.’
첫 시작은 기획 의도였다.
“전 이번 카페를 설립할 때, 저희가 스타벅스를 상대로 어떤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음. 좋은 판단입니다.”
오경진 회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 프랜차이즈를 설립할 거라면, 스타벅스와는 차별성을 둘 필요가 있지요.”
내 선택이 맘에 드는 눈치였다.
사실, 여기서 스타벅스가 어쩌고는 나중에 덧붙인 설정이었다.
‘스타벅스는 이미 직영점만 수십 개 세운 프랜차이즈다. 비교 모델로 두기에 딱 좋지.’
아마 오경진 회장도 주시하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추측하고 말했던 건데, 운 좋게 제대로 먹힌 모양.
“그렇게 스타벅스를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그쪽은 모든 가게가 직영으로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본사 차원에서 엄격한 통제를 거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예. 개인 사업자가 연락을 취하려고 해도 상대해 주지 않지요.”
오경진 회장이 동의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스타벅스의 인테리어는 엄격합니다. 덕분에 전국 어디서나 같은 경험을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탓에 한 가지 단점이 생겼습니다.”
“그게 뭐죠?”
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딜 가든 거기서 거기라는 겁니다.”
스타벅스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신선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스타벅스는 어딜 가든 익숙한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
점포의 차이점이라고는 기껏 해 봐야 가게 바깥 외관의 차이가 대부분에, 가게 내부는 십중팔구가 비슷비슷했다.
‘그렇게 세계를 정복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우리가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쌓아온 브랜드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
“대신, 저희는 스타벅스와는 다른 방식을 생각해 봤습니다. 프랜차이즈면서도 올 때마다 새로운 재미, 다른 지점으로 찾아갈 이유를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그 방법이 전시였군요.”
“예.”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매주, 혹은 매달 전시 컨셉을 바꿉니다. 고전파 회화부터 시작해, 복고풍 포스터와 공예, 만화까지 넓은 분야의 작품을 차례대로 전시해나갈 생각입니다.”
“그럼 이 분, 연우 씨가 그중 한 작품을 맡으신 건가요?”
“예. 지금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전시대 위에 얹어두었던 흰색 천을 걷었다.
규태가 밀어붙였던 그 아이디어였다.
그 천 아래에서 아름다운 예술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섬유 예술이라고 합니다.”
“······ 오오.”
오경진 회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 선배가 옆으로 걸어가서는 천천히 설명했다.
“마닐라삼이라 불리는 아바카에서 추출한 섬유를 엮어, 창문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을 재현해 봤습니다.”
창틀 형태의 액자 뒤로 비가 흘렀다.
하지만 유리처럼 보이는 건 자세히 보면 그 정체는 섬유.
그 뒤에 흐르는 비 또한 섬유였다.
요컨대, 여러 겹의 섬유로 구성한 트릭.
‘역시 대단하다. 건조한 소재로 물기를 재현해 내다니.’
눈을 조금만 좁게 뜨고 보면 구분이 안 되는 정밀함에 오경진 회장이 환하게 웃었다.
“멋지군요. 이런 작품이라면 멀리서라도 얼마든지 보러 올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을 정도군요.”
“예. 그런 점에서 구매자를 중계해 주는 서비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이 부분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호평의 연속.
연우 선배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그다음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인테리어 모형을 가린 천을 걷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