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0)
두 번 사는 미대생 20화(20/93)
*
가로세로 일 미터 남짓의 인테리어 모형.
오경진 회장이 그것을 보고 내뱉은 첫 마디는 이러했다.
“······ 구조가 독특하군요.”
말 그대로였다.
15평 남짓한 실내는, 거의 벽돌과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 1평의 면적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시원하게 개방된 구성.
그 한가운데에는 우드 슬랩 테이블을 배치하고, 가장자리에는 정사각형 테이블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음.”
오경진 회장을 모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지난번에 들렸던 헤븐즈 도어와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합니다만, 세부적으로는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오경진 회장은 의아한 것을 넘어,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예. 거기서 한층 더 개선했습니다.”
인정했다.
차이를 피하면 변명이 되지만, 차이를 인정하면 선택이 된다.
“헤븐즈 도어를 이루는 핵심 DNA를 추출해서 한층 더 강화했습니다. 그게 이 매장입니다.”
“······!”
나는 모형 위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으면서 말했다.
“모든 좌석은 1인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인석이나 4인석이 필요할 경우, 1인 책상을 합쳐서 앉을 수 있게끔 설계했습니다.”
“지난번에 설명하셨던 그 책상이군요.”
“예. 이 부분은 기본기에 집중했습니다. 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타벅스도 앉아 있기 편합니다만, 저희는 가능한 그 이상을 추구했습니다.”
“음. 그때 말씀 주셨던 설명과는 다르지 않나요? 좌석이 편안하면 회전율에 불리하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회사 근처였기에 위치에 맞춰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프랜차이즈의 기본 인테리어는 기본적으로 범용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지역에 입점할지 모를 일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저 테이블은 뭐죠?”
그가 가게 가운데의 거대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기대한 그 질문이었다.
나는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드 슬랩 테이블이라고 합니다.”
“우드 슬랩 테이블?”
되묻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나무를 통째로 깎아서 만드는 테이블인데, 자연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것이 강점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멋이 깊어지는 건 물론, 방향제 효과도 있습니다. 또 기본적으로 합석용 테이블이기에 회전율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음······.”
오경진 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죄송하지만, 모형만 봐서는 딱 느낌이 오진 않는군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나는 인테리어 모형을 통째로 들어 옆 책상으로 옮겼다.
그리고.
기존 책상의 식탁보를 걷어 올렸다.
스륵.
동시에 오경진 회장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이건!”
식탁보의 밑에는 거친 통원목 테이블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
식탁보는 테이블의 정체를 가리기 위한 페이크였다.
‘발표라고 하면 반전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나는 차분히 책상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나무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테이블입니다. 이 테이블 하나를 만들기 위해 나무 하나가 들어간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진 않다.
나무 하나면 슬랩 두세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다.
꼼수를 부리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발표에서 적절한 과장은 필수다.
“전 이 프랜차이즈가 성공적으로 확장될 경우, 모든 매장에 우드 슬랩 테이블을 두고자 합니다.”
“모든 매장에 말입니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모든 나무는 고유의 생김새를 가지기 마련이고, 우드 슬랩 테이블은 그런 나무를 통째로 깎아서 만들기에 저마다 생김새와 품질이 다릅니다.”
“편차가 크겠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에 이 테이블이 각 매장을 대표하는 물건이 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건 단순한 공산품이 아닙니다. 이 책상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찍어내면 공산품이다.
하지만, 공산품이라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는 명품이 될 수 있다.
“이 테이블은 저희 카페와 함께 살아 숨 쉬고, 또 나이를 먹을 겁니다.”
“······ 맘에 듭니다. 음. 맘에 들어요.”
오경진 회장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반쯤 넘어온 눈치.
여기서 끝내도 좋겠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직 한 발 남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럼 또 뭔가가 있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씨익 웃고는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음?”
의아해하는 오경진 회장을 남겨두길 잠시.
나는 작업실 건물의 다른 층에 갖춰진 탕비실로 갔다.
그리고.
그동안 오늘 하루를 위해 준비했던 비밀 병기를 준비해서 가지고 왔다.
“이걸 저희 매장의 세일즈 포인트로 쓰려고 합니다.”
“······ 이건.”
오경진 회장은 잠시 굳더니 말했다.
“빙수군요.”
말 그대로였다.
빙수였다.
헤븐즈 도어의 사장님이 가져다주신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지만, 이건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그 빙수와는 어딘가 달랐다.
“아무런 토핑도 없군요.”
“한 번 드셔 보세요.”
나는 그에게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말없이 숟가락을 받아든 오경진 회장은, 빙수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이 맛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대체······ 이런 빙수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깊은 맛이라니.”
기대 이상의 반응이다.
나는 고생했던 보람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반적으로 빙수라고 하면 물을 얼려서 만들기 마련입니다만, 저희 얼음은 조금 다릅니다.”
“우유.”
오경진 회장이 말했다.
“우유를 넣었군요.”
“예. 물이 아닌 우유를 얼린 다음, 그대로 빙수기에 돌렸습니다.”
“저도 우유를 얼린 빙수는 먹어 봤습니다. 하지만, 이 빙수는 그 맛 이상입니다. 굉장히 진하고 단맛이 나는데, 뭔가를 첨가한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유만 넣은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경진 회장이 살짝 흥분한 눈치로 물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침착했던 그답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이 빙수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어 안달하는 눈치.
‘궁금하시겠지.’
하지만.
나는 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레시피는 비밀입니다.”
“······예?”
그가 굳은 사이,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설계를 채택하시겠다면, 그때 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침묵이 찾아왔다.
오경진 회장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그제야 자기가 조금 과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뱉었다.
“······ 좋습니다. 사실, 계약서는 미리 준비해 왔습니다. 빙수의 비밀이 궁금하니 어서 끝내지요.”
*
‘빙수가 잘 먹혔다.’
빙수의 비밀은 이러했다.
우유를 얼린 건 맞는데, 우유에 이것저것 첨가했다.
분유와 연유를 비롯해 아이스크림이나 쉐이크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밀크 파우더까지.
여러 가지 재료를 첨가한 결과, 전생에 먹었던 그 빙수 맛의 느낌이라도 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날려 먹은 재료만 해도 엄청나게 깨졌다. 그래도 그만한 값어치는 했어.’
빙수기가 눈꽃빙수기 같은 게 아니라 사장님한테 빌려온 평범한 물건인 탓에 조금 걱정했는데, 이걸로 충분했던 모양이다.
이 시기에 빙수란 문방구나 디저트 전문점에서 취급하는 정도.
카페에서 파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 메뉴 하나만으로도 흥행은 보장이다.’
오경진 회장은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뒤, 그 자리에서 잔금 지불을 마쳤다.
‘어서 결과물을 보고 싶군요.’
작업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시작됐다.
본격적인 작업을 착수한 게 방학이 끝나기 직전.
흔히 인테리어 공사로 보름에서 한 달 정도가 걸린다고 하는데, 그사이에는 내가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진짜 딱 설계한 대로 만드시네.’
오경진 회장은 돈을 아끼질 않았다.
보낸 견적서, 설계도에서 조금은 타협을 하지 않을까 했더니, 딱 내가 주문한 그대로 실행했다.
아무래도 나를 신뢰하는 모양.
덕분에 때때로 공사현장에 방문해서 둘러보고 있노라면 내가 다 흐뭇했다.
‘이 가게는 대박이 날 수밖에 없겠다.’
수준 차이가 심하다.
모든 면에서 이 시대의 다른 카페들과 수준 차이가 극심했다.
스타벅스는 돼야 상대를 해 볼 만하다.
한 번 헤븐즈 도어를 경험한 손님들은 결코 다른 가게에 만족하지 못하리라.
사장님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럼 내 지갑도 빵빵해지겠지.’
약속했던 천만 원은 다른 팀원들과 나눠 가졌지만, 오경진 회장에게 별도로 받은 옵션이 있었다.
‘프랜차이즈 매출의 1%. 그게 내 거다.’
로열티 계약이었다.
이건 오경진 회장이 내게 따로 챙겨준 몫.
얼핏 1%라는 숫자가 작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카페의 로열티가 매출의 3.3%인 점.
그리고 내가 이 프랜차이즈에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썩 후했다.
‘가게 매출이 한 달에 천만 원이 발생할 때 그중 내 몫이 십만 원이다.’
작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모르는 이야기였다.
‘몇 년쯤 지나면 가맹점만 백 개를 돌파하겠지.’
그때가 되면 숨만 쉬어도 한 달에 천만 원이 넘는다.
전생에 오경진 회장이 이룩한 숫자, 천을 달성한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2학기에는 밥값 걱정할 필요 없겠네.’
그리고.
나는 오경진 회장에게 또 다른 보상을 받았다.
그게 뭐냐면······.
“슬슬 입장 시간 다 됐다.”
“지각할 뻔했네.”
“재하 덕분에 좋은 구경을 다 한다.”
드로잉 쇼 티켓이었다.
세계적인 드로잉 달인 애슐리 크루거의 내한이 있었는데, 오경진 회장에게 그 티켓을 선물 받았다.
[아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저보다는 재하 씨가 요긴하게 쓰실 것 같습니다.]그래서 기쁘냐고 묻는다면.
물론이다.
기쁘다 못해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이 시기에 이 사람의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애슐리 크루거.
드로잉의 신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
나 같은 드로잉 마니아에게 이만한 선물이 또 있을까.
그렇게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규태가 나를 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근데 그 빙수 있잖아.”
“어.”
“그거 왜 이름이 한빙이야?”
그렇다.
그 빙수의 이름은 한빙이라고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설이 누나가 빙수를 좋아하잖아. 누나 이름에서 한을 따와서 한빙이라고 지었지.”
“그래?”
규태는 내 말에 납득한 듯하다가도 곰곰이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그것보다는 그냥 설ㅂ······.”
“그 이름은 안 돼.”
나는 급히 말을 끊었다.
“왜? 이게 더 어감 좋지 않나? 단어 뜻도 맞아떨어지고.”
“안 돼.”
“······.”
“아무튼, 안 돼.”
세상에는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법이었다.
······
···
아님 말고.
드로잉의 신
애슐리 크루거.
드로잉을 잘하는 수준을 넘어,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남자.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는 한 가지 기술을 깨우쳤다.
‘뭐든 제자리에서 밑그림 하나 없이 쓱싹 그려버리는 기술.’
그의 드로잉은 묘기의 영역에 달해 있었고, 그는 묘기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애슐리 쇼.
훗날 애슐리 크루거를 대표하게 되는 쇼였다.
‘운이 좋았다. 돈을 줘도 못 보는 공연인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나 같은 드로잉 신자에게 애슐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남자의 솜씨를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다니.
행운이다.
정말 행운이다.
오경진 회장. 치얼스.
‘회귀하길 잘했다.’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떨리는 마음이 과했다.
호흡곤란이 올 것만 같은데, 지훈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네?”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아서.”
“······ 너무 신나서 그래요. 애슐리 팬이거든요.”
“그래?”
지훈 선배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애슐리가 나이 먹으면 어른슐리.”
“······.”
덕분에 긴장감은 사라졌다.
존경심도 사라졌다.
*
공연장에 입장하고 좌석에 앉아서 기다리기를 잠시.
사방에서 관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5년 만의 내한이라지.”
“이번에 못 보면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라.”
모두가 기대감에 차 있었다.
“티켓 구하느라고 진짜 고생했다. 프리미엄이 얼마나 붙던지, 돈을 줘도 구하기가 어렵더라.”
애슐리 쇼의 암표 시세는 최소 백만 원대 이상.
제아무리 유명인이라고는 하나, 어지간한 월드 스타의 티켓도 이십만 원 아래에서 구하고도 남는데 왜 그의 공연이 유독 비싼 걸까.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애슐리 크루거는 언제나 소수 인원 공연만 고집하기 때문이지.’
관객들 하나하나와 소통하지 못하면, 그건 공연도 뭣도 아니라나.
이번 공연도 100명이 조금 안 되는 소수 인원만이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즉, 이 자리에 온 사람은 전부 그림에 미친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탁!
공연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뚜벅뚜벅 울리기를 잠시.
탕!
무대 위로 작은 조명 하나가 비쳤다.
“······!”
“애슐리다!”
그가 무대 위에 등장했다.
대머리에 하얀 와이셔츠.
환하게 웃는 얼굴.
애슐리를 대표하는 이미지 그대로였다.
‘진짜 애슐리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안뇽하세요우. 반갑슴니다. 애슬리 크루걸임니다.”
어설픈 한국어, 하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애슐리는 셔츠 앞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을 꺼내더니,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진정한 드로잉의 세계로 초대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진정한 드로잉의 세계로 초대하겠습니다.”
어딘가에서 통역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앞에 나와서 제 쇼를 도와줄 사람 어디 없습니까?)”
애슐리가 큰 목소리로 외치자, 사방에서 손이 올라왔다.
애슐리는 그중 한 명을 골랐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었다.
“(무대 위로 올라오세요.)”
애슐리는 그녀를 무대 위에 세우고는 말했다.
“(이름이 뭐죠?)”
“양채은이요.”
“(좋습니다. 미스 양.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시죠?)”
“음······.”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중세 포르투갈로 가고 싶어요.”
“(좋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을 그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애슐리는 그녀의 모습을 살피기를 불과 5초.
한순간 몸을 돌리더니, 벽에 펼쳐진 흰 종이 위를 향해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카가각!
칼 소리가 울릴 만큼 강렬한 펜.
춤사위를 방불케 하는 몸놀림을 따라 검은색 선이 일필휘지로 나아갔다.
얼핏 보기에는 날림으로 그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단언컨대 어설프지 않았다.
‘엄청나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특징만 잡아내고 있어.’
신기에 가까운 드로잉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얼굴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
‘밑그림도 없이 저렇게까지 그려내다니.’
이 기술을 구사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면, 못 하는 경우가 더 드물었다.
하지만, 애슐리처럼 완벽하지는 못했다.
몇십 초 남짓한 찰나.
종이 위로 여성의 얼굴이 나타났다.
“······와, 미치게 잘 그린다.”
규태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옆의 한설 선배도 공연에 푹 빠져 중얼거렸다.
“······ 조용히 해라. 박규태.”
불과 몇 분.
애슐리는 드디어 몸을 돌리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소개하겠습니다. 해적으로 재탄생한 미스 양입니다.)”
“······ 세상에.”
그녀가 그림을 보며 멍한 눈길로 감탄을 뱉었다.
그림 속의 그녀는, 해적의 옷을 입은 채 저 먼 허공을 향해 머스킷 총을 겨누고 있었다.
마치 현대인을 대항해시대로 불러낸 듯 생생한 모습.
디테일은 날렸지만, 윤곽만으로도 모든 느낌이 완벽하게 전해졌다.
‘인터넷에서 봤던 말들이 과장이 아니었어.’
진정 드로잉의 신이라고 말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솜씨였다.
관객들은 그제야 멈췄던 숨을 토해냈다.
“사람이 아니다.”
“몇십 년을 그리면 저런 게 되나?”
“이번 생에는 힘들지.”
애슐리는 관객들의 박수 소리를 즐기다가 말했다.
“(그럼, 다음으로 절 도와주실 분은 어디에 계실까요?)”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이 무대 위에 올라갔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모습이 그림 속에 등장했다.
쇼가 시작하고 불과 몇십 분.
곧 애슐리가 그리는 큰 그림이 나타났다.
‘전쟁이었어.’
관객들이 그림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해적, 전사, 귀족, 카우보이, 스파이 등 온갖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선박 위에 올라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내 피부에 소름이 올라왔다.
‘밑그림 하나 없이 펜 하나로 이런 세계관을 만들어 내다니. 역시 애슐리는 천재야.’
그는 종이 속 공간을 단 하나라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듯 빽빽하게 드로잉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관객들 대다수가 그림 속에 나타났을 무렵이었다.
“(흐음.)”
애슐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이 그림 속에 없는 사람이 딱 하나 있군요. 누굴까요? 누구 말해줄 사람?)”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누구지? 안 나간 사람이 있나?”
“우리 주변에는 다 한 번씩 나간 것 같은데.”
그 순간이었다.
‘알겠다.’
내가 손을 들었다.
저 그림에 없는 사람이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애슐리는 그런 날 지목하고는 말했다.
“(예. 누가 없죠?)”
나는 심호흡을 한 번 다듬고 말했다.
“애슐리 크루거 씨가 없습니다.”
그렇다.
나를 포함해서 관객들 대다수가 그림 속에 나타났지만, 정작 애슐리 본인이 없었다.
“진짜네?”
“와. 관찰력 돌았네.”
선배들과 규태도 눈치채지 못한 눈치로 중얼거렸다.
애슐리는 씨익 웃고는 외쳤다.
“(정답입니다!)”
그는 관객석까지 걸어와서 내 손목을 잡고는, 무대 위로 직접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말했다.
“(아까 이름이······ 미스터 이. 맞지요?)”
“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씨익 웃더니 말했다.
“(미스터 이가 절 그려주시겠어요?)”
“······!”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애슐리가 나한테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다니.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라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내 우상이 이런 말을 하는데 긴장이 돌지 않을 수가 있나.
‘마이클 잭슨이 관객한테 같이 춤추자고 하면 이런 느낌일 것 같은데.’
블랙홀에 빨려들 듯 머릿속이 텅 빈 순간이었다.
“이재하! 파이팅!”
멀리서 한설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내 얼굴이 다 붉어지며 정신이 다 돌아왔다.
“하겠습니다.”
“(용기가 좋습니다. 이 펜을 받고, 절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펜을 건네받았다.
깃털만큼 가벼울 펜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실수하면 안 된다.’
애슐리의 그림은 이미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완전히 바뀔 것.
“후우.”
숨을 천천히 내쉬어 떨림을 가라앉히고, 애슐리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눈에 담기 위해 집중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를 그려야 할까.
아니, 어떤 그림을 그려야 애슐리가 영원히 나를 기억할까.
‘좋아. 그걸로 하자.’
상상을 마쳤다.
그다음부터는 그릴 뿐이었다.
사삭!
흰 종이의 이젠 얼마 안 남은 공간으로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애슐리에게는 조금 못 미치지만, 그래도 일반인의 범주는 아득히 뛰어넘은 드로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저 사람도 장난 아닌데.”
“프로인가?”
관객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중이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펜 끝에 집중하며 손을 계속해 움직였다.
그렇게 약 3분.
하얀색 종이 위에 애슐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건······ 놀랍군요.)”
애슐리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림 위에는.
이 해상 전쟁에서 한 발 떨어져, 이 광경을 그리고 있는 애슐리가 그려져 있었다.
작중작인 셈.
“(미스터 이, 직업은 어떻게 되죠? 본업이 이쪽 계통인가요?)”
“미대생입니다.”
내 말에 애슐리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 아직 대학생이 이만한 실력이라니, 놀랍군요. 제가 미스터 이의 나이 때는 이보다 반도 못 그렸을 겁니다.)”
과장이었다.
애슐리는 고등학생의 나이 때 이미 드로잉의 달인으로 유명했으니까.
“(고맙습니다.)”
애슐리는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꼭 안았다.
순간, 정신이 나가버리는 줄 알았다.
오경진 회장, 당신은 내게 최고의 선물을 줬어.
애슐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 방문한 게 정말 오랜만인데,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관객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손뼉이 터져 나왔다.
그가 포옹을 풀었을 때, 나는 반쯤 쓰러질 것만 같은 상태였다.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간신히 자리에 도착하고,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을 무렵.
지훈 선배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지금도 너무 신나서 그래?”
“······.”
얼마 남지 않은 존경심이 깔끔하게 증발했다.
그렇게 잠시 뒤.
“(오늘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미스터 이. 더더욱 감사합니다.)”
애슐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나갈 때 오른쪽 문으로 가시면 제 일러스트북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장사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