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3)
두 번 사는 미대생 23화(23/93)
*
“어떻게 기한에 맞추긴 맞췄네.”
동우 선배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 진짜 빠르다. 솔직히 네가 버거울까 봐 다른 작품도 준비해 뒀는데.”
“프로잖아요. 시간 약속은 지켜야죠.”
“짜식. 기특한 말을 다 하네.”
동우 선배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래도 결과물이 날림작업이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어디 한번 내용물이나 보자.”
“좋죠.”
그렇게, 둘둘 감싸온 캔버스 포장을 뜯은 순간이었다.
동우 선배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걸 진짜 네가 했다고?”
그 안에는 어린 왕자를 기반으로 타 작품에 크로스오버시킨 작품 두 점이 들어있었다.
하나는 어린 왕자를 신데렐라와 섞은 작품.
나머지 하나는 피노키오와 섞은 작품.
“나쁘지 않죠?”
“······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훌륭한데?”
이거다.
이 말 하나 들어보려고 며칠 동안 고생깨나 했지.
동우 선배의 반응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상희 교수님께서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거든요. 그래서 잘 생각해 봤는데, 작품 내적인 발상보다는 외적인 발상을 시도해 봤어요.”
이게 내 생각이었다.
남들이 어린 왕자라는 작품 내부를 다룬다면, 나는 어린 왕자라는 작품 바깥을 다뤄 보았다.
그게 크로스 오버였다.
아예 작품의 벽을 뛰어넘은 것.
“그림이나 발상도 그럴듯하긴 한데.”
동우 선배는 아직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거 스토리가 생각보다 괜찮다.”
“클리셰가 괜히 좋은 게 아니라잖아요.”
나는 큭큭 웃었다.
지금 동우 선배가 보고 있는 캔버스에는, 어린 왕자와 신데렐라의 4컷 만화가 그려져 있었다.
신데렐라는 유리 구두 한 짝을 잃어버렸는지, 나머지 한쪽만 신은 채 울고 있다.
어린 왕자는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신발을 벗어서 건네주었다.
내 나름대로 어린 왕자의 순수함을 표현한 장면이었다.
“직관적이네.”
동우 선배의 말에 내가 설명했다.
“노렸어요.”
“뭘?”
“아예 새 캐릭터면 이게 어떤 캐릭터인지 설명하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럼 차라리 원래 유명한 캐릭터라면 그대로 써먹어도 되지 않을까 했어요.”
“맞네. 이 세상에 신데렐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동우 선배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 자체가 영리하다. 이종이 교수님이 괜히 널 칭찬하셨던 게 아니네.”
이미 한 번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때는 초면이고 할 말이 없어서 꺼낸 말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
“개장은 언제부터죠?”
“한 두세 시간 남았나?”
“그럼······ 흐아암.”
나는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저 어디서 잠깐만 쓰러져도 돼요?”
긴장이 풀리자 나흘 동안 밤샘했던 후유증이 몰아쳤다.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깊은 늪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만 같은 피로감.
아무래도 너무 달렸다.
“노력한 사람한테는 쉴 자격이 있지.”
동우 선배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사무실에 간이침대랑 담요 있어. 거기서 눈 좀 붙여.”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실례 아니야.”
*
“······.”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눈을 뜬 건 서너 시간을 한참 넘어 아예 저녁이 된 뒤였다.
가만히 눈꺼풀을 깜빡거리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검은색이었다.
‘그동안 너무 무리하기는 했었나 보다.’
족쇄를 찬 것처럼 무거웠던 몸이 이제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일어났음에도 뜬 눈으로 비몽사몽 천장만 응시하고 있는데,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뭐 하지.’
솔직히 할 일은 딱히 없다.
전시회가 이미 끝났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전시회라는 게 작가가 할 일이 딱히 없다.
예의상 자기 작품 주변에 앉아 노가리 까는 정도가 전부.
그것조차도 허례허식이라며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 많았다.
‘······ 모르겠다.’
더 누워 있을까 하다가, 그래도 담요를 걷고 상반신만 일으켰다.
교수님 오셨을 텐데 인사라도 해야겠지.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제 일어났어요?”
사무실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그제야 고개를 돌리니, 사무실 구석에서 한 여성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서른 정도일까.
어딘가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여성이었다.
나는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너무 잤나요?”
“푹 주무시던데요.”
“······ 혹시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시나요?”
그렇게 물어본 순간이었다.
“혹시 정상희 작가님 찾으세요?”
“네? 네. 어떻게 아셨어요?”
잠시 의아한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물이 담긴 종이컵을 건네며 말했다.
“작가님 주무시는 거 보고, 잠깐 지켜보다가 가셨어요.”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민망한 마음에 종이컵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그녀가 물었다.
“한예원 학생이시죠?”
분명 초면인데도 나를 아는 것 같다.
부스스한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네. 1학년이에요.”
“······와. 1학년일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시네요.”
그녀는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냥 나이가 어려서 놀랐다기에는 좀 과할 정도로.
나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녀는 딴청을 피우더니 말했다.
“그게, 작가님 작품이요. 사고 싶다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거든요.”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네?!”
눈이 번쩍 뜨였다.
졸음이 한 방에 달아났다.
‘내 작품을 사고 싶단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이만한 갤러리에서.
나흘 준비한 작품으로.
그냥 사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많았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동우 선배가 처음 참가한 사람 작품은 거의 안 팔린다고 했잖아.’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데, 눈앞의 여성은 내 반응이 웃긴지 킥킥 웃다가 말했다.
“작가님 작품 보고 누가 그렸는지 계속 물어보던데요. 제가 기억하기로만 거의 다섯 명? 그쯤은 됐어요.”
“······.”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니.
입에서 뭐라 말이 안 나왔다.
이런 상황에 흥분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나는 애써 기분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거짓말이죠?”
“제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
역시 진정이 안 된다.
나는 이 흥분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하며 말했다.
“규모 큰 전시회가 좋긴 좋네요. 저 같은 신인한테도 이렇게까지 관심이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저어가며 내 말을 부인하더니 말했다.
“작가님 작품만 그랬어요.”
“······ 네?”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다른 작가님은 많아야 두셋이거나 아니면 아예 말 한마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설상가상이다.
아니면 첩첩산중이다.
이 두 사자성어를 이런 상황에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다 일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 이런 말이었다.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싶을 정도.
‘가만, 그럼 내 작품에 관심 있다던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자고 있어서 그냥 돌아간 건가 걱정하는데, 눈앞의 여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작가님 깨워서 말씀드릴까 하다가, 너무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못 그랬어요.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요. 연락처는 받아 뒀거든요.”
다행이다.
몸이 쉬었다가 뛰었다가 쉬었다가 청룡열차처럼 기복이 심하다.
한 달 치 감정을 모두 소비한 기분.
모든 걱정이 사라지자, 그다음으로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저 코 골았나요?”
내 말에 그녀는 푸흐흐 웃더니 말했다.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요?”
“저한테는 민감하거든요. 부끄럽잖아요.”
“아뇨. 새근새근 숨소리 내는 정도?”
“다행이네요.”
“아무튼, 축하드려요.”
“축하요?”
어리둥절한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이 첫 전시 아니에요? 그럼 등단이랑 비슷하잖아요. 축하받을 일이죠.”
그러고 보니까 그 말도 맞다.
나는 호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피식 웃는데, 그제야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람, 아직 이름도 안 물어봤다.
내친김에 물어봤다.
“실례지만 성함이······.”
“아 저요?”
그녀는 웃더니 말했다.
“심하윤이요.”
“그럼 혹시 어떤 일 하시는지도 여쭤도 될까요?”
“아, 제 직업이요.”
그녀, 심하윤은 내 질문이 무엇이 그리 웃긴지 깔깔 웃고는 말했다.
“이 갤러리 주인이요.”
“······.”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
터벅. 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설마 밥까지 얻어먹을 줄이야.’
그 사람.
심하윤이라고 했던가.
자기도 개인적으로 내 작품, 그리고 내게 관심이 있다면서 연락처를 줬다.
그뿐이랴.
아예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겠다는 듯 밥까지 비싸게 사 먹였다.
나라는 작가에게서 가능성을 봤다나.
‘자기랑 일하자면서 밥 먹이는 거, 어째 익숙한데.’
정광채 원장이 그랬던가.
벌써 시간이 좀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는 거절했지만, 이번 제안은 마냥 거절하기에는 심히 매력적이었다.
‘전시를 조금 더 크게 해 볼 생각 있냐니.’
심하윤 대표가 내게 제안했다.
이번 작품의 반응이 좋았으니, 조금 더 규모를 키워서 내 작품을 걸어볼 생각이 없겠냐고 물었다.
물론 내 작품만을 단독으로 거는 건 아니겠지.
개인전은 보통 갤러리 전속 작가한테나 열어주는 것.
나는 아직 가능성 있는 신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학부생 신분에 갤러리 측으로부터 역제안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연우 선배도 큰 전시회 하나가 힘들어서 그렇게 난리였는데.’
그 선배만큼 실력 있는 사람이 그랬다.
그런데, 난 고작 나흘 만에 만든 작품으로 이런 기회를 주겠단다.
운이 좋다 못해 날로 먹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드는 이유는 뭘까.
‘그러고 보니까······.’
문득 심하윤 대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작가님들은 다 똑같이 말해요. 자기가 작가 될 줄은 몰랐다고.]내 심정을 심히 복잡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작가라. 지금까지 디자이너 외길 인생만 걸어왔는데 갑자기 갤러리에서 전시라니.’
아무리 좋은 기회라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내 목표는 줄곧 디자이너였는데, 작가와 디자이너는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달랐다.
‘고객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디자이너,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작가라고 했지.’
예전 어딘가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할까.
“······ 아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다.
‘내일 정상희 교수님 뵐 때 상의를 드려봐야겠네.’
약은 약사에게.
진로 상담은 교수에게.
오후에 푹 잔 탓인지 뜬눈으로 하루가 지나갔다.
*
그렇게 다음날.
보고 겸 상담을 위해 정상희 교수님의 사무실에 방문해,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왜 일을 그쪽 맘대로 넘깁니까?”
문 안쪽에서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키스 해링
“제 자리 아니었습니까. 그게 왜 남한테 돌아가는 겁니까.”
누군가가 정상희 교수의 사무실에서 항의를 토해내고 있었다.
뭔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한 상황.
‘불 속에 뛰어들기는 좀 그런데.’
그래서.
안 들어갔다.
이럴 때는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는 게 정답이다.
그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곧 정상희 교수 특유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혼자서 정한 게 아니라 갤러리 대표님께서 부탁하셨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제 상의도 없이.”
“작가님께서 연락을 안 받으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작업하느라 바쁘면 그럴 수도······.”
상대가 뭐라 항변하려는 찰나였다. 정상희 교수는 단칼에 끊으며 말했다.
“그건 그쪽 사정입니다.”
“······ 같은 작가라면 알지 않습니까. 작업하다가 보면 가끔 슬럼프가 올 수도 있고, 그럼.”
“네. 슬럼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그렇다고 다른 사람까지 전시를 못 하게 할 건 없지 않을까요?”
“······.”
“오히려 제가 여쭙고 싶네요. 이렇게 다짜고짜 사무실로 찾아오는 거. 굉장히 경우 없는 행동 아닌가요? 적어도 연락은 하고 찾아오시는 게 맞지 않나요?”
전혀 안 밀린다.
분명 상대 목소리가 더 요란한데, 정상희 교수가 훨씬 무겁다.
바둑으로 치면 이창호.
‘교수님 화이팅.’
그렇게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접전이 이어지기를 잠시.
쿵. 쿵.
발걸음 소리가 입구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이내 문이 거세게 열렸다.
덜컹.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른 남짓한 나이에,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
그는 날 보고 흠칫 놀란 듯하더니, 이내 미간을 찡그리고는 복도 저 멀리 사라졌다.
‘누구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데, 이번에는 문에서 정상희 교수가 걸어 나왔다.
그녀도 나를 보고는 움찔 놀라더니 말했다.
“······ 들어오세요.”
“네.”
*
사무실에 들어오기는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 찜찜했다.
‘나는 상담을 받으러 온 건데.’
마음의 짐을 덜려고 온 건데, 짐이 하나 더 늘었다.
이런 상황, 내 취향은 아니다.
목이 타 종이컵을 입에 기울이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서부터 들으셨죠?”
정상희 교수가 대뜸 물었다.
“······ 자리를 뺏겼다는 부분만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정상희 교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 전시회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며칠 전 동우 선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글쎄다. 나도 주워들은 거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나. 경력은 화려한데 사람이 좀 괴팍하다고 하대.”
“작품은 안 나왔어요?”
“어쩌면 작품 준비하다가 뭐가 안 돼서 잠적 탄 걸 수도 있지. 그런 경우 많잖아.”
–
설마 그 사람 아닐까.
나는 입을 열었다.
“혹시 그 뺏긴 자리라는 게, 전시전에서 제가 가져간 자리를 말하는 건가요?”
“예.”
정상희 교수는 부정하지 않고 말했다.
“전시를 일주일도 안 남기고 연락이 두절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타를 구했습니다. 그게 학생이었고요. 그것 때문에 제게 항의하러 방문한 게 아닌가 싶네요.”
“아까 그 사람, 어떤 사람인가요?”
“송태엽이라는 작가입니다.”
송태엽.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정상희 교수는 그 이름만 떠올려도 진절머리가 나는지 머리를 흔들더니 말했다.
“실력은 나름대로 있는 사람인데, 기복을 심하게 타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펑크를 몇 번 내고는 신용이 떨어졌죠.”
신용 없는 예술가.
어떻게 보면 한심하게만 보일 사람이지만, 내 귀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하자가 있는데도 데려다가 쓴다는 건, 그만큼 실력은 있다는 건가.’
전시를 노리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도 굳이 이 사람을 쓴다는 건, 어쨌든 실력은 있다는 말이었다.
“학생 잘못이 아니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님과 상의를 마친 일이기도 하고, 학생이 아니더라도 누가 되었든 자리를 메꾸기는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잘못이 아니라면 됐다.
어차피 나는 이 업계 생태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아님 말고.
그보다, 난 오늘 다른 질문을 하러 찾아온 참이었다.
“교수님. 저 혹시, 작품을 전시할 기회가 생겼다면 하는 게 맞을까요?”
“어떤 전시인가에 따라서 다를 것 같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로브170 심하윤 대표님한테 제안을 받았어요.”
“네?”
정상희 교수가 놀라서 되묻는데, 나는 대강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저한테 한 번 본격적으로 전시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 어쩌다가 그런.”
나는 전시장 사무실에서부터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정을 전부 들은 정상희 교수는, 그녀답지 않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운이 좋았군요.”
그녀로서도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을 못 하는 모양.
실제로 그 말이 맞았다.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요?”
“그로브170은 좋은 곳입니다.”
내 질문에 정상희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학생이 장래에 이쪽으로 활동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지금부터 경력을 쌓아 두면 최소한 손해를 볼 일은 없지 않을까요?”
“제가 다른 쪽을 지망하고 있다면요?”
“달리 생각하는 일이 있나요?”
“디자이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정상희 교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남들이 안 해본 일을 하나라도 해 봤다는 건 학생만의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될 겁니다. 실제로 해외에는 예술을 병행하는 디자이너가 여럿 있기도 합니다.”
그녀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이어 내게 내밀었다.
“읽어 볼래요?”
표지를 보니, 저자에 키스 해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함께 팝 아트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천재.’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 사락.
책 안에는 키스 해링 특유의 위트가 담긴 그림이 가득했다.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이 있는 현대 미술과는 달리,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그림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랑과 평화를 울부짖는 화풍은, 어딘가 엉성한 것이 낙서처럼도 느껴졌다.
아니, 낙서가 맞았다.
그게 키스 해링의 그림이었다.
‘재밌다.’
보기만 해도 흥겹다.
어느새 푹 빠져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정상희 교수가 입을 열었다.
“키스 해링이 원래 전공했던 게 뭔지 아나요?”
“음······.”
나는 고민해 보고는 말했다.
“순수 미술 계열 아닐까요? 아무래도 작가주의가 강하니까.”
“아닙니다.”
정상희 교수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키스 해링은 뉴욕 시각예술 학교 출신으로서, 철저하게 상업적인 예술을 전공했습니다.”
“······!”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키스 해링은 전공과는 달리, 이내 공공장소에서 돈이 안 되는 낙서를 시작했습니다.”
“그라피티 말씀이신가요?”
“예. 주로 길바닥이나 기둥에 자기 그림을 그렸습니다. 처음에만 해도 낙서는 말 그대로 낙서 취급이었지만, 키스 해링이 낙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지요.”
정상희 교수가 피식 웃었다.
나로서도 몇 번 본적 없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유명해지더니 나중에는 전시를 열지를 않나, 큰 명성을 얻고는 광고 포스터를 제작하게 됐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티셔츠를 비롯한 상품까지 대거 판매하기까지 이어졌지요.”
참 두서없는 인생이었다.
문득,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하려는 말을 알 것만 같았다.
‘어디로 가든 길은 이어진다는 말이지.’
키스 해링의 생애를 전공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계획성 있게 대학에 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밀하게 사업을 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생각을 표출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욕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끝에 성공이 있었다.
“1학년 때는 뭘 하든 폭넓게 경험하는 게 좋습니다. 전 대학교도 가능하면 6년 정도 다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다른 교수님이라면 몰라도, 정상희 교수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6년은 좀 너무하네요.”
“그런가요?”
내 말에 정상희 교수가 두 번째로 웃고는 말했다.
“제가 대학을 6년 다녔습니다.”
“······.”
치사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다니.
이것만큼은 뭐라고 대답을 못 하고 가만히 있는데, 정상희 교수가 말을 이었다.
“기회는 뭐가 됐든 있을 때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무명으로 미술을 해 봤던 사람이라서 하는 말인데, 기회라는 게 정작 필요할 때는 없어질 수 있더랍니다.”
그녀는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은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도 미술을 못 잊어 마흔 넘기고 다시 붓을 잡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어 같네요.”
“그렇게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정상희 교수는 입이 험한 사람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만큼은 진짜였다.
그 방식이 조금 호불호가 갈릴 뿐이지.
‘아니, 좀 심하게 갈리지.’
어쨌거나 지금의 나한테는 마음에 드는 조언이었다.
“감사합니다. 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