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4)
두 번 사는 미대생 24화(24/93)
*
며칠이 지나고 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나는 그로브 170에 방문했다.
“오실 줄 알았어요.”
심하윤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맞이하며 말했다.
“저희도 작가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쁘지만, 작가님에게도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하셔서 아예 이 길로 정착하신 분들도 많답니다.”
그녀가 계속 싱글벙글 웃었다.
그렇게까지 기쁜가.
나는 헛기침하고는 물었다.
“제가 어떤 전시를 하게 될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상의를 드리려고 오늘 미팅을 요청했는데요. 당장은 일정이 이렇게 있어요.”
그녀가 갤러리의 전시 일정을 보여주었다.
[빛의 발견] [검은색으로 말하다] [인간을 이루는 70%, 물(水)] [엄준영 개인전: Poem] [꿈] [전쟁과 평화]······
···
앞으로 두 달 뒤까지 차곡차곡 들어찬 일정들.
심하윤 대표는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단체전이나 기획전 중에서 맘에 드는 걸 고르시면 돼요.”
여기서 단체전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여는 전시, 기획전은 갤러리 차원에서 개최하는 전시를 의미했다.
난 그것들을 확인하다가 말했다.
“보니까 대부분 참가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제가 중간에 합류하는 방식이 될까요?”
“네.”
심하윤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고민해 보고는 물었다.
“그럼 원래 전시를 계획했던 분들이 불편하시지 않을까요?”
그렇다.
나는 이미 지난 전시전에서 작게나마 트러블을 겪었다.
아무리 내 잘못은 아니었다고 하나, 이번에는 문제의 불씨를 피하고 싶었다.
“음,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으셔요.”
심하윤 대표가 말했다.
“저쪽에도 동의를 구할 거거든요. 물론 저희 측에서도 무작정 강요하는 건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메리트를 제시할 거예요. 대관료를 깎아 준다거나요.”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크게 꺼릴 건 없겠지.
‘뭐가 좋을까.’
다시 일정표로 시선을 돌렸다.
뭘 봐도 그럴듯하다.
재밌어 보인다.
그래도, 기왕이면 내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전시전으로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
‘학기 중에는 과제랑 병행해야 하니까 너무 시간을 잡아먹는 건 안 돼.’
나도 학생이다.
딱 봐도 시간 좀 걸리겠다 싶은 것들은 주저 없이 쳐냈다.
다음은 장르로 걸렀다.
‘흥미가 없는 장르에서 좋은 작품을 만들기는 어려울 거야.’
흥미 순으로 몇 개를 걸러냈다.
이후에도 몇몇 장르를 걸러냈고, 그 마지막으로 셋이 남았다.
이 셋이라면 할만할 것 같았다.
제목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제가 두루뭉술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듯했다.
“안목이 좋으시네요. 전부 매력적인 전시들이에요.”
심하윤 대표는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쪽과는 제가 따로 협상을 진행할 테니, 작가님께서는 느긋하게 기다려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뭘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심하윤 대표는 밝게 웃더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저희 갤러리는 언제나 실력 있는 신인 작가님들을 발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저희 그로브 170과 재하 작가님이 오랜 인연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듣는 사람이 상쾌할 정도로 깔끔한 화법.
말투에서 사람 좋음이 묻어난다.
‘왠지 자주 만날 것 같네.’
그렇게,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식사라도 할까 하는 참이었다.
덜컹.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님. 실례합니다.”
지저분한 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인 남자.
그런데,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아.
기억났다.
“······!”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그가 날 보고 눈가를 꿈틀거렸다.
< 나도 개인전 해 보고 싶다(여기서부터 유료입니다) >
갑작스럽게 사무실로 들어온 남자, 송태엽이 나를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와. 자주 보네.’
우리가 서로를 소 닭 쳐다보듯 하고 있는데, 심하윤 대표가 입을 열었다.
“작가님, 지금은 다른 작가님과 상담 중입니다. 다음에 다시 와 주세요.”
“······.”
송태엽은 눈길을 돌려 심하윤 대표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언제까지 미루실 겁니까?”
“지금 상황으로는 어렵다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나요?”
“계속 같은 말씀만 하시니까 제가 이렇게까지 찾아온 거 아닙니까.”
뭐가 뭔지는 몰라도, 구체적인 대답을 주기 전까지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눈치.
심하윤 대표는 날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손님과 이야기를 마치는 대로 확답을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약속하신 겁니다.”
“네.”
송태엽은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사무실 문을 나설 때까지 나를 곁눈질로 눈에 담으며.
쿵.
문이 닫힌 뒤, 심하윤 대표는 눈에 보일 정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부른 게 아닌데.”
“아니에요.”
분위기가 식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까 그 사람, 원래 제 자리에 전시할 예정이었던 사람 맞나요?”
“······ 어떻게 아셨죠?”
“예전에 정상희 교수님 사무실에서 한 번 스치듯 봤어요.”
“저한테 말도 없이 그쪽에 찾아갔었다니.”
심하윤 대표는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태엽 작가님이라고, 저희 갤러리의 전속 작가님이셔요.”
“전속이요?”
“저희 갤러리에 작품을 독점 공급하는 대신, 작품 활동 지원과 주기적인 전시를 약속한 그런 관계예요.”
심하윤 대표가 골치 아프단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전속 작가라.
대강의 사정을 들으니까 두 사람의 관계를 알 것도 같았다.
“전속을 맺긴 맺었는데, 정작 작품 활동은 안 되는 그런 상황이군요.”
심하윤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즘 슬럼프가 심하셔서 완성작을 못 내시다 보니······ 그렇다고 개인전 외의 행사에 참여하려 하지도 않으려고 하셔요.”
“자존심 때문인가요?”
“맞아요. 개인전을 안 열어주는 게 자길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음.”
나는 골똘히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그냥 개인전을 열어주면 되지 않나요?”
그렇다.
개인전을 안 열어주는 게 불만으로 보이는데, 그냥 열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전속인데.
하지만, 심하윤 대표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게 꼭 그렇지가 않아요.”
“따로 사정이 있나 보네요?”
“미완성작을 내놓는 건 작가로서 제 수명을 깎아 먹는 행위예요. 몸값이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타협은 습관이 되거든요. 게다가, 예전에 일정을 얼마 안 남긴 상태에서 작품 수를 못 채웠던 적이 있었어요.”
대충 정상희 교수에게 들었던 말 그대로였다.
불성실하고 다루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안 쳐내는가.
나는 내친김에 추가로 물었다.
“그런데도 계약을 유지한다는 건, 어쨌든 실력은 있단 거겠지요?”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가장 먼저······.”
심하윤 대표는 뭐라 설명하려다가, 문득 이야기를 너무 풀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멈췄다.
“제가 작가님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는 건가요?”
“말하는 사람 있으면 들어주는 사람도 있어야죠.”
“······.”
그녀는 내 대답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대충 보니까 저도 엮인 일이라서 그래요. 자주 볼 사이 같은데 이 정도는 말씀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 하아. 알았어요.”
심하윤 대표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이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송태엽 작가님은 흥행이 보장된 작가예요.”
“실력은 확실하다는 거네요.”
“네. 기복이 심해서 작품이 널뛰기하는 게 문제지, 일단 내놓으면 언제가 되었든 확실히 팔려요.”
실력을 불성실함으로 전부 깎아 먹는 작가라는 말이었다.
아니면 불성실함을 실력으로 커버하거나.
“요즘 들어서는 반년째 작품다운 작품을 못 내놓고 계시지만, 슬럼프만 빠져나오시면 보란 듯이 명작을 내놓으실 거예요.”
“가능성이 보여서 계약을 유지하시는 거군요.”
“그것도 있어요.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따로 있어요.”
잠시 뒤.
심하윤 대표가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갤러리는 어찌 되었든 작가와 공생하는 관계예요.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어떻게든 하게 만들어야지, 당장 문제가 있다고 무작정 쳐내기만 하는 건 정답이 아니에요.”
경영자로서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말.
나도 모르게 작은 감탄이 나왔다.
정작 심하윤 대표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상 작가들 사이에서의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지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저런 피곤한 일을 감수하는 것도 갤러리의 일이라는 말.
어떻게 보면 연예인 매니지먼트와도 같았다.
‘그럼 송태엽 그 작가는 왕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슬럼프를 겪고 있는 인기 싱어송라이터라고 봐도 되는 건가.’
그럼 심하윤 대표를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미완성 곡을 억지로 신곡이라고 냈다가는 역효과만 생길 수도 있고, 기량이 떨어진 아티스트를 데리고 단독 콘서트를 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려운 길을 가시네.’
서로 좋게 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심하윤 대표가 말했다.
“거기에, 태엽 작가님은 재하 작가님한테도 안 좋은 감정이 있을 거예요.”
“네? 저한테요? 왜요?”
의아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심하윤 대표가 설명을 이었다.
“지난 전시에서 작가님이 자기 자리를 가져간 데 앙금을 품고 있거든요. 자기를 팽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며.”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좀 피해망상 아닌가요? 그분이 먼저 마감을 못 지켜서 그랬던 거잖아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데, 예술가들 생각은 잘 모르겠네요.”
심하윤 대표가 벌써 다섯 번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일이니까 작가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온전히 혼자 안고 가려는 눈치.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이거 잘하면······.’
나한테도 이득이 될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지 않을까.
몇몇 방안이 떠올랐다.
이 업계 분위기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안은 해 보자.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대표님 말씀 듣다가 생각난 건데요. 그 작가님한테 어떻게든 작품을 만들게 만들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 네? 어떤 말씀이신가요?”
심하윤 대표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데,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그 작가님 목적은 개인전을 여는 거죠?”
“그렇죠.”
“대표님이 개인전을 안 열어주시는 건, 함부로 열었다가 작가 수명을 깎는 결과가 될까 걱정하시는 거고요.”
“네.”
“그렇다면요.”
나는 심하윤 대표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개인전을 미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요?”
“미끼요?”
심하윤 대표의 눈빛에 호기심이 담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개인전을 열어주는 대신, 조건을 거는 거죠.”
“그 조건이 뭔가요?”
“예를 들자면.”
이 부분이 중요하다.
나는 턱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누군가와 함께 공동 전시를 해서 상대보다 더 좋은 반응을 받아야 한다거나, 이런 게 있지 않을까요.”
“그 누군가가 누구······?”
그녀의 목소리에 작은 흥미가 담겼다.
그리고.
나는 흠흠 헛기침을 뱉었다.
“······ 설마 작가님이요?”
심하윤 대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핏 듣기에는 내 이득 챙겨달라는 말로 들릴 테니까.
그래.
그렇게 들리겠지.
그런데, 그거 맞다.
‘어디 엑스트라로 끼어가는 것보다는, 더블 주인공 캐스팅이 낫지.’
나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작가님도 저 같은 신인한테 밀리기 싫으면 조금이라도 열심히 하려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그 작가님이 기한 못 맞추실 게 걱정이라고 하셨죠? 2인 공동전이라면 작품 수 부담도 줄어들 거예요.”
뭐든 끼워 맞추기 나름이라고, 말을 하다 보니 뭐가 이어지기는 계속 이어졌다.
물론, 이쪽 업계를 잘 모르는 학생 신분이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대표님이 크게 손해를 보실 일은 없어요. 성공하면 좋고, 아니면 아닌 거고. 밑져야 본전 아닐까요?”
열띤 목소리로 설득하기를 한참.
심하윤 대표가 멍한 표정으로 있는데, 나는 이 상황을 돌이켜 보니 왠지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어떻게 그러겠어요. 어른들끼리 이러는 것도 조금 유치하고.”
이게 중고등학생 학원 숙제도 아니고, 남 이기면 뭘 해 준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작품으로 이기고 지고를 따지는 것도 웃기다.
뭘 기준으로 평가하려고.
내가 홀렸었나, 이 바닥을 잘 몰라서 이렇게 말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잠시만요 작가님.”
심하윤 대표는 내 말에서 뭔가를 찾은 듯했다.
“혹시 지금 하신 말 진지하게 생각 있으세요?”
“예?”
내가 살짝 놀라서 되묻는데,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2인 공동 기획전이요. 송태엽 작가님과 열어 보실 생각이 있으신지 여쭸어요.”
그녀의 표정에 어떤 의욕이 일렁였다.
내 얼굴에 웃음이 올라왔다.
“저야 환영이죠.”
*
심하윤 대표가 통화를 걸고 몇 분 뒤,
송태엽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대표님. 저 왔습······.”
그 찰나였다.
그는 여전히 사무실 한편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손님이 아직 계시는데요?”
“네.”
심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에게 같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계시라고 했습니다.”
“꼭 같이 들어야 하는 이야긴가요?”
“네.”
“······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송태엽이 소파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심하윤 대표는 심호흡을 내쉬기를 잠시, 담백하게 말했다.
“개인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바로 그겁니다.”
송태엽이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꿍했던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목소리.
“이제야 제 마음을 알아주셨군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정은······.”
“잠시만요.”
그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서 뭐라 말하는데, 심하윤 대표는 그 말을 끊더니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예? 조건이요?”
“네.”
심하윤 대표는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여기 계신 작가님과 둘이서 공동 기획전을 여세요.”
“······ 하지만 조금 전에 개인전이라고.”
송태엽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뭐라 말하려는데, 심하윤 대표는 차례를 넘기지 않겠다는 듯 이어 말했다.
“공동 기획전에서 이 작가님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시거든, 즉시 태엽 작가님의 개인전을 잡아 드릴게요.”
움찔.
뭐라 항의를 뱉으려던 송태엽의 입이 개인전이라는 단어 하나에 틀어막혔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성적이라면 대체 어떤 말씀이시죠?”
“관객들에게 앙케이트 조사라던지, 아니면 구매 오퍼라던지. 방법은 많아요.”
얼핏 봐서는 송태엽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는 이미 이 바닥에서 뼈가 굵었지만, 나는 고작 학부생 신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아직 심리적인 한계선이 남아 있었다.
“제가 뭐하러 그래야만 합니까?”
송태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데, 심하윤 대표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대로는 계약을 유지하기 힘들 테니까요.”
그 단어가 나온 순간이었다.
송태엽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더니, 그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계약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이번에는 심하윤 대표도 물러서지 않으며 말했다.
“상습적인 지각에 펑크. 다른 작가님에게 실례하기까지. 이만하면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나요?”
“슬럼프였습니다.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까 나온 슬럼프.”
“그게 너무 길었어요. 벌써 반년째 작품이라고 할 게 안 나오고 있지 않나요?”
“그건······ 노력은 하고 있는데.”
“다 미완성작이죠.”
“······.”
“계속 이러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송태엽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밀리기만 했다.
심하윤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제안하는 겁니다. 그나마 대안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제가 거기서 이기면 개인전이고, 지면 뭡니까. 계약 해지?”
“아뇨. 이쪽 작가님께서 개인전을 가지실 겁니다.”
그 말에 송태엽이 슬쩍 놀라면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 인간 이재하.
당당하다.
“거절하시겠다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앞으로도 개인전을 열어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송태엽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손익 계산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에 함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러기를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당신, 정상희 교수 제자 맞죠?”
“네.”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듭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담담히 말했다.
“저도 개인전 한번 해 보고 싶어서요.”
“······.”
송태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를 잠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거참. 저도 퇴물 다 됐네요. 이 나이 먹고 학부생이랑······.”
“말조심하세요. 이분도 작가님이셔요.”
심하윤 대표가 지적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시거나, 하지 않으시거나.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해주세요.”
송태엽이 입술을 은근히 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합니다. 해요. 제가 요즘 슬럼프가 있었기로서니 설마 신인만 못할 것 같습니까?”
“······.”
“그럼 일정 잡히는 대로 알려 주십쇼.”
송태엽은 뭐라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사무실 문을 나섰다.
심하윤 대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않게 신경전을 벌이느라 심력을 많이 소모한 모양.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제가 잘한 게 맞을까요?”
그녀는 한바탕 말을 쏟아내고 흥분이 식었는지 회의감이 섞인 기색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심하윤 대표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엄한 말은 잘 못 하는 성격으로 보였다.
“쓴 말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죠.”
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더더욱요. 괜히 나쁜 사람으로 보이기 딱 좋잖아요. 감정 상하면 내 탓이고요. 그래도,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싫은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해요.”
“······.”
내 말에 심하윤 대표는 우두커니 있더니, 문득 물었다.
“작가님, 몇 살이시죠?”
“스물이요.”
심하윤 대표가 피식 웃었다.
“작가님이랑 같이 일하면 편할 것 같네요.”
< 나도 개인전 해 보고 싶다(여기서부터 유료입니다) > 끝
ⓒ 이한이™
< 수업 시간에 딴짓하네 >
담판을 지은 뒤, 심하윤 대표는 내게 이번 전시의 개요를 알려주었다.
“이번 전시는 삼십 평대 규모의 별관에서 진행할까 해요.”
“본관은 안 쓰는 건가요?”
더 넓고 좋은 시설의 본관을 안 쓰는 게 의아해서 묻자, 심하윤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요. 다른 일정이 있기도 하고, 태엽 작가님이 작품을 못 만드실 수도 있고요.”
“그럼 몇 작품 정도 준비하면 될까요?”
“인당 다섯 점은 채우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다섯 점.
적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적은 수는 아니었다.
삼십 평대 면적의 별관이라도 작품의 크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부족할 수도 있는 노릇.
“한 번 둘러보실래요?”
“저야 좋죠.”
그녀의 말을 따라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로브 170 본관에서 나와서 10초도 안 되는 거리, 그곳에 건물 한 채가 더 있었다.
작다기보다는 아담하다.
그녀와 함께 걸으며 내부를 둘러보는데, 대충 구조를 알 것 같았다.
‘거실 딸린 투룸 같네.’
다만, 벽만 있고 문은 없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었다.
“이쪽 방은 그 작가분이, 하나는 제가 쓰는 형태가 되겠네요.”
“네. 맞아요.”
심하윤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리고 작품 주제에 관해서인데요. 이건 작가님들 자율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음, 그래도 기획전인데 너무 동떨어지면 통일성이 없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가끔 일부러 그런 식으로 여는 기획전도 있거든요. 다양성을 위한다는 취지로요.”
“말은 붙이기 나름이라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심하윤 대표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실내를 둘러보기를 잠시, 그녀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확실하게 말해 둘게요. 저는 재하 작가님과 태엽 작가님 중 어느 분이 개인전을 열게 되든 큰 상관은 없어요.”
“네. 그럴 것 같았어요.”
애초에 송태엽 작가가 작품을 안 만드니, 한 번 동기를 부여해 보자는 생각으로 꺼낸 제안이었다.
만에 하나 내가 이기면 이득이고, 지더라도 딱히 손해는 아니다.
‘아니, 이 기획전이 열린 시점에서 이득이라고 봐야겠지.’
애당초 나는 대인원이 한꺼번에 참가하는 기획전에 끼어갈 예정이었다.
그걸 둘로 줄인 것만 해도 얼마나 이득인가.
소설 속 조연에서 주연이 된 셈.
그런데, 문득 한 가지 호기심이 들었다.
“태엽 작가님은 평소에 어떤 작품을 그리시나요?”
“으음, 그건 말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잠깐 따라오시겠어요?”
심하윤 대표는 나를 데리고 별관 내 미술품 창고로 향했다.
그 안에는 아직 팔리지 않은 미술품이 수십 점도 넘게 쌓여 있었다.
“엄청 많네요.”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작품 하나를 감상하고 있으려니, 심하윤 대표가 전등을 켜며 말했다.
“전속 작가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갤러리의 컬렉션으로 사들이거든요. 그렇게 사서 팔릴 때까지는 전부 여기에 쌓아뒀다가, 팔리면 그때 수수료를 나누는 거예요.”
“수수료는 어느 정도죠?”
“통상 50대50이지만······ 음, 재하 작가님은 처음이시고 하니 10만 받을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전시 대관료가 공짜에, 수수료는 고작 10.
조건이 후하다.
그냥 퍼주는 건 아닐 테고, 아마 날 이쪽에 꼬시려는 계산이 있지 않을까.
‘뭔가 대접받는 기분이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심하윤 대표는 창고 안쪽에서 그림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성인임에도 양손으로 간신히 들 만큼 커다란 그림이었다.
“이게 태엽 작가님 작품이에요. 지금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것 중에는 유일한 완성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림을 본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숨을 멈췄다.
‘잘 그리기는 하네.’
풍경화였다.
그런데, 그냥 풍경화가 아니었다.
탁 트인 우유니 소금 사막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유화.
광활한 느낌이 그림 바깥으로도 전해져 가슴이 다 시원해질 지경이었다.
‘그래, 이 정도 그리면 팔릴만 하네. 아니, 팔려야지.’
인성을 떠나 작품 그 자체에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서 심하윤 대표가 말했다.
“태엽 작가님이 슬럼프만 없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 왜 슬럼프에 빠지셨을까요?”
“작품 욕심이 과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욕심이요?”
“자기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내 혐오감까지 느껴버리신 거죠.”
알 것도 같았다.
작가들은 이게 무서웠다.
디자이너들은 기본적으로 그림 퀄리티와 타협하는 데 능숙했다.
‘정해진 기한 안에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킬 정도면 충분하지.’
그래서 일정 선에 도달하거든, 거기서 성장을 멈추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작가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선이라고 할 게 없었다.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승부만이 있을 뿐.
그 말은, 평생을 슬럼프와 싸워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태엽 작가님의 작품은 일단 걸린다 하면 수백에서 천을 호가해요. 물론 작품의 크기 자체에서 나오는 가격이기도 하죠.”
이 부분은 대충 알아보고 왔는데, 작가들 사이에서는 호당(캔버스의 크기당) 가격제가 있다고 했다.
중견 작가가 호당 이십에서 삼십만 원 선이라고 했지.
아마 태엽 작가가 그 정도 아닐까.
만만하지 않다.
“제 작품 가격은 어떻게 배정될까요?”
“보통은 작가님의 커리어나 작품 특성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데··· 작가님은 신인이시니 백 아래로 책정될 거예요. 괜찮으실까요?”
생각보다는 적은 액수.
앞서서 태엽 작가의 몸값을 후하게 말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살짝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물론, 나는 별 반감이랄 게 없었다.
“괜찮네요.”
이득이다.
그것도 매우 큰 이득이다.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워하고 있는데 심하윤 대표가 거듭 말했다.
“실망스러우실 수도 있어요.”
아니, 실망스럽지 않다.
만족스럽다.
“전 좋은데요.”
“지금 당장은 숫자가 작아 보이더라도, 작가님의 커리어가 쌓이면 조금씩 가격이 올라갈 거예요.”
안 올라간 가격으로도 만족스럽다.
“저희가 안 챙겨드리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녀가 몇 번이고 미안해하는데, 내가 사양해야 할 지경이었다.
난 정말로 만족스러웠다.
이 시기 대학생이 돈을 버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오히려 후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작품 하나에 50 잡고, 한 점만 팔려도 수수료 떼면 45니까······ 최저시급 200시간분이네.’
좋다.
처음부터 돈 벌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기대 이상의 소득이다.
‘요즘 돈 벌 일이 많구나.’
최근 들어 헤븐즈 도어에서 로열티를 처음으로 받았는데 이게 또 달달했다.
오픈 매출이 꽤 좋아 벌써 다음 분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던데.
그럼 또 속도가 붙겠지.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데, 이 정도면 바위 정도는 되겠다.’
갈수록 금전 상황이 나아진다.
야식 하나에 허덕이던 1학기에 비하면 천국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하물며 이것도 다 기초공사 아닌가.
점점 쌓다 보면 나중에는 건물을 세울 날도 올 것 같다.
“진짜 괜찮으신 거 맞죠?”
“괜찮다고 해도요.”
“그래도 나중에 뒷이야기가 나오면 서로 불편하잖아요.”
“괜찮아요.”
“그럼 이렇게 진행해도 되는 거죠?”
“네.”
심하윤 대표의 걱정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
전시 일정은 한 달 뒤로 잡혔다.
그리고, 나는 의외로 시간이 남아돌았다.
‘앞으로 한 작품만 더 준비하면 되겠네.’
이번에 전시할 작품 중 네 점은 이미 골랐다.
입학 초 과제로 썼던 테이프 아트가 한 점.
헤븐즈 도어에 뒀다가 최근 들어 회수한 레트로 텔레비전이 한 점.
그리고 이번 [어린 왕자 다시 보기] 전시에 출품했던 두 점이었다.
‘작품의 수준 자체는 충분해.’
어차피 그림 실력이라는 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성장 속도가 느려진다.
내 실력은 옛적에 그 지점을 넘었다.
퀄리티에 목내느니 차라리 발상이 중요했다.
‘작품 평가는 앙케이트에 맡긴다고 했지.’
이 작품을 구매할 용의가 있는가, 어느 작품이 가장 흥미로웠는가 등등.
여러 문항을 준비해 두고, 최종적으로 컬렉터들의 평가를 종합해 승부를 가리겠다나.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하지만, 예술이 원래 주관적인 것이니 큰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객관적인 평가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는 게 옳으리라.
심하윤 대표의 안목을 믿는다.
‘그럼, 마지막 한 점으로는 뭐가 좋을까.’
아직 생각해 둔 게 없다.
다만, 기왕이면 송태엽 작가의 카운터로 쓰고 싶었다.
‘그 풍경화, 이미 사이즈에서 압도적이었지.’
이 부분이 제일 신경 쓰였다.
예술품이란 것이 원래 크기가 클수록 값어치를 높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었다.
제작비도 그렇지만, 실물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작가.
김환기.
인터넷으로 볼 때는 그의 작품이 왜 비싼가 이해가 안 되지만, 실물을 보면 그 크기에서 압도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다고 내가 크기로 맞승부를 노리긴 어렵겠지.’
크기가 큰 작품에는 한 가지 장점이자 단점이 있었다.
작가의 실력이 숨김없이 드러난다는 것.
양면의 칼날이었다.
이 부분을 커버하면서 전체적인 임팩트에서 안 밀릴 방법이 없을까.
‘크기에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밀리지 만이라도 않아야 하는데.’
이 고민만 벌써 일주일째였다.
난 일주일간 열심히도 뇌를 쥐어 짜냈다.
하지만, 원래 영감이라는 게 오라고 한다고 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지금은 수업 중이다.
당장 고민은 미뤄두고 눈앞의 수업에 집중하려는데, 옆자리 학생 하나가 거슬렸다.
규태였다.
규태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닥였다.
“박규태.”
“왜.”
“수업 시간에 뭐 하냐.”
“책 읽는다.”
“······.”
그래.
책을 읽는 건 좋은데, 그 책이 좀 독특했다.
동화책.
규태는 지금 수업 중에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왜 뜬금없이 뒷자리에 앉나 했더니, 설마 동화책을 펼칠 줄이야.’
그것도 그냥 동화책이 아니었다.
로알드 달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것도 아니고, 정말 어린 아이들 읽으라고 나온 동화책이었다.
규태는 그걸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평소에도 정신 연령이 오락가락하는 건 알았다만, 결국에는 이렇게 자랐구나.’
나는 측은지심을 담아 물었다.
“동화책은 갑자기 왜?”
“듣는 교양 수업 중에 동화책 읽고 독후감 써 오기가 있거든.”
“특이한 수업이네.”
“이거 발표도 한다. 동화라고 우습게 보고 대충 해 가면 공개처형 당해. 교수님이 정상희 교수님 그 이상이야.”
규태가 덜덜 떨었다.
이미 앞서 다른 사람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모양.
나는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 규태가 읽는 동화책을 엿봤다.
그런데, 아는 내용이었다.
“이거 그거 아니야?”
“뭐?”
“왜, 스승이 세 제자에게 돈을 얼마씩 주고, 그걸로 방을 가득 채운 사람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로 했다는 동화.”
그렇다.
그 동화였다.
“그래? 맥락은 비슷한데 좀 다른데.”
“어떤 점에서?”
“여기서는 선생님과 세 제자가 아니라 아버지랑 세 아들로 나와.”
구전동화라서 조금씩은 다른가 보다.
아무튼, 이 동화에는 여러 가지 레파토리가 있었지만, 그 결말만큼은 언제나 같았다.
‘첫째는 짚을 사 왔고, 둘째는 솜을 사 왔지.’
그리고 셋째가 뭘 했더라.
셋째가 우승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잠깐 줘봐.”
“왜?”
“결말 좀 보게.”
나는 규태가 읽는 동화책을 받아서는 페이지를 펄럭펄럭 넘겼다.
그리고.
그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착한 막내는 거지에게 돈을 적선하고, 남은 돈으로 양초를 사 왔어요.형들은 그런 막내를 비웃었답니다.
“낄낄. 바보 같은 막내.”
“차라리 그 돈 나 주지.”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 막내가 뭘 하려는지 가만히 지켜만 봤답니다.
“환상의 무언가, 제가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막내는 성냥을 꺼내더니, 양초에 불을 붙였어요.
착.
그 순간이었어요.
어두웠던 방이 한순간에 밝아졌답니다.]
이 페이지를 읽은 순간이었다.
“아.”
머릿속으로 뭔가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걸로 하면 되겠다.”
“뭘 해?”
“작품 하나 준비하는데 막히는 부분이 있었거든. 지금 막 풀린 것 같아.”
한 일주일째 막혀 있었는데,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가방을 뒤적여 드로잉북을 꺼냈다.
그리고 쓱싹쓱싹 스케치를 그리는데, 규태가 중얼거렸다.
“수업 시간에 딴짓하네.”
“······.”
< 수업 시간에 딴짓하네 > 끝
ⓒ 이한이™
< 빛과 그림자 >
설치미술.
말 그대로 정해진 장소에 물건을 설치하는 미술.
이 장르에는 한 가지 특성이 있었다.
‘크기가 커질수록 제작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
가장 가까운 예시로 조각을 보자.
정말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조각물이, 실제 설치비로는 수천에서 억을 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태반은 재료비였다.
부피는 곧 질량이고, 질량은 곧 가격이기 때문.
재료만 돈이 들까.
제작 기간부터가 부담스러운데, 보관부터 운송까지 모든 게 돈이었다.
진입 장벽이 더럽게 높다.
그런데, 과연 작가들이 바보라서 이 모든 걸 감수해가며 설치미술을 하는 걸까.
‘그럴 리가.’
설치미술은 수많은 단점을 가진 대신, 압도적인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림의 한계인 평면을 넘어 입체로 느낌을 전달한다는 것.
설치미술은 이거 하나로 존재의의가 흘러넘쳤다.
‘아무리 평면 그림을 큼지막하게 그린다 한들 설치미술의 3차원적인 존재감을 이기기는 어렵지.’
그리고.
내가 지금 하려는 설치미술은, 제작비는 거의 안 드는 주제에 스케일만 큰 물건이었다.
아참.
제작 기간도 얼마 안 걸린다.
“전구랑 종이만으로 뭘 만들겠다고?”
작업실까지 날 따라온 규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탁, 드르륵.
나는 작업실의 불을 끄고 커튼을 닫으며 말했다.
“혹시 그림자놀이라고 알아?”
“알긴 알지. 그건 갑자기 왜?”
“해 봤어?”
“하기야 해 봤지. 어렸을 때.”
“그거랑 비슷해.”
나는 작업실 선반에 올라가 있던 조명 하나를 집어왔다.
규태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 그거 1학기 때 썼던 거 아냐?”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규태의 말대로, 이 조명은 1학기 테이프 아트 과제 때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딸깍.
전원을 넣자, 곧 달빛을 닮은 푸른 빛이 작업실을 채웠다.
나는 그 조명 앞에 손을 가져다 대며 어떤 모양을 만든 뒤 말했다.
“이거 알지?”
“······ 늑대?”
“맞아. 늑대야.”
그렇다.
벽에 비치는 푸른 빛 위에 검은 늑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보자, 또 뭐가 있더라.”
나는 다시 한번 손의 모양을 바꾸며 말했다.
“그럼 이건?”
“음. 나비.”
“이거는?”
“백조.”
“잘 맞추네. 이것도 한번 맞추나 보자.”
“주전자.”
몇 가지를 더 보여줬고, 규태는 그럴 때마다 속속들이 맞췄다.
하다 보니까 재밌어서 계속했다.
“이건?”
“카우보이. 야,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하게?”
“지금까지.”
규태가 살짝 질려 할 무렵, 나는 가방에서 종이 무더기를 꺼냈다.
수업 시간 동안 스케치한 뒤 가위로 오린 물건들이었다.
대충 봐서는 초등학생 낙서처럼 느껴질 물건들.
“이게 진짜야.”
나는 씨익 웃으며 그 종이뭉치를 조명 빛 위에 살포시 얹었다.
그리고.
“······ 미친.”
규태가 놀란 눈을 떴다.
종이뭉치가 조명의 빛을 가린 결과, 작업실 한 편에 복합적인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름답다.
작업실 벽을 통째로 도화지로 쓰는 만큼, 어지간한 예술품과는 비교조차 안 될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직 이 수준인데도 볼 만하다.’
이것도 일단은 설치미술인데, 제작비는 고작 사천 원에 불과했다.
이거 만들겠다고 작살 낸 공책이 이천 원에, 학교 문구점에서 급하게 산 가위가 이천 원.
조명은 재활용이니까 공짜.
‘이 면적을 송태엽 작가처럼 유화로 구현하려 했더라면, 그림 한 점 그리는 데만 해도 백만 원 가까이 깨졌겠지.’
반면, 내 작품은 사천 원이다.
단순 비교로 백분의 일도 안 하는 가격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가성비.
하지만, 존재감이라면 오히려 이쪽이 더 컸다.
물론 이 방식에도 단점은 있었다.
섬세한 묘사가 불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관객들도 몇십 초쯤 보다 가겠지. 그 안에 임팩트 한 방을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당장 규태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마어마하게 놀랐다.
송태엽의 그림을 봤더라도 이만큼 놀랐을까.
[더럽게 잘 그리네.]이 정도가 현실적인 반응 아니었을까.
규태가 중얼거렸다.
“빛 한 번 더럽게 잘 다루네. 넌 지난번에 그 테이프 아트도 그렇고, 이런 데 재능이 있나 보다.”
“그런가?”
회귀가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운이 좋네.”
“와. 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