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6)
두 번 사는 미대생 26화(26/93)
*
일주일이 지났다.
전시는 성공리에 종료되었고, 심하윤 대표와 나, 송태엽은 그로브 170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결과부터 말할게요.”
심하윤 대표가 입을 열었다.
“매출을 이야기하자면, 태엽 작가님이 월등히 높게 나왔어요.”
완전히 말렸다.
그것도 처절하리만치.
‘괜히 중견 작가가 아니네.’
나는 다섯 작품을 내놓아 매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나온 총 매출이 450만 원가량.
수수료를 제하고 400만 원이었다.
반면, 송태엽의 작품은 단 한 점이 팔려나갔다.
단 한 점.
우유니 사막을 그린 그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작품 하나가 걸출했다.
매출 900만 원.
내 총매출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역시 한 방이 묵직하다.’
심하윤 대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엽 작가의 작품이 당장은 안 팔리더라도, 팔리기는 팔릴 거라고.
그 말이 맞았다.
하긴, 그 정도가 되니까 문제점을 감수하면서 데리고 있는 거겠지.
‘능력은 인정해야겠다. 대단해.’
다만, 정작 송태엽 본인은 탐탁지 못한 눈치였다.
팔짱을 낀 채로 계속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썩 불편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심하윤 대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이번 전시에서는 재하 작가님이 더 나은 결과를 보여주셨다고 생각해요.”
매출과는 정반대의 발언이었다.
“······ 후우.”
송태엽이 한숨을 내쉬는데, 심하윤 대표가 계속해서 말했다.
“재하 작가님에게 작품의 수가 많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관객들의 문의도 월등히 많았고요.”
이게 맹점이었다.
송태엽이 이긴 부분은 엄연히 따져서 매출액 외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커리어를 고려하거든, 앞섰다고 자랑하기에도 민망한 수준.
“그러니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개인전의 기회는 재하 작가님에게 드리겠습니다.”
“······.”
송태엽이 말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실망스러워서일까.
그도 신인이었던 적이 있을 테니 결과에 반박하지 못 하는 걸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심하윤 대표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태엽 작가님에게도 가까운 시일 내로 개인전을 잡아드리려고 합니다.”
아,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보여주셨던 것보다 많이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앞으로 조금만 더 다듬으면 충분하리라고 믿어요.”
양쪽에 당근을 던지면서 끝내려는 건가 싶은 그 순간이었다.
“됐습니다.”
송태엽이 입을 열었다.
“신인 작가한테 밀렸는데 개평을 챙겨달라는 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좋게좋게 가고 있었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노렸다면 천부적인 재능이다.
벽시계 째깍거리는 소리만 선명한 찰나, 송태엽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나만 말해도 되겠습니까?”
“······ 하세요.”
“그 쓰레기더미, 절 우습게 보는 건 줄 알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마는.
첫날에 화난 눈치였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조명을 안 켜 두면 그냥 쓰레기더미에 불과하긴 했지.
송태엽이 말을 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결과가 나왔으니 받아들이는 게 맞겠죠. 이번에는 제가 못났습니다.”
“······.”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송태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전 갑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사무실 문을 열더니 대뜸 나가버렸다.
덜컹.
뜬금없다.
자기 볼일 다 봤다는 건가.
‘사춘기 중학생도 이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예술인들은 다 이런가.
슬쩍 옆을 돌아보니, 심하윤 대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렇지.
저게 평균이라면 한국 예술계는 끝장이다.
나는 그녀에게 슬쩍 물었다.
“원래 저러셔요?”
“······ 평소에도 불같은 성격이시긴 한데, 이번 전시에서 충격을 많이 받긴 하셨나 봐요.”
이렇게까지는 아니라는 건, 평소에도 비슷한 행동을 하긴 한다는 뜻.
한결같다.
초지일관으로 저러니까 별로 거슬리지도 않는다.
‘뭐,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거지.’
내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사이, 그녀가 말했다.
“어찌 됐든,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작가님에게 개인전을 열어 드릴게요.”
그래.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별관인가요? 아니면 본관인가요?”
“어느 쪽이든 작가님께서 바라는 쪽으로 맞춰 드릴게요.”
그럼 아무래도 본관이 더 낫다.
하지만, 당장 전시를 열기에는 몇 가지 난관이 남아 있었다.
“본관은 전시 일정이 꽉 차 있었죠?”
“다음 달까지는 그래요.”
당장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해서 열 수는 없다는 것.
또 본관의 면적을 고려하거든, 작품만 해도 최소 스무 점은 준비해야 할 듯했다.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당장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대충 알아봤는데, 이만한 전시장이면 일주일 대관료만 수백 단위라고 했다.
‘자주 올 기회는 아니지.’
어지간한 졸업전시전보다도 훨씬 호화롭다.
말이 수백이지, 평범한 예술인이라면 일 년을 준비해도 한 번 얻기 힘든 기회다.
급하게 달려들기보다는, 천천히 준비해서 최상의 작품들을 완성했을 때 도전하는 게 낫지 않을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천천히 몸값을 올려두면 다음에는 수익 면에서도 더 기대할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심하윤 대표에게 말했다.
“혹시 미뤄도 될까요?”
“미뤄요?”
“시간을 좀 두고 지켜보려고요. 지금은 학기 중이라서 다른 곳에 정신을 돌릴 여유가 없네요.”
“아, 그건 괜찮아요.”
심하윤 대표가 피식 웃었다.
“일 년 전부터 계획하고 천천히 맞춰가는 경우도 꽤 있거든요. 작가님께서 편하실 때 말씀 주세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대충 결론이 나왔다.
이렇게 이번 전시전도 일단락이 난 듯했다.
겨우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일 년은 지난 것처럼 다사다난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돌이켜보려니 헛웃음까지 나오는데, 심하윤 대표가 아쉬움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님, 앞으로도 작품 활동은 꾸준히 하실 건가요?”
“음······ 지금은 학기 중이니까 학교에 집중해야 하지 싶어요. 어떤 작품을 할지는 그다음부터 천천히 고민해 보려고요.”
“그럼 당분간은 뵙기 어렵겠네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된다.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려는데, 심하윤 대표는 순간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해서 여쭙는 건데요. 작가님, 혹시 전속 한 번 안 해 보실래요?”
“안······.”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입을 멈췄다.
“안?”
“아닙니다, 잠시만요.”
평소였다면 단번에 거절했겠다만, 이번에는 조금 고민됐다.
작품이 한순간에 팔리며 거금을 만진 것도 있고, 심하윤 대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느꼈다.
또 전속 계약이라는 게 매력적이기도 했다.
‘생활비 지원에 작품 지원, 주기적인 전시회 지원까지 있었지.’
후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송태엽 작가였다.
‘그만큼 그리는 사람도 슬럼프 한 번 오면 저 신세가 됐지.’
나라고 안 그럴까.
어쩌면 내가 이번 전시를 맘 편히 즐길 수 있었던 건, 내가 전업 작가가 아니라서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었다.
‘어떤 직업이든 내부자가 되어 봐야 아는 고충이 있다.’
섣불리 선택했다가는 독이 든 성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물었다.
“저기, 한 가지만 여쭐게요.”
“말씀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제가 여기 전속이 된다고 치면요. 그럼 제가 전시하고 싶은 작품은 그대로 전시할 수 있는 걸까요?”
“그건······ 전시 작품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작가님의 의향을 최대한 존중하겠지만, 갤러리와 한 번은 조율을 거쳐야 해요.”
요컨대, 내가 작품을 걸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걸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송태엽 작가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갤러리에 목숨줄을 잡힐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단순히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그때 가서 내가 심하윤 대표와 사이가 틀어진다면 어떨까.
이번에 죽이 잘 맞았다고 해도 한 달 사이에 불과하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면 피곤한 일은 얼마든지 생기겠지.’
송태엽이라고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어지간한 가정을 할 때 최악을 전부 송태엽으로 두면 맞아떨어지네.’
그 작가가 이렇게 나한테 도움이 된다.
고맙다.
나는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계약 기간은 몇 년 단위인가요?”
“보통은 2년에서 5년 사이로 계약해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 기간이면 내 몸값은 어디까지 오를까.
‘솔직히 5년 뒤면 헤븐즈 도어에서 벌어들이는 로열티만 해도 어지간한 직장인 수준은 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오경진 회장의 수완을 생각해 보거든, 헤븐즈 도어가 전국적인 프랜차이즈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 결론이 나왔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는 아직 어딘가에 묶일 필요가 없다.
“죄송합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 알았어요.”
심하윤 대표는 못내 아쉽다는 눈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제든 생각이 나시거든 다시 말씀 주세요. 굳이 전속이 아니더라도 작가님의 전시 문의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편안한 화법이었다.
권유는 하되, 강요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 덕에 나도 기분 좋게 말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
심하윤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작가님, 혹시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이요.”
“지금 드시러 갈래요? 제가 대접할게요.”
“사 주시면 저야 좋죠.”
공짜 밥은 거절 안 한다.
그렇게, 짧으면서도 길었던 갤러리 전시가 완전한 끝을 맞이했다.
‘전시도 하고 볼 일이었어. 재밌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전시회를 계기로 예상외의 연락을 받게 됐다.
*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벽화 외주요?”
“예. 최근에 학과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종이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어린 왕자 전시회에 참여했죠?”
“네. 정상희 교수님께서 권유하셔서······.”
“그때 학생 작품을 인상 깊게 봤던 모양입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휘청했다.
그걸 왜 학과 사무실로 연락을 했나 싶은데, 그 이유도 곧 알 수 있었다.
“그쪽 말로는, 연락처를 남겼는데 답장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
그렇네.
내가 그걸 까먹었네.
첫 전시가 끝나고 심하윤 대표에게 건네받았던 연락처들, 어쩌다 보니까 말 그대로 받기만 해 버렸다.
아무튼, 벽화 외주 자체는 매력적이었다.
‘맘에 든다.’
키스 해링은 벽화를 그리다가 전시회로 이어졌지.
나는 반대다.
전시회를 여니까 벽화로 이어졌다.
구미가 당긴다.
하다 보면 어떻게든 나한테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건 그렇고.
‘혼자서 하려면 좀 힘들겠지?’
< 외주를 하자 > 끝
ⓒ 이한이™
< 기껏 해 봐야 스무 살 남짓 >
카페 헤븐즈 도어.
내 이야기를 들은 한설 선배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웬 벽화?”
극히 뜬금없다는 눈치.
나는 마시던 커피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외주가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어디서? 너 원래 벽화도 그렸었어?”
“아뇨. 그건 아닌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나는 한설 선배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저 어린 왕자 그렸던 거 있잖아요. 여기 카페에서 스케치했던 거.”
“어. 탕후루.”
“네. 탕후루. 그거 맛있었는데. 아무튼, 그때 그렸던 게 전시회에서 나름대로 반응이 좋았어요.”
“잠시만. 내가 한 번 맞춰볼게.”
한설 선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말했다.
“설마 거기에 작품 출품했던 게 연결고리가 돼서, 어쩌다 보니까 벽화 외주 의뢰를 받았다?”
“바로 그겁니다.”
정확하다.
한설 선배가 반쯤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일감이 그런 식으로도 들어오나. 넌 진짜 일복 하나는 터진 것 같다.”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내 말에 한설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들은 살다 봐도 안 그래.”
동감한다.
내가 생각해도 일반적인 미대생의 생활상이랑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
“아무튼, 그래서 엊그제 가게 둘러볼 겸 미팅하고 왔거든요.”
“응.”
“보니까 술집이더라고요. 치킨이랑 맥주 위주로 이것저것 파는 호프집.”
홍대 인근에서 새로 개업을 준비하고 있는 술집이었는데, 규모가 꽤 컸다.
꼬마 빌딩의 1층을 통째로 쓰는 규모.
“아직 오픈은 안 했는데, 저희한테 인테리어 막바지 작업으로 요청했어요.”
내 설명을 들은 한설 선배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기하네. 어쩌다가 그런 곳에서 벽화 외주를 찾게 됐대?”
“가격 대비 무난해서 아닐까요?”
“가격?”
“자세히는 그쪽에서 안 알려줘서 모르겠는데, 벽화가 그나마 돈이 덜 들잖아요.”
보통 식당에서 인테리어 비용으로만 수천 깨지는 건 일도 아닌데, 벽화는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만만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름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네. 그런데 그 식당이 왜?”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누님. 이거, 돈 됩니다.”
“그야 돈이야 되겠지. 외주인데.”
“그게.”
나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설 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걸까, 한설 선배가 침묵했다.
“같이 하자고?”
“네.”
“잠깐만.”
그녀가 팔짱을 끼고 끙끙거리더니 말했다.
“얼마 받기로 했는데?”
“그 부분 말인데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테이블 위 종이에다가 슬쩍 액수를 적었다.
그 숫자를 본 한설 선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뭐라고? 오배······.”
“쉿!”
나는 다급히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그녀의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작게 속닥였다.
“듣는 사람이 많아요.”
“······.”
내 말에 한설 선배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지금은 중간고사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기.
헤븐즈 도어는 사람이 많다 못해 미어터지고 있었다.
1학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만석을 기본으로 깔고 갈 정도.
‘카페에서 공부하는 맛을 알아버렸으니까 도서관으로는 못 돌아가겠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돈 이야기를 해서 좋을 일이 없다.
어떻게든 와전될 수 있기 때문.
그게 나 같은 대학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과에서 무슨 이야기가 퍼질 줄 알고. 지금도 교수님의 숨겨진 아들이니 뭐니 뜬소문이 많은데.’
각설하고, 나는 이번 외주 시공비로 오백만 원을 제안받았다.
벽화 외주치고는 상당히 큰 축에 드는 가격이었다.
“액수가 솔깃하기는 하네.”
“대신 해야 할 일이 많기는 해요. 가게 전체에 벽화를 그리기로 했거든요.”
보통 벽화는 면적 단위로 단가가 매겨지는데, 저쪽에서 요구한 건 건물 내벽을 따라 전체적으로 벽화를 그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백만 원.
‘혼자서 다 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하겠지.’
남들과 나눠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눠서 하는 게 낫다.
아니, 나눠서 해야 한다.
이게 다 내 밑천이 될 테니.
‘갑자기 동업하자고 하는 것보다는, 천천히 물들이는 게 낫다.’
한설 선배는 가능하다면 꼭 영입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최근 반년 동안 옆에서 체감한바, 그녀의 손재주는 한예원에서도 손에 꼽는 수준으로 탁월했다.
서지원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
괜히 조소과에서 손꼽는 인재가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답지 않게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기본적인 건 제가 할 줄 알아요.”
전생에 많이 해 봤다.
학비를 벌겠다고 학원 강사 일을 병행했을 때, 그래도 돈이 모자라서 외주를 뛸 때도 많았다.
그게 벽화였다.
그나마도 대학생이다 보니 단가가 푼돈이라 양으로 때워야 했다.
“재료부터 전체적인 도안까지는 제가 맡을 테니까, 누나는 페인트칠이랑 밑 작업을 도와주시면 돼요.”
내 말을 들은 한설 선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재하야.”
“예.”
“내가 가끔 느끼는 건데, 너는 신입생이면서 무슨 이 바닥에서 10년은 구른 것 같다.”
맞다.
예리하시네.
한설 선배는 나랑 알고 지낸 지 벌써 반년이나 지났으니 슬슬 적응할 법할 텐데, 아직도 이런 리액션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짜릿해. 늘 새로워. 2회차가 최고야.’
나는 속마음을 감추며 담담히 말했다.
“친구의 친구가 이런 일을 많이 해 봤거든요.”
여기서 친구의 친구란 나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설 선배는 조금 고민되는 투로 중얼거렸다.
“잠깐. 그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
한 번쯤 망설일 거라고는 짐작했다.
집안이 잘살다 보니, 돈 문제에 크게 구애되지 않는 게 그녀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나는 떡밥을 추가로 투척했다.
“지훈이 형이랑 규태는 이미 오기로 했어요.”
매일 보는 지인들이 이미 결정을 굳혔다는 것.
내 말을 들은 한설 선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나한테는 이제야 말했으면서 걔들은 이미 설득까지 끝냈다고?”
물론이다.
그 둘은 구체적인 외주비를 언급하자마자 한 방에 넘어왔다.
손쉽다.
반면, 한설 선배는 돈에 큰 관심이 없으니 순번을 뒤로 미룬 것.
‘원래 사람 끌어들일 때는 순서가 중요한 법이지.’
규태는 나를 따라오고, 지훈 선배는 돈을 따라온다.
그리고 한설 선배는 지훈 선배랑 오래된 사이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잖아요.”
“······.”
내 말에 한설 선배가 멍하니 있는데,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할 거죠?”
“어, 응······ 그래. 하자.”
*
홍대 인근의 술집. 인사운드.
그곳의 주방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중 예수 머리와 문신을 한 남자가 말했다.
“호민아. 이거 괜찮을지 모르겠다.”
“뭐가?”
호민이라고 불린 뚱뚱한 체형의 남자가 되묻자, 예수 머리 남자가 말했다.
“지난번에 네가 데리고 온 사람 있잖아. 벽화 작업 맡기겠다고.”
“아.”
호민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한예원 학생?”
“어. 그 사람. 이름이 이재하였나.”
“그 사람이 갑자기 왜?”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사람한테 맡겨도 괜찮을지 확신이 안 서네.”
푸념하던 예수 머리 남자, 황만기는 영 골치 아픈 눈치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전문 업자도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고 도망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 식당 내부는 술집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딱 기본적인 도배만 깔았다.
그들이 생각한 술집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거든, 이는 영 맞지 않았다.
“누가 이런 술집을 분위기 좋다고 찾아오겠냐.”
술집이라기보다는 일반 식당을 보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라고 원해서 이렇게 한 게 아니었다.
‘인테리어 업자가 잠적할 줄이야.’
업자가 중도금을 먹고 잠적해버렸다.
아닌 중에 다행으로, 이 점포는 그들이 양도받기 전부터 원래 식당이었던 덕에 기본기는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던 술집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다른 인테리어 업체를 구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돈이 없었다.
그나마 없는 돈을 쥐어짜 임기응변으로 선택한 게 벽화였다.
‘기껏 건실하게 살려 했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만기와 호민은 본디 음악을 했었다.
그러다가 워낙 뜨기가 힘들다 보니, 정리하고 돈을 모아 식당을 꾸린 것.
그런데, 그 식당마저 망하게 생겼다.
“나는 요즘 자려고 누워도 잠이 안 온다. 속이 쓰려서.”
만기가 하소연을 뱉었다.
호민은 그런 만기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낄낄 웃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마시라니까.”
“야, 너는 지금 내가―.”
“만기야.”
호민은 만기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괜찮아. 일단 시켜 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 그래도 돈이 돈인데.”
“맞아. 돈이야. 그러니까 쓸 때 써야지. 지금 아꼈다가 앞으로 얼마를 손해 볼지 모르잖아.”
만기는 썩 애매한 눈치였다.
호민은 그를 설득하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회의적으로만 볼 건 없는 게, 그 사람 예전에 카페 인테리어도 해 본 적 있다더라. 내가 엊그제 들려서 보고 왔는데, 썩 나쁘지 않았어.”
“······ 그건 모르지.”
“뭐가?”
“쥐꼬리만큼 참여해놓고 자기가 다한 것처럼 말한 걸지도 모른단 말이야.”
기껏 해 봐야 스무 살 남짓한 학생이다.
자기가 가게를 디자인했다고 주장해 봐야, 딱히 신뢰가 가진 않았다.
“우리도 무대 한 번 같이 섰다고 자기가 음악 가르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자식들 많았잖아.”
만기는 이렇게 짜증 내는 자기 자신이 한심한지,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식당 운영을 너한테 맡긴다고 했으니까 막지는 않겠는데,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고.”
“그래. 내가 네 마음을 모르겠냐.”
모를 수가 없다.
망하면 같이 망하는 거니까.
“아, 술 땅긴다.”
“마시고 죽자.”
그렇게 끝도 없는 비관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사장니-임! 계세요?!”
주방 바깥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용히 해라. 박규태.”
언짢아 보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
홍대의 술집, 인사운드에 도착했다.
식당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장님과 마주 앉았는데, 평소 그 시끌벅적했던 규태가 말없이 조용했다.
“······.”
주방을 맡은 사장, 황만기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험악했기 때문.
원래부터 매처럼 생긴 사람이 말없이 째려보고 있으니, 규태는 살짝 겁먹기까지 한 눈치였다.
한편,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다시 봐도 노다지네.’
실내 구조를 대충 보고 감이 왔다.
기본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몇 부분만 고치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별로여도 헤븐즈 도어보다는 낫다!’
이것만 해도 얼마인가.
김호민 사장은 내게 어린 왕자 스타일의 그림만 그려달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더 해야지.’
인간 이재하.
언제나 그 이상을 하는 사람이다.
“일단 제가 이것저것 시안을 좀 준비해 왔는데요.”
나는 가방에서 두툼한 드로잉북 세 권을 꺼내면서 말했다.
“같이 보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 기껏 해 봐야 스무 살 남짓 > 끝
ⓒ 이한이™
< 수성 페인트 >
책상 위로 쌓인 드로잉북이 세 권.
그 두께는 얼핏 보기에도 손가락 세 마디는 되었다.
“저······ 이건······.”
김호민 사장이 살짝 놀라서 묻는데, 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평소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둔 디자인 시안입니다.”
그래.
이건 디자인 시안이다.
그것도 모든 페이지가 완성도 높은 디자인으로 꽉 찬 시안.
‘이거 만드느라 고생 좀 했다.’
두 번째 삶을 얻고 어느덧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름대로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 기억력이 이렇게 안 좋았나?’
전생의 디자인들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확실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내 머릿속 기억이 해변의 모래성처럼 점점 쓸려나가고 있었다.
안 될 일이다.
이건 내가 가진 재산이다.
그래서, 나는 드로잉북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뭐든 상관없다.
타이포그래피, 미니멀리즘, 스큐어모피즘, 인더스트리얼, 스마트폰 등 장르와 양식, 카테고리를 가리지 않고 머릿속의 디자인이란 디자인은 떠오르는 대로 전부 기록했다.
‘앞으로 몇 년은 넉넉할 만큼 살렸지.’
지금 가지고 온 세 권도 그중 일부였다.
“천천히 읽으면서 말씀 나누시죠.”
“아, 네! 네.”
김호민 사장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놀란 눈치를 감추지 못했다.
“이야, 다 괜찮네요. 되게 세련됐다. 만기야. 그렇지?”
“······ 그렇네.”
옆에서 무뚝뚝하게 있던 황만기 사장도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해 버렸군.’
은근한 쾌감이 뇌수를 적셨다.
대충 보아 하니까 우리를 못 믿던 눈치였는데, 그 이유야 뻔했다.
대학생이라고 그랬던 거겠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나라도 내 돈 쓰는데 상대방이 대학생이라면 못 믿음직했을 거야.’
결국, 실력으로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내 실력 행사는 이게 끝이 아니다.
“제 눈에는 다 좋아 보여서 고르기가 어렵네요. 실제로 작업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사장님이 우선 추려내시면 제가 골라드릴게요.”
“그럼······ 우선, 이거랑 이게 괜찮은 것 같습니다.”
김호민 사장이 몇몇 시안을 뽑아냈다.
처음 내게 요청했던 대로 흑백 실루엣 풍의 디자인과, 타이포그라피를 살린 디자인이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나는 그 시안을 바탕으로 가게 내부를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리기를 잠시.
샤프와 노트를 꺼내고는,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삭.
그렇게 불과 5분.
벽화가 반영된 실내 전경이 한순간에 완성되었다.
“이런 느낌이면 될까요?”
“······.”
김호민 사장은 말없이 안경을 벗더니 눈을 몇 차례 비볐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 와우.”
조금 전에도 놀랐지만, 이제는 반쯤 경악한 눈치.
넉넉한 반응이 맘에 들었다.
‘연습한 보람이 있네.’
전생에 처음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을 무렵이었다.
직장 사수가 시킨 연습이 있었다.
[눈 감고 그려.] [네?] [사물을 딱 10초만 관찰한 다음에, 눈 감고 그대로 따라 그려.]눈 감고 크로키하기.
찰나의 순간 머릿속으로 그림을 옮긴 뒤, 자기 자신이 프린터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종이 위에 옮겨 그리는 연습이었다.
‘처음에는 이걸 왜 시키나 했지.’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를 삼 개월.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뭔가 빨라졌다.’
아무런 밑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대강의 스케치를 뽑을 수 있게 됐다.
디자이너로서 어느 껍질을 부순 순간이었다.
‘이 연습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남들이야 몇 달 하고 마는 기초 연습이지만, 나는 이걸 십 년 넘게 꾸준히 했다.
그 결과물이 이거다.
다른 건 몰라도, 빠르게 그리는 거라면 어지간히 자신 있다.
“이 디자인으로 진행하면 될까요?”
“네, 네. 맘에 듭니다. 엄청 좋네요.”
“그럼······.”
나는 슬쩍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내친김에 아예 오늘 다 끝내버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