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8)
두 번 사는 미대생 28화(28/93)
*
우리는 홍대의 어느 댄스 학원으로 향했다.
쿵, 쿵.
수강생들이 한창 배경음악에 어우러져 춤에 열중하는 사이, 우리는 사무실에서 원장님과 미팅을 시작했다.
“창수가 그러더라. 너희들이 그렇게 일을 잘한다고.”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낀 원장이 의자에 앉아 물었다.
“내가 미술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 아는 그림 그리는 동생들한테 물어보면 다 못하겠다고 거절하더라. 좀 까다로울 것 같은데, 어때, 할 수 있겠어?”
무엇이 까다로운가 하면.
연습실 벽에 댄서의 연속적인 동작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마치 동작 뒤로 잔상이 남는 것처럼.
난이도가 상당하다 못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원래 그림은 사람 그리는 게 제일 어렵고, 그중에서도 움직이는 사람 그리는 게 최악이지.’
프로 애니메이터들도 어려워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렵다고 못 할 일이라는 건 아니었다.
“합니다. 그게 프로니까요.”
“자신감이 보기 좋네.”
원장은 아직은 못 믿겠는지 피식 웃었다.
잠시 뒤.
댄스 수업이 끝났다.
나는 실제 작업에 착수하기에 앞서, 지훈이 형에게 부탁했다.
“이쪽에 프로젝터랑 노트북 좀 설치해 주세요.”
“잠깐만.”
지훈이 형이 챙겨온 장비를 꺼냈다.
이 두 장비는 이종이 교수님에게 빌린 게 아니다.
우리 거다.
언제까지고 빌린 장비로만 작업할 수는 없으니, 사업 투자비로 치고 공금을 각출해서 마련했다.
탁.
노트북으로 댄스 영상을 띄우자, 프로젝터의 불빛을 타고 연습실 벽에 재생됐다.
‘비싼 값 하네.’
괜히 종사자들이 장비병에 걸리는 게 아니다.
나는 댄스 영상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중 한 장면을 골라내고는 말했다.
“형, 여기서부터 할게요.”
“대충 0.1초 단위로 정지시키면 되나?”
“네. 딱 적당하네요.”
나는 매 장면을 일시 정지하면서, 그 실루엣을 트레이싱하듯 빠르게 땄다.
한 장면을 따면 프로젝터를 아주 살짝 옆으로 이동시키고, 그쪽에 다시 윤곽을 따는 과정의 무한 반복.
이내 멋들어진 스케치가 벽에 나타났다.
누구나 어려워할 작업물이 한순간에 해결된 셈.
‘뭐든 작업하기 나름이지.’
이 프로젝터, 정말 잘 샀다.
나는 벽에 연필로 선을 마저 그으며 말했다.
“저 뒷부분 스케치 따는 동안, 가영이랑 규태, 누나는 앞부분 페인팅 좀 부탁해요.”
“이미 준비하고 있어.”
손발이 척척 맞는다.
한설 선배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정 페인트를 벽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이 기법은, 우리가 이미 수차례 써먹은 그 기법이었다.
메인 인물은 아예 검은색으로 실루엣 처리하고, 특징이 되는 부분만 흰색으로 강조하는 기법.
이번 벽화의 경우에는 댄서를 그렸다.
거기에 댄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몸 선을 흰색으로 살짝살짝 강조했다.
“가영아. 저기 옷 주름 좀 그려줘라.”
흑백 작업이니만큼 작업 속도는 빠르게 진척됐다.
전체적인 상이 드러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3시간.
분명 어려운 작업인데, 퀄리티가 좋고 또 빠르다.
“좋네.”
원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수가 괜히 너희들을 추천했던 게 아니었네.”
물론이다.
이렇게 일감이 생길 걸 고려해서 창수 사장님의 옷가게에도 최선을 다해 작업했다.
물론, 이 학원에도 그랬다.
그래야 여기 원장님도 우리를 다른 일감으로 이어줄 테니.
‘진짜 일감이 일감을 부르네.’
지난 한 달.
우리는 벌써 네 작업을 처리했다.
일주일에 한 작품 꼴로 완성한 셈.
그것조차도 학교 과제와 병행해야 해서 줄인 것이었다.
심지어, 앞으로 우리에게 일을 맡기고 싶다는 문의가 여럿 쌓여 있었다.
내가 무슨 홍보를 했다고 이렇게 됐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 끝에다가 로고 박을 건데 괜찮으세요?”
작품마다 로고를 박았다.
[JH]헤븐즈 도어 우드 테이블에 박았던 것과 같은 로고를 조금 개선했다.
그리고, 로고를 박는 조건으로 외주 비용을 조금 할인해 주었다.
외주비의 3%.
로고 자체가 괜찮게 뽑혀서 그런지, 사장님들도 그리 꺼리지 않는 눈치였다.
“더 눈에 띄는 곳에 박지?”
“그러면 작품을 해칠 것 같아요.”
“거기까지 신경 써 주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면 안 되잖아요.”
내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학원 원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뭐야, 요즘 그라피티 한답시고 여기저기 낙서하는 애들보다 너희들이 훨씬 낫다.”
“에이, 방향성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그 차이가 중요한 거야.”
맞는 말이긴 하다.
이 방향성은 우리가 선점했다.
아직은 벽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업체가 손에 꼽았다.
일부 미술 업체가 부분적으로 겸업하는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확실하다. 이거 우리가 열심히만 하면 독점할 수 있어.’
뿌듯하다.
그렇게 마지막 작업을 앞두고 한숨 돌릴 때쯤이었다.
덜컹.
한 남자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생님. 저 왔어요.”
“오.”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원장이 그를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송주 왔어? 왜 왔어?”
“연어는 강물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하잖아요.”
“물 썩는다. 썩 꺼져.”
“에이,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요.”
송주라.
얼핏 익숙한 이름에 누구인가 하는데, 꽤 잘생긴 상의 남자였다.
단순히 남자답게 잘생긴 걸 넘어, 선이 곱다고 해야 하나.
그래.
이건 마치.
‘송주 같이 생겼네.’
아.
기억났다.
‘그 송주였어?’
춤과 노래 양면으로 뛰어나, 훗날 방송 3사를 석권한 송주였다.
그가 여기에 왔다.
황당하다.
자세히 보니까 닮긴 했다.
카메라 마사지랑 분장이 안 들어가서 바로 구분이 안 됐던 모양.
원장님은 그런 송주의 등짝을 짝짝 치면서 말했다.
“너 임마. 연습 빼먹고 놀러 왔지? 내가 소속사에 연락 한 통만 하면 너는 바로 잡혀가는 거야.”
“사장님께서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거든요.”
“곧 데뷔한다더니 거짓말만 늘었어?”
“처세술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그렇게 왁자지껄 떠들기를 잠시.
송주는 우리가 만들어 둔 작업 환경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선생님. 지금 이거 학원 리모델링하는 거예요?”
“아니, 벽화만 그리려고.”
원장님은 자랑스럽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때, 예쁘지?”
“네.”
그 말에 송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확실히 없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 저 때는 동네 초등학생들 다니는 학원 같았는데.”
“요즘 학원은 그러면 수강생이 안 모인다. 깔쌈하게 갈 거야. 아참. 신기한 거 하나 알려줄까?”
“뭔데요?”
“이거 작업해 주신 분들 있잖아. 다 대학생들이야.”
“네?”
송주가 눈을 깜빡거리는데, 원장이 흐흐 웃으며 말했다.
“방학이라고 일하는 거야. 너 같은 놈팽이랑은 다르다.”
“······ 저 같은 백수랑은 다르네요.”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결론은, 우리 일 잘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원장님.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의심이 가득하시더니 확 바뀌셨네.’
칭찬이야 들으면 좋다.
싫을 이유가 없지.
다만, 코앞에서 저러고 계시니 듣는 사람이 다 민망하다.
할 거면 안 듣는 곳에서 하지.
물론 싫다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게 재밌기도 했다.
‘미래의 인기 가수의 잡담을 엿듣는 느낌이 참 묘하네.’
송주다.
그 송주.
미래의 팬들이라면 돈을 주고서라도 내 기억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한참 있는데, 송주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거 말씀드리려고 온 건데, 저 이번 곡 뮤비 만들어 주신대요.”
“뮤비? 어떤 곡?”
“지난번에 들려드린 곡이요. 졸업식.”
“······ 너희 사장님께서 작정하셨나 보다.”
원장님이 놀라서 중얼거리는데,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식이라면 송주 데뷔곡이잖아.’
그것도 제대로 된 히트곡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을 노래방으로 달려가게 만든 주범.
오죽하면 10년이 지나서도 노래방 순위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는데, 나도 노래방에서 종종 불렀다.
지금 이 둘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근데 이 곡 망할 것 같아요.”
안 망한다.
“왜?”
“노래가 너무 제 취향이에요.”
그게 국민의 취향이 된다.
“그럼 망하겠네. 돈 아까워서 어쩌냐.”
“제 돈도 아닌데요, 뭐. 사장님만 눈물 흘리시겠죠.”
사장님이 눈물을 흘리기는 흘리겠지.
기뻐서.
내가 아는 미래를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안 된다.
말해봐야 괜한 농담이나 아부로 들리겠지.
이게 미래를 아는 사람의 고충이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게 너무 많은 거.
‘뜨면 자랑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근데, 뮤비 찍는 데 문제가 좀 있어요.”
“무슨 문제?”
“저희 그 폐교사 하나 빌려서 찍기로 했거든요. 곡 이름이 졸업식이니까 졸업식 컨셉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 그게 왜?”
“그게요.”
송주가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트 맡아줄 사람들이 요즘 다 바쁜가 봐요. 일정 꽉 차 있다면서 기다리라고만 하는데, 언제 된다는 기약도 없어요. 벌써 두 달째 들숨 날숨만 반복하고 있다니까요.”
“그거, 너 보험으로 깐 거 아냐? 좋은 일감 있으면 그쪽 먼저 하고, 네 거는 정 할 일 없을 때 하려고.”
“그런 것 같아요.”
“쯔쯔. 상도덕도 없는 놈들일세.”
대충 정리하자면, 뮤비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는 말.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서 벌어진 일이었다.
‘신인이라고 뒤로 미룬 건가?’
아마 내 기억대로라면, 졸업식의 뮤비는 송주가 학교 안을 걸으며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새긴다는 내용이었다.
‘칠판에 그림 그려져 있고, 복도 여기저기에도 낙서가 가득하고 그랬지.’
거기까지 되새긴 순간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가만.
낙서라고 했나.
‘이거, 잘하면 우리가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 졸업식 > 끝
ⓒ 이한이™
< 사전답사 >
이번 방학을 시작했을 무렵, 내가 결심했던 게 하나 있었다.
‘이름값 한번 만들어 보자.’
예로부터 미술계에는 한 가지 정설이 있었다.
이름값만 있으면 안 팔릴 작품도 팔린다는 것.
‘그 말인즉슨, 이름값이 없으면 팔릴 작품도 안 팔릴 수 있다는 말이지.’
나는 팔릴 작품은 팔고 싶었다.
그래서 벽화를 선택했다.
인지도를 올리기에는 가장 빠른 수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타이밍이다.’
저기 앞에 송주가 내 교두보가 될 것.
행동한다면, 지금이다.
*
“저희 작업을 맡고 싶으시다고요?”
송주가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제안에 거부감을 느낀다기보다는, 뜬금없이 걸려온 말이 당황스러운 눈치.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 일은 우리가 한 단계, 아니 세 단계는 나아갈 기회다.
놓쳐서는 안 된다.
‘이거 하나만 뜨면 바로 주류 무대로 도약할 수 있다.’
나는 각오를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두 분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곧 촬영하실 뮤비에 아트를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 고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그게 그렇긴 한데······.”
송주는 주저하는 눈치였다.
껄끄럽겠지.
갑작스러운 건 둘째 치고, 우리가 아직 학생이니까.
하지만, 이미 몇 번이고 겪은 일이었다.
설득할 방법 따위는 진즉에 구상해 뒀다.
“학교에서 졸업식 컨셉으로 작품을 찍고 싶으시다고 하셨죠?”
“그건 그렇습니다만······.”
“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거나, 벽화로 추억의 흔적을 그리거나. 그런 작품을 생각하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빈 교실에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코러스에서는 운동장에 의자 하나를 두고 앉아서 노래를 불러도 좋을 것 같네요.”
“······!”
송주가 놀란 눈을 떴다.
그쪽에서 예상해 뒀던 컨셉을 내가 정확하게 맞춰서 아닐까.
물론, 이미 완성본을 본 적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클라이언트의 수요를 정확하게 아는 디자이너는 치트키지.’
사기 쳤다.
“예. 말씀이 정확하긴 합니다만, 이게 또 저 혼자서 결정할 일은 아니라서······.”
송주는 다시 한번 말을 돌리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반쯤 혹한 목소리였다.
나는 눈치가 없는 척 말을 이었다.
“비용과 작업 기간에 대해서는 최대한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바로 내일이라도 작업에 착수할 수 있습니다.”
“으음······.”
송주가 끙끙 앓았다.
작업 기간으로 꽉 막혀 있었는데, 이 부분을 앞당길 수도 있다니 솔깃하겠지.
“잠시만요.”
그는 고민하다가 벽으로 다가와서는, 우리가 작업해 둔 그림을 꼼꼼히 살폈다.
“완성하신 건가요?”
“아뇨. 아직 조금 더 남았습니다.”
전체 작업에서 대충 3분의 2 정도 끝났을까.
내일 다시 와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놔둔 상태였다.
송주는 턱을 긁적이며 곰곰이 고민하다가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지금 급하기는 합니다. 이미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 게 벌써 두 달이 넘었거든요. 다만, 아무래도 사장님에게 말씀을 드리려면 저희도 포트폴리오를 더 확인하고 싶네요. 혹시 다른 작업물은 없을까요? 가능하면 완성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좋다. 반쯤 먹혔다.
포트폴리오를 고려할 단계까지 왔다면, 통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있습니다.”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가 되물은 찰나.
나는 이렇게 물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네? 네.”
“그럼.”
나는 짐을 챙기며 말했다.
“잠깐만 따라오실래요?”
여기는 홍대.
걸어서 몇 분 거리 안이면 내 포트폴리오가 널려 있다.
말 그대로, 널려 있다.
*
김호민 사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다 여기 이 친구가 작업해 준 겁니다. 보기 좋죠?”
송주를 데리고 처음 방문한 곳은 술집 인사운드.
“······.”
“제가 다른 업자들도 여럿 만나 봤는데, 이 친구만 한 사람이 잘 없습니다.”
가게 전체를 통틀어 내가 그린 벽화들이 가득했다.
처음 그린 타이포 그림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악기를 형상화한 벽화.
또 수저나 유사 화분까지.
무엇 하나 가게의 분위기와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떨어졌다.
‘90년대 록 음악을 컨셉으로 작업했지.’
내가 생각해도 참 괜찮게 뽑혔다.
송주가 말없이 벽화를 훑고 있는데, 김호민 사장이 그 옆에 서서 설명을 이었다.
마치 전시장 큐레이터처럼.
“처음 미팅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시안을 무려 세 권이나 보여주고는 거기서 고르라고 하는 게 아닙니까. 일단 고르면 최대한 비슷하게 재조율을 해 준다나. 그래서 반신반의하면서도 맡기니까 글쎄, 이렇게 잘 나왔습니다.”
사장님은 반쯤 들뜬 목소리였다.
자영업자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매출이 좀 달달하셨군.’
인사운드는 개업하고 불과 두 달이 안 되어 저녁 만석을 깔고 가는 맛집이 되었다.
분위기 좋은 술집으로 입소문이 빠르게 퍼진 덕분이었는데, 여기에는 내 벽화의 영향이 상당했다.
‘그렇다 쳐도 이렇게까지 잘 풀린 건, 요리 자체가 맛있는 덕분이겠지만.’
황만기 사장의 요리 솜씨는 진짜배기였다.
괜히 주방을 담당한 게 아니다.
여간한 셰프보다도 나은데, 어쩌면 음악보다는 요리에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친구가 작업도 빠르거든요. 여기 가게 다 작업하는데 사흘 나흘 걸렸나?”
김호민 사장은 송주의 옆에서 계속해서 내 칭찬을 늘어놓기를 한참.
어느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눈을 찡긋했다.
“······.”
아 그래.
그런 거였구나.
나한테 빚을 달아뒀다고 생색내시는 게 아닐까.
‘다음에 벽화 또 부탁하시면 조금 할인이나 해 드려야겠다.’
김호민 사장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고, 송주는 도망치듯 가게에서 나왔다.
그쯤.
나는 그에게 다시 말했다.
“다른 가게도 가 보실래요? 이 근방에 또 있는데.”
“또 있어요?”
송주가 되묻는데,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이 바로 옆에 있어요.”
인사이드 다음으로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임창수 사장의 옷가게였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자 가게 간판이 담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에 있는 옷가게]대충 지은 것 같으면서도 인상에 박히는 좋은 상호다.
그리고.
“여기 이 벽화 보이죠?”
이번에는 임창수 사장님이 기다렸다는 듯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 이쪽 사장님께서 해 주신 겁니다. 다 핸드메이드. 한국말로 수제.”
내가 이 가게에 작업한 벽화는 총 네 점.
큼지막하게 그리기보다는 포인트 위주로 작업했다.
작지만 확실하게 개성을 줄 수 있는 벽화들로.
“······.”
송주는 그걸 보면서 또 말없이 가만히 있는데, 임창수 사장이 그의 옆에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일 잘해요. 사람 좋고, 인성 괜찮고. 됨됨이 바르고. 배려심 있고. 이 바닥에 이만한 사람 잘 없지.”
벽화 이야기는 안 하고 내 인간성 이야기만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래도 되나.
뭔가 쎄하다.
임창수 사장에게서 김호민 사장의 모습이 엿보이는 이유는 뭘까.
‘아니, 뒤에서 둘이 입을 맞춘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임창수 사장과 내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씨익 웃었다.
확실해졌다.
이건 백 퍼센트다.
나는 송주의 옆으로 가서 말했다.
“송주 씨. 여기 보셨으면 다음 가게로 가실래요?”
“아, 예? 더 있어요?”
송주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묻는데,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한참 남았어요.”
시작이었다.
나는 이후로도 그를 데리고 가게 세 곳을 더 돌았다.
“여기 이거 저 학생들이 그려 준 거예요.”
소극장 바깥의 벽화.
높이 3m를 넘는 흑백 초상화를 그렸다.
찰리 채플린이나 제임스 딘 같은 배우 계의 스타들.
여기서 우리가 퀄리티를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를 실험했다.
“······ 와.”
송주가 놀란 목소리로 감탄을 뱉었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다.
‘역시, 일반인 대상으로는 실사 풍 작업물이 가장 잘 먹힌다니까.’
발상의 힘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기술의 힘을 과시하는 것.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실내 스케이트 보드장으로 갔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인가요?”
“보드 타는 곳이요.”
여기저기 우리 외에도 다른 아티스트들이 그린 벽화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곳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독 우리 작업물이 눈에 띄었다.
이집트 벽화 스타일로 작업했다.
‘너무 튀는 작품만 있을 때는, 오히려 클래식이 먹히는 법이지.’
그다음으로는 게임 판매 가게에 들렸다.
“사장님 오래간만이네요.”
“오, 재하 왔어?”
나도 이미 몇 번 들린 가게였다.
이곳 벽에는 게임 그래픽을 표현하듯 도트 느낌으로 작업했다.
그 덕에 묘한 감성이 넘쳤다.
미래의 내 기준으로는 레트로에 불과하지만, 아직 이 시대에는 현역이다.
‘역시 도트가 좋다니까.’
여기까지 왔을 때, 송주는 이미 생각을 굳힌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자의적인 생각이다.
‘어림도 없지.’
나는 타의적으로 보여줄 생각이 가득했다.
“송주 씨. 여기서 택시 타고 조금만 가면 제가 인테리어 맡은 카페가 있거든요. 헤븐즈 도어라고 하는데.”
“잠, 잠시만요.”
송주가 질겁하듯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사장님한테 한 번 말씀드려 볼게요.”
“괜찮으시겠어요? 아직 남았는데.”
“전 지금도 찬성입니다. 훌륭하네요.”
아쉽다.
더 자랑하고 싶었는데.
*
일주일 뒤.
우리는 인천에 있는 모 폐교사에 방문했다.
이미 방치된 지 한참이 지난 듯 음산하기 짝이 없는 실내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곳에 건물이 다 있었네.”
“좀 으스스하다.”
우리 앞으로 소규모 인원이 함께 앞장섰다.
윤가영이 내 귀에 소곤거렸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다. 막 수십 명 올 줄 알았는데.”
“사전답사잖아.”
뮤비 촬영을 맡아주시기로 한 스튜디오 촬영 감독님과 소속사 사장님, 그리고 송주가 함께했다.
우선은 이들과 함께 기본적인 컨셉을 따져보고, 그에 맞춰서 실제 작업을 진행할 예정.
‘보통은 스튜디오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알아서 한다던데. 아직 회사가 작아서 그런가.’
살짝 주먹구구식이다.
덕분에 우겨 들어갈 자리가 생겼으니 행운이다.
학교 3층으로 올라갈 무렵, 사장님이 우리에게 말했다.
“여기 복도부터 저기 복도 끝까지 사용할 예정입니다.”
“생각보다 넓진 않다.”
규태가 내게 슬쩍 중얼거리는데, 감독님이 답했다.
“작업 일정도 있고, 예산 문제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뮤비라는 게 원래 그렇다.
영상만 보면 굉장히 넓은 공간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극히 좁은 공간을 다양한 각도로 촬영한다.
인건비가 곧 작업비용인 특성상, 조금이라도 넓게 쓰려면 비용이 확 불어서 그렇다.
“여깁니다.”
걷다 보니까 곧 [3-1]이라고 팻말이 붙은 반에 도착했다.
드르륵.
문을 열자, 안쪽으로 반쯤 청소된 교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뮤비에서 여러 번 봤던 그 교실이었다.
감독님이 말했다.
“이쪽 칠판에는 졸업한 학생들의 졸업 메시지를 적을 겁니다.”
기억난다.
학생들의 졸업 메시지를 포함해, 몇몇 낙서를 그려둔 칠판이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견을 냈다.
“가사를 적는 건 어떨까요?”
“가사요?”
“그 졸업식 노래 안에 가사 있잖아요. 거기에 있는 것들을 조금씩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나는 스케치북을 펴고, 미리 준비해 둔 메시지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다시 보자.
친구들아, 그동안 고마웠어.
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 생각하나.
지구는 둥글지 않다.
이런저런 포부가 담긴 메시지들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가사를 메인으로 큼지막하게 적고, 나머지를 깨알같이 적으면 좋을 것 같네요.”
그것을 감독님에게 보여주자,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어떤 걸 적든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교실 내부는 크게 손볼 게 없었다.
여기저기 낙서를 추가하고, 가정통신문이나 시간표를 만들어서 붙이는 정도.
‘인쇄물이 많이 필요하겠네.’
모처럼 시각디자인과다운 일이다.
교실 내부를 둘러보며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여기에는 아예 의자 더미를 복잡하게 배치해서 의자의 산을 만드는 게 어떨까요?”
“송주가 그 위에 앉아서 노래 부르게끔 말이죠?”
“네. 그럼 느낌이 좀 살 것 같네요.”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은데, 우선 적어두겠습니다.”
예산이 많이 추가되는 것도 아니고, 달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음 가시죠.”
마지막으로 복도.
여기가 중요했다.
감독님이 한쪽 끝에 서서 다른 한쪽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송주 씨가 이쪽 복도에서 저쪽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촬영할 겁니다.”
이번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양분할 장면이었다.
또, 우리에게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직선으로 걸어서 통과하는 데만 해도 1분 가까이 걸리는 복도를 전부 벽화로 커버해야 했다.
양도 양이지만, 발상에서 밑천을 보일 수도 있는 강행군.
‘어지간하면 그릴 게 없어서 죽겠지.’
물론.
이것도 미리 준비해 왔다.
< 사전답사 > 끝
ⓒ 이한이
< 한우 적립 >
50m.
확실하게 말해서, 긴 거리다.
하루에 5m씩 작업한다고 쳐도 10일 가까이 걸린다.
작업량 자체가 어마어마하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이게 문제였다.
‘아무리 잘 그린 벽화라고 해도, 50m씩이나 이어서 그리면 소재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통일감도 사라지겠지.’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람이 전부 담당하더라도 뮤비 속에서는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이걸 한 팀이 나눈다니.
안 맞는 퍼즐을 억지로 끼운 꼴이 된다.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럼 50m짜리 한 작품을 그리면 되지 않을까.’
여러 작품을 이어서 그리려고 하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니까, 한 작품을 그리면 된다.
그래.
한 작품.
여기에 이야기를 그리는 거다.
“뮤비 속 주인공이 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3학년이 되어 졸업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벽화로 기록하는 거예요.”
이게 내 생각이었다.
송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복도 여기서부터 저기 끝까지 쭉 그렇게 그리는 건가요?”
“네.”
한 사람의 3년을 50m 복도 위에 오롯이 담는다.
미래의 인천, 어느 마을 벽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송월동 벽화 마을. 마을 전체를 동화로 가득 채웠지.’
벽화로 이야기를 푼다고 생각해 보면 어려울 게 없다.
다만, 이걸 송주와 사장님, 그리고 감독님에게 설득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입학 첫날, 친구들과 만나서 즐거우면서도 어색하겠지요. 처음에는 쭈뼛거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릴 겁니다.”
“이 다음 장면은 어떻게 하죠?”
“그릴 건 많아요. 급식을 먼저 먹으려고 줄을 서기도 하고, 또 싸우기도 하죠. 그 왜 옛날 영화 있잖아요. 누가 내게 우유를 던졌어.”
“아. 그 영화.”
송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그럼 운동회도 좋겠네요.”
“네. 다 같이 이어달리기를 하는 거죠. 주인공이 바톤을 넘겨받고 골인을 한 다음에는,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요.”
천천히 설명하면서 계속 걸었다.
이해가 잘 안 된다 싶을 때는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네요.”
송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학교생활 3년은 짧으면서도 길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담기에 50m라는 거리는 짧게마저 느껴진다.
‘물론, 이걸 순수하게 페인트로 그리려면 그것도 그리 쉽진 않겠지.’
발상과 작업량은 또 별개의 이야기다.
하루에 5m씩 작업을 한다고 쳐도 50m면 10일이다.
매일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한다 치면 피로감이 극심하다.
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래서 이것도 방법을 마련했다.
‘라인 아트로 커버한다.’
라인 아트라는 장르가 있다.
말 그대로 선만으로 그리는 그림.
그냥 선화랑 뭐가 차이가 있는가 싶겠지만, 라인 아트가 벽화와 만나거든 그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미래에는 라인아트 벽화가 실내 인테리어로 크게 유행하기도 했어.’
어디에나 어울린다는 특성 덕분이었다.
느낌이 산뜻하니 좋다.
무엇보다도, 작업 속도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페인트로 며칠이 걸릴 작업이라도, 라인 아트로는 잘하면 하루만에 그릴 수도 있지.’
하지만, 라인 아트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리는 사람의 기량을 심하게 탄다는 것.
순수하게 드로잉 만으로 승부를 봐야 하니, 어설픈 꼼수가 안 통한다.
사물이라면 괜찮다.
전생에든 이번 생에든 질리도록 그려봤으니까.
다만, 그리는 대상이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람은 그리기 어렵지. 프로 디자이너라고 해도 따로 몇 년씩 시간을 들여 연습하지 않는 이상, 사람을 그리는 데는 약할 수밖에 없어.’
이건 나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가라, 윤가영.’
새 멤버의 차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