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2)
두 번 사는 미대생 32화(32/93)
*
마침 헤븐즈 도어까지 몇 분 안 걸리는 거리였던 참에, 아예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한설 선배는 그동안 들려주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충격적인 실태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건물만 다섯 채요?”
“응. 대부분 작은 건물이지만.”
한설 선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게는 심히 대수로웠다.
‘······ 돈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설마 건물이 다섯 채라니.’
게다가 대부분 작은 건물이라는 건, 큰 건물도 있다는 말 아닌가.
한설 선배의 집안이 유복하리라고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미대 전공 중에서도 특히 돈이 안 되는 조소를 전공하는 것부터 그랬다.
하물며 돈 많은 티를 안 낸다뿐이지 입는 옷의 때깔부터 남달랐다.
‘그런데 설마 건물주라니.’
그것도 건물만 다섯 채 가진 진짜배기 건물주.
거듭 강조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건물주······.”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규태가 중얼거렸다.
“아니, 누님. 왜 1년 동안 말을 안 해 주셨어요?”
“왜? 안 할 수도 있지.”
“······ 저는 저희 집안 사정 다 말했는데.”
“으음.”
규태의 채근에 한설 선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말했다.
“내 나름대로 변명을 하자면, 집안 잘산다는 걸 알면 이유 없이 기분 나쁘게 구는 사람이 종종 있잖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있었어. 괜히 거리 두는 사람도 있고.”
“거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저라면 오히려 가까이할 텐데.”
“아니. 그것도 좀 그러니까 좀 떨어져 줄래?”
“악.”
규태는 그녀의 말이 딱히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이해 갔다.
‘당장 전생의 내가 그랬지.’
내가 이렇게 회사에서 고생하는데, 수저를 잘 물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미웠다.
당장 회사 사장의 아들놈이라던가.
인터넷에서 흥하는 죽창 드립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한설 선배에 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
‘내 편이라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국밥처럼 든든하다.
‘같이 사업하면 쉽게 관두진 않겠네.’
대충 그런 안정감.
그렇게 떠들면서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 찰나였다.
곧 어느 덩치 큰 남자가 다가왔다.
그것도, 매우 덩치 큰 남자가.
‘조폭인가?’
위압감마저 느껴질 지경인데, 그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샤우팅을 하듯 외쳤다.
“어, 우리 딸! 저녁 먹었어?”
“······!”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우리 딸이라.
‘설마?’
나랑 규태는 슬쩍 고개를 돌려 한설 선배를 바라봤다.
설마 그 딸이, 이 딸을 말하는 건가.
사이즈가 다른데.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한설 선배가 한숨을 쉬고는 중얼거렸다.
“아빠, 목소리 너무 커요.”
이 딸 맞네.
한설 선배의 아버지라.
빼어나게 작은 한설 선배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고는 믿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밥은 이미 먹었어요.”
“그럼 무슨 일이야.”
“아까 말한 그거요.”
한설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말했다.
“여기 이 둘이 제가 평소에 말한 걔들이에요. 학교 후배들.”
“아.”
이 곰 같이 큰 아저씨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너희가 우리 딸이 말한 그 친구들이구나. 설이 아빠다. 아저씨라고 부르렴.”
그가 곰 같은 앞발, 아니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멍하니 손을 쥐었는데, 아무리 봐도 앞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집을 보고 있다면서?”
“······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둘이서 같이 살 집을 찾고 있는데, 오늘 하루 동안 부동산만 돌아다녔는데도 마땅히 매물을 못 찾았어요.”
“뭐, 대학가 주변이 다 그렇지.”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지금 이 시기가 성수기이기도 하고, 이 주변은 다 짓다 만 원룸만 있다 보니까 좀 그래.”
짓다 만 원룸이라.
실로 과격하면서도 적절한 표현이었다.
한설 선배의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대학생들은 집이 별로여도 크게 불평을 안 하거든. 맘에 안 들어도 일 년 채우고 딴 데 가지 하고 마니까. 학기 중에는 공실도 거의 없고.”
아.
그렇다면 이상할 정도로 집이 별로였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만만한 게 학생이란 말이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그럼 어쩌죠? 그냥 감수하고 살 수밖에 없나요?”
“음······ 어디 보자.”
그는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너네 둘이서 살 거지?”
“네.”
“그럼 아저씨가 관리하는 건물에 공실이 하나 있기는 한데, 학교에서 조금 거리가 있거든. 어떻게 할래?”
“여기서 많이 먼가요?”
“대충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지.”
“자전거 타고 다니면 금방이겠네요.”
“그럼 큰 문제 없겠네. 너희들 지금 시간 괜찮지?”
“네.”
“지금 바로 보러 가자.”
행동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마침 학기 초라서 딱히 과제도 뭣도 없겠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곧 그를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한설 선배의 추천은 실로 옳았다.
“이 집이 통째로 아버님 거예요?”
“그렇지.”
석관동 인근에 약 4층 높이의 건물이 한 채 있었다.
그리고.
그곳 4층 주인 세대 방이 좀 좋았다.
‘쓰리룸에 화장실이 두 개라.’
대학생 둘이서 살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넓은 집.
아저씨는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둘러 봐.”
“잠깐 실례할게요.”
나는 천천히 방을 돌아다니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둘러본 결과, 나는 곧 판단을 내렸다.
‘흠잡을 게 없네.’
집의 넓이는 원래부터 좋았고, 도배 상태는 두말할 것 없다.
도배나 화장실 타일의 상태도 좋다.
창문도 남향으로 트여 있다.
골목으로 들어간 집이라 주변 소음 문제도 없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풀옵션이었다.
‘보통 쓰리룸은 옵션이 없는데.’
안에 들어간 가구들도 대체로 다 좋다.
훌륭하다.
프로 자취러인 내 기준으로도 결격 사유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
‘이런 집이 왜 남아 있지?’
의아한 마음에 물어보려는데, 규태가 들떠서 중얼거렸다.
“와, 집이 진짜 좋네요. 아까 봤던 집들이랑은 수준이 다르네. 재하야. 여기 큰 방은 우리 작업실이나 손님방으로 써도 되겠다. 집 진짜 좋은데?”
규태는 이 집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집 좋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지?”
한설 선배의 아버님이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는 설이 할머니가 살던 집인데, 얼마 전에 몸이 편찮으셔서 고향에 내려가셨거든. 아마 너희 둘이 살기에는 나쁠 건 없을 거다.”
아.
어쩐지 집 상태가 좋더라니, 그런 이유라면 이해할 만했다.
자기 가족들 살라고 마련해 둔 곳이라면 좋을 수밖에.
일단 집 상태만 봐서는 합격이다.
나는 슬쩍 물었다.
“저 아버님. 혹시 월세는 어떻게 될까요?”
“보증금 이천에 월세 팔십······.”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아빠. 적당히 받아요.”
한설 선배가 아저씨의 허리를 쿡 찔렀다.
“좀 디스카운트 해 줘요. 제 후배들이잖아요.”
“······ 이 애들이 네 후배라도 여긴 내 집인데.”
아저씨의 억울한 듯한 말에, 한설 선배는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빈방이었잖아요. 전 후배 팔아서 장사한다는 말 듣기 싫어요.”
“그럼······.”
아저씨는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리 딸 얼굴 봐서 보증금 천에 월세는 칠십. 어떠냐.”
오.
이 조건이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칠십이면 이 근방에서는 무난한 투룸이나 간신히 구할 정도인데, 쓰리룸이 이 가격이면 더 바랄 게 없지.’
살짝 비싸지만, 지금 수입을 생각해 보면 외려 만만했다.
어차피 둘이서 나누면 예전 살던 옥탑방이랑 별 차이도 없다.
‘여기서 더 좋은 집을 구하려면 아파트로 가야겠지.’
당분간은 이 집에서 살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버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라.”
“네. 아버님.”
*
정식으로 이사 일정이 잡히고 며칠 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짐을 옮기는 데 분주했다.
그런데, 피곤해야 할 이사이거늘 몸이 편했다.
“선배 좋다는 게 뭐냐.”
지훈 선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말을 들은 지훈 선배가 트럭과 인력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정확히는, 건축과 친구들을 내주었다.
“우리 후배님 오래간만이네. 전과 안 할래?”
“안 해요.”
“나무도 열 번 찍으면 넘어간다던데.”
“저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닙니다.”
그들은 내 말이 뭐가 그리 웃긴지 낄낄 웃었다.
그런데, 누가 건축과 아니랄까 봐 이삿짐을 잘 나른다.
“수당을 얼마만큼 챙겨드리면 될까요?”
“수당은 무슨. 그냥 나중에 밥이나 사줘. 고기로.”
좋은 사람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고 했던가.
지훈 선배의 지인인 만큼, 그들의 성격은 둥글기 그지없었다.
아무튼, 그들 덕분에 이삿짐을 편하게 나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우리 팀원들, 그러니까 한설 선배와 지훈 선배, 그리고 규태와 가영이를 거실에 모아놓고 말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여러분이 힘을 보태주어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사장님 훈사처럼 하네.”
“······.”
규태의 태클에 나는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가까스로 참고는 말했다.
“아무튼, 이제 대충 환경이 잡혔어요. 사무실은 조만간 알아볼 생각이고, 기본적인 자본도 갖췄어요.”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한설 선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 2학기 방학 전에 고기 먹으면서 했던 말 기억나요?”
“음······ 창업하자는 거?”
“네. 방학에 일하면서 좀 확신이 생겼어요.”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알바에 불과했다면, 이제부터는 전문적인 기업에 가까울 겁니다.”
이번 생으로 돌아온 뒤.
줄곧 꿈꿔왔던 일이 있었다.
“저는, 디자인 에이전시를 노려보려고 해요.”
디자인 에이전시.
다른 기업의 의뢰를 받고 디자인을 제공하는 기업.
그 범위는 산업 전반에 나무뿌리처럼 촘촘하게 뻗어 있었다.
“간단하게는 홍보용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인테리어 소품이나 벽화, 그리고 가구, 나아가서 건물 디자인이나 컨설팅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거예요.”
이게 내 생각이었다.
뭐든 하자.
그리고, 기왕 한다면 성공해 보자.
구성원은 갖춰졌다.
“기왕 하는 일, 이력서 한 줄로 끝낼 생각은 없어요.”
“그럼?”
지훈 선배의 질문에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 기업을 한국 최고로 만들 겁니다.”
“······.”
잠시 거실이 적막해졌다.
내 말이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한 걸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은 내게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너무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는 말아요. 사람이 꿈 하나는 있어도 되잖아요.”
이 정적이 민망해서 둘러대는데 한설 선배가 말했다.
“그 말을 굳이 우리한테 하는 건, 같이 하자는 말이겠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우리 다섯이 원년 멤버가 되는 거예요. 물론 사장은 접니다.”
내 말에 규태가 킥킥 웃고는 말했다.
“그럼 네가 한국 최고 디자인 기업의 사장님이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좋지.”
“그럼 나는?”
“음. 그럼 규태 너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한국 최고 디자인 기업 사장님이랑 같은 집에 사는 사람.”
“······ 어, 응. 그래.”
규태가 시무룩해졌다.
내심 부사장 소리라도 듣길 바랐던 모양.
그런데, 지훈 선배가 이마를 찌푸리더니 말했다.
“난 여기에 붙어야겠다.”
“오빠가 웬일이래요.”
“요즘은 불경기라서 취업도 어렵다잖아. 설이 너는.”
“전 어차피 취업 안 할 거라서 백수거든요. 백수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죠.”
세 사람이 대충 동의했다.
마침 얼떨결에 옆에 앉아 있던 가영이도 기어드는 목소리로 곁들였다.
“그럼 전 데뷔할 때까지만······.”
나는 그 시기가 언젠지 잘 안다.
앞으로 5년은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 다 찬성한 걸로 알고······.”
나는 대충 정리된 마음에 호흡을 내쉬고는 말했다.
“분위기 그만 잡고 밥이나 먹죠.”
“아. 적응 안 돼서 죽는 줄 알았다.”
“조용히 해라. 박규태.”
“넵. 사장님.”
< 디자인 에이전시 > 끝
ⓒ 이한이™
< 두개골 >
한예원 인근 건물의 3층 사무실.
한설 선배는 내부를 둘러보며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무실 되게 좋다.”
“그죠?”
그녀의 감탄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어요.”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
학교의 소개로 사무실 하나를 통째로 물려받았는데, 기본적인 사무용품도 전부 갖추어져 있었다.
그 덕에 정말 몸만 들어왔다.
“여기 딱 봐도 좀 비싸 보이는데 괜찮아?”
“괜찮아요. 한예원에서 전액 지원받았어요.”
“우리 학교 일 잘하네. 등록금 축내는 줄만 알았더니.”
한설 선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창문가로 걸어가 도로변을 내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위치가 좋다. 집이랑 학교랑 사무실이랑 다 금방이네.”
“간이침대랑 이불도 가져다 놓으려고요.”
“그건 왜?”
“바쁠 때는 밤샘해야죠.”
“······ 아무리 그래도 일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한설 선배가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몰랐다.
‘미안하지만, 하고 싶을 때만 할 수 있으면 일이 아니지.’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켰다.
“회의 준비나 하죠.”
“회의? 어떤 회의?”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죠.”
나는 씨익 웃고는 말했다.
“JH 디자인 오인회를 소집합니다.”
*
다섯 멤버가 소형 회의실 하나에 전부 들어왔다.
나는 적당히 분위기를 잡고는 말했다.
“예전에 말했다시피, 우리 목적은 디자인 에이전시입니다.”
“그 아무거나 다 한다는 그거?”
“네.”
나는 지훈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둬야 해요.”
“뭔데?”
“에이전시로서 우린 사실상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는 거죠.”
“······.”
이게 중요했다.
내가 경험한 디자인 에이전시는 인맥이 90%라고 말해도 무방한 업계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말 그대로 밑바닥이었다.
입소문으로 뭐가 팍팍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단발적인 일감으로만 먹고 살 수는 없어. 꾸준한 일감을 만들어야 한다.’
차라리 미래처럼 재능 마켓이라도 있었다면 시작이 쉬웠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그렇기에 아예 주먹구구식으로 접근을 해야 했다.
“일단은 인지도예요. 어디든 눈에 띌만한 일이라면 뭐든 찔러보면서 이름을 알려두는 거죠.”
“예를 들면?”
“공모전에 나가서 수상한다던가. 아니면 전람회에 출품한다던가 하는 수가 있겠네요.”
“회사에 다짜고짜 찾아가서 일감 달라거나 그러진 않네.”
“그것도 다 실적이 있어야 하니까요.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찾아가면 그냥 도적이잖아요.”
“음······ 그럼 사실상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은 전부 시간 낭비였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아예 실적이 없는 기업이랑, 개미 코털만큼이라도 있는 기업은 같은 일을 해도 다르거든요.”
“우리가 뭐라도 해놓은 게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팔이 기울 거다?”
“네. 그동안 놀기만 했던 건 아니잖아요.”
같은 상대라면, 뭐라도 해놓은 게 있는 사람을 고르기 마련.
그렇다.
당면과제는 뭐라도 ‘더’ 하는 것이었다.
“우선, 제가 생각해 둔 건 이거예요.”
나는 준비해 뒀던 전단지 더미를 책상 위에 퍼뜨렸다.
수십 장이 넘는 종이가 우르르 쏟아졌다.
지훈 선배는 그걸 보고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거 다 공모전 홍보지야?”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한 달 안에 있을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전부 다 모아 왔어요.”
학교 창업 지원 센터를 뻔질나게 돌아다녔다.
또 인터넷도 밑바닥까지 모조리 긁었다.
단순한 공모전이 아니었다.
실제 포트폴리오로 이어질 만한 물건들만 찾아왔다.
‘단순히 수상 경력에서 끝나지 않고, 나아가 실제 제작으로 이어지는 것들.’
대다수가 그랬다.
상을 타면 그게 곧 커리어로 이어진다.
“그럼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자는 건가?”
“아뇨.”
그럴 리가.
말했다시피, 우리는 손이 닿는다면 뭐든 다 할 예정이다.
그게 우리 에이전시니까.
나는 책상 위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인당 하나씩입니다.”
“······!”
“질보다는 양으로 싸울 거예요. 일단 넣고 봅시다.”
이게 내 생각이었다.
여기저기 씨앗을 뿌리고 보자.
디자인은 무조건 시간과 인력을 투자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분야가 아니다.
어떤 때는 1분짜리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1달간 준비한 결과물보다 좋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다섯 명이 머리를 맞댄다고 꼭 한 명이 전담한 것보다 좋은 물건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반드시 우승을 노릴 필요는 없어요. 우리 목적은 눈도장을 찍는 겁니다. 어떻게든 이름 한 줄만 올릴 수 있으면 돼요. 수상실적 하나만 있으면, 그걸 빌미 삼아서 여기저기 영업을 해 볼 수 있겠죠.”
그 순간 규태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하나만 얻어걸리라는 거 아니야? 사실상 도박이네.”
“맞아. 바로 그거야. 정확히 이해했어.”
모처럼 규태가 맞는 말을 했다.
“······ 어, 응? 어.”
정작 본인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
“분야도 크게 신경 쓸 거 없어요. 각자 마음에 드는 거 하나씩 집으세요.”
“당장 고르라고 해도. 지금 바로는 잘 모르겠는데.”
지훈 선배가 긁적이는 순간이었다.
이 선배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한설 선배도, 규태도 당장은 자신 없는 눈치.
내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였다.
“이거 맘에 든다.”
가영이가 팔을 뻗더니 한 장을 골랐다.
그 작품은, 캐릭터 디자인 공모전이었다.
어느 음식 프랜차이즈의 마스코트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일.
여기서 수상한 작품은, 정식으로 전국 점포에서 사용될 예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걸로 골랐어?”
“제일 재밌어 보여서.”
그럴듯한 이유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좋아. 가영이한테 잘 어울리는 일이다.’
자기 적성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모양.
캐릭터 디자인은 좋다.
무엇이 좋은가 하면, 확장성이 좋다.
‘발전 가능성만 따지자면 가장 압도적이지.’
앞으로 몇 년 안에 이모티콘 열풍이 불어친다.
또 그 뒤에는 캐릭터 하나로 수백억도 버는 세상이 온다.
그 전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리라.
‘탁월한 선택이야.’
나는 그다음으로 규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뭐 하나 골라봐.”
“나도?”
“부사장 하고 싶다며.”
“······.”
규태는 부사장이라는 단어 하나에 입을 다물더니 한 장을 골라냈다.
“그럼 나는 이거.”
패션 디자인 공모전이었다.
여름에 판매될 옷을 디자인해서 내놓으라는 공모전.
이 공모전에서 대상 수상작은 실제로 제작되어서 판매할 예정인 듯했다.
시각디자인과 주제에 패션에 더 관심이 많은 규태다운 선정이었다.
문득, 나는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왜 패션디자인과 안 가고 시각디자인과로 왔냐.”
“우리 어머니가 그랬는데, 옷은 돈이 안 된대.”
묘하게 현실적인 이유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좋네. 돈 안 되는 거 한 번 팍팍 만들어 보자.”
그렇게 두 후배가 각자 하나씩 집자, 두 선배도 가만히 있기는 민망했는지 각자 하나씩을 잡았다.
“난 이걸로 할게.”
한설 선배는 서울 관광기념품 공모전을 선택했다.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건데, 잘하면 해외로까지 판로가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역시나 전공을 살린 무난한 선택.
그리고 지훈 선배는.
“가구 하나 만들어야겠다.”
사무용 가구 디자인 공모전을 선택했다.
입상하거든 디자인 등록 출원까지 할 수 있는 기회.
‘각자 다 하나씩 골랐네.’
좋다.
어떻게든 자기 적성을 하나씩은 살렸다.
그럼, 이젠 내 차례였다.
“전 이거요.”
“음료수병 디자인?”
그렇다.
내가 고른 건 음료수 용기 디자인 공모전으로서, 이것도 마찬가지로 수상 시에는 실제 제작과 판매로 이어질 물건이었다.
음료수 용기라.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조금 사소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건 모르는 말이었다.
‘눈에 잘 띄는 물건만큼 홍보용으로 좋은 것도 없지.’
벽화와도 같다.
벽화를 했을 때도 우선 눈에 띄자 온 사방에서 일감이 들어오더니, 지금은 아예 골라서 받는 수준까지 됐다.
일단 눈에 띄고 볼 일.
하물며 이 음료수가 또 그냥 신제품이 아니다.
엄청나게 성공할 물건이다.
‘출시 두 달 만에 천만 병을 넘기면서 대박을 쳤다던가.’
여기서 내가 입상하거든, 어떻게든 전 국민의 눈에 노출될 터.
그다음부터는 쉽다.
벽화처럼 알아서 몰려오는 일감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나는 손바닥을 짝짝 치며 말했다.
“자, 그럼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봅시다.”
“오냐.”
“네. 사장님.”
“으, 졸리다.”
그렇게 첫 회의는 비교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헤븐즈 도어에 집합했다.
*
“우리 사무실 두고 여기서 뭐 하냐.”
“솔직히 이렇게 될 것 같았어요.”
“······.”
그렇다.
어째서인지 기껏 얻어낸 공간인 사무실보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카페가 더 편했다.
이미 몸에 습관이 배인 탓.
“기껏 사무실 구해놓고 좀 아쉽다.”
한설 선배가 중얼거리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래도 사무실이 쓸모가 없진 않을 거예요.”
“그래?”
“고객이 볼 때 사무실도 없는 회사라면 좀 수상쩍게 보이잖아요. 그리고 여기서 시제품을 만들 수도 없으니까, 막상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거기서 살다시피 할 거예요.”
“그럼 카페에서는 기획만 하는 거지?”
“아마도요.”
그래.
아마도.
‘디자인이 나와야 좀 뭘 해 보든 할 텐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었다.
파라락.
난 스케치북을 펴 봤다.
그 안에는, 내가 창의적으로 만들려 노력한 디자인이 백 개도 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쉽다.
창의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했다뿐이지, 딱히 창의적이진 않았다.
‘은근히 어렵네.’
그럴듯한 디자인은 많은데, 탁 꽂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헤븐즈 도어에 죽치고 있는 것.
이러다가 벌써 며칠이나 흘렀다.
다만, 사장님에게는 우리가 여기 뭉쳐 있는 게 썩 기쁜 눈치였다.
“나중에 너희들 유명해지면, 여기 자리를 관광상품으로 팔아야겠다.”
“······ 어떻게요?”
“그 패리 호터라고 있잖아. 마법사들 나오는 소설.”
“영국 작가가 쓴 거 말씀이시죠?”
“응. 그 소설도 카페에서 쓴 건데, 거기가 지금은 관광지 됐다더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발 디딜 곳도 없대.”
꿈에 부푼 목소리였다
행시 합격자를 배출한 고시원 사장님이 이럴까.
그런데, 사장님이 우리한테 주신 컵이 좀 신기했다.
“어? 이거 뭐예요?”
평소 음료를 담아주는 그 컵이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공포영화 속 소품으로 나올 법한 기묘한 컵이었다.
사람의 두개골을 형상화한 디자인.
‘······ 혹시 우리한테 불만 있으시나?’
나는 우두커니 있다가, 나름의 희망을 담아 물었다.
“이것도 아내분께서 구해다 주신 거예요?”
“아니? 이건 내가 가져온 거야.”
“가져와요?”
의아해서 물어보니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남대문에 그릇 도매 상가가 있거든. 지나가다 둘러보니까 예쁜 거 많길래 가져왔다.”
“······.”
이 해골 컵을 예쁘다고 해도 될까.
하지만, 적어도 개성만큼은 확실했다. 둘 장소가 카페라는 게 문제일 뿐.
두개골이 반질거려서 만지는 맛은 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잠깐. 그릇 도매 상가?’
문득 머릿속으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사장님. 혹시 거기 주소 저한테도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응? 어렵진 않은데 왜?”
“둘러보면 영감이 올 것 같아서요.”
뭐가 안 떠오를 때는 가서 둘러보는 게 장땡이다.
너무 참신한 것만 찾으려고 하다가 막힌 걸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참고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나도 같이 가.”
한설 선배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되물었다.
“누나도요?”
“응.”
“누나는 왜요? 컵 사시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한설 선배는 우물쭈물하다가, 말없이 스케치북을 덮었다.
아 그거구나.
그렇게 됐구나.
나는 측은지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도 막혔어요?”
“······.”
한설 선배는 나를 슬며시 째려보더니 말했다.
“조용히 해라 이재하.”
“막힌 거 맞네.”
“······.”
< 두개골 > 끝
ⓒ 이한이™
< 다윗과 골리앗 >
디자이너가 제품을 디자인할 때 고려하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합목적성과 심미성.
그리고, 경제성과 독창성이다.
‘무엇 하나라도 놓치면 공허한 디자인이 되어 버리지.’
합목적성은 디자인이 제품의 목적과 맞아떨어지는가이다.
심미성은 아름다운가.
경제성은 경제적으로 알맞은가.
독창성은 말 그대로 얼마나 독창적인지를 평가한다.
‘이번 공모전에서도 이 기준으로 네 부문을 평가한 뒤, 총점이 높은 작품을 선정하겠다고 했다.’
저걸 다 맞춰야 한다니.
까다롭다.
하지만, 해야 한다.
이런 일 하라고 디자이너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이 음료수 공모전 같은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성공해야만 한다.
나는 문득 한설 선배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연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와, 서울에 이런 곳이 다 있었네.”
“그렇게 신기해요?”
“당연하지. 한국에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다 여기 모인 것 같은데.”
그렇다.
지금 우리가 방문한 곳은 남대문 그릇 도매상가.
고급스러운 커트러리부터 시작해, 인도풍 티 세트나 학교 급식판까지.
어지간한 식기는 죄다 모인 곳이었다.
물건은 많은데 가게 내부가 오밀조밀하다 보니, 그 분위기가 마치 용산전자상가를 방불케 했다.
“어, 저거 원효대사 컵 있다.”
“원효대사 컵이요?”
“사장님이 사온 해골 컵.”
“······.”
거참 이상한 별명이다.
아무튼, 사장님이 정말로 여기서 사온 게 맞기는 한 모양.
‘다시 봐도 확실히 신선하네.’
다른 건 몰라도 독창성 점수는 기본으로 높게 먹고 들어가지 않을까.
그렇게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데, 한설 선배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재하야. 이런 디자인은 어때?”
“음 글쎄요.”
나는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합목적성이랑 경제성이 안 맞아요.”
“그게 뭔데?”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해골 컵을 한 손에 들고 설명했다.
“이거 모양이 좀 독특하잖아요. 올록볼록하고, 또 재질도 특이하고.”
“그렇지?”
“이런 게 실제 생산에 들어가면 수지가 안 맞거든요. 용기 제작단가가 올라가요. 그럼 경제성이 모자란 거예요. 아마 수상을 하더라도 우승은 힘들 가능성이 커요.”
내 설명에 한설 선배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보통 거기까지 보나?”
“대학생들 공모전이라면 아무래도 독창성만 있으면 되겠지만, 기업 대상 공모전이라서 그래요.”
“음, 그럼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건 알았는데. 합목적성도 안 맞다고 했잖아. 그건 또 뭐야?”
“디자인이 제품의 목적과 어울리느냐는 거예요.”
“이게 음료수 디자인으로는 안 맞나?”
한설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나는 그게 웃겨서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번 공모전 작품 주제가 스포츠 드링크잖아요.”
“그게 왜?”
“해골은 마시면 죽는 독약 같아요.”
“······ 듣고 보니까 그럴듯하네.”
한설 선배는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디자인과는 뭐 하나를 만들더라도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는구나.”
“아무래도 소비자 지향적인 과라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조소과도 비슷하지 않아요?”
“우리 과는 나 보기만 좋으면 장땡이라서.”
그녀가 큭큭 웃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의 차이점 아닐까.
소비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냐, 아니면 제작자의 에고를 우선시하냐의 차이.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디자인했던 것들 있잖아. 넌 다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만들었던 거야”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요.”
“힘들겠다. 난 그렇게까지는 머리 못 쓰겠어.”
그녀가 끙끙거리는데, 나는 그 모습이 썩 우스웠다.
‘오히려 내가 이 누나처럼은 못할 것 같은데.’
내게 극단적인 독창성 같은 건 없다.
또 한설 선배 같은 극단적인 손재주도 없다.
그러니, 결국에는 영역의 차이다.
‘각자 자기가 잘하는 분야에서 잘하면 그만이지.’
그렇게 나는 한설 선배와 상가를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거 컵은 좀 괜찮지 않아?”
한설 선배가 생선 머리 모양 컵을 가리켰다.
비린내가 날 것만 같은 디자인이다.
나는 애써 돌려 말했다.
“······ 심미성이 떨어져서 안 돼요.”
“안 예쁘다는 거지?”
“맞아요.”
“내 눈에는 예쁜데.”
“······.”
새삼 느끼는데, 이 선배 감각도 대중과는 은근 거리가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느끼든 자기 눈에 예쁘면 그만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 감각이 언젠가는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
“저쪽에도 한 번 가 보죠.”
그런데, 그렇게 걷기만 하는 찰나였다.
‘저건.’
눈에 그럴듯한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일반적인 컵과 저장 용기를 반반 섞어둔 것만 같은 형태의 유리컵.
메이슨자(jar)였다.
‘이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세련되게 예쁜 디자인 덕에 미래에는 개인 카페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었다.
취향이 독특한 한설 선배도 이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 이거 예쁘다.”
“그렇죠?”
이 디자인으로 밀어보자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설 선배는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왜 그래요?”
“이거 경제성이 안 맞을 것 같아서.”
“······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우두커니 있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면적이 좀 독특하잖아. 자판기 같은 곳에는 못 둘 것 같아.”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다.
예쁘다고 다가 아니란 말을 해준 게 불과 몇 분이 안 됐는데, 벌써 여기까지 볼 수 있게 됐다니.
나는 은은하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시네요.”
“내가 좀 그렇지.”
“한설 학생. 참 잘했어요.”
“······ 그만 개겨라.”
그렇게 이런저런 농담이나 나누며 둘러보기를 한참.
한설 선배와 떠들며 걷다 보니 순식간에 한두 시간이 지났고, 또 상가를 전부 둘러봐 버렸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하나도 못 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