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3)
두 번 사는 미대생 33화(33/93)
*
소득 없이 상가를 나오는데 한설 선배가 물었다.
“맘에 드는 게 없었어?”
“음······ 딱 꽂히는 게 없네요.”
말 그대로였다.
상가를 전부 돌아봤지만, 기억에 남는 물건은 없었다.
영감이라고 할 것도 못 받았다.
왠지 시간이 아까운데, 선배에게 헛걸음질을 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기도 한 복합적인 기분에 말했다.
“미안해요. 기껏 멀리까지 왔는데.”
“뭘 사과하기까지 하고 그래. 죄지은 것도 아니고.”
한설 선배가 큭큭 웃었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아직 시간 많잖아. 더 둘러보면 되지.”
“네?”
“영감이 필요하다며. 주변에 널린 게 영감 아냐? 저기 포장마차나 피시방이나 맘만 먹으면 다 영감인데, 뭐라도 하나 건지면 되지.”
그녀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럴듯한 말이기는 했다.
‘음료수 용기라고 영감을 꼭 식기에서만 받으라는 법은 없지.’
꼭 그릇 상가만 참고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아직 오늘 하루는 많이 남았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물었다.
“오늘 시간 괜찮아요?”
“나 친구 없잖아.”
“······.”
내가 정색하고 있으려니까 그녀가 한 마디를 다급히 덧붙였다.
“농담이야.”
아.
진담인 줄 알았네.
“아무튼, 시간 많다는 거죠?”
“취업 안 하는 4학년은 남는 게 시간이잖아.”
“그럼 좀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뭘 거창하게 고생은. 그냥 놀러 왔다고 생각해. 그러다가 뭐 하나 얻어걸리면 좋은 거고.”
놀러 왔다.
어쩐지 와닿는 말이었다.
요즘 제대로 놀아본 기억이 희미했는데, 어쩌면 그동안 생각이 지나치게 많았던 탓에 머리가 막힌 것도 있지 않을까.
“그럼 어디 갈래요?”
“음.”
한설 선배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선은 밥부터.”
“네 그럼 제가 잘 아는······.”
“국밥은 안 돼.”
“······.”
너무하시네.
아무튼, 나는 한설 선배와 말 그대로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냥 발이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평소에는 잘 안 건들던 시장 음식을 먹는가 하면, 생각 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또 특색 있는 가게에 들어가기도 했다.
“저거 인형 예쁘다. 병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는데?”
“음······.”
저 인형, 아무리 봐도 가까이 두면 저주받을 것 같다.
저걸 병으로 만든다는 건 또 어떻게 만든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 누나 감각은 잘 모르겠네.’
어렵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걸 보면 분명 수요가 있는 감각이기는 할 텐데.’
아무튼.
중간에는 카페에 들어가기도 했다.
음료수라고 하니 비교적 분야가 가까운 곳에 들린 것.
“저기 전구 예쁘지 않아?”
“전구를 음료수 용기로 만들자고요?”
“난 좋을 것 같은데.”
“음······.”
“아님 말고.”
한설 선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 의견도 같았다.
전구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음료수가 없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등장해 세계적으로 히트 쳤다.
‘지금 가져와서 그대로 제출해도 최소 평균 이상은 하겠지.’
문제는,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의 디자인을 아예 빼앗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한테 미래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대뜸 가져다가 썼을 것 같기도 한데.’
최소한의 직업윤리 차원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법이나 트렌드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제품의 디자인을 통째로 가져다가 쓰는 건 조금 그렇다.
“슬슬 나가자.”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한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한설 선배가 먼 하늘을 보며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시간 잘 가네.”
“그러게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갔다.
환생하고 이렇게 비생산적으로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고 딱히 낭비로 느껴지진 않았다.
굳이 어느 쪽인가 하냐면.
보람찼다.
어딘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데, 한설 선배가 중얼거렸다.
“집 갈까?”
나도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네.”
오늘만 날이 아니다.
기회는 또 있다.
디자인이라는 게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마감 기한도 넉넉하게 남았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어우.”
한설 선배가 한쪽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피곤해 죽겠다. 배터리 방전된 것 같아.”
“······.”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찰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어봤다.
“지금 뭐라고요?”
“피곤하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 방전됐다고요?”
“······ 배터리?”
그래.
이거다.
내 머릿속으로 신선한 산소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 느낌이다.
굳건한 벽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다윗이 돌팔매질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런 성취감.
나는 문득 웃으며 말했다.
“누나, 카페 갈래요?”
“왜?”
“일하게요.”
“······.”
*
우리는 바로 헤븐즈 도어로 향했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지만, 가게는 아직 열려 있었다.
장사가 잘되는지 최근 알바생을 추가로 뽑고 24시간 영업을 시작한 것.
‘학기 중에는 좋은 선택이지.’
사장님 말로는 옆 가게나 2층을 인수해서 가게를 확장할 생각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말도 아닌 듯했다.
“누나는 자리에 계세요.”
“옹야.”
나 혼자 카운터에 가서 주문하고 카드를 건네려는데, 알바생이 거절하더니 말했다.
“사장님이 손님들한테는 돈 받지 말라고 하셨어요.”
“······.”
이 가게에서는 돈 한 번 써보기가 참 힘들다.
아무튼.
나는 대충 자리에 눌러앉고 드로잉북을 꺼냈다.
그렇게 머릿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영감을 숨 가쁘게 털어놓기를 한참.
“어때요?”
한설 선배한테 보여주자, 그녀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돌아다닌 보람은 있네.”
< 다윗과 골리앗 > 끝
ⓒ 이한이™
< 우수한 일꾼들 >
‘좋아. 대강 성공이다.’
입가에 진한 웃음이 걸렸다.
지금 내 드로잉북에 그려져 있는 건 배터리 형태의 음료수 용기.
마치 검은색 건전지를 연상시키는 듯했다.
‘건전지에서 따온 뭉뚝한 몸체에, 위아래로 플러스마이너스 마크를 새겨 놨지. 뚜껑은 양극처럼 노란색으로 처리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음료수 용기는 겉면에 투명 포장지를 발라 내면의 음료가 보이도록 한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도 같은 설계를 응용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배터리 네 칸.’
마시면 마실수록 조금씩 배터리 칸수가 줄어드는 구조.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배터리 그 자체였다.
또한, 디자인의 네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디자인이기도 했다.
“진짜 참신하다.”
한설 선배가 감탄하고는 물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한 거야?”
“아까 누나가 집에 가자고 할 때 한 말 있잖아요. 배터리 방전됐다고.”
“그거 한마디 듣고 구상했다고?”
한설 선배가 살짝 놀라는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 배터리라고 하니까 감이 확 오더라고요. 이 제품을 캐치프레이즈로 뽑는다면······ 보자. 나는 방전됐을 때 배터리를 마신다. 어때요? 직관적이죠?”
“이게 네가 말한 합목적성인가 그건가?”
“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이게 디자인의 합목적성이었다.
배터리라는 모티브를 통해서 스포츠 드링크라는 특징을 최대한 살렸다.
이 두 가지를 연관시키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심미적으로도 단순한 구성이 예뻐요. 너무 복잡하게 구성하면 다른 제품들 사이에 세워뒀을 때 묻힐 수 있거든요.”
“확실히 편의점 진열대에 음료수 수십 개 놔두면 그 사이에서 이게 튀긴 하겠다.”
이게 두 번째.
심미성이었다.
순수하게 예쁜 디자인의 힘.
‘단순해서 더 예쁘지.’
나는 예나 지금이나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디자인이 좋았다.
어차피 이 세상은 미니멀리즘(제품에 필요한 최소한만 남기는 디자인)으로 흐르고 있기도 하고.
“게다가 구조도 단순하죠. 기존에 생산하고 있는 병은 그대로 쓰고, 거기에 포장 비닐만 새로 입혀도 될걸요.”
“이건 경제성이네.”
“바로 그겁니다.”
세 번째. 경제성.
제품 제조에 들어가는 비용이 낮다.
그리고 마지막은 독창성인데, 이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듯했다.
비슷한 물건을 찾아보려고 해도 없을 테니까.
“확실히 이 넷에 끼워 맞추니까 그럴듯한 물건이 나왔다.”
“끼워 맞췄다뇨. 나름대로 머리 엄청나게 굴린 건데.”
“응. 머리 열심히 굴려서 끼워 맞췄네.”
한설 선배가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우리 재하. 참 잘했어요.”
불과 몇 시간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것.
“으으.”
나는 일방적인 언어폭력 앞에 신음하다가 말했다.
“그럼 누나는 어떤 물건 준비했는데요. 누나도 공모전 준비하고 있잖아요. 그 서울 관광기념품인가 하는 거.”
“아 그거?”
한설 선배는 피식 웃더니, 가방에서 스케치북 하나를 꺼내서 쓱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
이미 완성된 디자인이 열 개도 넘게 담겨 있었다.
팔찌부터 시작해서 술잔이나 부채 등 종류도 다양했다.
뭘 보든 당장 상용화해도 좋을 것만 같은 물건들.
“봤지? 나는 진즉 다 해놨다.”
한설 선배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데,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막힌 거 아니었네······.”
“말했잖아. 막힌 거 아니라고.”
막혀서 같이 구경하러 가자고 한 줄 알았더니마는.
나는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들어 물었다.
“아니, 그럼 막힌 것도 아닌데 왜 같이 구경하러 가자고 했어요.”
“내가 나 놀러 가는 것도 너한테 이유를 밝히고 가야 하나? 이재하 요즘 건방지네. 사장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갑질이야?”
“아오.”
얄밉다.
도움이 됐으니 화도 못 내겠고.
나는 끙끙거리다가, 제풀에 지쳐 말했다.
“우리 저녁밥 아직 안 먹었죠?”
“먹어야지.”
“국밥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너 그럴 줄 알았다.”
“싫음 말고요.”
“어림도 없지. 국밥 먹으러 가자.”
*
약 이주일 뒤.
종로의 어느 조용한 고급 술집.
한 중년이 혼자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는데, 곧 인자한 얼굴의 중년 한 명이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어, 종이 왔어?”
“오래간만이다. 태수.”
한 명은 이종이 교수였다.
나머지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인데, 얼굴이 드셌다.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둘은 서로 막연한 사이인 듯했다.
“그러게. 둘이서 본 건 오래간만이네.”
이종이 교수는 자리에 앉으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동안 잘 살았어?”
“죽지 못해서 살고 있지.”
“농담이 과하네.”
“농담 아니야. 회사에서는 언제 잘릴지도 모르겠다.”
“되지도 않는 말은 하지도 말고. 너희 회사에서 너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태수는 한국 유수의 음료 제조 기업, 넥타르의 본부장이었다.
당연히 능력으로 빠질 수준은 아니다.
그런 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야. 우리 회사는 사장 가족 빼고 다 파리 목숨이라니까. 얼마 전에는 이사님도 실수 하나 했다고 잘렸다.”
“무슨 실수?”
“횡령.”
“······.”
그럼 실수가 아니지 않나.
아무튼, 태수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종이 너 같이 안정적인 교수직이 훨씬 부럽다.”
“그건 뭘 모르는······ 건 아니고 미대 교수가 편하긴 하지.”
이종이 교수는 차마 부인하기 어려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교수는 편한 일이 맞았다.
특히 국립대 교수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사립대 같은 실적 압박이 덜할뿐더러, 스스로 관두지 않는 이상 아다만티움밥통이니까.
그가 뜸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그래서, 왜 불렀어.”
“뭐 하나 물어보려고.”
“물어봐?”
“거시기 거 뭐냐. 나 이번에 공모전 하나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거 알지? 넥타르에서 내놓는 음료 신상품 패키지 디자인 공모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가.
들었던 것도 같다.
“얘기했었지.”
“그거 때문인데, 마지막에 누구 뽑아야 할지가 조금 고민돼서. 종이 네가 눈이 좀 좋잖냐.”
요컨대, 네가 작품 좀 골라 달라는 말이었다.
이종이 교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도, 가끔 이런 이유로 불려 다니고는 했으니까.
단순히 인맥 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종이보다 안목 좋은 사람은 없지.’
이종이 교수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좋은 발상력도, 좋은 스케치 실력도, 또 소통 능력도 그의 장점이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안목이었다.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가장 좋은 것 하나만 뽑아내는 압도적인 안목.
그 안목이 이종이 교수를 한국 산업 디자인 업계에서 입지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지.’
마침 이종이 교수도 반쯤 짐작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도와주면 나도 심사위원 목록에 올라가는 건가?”
“교수님께서 명예를 바라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드려야지.”
태수의 농담에 이종이 교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됐다. 한번 보자.”
“기다렸습니다. 교수님.”
태수는 클클 웃더니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 화면에는 전자화된 지원자들의 리스트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지원서만 팔백 개가 넘게 날아왔는데, 그중에서 99%는 쳐냈다.”
“야근 많이 했겠네.”
“나는 아니고 밑에 직원들이.”
“그럼 앞으로 열 명 정도 남은 건가?”
“그렇지. 남은 사람들은 전부 다 입상 대상자인데, 여기서 대상 받을 사람을 골라주면 된다.”
“나머지는?”
“그쪽은 대충 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야.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태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대상 외에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
상금액에 비례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다.
대상 수상작은 실제로 디자인을 채용해 제품에 적용할 예정이지만, 나머지는 서류에서 끝나기 때문.
“어려운 일 시키려고 불렀군.”
“맞아.”
“이래서 비싼 음식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되는데.”
이종이 교수는 한숨을 쉬고는 지원자의 리스트를 차례차례 검토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볼까.’
스포츠 드링크를 모티브로 제작한 디자인들.
태반은 그리 별 볼일이 없었다.
어디서 본 듯한 디자인에, 기업의 로고와 제품명을 보란 듯 크게 강조한 제품들.
이종이 교수의 시선에는 그게 그것으로 보였다.
‘화려하긴 하지만, 실속은 없다.’
물론 그것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종이 교수가 보는 건 그 이상이었다.
[이미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타사 제품들을 이길 수 있는가.]이게 이종이 교수의 유일한 잣대였다.
‘사람들은 음식에 보수적이다. 한 번 입맛이 굳으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아. 이런 시장에서 신제품이 오랜 역사로 브랜드를 다진 기존 제품들과 겨루려면, 디자인이라도 잘 뽑아야지.’
그리고.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대다수 작품은 기준 미달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럴듯한 물건들도 있지만, 타사 제품을 두고 이 제품을 골라야 할 이유는 안 보였다.
처음에는 홍보 때문에라도 적당히 팔리다가, 몇 달 지나면 할인 띠지가 붙은 채 대형 마트에서 미끼 상품으로 팔릴 그런 물건들.
‘재하가 디자인을 했더라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은데.’
이게 이종이 교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지원자를 봤을 때였다.
그 이름이 자랑스럽게 떠올라 있었다.
“······.”
이종이 교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 이재하?”
“아.”
태수가 낄낄 웃었다.
“사실 그거 때문에 종이 너 불렀다. 평소에 네가 애지중지한다고 아주 노래 부르는 그 친구인 것 같아서.”
듣자 하니 이 상황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모양.
지원자 중에서 익숙한 이름이 있으니, 검증 좀 해 보고 냅다 달려온 셈이었다.
이종이 교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지금 나한테 제자를 뽑으라고 말하는 건가?”
“그래도 되고. 아니면 떨어뜨려도 되고.”
태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네가 그런 정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지 않냐. 합리적으로 잘 뽑아주리라고 믿는다.”
“······.”
보통은 안 그러지.
당연히 자기 인맥으로 뽑지.
이종이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결국 선택했다.
“이게 제일 낫군.”
*
며칠 뒤.
공모전의 결과가 차례차례 발표됐다.
그리고.
“JH 디자인 오인회를 소집한다.”
나는 팀원들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제 공모전 결과가 나왔습니다.”
“드디어.”
규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혼자 늦게 나와서 무슨 고생이었냐. 크. 잘됐다.”
“그래. 내가 고생 좀 했다.”
그렇다.
나머지 넷은 결과가 진즉 나왔는데, 내 결과만 늦게 나왔다.
‘지훈이 형 대상, 설이 누나 대상, 가영이 대상, 규태······ 대상 같은 우수상.’
규태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대상을 받았다.
규태는, 우수상이지만 그 디자인을 아깝게 봐서 실제 제작에 들어가기로 했다.
사실상 전원이 대상을 탄 것과도 같은 셈.
우수한 일꾼들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디어 내 결과가 나왔다.
“곧 점심 먹을 때니까 결과만 말하겠습니다.”
< 우수한 일꾼들 > 끝
ⓒ 이한이™
< (수정)천마산 >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상을 받았습니다.”
“······.”
잠시 회의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어딘가 너무나도 태연한 말에 사고가 마비된 모양.
그저 모두가 말없이 앉아만 있으려니, 인내심이 제일 모자란 규태가 입을 열었다.
“그 공모전, 혹시 대상이 두 번째로 좋은 공모전이었나?”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위에서 첫 번째로 높은 상이야.”
“······.”
규태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승했다고?”
“뭐, 그렇지.”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해? 좀 기뻐하는 모습 좀 보여야지.”
“받을 줄 알았으니까.”
“······.”
태연하다 못해 무감각한 말에, 규태는 이번에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짓고는 다시 물었다.
“잠깐. 재하야. 침착해.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할 거 없어. 부끄러울 필요도 없어.”
“난 부끄러웠던 적이 없어.”
“알아. 누구나 다 그렇게 힘들 때가 있었지. 나도 우수상 받았을 때는 세상이 노래지는 것만 같더라.”
“그러니까 난 괜찮다니까.”
“그거 다 PTSD야.”
“······.”
내 말을 거세게 부인한다.
마치 내가 너무 기쁜 나머지 머리가 마비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야 그렇게 보이겠지.
열심히 하는 모습만 잔뜩 보여줬으니까.
“괜찮으니까 그만해.”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대상을 받긴 받은 건데, 거기서 추가로 다른 보상을 하나 더 받았어요. 그런데, 그게 좀 커요.”
“어떤 보상이길래?”
한설 선배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내부 심사에서 수상 연락을 받은 직후였는데요, 그쪽 담당자가 직접 찾아와서 한 말이 있어요.”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는 지훈 선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제 공모전 합격자들한테는 사전 통보가 있었어요. 지훈이 형도 예전에 받았을 거예요. 그렇죠?”
“음······ 시상식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 오라고 했었지.”
“저한테도 같은 연락이 왔었어요. 그런데, 통화가 끝난 직후에 그쪽 담당자가 꼭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면서 찾아오겠다고 하는 거예요.”
“담당자가 직접?”
“네. 조금 이상했어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했다.
상을 주면 상을 주는 거지, 왜 굳이 만나자고 하는가.
하지만, 기왕 클라이언트가 만나자는 걸 외주 업체가 거절하기도 좀 그렇다.
“영업 뛴다고 생각하고 만나러 갔죠.”
그렇게 넥타르 쪽 담당자, 박태수 부장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대상 받은 걸 축하한다고 말한 직후, 그가 대뜸 말했다.
[이종이 교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초면의 사람의 입에서 너무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살짝 당황하는데, 그는 대학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옛날에 이종이 교수와 어떤 일이 있었고, 그가 어떤 사람이고.
마치 그리운 이야기를 하듯 천천히 풀어놓았다.
그렇다.
박태수 이 사람도 한예원의 선배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다른 일을 하나 해 볼 생각 없나요?]그게 내가 말한 보상이었다.
“다른 일?”
한설 선배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묻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했다.
“넥타르에서 유통하는 전통주 브랜드가 있는데, 새로 제작할 한정판 패키지디자인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대요.”
병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포장까지 포함한 전체적인 프로젝트.
공모전보다 좀 더 범위가 넓었다.
그 제안 뒤에 박태수 부장은 말을 덧붙였다.
[이번 작업물이 괜찮다 싶거든, 아마 다음 시즌까지 일이 이어질 겁니다. 또 비슷한 일이 생기거든 그쪽에 맡기겠습니다.]단순한 보상이 아니었다.
공모전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건 일감을 위한 실적이니, 아예 징검다리를 건너뛰고 일감부터 제시한 것.
대학생 스타트업에게 선뜻 내준 일감 치고는 후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하늘이 내린 기회예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 경험상 이런 전통주는 일반 소비자 시장보다는, 기업 사이에서 선물용이나 건배주로 많이 돌아다니기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주류계의 대접용 술.
기업 사이에서 제대로 홍보할 기회다.
어쩌면 공모전 대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 정도로.
‘그건 일개 공모전이었지만, 이건 진짜 외주야.’
스포츠 드링크 패키지나, 전통주 패키지나 언뜻 비슷해 보이는 일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업무의 격으로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지훈 선배는 살짝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통 일개 공모전 참가자를 그렇게까지 챙겨주나.”
나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뇨. 사실 그분이 이종이 교수님의 지인인데, 그쪽으로 인연이 닿지 않았나 싶어요.”
“너희 작업실 교수님?”
“네.”
이종이 교수는 한국 디자인계에서 유명 인사임과 동시에, 인재의 산실 한예원에 큰 영향력을 가진 교수였다.
그렇기에 추가 보상이 주어진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후배 챙겨주기도 되고.’
이게 내 추측이었다.
“음.”
지훈 선배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듣고 보니까 그럴듯하기는 하네. 솔직히 어지간한 공모전보다는 훨씬 본격적이기도 하고.”
“비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나는 좋은데, 설이 의견은?”
“전 찬성이요.”
한설 선배가 동의했다.
“당장 다른 일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잘됐네요. 공모전 수상해도 별다른 게 있는 것도 아니던데.”
그렇다.
공모전은 뭐 하나만 걸리라는 식으로 뿌린 건데, 당장 마땅한 수확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들도 하나하나가 대상을 탔는데도 그러했다.
‘이러니까 운이 좋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나는 규태와 가영이가 차례차례 동의를 표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일 진행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사항은 없으시죠?”
“옙.”
“찬성합니다.”
“기념으로 회식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렇게 장엄한 JH 디자인 5인회가 막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잠깐. 다른 의제가 있습니다.”
규태가 손을 들었다.
“회식 메뉴까지 여기서 정하고 갑시다.”
“······.”
이 녀석.
눈치가 빨라졌다.
*
그 주말.
우리는 이른 아침 남양주의 명산(名山) 천마산에 방문했다.
“여행 온 것 같다.”
“겨울 되면 한 번 올까요?”
“스키 탈 줄 알아?”
“배우면 타죠.”
왁자지껄 떠들면서 걸어 올라가는데, 얼마 가지 않아 스키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양조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반 가정집 같네.’
그리 크지 않은 2층짜리 소박한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아직 건물에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바깥까지 술 냄새가 은근히 풍겨왔다.
그곳 테라스에서 전화를 걸자, 곧 안쪽에서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 양조장의 대표, 송현모 명인이었다.
그는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눈에서는 맑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옛 설화에 나오는 신선이 이러할까.
‘산에서 사셔서 그런가, 정정하시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요?”
“여기서 50년 넘게 양조장을 이어오신 명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명인이라니 부끄럽습니다. 그냥 술을 오래 빚은 것뿐인데.”
송형모 명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우리를 양조장 1층에 마련된 야외 테라스로 데려가더니, 곧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유리병과 컵이었다.
병 안에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게 저희 양조장이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는 술, 천마향이라고 합니다.”
이게 그거구나.
넥타르에서 유통을 맡고 있다는 그 술이었다.
전통주 중에서도 프리미엄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저기 기업 행사에서 건배주로 많이 쓰인다고 했다.
송현모 명인은 그것을 직접 잔에 따라주고는 권했다.
“한 번 맛들 보세요.”
“실례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이번 생에는 술을 안 마실 생각이었지만, 업무라면 조금은 달랐다.
머리가 마비될 정도만 아니라면야.
나는 술을 마시기에 앞서서 살짝 냄새를 맡았다.
“소나무 향기가 나네요.”
“예. 천마산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향을 담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술을 입술 위에 적시듯 살짝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는 상쾌한 향과 단맛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떻습니까?”
“다네요.”
“답니까?”
“네. 단맛이 납니다.”
“젊은 사람이 술맛을 아네요.”
송현모 명인은 기분 좋은 듯 웃다가 말했다.
“네. 천마향은 솔향과 단맛을 내세워, 마시는 사람의 심신을 맑게 해 주는 술입니다. 그쪽도 한 번 드셔 보세요.”
“아.”
“감사합니다.”
가만히 있던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모금 들이킨 지훈 선배가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시원하다.”
“진짜 술이 시원하네요. 그 맥주 시원한 맛 말고, 향이 청량해요.”
“읍.”
규태는 입맛에 안 맞는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나머지는 대체로 호평.
특히 지훈 선배는 놀라움이 아직 덜 가신 듯 말했다.
“이런 맛이 나는 술도 있었네요. 한국 술 하면 마트에서 파는 소주랑 막걸리만 마셔봤는데,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정말 새롭습니다.”
“한국 전통주가 원래 그렇습니다. 지역마다 저마다 자랑으로 내세우는 술이 하나씩 있습니다. 복숭아, 국화, 감자, 밤 등 온갖 재료가 사용되니 찾아서 마시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 그럼 이 술이 남양주를 대표하는 술이겠네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송현모 명인은 마치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본래 남양주는 탁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증류식 소주에서도 충분히 남양주의 특색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연구에만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고, 지금은 나름 자부할 수 있는 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술이다.
천마향.
술 한 잔에 천마산 소나무를 담은 술.
이쯤 되었을 때, 송현모 명인이 물었다.
“이 술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팔아야겠습니다.”
“어떻게 팔아야겠습니까?”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시안을 마련해서 다시 오겠습니다.”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다.
다급하게 생각할 이유도 없다.
‘생각해 뒀던 게 있었는데, 역시 현장에 오니까 다르네.’
처음에는 그냥 무난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현모 명인을 보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잘만 하면 술맛을 더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엎고 다시 만들어야겠다.’
디자인 프로젝트는 어떤 건 하루에 끝나는가 하면, 몇 달씩 걸리는 것도 있다.
이번 일은 시간이 상대적으로 넉넉하다.
일단 시간을 두고, 제대로 된 시안을 마련해서 천천히 다시 방문하면 된다.
그날 저녁.
나는 예약한 주변 숙소에 앉아 네 사람을 보며 말했다.
“JH 디자인 5인회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