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5)
두 번 사는 미대생 35화(35/93)
*
며칠이 지났다.
나는 사무실에서 팀원들과 함께 작업 준비로 분주했다.
“야, 재하야. 출력물 나왔다.”
“오. 보자. 얼른 보자.”
규태에게 맡긴 출력물이 왔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프린터 출력보다는 훨씬 고품질로 출력된 몇 장이 있었다.
인디고 출력.
흔히 기업용으로 자주 이용되는 출력 방식이었는데, 이번에는 한예원과 협약을 맺은 업체 측에 맡겼다.
보통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이 졸업전시품을 만들 때 애용하는 업체였다.
물론 여기서도 소소한 특혜를 받았다.
‘반값 개꿀.’
할인받았다.
스타트업 프로그램에서 지원하는 항목이기 때문.
역시 지원하기를 잘했다.
‘어디 보자.’
두꺼운 출력물 위로, 우리가 그간 준비한 패키지디자인의 박스 도면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이걸 오려서 접으면 바로 훌륭한 시안이 된다.
“설이 누나. 이것 좀 작업해 주세요.”
“나 이것만 하고.”
한편, 거의 동시에 술병에 두를 라벨도 준비가 끝났다.
“역시 교수님들은 수준이 다르구나······.”
“괜히 한예원 교수가 아니라니까.”
정상희 교수의 수묵화가 인쇄된 라벨이 술병에 둘러져 있었다.
준비는 대충 끝났다.
규태가 자랑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크. 잘 뽑혔다. 지금 당장 갖다 팔아도 되겠네.”
나도 동감한다.
공산품이라고 해도 믿을 퀄리티다.
시안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실력 발휘를 해 봤다.
JH 디자인이 패키지디자인으로는 처음 받은 일감이니까.
지훈 선배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지간한 시디과 졸업전시품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당연하죠.”
그렇게 팀원들과 함께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찰나였다.
똑똑.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잠시만요.”
가서 문을 열자, 그 자리에는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앳된 남학생이 서 있었다.
임동민이었다.
“동민이 왔어?”
“안녕하세요. 여기가 형 사무실이에요?”
임동민은 내 뒤로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놀란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그는 이내 사무실 식구들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임동민이에요. 재하 형한테 소개받고 왔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재하가 형이면 나도 형이지. 잘 부탁한다.”
지훈 선배는 이미 동민이가 마음에 든 모양.
한편, 규태는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가 싹싹해 보이네.”
“그렇지.”
“재하야.”
“왜.”
“저런 애를 대체 뭐라고 속여서 데려왔어?”
“······.”
< 첫 알바생 > 끝
ⓒ 이한이™
< 너 진짜 2학년 맞냐 >
이튿날.
나는 완성된 시안을 들고 미팅에 나갔다.
넥타르 측 박태수 부장과 송현모 명인에게 컨펌을 받기 위함이었다.
“음.”
시안을 확인한 두 사람의 반응은 각각 이러했다.
“송 선생님께서는 어떠십니까?”
“기대 이상이군요. 만족스럽습니다.”
“제 생각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이번 건은 이 시안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한 방에 컨펌이 나왔다.
자질구레한 건더기 없이 깔끔한 컨펌.
‘휴.’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떻게 잘 풀려서 다행이다.’
몇 번은 반려 당하고 수정할 것도 고려했다.
자고로 이 업계에서 한 번에 컨펌을 받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작은 규모의 업체라면 더더욱 어려웠다.
동네 하천에서 이무기를 발견하는 정도로.
‘그 이무기, 내가 발견했다.’
그렇게 사무실 식구들에게 어떻게 승전보를 알리면 좋을까 고민하는 찰나였다.
“흐음.”
송현모 명인은 시안을 이리저리 꼼꼼히 확인하던 중, 라벨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소나무 그림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만, 이건 혹시 직접 그리신 건가요?”
“아.”
정상희 교수가 그린 수묵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 작업에서 특히 자신 있는 부분이었기에 나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분께 외주를 부탁드렸습니다.”
“아 그렇군요. 혹시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한예원의 정상희 교수님 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뜬금없이 박태수 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가 말했다.
“정상희 교수요? 혹시 그 사람이 한국화 그리는 정상희 교수 맞습니까?”
“네? 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심상치 않다.
박태수 부장은 놀란 기색이 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하긴, 이만큼 잘 그리는 사람이 흔치 않지요. 그분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정상희 교수님을 아세요?”
내 질문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마어마하게 깐깐한 사람 아닙니까? 냉혈동물처럼.”
“······.”
냉혈동물이라.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공감해 버리는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정상희 선배님은 제가 한예원에 다닐 적의 선배님이었습니다. 연락은 아예 안 하고 지냅니다만.”
“아.”
둘이서 옛날 학교 동창이었구나.
그럼 이해하지.
‘자세히 보니 나이대가 가까워 보이기는 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가려는데, 박태수 부장이 나를 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선배님 밑에서 배우느라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네? 네. 그럭저럭······.”
“사실 정상희 선배님이 학부생 때부터 교수님들한테도 또박또박 대드는 걸로······ 아니, 자기 할 말 하는 걸로 유명한 선배님이었습니다.”
“교수님한테요?”
“예.”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몰라도 옛날 교수님의 말씀은 하늘과도 같았습니다. 그럴진대 어찌 사람이 하늘에 거역하겠습니까?”
“그걸 정상희 교수님이 하셨군요.”
“예. 교수님의 작품 해석이 잘못됐다면서 논문까지 들고 와 반박하는데, 그때는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
원래부터 당찼구나.
나는 반쯤 나간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기 많았겠네요?”
“그럴 리가요.”
박태수 부장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교수님한테도 그러는 사람이 동기들한테는 오죽하겠습니까. 남의 작품 보고 표절이니 발상이 창의적이질 못 하니 뭐니 대놓고 지적하다가 적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
대단하다.
그때부터 학부생들 작품 보면 발상으로 깠구나.
사람이 소나무처럼 일관적이니 존경심마저 싹튼다.
아니, 역으로 라벨에 그려진 소나무에서 정상희 교수님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못 본 셈 치자.
“게다가 말입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박태수 부장은 정상희 교수와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영웅담이 이어지기를 한참.
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사람이 말을 그렇게 하면 미움을 사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하는 흔한 실패 한 번에도 기다렸다는 듯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지요. 그런데 정상희 선배님은 달랐습니다.”
“한 번도 실패를 안 했군요.”
“예. 처음에는 선배님을 고깝게 보던 교수님들도, 나중에는 결국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저게 나랑 같은 사람이 맞나 싶더군요.”
그렇게 옛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아득한 클라이언트로만 보였던 박태수 부장에게서 묘한 동질감이 싹텄다.
“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정상희 선배님께는 비밀입니다.”
“물론입니다.”
역시 친해지기에는 제삼자 이야기만 한 게 없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 일은 끝.
마무리 작업으로 소소한 로고 수정이나 폰트 작업 정도야 있었지만, 그건 넥타르 측에서 담당하기로 했다.
“그럼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종종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슬 미팅을 끝내고 헤어질 무렵, 박태수 부장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럼 작품이 완성되는 대로 작은 선물을 보낼 테니, 기대 바랍니다.”
“선물이요?”
“비밀입니다.”
박태수 부장이 키득 웃었다.
비밀이라.
대체 무슨 비밀일까.
일말의 장난기조차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나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선물이라면 적어도 해가 되는 걸 보내진 않겠지. 나중에 잔뜩 놀란 목소리로 전화나 걸어야겠다.’
그걸 빌미로 일감 하나 따내면 좋고.
정리해서, 이번 의뢰는 성공적이었다.
‘한 번에 컨펌을 따낸 점이 고무적이었어.’
우리 작업에 만족했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일감을 구해다 주지 않을까.
다만, 아쉬운 마음은 들었다.
제품 디자인만 맡았을 뿐 브랜딩 전반을 맡진 못했다는 점이 그러했다.
‘제대로 된 에이전시라면 할 일이 좀 더 많았을 거야.’
여기서 JH 디자인의 한계가 드러났다.
규모가 받쳐주는 디자인 에이전시라면, 제품의 마케팅 솔루션부터 섭외까지 할 일이 많았다.
우리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업체 규모가 영세하고, 또 인프라도 모자라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건 지금의 우리다.
미래엔 달라지리라.
언젠가는 브랜딩 전체를 맡을 날도 올 터.
‘그것도 내 주도로.’
지금은 목표에 한발 다가갔다.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 달.
나는 박태수 부장이 말한 ‘선물’이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
뒤늦게 사무실에 출근한 어느 날.
나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 뭐가 많네요.”
“응. 많다.”
한설 선배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의 앞으로는 상자가 무려 네 개나 쌓여 있었다.
[넥타르에서 귀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to. JH 디자인.]
우리가 한정판으로 리패키징한 천마향이 담긴 상자였다.
한 박스당 12개만 들었다고 쳐도 48개.
양이 많아도 좀 너무 많았다.
‘이거 그래도 비싼 술 아닌가? 대학생들 마시라고 보낸 거 맞아?’
머리가 순간 휘청했다.
전통주의 가격대가 양주보다 상대적으로 낮게 형성된다고는 하나, 그래도 천마향은 병당 삼만 원에 가까운 술.
대학생이 마시기에는 좀 비쌌다.
제조사에서 보냈으니 원가만 들었다 치더라도 저렴할 리가 없지.
그걸 네 상자나 보내다니.
“이걸 어떻게 처분하지?”
한설 선배의 말에 규태가 답했다.
“마셔······ 서요?”
“규태가 술을 잘 마셨던가?”
“크흠. 제가 술은 좀 마십니다.”
규태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가영이가 옆에서 혀를 찼다.
“저거 쌩 거짓말이에요. 쟤 맥주 두 캔이면 뻗어요.”
“······.”
그녀의 한 마디에 규태가 침묵하는 사이 나는 슬쩍 물었다.
“너희 언제 술 마셨냐.”
“과 행사에서 마셨지. 너는 안 왔지만.”
그렇구나.
내가 과 행사 참여를 거의 안 해서 몰랐네.
아무튼, 당장 문제는 우리가 술을 잘 못 마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안 마시고. 규태는 못 마시고.’
우리 둘은 물론이고 나머지도 사정은 같았다.
한설 선배는 음주가 시간 낭비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멀리했다.
가영이도 마찬가지.
지훈 선배가 그나마 마시는 편이었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동민아. 너랑 내가 마시면 되겠다.”
“저랑요?”
“음. 술은 일찍 배울수록 좋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한설 선배가 지훈 선배를 째려보며 말했다.
“오빠, 애한테 술 권유하지 마요. 얘 입시생이에요. 오빠가 공부 가르치면 그만큼 책임감도 가져야죠.”
실제로 최근에는 지훈 선배가 동민이의 공부를 봐 주고 있었다.
일이 없을 때는 거의 개인과외 수준으로.
그가 썩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아.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잖아.”
“농담으로 안 들렸는데요?”
“······ 재하야. 네가 한마디만 해 줘라.”
치사하다.
여기서 나한테 과녁을 돌리다니.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제 생각에도 설이 누나 말이 맞아요.”
“······ 세상에 내 편이 한 명도 없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지훈 선배보다는 한설 선배의 후환이 조금 더 무섭다.
“딱히 제가 누구 편드는 건 아니고요, 동민이가 술 냄새 풍기면 보육원에서 알바 못 하게 할까 봐 그래요.”
그렇게 일말의 변명을 하는 순간이었다.
똑똑.
사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문을 열자, 밖에는 상대적으로 젊은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 얼굴이 낯익었다.
“내가 제대로 온 게 맞나 보네.”
그가 사람 좋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좀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선배님?”
*
사무실에 갑자기 방문한 3학년 선배, 권용빈 학생회장이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소문만 들었는데, 사실이라니 진짜 믿기질 않는다.”
“저희도 선배님이 갑자기 찾아오신 게 믿기질 않네요.”
“그런가?”
“저희 이렇게 대화 나누는 게 처음이잖아요.”
그렇다.
권용빈 선배는 과 생활에 집중해서 학생회장까지 단 반면, 나는 반대로 과 생활과 우주만큼 떨어진 학생이었다.
오죽하면 1학기 이후에는 MT에 참석조차 안 할 정도.
당연히 그와 나는 같은 과임에도 서로 개와 소, 혹은 닭 보듯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가 여기에 찾아온 이유라면 대강 알 것도 같았다.
“혹시, 학교 축제 때문에 오신 건가요?”
곧 있을 한예원 대동제에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응. 맞아.”
권용빈 선배는 바로 수긍했다.
보통 한예원 축제는 실질적으로 2학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하는데, 축제준비위원회를 꾸리려는 참에 나를 포섭하려고 온 것.
“위원회라면 혹시 어떤 일인가요?”
“그게 말이지. 이번 대동제에 우리 시디과는 주점을 열려고 하는데, 가게 인테리어 맡아줄 적임자를 찾다가 네가 이런 일을 잘한다는 추천이 있어서 찾아왔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방면에서 우리보다 잘 아는 학생은, 시디과 1학년부터 4학년 전체를 통틀어서도 없으리라.
왜냐.
우리는 병아리일지언정 프로니까.
“너희가 또 학교 앞에 카페도 담당했다며. 거기 장사도 잘 풀려서 막 프랜차이즈도 됐다고 하고.”
헤븐즈 도어 이야기였다.
나는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잠깐만 고민 좀 해 볼게요.”
이야기를 듣자 하니, 당장 분위기 타서 결정할 사안은 아니었다.
학부생 행사치고는 꽤 본격적인 일.
그렇다고는 하나, 사실 도와주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대동제 주점 따위, 헤븐즈 도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다만.
할 줄 아는 것과 하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왜.
옛날에 어느 무정부주의 사회운동가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잘하는 일은 공짜로 해 주면 안 되지.]명언이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인간관계는 뭐든 시작이 중요하다.
한 번 공짜로 부려먹으면 앞으로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계속 부려 먹힐 터.
바라는 게 있다면 적합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설령 내가 같은 과라고 해도 말이지.’
좋아.
단호하게 끊는다.
나는 사장으로서 결심을 다지고 입을 열었다.
“도와드리려면 도와줄 수는 있어요.”
“오. 고맙다.”
“그런데, 공짜로는 안 돼요.”
“음. 그래?”
권용빈 선배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는데, 내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정식으로 사업을 하는 사업체예요. 그리고 여기서 저랑 가영이, 그리고 규태를 제외하면 전부 다른 과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저희한테 일을 맡기시려면 그만한 보수가 필요해요.”
“음······.”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내 얼굴을 봐서 어떻게 안 될까?”
“죄송합니다.”
훈훈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식었다.
권용빈 선배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를 한참.
툭 던지듯 말했다.
“주점 수익의 40% 어때.”
“환영합니다.”
“······.”
내 말에 그가 말문이 막힌 듯 눈만 깜빡거렸다.
“어째 대답이 너무 빠르다?”
“그게 프로니까요.”
잘하는 일은 공짜로 해 주면 안 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공짜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된다는 말이다.
“아, 그런데.”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혹시 저희가 가져가는 수익을 50%로 올리면 안 될까요?”
“······ 야!”
권용빈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날강도 심보 아냐?”
“저도 그냥 그러는 건 아니고요.”
나는 손가락으로 사무실 구석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흉악한 크기의 무언가가 있었다.
천마향 탑(塔)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서로 돈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몇십 분 뒤.
권용빈 선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너 진짜 2학년 맞냐?”
그의 옆에서 규태가 중얼거렸다.
“저거 쌩 사기꾼이라니까요.”
“조용히 해라. 박규태.”
“넵.”
< 너 진짜 2학년 맞냐 > 끝
ⓒ 이한이™
< 축제를 준비하시오(4점) >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있다.
뭐가 안 풀린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안 풀린다.
‘애인에게 차이고, 회사에서 잘리고, 대출이 밀리고.’
악재가 겹친다.
이 세상이 내가 망하기를 바라는 건가 싶다.
하지만.
그 반대 또한 분명 존재한다.
풀린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뭐가 막 된다.
이번 생은 그런 삶인 듯했다.
‘어디 되나 안 되나 해 보자.’
나는 심호흡을 다지고 박태수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찰칵.
“안녕하세요.”
[아, 사장님.]수화기 너머의 박태수 부장이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선물은 잘 받으셨나요?]“네.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긴 놀랐지.
전화를 걸고 싶어졌을 정도로.
[다행입니다. 원래는 이게 말이 많았거든요. 기왕 선물을 보낼 거라면, 차라리 다른 걸 보내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면서요. 하지만 원래 대학 생활이라는 게 술이 함께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어느덧 친근해진 그가 이런저런 말을 털어놓기를 한참.
[이것 좀 봐. 어쩌다 보니까 너무 제 말만 했네요. 그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그게요. 저 다름이 아니라.”
나는 그에게 이번 축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모든 설명을 들은 박태수 부장은 살짝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해 볼 생각이 있냔 말입니까?]“네. 일종의 마케팅 같은 겁니다.”
[음······.]그는 딱 확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어물거리는 사이, 나는 설득을 이어나갔다.
“요즘 사람들은 전통주가 맛이 없어서 안 마신다기보다는, 있는 줄을 모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번 우리 식구들처럼 말이다.
나는 전통주에 더 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점.
남들과 똑같이 소주와 맥주만 취급하는 것보다는, 좀 더 다양한 전통주를 판매해 보는 게 어떨까.
나아가, 대동제 기간에 넥타르의 전통주를 판매하는 주점을 세워 보는 건 어떨까.
이게 내 생각이었다.
“이번 축제는 젊은 20대를 수요층으로 끌어들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내 설명을 들은 박태수 부장은 말을 삼가듯 말했다.
[······ 이건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 혼자서 결정하기에는 조금 일이 커진 감이 있어서 말입니다.]“죄송합니다만, 혹시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까요?”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연락을 드리겠습니다.]“네.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었다.
우선 이쪽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운에 기댈 뿐.
그렇게 다음날.
나는 기대했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뭐가 잘 된다.
*
며칠 뒤.
나는 주지훈 선배를 데리고 건축과 학생회장 김강한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김강한.
주지훈 선배의 동기로서, 건축과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아, 네가 그 재하구나.”
그가 나를 보고는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유능하다고.”
“부끄럽네요.”
“건축과로 편입하지 않을래?”
“······.”
왜 건축과 사람들은 나만 보면 이 말부터 꺼내고 보는 걸까.
혹시 자기들 사이에서 유행하나.
잘 모르겠다.
“제가 건축과에 편입하면 죽는 병이 있어서요.”
나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했다.
“그 오늘 뵙자고 한 일 말인데요.”
“음. 무슨 일인데?”
내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
그건 바로.
“축제 때 지훈 선배님을 저희 시디과에 데려가서 일 좀 시키고 싶습니다.”
지훈 선배를 우리 주점에 도우미로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사실, 굳이 건축과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여기가 무슨 고등학교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의적인 문제를 저버릴 수 없기에 찾아온 것.
‘원래 축제 때는 자기 과부터 돕는 게 상식이지.’
지훈 선배는 건축과니까 건축과를 돕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우리 과에 데려올 생각이었다.
왜냐.
주점이니까.
‘직원 중에 잘생긴 사람 한 명만 있어도 분위기가 확 바뀌지.’
이 부분이 중요했다.
잘생긴 사람은 돈이 된다.
더군다나 지훈 선배는 지인이 많다.
인맥은 곧 매출로 이어진다.
내 설명을 들은 김강한 선배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지훈이 너, 우리 과는 안 돕게?”
“당연하지.”
주지훈은 뭐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라면 월급 주는 사람 따라가지. 동전 한 푼 안 주고 착취하는 사람을 따라가겠냐.”
“······.”
강한 선배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훈이 형한테 월급을 줬었나?’
아니다.
JH 디자인에는 근본적으로 월급 시스템이 없었다.
아직은 일한 만큼 벌어가는 구조.
그런데 지금 지훈 선배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이 인간, 일하기 싫구나.’
건축과에서 축제 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다.
2층 주점.
건축과 전통인데, 철골 구조물을 지어서 그 위에 주점을 차릴 거라고 했다.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개고생이다.
이른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려야 할 터.
‘그러느니 차라리 다른 과에서 일손 돕는 게 만만하지.’
지훈 선배는 그게 싫어서 도망치는 게 아닐까.
물론 내 짐작에 불과했다.
“야! 주지훈!”
강한 선배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빠지면 과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냐. 너 따르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후배가 부탁하는 걸 어떡해.”
“우리 과 후배들은 네 후배도 아니야?”
“걔들이 나한테 월급 주는 후배는 아니잖아.”
“······.”
놀랍다.
똥고집이 장난 아니다.
이 양반, 그동안은 한설 선배 옆이라서 몰랐는데 은근히 고집이 세다.
“으, 나는 모르겠다.”
강한 선배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애들이 뒤에서 너 엄청 씹을걸? 나 거기까지는 네 편 못 들어줘.”
일이 쉽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렇게 안 풀릴 것도 짐작했다.
그래서 대처법도 준비했다.
“저, 선배님.”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저도 그냥 부탁드리는 건 아니고, 나름대로 성의를 준비해 왔습니다.”
“성의?”
“지훈이 형.”
내 말에 지훈 선배는 밀고 왔던 카트에서 상자를 내렸다.
그 안에는 술병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천마향이었다.
그것을 본 강한 선배가 물었다.
“술?”
“네. 며칠 전에 넥타르에서 발매한 고급 전통주예요.”
“그걸 왜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어?”
“선물 받았어요.”
“어디에서?”
“회사에서요.”
“회사에서 선물을 보냈다고?”
그가 질문하는데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 이거 저희가 외주 받아서 디자인했거든요.”
“······.”
강한 선배는 말없이 있다가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정신이 좀 어지러워서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술 한 상자 주는 대신에 지훈이를 데려가겠다?”
“아뇨.”
아직 끝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더 있습니다.”
“그게 뭔데?”
“저희가 넥타르 측 부장님이랑 협상해서 따로 준비한 게 있는데요.”
나는 그에게 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축제에 넥타르에서 음료 전반을 할인가에 공급하기로 한 것.
그것도 거의 이윤을 남기지 않는 수준의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건축과에서도 저를 통해서 주문하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을 거예요.”
내 설명을 들은 강한 선배는 다시 한번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건수를 네가 따왔다고? 어디 공동구매 사이트 같은 게 아니라?”
“이 술병 디자인한 게 계기가 돼서 그쪽 부장님이랑 연락을 주고받게 됐어요. 아무튼, 그래서 어때요? 이만하면 지훈이 형이랑 교환할 만하지 않아요?”
“으음.”
강한 선배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 어떻게 과 애들한테 둘러댈 핑계는 되겠네.”
사실상의 허락이었다.
지훈 선배가 돈 벌려고 팔려나간 셈 치자는 것.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양손으로 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저 말 나온 김에 여쭙는 건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건축과에서 저희 과도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도와줘? 너네도 뭐 건물 세우게?”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비슷해요. 건축과만큼은 아니고, 그냥 조금 큰 텐트 하나 세우려고요.”
“음, 이건 과 애들한테 이야기를 나눠봐야 알 것 같은데, 딱 될 거라고 말해주긴 어렵겠다.”
다소 회의적인 뉘앙스였다.
아마도 돌아가서 과 사람들의 다수결로 부결됐다고 둘러댈 생각 아닐까.
‘어림도 없지.’
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럼 저도 넥타르에 이야기를 더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
“······.”
그 말에 강한 선배가 눈을 크게 뜨더니, 짧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사실 처음부터 건축과의 협조를 받을 생각으로 왔다.
이게 본론이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큰 건수를 들이밀면 좀 어색하지.
그래서 당근부터 내밀었다.
줬다 뺏어야 더 간절하기 때문.
순서의 문제였다.
“으······ 잠깐만.”
강한 선배는 쉬이 거절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지훈 선배를 내주는 건 도리의 문제지만, 주류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건 실리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학생회장이면 이래저래 예산 문제로 머리가 복잡할 텐데, 술값에서 조금만 아껴도 숨통이 확 트이겠지. 여기서 좀 쟁여두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쓸 일이 많을 테고.’
저쪽 입장에서는 어느 쪽 판돈이 더 큰지 눈에 보이리라.
결국, 강한 선배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과 애들이 왜 너를 좋아하는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