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6)
두 번 사는 미대생 36화(36/93)
*
기본적인 바깥 일이 끝났다.
이제 시각디자인과 일을 처리하기 위해 헤븐즈 도어로 향하자, 그곳에는 한설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지훈이 오빠랑 같이 왔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건축과 설득하고 왔죠.”
“건축과? 걔들은 왜?”
“지훈이 형 때문에요.”
나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건축과 학생이 시디과 도우러 간다고 되게 싫어하던데요? 누나는 조소과에서 안 그랬어요?”
“글쎄?”
한설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지들이 싫으면 뭐 어쩔 건데?”
“······.”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선배는 이런 사람이었지.’
인간관계에 여기저기 얽매이는 지훈 선배와는 달랐다.
애초에 과 생활을 멀리하니, 볼 눈치도 없는 것.
좋게 말하면 자유인.
나쁘게 말하면 맘대로 논다.
‘그래도 우리 편에서 맘대로 놀아서 다행이다.’
아무튼,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다 모여 있네? 미안하다. 회의 때문에 좀 늦었다.”
한발 늦게 도착한 권용빈 선배가 헛기침을 내뱉고는 중얼거렸다.
“이번 주점 컨셉 말인데, 어때. 괜찮은 아이디어는 생각해 왔어?”
“물론이죠.”
지난번에 상의를 마친 뒤로 고민 많이 했다.
그렇게 내가 준비한 게 이것.
사락.
나는 정리해 온 아이디어 노트를 앞으로 밀며 말했다.
“70년대 컨셉으로 주점을 차려볼까 해요.”
“70년대?”
“네. 좀 옛날 복고풍으로요.”
이게 내가 생각한 디자인이었다.
70년대 스타일 복고풍 주점.
지금 시대에는 흔치 않다만, 미래에는 꽤 잘나가는 사업 아이템이 되었다.
‘주요 상권이라면 어디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지.’
가게 곳곳에서 낡은 간판과 촌스러운 영화 포스터가 돋보이고, 메뉴판부터 벽에 가득한 낙서에서는 낡은 감성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확인한 권용빈 선배는 다소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문가 느낌이 확 든다. 괜히 프로가 아니네.”
권용빈 선배는 내 디자인에 감탄하다가도, 조금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이거 디자인은 그럴듯한데, 건물 만들기가 쉽지 않겠다.”
그렇다.
얼핏 보기에도 만들기 어려워 보이는 구조물이었다.
보통 대학 축제하면 텐트를 대여해서 설치하고는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아예 프레임부터 직접 설계할 예정.
물론, 내가 직접 뭘 해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 건축과에 도와달라고 했어요.”
“건축과?”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걔들이 도와준대?”
“네.”
“왜?”
“몰라요. 막 도와주려고 하던데요.”
“걔들 자선 사업하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직원용 유니폼도 아예 70년대풍으로 꾸며볼 생각이었다.
이건 아예 규태한테 맡기기로 했다.
“괜찮을까?”
“얘가 좀 실없어 보여도, 의류 디자인 공모전에서 우수상도 탄 적 있어요.”
“우수상?”
내 말에 권용빈 선배는 의심의 눈초리로 규태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규태는 움찔하더니 말했다.
“왜요.”
“······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후로도 몇 가지 사안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하지만, 말이 회의지 일방적인 제안과 컨펌의 반복에 가까웠다.
그 끝에 권용빈 선배는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의가 이렇게 생산적으로 느껴진 건 처음이다.”
그야 완벽하게 준비해 왔으니까 당연하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손발이 잘 맞아서 그런가 봐요.”
“그럼 인테리어 소품 제작은 그쪽에서 다 맡는 건가?”
“네.”
“어려운 일은 다 맡기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뭘요. 돈 받는 만큼 일하는 거죠.”
내 대답에 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렇네. 그럼 각자 할 일이나 열심히 해 보자.”
권용빈 선배와의 회의도 여기서 끝났다.
‘이제는 정말 실행에 옮길 일만 남았네.’
일정이 바쁘다.
빼곡하게 들어찬 달력이 충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 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연락마저 한 통 받게 되었다.
“한예원에서 공연 예정이라고요?”
[네. 섭외 이야기가 들어와서 겸사겸사 연락드렸습니다.]송주의 연락이었다.
한예원 대동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예정인데, 미술을 도와달라는 연락.
바쁘지만 이걸 어쩌겠는가.
당연히 승낙했다.
전화를 끊을 무렵, 나는 생각했다
‘일복 제대로 터졌네.’
< 축제를 준비하시오(4점) > 끝
ⓒ 이한이™
< 수확 >
축제 시작까지 불과 며칠을 남긴 무렵.
본격적인 마감이 찾아오며 식구들 모두 유례없이 분주해졌다.
나는 사무실로 들어서며 윤가영에게 물었다.
“입구 쪽에 붙일 영화 포스터 준비 다 됐어?”
“저쪽 책상에 말리고 있어.”
그녀는 주점에 붙일 포스터를 포함한 그림 전반을 담당했다.
70년대 컨셉으로 가게 내외로 붙일 포스터만 10장이 넘었는데, 전부 그녀가 직접 손으로 그렸다.
결과물은 생각보다 좋았다.
“음.”
나는 그녀가 미리 작업해 둔 포스터 한 장을 천천히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잘 그린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를 70년대풍으로 재해석한 패러디 포스터였는데, 그녀가 센스 있게 소화해 준 덕분에 느낌이 살았다.
‘적당히 촌스럽고 투박하니까 오히려 느낌이 사네.’
여유가 느껴졌다.
다만, 모든 작업물이 순조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막상 그려놓고 보면 초기 기획안과는 달리 어색해진 것들도 꽤 됐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저기 가영아. 이거 어제 보여줬던 거랑 조금 다르지 않나?”
“아, 어제 그거는 버리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그렸어.”
“왜?”
“왜긴. 막상 채색해놓고 보니까 어색하더라. 새벽부터 부랴부랴 그렸지.”
그녀의 손이 굉장히 빨랐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거의 밤을 새워 가며 작업에 몰두했다.
“안 피곤해?”
“며칠 밤샘 좀 했다고 피곤하면 만화는 못 그리지.”
만화가를 준비해서 그런지, 자체 열정페이 탑재는 기본이다.
기본적으로 일을 즐기는 내 눈에도 그녀의 작업량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이쪽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
나는 다음으로 규태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니폼은 좀 어때?”
“도매상 찾아가서 수소문해 봤는데, 너무 옛날 디자인이라서 그런지 재고가 없더라······.”
“큰일 났네. 그럼 우린 어쩌냐.”
“어쩌겠냐.”
규태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래서 직접 만들고 있잖아.”
그렇지.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는 70년대 스타일에 맞게 종업원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는데, 없는 건 없는 데로 수선해가며 직접 만들었다.
‘적당히 쉽게 갈 방법도 있을 텐데, 성실하네.’
규태가 이래저래 엄살을 부릴 때가 많아도, 기본적으로 자기 할 일은 책임감 있게 한다.
나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난 다른 곳 좀 둘러보고 올게.”
“다녀와라.”
나는 사무실을 나와, 이번에는 학교 캠퍼스 호수 앞으로 이동했다.
간이주점이 설치될 장소였다.
그곳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모여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건축과 사람들.
그리고 지훈 선배였다.
그래.
그가 우리 주점용 천막 제작을 맡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어쨌든 일은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일하기 싫다고 건축과에서 도망쳐서 나왔는데, 결국에는 건축과랑 일하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미리 챙겨온 음료수를 주위에 돌렸다.
“마실 거 드세요.”
“오. 재하 고맙다. 왜 왔어.”
“일 좀 도우려고요.”
“이야. 시디과 후배가 이러는데 우리 후배들은 뭐하냐.”
“몰랐냐? 건축과에는 원래 후배가 없어. 젊은 경쟁자가 있을 뿐이지.”
그들이 낄낄 웃는데, 우리 주점은 이제 막 프레임을 올린 단계임에도 꽤 그럴듯했다.
‘기본 스케일 자체가 크네.’
덕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른 동기들의 이목을 끌었다.
원래 고만고만한 놈들 사이에서는 조금만 튀어도 확 튀는 법이라는데, 우리 주점이 딱 그 꼴이었다.
‘역시 경쟁자들보다 아주 조금 더 잘하는 게 최고라니까.’
실제로 간혹 지나가는 타과 학생들이 놀라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얘들 뭐 하나?”
“시디과 주점 짓는다던데.”
“우리 과는 천막 하나 치고 말 것 같던데, 왜 우리 기죽게 자기들만 열심히 하냐.”
“상도덕이 없네.”
“시디과니까 이렇게 눈치 없지. 정치학과였으면 분위기 보고 묻어갔다.”
“근데 우리 학교에는 정치학과 없잖아.”
“맞네.”
몹시 긍정적인 반응이다.
‘그래. 더 놀라라. 나중에는 더 놀랄 테니.’
물론 건물에 놀라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이유로 어이없어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저기 쟤 건축과 아냐?”
“건축과가 왜 시디과 주점을 짓고 있냐.”
“몰라. 할 일 없나 보지.”
한설 선배는 소품 조달에 바쁜지 모습조차 안 보였는데, 결국 모두가 공평하게 바쁜 셈이었다.
그래도, 바쁘기는 내가 제일 바빴다.
“그럼 전 외근 좀 다녀올게요.”
“어디에?”
“송주랑 미팅하러 가요.”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옆에서 왁자지껄하던 건축과 선배가 싹 굳더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송주? 무슨 송주?”
“가수요.”
“잠깐. 그 졸업식 노래 부른 송주 말하는 거 맞지?”
“넵.”
내 대답에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물었다.
“네가 그 송주를 만나러 간다고?”
믿기 어려운 모양.
나는 뭐라 설명해 봐야 큰 의미는 없겠다는 생각에 대충 둘러댔다.
“우리 학교 축제에 무대 하러 오잖아요. 그거 때문에 가는 거예요.”
“사인 좀 받아와라.”
“내 것도.”
“일하는 거 봐서요.”
*
며칠 뒤 모든 준비는 끝날 무렵.
수요일 늦은 점심 무렵부터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됐다.
[그 시절 술집]모든 준비가 끝난 주점을 둘러보자, 촌스러운 분위기로 만든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더럽게 촌스럽네.’
내가 의도했던 그 느낌이 그대로다.
주점 천막도, 내부 인테리어도, 종업원들 복장도 그럴듯하게 갖춰졌다.
이만하면 다른 과를 압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아니, 실제로 주변 주점과 비교하면 우리 과만 심각하게 눈에 띄었다.
다른 과에서는 기껏 해 봤자 빌려온 천막에 플라스틱 의자를 깔아둔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말 그대로 수준 차이가 극심했다.
‘학부생 수준에서는 이만하면 최상이지.’
이게 도토리 키재기 효과였다.
고만고만한 도토리들 사이에서는, 조금만 큰 도토리가 있어도 눈에 확 띈다.
이 속담이 이 뜻이 아니라고?
아님 말고.
“진짜 수준이 다르다.”
“나 2학년 때는 뭐했지.”
뒤늦게 구경하러 온 시각디자인과 동기들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쟤만 혼자서 인생 2회차 뛰나?”
“······.”
잠깐 움찔했다.
날카롭네.
그렇게 영업을 개시하고 불과 한 시간.
어느 커플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왜 여기만 이렇게 사람이 많아?”
“그러게. 거의 꽉 찼네. 다른 곳은 안 이러던데.”
그렇다.
우리 과 주점만 이른 저녁부터 만석이었다.
영업을 시작하고 불과 한 시간.
웨이팅이 필수가 되었다.
“여기 가게 예쁘다.”
“좀 옛날 느낌인데. 저거 다 직접 그린 건가?”
“그림만 옛날 그림이지 요즘 영화 아냐?”
손님들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곧 70년대풍 유니폼을 입은 동기 한 명이 가서는 말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자리가 없는데, 괜찮으시면 명부 작성하고 기다려 주시겠어요?”
“얼마나 걸릴까요?”
“대기하는 팀이 많아서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한 시간이나요?”
커플 중 남자는 깜짝 놀라서는 여자에게 말했다.
“한 시간은 좀 긴데, 그냥 다른 곳 가자.”
“······ 아냐. 난 여기가 좋아 보여.”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까짓거 다른 곳 둘러보면서 기다리지 뭐.”
이 주점에 아예 꽂힌 눈치가 인상적이었다.
압도적이다.
물론, 내세울 게 가게 디자인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 오빠 누구야?”
“이따가 주문할 때 번호 물어볼까.”
“딱 봐도 여자친구 있을 것 같은데.”
지훈 선배가 기대 이상으로 잘 먹혔다.
그에게 어떻게든 말을 한 번 붙여보겠다는 듯 주문이 들어왔다.
이는 곳 매출 상승을 의미했다.
‘생각보다 훨씬 옷발을 잘 받네.’
규태가 의도한 70년대 복장이 다른 종업원들에게는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시대상에 안 맞으면 촌스러우니까.
하지만, 지훈 선배는 예외였다.
그냥 어울린다.
대충 쓰레기장에서 누더기를 주워와서 입혀도 어울리지 않을까.
그리고 또.
전통주가 잘 팔렸다.
“여기 천마향 두 병에 시인예주 하나요.”
“잠시만요.”
주문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메뉴판에는 일반적인 소주와 맥주도 함께 준비해 뒀는데, 실제로 판매되는 주류 중에서는 과반수가 전통주였다.
‘역시 있으면 마신다니까.’
이건 내 나름의 도박이었는데 어떻게 통한 모양.
생각보다 훨씬 잘 팔렸다.
전통주를 자신 있게 밀어붙이긴 했다만 망할까 봐 긴장했는데, 이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가격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비록 저렴한 가격에 업어왔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기본 체급이 있다 보니 가격대 자체가 좀 높았다.
하지만.
정작 손님들은 가격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거 맛있다.”
“그러게. 이름이 천마향? 술을 마시는데 술이 깨는 기분이네.”
“마트 가면 파나?”
“저기 포장된 것도 그냥 판다는데.”
“한 병만 포장해 가자.”
어차피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축젯날 기분 내러 온 사람들이었다.
고급술을 마시며 일반 소주보다 얼마 더 비싸다고 불평할 사람은 흔치 않았다.
물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텐가.
다른 가게로 가면 그만인 것을.
‘역시 남들보다 쪼금 더 잘난 게 최고야.’
손님들은 계속해서 만석이었고, 주문도 쉴새 없이 몰려왔다.
덕분에 손님 접대와 요리를 맡은 시각디자인과 학생들만 혼이 나간 눈치였다.
“바쁘다 바빠.”
“뭐 이렇게 손님이 많냐. 나 알바 하는 고깃집도 이것보다는 손님 적은데.”
놀란 건 권용빈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매출 엄청 나오겠다.”
“나와야죠. 이렇게 노력했는데.”
나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한 번 치고는 물었다.
“수익 50% 주시기로 했던 거 기억하시죠?”
“······.”
그가 우두커니 있다가 물었다.
“30%만 받으면 안 될까?”
“진짜로요?”
“아니, 농담이야.”
진심 같았는데.
*
손님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도 잠시.
정신없이 일손을 돕다 보니, 어느덧 슬슬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쯤 시계를 보자 저녁 10시가 다 되었다.
기다렸던 시간이었다.
“저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나는 급히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권용빈 선배가 물었다.
“어디 가게?”
“저 그 무대에 일이 좀 있어서요.”
“무대?”
“송주요.”
그렇게 가게에서 나와 부지런히 걷기를 몇 분.
곧 사람들이 잔뜩 모인 무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송주가 서기로 한 무대였다.
‘사람 엄청 많네.’
누가 보면 락 페스티벌이라도 온 건가 싶을 어마어마한 인파.
역시 인기 가수다웠다.
“실례합니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무대 뒤로 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미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하 이제 왔어?”
JH 디자인 식구들이었다.
못 온 한 사람은 아직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지훈이 형.
나는 규태에게 슬쩍 물었다.
“나 늦게 온 거 아니지?”
“우리가 빨리 왔지.”
그가 큭큭 웃는데, 곧 어딘가에서 송주가 걸어오더니 물었다.
“준비됐어요?”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됐냐는 말이었다.
나는 이내 심호흡을 다잡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요.”
“······.”
송주는 어이없다는 듯 가만히 있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 큰일인데. 무대라는 게 여러 번 서본 저도 엄청 긴장되거든요.”
“어떻게든 되겠죠.”
“네. 너무 심하게 긴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런 마음가짐이 낫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함께 무대에 선다.
송주와 JH 디자인의 콜라보 무대라고나 할까.
나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를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 수확 > 끝
ⓒ 이한이™
< 부자 이야기 >
송주와 JH 디자인의 콜라보.
거기에서 우리가 맡은 일은 간단했다.
드로잉 쇼.
말 그대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송주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는 무대 뒤에서 그림을 그린다.’
단순히 좋은 일감을 넘어, 아주 좋은 일감이었다.
한예원 학생들에게 JH 디자인의 존재를 대대적으로 알릴 기회이기 때문.
‘학부생 신분으로 송주와 콜라보를 가진다면, 유망한 스타트업이란 이미지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어떻게 이런 일이 성사된 걸까.
처음 발단은 이러했다.
[혹시, 함께 무대 위에 올라보실 생각 있으세요?]송주 측에서 먼저 제안을 넣었다.
원래는 그림만 몇 점 제공하는 방향으로 말이 나온 참이었는데, 송주가 말을 바꿨다.
어차피 그릴 그림이라면, 공연 중에 그리는 게 그럴듯하지 않겠냐면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 불가능한 일 또한 아니었다.
‘이미 지금껏 수많은 벽화를 그려왔다. 경험치 자체는 충분해.’
그리고, 나도 드로잉 쇼를 한 번쯤 해보고 싶기는 했었다.
애슐리처럼 말이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반쯤은 계산으로, 반쯤은 치기로.
그렇게 무대 위에 오른 순간, 나는 조금 후회할 뻔했다.
‘······ 이렇게 보니까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무대 너머로 보이는 천 명은 거뜬히 넘기는 관중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우와아아아!”
환호 소리에 정신이 아찔하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 같다.
“송주다!”
“오빠!”
“머리 작다!”
송주의 등장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함께 등장한 우리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 또한 있었다.
‘쟤는 누구지?’
대충 이런 생각이 담긴 듯한 시선.
숫자가 숫자다 보니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벽화 작업을 하며 사람 시선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무대 위는 또 별세계였다.
‘나는 그렇다 쳐도 다른 애들은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규태와 가영이, 그리고 한설 선배를 바라봤다.
규태는 시퍼렇게 바란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으······.”
“사람 개 많다.”
가영이는 별생각이 없는 듯했으며, 한설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사람이라도 제정신이라 다행이다.
그렇게 서 있으려니 곧 무대에 인트로가 깔리기 시작했다.
“자기소개는 지루하겠죠? 그냥 노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송주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 말인즉슨 우리 차례가 왔다는 말이었다.
“시작하죠.”
“응.”
무대 뒷면에는 성인 크기는 거뜬히 될 법한 칠판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또, 그 앞에는 분필이 몇 자루 놓여 있었다.
우리는 저마다 분필을 한 자루씩 집어 들고는, 이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사삭.
타닥.
분필을 놀리고 있으려니 그와 동시에 송주의 노래 가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어렸던 시절 아버지가 해 주셨던 이야기. 부자가 되지 못해도 좋다. 정직하게 살아라. 성실하게 살아라.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며 살아라.]송주가 최근에 낸 신곡 [부자 이야기]였다.
부드러운 비트 아래로 송주의 랩이 담백하게 깔렸다.
3분은 넘고 4분은 안 되는 노래.
우리는 이 사이에 그림 한 장을 그려야 했다.
그리고.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미리 연습해 두었다.
‘지금이다.’
난 기다렸다는 듯 주인공을 그렸다.
그 바로 옆에 가영이가 주인공의 아버지를 그렸다.
둘이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그림.
우리 둘이 캐릭터로 선화를 그리는 사이, 규태와 한설 선배가 각각 디테일을 넣었다.
칠판 그림답게 단순하지만, 어딘가 정겨운 맛이 살았다.
‘좋아. 속도 자체는 충분하다.’
사무실에서 수차례 리허설을 가진 만큼, 속도 자체는 무난하게 나왔다.
적어도 송주의 곡에 늦어지지 않을 만큼은 되었다.
대강 그림의 윤곽이 잡힐 무렵, 송주의 노래는 첫 번째 코러스에 도착했다.
[교과서에 목매지 않아도 좋다. 많이 경험하고 배우거라. 힘들 때는 잠깐 쉬어도 좋단다.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란다.]감동적인 가사에 무대가 차분해진 느낌이 우리에게도 바로 느껴졌다.
‘이게 관객들과 함께 호흡한다는 느낌이구나.’
색다르다.
그쯤 [부자 이야기]도 2절로 넘어갔다.
1절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라면, 2절부터는 성인이 된 이후의 이야기.
우리도 그에 맞춰 한층 성장한 아들,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그리면서도 대충 그리는 느낌은 안 들게.’
그쯤 두 번째 코러스가 들려왔다.
[취업에 목매지 말아라. 서두르지 않아도 좋으니 하고 싶은 일을 찾거라.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이쯤 되었을 때 관객들의 시선이 우리 그림 쪽으로 살짝 쏠렸다.
이게 드로잉 쇼의 매력이었다.
과정의 매력.
쇼가 진행될수록 힘이 강해진다.
‘송주의 노래와 더불어 완성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매력적이겠지.’
아마 내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그러리라.
‘원래 그림은 문외한이 봐야 더 재밌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봤을 때 드로잉 쇼는 암기력 자랑에 불과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애슐리 같은.
하지만, 대부분의 드로잉 쇼란 전공자에게 있어서 외워온 그림을 빠르게 그리는 묘기에 불과했다.
그래.
하지만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어떨까.
그들에게 드로잉 쇼는 마술이었다.
‘태권도 격파 시범처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는 기분이겠지.’
한예원에는 미대만 있는 게 아니다.
음악, 공연, 사진까지 범위는 넓고 넓다.
모두가 미술의 전문가는 아니다.
저들에게 우리의 그림은 송주의 노래만큼이나 놀라우리라.
‘자, 놀라라. 그리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라.’
이 드로잉 쇼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한예원에 우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프레젠테이션.
‘이미 우린 광고나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래도 홍보는 많이 할수록 좋지.’
아직 한예원에는 긁어갈 인재가 더 많다.
기회는 그 이상으로 많겠지.
그렇게 계속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으려니, 곧 송주의 세 번째 코러스가 끝났다.
[네 자식을 사랑하거라.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단다. 내가 널 사랑했듯, 너도 네 아이를 사랑하거라.]아이가 성장해서 다시 한 명의 부모가 된 이야기.
노래 제목 그대로 부자 이야기였다.
거기서 우리의 그림도 완결을 맞이했다.
“감사합니다!”
송주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자, 관중들 사이에서 우레와도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다.
실로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소리에 피부를 두들겨 맞는 것 같네.’
고막이 울리다 못해 심장이 울린다.
그 환호성이 멎을 무렵, 송주는 그제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소개합니다! 이번 무대를 도와주신 시각디자인과 JH 디자인 일동입니다. 마찬가지로 제 졸업식 뮤비의 미술을 도와주신 분들이기도 합니다.”
“우와아!”
관객들이 이번에는 우리에게 표적을 돌려 환호성을 질렀다.
민망하다.
규태를 보자, 규태는 딱딱하게 굳은 걸 넘어 목각인형이 된 듯했다.
‘이러면서도 그림 그릴 때는 잘도 그렸네.’
그쯤 송주가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안녕하세요. 시각디자인과 2학년 이재하라고 합니다. 좋은 그림을 보여드리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즐거운 감상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런데.
무대 앞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이! 재! 하!”
“이! 재! 하!”
“······.”
내 이름을 때창하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나 해서 보니, 곧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건축과 선배들이었다.
‘또 이 양반들이네.’
그들은 술에 취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래고래 내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우리 과 사람들도 가만히 있는데.’
나는 오묘한 기분에 잠긴 채 나머지 식구들에게 차례차례 마이크를 건넸다.
규태는 덜덜 떨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박, 박규태라고 합니다. 시디과 1학년, 아니 이제 2학년입니다. 감사합니다.”
“박! 규! 태!”
“박! 규! 태!”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 뒤에 환호가 잇따랐다.
가영이와 한설 선배 때도 마찬가지.
그렇게 간략한 자기소개가 끝날 무렵, 송주가 말했다.
“앞으로 제가 부를 곡이 네 곡 정도 남아 있는데요. 좀 짧죠? 저희 사장님께서 11시 전까지는 돌아오라고 시켜서 그래요.”
“우우.”
관객들 사이에서 아쉬움이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송주가 씨익 웃더니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디 사장님께서 까라면 까는 노예라도 됩니까? 아닙니다. 저는 접니다.”
“······!”
“내일 저 휴무거든요? 한 번 새벽까지 달려봅시다!”
“우와아아아!”
새벽까지 달리자.
콘서트의 왕자로 불릴 그다운 발언이었다.
라이브 한 번을 하더라도 밤샘은 기본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참. 오늘 제가 여기에 온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요. 사실 제가 여기 이재하 학생에게 큰 빚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큰 박수로 보답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끝에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 재! 하!”
“이! 재! 하!”
“······.”
이제는 건축과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연신 외쳐댔다.
내 이름으로 운동장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만 같은 광경 속에서,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개판이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송주도 반쯤 즐기는 표정이었다.
사람이 못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