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7)
두 번 사는 미대생 37화(37/93)
*
무대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저 멀리서 동이 틀 무렵에도 송주는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칠듯한 에너지.
끝에 가서는 관객들이 지쳐 떨어질 정도였다.
송주답다.
한편, 무대 사방에는 술에 취해서 잠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송주와 무대에서 함께했다.
‘이젠 더 그릴 것도 없네.’
무대를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릴 만한 건 전부 다 그렸다.
이후로는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아무거나 계속 그렸다.
칠판이 멀리서 보면 흰색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빼곡하게 가득 찼다.
‘밤새 이거 하나만 계속 그렸네.’
이 거대한 칠판들이 내게는 마치 훈장처럼 느껴졌다.
버틴 내가 자랑스럽다.
슬슬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송주가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외쳤다.
“마지막으로 한 곡만 더 하겠습니다!”
“······.”
앵콜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미묘한 환호성조차 없었다.
왜냐.
저 마지막 한 곡이 벌써 열 번은 더 반복되고 있었거든.
‘자기가 무슨 헬스 트레이너야?’
끝이 없는 도돌이표의 반복에 관객들조차 질려버렸다.
하지만 송주는 질리지 않는다.
그는 이후로도 무려 세 곡을 더 부른 뒤에야 떠나갔다.
“다시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 대동제 때도 뵙겠습니다!”
드디어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쯤 나도 슬쩍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무대 옆 의자에 앉아 쿨쿨 졸고 있는 식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자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사장이 퇴근을 안 하면 직원들은 퇴근을 못 한다. 뭐 그런 건가.’
대견하기는 하다.
나는 피식 웃고는 그들의 어깨를 흔들었다.
“규태야. 일어나. 너 입 돌아간다.”
“엄마······ 나 조금만 더 잘래······.”
“······.”
제정신이 아니기는 하네.
“난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인내심을 갖고 어깨를 흔들자, 규태는 곧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으음······ 지금 몇 시야.”
“새벽 다섯 시.”
“내가 그렇게 많이 잤어?”
“집에 가서 더 자.”
“그래야겠다.”
우리는 어차피 같은 집에 살고 있으니 같이 돌아갈 생각.
가영이와 한설 선배는 따로 돌아가려는데,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축제 아침에는 꼭 먹어야만 할 음식이 있지.’
나는 한설 선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장하고 갈래요?”
“······.”
이번에는 그녀도 부인하기 힘든지 중얼거렸다.
“그래. 밥 먹자.”
우리는 곧 단골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밥을 입에 넣는지 코로 넣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대충 먹은 뒤, 집에 들어가서는 바로 쓰러졌다.
어떻게 깨어났을 때는 이미 초저녁이었다.
‘푹 잤네.’
어지간히 피곤하기는 했나 보다.
그래도 푹 자서 몸이 가뿐해졌다.
‘슬슬 내일 할 일 준비해야지.’
대충 씻고 사무실로 향했을 무렵이었다.
그곳에는 예상외의 사람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 부자 이야기 > 끝
ⓒ 이한이™
< 족발집 >
사무실 안에 손님이 앉아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교수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종이 교수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
그가 JH 디자인 사무실에 방문해서는 지훈 선배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지?’
이렇게까지 예고 없이 찾아오다니.
솔직히 말해서 당황스럽다.
왜 오셨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고민하는 참인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나치다가 생각이 나서 들렀습니다만, 지훈 학생 덕분에 즐겁게 시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교수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지훈 선배가 그의 눈치를 보듯 헛기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뭐야. 교수님께서 네 칭찬 많이 하시더라. 요즘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하셔서 그거 말씀드리고 있었어.”
“아.”
정신이 반짝 깼다.
그래서 오셨구나.
문득 요즘 들어서는 이종이 교수와 연락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사무실을 구해 독립한 뒤로는, 강의 시간 외에는 아예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날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추천해 준 것도 이종이 교수님인데.’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그를 피했던 것 같아 작은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자주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저한테 전화를 주셨으면 제가 교수님 작업실로 직접 찾아가서 모셨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래저래 한창 바쁜 시기잖아요?”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결 마음이 편해진 듯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박태수 부장과 있었던 일도 잘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그 친구 앞에서는 어깨가 든든합니다.”
“아닙니다. 부장님께서 좋게 봐 주신 덕이었습니다.”
“축제에서도 크게 활약했다지요? 학생이 훌륭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으니, 담당 교수로서 자랑스러울 따름입니다.”
“······.”
민망하다.
이종이 교수는 나를 만날 때면 언제나 칭찬을 퍼부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러는가.
나는 작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전부 교수님 덕분입니다.”
“학생 덕분입니다.”
그렇게 몇 마디의 겸양을 나누기를 잠시.
이종이 교수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사실, 오늘은 학생에게 전할 말이 있어 겸사겸사 찾아왔습니다.”
역시 그렇군.
안 그래도 이유 없이 방문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짐작한 참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어떤 일인가요?”
“학생에게 좋은 일입니다.”
나한테 좋은 일이라.
그게 뭘까.
호기심이 발생한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최근 들어 정부에서 디자인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여기저기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정부 지원 사업.
이종이 교수의 말마따나 요즘 정부는 디자인계에 전폭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결과물이 눈에 보이다 보니,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좋은 것.
그런데.
이러한 사업에는 매번 작은 폐단이 일어나고 있었다.
‘취지가 그럴듯해도 선정 단계에서 날치기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지.’
그렇다.
사업이라면 지원 업체 중에 우수한 업체 하나를 골라내야 하는데, 애당초 디자인에 명확한 우열이라는 게 존재하겠는가.
그뿐이랴.
수혜자를 선정하는 공무원 중에 전문가가 얼마나 있겠는가.
세금은 원래 눈먼 돈이라 주워가는 사람이 임자라지만, 디자인 사업은 한술 더 뜨는 것으로 유명했다.
붙기만 하면 용돈이다.
만만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JH 디자인이 정부 사업을 멀리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무나 주워갈 수 있다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누구나 눈독을 들인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지.’
이게 중요했다.
‘이런 사업은 업체 하나 선정하는 심사에도 수백 개 기업이 달려들기 마련이야.’
지원한들 붙을 확률이 극악이었다.
더군다나 공무원들은 안정성에 목숨을 거는 부류.
아무리 돈을 막 뿌린다고는 하나, 이름 없는 업체에 뿌리지는 않았다.
아직 JH 디자인은 규모가 작다.
비록 요즘 들어 단기간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제대로 된 기업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했다.
‘돈 좀 벌리는 동아리 수준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정부 지원 사업은 포트폴리오가 쌓일 때까지는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그런 참에 이종이 교수가 먼저 언급한 것.
‘어쩌면 나한테 자리를 추천해 줄 생각으로 말씀하신 게 아닐까.’
나는 작은 기대감을 품으며 입을 열었다.
“요즘 벽화 마을이나 공공기관 로고, 기념품 공모전 같은 게 많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역시 학생은 보는 시야가 넓군요.”
“······.”
늘 생각하지만, 이 교수님. 언제나 칭찬할 타이밍만 기다리고 계신 것 같다.
아무튼, 그가 말을 이었다.
“마침 정부에서 최근 공공사업 관련해서 제게 자문을 구해 왔습니다.”
“자문이요?”
“예.”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상수도사업본부에서 수돗물 브랜드를 런칭할 계획인 모양입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벌써 그 시기야?’
기억났다.
서울 상수도사업본부에서 출시할 수돗물 브랜드.
가온수.
기존 불신으로 가득했던 한국 수돗물의 이미지를 한 번에 바꿔, 성공적인 브랜드 마케팅의 예시로 꼽히게 된 사업이었다.
그게 어느덧 조만간이었다.
“이 사업의 일부 종목이 중소기업 지원 사업으로 배정된 모양인데, 정부 측에서 제게 기업 추천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말씀은 설마······.”
“예.”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학생을 여기에 추천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작은 충격이 찾아왔다.
설마설마했는데, 그 설마가 사실이었다.
놀란 마음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단순히 학생이 제 제자라는 이유로 추천하는 건 아닙니다. 마침 저도 어느 업체를 추천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선정 조건이 다소 까다로웠거든요.”
“매출액이나 고용인원 제한이 있었나요?”
“예. 직원은 5명 이하에, 연간 매출액은 50억 미만이 조건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JH 디자인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더랍니다.”
요컨대, 회사가 작아서 얻어걸렸다는 말이었다.
“또 JH 디자인은 관련 업종으로 포트폴리오도 있지요.”
“넥타르 말씀이신가요?”
“예. 제 생각에 서류심사를 넣기만 한다면 통과 확률 자체는 꽤 높을 겁니다. 학생에게 용의가 있다면 제가 추천해 보겠습니다.”
긴말을 마친 이종이 교수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봤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사실.
해야 할 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교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나를 추천해 주시려고 하신다.’
그는 추천할 기업이 드물다고 했지만, 내 생각에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정부 사업이라면 노릴 기업이 한둘이 아닐 터.
그런데 업계 초짜에 불과한 우리에게 먼저 제안했다는 건, 그 이유가 뻔했다.
‘밀어주려고 하신다.’
고민할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나는 그의 눈을 직시하며 바로 말했다.
“해 보겠습니다.”
내 말에 그가 흐뭇하게 웃더니 말했다.
“좋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이종이 교수는 볼일을 마쳤다는 듯,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가까운 시일 내로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무조건 붙으리라는 확신은 없습니다만,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한대, 그 말에 기분이 오묘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상대를 자기 사람이라고 한 번 결정했다면, 그 뒤로는 한없이 퍼주는 그런 사람이.
나는 내가 그의 사람이 됐다는데 작은 감사를 느끼면서 말했다.
“저, 교수님.”
“예?”
“이번에는 죄송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제가 먼저 찾아뵙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내 말에 그는 흐뭇하게 웃더니 말했다.
“저야 언제든 좋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학생과도 한잔하고 싶군요.”
그렇게 그가 자연스레 사무실에서 떠나려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교수님의 등이 눈에 들어오는데, 어째서일까.
문득.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교수님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사람인가?’
이질감이 확 들었다.
저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내려보자면, 내 생각에는 아니었다.
이종이 교수는 자기 제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면서도, 자기가 찾아가면 그게 또 부담이 될까 우려할 정도로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에 그냥 찾아왔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나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최근 며칠간의 문자 수신 목록을 확인했다.
업무 이야기로 가득한 문자 수신함.
그 사이로 극히 짧은 문자 한 통이 다소곳이 있었다.
[이종이 교수님] [잘 지내고 있나요? 안부 인사차 연락 드립니다.]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 아.”
연락하셨네.
그냥 내가 바빠서 못 봤던 것이었다.
‘이걸 어쩌지?’
진실을 깨닫자, 그제야 엄청난 미안함이 몰려왔다.
만회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시선을 돌려 사무실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천마향 상자가 있었다.
그래.
아직 한 상자 남아 있었다.
건축과에 준 게 한 상자, 그리고 축제에 푼 게 두 상자.
그리고 우리 사무실에서 이따금 축하주로 쓰려고 남겨둔 한 상자였다.
“그럼 또 연락하겠습니다.”
이종이 교수가 사무실 문을 연 찰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예?”
내 말에 그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목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 아까 한잔하시자고 말씀하신 것 때문인데요. 지금 바로는 안 될까요?”
“······.”
“다름이 아니라 넥타르에서 선물 받은 술이 있는데, 교수님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마시고 싶어서······.”
대답이 없다.
어떻게 더 권유해야 하나 모르겠어 어물거리는 찰나였다.
“저야 좋습니다만.”
이종이 교수가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안주도 학생이 사는 건가요?”
“······!”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이 앞에 족발집이 기가 막힙니다.”
*
다음날.
나는 축제준비위원회 미팅에 참석했다.
이틀 동안 있었던 주점의 뒷정리 및 결과보고를 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나는 주변인들의 눈치를 슬쩍 봤다.
‘사과해야겠지.’
어제 나는 주점 일을 펑크냈다.
이종이 교수님과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대타가 금방 구해져서 별문제는 없었다지만, 그래도 찔리는 부분은 있었다.
“저, 할 말이 있는데요.”
그 부분을 언급한 찰나였다.
권용빈 선배의 반응은 썩 담백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사과까지 하고 그러냐.”
“······.”
“오히려 그동안 너무 일만 했지. 너 그러다가 과로사하겠다. 안 그래도 좀 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안 그래?”
그가 다른 시각디자인과 학생회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쉴 자격이 있지.”
“조별과제 할 때마다 친척분들이 한 명씩 돌아가시는 애들도 있는데 별걸 가지고.”
“교수님이랑 있는 자린데 그걸 안 나가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일관적인 반응에 권용빈 회장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들었지?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그걸로 끝이었다.
외려 말을 꺼낸 내가 민망해졌다.
권용빈 선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슬슬 회의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민지야. 자료 좀 읽어주라.”
“네.”
발표를 맡은 회계담당 박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에 자료 하나를 들고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번 시각디자인과 주점의 매출부터 발표하겠습니다.”
그다음 순간.
뭔가.
뭔가가 일어났다.
“이틀간 발생한 총매출액은 천만 원가량으로서, 한예원 대동제 역사상 최고 매출을 달성했습니다.”
< 족발집 > 끝
ⓒ 이한이
< 기승전결의 결 >
‘천만 원이라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천.
이틀짜리 학교 축제에서 나올 매출치고는 좀 과하지 않나.
슬쩍 고개를 돌려 권용빈 선배를 보자, 은근히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 자랑하고 싶었구나.’
하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보통 학교 축제에서 최고 매출이라 한들 오백을 넘기기도 힘들지.’
그 수치를 이틀 연속으로 기록해야 나오는 게 천만 원이라는 숫자다.
어떻게 이런 매출이 나온 걸까.
짚이는 부분을 떠올리고 있는데, 발표를 맡은 박민지가 말을 이었다.
“전체 매출액의 70%는 주류 판매에서 발생했으며, 구체적인 액수로는 700을 조금 넘겼습니다.”
주류 매출이 압도적이다.
권용빈 선배가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질구레한 안줏거리를 실컷 파느니 술 몇 병이 훨씬 강력한 거야. 재하 말이 맞았던 셈이지.”
“제 말이요?”
“왜, 일반 주류보다 상대적으로 고가를 형성한 전통주 위주로 판매하되, 이유 있는 가격대를 선정하자고 했잖아.”
아, 기억났다.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그 뭐야. 그 미국 아이스크림 회사 이야기도 했었고.”
“하겐다즈요.”
“그래, 거기 모토가 손에 닿는 거리에서 누릴 수 있는 프리미엄이라고 했나?”
하겐다즈의 판매 전략이었다.
확실한 프리미엄이되, 누구든 누릴 수 있는 프리미엄.
내가 이번 주점 판매 전략의 예시로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일상 속 작은 사치라고 했지.”
권용빈 회장이 말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마셔보냐. 그런 느낌의 전략으로 구성했죠.”
일반적인 소주의 가격을 병당 삼천 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제시한 전통주의 가격대는 최소 오천 원 이상을 형성했다.
어지간하면 병당 만 원을 넘는다.
학생 지갑에는 비싸다.
하지만, 굳이 축제까지 찾아온 손님 기준이라면 어떨까.
‘일 년에 몇 번 없는 축제의 가장 좋은 주점에서 적당히 비싼 술을 마신다. 이거 하나면 충분하지.’
물론 무작정 운에만 기댄 건 아니었다.
그 비싼 술을 구매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 갖은 방면으로 노력했다.
메뉴판도 그중 하나였다.
–
천마향(700ml/18000원): 남양주에 자리 잡은 천마산의 특산품. 매년 가장 좋은 쌀과 솔잎을 엄선해 맑은 물로 추출했으며, 이 모든 과정은 송현모 명인이 직접 검수하였다. 풍성한 솔향 다음으로 찾아오는 담담한 단맛이 특징이다.
–
[전문가 평]이재하(시각디자인과 2학년): 술을 마시는 것 같지 않다. 천마산의 상쾌한 공기를 한 모금 베어 무는 듯 산뜻하다.
권용빈(시각디자인과 4학년): 튀김보다는 찬 음식이 잘 어울린다. 순대도 괜찮을 듯. 마실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도수에 비해 바디감이 가벼워 아차 하는 사이에 훅 가기 좋으니 주의할 것.
주지훈(건축과 4학년): 너무 맛있어서 사무실에 한 상자 쟁여놨다.
박민지(시각디자인과 3학년): 18000원이라는 가격대임에도, 놀랍게도 가성비가 좋게 느껴진다.
–
아예 모든 메뉴를 전문가 평론처럼 적어두었다.
나는 여기에 추가 설명을 이었다.
“처음 보는 술이라면 아무래도 호기심보단 거북함이 생기기 쉽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친근하게 접근했어요. 또 이렇게 적어두면 어떤 맛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하긴, 읽고 있으면 나도 솔깃하더라.”
권용빈 선배가 낄낄 웃기를 잠시.
박민지는 곧 하던 말을 이었다.
“이번 매출의 특이사항으로는, 이틀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매출 하락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건 또 의외였다.
“왜 그랬지?”
“주류만 구매해 가는 손님이 늘었습니다.”
“아.”
한 학생이 손뼉을 치더니 말했다.
“교수님들이 들러서는 있는 술 전부 한두 병씩 포장해가시더라.”
그들도 고객으로 끌어들였다.
이후로도 몇 가지 분석이 다 나왔다.
하지만, 대체로 뻔한 분석들이었다.
이미 나온 결과를 되짚는 수준에 불과한 이야기.
‘사실상 끼워 맞추기에 가깝네.’
학부생들끼리 뭐 엄청난 분석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듣고 있으려니 기분은 좋다.
칭찬받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
이 회의의 진짜 목적은 승리를 곱씹는 것에 있었다.
‘어차피 결과는 최대 매출로 증명됐겠다. 무슨 말을 하든 기분만 좋지.’
그렇게 뻔하면서도 기분 좋은 이야기가 이어지길 한참, 권용빈 선배는 슬쩍 주위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는데.”
“네.”
“이번 주점의 가장 큰 공로자이자 협력자이자 MVP인 재하에게 박수 한 번씩 쳐 주자. 자, 박수!”
“······?”
뜬금없이 내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박수야 할 수 있지.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니 미리 연습했다는 것처럼 인위적이다.
‘왜 이러지.’
의아한데 권용빈 선배가 말을 이었다.
“재하야. 내가 과 선배로서 그리고 형으로서 할 말이 있는데.”
“네.”
“그게 말이다.”
그가 헛기침을 뱉더니 말했다.
“약속한 수익 분배, 30%로 낮춰 주지 않을래?”
대단히 또렷하고 정의로운 목소리였다.
또 눈빛은 얼마다 강직한지.
옛날 만화책에 나오는 용사가 이럴까.
설득력 있다.
나는 그의 눈을 곧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 됩니다.”
“······그래.”
어딜 감히.
*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나는, 사무실 식구들에게 오늘 있었던 회의 내용을 전달해 주었다.
그 모든 설명을 들은 지훈 선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매출의 70%가 순이익이라고?”
“네.”
“······ 내가 이런 일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게 말이 되는 수익률인가?”
“아뇨, 절대 아니죠.”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70%.
자영업자의 기준으로 본다면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치였다.
보통 매출의 30%만 순이익으로 남아도 대박으로 보니.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인건비랑 임대료 지출이 아예 없었어요.”
그렇다.
저 둘이 빠지고 기타 잡비가 빠지자, 사실상 재료비 외엔 지출이 없었다.
그나마도 주류는 넥타르에서 직접 구매하였기에 예산을 크게 아꼈다.
“여기에 남들은 텐트 대여한다고 수십씩 드는데, 우린 그것도 건축과로 넘겼죠.”
“응. 내가 했던 그거.”
“네. 형이 했던 그거요.”
나는 그의 말에 긍정하고는 말했다.
“결국, 넥타르와의 협상이 크게 힘을 발휘했던 거예요.”
우리 측의 피곤한 일은 줄이고, 타 과의 노동력은 흡수했다.
그런데.
내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지훈 선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재하야. 네 말만 들으면 썩 그럴듯하기는 하다만. 그거 한마디로 말하면······.”
“네.”
“그냥 노동력 착취했다는 거 아니야?”
“······.”
정확하다.
쓸데없이 핵심을 짚다니.
‘역시 한예원에서 손에 꼽는 성적 우수자답군.’
나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파야 청춘이래요.”
“그게 무슨 말이래?”
“젊어서는 사서도 고생한다는 말이죠.”
“그거 완전······.”
지훈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멍멍이 소리 같은데.”
이것도 몹시 정확하다.
냉철하다.
괜히 4학년이 아니다.
‘적어도 축제준비위원회보다는 두 차원쯤 나은 분석이다.’
나는 숙고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전 강요한 적 없어요.”
“······.”
드디어 지훈 선배가 지적을 멈췄다.
아무튼, 여기에 우리는 송주와의 공연에서 챙긴 수당도 따로 붙었다.
결론적으로.
‘좋네.’
좋다.
챙길 이득은 전부 챙겼다.
과 내에서의 이미지도, 교내에서의 홍보도 챙겼다.
이게 다 씨앗이 되어 또 다른 이득으로 돌아오겠지.
다만, 이득과는 별개로 아쉬운 점이라면 분명 있었다.
한설 선배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축제 기간 내내 거의 일밖에 안 했네.”
그렇다.
남들 즐길 때 일밖에 안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쉬워요?”
“아쉽지. 아쉬우면 안 되나?”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누나는 노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가? 딱히?”
그녀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냥 시간 낭비가 싫은 거지.”
“시간 낭비요?”
“의미 없이 친목 다진다고 MT 가서 술판 벌이고 그런 거. 미팅도 시간 낭비고.”
그녀가 담담하게 중얼거리는데, 그게 내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럼 우리랑 노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란 말인가?’
놀랍다.
마냥 생산적으로만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기 나름대로 평가 기준이 있었구나.
알고 지낸 게 벌써 1년인데 처음 보는 면모였다.
“음, 그럼요.”
문득, 나는 말했다.
“아쉬운 대로 우리도 이따 저녁에 다 같이 축제 구경이나 다녀올래요?”
“축제? 무슨 축제?”
“이스포츠요.”
“갑자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티켓은 어쩌고?”
“방송국에서 받은 초대권이 있어요.”
그렇다.
가끔 그쪽에서 말없이 한두 장씩 챙겨주었다.
나름대로 협력사라고 챙겨주는 거겠지.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가만, 가는 게 오늘 저녁이라고 했지. 그럼 시작은 언제야?”
“3시간 뒤요.”
“금방이네. 가려면 서둘러서 출발해야겠다.”
한설 선배는 최근 게임에 대한 선입견이 부쩍 사라진 눈치였다.
그렇게 짐을 싸는 찰나였다.
지훈 선배가 슬쩍 물었다.
“동민이도 데려갈래?”
“······ 오빠.”
한설 선배가 그를 흘겨봤다.
잔소리가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3초.
지훈 선배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설아. 잘 생각해 봐. 입시생도 놀 때는 놀아야지. 스트레스만 쌓이면 공부를 멀리하게 되고, 공부를 멀리하면 대학에 못 붙고, 대학에 못 붙으면 우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거 아니야. 그럼 회사 일에 지장이 생겨서 매출이 떨어지겠지. 넌 우리가 망하길 바래? 너 산업스파이야? 간첩이야?”
“······.”
일련의 헛소리가 이어졌다.
한설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가만히 듣고만 있더니 말했다.
“이번에만 봐 주는 거예요.”
“고맙다.”
뭘 굳이 고맙다고 말까지 하는 걸까.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얼른 출발하죠.”
그렇게 짐을 챙기고 사무실 밖으로 튀어나오자, 벌써 하늘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번 일이 끝났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역시 노는 과정까지 합쳐서 업무라니까.’
지금이야말로 기승전결의 결 아닐까.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