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8)
두 번 사는 미대생 38화(38/93)
*
며칠 뒤.
사무실에서 잡무를 보고 있는데 규태가 외쳤다.
“재하야! 메일 왔다.”
“잠깐만. 지금 바로 확인할게.”
나는 바로 규태의 자리로 가서 모니터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화면에는 내가 기다렸던 그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드디어.’
우리가 새롭게 착수한 일.
얼마 전 이종이 교수가 추천해 준 상수도사업본부 일이었다.
–
가온수 BI(brand identity) 개발용역 공고
사업명: 상수도사업본부 가온수(가제) BI 개발용역
추진 기한: 착수일로부터 3개월
사업 범위:
1. 기본 시스템(심볼, 로고, 패턴 등) 개발
2. 응용 시스템(서식, 홍보, 광고 등) 개발
······
···
–
상세한 공고를 훑기를 한참, 나는 문득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손대는 범위가 넓네.”
“그래?”
규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로고부터 패턴, 명함에 스티커, 팜플렛에 포장지, 기념품까지 범위가 좀 넓다.”
이종이 교수의 일부 종목이라는 말에 그냥저냥 외주 수준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넓다. 더럽게 넓다.’
깊게 들어가는 건 없지만, 폭 자체가 넓었다.
패키지만 맡았던 천마향과는 비교가 안 되는 범위에, 규태는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다가 물었다.
“원래 일을 이렇게 두서없이 시키나?”
“가온수가 이제 막 시작하는 브랜드라서 그런가 본대.”
“그럼 우리가 기둥을 세우는 셈이네.”
“그렇지.”
“······ 그럼 참고자료 삼을 것도 마땅히 없겠다?”
아닌데.
참고자료 있는데.
내 머릿속에 잘 들어 있는데.
입이 근질거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으려니, 규태가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우리가 소화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모르지.”
잘 모르겠다.
삼킬 수만 있다면 무조건 이득이겠다만, 자칫하면 입이 찢어질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나마 어떻게든 손을 댈 수는 있는 일들이기도 했다.
‘디자인 외적으로 제작 단계 들어가면 한예원에서 도와주겠지.’
한예원의 힘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자란 힘은 어떻게든 빌려올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창업 지원 프로그램.
지원하기를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번씩 든다.
“이종이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아마 서류심사에서 떨어질 확률 자체는 낮을 거야. 문제는 붙은 그다음부터지. 업무량 자체가 많아.”
“당분간은 야근 좀 해야겠다.”
규태가 퀭한 눈길로 중얼거리는데,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슬슬 적응 되지?”
“······.”
규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등을 두드리고는 말했다.
“이거 형식적으로라고는 해도 제안서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데, 그게 또 쉽지 않을 거야.”
“어떻게 쓰는 건데?”
그 순간이었다.
“그건······.”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도 못 한 질문이었다.
‘제안서를 어떻게 쓰냐니.’
그건 기초 중의 기초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규태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안 해봤으면 못하는 게 인지상정.
그저 내게 조금 특이할 뿐.
‘그렇네. 뭐, 여기서부터 시작이지.’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지금부터 같이 고민해 보자.”
디자인 기업의 꽃.
제안서를 쓸 시간이 왔다.
< 기승전결의 결 > 끝
ⓒ 이한이™
< 서운하셨구나 >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머리 깨져봤을 고민이 있다.
‘제안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라면, 나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질리도록 써 봤지.’
제안서란 일종의 자기소개와도 같았다.
왜 굳이 우리와 함께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자기소개서.
그게 제안서였다.
당연히 나도 신물이 나도록 써 봤다.
하지만.
아는 것과 설명하는 건 별개의 영역이었다.
‘이걸 식구들한테 어떻게 가르친대?’
이 부분이 어려웠다.
“여기 이 문장 있잖아.”
규태가 물어봤다.
“독립채산제의 공급처로서 타 기관과 차별화되는 정체성을 확립함과 동시에, 시민 단체와의 상호 협력 가능성을 통한 신뢰와 공감을 충족해야 한다. 또한, 국가기관으로서의 투명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래?”
이 질문의 답은 정확히 알고 있다.
‘대충 아무 곳에나 얹어도 어울릴 만큼 무난하면서도, 짝퉁 느낌 안 들게 해달라는 말이지.’
하지만, 확답하듯 말하기는 힘들었다.
지금의 내 신분은 업계 신입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초짜면서 베테랑인 척 잘난체하는 건 조금 그렇지. 말에 설득력도 없을 테고.’
지금까지도 잘난 모습이야 얼마든지 보여줬다만, 정도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도 저도 못 하고 고민만 하는 신세에 빠져 버렸다.
“참고자료라도 있으면 좀 낫겠는데.”
규태가 중얼거렸다.
이미 일곱 번이나 나온 말이었는데, 내게도 심히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참고자료 하나 찾기가 이렇게 힘드냐.’
미래에는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 봐도 실무자들의 제안서 견본이 가득하다.
돈을 주면 더더욱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보가 극히 제한된 사회다.
제안서를 찾기 힘든 건 물론이고, 아예 기초적인 노하우조차 구하기 어렵다.
‘그냥 나 혼자서 원맨쇼라도 해 봐?’
이런 생각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도 마냥 정답은 아니었다.
‘나랑 오랫동안 일할 사람들이야.’
이 식구들도 언젠가는 각자 일 인분을 해야 한다.
나 혼자서 잘났다는 듯 행동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같이 고민하듯 문서를 작성해 나가야 하는데, 이게 또 규태에게는 스트레스인 듯했다.
“이쪽에는 우리 회사가 넥타르에서 작업했던 이야기를 더 넣어 보자.”
규태가 중얼거리는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여기는 상수도사업본부 이야기를 들면서, 타 국가의 브랜드 예시를 넣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너무 우리 쪽 이야기가 빠지지 않나?”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을 거야. 설득은 우선 공감대를 형성한 뒤로 빼는 게 정석이니까.”
“······.”
규태는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끙끙 앓다가 말했다.
“보통 이럴 때는 네 말이 맞는데, 으음. 어렵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었다.
규태가 뭘 제안하든 내가 반박하는 과정의 반복.
‘내놓는 의견마다 동기가 마냥 비판하니 내심 기분이 나쁘겠지.’
나도 미안하다.
그렇게 규태와 고민 아닌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와중이었다.
덜컹.
“니하오마.”
한설 선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축 처진 규태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더위 먹었어? 왜 그렇게 한숨만 푹푹 쉬어?”
그 말에 규태가 책상에 얼굴을 붙인 채로 중얼거렸다.
“으으······ 제안서 쓰고 있는데 너무 어려워서요.”
“제안서?”
“넵. 이거 발주처에서 참고하라고 준 가이드인데, 누님도 한 번 보실래요?”
“어디 보자.”
한설 선배는 규태가 넘겨준 자료를 잠시 읽었다.
그러기를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이상 시집 읽는 것 같네.”
말 그대로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도 안 올 표현들로 가득했다.
더군다나 규정 사항이 많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 될 것만 같은 압박감까지.
‘나도 피곤한데, 규태는 한술 더 뜨겠지.’
나는 펜을 손에서 놓고는 한설 선배에게 말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그런가, 쉽지가 않네요.”
“머리 아프겠다. 그런데, 이걸 왜 너희끼리 고생하고 있어?”
한설 선배의 말에 나도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어디 참고할 자료가 없어서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한설 선배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너희끼리 고생하냐니까?”
“네?”
“모르면 배워야지. 참고할 곳이 있는데 뭐하러 너희끼리 그래?”
그런 게 있나.
나도 모르는 게 어디에 있었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한설 선배는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 너머를 가리켰다.
“저쪽에 있잖아.”
빌딩으로 가로막혀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바깥이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눈앞을 보지 말고, 방향을 봐. 이쪽 방향 끝에 뭐가 있지?”
“음.”
나는 고민하던 중, 이내 떠올라서 말했다.
“한예원이요?”
“그래. 한예원. 교수님들 계시잖아.”
“아.”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린 찰나, 한설 선배는 담담하게 말했다.
“왜 교수님한테 안 물어보고 너희들끼리 이 난리야?”
그렇네.
그 방법이 있었네.
‘내 입으로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라면, 남의 입을 빌리면 그만이었네.’
학부생들끼리 아옹다옹하다가 막힐 때면 뭘 하면 될까.
교수에게 도움을 구하면 된다.
직관적이다.
내가 이걸 왜 못 떠올렸을까.
그 이유라면 뻔했다.
‘혼자서 다 하는 데 익숙해진 거겠지.’
나는 한설 선배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누나 머리 좋네요.”
그 말에 한설 선배는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중얼거렸다.
“나 원래 머리 좋아.”
*
다음날.
나와 규태, 한설 선배는 이종이 교수님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그는 우리에게 각자 물을 한 컵씩 떠나 주고는 입을 열었다.
“제안서를 작성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했지요?”
“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저희가 처음으로 제안서를 작성하는 건데, 아무래도 참고할 게 하나도 없다 보니까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교수님께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남의 힘을 빌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종이 교수는 곧 노트북을 한 대 들고 오더니,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어느 폴더를 띄웠다.
그 폴더에는, 온갖 자료가 수십 개도 넘게 들어 있었다.
‘이건······ 전부 제안서들인가?’
내가 눈을 크게 떴다.
파일마다 적힌 이름들이 하나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유명 문구업체인 [위즈덤글로리]부터 시작해, 전자제품 체인점인 [H마트]까지 온갖 분야에 사용된 제안서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렇게까지 넓고 상세한 자료들이라니.’
어떻게 구한 걸까.
미래의 나조차도 쉬이 접할 수 없었던 자료들에 감탄하고 있는데, 이종이 교수가 입을 열었다.
“제가 가르친 제자들에게 부탁해 최근 작업물만 정리해 봤습니다.”
“······!”
그렇게까지 도와주시다니.
‘역시 이종이 교수님을 찾아온 게 정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종이 교수가 입을 열었다.
“아무거나 좋으니 한 번 볼래요?”
“네.”
나는 천천히 마우스를 클릭했다.
유명 택배 기업 [KOF 택배]의 리디자인 제안서였다.
내용물을 훑기를 잠시, 나는 곧 깨달았다.
‘투박하네.’
아무래도 과거의 작업물이라서 그런지, 그 내용물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텍스트 덩어리의 나열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
미래의 쇼를 연상케 하는 제안서에 비하면 심히 딱딱하다.
하긴.
제안서에도 트렌드는 있기 마련이고, 지금은 이런 시대다.
감수하고 넘어가야 하겠지.
‘어쩌면 이 부분에서 우리 강점을 살릴 수도 있겠어.’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안서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이종이 교수가 물었다.
다소 맥락 없는 질문에, 처음으로 답한 건 규태였다.
“으음. 우리 기업이 이렇게 잘 나간다? 그런 거 아닐까요. 얼마나 쓸모 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해 봤다.”
괜찮은 대답이었다.
제안서의 기본 목적이 자기소개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나름대로 학부생 입에서 나올 법한 대답.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오답이었다.
“정답에 가까웠습니다만, 조금 아쉽네요. 그럼 이번에는······ 재하 학생이 대답해 보겠어요?”
“······.”
나를 겨냥하다니.
누가 교수님 아니랄까, 묘하게 학과 수업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제안서에서 가장 중점에 둬야 할 부분이라면, 우리가 당신들을 이만큼 잘 이해하고 있다. 그걸 보여주는 거 아닐까요?”
이게 내 생각이었다.
제안서는 기본적으로 자기소개가 맞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얻기 위한 물밑작업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한 나라의 왕은 마냥 잘난 사람보다는, 자기를 잘 이해하는 사람을 옆자리에 앉히기 마련이었지.’
그렇기에 제안서를 쓸 때도 상대방의 공감을 유도하는 게 중요했다.
물론, 내 주관적인 생각이긴 했다.
그에 대한 이종이 교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정답입니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여기에, 이종이 교수는 흡족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역시 재하 학생입니다. 추론력이 우수하네요.”
“······.”
이런 칭찬은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갓난아기들이 밥 먹고 트림만 해도 칭찬받는 그런 기분이다.
아무튼, 그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모든 제안서의 기본은 발주처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발주처 기획자의 심리를 역산해 보는 게 유효하겠지요. 여기서 제가 제안하겠습니다.”
이종이 교수가 종이를 꺼내더니 그 위에 네 가지 단어를 적었다.
why
what
how
if
그리고는 말했다.
“4mat이라고 하는 기획법입니다.”
“······!”
나도 질리도록 들어본 기획법이었다.
이종이 교수가 설명을 이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이 브랜딩을 왜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는 노트북 화면에 띄운 제안서 중 한 자료를 펼쳤다.
[생과일전문점 ㈜허브나인 CI 제안서]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생과일주스 전문점의 제안서였다.
이종이 교수는 그 화면을 우리에게 돌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5분 동안 이 제안서를 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후에 다시 문제를 내겠습니다.”
문제라.
참 교수다운 말이었다.
무엇 하나 가르치듯 말하다니.
하긴, 우리는 배우려고 온 거니까 이게 정답이긴 했다.
‘어디 보자.’
5분이라는 시간은 짧았다.
제안서 하나를 후루룩 훑기에도 한참 모자란 시간.
그걸 간신히 전부 읽었을 무렵, 이종이 교수가 입을 열었다.
“위에서 말한 4mat으로 이 제안서가 나오게 된 바탕 기획을 분석해 봅시다.”
“으음.”
규태는 아직 생각이 덜 정리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Why, 근래 생과일주스 시장이 웰빙 열풍과 함께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서. What. 타 생과일 업체와 차별력을 갖춘 특화된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서.”
“네. 맞습니다.”
이종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나머지 how와 if도 부탁하겠습니다.”
“How는, 음. 아이스크림 매장과 함께 운영해서. If는······ 자회사의 브랜드를 기반으로 확장성을 갖춘다. 제 생각이 맞을까요?”
“거의 근접했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는 웃더니 말했다.
“이 부분을 되짚으며 제안서를 한 번 봅시다. 어떤가요?”
“······!”
이번에는 규태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거의 발주처의 기획안에 공감하고 분석하는 내용밖에 없네요.”
그렇다.
저쪽 기획자가 품었을 고민을 효자손으로 긁듯 저격하는 내용으로만 가득했다.
단 한 줄의 낭비도 없는 제안서.
이종이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맞습니다.”
“우리 쪽 기업 이야기는 아예 없는데······ 이래도 되나요?”
규태의 질문에 그가 단호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겁니다.”
“그럼 발주처 입장에서는 우리 업무 능력에 의심을 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은 괜찮을까요? 저희는 신생인데.”
“그렇다면 역으로 제가 묻겠습니다. 업무 능력이 증명된 업체라면 꼭 우수한 결과물을 내놓을까요?”
“······ 아닌가요?”
작은 반문에도 쪼그라드는 규태의 모습에, 이종이 교수는 살짝 웃더니 말했다.
“꼭 그렇진 않습니다. 막상 일을 시켜놓고 보면, 기존 작업물에 완전히 매몰되어 발주처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물건을 내어놓는 경우도 잦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경험상 그렇다는 겁니다만.”
“······!”
규태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도 가슴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나도 저런 설명을 하고 싶었어.’
내 입에서 나왔더라면 설득력 없었을 말이다.
그것이 이종이 교수의 입을 통하니 설득력을 얻었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말했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차라리 소통이 잘 되는 회사에 호감이 생기는 거군요.”
이종이 교수는 웃더니 말했다.
“예. 결국에는 사람 하는 일이니 말입니다.”
사람 하는 일이라.
지극히 그다운 말이었다.
나는 내심 피식 웃고는 말했다.
“교수님.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이 자료들을 저희가 복사해서 가져가도 될까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죠?”
이종이 교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저희끼리 작업 진행하다가 막힐 때 참고자료로 쓰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요?””
내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이종이 교수가 입을 열었다.
“아예 학생들이 여기서 작업한다면. 필요할 때마다 제가 봐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
말문이 막혔다.
그래.
그게 최선이긴 하지.
이종이 교수가 바로 옆에서 코칭한 제안서라. 한국 최고의 작업물이 나오겠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규태는 계 탔다는 듯 기쁜 심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는데, 정작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교수님의 속마음이 넌지시 읽혔기 때문이었다.
‘요즘 안 찾아와서 서운하셨구나.’
< 서운하셨구나 > 끝
ⓒ 이한이™
< 튜토리얼 >
제안서 작업에 본격적인 발동이 걸렸다.
그리고.
이종이 교수가 떠먹이듯 규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쪽은 구체적인 디테일보다는 개요 위주로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사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말입니다.”
“으음.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볼 때는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그 구분은 괜찮습니다. 전문성은 페이지에서 풍기는 뉘앙스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어설픈 디테일이 보는 이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여기서 어설픈 디테일이 뭘 말하는지는 뻔했다.
규태가 1시간 넘게 공을 들여서 작성한 문서였는데, 그것을 말 한 마디에 엎자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아······.”
한창 두들겨 맞던 규태가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호화롭네.’
복 받았다.
이종이 교수가 누구인가.
한국 디자인계의 화석이자, 최다 어워드 수상자이자, 현역에서 물러난 지금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규태는 그런 사람에게 일대일로 배우고 있었다.
‘저거 시급으로 치면 장난 아니겠네.’
최상위급 교수는 기업 특강 강사료만 해도 시간당 백 이상을 받는다.
그걸 일대일로 배우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큰 복인가.
물론, 규태만 이득을 보는 건 아니었다.
나도 이종이 교수 덕에 작은 수혜를 봤다.
“교수님. 이런 느낌의 구성은 어떨까요?”
“과감하군요.”
“네. 단순 텍스트보다는 시각적인 정보에 집중해 봤습니다.”
프레젠테이션 구성이 그러했다.
심리적인 여유가 생긴 덕에 시도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사실, 이종이 교수가 구해 준 제안서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너무 투박했지. 단순 텍스트의 나열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불편했다.
보는 입장에서 느낄 피로도도 높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제안서가 모자란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
그저 그게 이 시대의 평균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서 JH 디자인의 강점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프레젠테이션 문화는 잡스 전후로 완전히 재편성됐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처럼. 나도 이 부분을 공략해 보자.’
이게 내가 노리는 바였다.
잡스식 프레젠테이션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정보의 시각화가 있었다.
‘텍스트를 가급적 줄이고, 이미지 위주로 제안서를 꾸리는 것.’
여기에 더불어,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발표자와 발표 자료를 별개로 보지 않는다.
둘이 합쳐져서 완성되는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한다.
이게 잡스식 프레젠테이션의 핵심이었다.
‘어쨌든 몰입감은 확실하다.’
내가 만든 구성에 대한 이종이 교수의 평가는 이러했다.
“음, 좋군요. 꼭 제안서를 딱딱하게 작성하라는 법은 없지요. 개인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이종이 교수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도발적인 구성일수록, 발표자의 기량이 부족하다면 속된 말로 약장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격한 표현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공감하는 바였다.
‘그렇지. 어설프게 다루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게 잡스식 프레젠테이션이지.’
내가 극복해야 할 사항이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극복 방법을 생각하는데 이종이 교수가 말을 이었다.
“물론 이건 제 추측에 불과하긴 합니다. 구체적인 평가는 제 눈으로 직접 봐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혹시 리허설을 봐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야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나는 리허설을 위해 자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하 리허설 한대.”
“또요?”
“오늘만 여섯 번째 같은데.”
작업실 식구들이었다.
나랑 규태가 이곳으로 업무 장소를 바꾼 김에, 아예 나머지 식구들도 이쪽에 와서 일하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내친김에 그들에게 물었다.
“형 누나도 같이 볼래요?”
리허설에 관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좋지.”
“우리 재하 얼마나 컸나 보자.”
그렇게 잠시 뒤, 나는 그들을 클라이언트라고 생각하며 발표를 이어나갔다.
“······ 이상입니다.”
그렇게 짧은 발표가 끝날 무렵.
이종이 교수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사실 구성안만 봤을 때는 노파심이 들었는데, 실전에서도 이대로만 진행한다면 큰 걱정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호평이다.
이종이 교수의 말에 비로소 자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외 식구들의 반응은 주로 이러했다.
“자주 생각하는데, 재하가 입 놀리는 거 하나는 참 괜찮아. 은근 홀린다니깐.”
“저거 사기꾼이라니까요.”
“······.”
뭐라고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
원래 사장님이랑 사기꾼은 한 끗 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또.
겸허한 마음으로 넘기는 것도 사장의 도량 아니겠는가.
‘나중에 당신들 차례 되면 보자.’
아무튼, 이종이 교수의 도움 아래 제안서를 완성해 나가면서, 우리 식구들에게도 점차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어떻게 되는 거 아냐?”
“학교에서 하던 거랑은 비교가 안 된다.”
뿌듯하다.
이종이 교수님을 찾아온 건 정답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가슴속에 남는 의문이 있었다.
“우리 사무실 왜 구했냐.”
“그러게.”
*
며칠이 지났다.
우린 마감일을 고작 이틀 남긴 시점에 제안서 제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규태야. 서류 어디에 뒀어?”
“저쪽 책상 위에.”
“아, 찾았다. 그럼 다녀올게.”
“옙. 사장님 다녀오십쇼.”
나는 서류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래에는 전자 접수도 늘었지만, 이 시절의 제안서 제출은 거의 방문 접수로 이루어졌다.
‘불편하긴 해도, 나름대로 찾아가는 재미가 있네.’
서대문구에 있는 상수도사업본부.
나는 그곳 4층의 재무과에 방문했다.
“실례합니다.”
그런데, 사무실 직원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썩 의아해 보였다.
그중 한 직원이 내게 다가와서는 물었다.
“어떤 일로 방문하셨나요?”
“안녕하세요. 저기 사업 공고 보고 왔는데요.”
“아.”
그는 바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대학생 급수대 캐릭터 공모전 말씀이시죠?”
“······.”
그런 것도 있었나.
슬쩍 뒤를 보니 게시판에 그런 포스터가 붙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가온수 BI 디자인 용역 공고 보고 왔습니다.”
“BI 디자인이요?”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나를 바라봤다.
“저, 혹시 대학생 아니신가요?”
“대학생 맞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는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말했다.
“죄송하지만 사실 그건 중소기업 대상으로 하는 거라서요.”
“네. 그거 맞습니다.”
“······.”
내 말에 그의 얼굴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처음 벽화 일을 시작했을 때 종종 보던 그 표정.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생각해 보면 이제 막 갓 스물을 넘겼지.
다음부터는 지훈 선배를 보내든지 해야겠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이쪽에서 제출하는 거 맞나요?”
“아, 네. 맞습니다.”
그는 그제야 서류를 보여주었다.
나는 손이 가는 대로 빠르게 작성하고는 다시 건넸다.
“JH 디자인······.”
직원은 그 서류를 몇 번 위아래로 검토한 뒤에야 말했다.
“진짜 맞네요.”
“네. 맞습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너무 젊어 보이셔서. 사실 저도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딱 학생 또래라서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아닙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이 나이에 이런 입찰공고 찾아다닐 사람이 한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있어 봐야 손에 꼽겠지.
직원은 내게 건네받은 서류를 받아 파일에 넣더니 말했다.
“접수 완료되셨고요. 서류 결과는 오늘 저녁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합격하신다면 모래에 이 건물 5층의 회의실로 와 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짧은 일을 마친 뒤, 짐을 챙기고 사무실에서 나가려는 찰나였다.
“저.”
그가 날 보고는 말했다.
“우리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인데요.”
“······.”
보통 우리 딸, 아들 같아서라고 하는 말 뒤에는 예쁜 말이 붙는 일이 드물던데.
어떤 훈수를 두려는 건가 싶은 순간이었다.
“화이팅입니다.”
“······.”
나는 우두커니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상수도사업본부 건물을 나오는데, 바깥 하늘은 아직 푸르렀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네.’
옆으로는 공무원들, 회사원들이 지나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뎠구나.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을 끝마쳤구나.
그런 느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찌어찌 여기까지는 왔네.’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돌아가는 길에 육개장이나 한 그릇 때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