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43)
두 번 사는 미대생 43화(43/93)
*
코인 소프트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고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
하지만, 덥지는 않았다.
위이잉-
사무실에 설치된 에어컨이 24시간 쌩쌩 돌며 달아오른 실내를 식혀주었다.
그 덕에 누구 한 명은 살맛이 났다.
‘이게 인생이지.’
남운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민에게 손짓했다.
“야.”
“왜.”
“디티 가쉴?”
디티.
DT, 담배 타임의 줄임말.
코인 소프트 내부에서 흡연자들끼리 사용하는 은어였다.
곧 나머지 프로그래머 식구들도 속속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디티?”
“디티.”
“고.”
그들은 곧 정해놨다는 듯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피스텔로 설계된 고층 빌딩답게, 탁 트인 석관동의 전망이 그들의 눈앞을 한가득 메웠다.
한 마디로, 속이 다 시원했다.
‘반지하랑은 딴판이네.’
남운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욱.
한 모금을 깊게 마시더니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세상일 진짜 모르겠네.”
“뭐.”
“그냥.”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운은 되는 대로 중얼거렸다.
“우리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월세가 어쩌고, 관리비가 어쩌고, 환기가 어쩌고 난리였잖아.”
“그랬지.”
“이제는 그런 거 걱정 안 하잖아.”
“음.”
“이 짓도 점점 궤도에 오르고 있는 거 같지 않냐.”
김상민은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옛날에 우리가 심심하면 하던 말 기억해? 돈 벌면 각자 건물 한 채씩 사자고.”
“······ 그랬었지.”
그들이 습관처럼 뱉던 말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하게 쌓여서 때려치고 싶어지거든, 미래에 돈을 벌면 건물주가 되자는 이야기를 하며 불안을 해소하고는 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상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그냥 개소리로 들렸다.”
“왜?”
“일하기가 너무 빡세니까 자기최면을 거는 거라고 생각했지. 누가 그걸 진심으로 생각했겠냐.”
“······.”
김상민의 말에 남운이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응 아냐.”
남운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우리가 이 일 시작한 게 대충 2년 정도 됐나.”
“그쯤 됐지.”
김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게임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벌써 2년 전.
처음에는 게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뭐 하나 만들어 보자면서 뭉쳤다.
졸업하기 전까지 유종의 미를 거둬 보자고.
그리고.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나 나나 처음에는 너무 순진했지.”
“하면 할수록 공부할 게 너무 많더라. 쓰읍. 차라리 학교 과제가 쉽지.”
나름대로 명문대 엘리트들이라고 자부심에 차 있었는데, 게임 개발은 고작 학부생들에게는 버거운 영역이었다.
‘엔진부터 클라이언트, 서버, 레벨 디자인까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학교에서 구할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직접 부딪쳐 봐야 아는 일들이 태반.
당연히 시간이 촉박해졌다.
이대로는 졸업 전에 완성은 힘들겠다는 생각에, 우선 휴학을 냈다.
이후, 첫 1년은 거의 공부만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2년 차였는데, 그것도 솔직히 말해서 많이 모자랐다.
주로 돈이 모자랐다.
“난 솔직히 하다가 관둘 줄 알았는데, 어떻게 버티고 있네.”
남운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않냐.”
“뭐가?”
“재하 걔 있잖아.”
“아, 우리 팀 복덩이 있지. 그런데 왜.”
“걔가 우리보다 우리 게임을 잘 아는 것 같더라.”
근래 자주 드는 생각이었다.
분명 바깥에서 데려온 사람인데, 그들이 만들려는 게임이 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알고 있다.
“가끔 기획 회의할 때 있잖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의견을 하나씩 툭툭 던지는데.”
“재하가 좀 적극적이지.”
“그게 좀 신기하더라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처음부터 우리 팀에서 같이 작업했던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들로서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재하 본인에게는 그저 당연한 말이었다.
개발자이기에 앞서, 이미 완성본을 수백 시간 플레이해 본 유저다.
하물며 앞으로의 몇 년 치 업데이트 내용까지 대충 머릿속에 담겨 있다.
기획 단계에서 한참 고생해 봤던 그들 기준으로는, 경력도 없는 주제에 그럴듯한 의견을 쉽사리 내놓는 재하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씁. 이쪽으로 머리가 타고난 사람이 있긴 한가 보다. 그 마리오처럼.”
남운의 말에 상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리오?”
“미야모토 시게루 있잖아. 게임의 신.”
“아.”
미야모토 시게루.
게임 개발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온갖 시스템과 기믹의 선구자.
오죽하면 그에게 받은 게 없다는 개발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상민은 솔깃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 알지. 왜.”
“원래는 미대에서 산업디자인 전공했었다고 하더라. 게임 만들 생각도 없었대. 오히려 장난감이나 악세사리 제작에 관심이 더 많았다나.”
“진짜?”
김상민이 조금 놀라는데, 남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졸업하고 백수로 한참 지냈다고 하대. 그러다가 부모님 인맥으로 회사 들어갔지.”
“역시 인맥이 최고구만.”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미야모토는 게임 소프트보다는 패키지디자인 쪽 일밖에 안 했다더라. 입사하고서 게임 제작 프로젝트에 합류한 것도 반쯤 우연이었고.”
“그러다가 대박을 터뜨린 거네.”
“낙하산인 줄 알았는데, 그 낙하산이 공수부대였던 거지.”
“돌았네.”
이쯤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뭘 말하려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지?”
“좋은데도 묘하게 섭섭하고 그렇네.”
“아. 답답하다.”
할 말이 있는데 안 나온다.
적절한 말이 없다.
가까운 미래, 이들의 기분을 정확하게 대변해 줄 단어가 생겼다.
바로, 현자 타임이었다.
담배 타임 중에 현자 타임을 느끼는 자들.
그것이 이들이었다.
“이 게임 대박 칠 것 같냐?”
“음.”
남운의 질문에 상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대박이라면 어느 정도.”
“아무 곳에서나 건물 하나 살 정도.”
“최소 10억은 벌어야겠네.”
10억이라.
쉽게 입에 올리기에는 좀 너무 큰 숫자다.
상민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10억은 무슨. 턱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일이나 하러 가자.”
< 현자 타임 > 끝
ⓒ 이한이™
< 더덕주 >
처음 코인 소프트와 접했을 당시, 남운이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서로 배워가면서 하자고.
그때만 해도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실제로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그 말이 실로 적절했다.
“으음.”
양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앞에 노이즈가 낀 것처럼 침침했다.
‘이펙트 작업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네.’
처음에는 잘 몰랐다.
컨셉과 도트 문제만 어떻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는데, 실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펙트 작업이었다.
이게 정말 토가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도트라면 어떻게 노가다로 때울 수라도 있지, 이펙트는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
그렇다고 어쩔 수 있나.
책을 쌓아놓고 차근차근 공부하는 수밖에.
‘미래에는 동영상 교재가 넘쳐나는데, 책으로 배우려니까 너무 딱딱하네.’
이 부분이 아쉽다.
미래엔 인터넷만 찾아보면 강의 영상이 널려서, 큰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양질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이렇다.
인터넷의 단편적인 정보를 참고하던가, 아니면 책을 붙잡고 머리가 깨지도록 씨름해야 한다.
정보가 한정된 사회다.
‘이런 식으로 머리 아프게 제대로 공부해 보는 게 오래간만인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영상편집 분야도 선점해 볼까.’
영상편집 기술이 대중에게도 널리 보급되기 전에, 아예 이쪽에서 먼저 손을 뻗어 보는 건 어떨까.
나름대로 사업성은 보인다.
뭐, 빨라 봐야 10년은 지난 뒤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펙트 공부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맨땅에 헤딩인 것도 아니었다.
“저, 유미 씨.”
내게도 선생님이 있었다.
“네.”
“지난번에 추천해 주신 책 읽고 왔는데요. 여기가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어느 부분인가요?”
“여기요. 선에서 면으로 구성한 다음, 다시 점으로 분해하라는 부분이 어렵네요.”
“아, 여기 말이죠?”
그녀는 내 옆에 끈기 있게 붙어서는, 마치 학원 강사처럼 차근차근 가르쳐 주고는 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장 기초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머릿속에 가상의 불길이 있다고 가정하고, 어느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 어떤 부피를 가질지. 또 어떤 입자를 구성할지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상상해 보는 거죠. 툴은 그다음 문제예요.”
말은 쉽지만 어렵다.
‘무슨 무협지 구결도 아니고.’
나는 끙끙대며 고민하다가도 결국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제가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썩 쉽지 않네요.”
내 말에 그녀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재하 씨가 상상력이 부족하다뇨. 여기 컨셉트 스케치 혼자 다 쌓은 사람이 누군데.”
그거야 참고할 자료가 좀 많아서 가능했고.
목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아무튼, 그녀는 서글서글 웃더니 말했다.
“사실, 지금 재하 씨 정도면 엄청나게 빠르게 느는 거예요.”
“그런가요?”
“물론이죠.”
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이펙트는 경험으로 다뤄야 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1년을 배워도 기초가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누구나 처음에는 느린 게 당연하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재하 씨 센스 자체는 정말 좋아요. 다른 사람한테 이게 초심자 작업물이라고 하면 안 믿을걸요? 어쨌든, 먼저 이쪽을 보시면요.”
나긋나긋 웃으며 실제 작업물 예시를 보여주는데, 이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떠먹여 주는 기분이었다.
‘편안하다.’
어쩌면 유미 씨를 영입한 게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분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녀는 이펙트 같이 내가 놓친 부분 외에도,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 주었다.
내 머릿속의 흐느적거리는 아이디어를 실무에 맞게 가다듬는 일부터 시작해, 전반적인 도트 작업의 방향성부터 직원들 사이에서의 업무 조율까지.
안 건드는 일이 없다.
사실상 그녀가 이 팀의 팀장이라 느껴질 수준.
대단하다.
‘이런 걸 올라운더라고 하던가.’
보통 작은 회사와 큰 회사의 차이에는, 올라운더와 스페셜리스트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작은 회사일수록 업무 구분이 두루뭉술해 여러 방면에서 적당한 능력을 발휘하는 인재가 선호되는 반면, 큰 회사는 주어진 분야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를 우대하게 된다.
유미는 전자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잘하는 팔방미인.
큰 회사라면 모르겠지만, 우리같이 작은 팀에서는 그 이상 바라기 어려운 인재였다.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도 분명 인정받으셨을 것 같은데, 왜 나오셨지.’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내 행운에 감사할 뿐이었다.
“노민 씨, 맡긴 건 해결하셨어요?”
“아, 잠시만요.”
그녀는 노민의 교육도 굉장히 잘 맡아주고 있었다.
노민은 정적인 일러스트는 잘 그리더라도 애니메이팅에서 큰 약세를 보였는데, 이 부분을 그녀가 많이 도와주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말고, 먼저 큼지막하게 검은색 덩어리로 만드는 거예요. 덩어리만 봐도 어떤 동작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까지 좁혀 봐요. 그다음에 각 파츠 별로 나눠서 동작을 구성하는 거죠. 우선 크게 머리, 몸통, 양팔, 양다리로 각각 덩어리를 나눠 봐요. 거기서 익숙해지면 조금씩 더 쪼개는 거예요.”
이렇게 나와 노민이 그녀의 신세를 지는 한편, 경남은 묵묵하게 자기 할 일만 하고는 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훌륭한데요?”
“그럼 다음 작업 진행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소통이 모자란 건 아니고, 딱 맡은 일을 한다는 느낌.
‘듬직하네.’
무뚝뚝한 게 외려 장점으로 보였다.
한편.
의외로 게임 제작에 활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 좀 이상한데요? 벽 뚫고 들어가요.”
“오. 이거 재밌다.”
JH 디자인 식구들이었다.
개발이 진행되며 내부적으로 테스트를 진행할 일이 많았는데, 심심하면 그들을 불러서 부려먹었다.
‘멤버 구성이 딱 적당하단 말이지.’
가영이와 규태가 적극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하드 게이머라면, 한설 선배와 지훈 선배는 어쩌다가 하는 정도.
나름대로 구성이 알맞았다.
여기에 동민이도 종종 참여했다.
이게 계기가 되었을까.
“동민이 숙제 다 해 왔어?”
“네.”
아예 김상민에게 공부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김상민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 강사로 일을 해왔는데, 내친김에 지훈과 함께 동민의 교육을 양분했다.
“지훈 씨, 동민이 국어는 어떻게 돼 가요?”
“이제 슬슬 2등급은 안정적으로 나오는데, 아직 한참 부족하죠. 모의고사에서 1등급은 만들어 둬야 실제 시험에서 마음이 편합니다.”
“한예원은 영어 비중이 낮은 편이죠?”
“국어 배점의 3분의 2 정도? 3등급만 넘기면 큰 지장은 없습니다.”
“그럼 우선은 영어는 단어장 암기 위주로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기출 문제풀이는 다음 달부터 하죠.”
가끔 두 사람이 동민이 교육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면, 난 괜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짜식, 복 받았네.’
저런 교육을 공짜로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다고 동민이가 그냥 받아먹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감사의 마음을 표출하고는 했다.
“토하젓?”
“원장님이 형 누나들 밥반찬 하라고 싸주셨어요. 맛있어요.”
“크.”
자꾸 뭘 가지고 왔다.
주로 사소한 먹을거리들.
명문대생 둘 달고 과외 하는 것치고는 썩 소소한 수업료였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려서부터 젓갈 맛을 알다니. 커서 크게 되겠네.’
장하다.
“나도 토하젓 좋아하는데.”
한설 선배가 토하젓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보고는 눈빛을 빛냈다.
“누나도 토하젓 좋아해요?”
“우리 아빠가 환장해.”
“그러면 좀 싸가세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
“왜요?”
“가져다 줘 봤자 안 먹을걸?”
안 먹는다니.
조금 전에 아버지가 토하젓에 환장한다고 하지 않았나.
의문을 품으려니 그녀가 말했다.
“딸내미가 젓갈 가져왔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는, 먹기 아깝다고 냉장고에 쟁여둔 다음 썩기 직전까지 안 먹을 게 뻔해. 그 꼬라지를 보느니 먹을 사람이 먹는 게 낫지.”
“······.”
응.
그 아저씨 좀 팔불출 같긴 하더라.
이쪽 부녀관계도 좀 독특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냥 너희 집 냉장고에 넣어놔. 나도 가끔 놀러 가서 맛이나 보자.”
“놀러 오시게요?”
“왜, 싫어?”
“그런 건 아니고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책상 위에 토하젓이랑 백반만 놔두고, 옹기종기 앉아서 퍼먹는 상상을 잠시 해 봤다.
‘재밌겠다.’
마침 코인 소프트 직원들도 우리 집에서 자주 지내는데, 이제부터 아예 아침밥을 거기서 다 같이 때우는 건 어떨까.
식재료랑 밑반찬도 좀 사놔야겠네.
한 번 상상이 시작되자, 뒤로 미루기가 귀찮아졌다.
“누나, 오늘은 다 같이 회식이나 하러 갈래요?”
“회식? 갑자기?”
“그냥 그런 기분이에요. 일찍 정리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일하다 보면 괜히 소풍을 나온 듯 상쾌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일은 적당히 풀리고, 날씨는 좋고, 괜히 여유로운 날.
“대충 정리하고 회식하러 갑시다!”
내가 외치는데, 남운은 기다렸다는 듯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회식 좋지. 뭐 먹을래? 곱창? 치킨?”
꿈이 크구나.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예로부터 부모님에게 회식 메뉴는 돈 내는 사람이 정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야, 너 설마 또······.”
남운이 살짝 볼멘소리를 뱉는 순간이었다.
지나가던 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애초에 기대를 하니까 실망하는 겁니다.”
“······.”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잘한다.
고기 사다가 집에서 구워 먹자고 하려 그랬는데, 대체 뭔 말을 하고 있대.
*
얼마간 뒤, 방학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직감했다.
‘슬슬 때가 찾아왔다.’
그동안 폐관 수련은 할 만큼 했다.
이젠, 그동안의 성과를 들고 시험대에 오를 시간이 왔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모처럼 이종이 교수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재하 학생,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바쁘게 지냈습니다. 흐흐. 이거 선물입니다.”
나는 그에게 슬쩍 챙겨온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유리병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뭐죠?”
“더덕주입니다.”
“······ 흠.”
“이번에 저희 작업실 식구가 된 사람한테 받아왔어요. 환절기에는 감기 걸리기 좋다는데, 면역력에 더덕주만 한 게 없답니다. 불면증에도 좋다네요.”
“호오.”
교수님의 호수같이 편안한 눈빛에 작은 욕심이 스쳐 지나갔다.
‘빙고.’
학부생 중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자주 접한 나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소한 변화였다.
‘나이대가 있으신 분들은 이런 약주를 좋아하시지.’
이종이 교수는 얼핏 보기에는 세련되고 점잖으면서도, 입맛은 옛날 사람의 그것이었다.
“기왕 받은 선물이니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그와 짧게 근황을 나눈 뒤, 바로 본론을 말했다.
“교수님. 잠깐 이것 좀 봐 주세요.”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는 몇몇 자료를 실행시켰다.
반쯤 개발된 던전 앤 스토리의 실기 스크린샷이 주룩 재생되었다.
“이게 뭐죠? 옛날 오락실 게임 같군요.”
이종이 교수가 의아해하는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 말한, 만들고 있다던 게임이에요.”
“······!”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물었다.
“설마, 그때 보여준 것과 같은 게임이라는 말은 아니겠죠?”
그가 아리송한 목소리로 묻는데,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네. 바로 그겁니다. 그동안 열심히 엎고, 엎고 또 엎었더니 이렇게 됐네요.”
“허어, 그때 그게 이렇게까지 바뀔 수도 있군요.”
이종이 교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 달 사이에 완전히 바뀐 그래픽에 깜짝 놀란 모양.
그래.
내가 보여준 건, 누가 보면 그때와는 아예 다른 게임이라고 오해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드디어 알파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프로토타입을 졸업했다.
이젠 본격적인 게임 플레이가 가능한 단계.
비록 구현된 건 일부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아는 던전 앤 스토리의 핵심 재미는 대강 완성됐다.
이제부터는 컨텐츠를 채워 넣는 단계다.
‘여기까지 왔구나.’
묘한 감동에 잡혀 있는데, 이종이 교수가 흐뭇한 목소리로 물었다.
“JH 디자인은 다른 일도 많을 텐데, 일이 벅차지는 않나요?”
“감수했어요. 딱 요즘 시기가 게임 시장이 성장하는 와중이라고 생각해서요. 늦으면 진입이 어려워질 수도 있고, 미래에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이쪽에 집중했습니다.”
“음, 선택과 집중을 했군요.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실, 제가 아는 옛 지인 중에도 큰 게임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있겠지.
그리고.
내가 오늘 여기에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이종이 교수에게 이런저런 훈화를 듣기를 잠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교수님.”
“예.”
“혹시, 게임 회사에 아는 현업자가 있다면, 한 분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더덕주 > 끝
ⓒ 이한이™
< 꼼수 >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근황 보고는 그냥 겸사겸사하는 거고, 이게 본론이었다.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것.
“사람을 소개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이유를 듣고 싶네요.”
“네.”
나는 이종이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가 대학생들 위주로 모인 팀이다 보니까,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다가 막힐 때가 많더라고요.”
“음, 게임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이니, 배우기도 힘들겠습니다.”
“네. 학원이라도 다닐까 했는데, 배울 곳도 잘 없더랍니다. 진짜 프로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가 궁금해요.”
지금은 말 그대로 대학생 동아리처럼 게임을 만들고 있다.
안 되는 부분은 누덕누덕 기워가면서.
언제까지 이러겠는가.
진짜 큰 팀들의 작업 프로세스를 배울 필요가 느껴졌다.
천천히 머리가 깨져 가며 요령을 습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지름길이 있다면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물론.
이것도 부가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내가 오늘 이종이 교수님의 작업실에 방문한 데는, 이보다 훨씬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슬슬 던전 앤 스토리를 세상에 보여줄 때가 왔다.’
영업을 뛰어 볼 생각.
궤도에 오른 던전 앤 스토리를 어떤 방식으로 홍보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부터 뻗어갈 생각이었다.
‘이종이 교수님을 통해서 퍼블리셔 측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다만, 노골적이지 않고 공손하게.
“음.”
이종이 교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기를 한참.
문득 한 회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혹시 넥스트라는 이름의 회사를 아시나요?”
넥스트.
대뜸 아는 이름이 나왔다.
게임 만드는 사람이기 전에, 한 명의 게이머로서 넥스트를 모를 리가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 이런저런 게임을 퍼블리싱하는 회사 아닌가요?”
그냥 널린 회사가 아니다.
근미래 국내 게임 회사 중 시가총액 10조를 최초로 돌파하며, 3대 게임 회사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공룡기업이었다.
문어발식 개발과 과금 체계로 게이머들 사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기업의 실력은 매출로 평가받는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배울 점이 많아.’
무엇보다도.
넥스트라면 전생에 던전 앤 스토리를 서비스해서 수십 배로 키운 회사이기도 했다.
넥스트 하면 던전 앤 스토리.
던전 앤 스토리 하면 넥스트.
상식이다.
이런 식으로 인연이 닿는다면 내게도 환영일 따름.
‘원래는 전생의 코인 소프트처럼 학교 선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를 바랐지만, 사무실까지 이전한 와중에 마냥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이미 운명은 한 번 뒤집혔다.
전생의 그것대로 진행되리라 기대하며 무작정 기다리기는 어렵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을 따라야 하는 법.
그렇다면, 이제 이쪽에서 찾아가는 게 한 가지 방법일 듯싶다.
‘교수님이 알 정도의 사람이라면 꽤 높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 넥타르의 박태수 부장처럼.’
기왕이면 우리 게임이 품은 가능성을 한눈에 파악할 정도의 안목을 갖춘 사람이 좋을 텐데.
나는 이종이 교수에게 물었다.
“혹시 넥스트에 아는 친구분이 계신가요?”
“예.”
이종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제 먼 후배가 그쪽에서 아트 디렉터 자리에 있습니다.”
“······!”
대뜸 아트 디렉터가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뭔가 영향력이 있어도 한참 있는 사람이겠지.
“학생만 괜찮다면 한 번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혹시 최대한 빠르게 약속을 잡을 수 있을까요? 마침 요즘 막히는 게 많았거든요.”
심장이 두근거리니 말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종이 교수는 짧게 답했다.
“음, 지금 바로 연락해 봐야겠군요.”
지금 바로 연락이라.
빠르다.
‘역시 이종이 교수님이야.’
딸칵.
빠르다.
저쪽에서 전화를 받는 것마저 빠르다.
‘역시 이종이 교수님의 후배야.’
그는 아예 전화기를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그럼, 잠시 통화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불과 5분 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이종이 교수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내일 시간 괜찮은지 묻는데, 내일 점심 어떤가요?”
“······.”
진짜 빠르네.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달리 없었다.
“시간이야 썩어 넘칩니다.”
“그럼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기본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였다.
뭔가 아쉽다.
아무리 내가 필요해서 부탁하려고 왔다지만, 딱 할 말만 하고 나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저, 교수님.”
나는 이종이 교수에게 슬쩍 물었다.
“제가 여기 주변에 죽여주는 소머리국밥 집을 하나 알고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음.”
이종이 교수는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소머리국밥집이라면, 아마 수육도 팔겠군요. 학생이 사는 건가요?”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나는 호탕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국밥 두 그릇에 수육 대짜 하나 어떠십니까. 석관동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좋군요.”
우리 둘은 기다렸다는 듯 큭큭 웃으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득 내 기분이 묘했다.
‘요즘 들어서 술을 마시는 일이 부쩍 늘었네.’
그런데.
전생의 음주와는 어딘가 달랐다.
‘뭔가 다르단 말이지.’
그때는 뭘 잊으려고 마셨다면, 이번 생의 음주는 더 깊게 기억하기 위해서 마신다.
JH 디자인의 건승을 위해.
직원의 승진을 기념하기 위해.
또 제자로서 스승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
···
국밥이랑 같이 먹으면 한 그릇 뚝딱이라.
*
이튿날.
나는 이종이 교수의 소개를 받고 강남구 테헤란로의 어느 회사로 향했다.
넥스트였다.
‘회사가 멋있네.’
최근에 새로 지었다고 하였던가.
회사 겉면에 온통 유리가 발린 것이 나름 미래지향적인 맛이 살았다.
그래, 회사라면 모름지기 이래야지.
위잉.
자동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 갖가지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1층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 1층 카페가 있었다.
나와 넥스트 측 직원이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어디 보자. 아직 시간 여유가 좀 있네.’
들떠서 그랬는지, 약속했던 것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그렇다고 그냥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분위기를 익힐 좋은 기회였다.
“아, 힘들다.”
“힘들다.”
목에 카드를 건 직원들이 초췌한 얼굴로 카페에 앉아 커피를 생명수처럼 기울였다.
“아, 힘들다.”
“힘들어 죽겠네.”
“일하다가 죽어도 보험 처리되나?”
‘······.’
저걸 보러온 건 아니다.
세상은 아름답다.
나는 좀 더 좋은 것만 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사람만 빼놓고 본다면, 건물 자체는 나무랄 것이 없었다.
‘나중에는 JH 디자인도 이런 회사로 키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사무실 두 개를 쓰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싶다.
나아가, 건물 하나를 쓰고 싶다.
그때쯤이면 JH 디자인은 이미 작은 회사라고 불리기 어렵겠지.
내 꿈에도 조금은 가까워진 상태일 터.
그만큼 회사를 그만큼 키우려면 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우선, 내가 아는 전생의 디자인 에이전시 중에 이만한 건물을 통째로 쓰는 곳은 없었다.’
그나마 1위라고 할 수 있을 회사, 메가브랜딩조차 직원이 100명이 안 되었다.
사업 규모 탓일까.
‘디자인이라는 업무 특성상, 한 분야만 파서는 아무래도 매출을 불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겠지. 제대로 회사를 키우려면, 결국에는 이것저것 다 할 수밖에 없어.’
이 부분은 미리 고민해 둘 가치가 있다.
나는 이번 코인 소프트 일로 조금 더 넓게 생각하게 되었다.
기존 디자인 에이전시, 좋다.
그 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자.
‘아예 모든 분야의 디자이너를 파견하거나 공급하는 회사는 어떨까.’
말 그대로 디자이너의 에이전시다.
파견 회사와는 같으면서도 같지 않다.
디자인 에이전시란 디자인이 필요한 분야에 디자인을 제공하는 기업.
이걸 더 넓게 봐서, 게임 회사에 같은 방식으로 서비스한다면 어떨까.
‘원화가가 필요한 곳에 탄력 있게 공급하는 거야.’
여기서 좀 더 넓게 보면, 만화가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웹툰 에이전시처럼.
‘그렇게 일을 다양하게 다루려면, 우선은 회사의 브랜드 자체를 키워야겠지.’
브랜드를 쌓는다는 건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다른 회사라면 꾸준한 홍보가 필요하겠지만, 디자인에서는 포트폴리오가 곧 신뢰다.
그리고 포트폴리오는 단기간에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소한 일 하나 대충하지 않고 쌓아가는 것. 그게 우리의 큰 자산이 될 거야.’
요즘은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돌아간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떤 일이 유망할지.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고 산다.
‘좋아, 이만하면 됐다.’
충분한 사색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보는데.
“······.”
아직 시간이 20분도 안 갔다.
‘와.’
나름대로 유익한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20분이라니.
쯧.
적당히 빨리 왔어야 했는데.
약속 시각까지 한참 남은 상황.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놀면 뭐하나. 이런 시간이라도 알뜰살뜰 활용해야지. 도트 작업이라도 손보고 있자.’
어지간한 그래픽 작업은 PC 사양을 타는 편이지만, 도트는 달랐다.
점만 찍으면 되다 보니 워낙 요구하는 사양이 낮은데, 오죽하면 인터넷 서핑만도 못할 지경.
‘일하자. 일.’
나는 그렇게 작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군가가 옆에서 내 작업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
중년쯤 되는 남자.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정겹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인사성도 바르네.
근데······.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