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46)
두 번 사는 미대생 46화(46/93)
*
집 밖으로 나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 한설 선배가 물었다.
“누구야?”
굳이 설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한설 선배의 성격을 떠올리고는 그냥 설명하기로 했다.
“동생이요.”
“학교 후배?”
“친동생이요.”
그 순간이었다.
한설 선배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동생도 있었어?”
“네. 여동생이요. 고등학생 2학년.”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안 물어보셔서요.”
“······ 으음, 그런가? 아무튼, 너 가족이랑 원래 연락 안 하고 산다면서.”
“거의 안 하긴 했죠.”
정확히는, 부모님이랑만 안 했다.
이번 생에는 통화 한 번도 안 했고, 특히 전생에는 거의 남남처럼 살았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할 지경.
“그래도 동생이랑은 가끔 연락하고 살아요. 부모님이 할 말 있으면 동생한테 전화시키거든요.”
“이번에도 그래서 전화한 거고?”
“그게 좀 사정이 복잡한데요.”
남한테 당당하지 못한 가족 사정을 밝히려니 썩 껄끄럽다.
나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누나, 혹시 코믹 페스타라고 아세요?”
“코믹 페스타?”
그녀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게 뭔데?”
역시 모르는구나.
모를 수도 있지.
내가 알려줄 생각으로 입을 연 찰나였다.
“어? 나 알아.”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가영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일어나 거실 소파에서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한설 선배가 입을 열었다.
“가영이는 알아?”
“네. 코믹 페스타 그거 만화 축제예요. 막 만화 그리는 사람들 모여서 부스 열고 자기 상품 팔고, 코스프레하는 사람들도 모이고 그러는 축제.”
“한국에 그런 것도 있어?”
“꽤 오래됐어요. 모이는 사람도 많고.”
그 말대로였다.
코믹 페스타, 일명 코믹페스는 한국에서 가장 큰 만화 축제인데, 하루에도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 행사였다.
그게 조만간 열릴 예정.
그리고, 내 동생.
이재서도 그 일 때문에 내게 연락했다.
“신기하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행사가 진짜 많구나. 가영이는 그런 데를 어떻게 알았어?”
“만화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알아요. 그리고.”
가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도 거기에 제 작품 출품하거든요.”
“출품?”
“동인지요. 그러니까 얇은 만화책 그려서 내기로 했어요.”
윤가영이 뿌듯하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걸 언제 다 준비했대?”
“나 사무실에서 일 할 때 빼고는 집에서 만화만 그리잖아.”
대단하다.
사무실 일도 바쁜데, 집에 가서도 그림을 그리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워커 홀릭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만화 좋아해서 만화가 하겠다는 애니까, 코믹 페스타에 부스 내는 것도 없을 일은 아니지.’
그저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니까 괜히 신기할 따름.
한설 선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재하 동생은 왜?”
“아. 이번에 코믹 페스타에 구경을 좀 가고 싶다고 해서요. 겸사겸사 저희 쪽에 며칠 머물러도 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렇다.
코믹페스는 서울과 부산에서만 열리는 행사다 보니, 재서가 사는 시골 동네에서는 열리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마침 방학이니 서울에 올라오려는 것.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겸사겸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나 확인할 생각이겠지.’
부모님의 은밀한 임무를 받은 것.
전생에 재서가 왔다 간 이후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영향이 없지 않으리라.
“얘가 이제 막 고등학생 2학년인데, 만화에 관심이 많아요.”
“읽는 거? 아니면 그리는 거.”
“둘 다요.”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다.
한때는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것도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의 길을 걸은 나와는 반대로, 내 동생 재서는 그럴 깡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그럭저럭 취미생활 수준에서 정리하고 괜찮은 인문계 대학에 입학.
착실한 성격답게 스펙을 잘 쌓고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보면 전생의 나보다는 아득히 나은 인생이었다.
그런 재서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점이었다.
‘좀 많이 잘 그리지.’
단순 취미생활로 유지했음에도 인터넷에서 나름 유명세를 가졌던 게 그녀였다.
가끔 커미션이나 외주로 용돈벌이를 했다고도 들었고.
“재하 여동생이라······.”
지훈 선배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생겼을까?”
“재하랑 똑같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걔도 국밥 좋아하나?”
별 이상한 말이 다 올라온다.
그렇게 할 일 없이 노닥거리는 찰나였다.
“으, 카레 냄새.”
침실 안쪽에서 남운이 걸어 나왔다.
자기 이름 언급되니까 귀신같이 일어난 모양.
그가 찌뿌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누가 아침부터 카레를 끓여.”
“제가요.”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재하야, 먹을 거 없으면 그냥 국밥 먹어도 돼.”
“······.”
해장 카레가 그렇게 이상한가.
아무튼.
이쯤에서 나머지 식구들도 하나하나 깨어나기 시작했다.
“식사하세요.”
“카레?”
“아침부터 웬 카레?”
그들 또한 해장 카레의 효능에 대해 의문을 표했지만, 먹으면서 점차 깨달았다.
“······ 은근 속에서 받아주네?”
“왜 괜찮지?”
“그러니까 이거 잘 먹힌다니까요.”
“이거 묘하게 자존심 상하네.”
자존심 상할 것까지야.
그렇게 여덟 명 남짓한 인원이 아침밥을 다 먹었을 무렵.
나는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곧 제 여동생이 여기 놀러 옵니다.”
“······ 여동생?”
“재하한테 여동생이 있었어?”
식구들이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걔도 국밥 좋아하나?”
“······.”
조금 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반응이었다.
나는 딴지를 걸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대충 넘긴 뒤 말했다.
“그런데, 가능하면 좀 잘 대해주고 싶어요.”
“재워주고 먹여주면 됐지. 뭘 더 하려고?”
남운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말이죠. 제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부모님들이 동생한테 전해 듣고 판단하실 것 같거든요.”
“음. 그래서 부모님한테 잘 보이고 싶다?”
“네.”
그렇다.
처음에는 부모님에 대해서 별생각 없었지만, 어제 다시 생각했다.
‘가족은 필요해. 관계 회복도 필요하고.’
전생의 내게 가족이란 내 의견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장애물이란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기왕 다시 돌아온 삶이다.
이번 생에 느낀 가장 큰 점이라면, 인간관계는 외면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애써 외면하면 곪는다.
언제 곪는가 하면.
돌아가신 뒤에 곪는다.
‘그때는 이미 늦었었지.’
이유 모를 공허감이 쭈욱 남았다.
해소할 방법이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남았다.
말도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무언가.
그게 날 좀먹었다.
그 탓에 한설 선배의 부모님을 봤을 때 그 부녀관계가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부모님과의 관계를 굳이 해소할 필요가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고, 그 끝에 결론을 내렸다.
‘시도해 보고 생각해도 안 늦는다.’
구체적인 건 나중에 생각하면 그만이다.
전생에는 서로 외면하다가 끝내는 연락 한 번 안 하는 남남 같은 사이가 됐다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관계를 회복해 보고 싶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터.
하지만 괜찮다.
한 번에 풀리는 인간관계 같은 건 없다.
이번 일을 징검다리로 삼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고, 내 의지는 굳건하다.
“조금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뭘, 가능하면 부모님들한테는 잘 보이고 싶은 게 자식 마음이지.”
남운이 크게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 안 드린지 오래 됐다고 했지?”
“네. 제가 미술 하는 거 싫어하시거든요. 사정이 있긴 한데······.”
이야기가 딴 길로 새려는 찰나.
나는 애써 화두를 잡은 뒤 말했다.
“아무튼, 제가 남들 못지않게 잘살고 있다는 걸 동생을 통해 부모님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떻게?”
“그게 말인데요.”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한 번 고민해 봅시다.”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 해장 > 끝
ⓒ 이한이™
< 사기극 >
카페 헤븐즈 도어.
망해갔다가 살아난 가게.
학기 중에는 시끌벅적했던 만큼, 반대로 방학 중에는 한산했다.
‘여기 오는 것도 오래간만이네.’
최근 들어서는 거의 방문을 안 했다.
코인 소프트와의 일이 바빠지면서 사무실에서 나올 일이 줄었기 때문.
그래도 간판만 봐도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었다. 게임 속 초보자 마을로 돌아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사장님. 안녕하세요.”
짤랑.
문을 들어가며 큰 목소리로 인사하자, 사장님이 밝은 표정으로 반겨 주었다.
“학생, 요즘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일이 너무 바빴어요.”
“일? 어떤 일? 아니다, 잠깐. 일단 뭐 마실지부터 정해. 손님도 없는데 느긋하게 이야기나 듣자.”
사장님은 허겁지겁 서랍을 뒤지더니, 곧 커피 두 잔과 초코 브라우니를 챙겨 자리로 가지고 오셨다.
그 모습도 오래간만이다.
일에만 치이다가 보니 괜히 힐링되는 기분.
“요즘 일이 좀 어땠냐면요.”
나는 그에게 최근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코인 소프트와 있었던 일부터,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가족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사장님은 나이가 있는 사람이다 보니, 자세한 상담을 받아 보고 싶었다.
“제가 괜한 일을 하는 걸까요?”
“음.”
사장님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아니지. 가족이랑은 자주 연락을 안 하면 말이야, 나중에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돼요. 그러기 전에 조심하는 게 좋아.”
“가치관이 너무 안 맞아도 그런가요?”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치관은 안 맞아.”
“그래요?”
“응. 중요한 건 그걸 티를 내느냐 마느냐인데, 가까운 사람일수록, 마음이 열릴수록 숨기기가 힘들어지지. 애인도 그렇잖아. 처음에는 좋다고 사귀다가도, 본모습을 드러내면 금방 서로 깨지고 미워하고. 가족은 가까우니까 더 그런 거야.”
호록.
사장님은 커피를 살짝 마시더니 이어서 말했다.
“누구나 다 살다 보면 자기 나름의 가치관이 생기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단단하게 굳어져서 안 바뀌더라. 나도 그랬고, 이 가게도 그렇고.”
교과서와도 같은 조언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님이 말하니 새삼 와닿는 조언이기도 했다.
“가족이랑 잘 안 맞을 수 있는데, 그래도 가족들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내가 어떤 사람한테 들은 말인데,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도 세 다리만 거쳐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
세 다리라.
부모님들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천천히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말했다.
“저도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요.”
“그래. 역시 학생은 현명하다니까. 지금 바로 연락도 해 보고.”
“······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고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버지가 저랑 말 섞기도 싫어하시거든요.”
“그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아?”
“제가 서울에 올라올 때만 해도 거의 가출이나 다름이 없었어요.”
말 그대로 가출이었다.
그때만 해도 패기에 가득 차 있었다.
입시 미술을 공부한다는 것도 거의 비밀로 했고, 학자금도 내가 알아서 모았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다.
무슨 환쟁이 노릇이냐며 굶어 죽기 딱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고, 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도망치듯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뭐,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지만.’
지금 와서는 별 미움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연락을 안 하는 건.
그래.
사장님의 말마따나 내 머릿속 가치관이 나이를 먹어서이리라.
‘굳을 만큼 굳었지.’
슬슬 지겨운 참이었다.
“역시 부모님들이랑은 화해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래. 나도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다만, 남이랑 척지면서 살면 그게 가슴 속에 독이 돼서 평생 남는다니까.”
“저, 사장님. 그래서 그런데요.”
나는 살짝 단호해진 마음가짐으로 물었다.
“혹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 도와달라고? 뭘?”
그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카페 전용 좌석에 앉아서 기다리기를 한참.
곧 가게 현관 벨이 딸랑 울렸다.
그리고.
한 여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네.’
나랑 닮았지만 나보다는 훨씬 사람다운 생기가 가득한 여학생.
재서였다.
그녀는 가게 안으로 와서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오빠?”
“그것이 나다.”
그녀는 대뜸 자리로 달려와서 앉더니 말했다.
“우와! 오빠 뭐야? 살 많이 쪘다. 못 알아볼 뻔했네.”
“······.”
1년 만에 만나서 대뜸 하는 말이 살쪘다니.
짜증이 나기 전에 서럽다.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점이 더 서러웠다.
그래도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다.
작년 초에만 해도 내가 지나치게 말랐던 게 사실이니.
······
그래도 내심 찔려서 물어봤다.
“살 뺄까?”
“아니.”
그녀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 백 배 낫다. 오빠 예전에는 해골이었어. 해골. 이젠 밥 좀 잘 먹고 다니나 보네.”
내심 안심이 들었다.
재서의 얼굴을 보는 게 벌써 1년도 전, 전생까지 합치면 그 이상임에도 반갑게 느껴졌다.
“짐은 잘 챙겨 왔고?”
“응. 갈아입을 옷이랑 용돈.”
“얼마?”
“비밀.”
“혹시 부모님들이 이상한 말은 안 했고?”
“부모님한테 이상한 말이 뭐야. 말뽄새 좀 봐.”
“시끄러워. 나랑 부모님 사이 껄끄러운 거 알잖아.”
“음, 별거는 아니고, 오빠 망했을 거라고 아주 매일 제사를 지내던데.”
“······.”
응.
분위기가 많이 안 좋긴 하구나.
“오빠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으면 당장 잡아 올 거라고 막 난리가 아니었던 거 알아?”
역시 나 염탐하라고 보낸 거 맞구나.
전생에 재서가 서울에 다녀간 뒤로 부모님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는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이게 그 원인인 듯했다.
‘여기서부터 다잡자.’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재서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얼핏 보기에는 어른스러운 척하는 모습이지만, 사실 나랑 부모님 사이에 끼어서 눈치만 보다가 일찍 철이 든 모습이기도 했다.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공부는?”
“전교 10등 안 턱걸이.”
“대학은 잘 가겠네.”
“오빠보다는 잘 가야지. 안 그러면 엄마 아빠한테 잔소리 장난 아닐 텐데.”
그녀가 흐흐 웃었다.
그렇게 모처럼 만나서 근황을 나누고 있기를 한참.
난데없이 사장님이 등장하더니 말했다.
“학생,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요?”
“아.”
드디어 그 타이밍이군.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사장님. 여기 재서예요. 재서야. 이분이 여기 가게 사장님.”
“재하 학생 여동생이었구나. 반가워요. 학생.”
“안녕하세요.”
재서의 예의 바른 인사에 사장님은 흐뭇하게 웃기를 잠시.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리에 눌러앉았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칭찬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휴. 재하 학생 동생 아니랄까 봐 쏙 빼닮았네요. 미녀야, 미녀.”
“네? 네. 감사합니다······.”
“공부도 잘한다면서요? 재하 학생이 동생 자랑을 그렇게 많이 하더라고요.”
“······.”
사장님이 계속해서 말을 퍼부었다.
뭔가 칭찬이 많은데, 두서가 없다.
어색하다.
이 느낌은 뭘까.
잠시 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망했네.’
아뿔싸.
이 가게가 장사 못 해서 망할 뻔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그래.
내가 대화를 유도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긴 했다만, 그게 이런 방식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재하 학생 공부 되게 잘해요. 학점도 좋고. 응. 성실한 데다가 친구도 많이 데려오고. 요즘 이만한 학생이 잘 없지.”
듣는 사람이 다 불편해질 정도로 작위적이기 짝이 없는 화술.
그게 끊이질 않았다.
명색이 카페 사장이라서 언변이 좋기를 기대했더니마는, 대화를 이끌고 나가는 게 아주 어거지 중에 상 어거지였다.
나조차도 민망함을 못 이겨 두 눈을 질끈 감을 정도.
‘내가 손님이었다면 도망쳐서 두 번 다시 안 올 거야.’
나는 이 가게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게 괜히 그랬던 게 아니라는 사실만 되새겼다.
그렇게, 나도 재서도 부담스러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찰나였다.
사장님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제가 말주변이 없죠? 미안해요. 반가워서 주책을 좀 떨었어요.”
“아, 아니에요. 그······.”
재서가 뭐라 말하려는데, 사장님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은요. 내가 재하 학생한테 받은 게 많아요. 우리 가게의 은인이죠. 은인.”
그 순간이었다.
“은인이요?”
재서의 눈이 동그랗게 뜨는데, 사장님이 서글서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럼요. 은인이죠. 원래는 이 가게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그런데 재하 학생이 리모델링을 해 줬죠. 여기 의자.”
사장님이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책상.”
그다음은 책상.
“선반.”
소소한 가구.
“저쪽에 걸린 그림도요.”
벽에 걸린 작품까지.
차례차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 보이죠? 전부 다 재하 학생이 새로 해 준 거예요.”
“······.”
재서는 눈만 깜빡거렸다.
사장님의 말을 믿기 힘들다는 눈치.
그런데, 여기서 사장님은 싱긋 웃더니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이 가게가 지금은 프랜차이즈가 됐는데, 벌써 점포가 열 개가 넘었어요. 종로, 강남, 홍대 어딜 가든 가게가 하나씩은 있습니다. 그것도 다 재하 학생이 봐준 거예요. 그렇죠?”
이번에는 나한테 바톤을 넘겼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타이밍은 나쁘지 않다.
이건 받아먹어야지.
나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 재서야. 헤븐즈 도어라고 검색하면 프랜차이즈가 하나 나오거든. 내가 거기 가게 디자인 다 했다.”
“오빠가? 진짜로?”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로열티로 계약해서 매달 입금도 들어온다. 사장님 연락처도 있어.”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지?”
“내가 뭐하러.”
“못 믿겠어.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데?”
“그게 말이지. 다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너 시간 많아?”
그렇게 자연스레 잡담이 이어져 나갔다.
1학기가 되고 나서부터 있었던 일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허언증으로 취급받기 딱 좋아 보이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을 해야 할 시긴데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건축과 선배들을 부려먹었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거짓말이다. 1학년이 무슨 선배를 부려먹어.”
“진짠데.”
“응, 안 속아. 내가 고등학생이라고 막 던지는 거 아니야?”
재서가 깔깔 웃으며 이렇게 말할 때마다 사장님이 시의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재하 학생 말이 맞아요. 학생이 사람 데려와서는 감독하면서 수당도 주고 그랬어요.”
“이것도 진짜라고······?”
재서의 눈은 연신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딱 좋다.
“음, 한예원 건축과는 내 수족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
한 번 티키타카 구조가 잡히자, 이후로는 레일 위에 올라간 듯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그렇게 내 작년 이야기를 풀기를 한참.
나는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느끼며 말했다.
“아참. 나 사업자도 냈다. 그때 같이 일했던 선배들이랑 같이 사무실도 구했어.”
“사무실?”
재서는 어느덧 이야기에 푹 빠진 표정이었다.
“응. 번듯한 사무실. 한예원에서 스타트업 프로그램으로 지원해 줬거든. 여기서 걸어서 금방인데, 구경 갈래?”
“사무실인데 나도 가도 돼?”
“그럼, 왜 안 되겠어. 내 사무실인데. 점심 먹고 바로 가자.”
“가서 먹으면 안 돼?”
“그래도 되고.”
재서는 명백하게 들뜬 눈치였다.
처음에만 해도 카페에 잘못 데려온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됐다.
‘이만하면 실패는 아니네.’
사장님의 덕을 크게 봤다.
뒤를 돌아보자, 사장님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의 공로자다.
역시 연륜이라는 게 있다는 건가 싶은데, 그가 내게 윙크를 날렸다.
“······.”
저건 다른 손님들한테 안 했으면 좋겠다.
기껏 살려놓은 가게 도로 망할라.
*
헤븐즈 도어에서의 짧은 대화가 끝난 뒤, 나는 재서를 데리고 JH 디자인 사무실로 이동했다.
재서는 오피스텔 건물을 보며 놀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오빠 사무실 있는 건물이야? 되게 좋아 보인다.”
“학교에서 빌려줬어.”
“와······.”
도심 한복판의 신축 오피스텔은 시골 소녀 재서에게 자극이 너무 강했다.
“여기 JH 디자인이 재하 디자인의 줄임말이야.”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사무실의 문을 연 찰나였다.
한설 선배가 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사장님. 어서 오.”
뭐라고 말하려는데.
“······.”
말문이 막혔다.
이어 못해 먹겠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꺾더니 썩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하 왔네.”
“응. 재하 왔다.”
지훈 선배랑 규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양반들이.’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언제는 신나서 각본을 짜더니마는, 막상 1초 만에 포기한 모양.
나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래, 오글거리는 대사 치느니 차라리 이게 낫다.’
반쯤 체념하고 있는데 지훈 선배가 재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쪽은 재하 여동생이지?”
“······ 네? 네!”
그 순간이었다.
재서는 지훈의 눈치를 보듯 삐쭉거렸다.
명백히 이상한 태도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심하게 긴장을 했고, 호흡이 불안정하다. 눈은 크게 떴다.
내가 아는 이재서가 아니다.
대체 왜 이럴까 싶은데, 곧 깨달았다.
‘아. 지훈이 형 때문이네.’
그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사실 지훈 선배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무명 배우라고 속여도 먹힐 정도인데, 오죽하면 예전에 인게임넷 CM에 잠깐 나왔던 게 한예원 얼짱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사진이 떠돌 정도였다.
적어도 여고생 한 명 홀리기에는 충분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다. 재하가 평소에도 동생 하나 있다고 자랑을 엄청나게 하더라.”
“아······ 감사합니다.”
재서는 그저 감명받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재하가 일을 잘해. 사내에서도 평가가 좋고, 학교에서도 재하 하면 어디든 통하지. 어느 과를 가도 재하는 다 안다니까. 네가 오빠를 정말 잘 둔 거야. 나도 재하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대사가 더럽게 어색하다.
손발이 다 오글거린다.
‘미쳐버리겠네.’
사소한 점심밥 하나로도 딴지를 두 시간은 거는 지훈 선배가 이러니까 더 어색하다.
옆을 보니 한설 선배의 표정도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이게 동병상련의 처지라는 거구나.’
그렇게 발연기로 고통받으며 사무실에서 떠들기를 한참.
“어, 싸장님. 외근 나갈 시간이다.”
곧 규태가 기다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존댓말과 반말이 섞였다.
‘얘도 연기는 하면 안 되겠다.’
< 사기극 > 끝
ⓒ 이한이™
< 빛나는 록스타 >
나와 한설 선배, 지훈 선배.
규태, 그리고 재서.
우리 다섯은 사무실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부릉.
최근 업무용으로 마련한 중고 붕붕이가 기분 좋게 달리는데, 재서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홍대.”
“홍대? 거기는 왜?”
재서의 눈이 반짝였다.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모양.
“그쪽에서 일이 있어. 벽화 그리는 일.”
“오빠 벽화도 그려?”
“카페에서 말했잖아. 원래는 벽화 그리면서 시작했어. 우리 사무실의 뿌리이자 근본이고 정체성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직접 그리러 가는 것도 오래간만이네.’
그동안은 일이 바쁘다 보니 벽화 관련 업무는 거의 지훈 선배에게 위임하고 있었다.
보통 건축과 후배들과 같이 작업한다는데, 워낙 보수가 후하다 보니 할 사람이 차고 넘친다고 했던가.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섰다.
굳이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재서에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벽화만큼 눈에 훤히 보이는 일도 잘 없으니.
‘이것도 일종의 과시욕인가? 퍼포먼스? 정치인들이 이래서 대외적으로 이런저런 사업을 진행하나? 설마 나도 보여주기에 급급한 사람인가.’
이유 모를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내면의 자아와 싸우고 있는 찰나, 곧 홍대에 도착했다.
“사람 진짜 많다아······.”
재서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평소 시골 동네에만 지내다 보니, 홍대 같은 번화가는 신기한 모양.
차에서 내려 지나가던 중 한설 선배가 재서에게 간식을 사 주었다.
“재서야. 떡볶이 먹을래?”
“네!”
그렇게 걷는 사이사이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가게 벽에 벽화 보이지? 커다란 기타리스트 그림.”
“응. 되게 크다.”
“우리가 그린 거야. 저기 옷가게 바깥도. 아참. 저거 간판도 우리가 그렸다. 저기 술집도.”
걷다 보면 계속해서 뭐가 튀어나왔다.
사실상 홍대에서 벽화업체라고 하면 곧 JH 디자인을 의미하는 상황.
이게 반독점 체제의 무서운 점이었다.
“무슨 영역표시 해 놓은 것 같네······.”
재서가 질려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또 걷다 보니 곧 어느 가게가 나타났다.
라이브 카페. 슬럼.
간단한 술, 커피를 음악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색 카페인데, 지하에 소형 공연장이 갖춰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여기도 오래간만이네.’
우리가 입장하자 사장님이 싱글벙글 웃으며 반겨 주었다.
“어이구, 이 사장님 오래간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우리는 그와 이미 구면이었다.
이미 이 가게에서 한 번 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기 때문.
사장님은 그 이후로 심심하면 새 작업을 요청하는 단골 중의 단골이었다.
“이제 계절도 바뀌는 시즌이겠다, 좀 차별성이 있는 작업물로 진행해 보고 싶습니다.”
“차별성이라······.”
대충 감이 잡히는 바가 있었다.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짧은 미팅 결과, 이번에 그릴 물건은 록스타 네 명의 일러스트 정해졌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좀 특별했다.
실내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갈 무렵, 늘 그러했듯 규태가 노트북과 빔프로젝터를 꺼내서 세팅했다.
위잉.
벽으로 선명한 화상이 잡혔다.
‘오래간만에 하니까 신선하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화상 위로 연필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게 우리 작업물의 가이드가 될 예정.
‘아예 리얼하게 그리기보다는, 흑백 음영을 구분 짓는다는 느낌으로.’
요령이 필요할 뿐, 업무량 자체는 적은 작업이다 보니 어려울 것도 없다.
이제 우리 식구들도 모두 작업이 손에 익었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상황.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묘기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르는 사람이 재서였다.
“오빠 그림 되게 잘 그린다.”
재서의 진심 어린 감탄에 괜히 뿌듯해졌다.
“그러니까 그림으로 먹고살고 있지.”
“어쩐지 살이 붙었다 했다. 그만 좀 먹어.”
“······.”
진심 어린 타격이 필요하다.
아무튼, 식구들이 각자 한 장씩 맡으니, 밑 작업을 처리하는 데는 불과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흰색 일색으로 그린 벽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하다 못해, 건성건성 작업한 것으로 보일 작업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법을 걸 차례가 왔다.’
앞으로 단 한 단계가 남았다.
‘미리 발라둔 페인트가 마를 시간이 필요하니까 바로 시작하기는 좀 그렇고.’
그렇게 머릿속으로 큰 그림을 그리는 찰나였다.
꼬르륵.
뱃속에서 민망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까 아직 밥을 안 먹였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나는 재서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재서야. 뭐 먹을래? 오늘은 내가 산다.”
“음 그럼.”
재서가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김치찌개.”
그 순간이었다.
“까비.”
규태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훈이 형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졌습니다.”
“씨에씨에.”
“······.”
저 인간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