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47)
두 번 사는 미대생 47화(47/93)
*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 나는 페인트가 마른 걸 확인한 뒤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형광 안료로 2단계 작업을 진행한다.’
형광 안료.
이게 이번 작업의 핵심이었다.
“규태야. 불 끄고 그것 좀 꺼내 줘.”
“잠시만.”
규태가 가방에서 UV 자외선 라이트를 꺼내서 켜자, 좁은 실내가 한순간에 신비로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우주에 들어온 것만 같은 광경.
“우와······.”
재서가 감탄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기서, 조금 전에 그려뒀던 단색 페인트 위로 형광 안료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림 안에 명암을 형광으로 준다는 느낌으로.’
형광 벽화.
이게 내가 생각한 ‘참신한 벽화’였다.
실내가 밝을 때는 평범한 흰색 그림에 불과하다.
조금 잘 그린 그림.
그게 전부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면 달라진다.
형광 안료가 은근하게 빛나며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다.
‘빛이 강할 때와 약할 때 이중적인 맛을 줄 수 있는 작품.’
이 작업 방식은 아직 우리가 독점하는 상황이었다.
최근 들어 우리를 모방하는 벽화업체가 여기저기 나타나는 추세인데, 그들은 이런 작업물은 해내지 못하리라.
이게 그들과 우리의 격차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따라잡힐 것이다.
상관없다.
‘그때는 또 다른 거 꺼내서 써먹어야겠다.’
아이디어는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그렇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려니 재서가 말을 걸어왔다.
“오빠, 이거 그리면 얼마 정도 받아?”
“사업 비밀인데.”
“그러지 말고. 오빠가 사장이라면서.”
“사장이니까 규칙을 지켜야지.”
“오빠랑 나는 가족인데도?”
“가족이라고 예외를 두면 그게 회사 망하는 첫걸음이란다.”
“으, 재수 없어.”
내가 뜸을 들이니 재서가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렸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나는 의외의 감정을 느꼈다.
‘와, 이게 안 추하네.’
여동생이 뺨을 부풀렸다.
정말 흉측한 짓이다.
그런데, 저게 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대체 왜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 기분.
재서가 특별히 귀여운 얼굴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생물체로서 혐오감을 느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화가 안 난다.
이유가 뭘까.
나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이 얼굴을 십몇 년 만에 봐서 그렇네.’
이게 정답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동생이라고 얼굴이 참신했다.
자주 보면 다시 흉측해지지 않을까.
“기분이다. 어디 가서 말하지 마.”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거 그림 하나당 80씩 받아서, 네 점이니까 320.”
“그렇게나 많이 받아?”
재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나는 킥킥 웃고는 말했다.
“어디 보자, 지금 우리가 넷이서 일하러 왔잖아. 작업하는 데 한 서너 시간 걸렸고.”
“그렇지.”
“대충 나누면 시간당 80만 원이니까, 넷이서 시급이 인당 20만 원 받은 셈이네. 여기서 재료비나 이동하는데 드는 시간 빼고 세금 빼고 뭐 빼고 저거 빼고 하면 더 줄겠지만. 그래도 시급 10만 원은 될 것 같은데?”
“우와······.”
재서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내 입으로 말하면서 문득 감탄했다.
‘벽화가 효자기는 효자네.’
사업을 키우기에는 장기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외면하고 있었는데, 단발성이라지만 페이가 세긴 정말 세다.
다른 길로 발전시킬 방법도 있지 않을까.
‘분명 있다. 진지하게 한 번 고민해 봐야겠어.’
물론, 지금 당장은 게임 제작에 집중하는 게 맞다.
나는 재서를 보며 말했다.
“아 맞다. 너 용돈 좀 벌어 볼래?”
“용돈? 어떻게?”
“내가 저기에 미리 그려둔 밑그림들 있잖아. 저기 안쪽에 맞춰서 페인트만 칠하면 돼.”
단순 채색 작업이다.
그림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도 할만한데, 재서는 나름대로 그림을 잘 아는 편.
아마 시키면 잘하지 않을까.
“그냥 용돈을 주지.”
“응.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치사하게.”
재서는 툴툴거리면서도 페인트 붓을 잡더니,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나 실수해도 뭐라고 하지 마.”
“응 어림도 없어. 최선을 다해서 놀릴 거야. 서울에 소문 다 낼 거야.”
“아 진짜 좀.”
그녀가 심호흡을 길게 들이쉬었다.
아무래도 백 단위 금액이 오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크게 긴장한 모양.
그래도, 막상 그리기 시작하자 이내 금방 그럴듯하게 그려냈다.
‘역시 재능은 있어.’
기본적인 섬세함이 남달랐다.
일을 안 배워서 그렇지, 본격적으로 가르치면 금방 잘할 것도 같다.
그렇게 다섯이 달라붙자 작업이 끝나는 것도 금방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네 명의 록스타.
잘 뽑혔다.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나 완성된 작업물을 크게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때, 뿌듯하지?”
“······ 응.”
재서는 크게 감명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
기특하다.
나는 재서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려다가, 흠칫하고는 중얼거렸다.
“와, 뒤통수 후려칠 뻔.”
*
그날 저녁, 나는 재서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방이 몇 개야?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것 같은데?”
“더 좋은 거 맞아.”
“오빠가 진짜 성공하긴 했구나······.”
물론 한설 페이로 저렴하게 구한 집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월세를 말하면 하찮아 보일까 봐 굳이 말 안 했다.
“얼른 씻고 자. 아침부터 나간다며.”
“옙.”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재서를 데리고 코믹페스로 갔다.
‘사람이 진짜 많네.’
인간의 파도였다.
나도 살면서 행사라면 여기저기 많이 다녀 봤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리는 광경은 몇 번 못 본 상황.
입장까지도 한 시간은 기본으로 줄 서야 할 것 같았다.
‘가영이는 여기에 거의 매달 온다는 거지.’
그 정성이 지극하다.
그리고.
나는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윤가 작가님이요?”
재서가 윤가영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동동 뛰었다.
“저 아세요?”
“당연히 알죠! 작가님이 그린 작품은 다 읽어 봤는걸요!”
윤가영이랑 재서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정확히는 재서가 윤가영을 일방적으로 알았다.
윤가영은 윤가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이런저런 만화를 그렸는데, 재서도 그걸 자주 봤던 모양.
“저 사인 좀 해 주세요!”
“아예 그림도 그려 드릴까요?”
“네, 네!”
재서는 방방 뛰더니,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 성공했구나.”
“······.”
이놈 봐라.
어제 열심히 데리고 돌아다닌 것보다, 이거 한 방이 더 크게 먹힌 것 같다.
그런데, 코믹페스는 내게도 둘러볼 가치가 있는 장소였다.
‘코스프레라.’
주변으로 만화 캐릭터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는데, 내 기준으로도 알아볼 만한 캐릭터가 꽤 많았다.
옛날이었다면 이상하게 보였겠다만, 지금 내 기준으로는 나름의 개성으로 느껴진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네.’
뭐든 경험하고 볼 일이다.
‘규태라면 이 광경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코믹페스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재서는 어제 내게 받은 용돈으로 이런저런 걸 한 아름 사 모았는데, 그게 못내 좋은 듯 입가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히히.”
“그렇게 좋아?”
“좋지.”
문득, 재서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빠.”
“왜.”
“그냥 어제오늘 느낀 건데.”
“응.”
분위기가 남다르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은 찰나였다.
“오빠 작년이랑은 많이 변한 것 같아.”
“······ 그런가?”
지적하기 애매한 헛소리였다.
“응. 그때는 뭔가 날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동글동글해졌다고 해야 하나.”
“또 살쪘다고 놀리는 거지.”
“아 진짜 좀.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그래그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성격이 좋아진 것 같아.”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겨서 그런가 보다.”
“아니, 그거랑은 조금 달라.”
재서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작년에 오빠 봤을 때만 해도 남을 못 이겨서 안달인 느낌이 있었거든. 조금만 지적당하면 못 받아들이려고 하고.”
“······.”
그랬었나.
너무 옛날이라 잘 모르겠다.
나한테는 벌써 20년 가까운 옛날 일이니.
“사실, 부모님들도 그거 때문에 걱정이 많았어. 오빠가 원래 고집이 센데 남이랑 소통을 하려고 하질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제 좀 사람 된 것 같아.”
“그건······.”
부모님 이야기에 반박하려다가, 도로 입을 닫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생부터 부모님 쪽에서 나와 소통하길 거부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 아닐까.
내가 먼저 거부했던 건 아닐까.
‘뭐, 그림 못 그리게 반대하셨던 건 어떻게 해석해도 말이 안 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부모님을 아예 설득의 대상으로도 여기지 않았던 건 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내 머릿속의 부모님은 말 한마디 나누기도 텁텁한, 꽉 막힌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것도 그 당시의 내 생각일 수 있으니.
“오빠.”
“어.”
“조만간 추석이잖아.”
“그렇지.”
“그때는 가족들끼리 다 같이 한 번 만나면 안 될까?”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위잉.
핸드폰이 울렸다.
‘아,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그렇게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그 이름이 좀 특수했다.
[넥스트 심동호 AD]< 빛나는 록스타 > 끝
ⓒ 이한이
< 소싱 위원회 >
넥스트.
한국에서 게임 퍼블리싱으로는 손에 꼽는 공룡 기업.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매출 2조원을 넘기며 국내 1위를 차지할 기업.
이 기업은 어떻게 해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대체 다른 기업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저게 가능했던 걸까.
이 부분을 설명하자면, 넥스트만의 독특한 문화 한 가지를 설명해야 했다.
‘소싱 위원회.’
신작 게임의 퍼블리싱 여부를 결정하는 사내 조직이었다.
‘이 시기의 소싱이라고 하면, 솔직히 인맥 장사에 가까웠지.’
게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가능성을 살피기 보다는, 그저 순간순간의 직감에 의존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생각보다 매출이 안 나오거든, 그걸로 끝.
이게 한국 게임업계의 초창기였다.
하지만, 넥스트는 달랐다.
‘엄격하게 심사해서 받아들이고, 한 번 서비스를 결정했다면 끝까지 책임을 진다.’
그 결과 서비스를 맡은 기업들은 거의 전부가 흑자를 달성.
타 회사에 비해 압도적인 타율이었다.
그리고 이 전설을 쌓은 주역이 바로 소싱 위원회.
넥스트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얼마 전.
심동호 AD가 내게 말해준 게 있었다.
–
“우선 서비스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참. 이 이야기는 비밀입니다.”
“······.”
심동호 AD.
그는 비밀이 많은 사나이였다.
‘뭐만 말하면 비밀이래.’
분위기를 보니 딴지를 걸기도 어중간해 고개를 끄덕이자, 심동호 AD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싱 위원회는 기본적으로 소규모 조직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게임에 관한 안건이 올라오거든 넥스트에 소속된 하부 조직에서 인원을 각출해 그때그때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상시 설립된 조직이 아닌 건가요?”
“예. 일종의 TF팀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각각의 팀마다 잔뼈가 굵은 중역을 각자 정해진 인원만큼 선별합니다. 그 결과, 각 개발팀, 사업팀, 지원팀, 법무팀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스페셜리스트가 모인 드림팀이 형성됩니다.”
말은 좋다.
하지만, 다소 의아한 점도 있었다.
“그렇게 팀을 구성해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통하나요?”
그렇게 다양하게 모이는데 소통 문제가 없냐는 말.
이에 심동호 AD는 다소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해관계가 다소 엇갈릴 때가 있더라도, 게임을 성공시키겠다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기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와.
조금 멋있는 말이었다.
감탄할 뻔했다.
“그렇게 팀을 구성하고 나면, 개발사에 맞춤식으로 최대한 폭넓은 조사를 진행합니다.”
“쉽지 않겠군요.”
“예. 게임성부터 사업성은 물론, 재무 상황과 구성 인원, 그리고 보유 기술력과 비전까지 최소 10명 이상의 실무자가 붙어 꼼꼼히 검토합니다. 그리고.”
심동호 AD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답했다.
“이 과정에서 심사 작품의 80% 이상이 떨어져 나갑니다.”
“······.”
엄격하다.
심사에 오르더라도, 통과하는 작품은 다섯 작품 중 하나.
얼핏 타율이 높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기의 게임 회사 수를 생각해 보거든 극소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아쉽게 놓치는 게임도 많겠네요.”
“예.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나중에 손해를 보더라도요?”
“넥스트는 소싱을 단순히 사업 확장이 아닌, 새로운 가족을 들이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짚이는 바가 있었다.
넥스트는 서비스하는 게임의 매출이 어지간히 떨어지더라도, 유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상 쉽사리 서비스 종료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동시 접속자가 100명도 안 되는 게임을 10년 이상 유지했다거나 하는 미담이 있었다.
유저들 입장에서는 돈 먹는 하마지만, 개발사들 입장에서는 더없이 든든한 파트너.
그게 넥스트였다.
“던전 앤 스토리도 기본적으로 같은 과정을 밟게 될 겁니다.”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겠군요.”
“예. 우선은 저도 신청은 해 볼 겁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겠다는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애초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어떻게 되든 AD님을 탓하진 않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동호 AD는 할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이후로 심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여기서부터는 어찌할 구간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왔던 모든 일을 평가받을지도 모르는 일.
“뭐, 그래도 정말 재밌는 게임이 떨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심동호 AD가 시원하게 웃었다.
–
이게 재하가 넥스트에 방문했을 적 심동호 AD와 나눴던 대화였다.
‘그래도 막상 중요한 건 김종수 대표 이사의 의지라고 했지.’
모든 게임은 최종적으로 김종수 대표 이사가 최종 결정 권한을 가진다고 하였다.
나름대로 안목에 자신이 있는 모양.
아무튼, 넥스트의 소싱팀은 그런 구조였다.
*
최근 넥스트에 뜨거운 감자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언제까지 지지부진하게 회의만 할 건지.”
“그만큼 독특한 사안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던전 앤 스토리]였다.이 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독창적인 수준을 넘어, 도발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대에 안 맞는 도트 그래픽에, 시대에 안 맞는 RPG. 이건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오락실 RPG라고 부르면 될까요?”
한 임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비웃는 건 아니었다.
그냥 넥스트의 회의가 이런 분위기였다.
대학교 동아리를 방불케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다소 가벼운 농담도 쉽사리 나왔다.
그러는 중 지원팀의 한 직원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게임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공감하실 겁니다.”
던전 앤 스토리의 최대 특징.
그건 어쨌든 하다 보면 재미는 있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게 손맛이 좋다.
도트 그래픽도 보다 보면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부족한 시장성을, 순수히 게임성으로 커버하는 형태의 게임이었다.
재밌다.
그럼에도 회의가 지지부진한 건, 역시 사업성 문제.
“회사 자체는······ 대학생 위주의 팀이라지만 개발 역량 자체는 크게 모자라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자본력에서 약세를 보이고 공동제작이라는 작업 형태가 장기적으로 불안 요소가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JH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픽 작업을 전부 협력사에 맡겼다고 했지요?”
“예. 이쯤 되면 오히려 그쪽이 모회사가 아닌가 싶은데, 이쪽이 좀 독특합니다. 그냥 손이 닿는 일은 전부 다 한다고 봐도 되겠더군요.”
코인 소프트는 그리 신기할 게 없다.
대학생들이 손을 합쳐서 게임 하나쯤 만들려고 시도하는 일이야 쌔고 쌨다.
그런데, JH 디자인이라는 회사는 명백히 이상했다.
“벽화부터 제품 디자인, BI 개발까지 두서가 없더군요. 그런데 또 소속 직원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습니다.”
이렇게까지 회사를 중구난방으로 키울 수 있나.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런 느낌마저 받았다.
“건물주가 취미 삼아 기업을 운영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더군요.”
물론 아니다.
일단은 그 정도로 구조가 이상했다는 말.
“장기적으로 전문성이 모자랄 수도 있겠습니다.”
“각설하고.”
한참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재미만 따지자면 당장 통과시켜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외적으로 독소 요소가 너무 많군요.”
“예. 사업 모델이 불분명합니다. 아케이드 게임도 아니고 RPG에서 이래서야, 컨텐츠 고갈이 빠르게 일어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게임 자체가 구조적으로 컨텐츠를 늘리기 어려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인 RPG 게임의 구조는 이러했다.
몬스터를 사냥한다.
좋은 보상을 얻는다.
그 좋은 보상으로 스펙을 올리고, 더 잡기 어려운 몬스터를 사냥한다.
여기서 개발 시간을 벌려면, 의도적으로 컨텐츠의 공급을 조절할 필요성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를 어마어마하게 늘리거나.
아니면 게임 보상을 짜게 주거나.
여기서 던전 앤 스토리는 작업량의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 부분은 따로 상의를 나눠 봐야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구조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홍보를 어떤 식으로 진행해야 할지도 문제가 되겠군요.”
“으음. 연예인을 고용해서 액션성을 강조하면······.”
“캐릭터를 중점으로 만화책 출판사와 함께 아동용 서적 사업을 진행하는 건 어떨까요? 최근에 그쪽으로 성과를 거둔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이 즐길 게임은 아닐 듯합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도 몇 번이고 나왔다.
끝까지 지지부진한 상황.
이게 몇 번이고 반복이 되니, 다들 지칠 만큼 지친 상황이었다.
대충 끝냈으면 좋겠다 싶은 판국.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천천히 살피던 한 사람.
“그러고 보니.”
김종수 대표 이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2 개발 본부는 어떻게 되고 있나?”
제2 개발 본부.
과거에는 넥스트와 별개의 스튜디오였으나, 넥스트에서 창립 공신에 준하는 대우로 내부에 흡수한 개발팀이었다.
사내에서도 손꼽히는 역사를 자랑하는 스튜디오.
또한, 심동호 AD가 소속된 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개발팀은 최근 타 부서의 눈총을 사고 있었다.
“작업에는 진척이 좀 있나?”
몇 달째 업무가 지지부진하다는 것.
김종수 대표 이사의 말에 제2 개발 본부장이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팀원들은 모두 의욕에 불타고 있으며, 작업 속도도 순조롭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좋네, 다 좋은데 말이야.”
김종수 대표 이사는 귀를 후비더니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서울게임쇼까지 기한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나?”
“그건······.”
제2 개발 본부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확답을 못 한다.
물론, 이들이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또 유능한 사람들이 모인 게 제2 개발 본부였으니.
그럼에도 왜 이러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유는?”
“최근에 더 좋은 수정 방안을 찾았기 때문에······.”
고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는 개발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만, 최근에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계기?”
“외부에서 손님이 왔는데, 그쪽에서 아이디어라고 꺼낸 게 조금 괜찮아서.”
“손님에게 아이디어를?”
김종수 대표 이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시간만 소모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이 방향으로 고치는 게 맞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더 좋은 게임이 되리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단단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자기 작품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눈빛.
김종수 대표 이사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기를 잠시, 귀찮다는 듯 손을 젓더니 말했다.
“됐어, 알아서 하도록 해.”
저쪽에서 저렇게 말한다면 저게 맞다.
김종수 대표 이사는 자기 안목을 믿었고, 그 안목으로 고른 사람은 더더욱 믿었다.
설령 그 결과 망하더라도 그러려니 할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홀가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서울게임쇼까지 기한을 맞추기는 힘들겠군.”
“예. 죄송합니다.”
“그럼.”
그 순간이었다.
김종수 대표가 중얼거렸다.
“자리가 남겠군.”
“······.”
“그리고, 마침 시장의 반응이 궁금한 게임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이 말이 왜 나오지.
잠시 뒤, 모두가 깨달았다.
“대표님. 저 혹시.”
사업본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남는 자리를 던전 앤 스토리로 돌리자. 이 말씀은 아니겠지요?”
“음.”
김종수 대표 이사는 으쓱하더니 말했다.
“안될 게 뭐가 있겠나. 어차피 남는 자리인데.”
“······.”
사업본부장은 다소 당혹감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반응이 안 좋거나, 중간에 개발이 중단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말이 옳다 친들 마땅히 대체할 컨텐츠도 없지 않나?”
“차라리 기존 서비스하고 있는 작품의 신규 업데이트를 공개하는 게······.”
“벌써 일 년 가까이 신작 발표가 없었지. 다른 회사들은 다 신작을 내놓기 급급한데, 우리만 기존 작품의 업데이트로 끝내자고? 넥스트의 개발력이 바닥을 드러냈다고 온 업계 사람들이 다 비웃겠군.”
사업본부장은 순간 울컥할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검증도 안 된 작품을 밀어 넣자니.
억지로 반박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대표와 갑론을박을 펼치기는 부담스러웠다.
“뭐라도 던지고 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게 사업본부장은 꿀 먹은 병아리가 됐다.
김종수 대표 이사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그럼 그렇게 하자고. 일단 서울게임쇼에 얼굴이나 비춰 보고, 대략적으로라도 반응을 확인한 다음에 정식으로 진행할지를 결정하는 형태로. 어떤가?”
“음······.”
솔직히 말해서 궤변이었다.
서울게임쇼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 회사 이름 걸고 발표까지 해 놓고, 그다음에 경과를 보자는 게 말이 되는가.
이례적인 제안.
말이 제안이지, 심사 통과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솔직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반박 한마디라도 해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은 잘 알았다.
‘어차피 대표님이 저러시면 못 막지.’
‘반대해 봤자 멋대로 진행하시겠지.’
‘이 정도면 많이 버텼다.’
김종수 대표가 워낙 똥고집인 탓이었다.
이 사람이 한 번 마음을 굳히면, 그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뒤집기가 쉽지 않다.
일단 망하더라도, 망한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자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난 반대했어.’
‘옛날 생각나네.’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이거 하나로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기기나 하려고.’
‘개발 2팀에 구경이나 가 봐야겠군.’
일명.
‘내 일만 아니면 돼.’
이런 마인드가 없지 않아 있었다.
소싱 위원회는 늘 이렇게 굴러갔다.
분위기를 봐 가면서 적당히 비판하다가, 김종수 대표가 최종 결정을 내리면 끝.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하되, 막바지에는 대표의 안목에 맡긴다.
얼핏 보기에는 독재랑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게 그들이 연전연승하는 비결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김종수 대표가 큭큭 웃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난 뒤였다.
“저, 대표님.”
“음?”
김종수 대표의 뒤를 따라온 사업본부장이 물었다.
“대표님께서는 그 게임을 조금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
당돌한 질문이다.
김종수 대표는 잠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말했다.
“내가 학생 때 오락실에서 그런 게임 많이 했거든. 학교 땡땡이치고.”
“······.”
그게 이유라고?
사업본부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데, 김종수 대표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시간 되면 한번 해 보게. 어지간한 요즘 게임보다 훨씬 더 재미지다니까.”
*
심동호 AD에게 통화가 걸려왔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연락에 머릿속이 멍했으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잠시.
“······.”
전화가 걸린 타이밍이 좀 불편했는데, 막상 통화를 나누고 나니 전화를 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무슨 일인데 그래?”
재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재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를 잠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그 만들고 있다는 게임 있잖아.”
“응.”
“그게.”
꿀꺽.
긴장을 삼키며 말했다.
“넥스트에서 심사에 통과했대.”
< 소싱 위원회 > 끝
ⓒ 이한이™
< 서울게임쇼 >
“넥스트?”
재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아?”
“넥스트를 왜 몰라.”
서브컬쳐에 관심이 많은 그녀이다 보니, 넥스트라는 이름도 잘 아는 눈치.
재서가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빠 게임이 거기에 심사 들어갔었어?”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조금 됐어.”
사실 재서에게 이 일은 말을 안 했었는데, 결과도 안 나온 일로 떠들썩하게 만들기 싫어서 그랬다.
괜히 가족들 사이에 말이 퍼졌다가 잘 안 풀리면 좀 민망하니까.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말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본사 찾아가서 요청했는데, 지금 막 답장 왔다. 붙었대.”
“우와······.”
재서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넥스트에서 오빠 게임 볼 수 있는 거야?”
“음, 그건 당장은 모르겠는데.”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심동호 AD에게 연락이 왔고, 분명 긍정적인 말을 듣긴 했다.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붙기는 붙었는데 1차 합격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은 사무실 사람들이랑 상의라도 나눠 봐야겠다.’
나는 재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서야. 갑자기 미안한데, 내가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뭔데?”
“나 지금 중요한 일이 있어서 사무실 사람들이랑 급히 이야기 좀 나눠야 할 것 같거든. 혼자서 잘 놀 수 있어?”
그 말에 재서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내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세 살배기 어린애야? 혼자 잘 놀 수 있어는 또 뭐야?”
“······.”
그런가.
너무 애 취급하기는 했다.
혼자 버스 타고 지방에서 여기까지 올라올 정도의 나이는 되는데.
“아니, 기껏 나 만나겠다고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미안하잖아. 혼자 놀라고 내버려 두면.”
“오빠 보러온 거 아닌데? 오빠 집 아니었어도 혼자서 올라왔을 건데?”
“누구 집에서 지내려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아. 정 없으면 서울역에서 노숙이라도 하지.”
나는 그녀를 어처구니없다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오늘 약속 없지.”
“응.”
“그럼 그냥 사무실 같이 가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급히 택시를 부르러 큰길가로 가는데, 재서가 물었다.
“그런데 오빠.”
“왜?”
“아까 물어본 거 있잖아. 추석에 가족들 만날 수 있겠냐고.”
아.
그렇지.
아직 제대로 답을 안 했다.
‘추석이라.’
전생의 나는 추석에 가족들을 만날 일이 없었던 건 물론, 굳이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가족들 이름만 들어도 속이 더부룩해서 며칠 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
얼굴을 마주치는 건 마냥 싫었지.
‘그래도 뭐, 일단은 만나보고 생각하자.’
전생의 내 판단이 옳았다면, 그때 가서 다시 안 보고 살면 그만이다.
나는 재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추석인데 가족 얼굴 봐야지. 안 보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