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48)
두 번 사는 미대생 48화(48/93)
*
사무실로 돌아온 뒤, 나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코인 소프트 십인회를 개최합니다.”
“십인회는 또 뭐야.”
“우리 열 명 안되지 않아요?”
직원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한 눈치면서도 어쨌든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놓고 보니 회의실 공간이 어중간하게 남았다.
“아니다, JH 디자인 식구들도 부르죠.”
그렇게 모여놓고 보니 이번에는 회의실 공간이 비좁았다.
그냥 넓은 사무실에서 모이기로 했다.
짧은 소란 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조금 급한 사안이라서 불렀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다음 한 마디로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넥스트에서 퍼블리싱 심사에 통과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
“진짜?”
조용해지더니, 직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전부 벼락 맞은 대추나무마냥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는데, 유독 반응이 남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진짜로 우리 게임이 넥스트에서······.”
코인 소프트의 초기 멤버들이었다.
남운과 상민을 필두로 그들은 부르르 떨고만 있었다.
입술을 말아 물고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감격이 진하다 못해 누가 콕 찌르면 터질 것만 같은 느낌.
코끝이 시큰하겠지.
그들이 속으로 어떤 감동을 느끼고 있는지는 안 물어봐도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지간했구나.’
나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기사, 나야 이 게임 제작에 참여한 게 고작해야 한 학기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순수하게 제작에 들인 시간만 최소 1년 이상에, 공부한다며 투자했던 시간을 계산하면 최소 몇 년이었다.
그나마도 심사에서 떨어졌다면 앞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어느 단계를 넘었다고 생각하겠지.
공무원 시험에 붙은 장수생과도 같다.
기뻐할 일이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지.’
나는 말을 이었다.
“심사에 통과 자체는 했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남운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네. 심사를 일차적으로 통과하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이게 조건부라고 합니다. 혹시 서울게임쇼라고 아시나요?”
“그야······ 당연히 알다마다.”
남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게임 발표하는 행사잖아.”
“맞아요. 그래도 다른 분 중에는 모를 분도 계실 테니까 짧게 설명할게요.”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서울게임쇼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게임 박람회예요.”
서울게임쇼.
한국에서 미래 먹거리 개발을 모토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한 박람회다.
지금도 국내 최고 수준의 권위를 갖춘 게임 박람회인데, 훗날에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게임 축제로 성장할 이벤트.
당연히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빠짐없이 참석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박람회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서울게임쇼는 철저하게 소비자 지향적인 박람회입니다.”
유저 대상의 박람회라는 점이 그러했다.
그 말이 의아했는지 지훈 선배가 물었다.
“다른 박람회는 안 그런가?”
“조금 달라요.”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보통 게임 박람회라고 하면 B2B(기업 대 기업)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B2C(기업 대 소비자) 중심 박람회라고 해도 그래요. B2B와 동시에 운영하는 경우가 많죠.”
“서울게임쇼는 조금 다른가 보다.”
“네. 서울게임쇼는 설립 초기부터 아예 시민의 축제를 표방했어요. 실제로 내방객도 대다수가 일반 소비자인데, 아예 게이머가 아닌 사람도 많아요. 행사 자체도 그쪽으로 초점을 맞추고요.”
어디까지나 비중의 이야기였다.
타 박람회가 기업에 중심을 둔다면, 서울게임쇼는 정확히 그 반대.
쇼라는 이름에 걸맞다.
물론 타 게임 박람회도 대부분 B2C(기업 대 소비자)를 표방하는 건 같다.
그런데.
서울게임쇼는 여기서 한술 더 떴다.
“입장료가 무료예요.”
애초에 행사 자체로는 돈을 벌 생각을 안 하는데, 국가 행사 차원에서 일단 사람을 많이 유치하고 보자는 취지였다.
지훈 선배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돈이 되나?”
“방문객이 많으면 돈은 알아서 따라온다나. 뭐 그런 이유래요. 그래서 실제 소비자층의 반응을 보기에 가장 좋은 박람회이기도 하고요.”
잡설이 길었다.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아무튼, 저희 던전 앤 스토리가 거기에서 정식으로 발표 기회를 얻게 됐어요.”
“······!”
남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그럼 엄청 좋은 일 아니야?”
“그렇죠. 보통은 회사에서 밀어주는 작품이나 여기서 소개를 하는데, 저희가 그쪽으로 선정이 된 꼴이니. 최고의 기회예요. 이만한 기회는 다시 없을 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 내 말에 남운은 더더욱 의아해졌는지 물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다 잘 된 것 같은데. 조금 전에는 뭐가 조건부라며. 그건 또 무슨 말인데?”
“그게 지금부터 설명해야 할 부분인데요.”
나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조금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심사에 붙은 게 맞긴 해요.”
“응.”
“그런데, 거기서 실제 반응을 보고 정식 퍼블리싱 진행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
“······.”
순간적으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 공간 채로 사고가 마비된 것 같다고나 할까.
어색하다.
차라리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런 지적이라도 나와 줬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는 찰나, 규태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규태야. 회의 중에는 말을 곱게 써야지.”
“그게 무슨 멍멍이 소리입니까.”
“옳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안 하는데, 우리가 이례적이었대.”
“어떤 점에서?”
“회의 진행 과정에서 사업성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그래서 이런 방식을 취하게 됐다고 하더라. 워낙 독특한 게임이다 보니 검증이 필요하다나.”
정확히는, 대표를 제외한 모두가 반대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건 심동호 AD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제 소비자들 반응을 한 차례 검토하고, 거기서 기대치 이상의 반응이 나왔을 때 진행하겠다고 했어.”
“뭐······ 이미 결정된 일 같으니 그건 뭐 그렇다 치고.”
남운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냥 물 떠놓고 구경만 하면 되나?”
“그게요.”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소싱 팀에서 정식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어떻게 부스를 운영할지 미팅 전까지 최대한 생각을 정리해 두라고 했어요.”
부스 운영.
우리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다.
그 말에 남운이 물었다.
“우리가 의견을 내면 그쪽에서 반영해 주는 건가?”
“가급적 개발사 입장에 맞춰주는 게 관례라고 하네요. 아무튼, 부스 운영에 좀 공을 들여야 할 것 같아요. 실제 소비자들의 반응을 끌어올려야 하니까요.”
이게 관건이었다.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어떤 식으로 어필해야 하겠는가.
‘확실한 건, 관심만 끌면 어떻게든 돼.’
사실, 던전 앤 스토리의 소비자 반응 따위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먼 미래에 매출로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나만 아는 일.
그렇다면, 우선은 최대한 많은 소비자의 눈에 보이게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구상을 다 마친 상태였다.
‘이 시대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방식이 좀 있지.’
미래의 박람회에서 자주 써먹히던 몇 가지 방식이 있다.
비용이 그렇게 높은 건 아니며, 그렇다고 특별히 기술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파급력은 확실하다.’
어떻게 됐든 기사는 주구장창 뽑혀 나올 방식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 생각을 말씀 드릴게요.”
*
며칠 뒤.
우리는 정식으로 넥스트 측 직원과 미팅을 가지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넥스트 사업본부의 최우영이라고 합니다.”
최우영 과장.
사업본부에 소속된 채로 넥스트 소싱팀에서 활약하는 인재라고 했다.
굴리면 구를 것 같이 동글동글한 몸에, 쿼카를 닮은 얼굴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남운입니다. 개발을 맡고 있습니다.”
“이재하입니다.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 그와 인사를 나누는데, 그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코인 소프트는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만든 팀이라고 전해 들었는데, 맞나요?”
“네?” 네.“
“게임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안 믿겼습니다. 저희 김종수 대표님도 대학생 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는데, 코인 소프트가 언젠가 넥스트처럼 될 수도 있겠네요.”
“······.”
넥스트처럼 되긴 좀 힘들 것 같은데.
아무튼, 나는 적당히 자리를 잡은 뒤 물었다.
“AD님께 이야기를 여쭸는데요. 서울게임쇼에서 홍보 부스는 저희가 상당 부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인가요?”
“예. 부스의 구조부터 기능까지 최대한 개발사의 의향에 맞춰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우영 과장이 긍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요구를 들어드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단 점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퍼블리셔와 개발사의 관점이 조금 다르다 보니, 조율을 해 봐야 아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부스의 면적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야 한다.
또한 각 부스는 해당 퍼블리셔의 얼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개발사가 요구한다고 하여서 아무렇게나 내줄 수는 없는 노릇.
“의견을 주시면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혹시 생각해 두신 부분이 있으실까요?”
“네, 그게 사실은.”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어느 파일을 불러왔다.
사업 제안서에 가까운 양식으로 작성한 프레젠테이션 문서.
그것을 그대로 최우영 과장에게 건네어 주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양이 조금 많네요?”
그렇다.
수십 페이지 면적.
뭐든 정성이라고 생각해서 양을 늘려 봤다.
또한.
비록 전시 디자인은 한 번이었지만 이미 해 본 일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습니다. 한 번 읽어봐 주실 수 있으신가요?”
“예. 잠시만요.”
문서를 읽기를 한참.
최 과장이 살짝 당혹스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렇게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 서울게임쇼 > 끝
ⓒ 이한이™< (수정)상술 >
“네, 이렇게 진행하고 싶습니다.”
내가 단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홍보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10년가량 뒤.
한 가지 상술이 세상에 나타났다.
크라우드 펀딩.
아직 발매되지 않은 게임을 개발 단계에서 후원받고, 후원액에 따라 게임 퀄리티에 공약을 거는 상술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목표 모금액으로 1억을 건 게임이 있다고 치자.
여기서, 제작비가 일정 수준 모일 때마다 추가 보상을 공약으로 거는 것이다.
–
100만 원 달성 – 신규 캐릭터 추가
500만 원 달성 – 신규 스테이지 추가
1000만 원 달성 – 풀 보이스 추가
5000만 원 달성 – 콘솔 전 기종 발매
1억 원 달성 – 멀티 경쟁 모드 추가
–
‘얼핏 보기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게 의외로 잘 나갔지.’
펀딩을 열면 그 자체로 홍보가 될뿐더러, 소규모 개발팀이라면 부족할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메리트였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소규모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크라우드 펀딩은 필수요소가 되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면, 게이머들의 심리를 잘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영리하게 이용했지.’
게이머들은 새로운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어 한다.
거기서 한 발 나아가, 게임의 개발 과정에도 참가하고 싶어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돈을 투표지 삼아 게임 개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심지어 식사 한 끼 값으로 충분하다면 어떨까.
‘지갑을 열 수밖에.’
그야말로 구미가 당기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뿐 만이 아니다.
보통 이렇게 참가한 게이머들은 하드 팬이 되어, 자발적으로 홍보에 힘을 써 준다는 점도 소소한 장점이었다.
그리고.
이를 본 기업들은 한 가지 상술을 떠올렸다.
‘이거 돈이 좀 되는 것 같은데?’
소규모 개발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크라우드 펀딩이 대형 게임 회사들 사이에서도 퍼져나가는 계기였다.
물론, 초기에는 영세 개발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그것을 자본력을 갖춘 개발사들이 활용하기 시작했을 뿐.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공짜로 홍보할 기회다.’
고작 개발비 30억짜리 게임을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알게 될 정도의 압도적인 홍보력.
내가 크라우드 펀딩에서 인상 깊게 본 부분은 이러한 ‘홍보력’이었다.
“체험판을 제작해서 배포할 겁니다. 그리고, 판매자들에게 후원을 받을 겁니다.”
“······ 파격적인 상술이군요.”
내 설명을 들은 최 과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크라우드 펀딩이 지금까지 없던 판매 모델이다 보니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
노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미래의 넥스트 상술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는다.
“소비자들이 부담감을 가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스토리 마케팅을 진행하는 겁니다.”
“스토리 마케팅?”
“예. 돈 없는 대학생들이 소규모로 게임을 제작했고, 그걸 본 넥스트가 손을 잡았다는 식으로 가는 겁니다.”
“으음, 깊게 따지고 보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도 같은데······.”
최 과장의 걱정에 내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손해를 볼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애당초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발매 전부터 물건을 팔아먹을 생각을 하겠는가.
그걸 미래의 사람들이 했다.
이제는 내가 한다.
시간을 거슬러서 미래의 상술을 써먹을 생각이다.
“모금 금액은 단돈 천 원부터 시작합니다. 과자 한 봉지면 사는 가격입니다. 딱 천 원만 지불하면 체험판을 플레이할 수 있고, 모금액에 따라서 부스에서 공개할 게임의 볼륨이 결정되는 거예요.”
“단계별로 보상을 지급하는 거군요.”
최 과장도 슬슬 생각이 정리되는지, 흥미가 담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내심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체험판을 기준으로 백만 원이 모이면 그래픽을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할 거고, 이후 모금액에 따라서 OST를 판매하고, 볼륨을 늘리고, 총 천만 원을 달성하면 완성판이 나오는 구조로 가는 겁니다. 또 후원액에 따라서 게임 내에 NPC나 기믹을 추가해 주는 것도 좋겠지요.”
후원자의 닉네임이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NPC를 만들어, 게임 속에 넣는 것이다.
크라우드 펀딩에서도 가장 먼저 품절되고는 하는 항목이었다.
“확실히 저라도 그런 식이라면 조금은 후원을 해 볼 것 같습니다.”
최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체험판은 어떤 식으로 만들게 될까요?”
“완성판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제외하고 만드는 겁니다. 딱 게임의 기본적인 느낌만 전달할 수 있게요.”
“수학의 역산과도 같군요.”
“네. 그러니 저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체험판을 제작하는 겁니다.”
체험판이라고 해 봐야 거창한 게 아니다.
옛날 8비트를 연상시키는 레트로 그래픽에, 레벨 단계도 확 낮출 거다.
목표는 플레이타임 30분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짧은 기간 안에 제작하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갈아 넣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나는 옆자리에 앉아서 멍때리고 있는 남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 자기가 된다고 했으니까 되겠지.’
안 되면 뭐 어쩌겠는가.
꼬우면 된다고 하지 말던가.
나는 그에게서 관심을 끄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언론에서도 주목할 것 같지 않나요? 유저들이 게임 제작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한 번 열기를 올려둔 상태에서 서울게임쇼에 출품한다면, 어떻습니까. 느낌이 괜찮지 않나요?”
“······ 음.”
최 과장은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럼 넥스트에서 맡을 일은, 이 후원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일이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이거 참. 제가 고생을 좀 해야겠네요”
생각을 정리한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솔깃하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없던 방식이다 보니 잘 안 될 수도 있고, 위에서 반려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나도 부담 없이 동의했다.
이 홍보 방식은 어차피 더 팔기 위함이지, 안 팔릴 작품을 팔리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반려 당한다고 하여서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좋은 아이디어를 버리게 되는 게 조금 아쉬울 뿐.
“후우.”
최 과장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참. 특이한 제작진에, 특이한 그래픽에, 특이한 장르에, 특이한 판매 방식에······ 저도 이 일을 하면서 개발사 미팅은 많이 해 봤습니다만, 이런 식은 또 처음이네요.”
“앞으로 자주 겪으실 겁니다.”
“그럼 업무 부담이 늘 것 같아서 싫네요. 어우, 지금도 감당이 안 되는데.”
그가 질색하면서 웃었다.
일단 기본적인 판매 방식 이야기는 끝났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그다음 이야기였다.
“그리고 부스 디자인에 관해서인데, 이것도 나름대로 구상을 해 왔습니다.”
*
내가 그에게 제안한 부스의 디자인은, 지금까지 흔했던 게임 박람회의 부스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군더더기가 없긴 한데······.”
최 과장이 중얼거렸다.
“좀 심하게 없군요.”
“네. 맞습니다.”
조금의 공간 낭비도 없이, 부스의 모든 면적을 게임 플레이 좌석으로만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이게 좀 과해서 게임 홍보 부스가 아닌 PC방처럼 느껴질 정도.
‘이것도 10년은 뒤에 유행하기 시작하는 스타일이지.’
2000년대 초반 게임 박람회 부스라고 하면, 체험석 뿐만 아니라 게임 홍보물을 다채롭게 배치하는 스타일이 많았다.
캐릭터 일러스트, 소품, 인형, 모델, 포토존을 다채롭게 활용하는 것.
하지만.
미래의 게임 박람회 부스 문화는 조금 바뀌었다.
‘다짜고짜 체험석을 때려 박는 방식이 많아졌지.’
실제 게이머들은 홍보용 소품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10명이 게임을 할 체험석을 두느니, 20명이 플레이할 수 있게 배치하는 게 낫다.
“저희 던전 앤 스토리의 최고 강점은, 다름 아닌 실제 플레이에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내 생각이었다.
어쨌든, 하면 된다.
해 보기만 하면 무조건 빠진다.
‘재미는 어차피 검증되어 있어.’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손만 대게 하면 그만이다.
이를 위해서 기형적일 만큼 체험석을 밀어 넣은 부스 디자인을 제안했다.
‘카페의 회전율과도 같아.’
예전 헤븐즈 도어를 참고했다.
회전율을 위해서 부가적인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메뉴마저도 일부 메뉴 위주로 함축시킨 헤븐즈 도어.
그 구조를 게임 부스라고 해서 응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다른 게임 박람회 자료를 조금 조사해 봤는데요. 보통 게임 체험 한 번에 제공하는 시간이 1시간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맞을까요?”
“예. 딱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만, 보통은 1시간에 맞추는 게 관례입니다.”
“저희는 그것도 30분까지 줄이고 싶습니다.”
“······!”
최 과장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게임에 몰입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대신 그만큼 대기 줄이 빠르게 줄어들기도 할 테고, 이 게임의 아케이드성을 고려해 보거든 30분이 한 판을 플레이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딱 충분할 것 같습니다.”
“흐음. RPG 게임이 아닌, 아케이드 게임의 시간 감각이군요.”
최 과장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하나를 깨는 데 걸리는 시간이 5분가량.
이렇게 구성된 던전 다섯 개를 클리어하면 부스 체험이 끝난다.
고전적인 오락실 게임의 플레이 타임과 유사했다.
“방문객들이 아쉬워하겠군요.”
“그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살짝 모자란 정도.”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줄을 서도 된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생각이 더 있습니다.”
나는 화면을 조작해서, 조금 전에 최 과장이 성큼 넘겼던 문서를 불러왔다.
“대형 스크린으로 플레이 상황을 중계하는 겁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요즘 박람회에서는 꽤 있는 일이기도 하고······.”
이후로는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통과되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나눈 이야기를 전부 정리해 보거든, 핵심은 둘이었다.
첫째. 정식 발표 전부터 체험판을 공개하여 기대치를 올려두는 것.
둘째. 부스의 디자인을 개편해 회전율을 올리는 것.
이야기를 마쳤을 무렵, 최 과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만 들으면 솔깃한 게 썩 그럴듯한데, 너무 파격적인 게 많아서 위에서 통과가 될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사실 어떻게든 될 것 같기는 합니다. 어쨌든 개발사의 입장에 맞춰주는 게 넥스트의 관례였으니까요.”
“아직 계약서에 사인 안 했는데도 그렇나요?”
“곧 하실 겁니다. 그보다 이제 슬 ······.”
최 과장이 시계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식사 어떠십니까?”
“아, 좋습니다.”
“참치 어떠신가요? 이 주변에 맛있는 참치 집이 하나 있던데. 물론 저희가 사는 겁니다.”
“그렇게 비싼 걸 먹어도 되나요? 좀 죄송한데.”
조용히 있던 남운이 살짝 놀라서 묻는데, 최 과장은 웃으며 말했다.
“법카라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돈도 아닌데요.”
“······.”
남운이 말없이 있으니, 그가 민망하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회사원 삶에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그건 그렇지.
백 번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셋이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남운이 나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아까 그 법카 보니까 생각난 건데.”
“네.”
“나도 그냥 취업할까?”
“······.”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냥 나중에 형이 정식으로 법인 세우고, 직접 법카 뽑아서 실컷 쓰세요.”
“오, 그럼 되겠다. 법인은 세우려면 대충 얼마 벌어야 되지?”
“대충 일 년에 3억이요.”
“와, 쉽지 않겠네.”
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나도 내심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 양반, 금전 감각이 모자란 구석이 은근 보인단 말이지.’
천생 개발자라고 할까.
그러고 보면 가끔 상민의 머리에서 종종 흰머리가 보이던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그 사람 젊은 나이에 탈모 오지 않았나?’
앞으로 아침밥은 검은콩으로 지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수정)상술 > 끝
ⓒ 이한이™
작가의 말
저 오늘 참치 먹으러 갑니다
(수정)
1. 초반부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보강했습니다.
2. 잘못 다룬 용어를 수정했습니다.
< 성능 확실하네 >
이후로도 최 과장과 몇 번의 연락을 다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컨펌이었다.
그것도 아주 시원한 컨펌.
“······.”
솔직히 어이가 없다.
진짜 생각나는 대로 전부 던졌다.
이 중에 하나만 걸려라 하는 심정이었지.
그런데 전부 컨펌이라니.
‘뭐지? 이 회사가 원래 이런 회사였나?’
당황스럽다.
내가 알기로 넥스트는 그리 도전적인 성격의 회사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보수적인 성격의 회사에 가까웠다.
다소 상업성을 중시하는.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제시한 걸 전부 받아들였다고 한다.
신기하다.
진짜 망하려면 망할 대로 해 봐라 이건가.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저 혹시, 위에서 반발이나 지적 같은 건 없었나요?”
“반발이요?”
“심사 회의 때 비판이 많았다고 들어서요. 상업성 관련해서. 그런데 너무 담백하게 컨펌이 나오니까 조금 당황스럽네요.”
“음, 그게 말입니다만.”
최 과장은 다소 편안한 눈치로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 하고 벼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표정이 워낙 해맑아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절대 망하면 안 된다.
“너무 부담 가지진 마세요. 어차피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건 컨펌을 내린 시점에서 퍼블리셔 측의 책임이니, 코인 소프트는 개발에 최선을 다해 주시면 됩니다.”
저 말이 압박을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착각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우리는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
그리고.
우린 지옥을 마주했다.
‘······ 이게 진짜 크런치 모드구나.’
크런치 모드.
오픈이나 발표 같은 큰 행사를 앞에 두고, 게임 개발에 전력을 투자하는 기간.
즉.
사람을 갈아 넣는 기간.
코인 소프트는 서울게임쇼 준비를 앞두고 비로소 크런치 모드에 돌입했다.
“운이 형. 가서 1시간만 눈 붙이고 와요.”
“······ 사나이로 태어나서 그럴 수는 없지.”
남운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키보드 앞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는데, 그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죽어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어쩐지 익숙했다.
언제 본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아, 넥스트 놀러 갔을 때 봤던 모습이네.’
그쪽 직원들이 저런 느낌이었다.
‘개발자들 다 똑같구나.’
물론 그만 그런 건 아니고, 나도 그렇다.
단기간에 체험판을 제작해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부스에 필요한 디자인을 제작하는 것도 문제였다.
“노민아. 컨셉안은 언제 나와?”
“오늘 안에는······ 어떻게든······ 노력해 볼게요······.”
언제나 밝은 얼굴로 일을 하던 노민조차도 목소리에 힘든 기색이 뚝뚝 묻어났다.
‘딱한 존재로다.’
경남도, 노민도, 그 외 식구들도 모두 힘든 기색이 완연했다.
일이 워낙 밀리니 JH디자인 식구들도 심심하면 와서 일손을 보태는데, 그래도 벅차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 유미 씨라도 있으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그녀의 공백이 크게 느껴졌다.
유미 씨는 최근 가족 일 때문에 사흘간 휴가를 신청했는데, 그 여파가 조금 컸다.
평소 열심히 일을 해 주었으니 불만은 없다만, 그래도 그녀가 빠지자 구멍이 크게 느껴졌다.
그녀는 혼자서 서너 명분의 일을 능히 하고 있었다.
‘역시 유미 씨는 우리 팀에 필요해.’
이번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영입해야겠다.
‘설령 지분을 주더라도.’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지금 당장은 사무실 식구들이 고생하는 와중에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딱히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렇게.
그저 버티고 있는 와중이었다.
덜컹.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간식거리 가져 왔슴다.”
규태였다.
그의 손에 커피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뭐야, 이런 걸 어디서 가져왔어?”
“헤븐즈 도어. 사장님한테 말했더니 이렇게 챙겨 주시더라.”
“영수증은?”
“공짜로 주신다던데.”
“크으.”
역시 사장님.
나중에 가서 뭐라도 해 드려야겠다.
“쉬었다가 합시다!”
내가 큰 목소리로 외치자, 작업에 불타오르던 식구들이 좀비처럼 기어가서는 이내 음료수를 하나씩 집어갔다.
“오오.”
그리고는 숨넘어가게 들이키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크, 이제 좀 살겠다.”
“으아, 힘들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네.”
피로가 극한으로 치달은 모양새.
누가 옆에서 콕 찌르면 무너질 것만 같은 가뭄에, 물 한 방울을 떨군 느낌이라고 할까.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안쓰러움이 배가 됐다.
‘내가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된다.
어떻게든 직원들의 의욕을 끌어올리고, 부담을 덜어줄 방법이 없을까.
‘프로그래머들은 어차피 지분으로 주니까 연봉으로 때우기는 힘들고. 단기간에 직원을 추가 고용하기도 힘들어. 교육할 시간도 없겠지.’
잘 떠오르질 않아도 열심히 고민하기를 한참.
이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형들.”
“왜.”
“형들은요.”
나는 천천히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번 개발 끝나고 나면 뭐 하고 싶어요?”
“뭘 하고 싶냐니······.”
“아무거나요.”
역시 당사자들한테 묻는 게 직빵이다.
남운은 뜬금없는 말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팔짱을 끼고 말했다.
“뭐, 아무 걱정 없이 잠이나 실컷 퍼질러 잘 수 있으면 좋겠는데.”
요즘 들어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그다운 의견.
하지만, 이건 내가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잠도 좋죠. 하지만 좀 더 크게 봤을 때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뭔가 큰 목표로 삼을 그런 거 있잖아요. 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수십만 원짜리 밥을 먹고 싶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뭐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가고 싶다거나. 목표 지점으로 삼을 만한 거요.”
“난 그것보다 잠이 더 땅기는데.”
“······.”
이 양반, 어지간히 잠이 고팠구나.
하지만, 수면을 당근으로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잠을 자게 해 줄 테니까 열심히 일하라는 게 말이나 되겠어.’
의욕을 고취 시킬 만한 거.
좀 더 구체적인 뭔가가 필요하다.
“그보다요. 으음. 그래도 뭔가 큰 거요. 평상시에 못 해 볼 만한.”
“굳이 뽑자면······.”
그렇게 고민하기를 잠시, 남운이 툭 던지듯 말했다.
“신작 게임 플레이하기?”
“게임이요?”
“조만간 킹○파 2003 나온다던데 그거나 실컷 하고 싶다.”
“아, 나도.”
남운의 말에 한 명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동조했다.
“그거 반응 장난 아니던데. 다 같이 밤샘하면서 그거나 하고 싶다.”
“이번에 새 스토리 시작한다고 싹 갈아엎었다던데? 신캐도 나왔고.”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대화가 시작됐다.
나는 해맑기 짝이 없는 이들의 대화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킹○파 2003 그거. 졸작이라고 욕먹으면서 시리즈를 나락으로 빠뜨릴 예정인데.’
킹○파 2003.
시리즈 역대 최악의 작품으로 꼽히는 물건이었다.
나는 이들의 희망을 뺏지 않기 위해 속으로 말을 삼키는데, 식구들은 저마다 하고 싶었던 게임 하나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메탈○○그 5도 좋고.”
“······.”
그것도 망한다.
킹○파 2003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망한다.
역사에 남을 망겜이 된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노민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메탈맨 X7이요. 시리즈 최초로 3D 도입했다는데. 트레일러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구요.”
“크, 오졌지.”
“······.”
저건 아예 시리즈를 저세상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했다.
왜 자꾸 이런 게임만 거론되나.
‘이 사람들, 작정하고 저주하는 건가? 혹시 회귀한 거 아냐?’
타율이 좀 높은데.
하지만,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임 이야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시체마냥 지쳐 있던 이들의 눈빛이 의욕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뭐, 게임 만드는 사람들 답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걸 이야기하다 보면 힘이 나기 마련.
이들에게는 그게 게임이었다.
결국에는 나도 피식 웃고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연애나 실컷 해 보고 싶다.”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상민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식구들이 딱딱하게 굳었는데, 상민은 허심탄회한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켜며 말했다.
“연애. 나도 남들처럼 연애나 실컷 해 보고 싶다. 땀내 나는 남정네들끼리 매일 사무실에서 이게 뭐냐? 지겹다, 지겨워. 아주 위에서 신물이 올라올 것 같다.”
그 말에 남운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네 팔자에 무슨 연애야. 가서 모니터에 키스나 해.”
“······ 꼭 한마디를 해도. 운아, 솔직히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가 뭐냐.”
“에어컨 실컷 틀려고.”
“그놈의 에어컨은 좀 내다 버리고.”
상민은 울컥하더니, 무언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다시 물었다.
“아니다. 운아. 너는 에어컨을 왜 트냐?”
“에어컨을 틀면 행복하니까.”
“그래, 행복하려고 틀지.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이 지랄을 하는 거고. 맞아? 아니야.”
“반박하면 화낼 거지?”
“잘 아네.”
상민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말했다.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면 삼대 욕구. 그러니까 수면욕, 식욕 그리고 성욕 아니겠냐.”
“성욕을 충족시키고 싶으시다?”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유도하지 말고. 성욕이 뭐야. 다른 성별을 갈구하는 욕구잖아. 곧 사랑이지.”
“되게 문과적인 이야기를 한다.”
“계속 들어 봐.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성별을 추구한다 이 말씀이야. 그래. 인간은 그렇게 설계된 생물이야.”
“지금 우리가 잘못 설계된 생물이라고 돌려 까는 거 맞지?”
“······.”
참으로 하찮은 탁상공론이다.
그런데, 문득 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 설마, 전부 모쏠인가.’
놀랍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하지만도 않다.
이들은 전부 컴공과.
미래의 컴공과라면 모르겠지만, 이 시기의 컴공과라고 하면 공대에서도 대표적인 남초 학과에 속했다.
거기에다가 한국대생이라면 학창시절 내내 공부만 했을 텐데, 또 게임 오타쿠이기까지 하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게임만 만들겠다고 난리였으니 연애 한 번 못 해봤어도 이상하진 않겠지.
솔로가 되기에는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것.
‘가엾은 영혼들이구나.’
살면서 연애도 한 번 못 해봤다니.
나는 그들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렇네.’
괜히 생각했다가 내상만 입었다.
이번 생에 친구들이 좀 많았다는 이유 하나로, 스스로 여자친구가 있었던 것만 같은 착각을 했다.
인간은 그런 생물이다.
환경에 맞춰 자기 기억을 속인다.
‘속이 쓰리니까 그만 생각하자.’
아무튼, 이쯤 되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말을 꺼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저기요.”
“왜.”
남운이 상민과 말다툼을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는데, 내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형들한테 소개팅을 주선해 주면 어떨까요?”
“······.”
정적이 찾아오기를 잠시, 남운이 입을 열었다.
“뭐? 여자 소개시켜 준다고?”
“네. 연애하고 싶으시다면서요.”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제가 또 미대생이잖아요. 미대 하면 뭡니까. 여초과 아니겠습니까.”
“너 학교 안 나가잖아.”
“방학인데 학교를 어떻게 나가요.”
“아.”
“요즘 제가 학교생활을 좀 대충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아는 사람이 좀 있긴 있어요. 또 지훈이 형이 인맥 엄청나죠.”
“그래서, 그 인맥으로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못 해 줄 것도 없죠.”
“······!”
그 순간,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그냥 해 주겠다는 건 아니고, 힘들어도 이번 서울게임쇼까지만 어떻게 잘 버텨 봐요.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자리 한 번은 만들어 볼게요.”
“······ 재하, 너.”
남운이 깊은 의심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생각보다 좋은 놈이었구나.”
“······.”
남운은 나와 눈을 마주치기를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상민에게 말했다.
“야, 일하자.”
그 말에 상민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얼씨구. 이 미친놈. 언제는 연애에 관심 없다더니.”
“그건 일 분 전의 나. 지금의 나는 완전히 새로운 나다.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남운 마크 3이라고 불러다오.”
“네 다음 밥벌레.”
그들은 언제 기진맥진했냐는 듯 우르르 일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이내 사무실이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찼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성능 확실하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훈 선배를 쥐어짜면 몇 명은 나오지 않을까.
안 되면 소고기로 협박하면 그만이고.
‘아, 이게 진정한 경영이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야. 재하야.”
규태가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나도 소개팅 시켜 주냐?”
“······.”
그렇네.
이놈도 있었네.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규태야.”
“응.”
“숫자 삼에서 이를 빼 봐.”
“왜?”
“그냥, 얼른 해 봐.”
규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일.”
“그래, 일이나 하러 가자.”
“······.”
규태가 시무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