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50)
두 번 사는 미대생 50화(50/93)
*
며칠 뒤.
정식으로 공개 일정이 잡혔다.
서울게임쇼 넥스트 부스에서 가장 큰 면적을 배정받을 예정.
아니, 사실상 우리의 독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게임에 돌아갈 자리까지 뺏었다나.
‘대놓고 밀어주기는 하네.’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설 선배에게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혜화역으로 향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미래 같은 지도 어플이 없다 보니까 길 찾기가 힘들다.
그래도 조금 걷다 보니, 곧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 잔소리 많이 하는 동생 > 끝
ⓒ 이한이™
< 자린고비 >
혜화역 주택가의 어느 길에는 특별한 건물이 있다.
수많은 일반 빌라들 사이에서 혼자 세련되기 짝이 없는 건물.
일반적인 건물과는 달리, 디자이너가 지었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 건물이 위용을 뽐내었다.
“후우.”
나는 그 앞에 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로브 170.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꿈에 그려 마지않는 갤러리였다.
보통은 중견급 아티스트들이나 힘을 합쳐 한 번쯤 행사를 열어볼까 말까 하는 곳.
나 같은 학부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많이 먼 곳이지만, 우연히도 나는 이곳과 인연이 있었다.
작년 2학기.
나는 이곳에서 특별한 전시전을 가졌다.
정확히는, 다른 작가와 누구 작품이 더 뛰어난지를 두고 싸웠다.
‘······ 지금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네.’
이불에 들어가서 발로 뻥뻥 차고 싶은 기분이다.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다.
‘왜 이런 일은 시간이 지나서야 꼭 기억에 생생하게 남을까. 어제 점심밥 메뉴처럼 대충 잊혀지면 좋을 텐데.’
참고로 어제 점심에는 나주곰탕을 먹었다.
아무튼, 그때 일은 벌써 1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지난 일 년간 너무 열심히 살아서 그런 게 아닐까.
‘대표님이 날 이상한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약속은 했으니까, 만난다.
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다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
“어머, 너무 오래간만이에요.”
심하윤 대표가 싱글벙글 웃었다.
‘······ 응?’
어느 정도 안 좋게 볼 줄 알았더니 이게 웬일.
오히려 작년보다 나를 더 달가워하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까 사람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하고.’
1년 전에는 피곤한 인상이 보였는데, 그때와는 달리 상당히 편안해진 표정이 인상이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저도 반갑네요. 혈색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전부 작가님 덕분이죠. 어제 작가님한테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
작가님이라.
저 말이 괜히 귀에 밟혔다.
‘지금 일부러 들으라고 강조한 거 맞지.’
나는 큼큼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저, 그게 다름이 아니라.”
“저희 전시장을 이용하고 싶으셔서 온 거죠?”
다짜고짜 본론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나는 그녀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작년에 대표님이 말씀을 주셨던 게 기억이 나서요. 그 누구야. 그 송 무슨 작가님이랑 다퉜을 때요.”
“송태엽 작가님이요.”
아, 그런 이름이었지.
“그때 저희가 서로 작품으로 경쟁했었잖아요. 기억하시나요?”
“예. 작가님께서 큰 역할을 해 주셨죠. 그때 일 이후로 송 작가님께서도 많이 바뀌셔서, 지금은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계셔요.”
그녀가 싱글벙글 웃었다.
송태엽 그 사람 결국에는 잘 풀렸구나.
당시에는 그럭저럭 악감정이 있었는데, 지금 그 이름을 들으니 별생각도 안 든다.
역시 시간이 약인 모양.
하지만, 시간이 약으로 듣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으으. 그때의 나는 1학년 학부생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대.’
그때 일을 떠올리려니 어쩐지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작가들끼리 작품을 두고 싸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물며, 전업 작가랑 일개 학부생이 그랬다는 게 더 말이 되긴 하나.
안 된다.
그런데, 나는 작년에 그걸 했다.
‘작년의 나는 여포였구나.’
찻잔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심하윤 대표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일은 지금도 사진에 찍힌 것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작가님이 주셨던 작품의 이름부터 영감과 시도. 그리고 손님들의 반응까지.”
“음.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죠?”
그렇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나쁘지 않았냐고요?”
심하윤 대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이 사람 왜 이래.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른다 싶은 찰나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때 작가님 작품이요.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음.”
솔직히 말하자면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래도 곰곰이 되새겨 봤다.
“어린 왕자랑 텔레비전 같은 몇 작품은 오경진 회장님께서 사가셨고. 마지막에는 어떤 회사원 같은 사람이 가져갔죠. 그 그림자로 만든 작품.”
“네. 그 마지막 작품이 말인데요. 지금.”
심하윤 대표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홍콩 쪽에서 팔천만 원에 팔렸어요.”
“쿨럭!”
나도 모르게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진짜로 뿜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진짜로 모르셨던 거에요?”
“요즘 워낙 바빴거든요. 비싸게 팔렸다니, 잘됐네요. 잘됐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머릿속이 영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망치에 머리를 맞은 기분.
‘그 작품이 팔천만 원에 팔렸다고?’
고작 해 봐야 백만 원도 안 하는 가격에 판 작품이었다.
그랬던 작품인데, 불과 1년 만에 가격이 백 배 가까이 뛰었다니.
이런 말을 누가 믿겠는가.
“어떤 돈 많은 사람이 사 갔나 봐요.”
“홍콩에서 영상 벤처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소장해 갔어요.”
“음. 그 사람은 왜 제 작품을 비싸게 사 갔던 거죠?”
“이유가 없진 않아요.”
심하윤 대표가 설명을 이었다.
“원래 시험적인 작품일수록 초기 가격대가 낮게 형성되더라도, 장기적으로 가격대가 높게 오르고는 해요. 안에 있는 시도 그 자체의 값어치를 보는 거죠. 그만큼 작가님의 시도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말이에요.”
나름 설명이 되긴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발상이 참신하다는 이유 하나로 가격이 그렇게 오른 건가 싶은데, 심하윤 대표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또 구매가에 따라서 향후 판매가가 형성되기도 하고요.”
아.
“비싸게 주고 사야, 비싸게 팔 수 있다는 말이군요.”
“이해가 빠르시네요.”
심하윤 대표가 싱글벙글 웃었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참 특이한 세계다.
비싸게 팔기 위해서 비싸게 산다니.
하지만, 예술작품을 살 때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구매한다고 보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내가 만들어 둔 이야기에, 어느 부호가 비싸게 사 갔다는 이야기가 덧씌워지는 걸 테니까.’
다만 그 일을 내가 왜 몰랐는지가 신기하긴 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알려주시지, 왜 연락을 안 주셨어요.”
“사정이 있었어요.”
“어떤 사정이요?”
“작가님께서 부담스러워 하실까 봐요.”
심하윤 대표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제가 그때 했던 말 기억하세요? 작가가 될 사람은 어떻게 되든 다시 작가로 돌아온다는 말.”
“네. 할 사람은 결국 시간이 흘러도 다시 도전하게 된다고. 연어처럼.”
“작가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당장은 작품에 관심이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저희를 찾아오실 거라고. 또 작가의 이름값이 형성되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시간이요?”
“한 달에 한 작품을 내는 작가의 작품보다, 일 년에 한 작품을 내는 작가의 작품 쪽이 소장 가치를 가진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게 당연한 일인가.
그럴 수도 있고.
나는 이미 이 업계 상식에 딴지를 걸기를 포기했다.
물이면 물이요.
우주는 우주다.
그저 그러려니 할 뿐.
“그런데 설마 자기 작품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있으셨을 줄이야······ 끄응.”
그녀는 머리가 지끈지끈한 듯 이마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후. 됐어요. 이미 지난 이야기니까 그러려니 할게요. 그래도, 이렇게 돌아와 주셨으니까 저는 환영일 따름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어쩐지.
이제야 간신히 이해됐다.
어제 내가 한 번 방문해도 되겠냐고 연락을 줬을 때 심히 기뻐 보이더라니. 이게 그 이유였구나.
‘내가 작가로 다시 눈독을 돌렸다고 생각했겠군.’
하지만, 나는 그녀가 기대할 그런 목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유였다.
“저기,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는 건데요.”
“네.”
“전시회를 열고 싶은 건 맞아요.”
“그럼요?”
“그게.”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제 단독 전시를 여는 건 아니고요. 남들이랑 같이 이것저것 열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어요.”
“······.”
그 순간이었다.
심하윤 대표의 해맑은 표정이 세상 잃은 얼굴로 바뀌었다.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네.’
이 사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물건 사고파는 일을 하기엔 안 맞는 성격 같다.
*
잠시 뒤.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는 나뿐만이 아닌, 한설 선배까지 모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예원에서 최고의 유망주를 꼽으라면, 누구나 조소과의 한설이라고 입을 모아서 칭송합니다.”
“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실력은 제가 보증해요.”
“조소 전시품이라······.”
그녀가 고민하는데, 나는 확언하듯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실망만큼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한설은 어찌 되었든 전생에 국내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그런 사람의 작품이다.
여기서 졸업전시를 유치하고, 끝내 판매할 수 있다면 적어도 후회는 안 할 것.
‘지금 시점에서는 일개 학부생이라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로브 170은 어쩌니저쩌니해도 콧대가 높은 전시장이었다.
난 이곳에서 내게 준 특권.
내게 한 번 전시를 열어주겠다고 한 권리를, 한설 선배와 공유할 생각이었다.
‘수백만을 호가하는 대관료도 대관료지만, 여기가 돈을 낸다고 아무나 유치를 허락하는 곳도 아니지.’
기업이 브랜드를 만들 듯, 갤러리도 브랜드를 만든다.
그리고, 이 브랜드는 어떤 작가를 유치하느냐에 따라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형성되고는 했다.
흔히 말하는 수질이었다.
그러니 작가를 고르는 데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서 수질 검사에 통과했다.
하지만, 한설은 아직이었다.
“제가 보장합니다. 이참에 서로 연을 터 두면 좋을 거예요.”
물론, 나라고 해서 그녀에게 공짜로 호의를 베풀려는 게 아니다.
확신이 생겼다.
그녀는 내가 잘해주면, 그만큼 돌려주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지금까지 회사 일 도우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누르느라 고생이 많아 보였는데, 이럴 때 해소하게끔 도우면 나쁠 게 없지.’
어차피 언젠가는 작가 일을 하게 될 터.
차라리 이 기회에 그로브 170에 그녀를 소개해 주거든, 두고두고 양쪽으로 빚을 남겨둘 수도 있다.
한설 선배가 좋은 성적을 낼수록, 나는 그로브 170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커지는 셈.
‘이게 진정한 사원 복지지.’
대충 이런 계산으로 찾아온 셈이었다.
그리고.
마침, 내 작품을 전시할 곳도 필요했고.
‘오히려 이쪽이 메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나도 슬슬 내 작품을 내고 싶은 참이었다.
그래.
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벽화를 이쪽 방면으로 발전시켜보는 거야.’
지난번 홍대에 갔을 때부터 생각했다.
‘벽화를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면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그러다가 최근에 한설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떠올렸다.
이참에 예술품으로 전환해 본다면 어떨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작년에 심하윤 대표가 책정한 내 작품의 가격이 오십 정도였다.
마침 벽화도 마찬가지였다.
평균적인 사이즈와 난이도를 가정하고, 점당 오십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둘 다 하는 게 남는 장사 아닌가.’
특히 벽화를 작업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 벽화를 허물고 새로 그리는 경우가 종종 생겨났는데.
이걸 갤러리를 통해서 유통한다면 어떨까.
시도는 해 볼 만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손해는 없다.
“후.”
심하윤 대표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그 한설이라는 분이요. 실력은 믿을 만한 사람 맞죠?”
“한예원에 이만한 인재 없습니다.”
“으음.”
“참고로 저랑 한설 선배는 세트 메뉴입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취사선택은 없습니다.”
“으으으음.”
심하윤 대표는 나를 보기를 한 번, 천장 보기를 한 번.
천장에 굴비를 달아놓은 듯 시선을 와리가리 하다가 말했다.
“알았어요. 대신 전시품은 확실하게 만들어 주세요.”
성공이다.
“역시 대표님이 최고이십니다.”
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하는데, 심하윤 대표가 처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원래 이렇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닌데······.”
이 말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휘둘리는 사람 맞는 것 같다.
*
얼마간의 시간 뒤.
우리는 강남 학여울역과 삼성역 사이에 위치한 어느 대형 전시장에 방문했다.
KTEK(Korea Trade Exhibition Center).
일명 케이텍.
서울 최대 규모의 종합 전시장이었다.
그런데, 나는 과거 이미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코믹페스도 여기서 개최했었지.’
재서를 대동하고 방문했었다.
설마 이렇게 단기간에 다시 들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새삼 그 당시를 떠올리자 기분이 남달랐다.
‘오늘부터 여기서 우리 작품이 전시된다는 거지.’
그렇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 자린고비 > 끝
ⓒ 이한이™
< 진상 손님 >
“야, 재하야. 밖에 사람 진짜 많더라. 중간에 누구 하나 넘어지면 깔려 죽겠던데?”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온 규태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대문 시장 외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린 건 처음 본다. 진짜 이러다가 무슨 사고 터지는 거 아니야?”
호들갑이 심하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KTEK이잖아. 서울에서 가장 큰 전시장인데. 이 정도쯤이야 몰릴 수도 있지.”
“그런가?”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주최 측에서 알아서 대비했겠지.”
“으음. 그렇다면야······.”
규태는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너는 이런 데 좀 익숙한가 보다.”
“부모님의 지인이 이런 쪽에 관심이 많으셔서, 가끔 들렀지.”
여기서 부모님의 지인은 나다.
전생의 나는 휴일이 되면 안목도 쌓을 겸, 때때로 박람회를 돌아다니고는 했다.
요컨대, 나는 뉴비가 아니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서울게임쇼의 인원수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역시 서울게임쇼.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축제다.’
사실, 나도 그럴듯하게 말이야 했다만 내가 보기에도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많긴 했다.
KTEK에서 소화할 수 있는 일 평균 방문객 수는 5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전시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생 볼 일이 없는 규모였다.
‘저 문 너머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고 있겠지.’
정문은 아직 셔터로 가려져 있는데, 그 너머의 열기가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같은 축제라고는 해도 방문객으로서 참가하는 것과 관계자로서 참가하는 건 완전히 다른 기분.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분을 느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정된 넥스트 부스에 방문한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많네요.”
최 과장이 중얼거렸다.
응?
원래 이렇게 사람 많이 오는 거 아닌가?
“······ 예전에는 안 이랬나 봐요?”
“저도 지금까지 서울게임쇼에 세 번 정도 방문해 봤습니다만, 오늘같이 사람이 많은 건 생전 처음 봅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는 방문객을 많아야 2만 명 잡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많이 방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
아, 오늘이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많은 게 맞았구나.
미안하다. 규태야.
네가 맞았다.
하고 고개를 돌려 보니, 규태는 저만치 멀리 가서 다른 부스를 둘러보고 있었다.
‘규태 컷.’
나는 다시 최 과장을 보며 물었다.
“오늘이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몰린 거라면, 혹시 오늘 무슨 행사 있나요? 막 폭풍설 사(社)라도 참가했다거나.”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대.
다른 회사에서 어마어마한 히트작이라도 유치했나.
아니면 설마.
던전 앤 스토리 때문에 이렇게 사람이 몰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최 과장이 뭔가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는 작품이 있기는 하네요.”
귀가 솔깃해졌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이건 지인을 통해서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엔지 소프트에서 이번에 꽤 큼지막한 신작의 실제 플레이를 공개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까 잠깐 둘러보니까 맞는 것 같았습니다만.”
“신작이요?”
“예. 바츠 온라인 2라는 작품인데요.”
“아.”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뜨였는데 최 과장이 웃으며 물었다.
“재하 씨도 아시나요?”
모를 리가.
나는 살짝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현질이 엄청난 게임 아닌가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최 과장이 씁쓸한 목소리로 웃었다.
엔지 소프트의 대표작.
바츠 온라인.
한국 게임의 전설이다 못해, 10년도 더 뒤에도 현역으로 뛰며 수많은 어른이들의 코 묻은 돈을 갈취하는 게임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중에는 아재 게임 소리 들을 바츠 온라인이, 이 시기에만 해도 전성기였구나.’
이 게임이 전설이 된 이유에는 게임성도 한몫했지만, 다른 부분이 더 컸다.
현질.
사이버 도박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현질이 심하다는 점이었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의 판매액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가 전부 바츠 온라인이었다고 했던가.’
타사 작품에 100만 원을 투자하면 대충 남부럽지 않게 플레이할 수 있을 때, 바츠 온라인은 1억을 투자해도 조금 꿀리는 느낌이 든다고 했지.
강력하다.
얼마나 유저들을 매료시켜야 그럴 수 있는 걸까.
문득 경각심이 들어 중얼거렸다.
“트럭에 치일 수도 있겠네요.”
“트럭이요?”
“갑자기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서 치인다는 뜻입니다.”
“아, 재밌는 표현이군요. 트럭에 치이다.”
그렇게 최 과장과 떠들고 있는데, 남운이 살짝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사촌 형도 바츠 온라인에 등록금 꼬라박고 군대 갔는데.”
“······.”
피해자가 바로 옆에 있으셨네.
그가 중얼거렸다.
“막상 별거 아니게 나온다던가.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
“······ 그랬으면 좋겠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는 그 작품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대박이 터졌다.
내가 기억하는 바츠 온라인 2는, 1보다 못할지언정 어마어마한 대박을 터뜨린 작품이었다.
‘둘이서 엔지 소프트를 10년 넘게 먹여 살리고, 모바일로도 나와서 더 대박을 터뜨렸지.’
경쟁작이 그렇게까지 강력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살짝 위축됐다.
“어쩌면 던전 앤 스토리가 묻힐 수도 있겠네요.”
“음. 그럴 수도 있겠죠.”
최 과장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낙심하지는 말아요.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해요. 엔지 소프트랑 넥스트가 경쟁 구도라고는 한들, 사실 세부적으로 따지면 엔지 소프트가 훨씬 강하기는 하거든요. 매출만 따지자면 3배 이상 차이 날 겁니다.”
담담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역시 같은 업계인이라면, 엔지소프트 신작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최 과장이 씨익 웃더니 말했다.
“그래도 전 던전 앤 스토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이게 갑자기 또 무슨 말인가 싶은데.
그가 말을 이었다.
“비록 제가 직접 개발에 참여한 게임은 아닙니다만. 제가 플레이한 던전 앤 스토리는 분명 재미있는 게임이었습니다. 바츠 온라인2가 얼마나 재밌게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유저들에게 눈이 있다면 저희 게임을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
“재하 씨도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데, 문득 내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만든 게임을 내가 믿어야지, 누굴 믿겠나.’
사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이리저리 만진다고, 전생의 원본보다 게임성을 깎아 먹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최 과장의 말에서 작게나마 생각이 달라졌다.
‘하긴, 내 자식 내가 챙겨야지.’
그래도 정 자신감이 모자라거든, 그냥 최 과장의 직감을 믿어볼 뿐이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널 믿지 말고, 널 믿는 나를 믿으라는 말.
나도 그렇게 해 볼 생각이었다.
*
약 한 시간 뒤.
찰크락.
KTEC 정문의 철문이 올라가며, 본격적인 입장이 개시됐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전시장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이 많다.’
정문 바깥으로 보이는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인간의 파도가 저걸 말하는 거구나.
뭐라고 해야 할까.
좀비 영화에서 생존자들이 흔히 보는 그 광경 있지 않은가.
그걸 보는 기분.
사람들은 가이드를 읽으면서 내부 구조를 미리 숙지해 뒀던 건지, 입장과 동시에 정해진 부스로 재빨리 이동했다.
“저 사람들은 여기 뭐가 있는지 다 외우고 오나 봐요.”
“보통 이렇습니다.”
최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사람이 워낙 많이 오다 보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여기저기 줄이 생기거든요. 그 전에 둘러볼 곳을 정해서 미리 둘러보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서울게임쇼가 무료입장이라는 건, 그만큼 방문객이 많다는 뜻.
그만큼 시기를 놓치면 바라는 부스를 못 즐길 수도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체험석을 사십 개씩 마련해 둬도, 하나당 플레이를 1시간으로 제한한다고 치면. 하루 동안 최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사백 명이 채 안 되겠지.’
물론 중간에 관두고 빠져나가는 사람이 많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 참가 회사가 많으니 전체적으로 분산이 되긴 하리라.
아무튼, 그렇게 개발좌 좌석에 가만히 앉아서 멍때리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달려가는 부스의 순서가 슬슬 눈에 읽혔다.
“엔지 소프트 부스로 가네.”
사람들이 달려가는 부스에 순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부스는 주로 엔지 소프트였다.
“응. 저기 또 간다.”
“또.”
“······.”
분위기가 이상하다.
거의 다 저쪽으로 향하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약속했다는 듯 엔지 소프트 쪽으로 달려간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이번에는 외국 부스로 간다.”
“계속 저기로만 가네.”
“아, 소프트미니로도 갔다.”
외국계 패키지게임 회사 부스나, 소프트 미니 쪽 부스로 사람들이 달려가고는 했다.
예외는 잘 없었다.
정문에서부터 직선 경로로 쭈욱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약 30분이 흘렀을 무렵.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지?’
넥스트 부스로 오는 사람이 기이할 정도로 적었다.
이상하다.
제아무리 아직 사람이 차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혹시 원래 다 이런가요?”
어이가 없어서 최 과장에게 물어보니.
“······ 으음. 조금 과하기는 하군요.”
그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들어 보십시오. 원래 개장 초기에는 팬층이 두터운 회사에 사람이 먼저 몰리기는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려 보세요.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차례가 돌아올 겁니다.”
그렇게 들으려면 이해 못 할 건 없었다.
기본적으로 엔지 소프트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콘크리트 유저층을 보유한 회사다.
외국계 게임 회사들 또한 매니아층이 강한 건 마찬가지.
또 소프트미니도 한물 죽기는 했다만 국산 패키지게임의 구세주쯤으로 대접받는 회사였다.
이렇게 놓고 보니 넥스트가 뒤떨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넥스트는 이랬구나.’
내가 아는 넥스트는 한국 1위 게임 회사였다 보니, 이러한 대접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기껏 해 봐야 수많은 회사 중 하나 정도의 취급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게 당사자인 내 눈에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휑하네.’
우리 넥스트 쪽 부스.
가뜩이나 불필요한 장식품을 버리고, 전부 체험석으로만 가득 채워 뒀다.
넥스트에서 배려를 해 주어서 최대한 확보한 좌석이 무려 50석.
사실상 없는 공간까지 만들어 꽉꽉 채워 넣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플레이하는 사람은 고작 다섯 명이 안 되었다.
그에 반해, 엔지소프트는 거의 만석.
차이가 크다
‘장사 안 되는 레스토랑 보는 것 같은데.’
나름대로 홍보 열심히 하지 않았나.
기사도 꽤 퍼졌는데.
그렇게 실패의 예감이 드는 찰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최 과장이 내 어깨를 다독이더니 말했다.
“그것 아십니까? 김종수 사장님이 처음으로 게임 박람회에 참가했을 때만 해도 재하 씨처럼 대학생 신분이었는데, 당시에는 종일 백 명도 유치하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적도 있었나요?”
“네. 사실상 망했다고 봐야겠지요. 그야말로 파리만 날렸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누구나 다 망할 때가 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라는 건가.
정신승리에 가까운 위로다.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어쩐지 이 이야기에는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나요?”
최 과장은 흐뭇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손님 중에 어느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한 사람이요?”
“다른 곳에 안 가고 부스에 계속 붙어서는, 계속 이래저래 말을 걸었다고 합니다. 개발 철학부터 개인사, 기술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다른 게임 이야기까지. 김종수 대표님은 또 그걸 받아주면서 계속 잡담만 나눴다고 하더군요.”
아.
그런 사람 가끔 있지.
행사 부스에 상주한 채 직원한테 계속 이래저래 말 걸며 시간 뺏는 진상.
그래서 그날 행사를 망치기라도 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최 과장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어느 잡지사의 편집장이었습니다.”
“······!”
조금 놀라는데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돌아가서는 한국 게임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면서 크게 글을 썼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점점 치고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게 지금의 넥스트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알 것도 같았다.
“숫자보다는, 확실한 팬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여기서 혼자 가만히 있는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럴 시간에 화제가 될 일을 뭐든 시도해 봐야지.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혹시 연필 있나요?”
< 진상 손님 > 끝
ⓒ 이한이™
< 조삼모사 >
“연필이요?”
최 과장이 의아한 듯 되묻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네. 필기도구 이런저런 거랑. 그리고 종이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좀 흰 면적이 넓은 종이.”
“찾아보면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이신지······.”
“그게요.”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아까 과장님이 김종수 대표님 이야기 해 주신 거 보고 떠올렸는데요. 저도 뭔가 접대를 해 보려고요. 남들 안 하는 접대로.”
나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참. 책상이랑 큰 칠판 같은 것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건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우선은 알겠습니다.”
최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