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56)
두 번 사는 미대생 56화(56/93)
*
다음 한 명은 미리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다.
앞서 만난 저 둘이 비교적으로 상식적인 범위 안의 예술을 추구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아예 자기 멋대로 구는 타입이었다.
‘어디 보자, 이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한예원 미대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있었다.
[공동 작업실에는 미친 놈이 있다.]사실, 사회의 보편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한예원의 학생이라면 충분히 미친 게 맞았다.
돈보다는 예술을 본다는 점이 그러하며, 자기만 아는 사고방식이 또 그러했다.
‘오죽하면 취업하고 1년 안에 때려치는 비율이 전국에서 제일 높다고 했지.’
극단적인 마이웨이.
그게 한예원이었다.
그런 이곳에서도 각별히 미친놈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었다.
‘냄새를 보니까 이쯤 같은데.’
걷다가 공동작업실 중 어느 구역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방에서 은은한 단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마치 과일 향수를 뿌린 것만 같은 단 향기.
하지만 그 실체를 안다면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향기였다.
‘여기 맞네.’
구석을 돌자 창가 앞으로 거대한 캔버스가 그 자태를 드러났는데, 그 위로 아름다운 나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수백 개의 색채를 다채롭게 이용해 감각적으로 그려낸 나비.
얼핏 보기에는 인상파의 그림을 보듯 화려하기 짝이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물감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찐득찐득하고 냄새나는 덩어리.
껌이었다.
그렇다.
이곳에서 풍기는 단 향기는, 전부 이 캔버스에서 풍기는 단내였다.
‘우욱.’
순간 올라오는 작은 구역질에 작은 현기증마저 풍겼다.
하지만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다.
이 껌을 씹은 사람이야말로, 내가 오늘 힘겹게 찾아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주목은 무조건 산다.’
지금 한예원에서 내가 아는 학생 중에서라면, 개성으로는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 압도적인 최고였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재하야. 그래도 이 정도면 참을 만하잖아. 심하윤 대표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려라. 네가 투자한 돈을 생각해.’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기를 한참이었다.
곧 어느 잘생긴 남자가 복도 멀리서 천천히 걸어왔다.
머리에는 야구모자를 쓰고 후드티를 입었는데, 입으로는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남자.
‘찾았다.’
오사무엘.
한예원 공식 미친놈이자, 한예원 서양화과 3학년생이었다.
그리고.
껌으로 작품활동을 할 생각을 하는 미친 턱근육의 소유자였다.
“어, 뭐야. 누구세요?”
그가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너 찾으러 온 사람입니다.’
< 미친 턱근육 > 끝
ⓒ 이한이™
< 초절정 스미스 머신 >
미리 말했다시피, 한예원에는 미친 사람이 많다.
‘학교 자퇴를 자랑으로 여기는 건 기본에, 인터넷에 우울증 글 쓰는 건 소양이고. 서로 작품 이야기로 말다툼하다가 절교하는 건 일상이지.’
그런 바닥이다.
여기서 단순히 껌 좀 잘 씹는다고 그중 독보적인 미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사무엘은 어째서 독보적인 미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그러니까, 봐. 이렇게 훌륭한 소재를 두고 다 욕만 한다니까. 다 예술알못 아니야?”
자기 작품이 욕먹는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 그러했다
“껌이라는 소재가 얼마나 좋은데. 몇 번을 씹느냐에 따라서 색감도 바뀐다니까. 브랜드에 따라서 색감이 다른 데다가 입체감을 묘사하기도 좋지. 어지간한 물감보다 훨씬 나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그 비주얼이 자세히 보면 더럽고 이상한 냄새가 문제일 뿐이다.
자기 작업실에서 하면 안 되나.
이걸 굳이 공용 작업실에서 해야만 하는가.
‘······ 이렇게 쏴 주고 싶은 기분이 굴뚝같다만, 지금은 참아야지.’
이 미친 사람이 유능한 미친 사람이라는 점이 모든 비극의 발단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듯 말했다.
“확실히 이 작품을 못 알아보는 사람들은 눈깔이 삔 겁니다.”
“그렇지.”
“제가 보기에도 이건 아트입니다. 아트.”
“암.”
열심히 비위를 맞춰 주려는데, 오사무엘이 갑자기 말했다.
“봐, 역시 예술은 잘하는 사람이 잘 안다니까.”
“저 아세요?”
뭔가 나를 안다는 말투에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너 시각디자인과 2학년 이재하 아니야?”
“맞는데요.”
“너를 누가 몰라.”
“······.”
내가 그렇게 알려졌나.
그렇다면 차라리 낫다.
‘다짜고짜 외국에 작품 내자고 말하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보다는 쉽게 받아들이겠지.’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그냥 본론으로 넘어갈 생각으로 말했다.
“저기, 혹시 작품을 좀 팔아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판다고? 어디서?”
“해외에요.”
“······.”
오사무엘이 잠시 멍하니 있더니 말했다.
“확실히 내 작품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먹힐 것 같기는 해.”
“······.”
이 말이 사실이라는 점이 개탄스러웠다.
나는 쓴물을 삼키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냥 해외가 아닙니다. 조금 물이 큰 곳입니다.”
“그게 어딘데?”
“스위스 아트 페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나는 그에게 이번 일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 홀리 쉣.”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드디어 이 세상이 오사무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날이 왔구나.”
“네. 그렇습니다.”
“좋다. 앞으로 우리는 브라더다.”
오사무엘은 기뻐서 춤이라도 출 것 같더니 말했다.
“그런데, 거기 나가는 건 좋은데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이요?”
스위스 아트 페어에 작품 출품시켜주면 됐지, 거기서 뭘 더 추가로 요구하려는 건가.
예술가라고 이상한 조건이라도 붙이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한 찰나였다.
“내가 돈이 없거든.”
오사무엘이 중얼거렸다.
“캔버스랑 껌 살 돈 좀 빌리자.”
“······.”
“나중에 갚을게.”
응.
돈이 없었구나.
어쩐지 공동 작업실에서 욕먹으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했다.
‘하긴, 작품 하나당 껌값만 몇만 원은 그냥 깨지겠네.’
남들이 페인트로 붓질 한 번 할 때, 이 사람은 껌을 몇 통을 씹어야 한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냥 다 빌려줄 테니까, 작품만 확실히 만들어 주세요.”
“오, 좋아. 아주 좋아.”
그가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도저히 그 손을 잡을 엄두가 안 났다.
‘저 손으로 벽에 껌을 하나하나 붙였겠지.’
생리적으로 좀 그렇다.
나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호주머니 속의 명함을 집어내 그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어? 그래.”
나는 재빠르게 그곳을 벗어나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이재하, 임기응변 좋았다.’
모처럼 나 자신에게 감격했다.
*
‘지금까지 대충 다섯 명.’
나와 한설 선배, 그리고 내가 직접 데려온 세 명까지.
이 정도면 일단 기본적인 구성은 갖췄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심하윤 대표님이랑 한설 선배가 각각 한 명씩 데려오겠다고 했지.’
오늘은 그 둘과 차례대로 미팅을 가지는 날.
그중 한설 선배가 소개하려는 한 명이 누군지 기대되는 참인데, 그녀가 기대를 복돋아주기까지 했다.
‘한예원 사람이야. 깜짝 놀랄 테니까 기대해.’
한예원에서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이라.
대체 얼마나 잘난 사람을 소개하려는 걸까 싶은데, 나는 그 실체를 확인하고는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오래간만이네요.”
“······ 교수님?”
익히 아는 얼굴이 있었다.
정상희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이 왜 여기에 오셨지.’
그러고 보니까 교수님들은 서로 아는 사이라고 했지.
설마 이종이 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신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이 교수님 만날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들렸어요. 아트 페어에 나간다면서요?”
“네.”
“설이 학생에게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잠깐.
한설 선배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싶은 찰나였다.
“저도 같이 참가할 수 있을까요?”
“······.”
그래.
한설 선배가 정상희 교수님에게 제안을 했구나.
‘이건 상상도 못 했네.’
학부생들이 전시회를 열겠다는데, 설마 교수님을 데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이건 무릎을 탁 칠 일이었다.
‘체급이 말이 되나.’
정상희 교수가 그냥 교수인가.
교수라면 누구나 화려한 커리어를 덕지덕지 달고 사는데, 정상희 교수는 그중에서도 정상인 한예원의 교수였다.
그 커리어는 독보적인 수준.
해외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화가였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는 동양화를 그린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그녀가 즐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트 페어에 나가는 건 오래간만이군요.”
그러시겠죠.
어디 유명한 단독전 외에는 어디 나갈 일이 별로 없으셨을 테니까.
명예의 전당 정도는 돼야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실 테니.
“해외 전시전은 오래간만인데, 저도 이번에는 작품을 많이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냥 쌓인 거 아무거나 가져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정상희 교수와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 한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눈을 말했다.
‘뭐.’
나도 답해줬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막상 말은 이렇다만, 솔직히 말해서 마냥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정상희 교수라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섭외할 수 있는 상대로는 최고급일 테니.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두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네, 교수님.”
정상희 교수가 일이 바쁘다면서 돌아간 뒤, 나는 한설 선배를 보면서 물었다.
“미리 말이라도 해 주시지. 어차피 교수님이면 제가 거절도 안 했을 텐데요.”
“그럼 재미 없잖아.”
“······.”
응.
그렇구나.
어쨌든 그건 그렇구나 싶은데, 이제는 다음 관심사로 넘어갔다.
“심하윤 대표님은 누굴 데려올까요?”
“그러게.”
“좀 대단한 사람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말을 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그로브 170은 분명 중견급 아티스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 맞다.
하지만, 정상급과는 거리가 있었다.
여기서 정상이란 스위스 아트 페어에 느긋하게 참가할 수준의 아티스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상희 교수님이 그로브 170에서 전시를 하긴 하셨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호회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좀 그런 느낌이다.
정상희 교수를 본격적으로 섭외하려면, 석기 아트센터가 달려와도 어렵겠지.
과연 그로브 170은 어떤 사람을 데려올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머릿속으로 어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설마 송태엽을 데려오는 건 아니겠지.’
나랑 다퉜던 아티스트였다.
생각해 보니 그로브 170에서 간판으로 내세우는 사람이라면 당장 그 사람 외에는 크게 떠오르지 않았다.
‘실력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얼굴 마주치기는 또 싫은데.’
거북하다.
무슨 인생이 걸린 문제도 아닌데 굳이 손잡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안녕하세요.”
심하윤 대표가 작업실로 와서는 내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데려오신다는 분은요?”
“이 근방에 사시거든요. 곧 오실 거예요.”
순간적으로 머리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근방에 산다고?’
여기는 한예원 대학로.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태반이 한예원 학생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집값은 비싸면서 교통은 후진, 이런 동네에 제 발로 들어올 리가 없지.
누군가 싶은 찰나인데, 또 누군가가 찾아왔다.
“······.”
“오래간만이네.”
아는 사람이었다.
호탕한 인상에, 히피도 아니면서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
그리고 이미 나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
백동우였다.
‘이 사람이었구나.’
한 순간 긴장이 풀렸다.
시각디자인과 백동우 선배.
과거 정상희 교수님의 전시전 때 만났던 사람이었는데, 흑백 그림을 그리는 데 특출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 교수급이 포진한 단체전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솜씨였다.
“깜짝 놀랐다. 누가 스위스 아트 페어에 참가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길래.”
“네. 그게 접니다.”
“우리가 처음 봤던 게 분명 작년이었지? 그때가 첫 전시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1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됐냐.”
“그러게요. 살다 보니까 일이 이렇게 되네요.”
“너 보니까 나는 제자리걸음만 한 것 같다.”
1년 사이에 참 많이 변했구나.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그때가 이미 4학년 아니었나.’
그게 벌써 작년이었다.
그럼 지금은 졸업한 건가 싶어서 물어보는데, 그가 답했다.
“대학원 들어갔다.”
“······ 대학원이요?”
“응.”
“어쩌다가요.”
“그때 그 전시전이 잘 풀려서 이래저래 일이 좀 있었거든. 어떤 교수님이랑 말이 좀 오가서, 지금은 이런 쪽 그림 하면서 겸업하고 있어. 이래 봬도 그로브 170 전속이다.”
문득 작업실에 들어온 후배의 말이 떠올랐다.
[대학원까지 가면 삼류, 학부만 졸업하면 이류, 학부 다니던 중에 자퇴하면 일류라고 하던데요?]그 말이 그냥 속설이 아니었구나.
백동우 선배는 삼류구나.
“왜 그래.”
“아뇨. 반가워서요.”
“그렇냐? 나도 반갑다.”
그가 낄낄 웃었다.
*
작가진을 구성하는 데는 이래저래 고난이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작가를 모으자 작품 수급에는 문제라고 할 것이 없었다.
필요한 작품 수는 최소 50점 이상.
이중 절반가량이 나와 한설 선배의 작품이었는데, 나머지도 금세 모였다.
“필요하면 더 말해.”
연우 선배나 봉식 아저씨는 가진 게 작품이었다.
“내가 작품을 한 번에 많이 못 만들어서.”
오사무엘은 기껏 3점이었지만, 그 3점의 임팩트가 강하니 괜찮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것보다 많으면 회장에 껌 냄새가 진동할 것도 같고.
백동우 선배나 정상희 교수님은 그냥 모범적이었으니 말이 필요 없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네.’
사실, 스위스 아트 페어라는 큰 기회를 두고 작품을 게을리할 만큼 대범한 사람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매진을 노리고 가는 행사라고 하니까.’
점당 수백은 기본에, 수천에서 억대 작품도 널린 게 스위스 아트 페어였다.
기본적으로 아트 페어는 고상한 척을 해 봐야 수익을 내기 위한 장소.
특히 스위스 아트 페어는 수천만 원대 참가비를 요구하는 만큼, 그만한 차익을 낼 수 있을 작품만을 내놓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격대에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노력은 해 봐야겠지.’
작품은 심하윤 대표가 소개해 준 전문 배송 업체를 통해서 미리 보내두었다.
그리고.
나도 떠날 준비를 했다.
“사장이 자리를 비우네.”
오늘은 그 전날, 사무실 식구들과 함께 보내는 날이었다.
남운 선배가 섭섭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없으면 심심해서 어쩌냐.”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버텨야죠.”
“나도 데려가.”
“비행기값은 각자 부담입니다.”
“······ 치사하겠시리. 나도 스위스 여행 좀 가 보나 했더니.”
문득 스위스라고 하니 미래의 유머가 떠올랐다.
나는 규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규태야.”
“왜.”
“초절정 스위스 여신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리는 데이트랑.”
“나 할래.”
“아니, 좀 더 들어봐.”
“뭔데.”
“초절정 스위스 여신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리는 데이트랑, 초절정 스미스 머신과 함께 가슴 이두근 고립 웨이트. 둘 중에서 뭐 고를래.”
“······.”
그 말에 규태는 나를 뻔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재하야. 요즘 많이 힘들어?”
“······.”
과연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미래의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걸까.
아무튼, 그렇게 식구들과의 마지막 날이 지나갔다.
다음 날.
나는 식구들의 배웅과 함께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대되네.’
세계 예술의 격전지.
스위스 바젤.
나는 그곳으로 간다.
< 초절정 스미스 머신 > 끝
ⓒ 이한이™
< 모처럼 크로키 >
‘여기가 스위스구나.’
비행기를 타고 한참.
스위스 바젤 공항에 도착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 이상으로 온몸이 뻑적지근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체 비행기를 몇 시간을 탄 거야.’
그렇다.
인천에서 출발해서 중간에 경유지를 통하며, 순수하게 비행기에 앉아 있었던 시간만 12시간.
중간중간 눈을 붙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깐이지, 나중에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공항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동안의 노고를 한 번에 보상받는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사방이 뻥 뚫렸네.’
속이 다 시원하다.
직선거리에 높은 빌딩이라고 할 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자연은 몰라도 시원하게 트인 광경.
“공기 되게 좋다. 제주도 여행 온 것 같네.”
옆에서 한설 선배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제주도 여행 가 봤어요?”
“가끔?”
“가 보면 어때요.”
“심심해. 막상 둘러보면 할 거 진짜 없다.”
공감한다.
그녀는 몸을 이래저래 비틀다가 말했다.
“가이드는?”
“바빠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네요.”
심하윤 대표는 행사 준비로 바쁘다고 했던가.
그 대신 그녀가 알아봐 준 가이드는 조금 늦을 듯했다.
“와. 백인이다.”
“그러게요. 백인이네.”
“저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특이하게 보이겠지?”
“그럴 수도 있고요.”
그렇게 한설 선배와 함께 공항 정문에 서서 멍하니 있는데, 참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살다 살다 내가 스위스에 다 와 보네.’
전생의 나는 국내파였다.
딱히 해외를 둘러보고 할 게 없었지.
그랬던 내가, 지금은 유럽까지 왔다.
그것도 대형 행사에 참가하러,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학교 선배와 함께.
‘묘하게 즐겁네.’
여행 온 기분이 제대로 난다.
마침 행사는 내일부터이다 보니, 오늘 하루는 우리 둘의 일정이 될 것도 같다는 점이 더더욱 그러했다.
“야, 이따가 퐁듀나 먹으러 가자.”
“퐁듀 좋죠. 누나 그런데 퐁듀 하면 어떤 느낌이 떠올라요?”
“고급진 요리. 돈 많이 들겠다 싶은데.”
“그렇죠? 그런데 옛날에는 돈이 없어서 퐁듀를 해 먹었데요.”
“그래? 왜?”
“먹을 게 치즈랑 딱딱하게 굳은 빵밖에 없는데, 빵을 어떻게든 먹어야 하니까 치즈를 녹여서 찍어 먹었다나 봐요.”
“신기하네.”
“그렇게 발전해서 지금은 김치처럼 변했데요. 막 초콜렛에 찍어 먹고, 기름에 찍어 먹고, 해물 찍어 먹고.”
“김치라고 하니까 갑자기 로망이 죽는다.”
그렇게 한가롭게 여행 이야기나 나누던 와중이었다.
끼익.
곧 앞으로 차 한 대가 오더니 멈춰섰다.
“안녕하세요.”
어느 백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한국어 발음이 썩 정확했다.
“혹시 JH 디자인에서 온 거 맞습니까?”
“네.”
“오래 기다렸습니다. 타세요.”
이 사람이 가이드가 맞긴 한 모양.
나는 한설 선배와 함께 그의 차에 올랐다.
*
스위스 아트 페어가 열릴 바젤(Basel)시.
그곳 인근의 호텔 방에 들어가서 짐을 내리고 이래저래 여독을 풀기를 잠시.
“퐁듀가 맛있긴 한데.”
“네.”
“금방 질린다.”
“······.”
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곧 거대한 난관에 봉착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할 일이 없다.
‘애초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으니까, 여행을 와도 할 일이 없다.’
행사는 내일부터 시작인데,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 어떻게 살았던가.
눈을 뜨면 작품을 만들고, 눈을 감으면 머릿속으로 작품 생각을 하면서 잠들었다.
‘밥 먹을 때도 머릿속으로 작품 생각만 했지.’
모든 심력을 전부 작품에만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렇게 살아온 나와 한설 선배이다 보니, 막상 여행을 와도 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다.”
“어쩌죠?”
“뭘 어쩌긴. 그냥 평소처럼 살아야지.”
여기서 평소처럼이란 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말 그대로 늘 하던 대로 하자는 말이었다.
다른 대학생들은 모르겠다.
하지만 한예원 미대생들이 모이거든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밥, 카페, 그림
여기서도 그럴 생각인 모양이었다.
‘뭐, 나쁠 건 없지만.’
나도 그림을 손에서 놓은 지 하루밖에 안 됐다고 벌써 좀이 나는 참이었다.
그런데 기왕 해외까지 나와서 그냥 그리기에는 어딘가 애매했다.
“누나.”
“왜.”
그래서 나는 제안했다.
“우리 길거리에서 크로키나 해 볼래요?”
그렇다.
이 세상에는 그림을 그릴 다양한 방법이 있고, 그중에서 현장감을 살리기에는 크로키만 한 게 없었다.
기왕 스위스까지 온 참이다.
늘 하는 크로키라고 해도, 조금은 다른 맛이 살 것도 같다.
“크로키 좋지.”
한설 선배도 흥미가 동하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할 일 없어서 어쩌나 하는 참이었는데, 너 머리 좋은데.”
“제가 조금 그렇습니다.”
“좋아. 아주 기특해.”
그렇게 우리는 여행 씩이나 와서 화구를 바리바리 싸 들고 길거리로 나왔다.
크로키에 특별히 필요한 도구라고 할 건 없었다.
간단한 종이 노트와 연필.
무엇보다도 볼거리가 많은 동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근린공원에 방문했을 때였다.
“······.”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 우리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좀 많았나 보다.”
“그러게요. 저 사람들도 할 일이 없었나 보네.”
공원 사방에서 사람들이 종이를 하나씩 들고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체 왜지? 왜지?’
스위스 사람들은 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나.
아니면 여기가 그런 지역인가.
잠시 고민을 하려니 그럴듯한 이유가 떠올랐다.
“누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뭔데?”
“여기 바젤시 인구가 20만 명이 좀 안 된다고 들었거든요.”
바젤은 스위스 북부의 소도시.
스위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라고는 하나, 그 면적은 서울의 30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 면적이 문제였다.
“스위스 아트 페어 방문객만 10만 명에 가깝다고 해요.”
“······.”
소도시의 비극이었다.
행사 하나 열린다고 이 작은 도시에 사람들이 쏠리니, 그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았던 것.
그래.
이건 마포구에만 그림 관련 인구가 10만 명이 모인 것과도 같은 참사였다.
“지구상에서 여기보다 그림의 밀도가 높은 지역은 없을 걸요.”
“와, 진짜 그림의 도시네.”
내 설명을 들은 한설 선배도 떨떠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림 그리는 게 부끄럽진 않겠다.”
“남 눈치 볼 필요는 없겠네요.”
“응. 그냥 그리고 싶은 거나 그리자.”
나와 한설 선배는 대충 아무 곳에나 앉은 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새삼 느꼈다.
‘이번 생 들어서 크로키를 안 한 지도 꽤 됐구나.’
사실, 전생의 나는 크로키에 자부심을 넘어 일종의 강박관념마저 가지고 있었다.
눈 감고 그리기.
이걸 내 일생의 과제로 여기면서 매일같이 수행하였기 때문.
그런데, 최근 일이 바쁘다 보니까 조금 멀리하고 있었다.
‘실력이 좀 죽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는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조금만 그리면 금방 다시 실력이 되돌아오리라.
그런 생각으로 주위를 관찰하자, 곧 그릴 소재가 수없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가 그림 같아서 그런가. 그릴 게 많네.’
마치 판타지 소설 속 마을의 한 풍경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광경.
나는 그것을 천천히 머릿속에 담기 시작했다.
천천히 음미하고 스캔하듯 눈으로 훑었다.
마침 그림을 안 그린지 무려 하루나 지난 상황.
가뭄에 비를 만난 토양처럼, 내 집중도가 절호조로 올라갔다.
그렇게 약 1분의 관찰 뒤.
나는 눈을 감았다.
사각.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 천천히 되새겨 보는 거야.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 어떤 광경을 보았는지.’
흔히, 크로키를 하면 그림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크로키 실력이 는다는 말이 있다.
연습이 지나쳐 연습에만 능숙한 사람이 된다는 말.
나도 일부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충분히 잘 발전한 크로키는 완성된 스케치와 구분할 수 없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그렇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완성된 스케치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내 머리가 하드 디스크라면, 바깥 광경은 이미지 데이터였다.
그걸 손이라는 도구를 통해 바깥으로 꺼낼 뿐.
사사삭.
내 손이 나조차도 놀랄 만큼의 속도로 빠르게 뻗어 나갔다.
‘좋아. 느낌이 좋다.’
한 번 집중을 시작하자 세상이 마냥 고요하게 느껴졌다.
검은색으로 물든 세상.
이 세상에서 나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나를 둘러싼 환경은 모두와 공유하는 공원이지만, 내 의식을 지배하는 공간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자유로웠다.
‘자,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리는 거야.’
그렇게 눈을 감고 그림에 빠지기를 한참.
눈을 뜨고 나자.
“······ 너 뭐냐?”
한설 선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저 이재하요.”
“누가 네 이름을 모른대.”
한설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말했다.
“그거 말고, 네가 그린 그림 말하는 거야. 언제부터 이렇게 그릴 줄 알았어?”
“이게 뭐 어때서······.”
나도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내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도 놀랐다.
“요?”
그림이 이상하다.
‘뭐야, 왜 이렇게 잘 그렸어.’
압도적인 수준의 그림 한 점이 내 스케치북에 담겨 있었다.
신비롭다.
내가 그린 크로키인데, 내가 그린 게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터 이렇게 잘 그렸던가.
그림이라는 게 이렇게 시간이 단기간에 확 오를 수 있던가.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크로키라면 그릴 만큼 그렸다.
남들이 평생 그릴 분량의 몇 배를 그려본 게 나였다.
그런데 최근 몇 달 게을리해서 실력이 줄었을 거라고 생각을 했더니, 오히려 실력이 한참 늘었다.
“와. 나도 주변에 크로키 많이 하는 사람들은 봤는데, 이렇게 맛깔나게 그리는 사람은 처음 본다.”
한설 선배가 옆에서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 선배가 누구던가.
아닌 것 같은 작품은 대놓고 아니라고 지적하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헤븐즈 도어에서 작품 평가를 받을 때도 그랬다.
[아틀란티스]의 스케치를 보고서는, 재미가 없다고 대놓고 지적하지 않았던가.‘그런 한설 선배가 내 작품을 보고 감탄하고 있다니.’
이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
어쩌다가 실력이 이렇게 늘었나.
한참 고민하기를 잠시.
‘설마.’
곧 한 가지 단서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게임을 제작했던 게 도움이 됐던 건가?’
그게 그나마 정답 아닐까 싶었다.
전생의 나는 크로키를 많이 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실무에서는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디자이너였다.
크로키는 작업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것이 이번 생에는 바뀌었다.
‘게임을 만들면서, 등장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실제로 그려내야 했지.’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동세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한 가지 움직임을 보거든, 그 움직임이 뻗어나갈 가짓수를 계속 생각해야만 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
그리고 고치기.
그 모든 과정이 내 머릿속에서 화학작용을 일으켰던 게 아닐까.
모르겠다.
그저 당장 짚이는 단서가 이것밖에 없었다.
‘정신 나갈 것 같네.’
뭐라고 해야 하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 같다.
흔히, 크로키를 하면 그림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크로키 실력이 는다는 말이 있다.
잘 생각해 보니 그 말은 틀린 것 같다.
‘딴짓하는 게 크로키 실력 늘리기 더 좋네.’
뭔가 문맥이 나간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게 느껴진다.
“야, 이거 어떻게 했냐. 나도 좀 알려줘.”
한설 선배가 내게 그렇게 물어왔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떨떠름하게 답했다.
“저, 그게요. 눈을 크게 뜨고 관찰을 한 다음에,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리고 그걸 손으로 그리면 돼요.”
“무슨 교과서 읽고 예습복습 철저히 하라는 말을 하냐. 치사하게.”
한설 선배가 툴툴거리는데, 정말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시끌벅적 떠드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누가 뒤에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서 뒤를 바라보는데, 푸른 눈의 백인 한 명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실례지만 그림 좀 봐도 되겠습니까?)”
< 모처럼 크로키 > 끝
ⓒ 이한이
< 바젤 예술 대학 >
‘누구지?’
한국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외국인의 외모는 잘 분간이 안 되는 게 보통이라지만, 그중에서도 태어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유명한 예술가는 아니다.
‘어떤 사람이지? 그냥 지나가던 시민?’
나름대로 추측을 하고 있는데, 그가 날 보고는 물었다.
“(혹시 영어 하실 줄 아시나요?)”
“(······아, 네. 가능합니다.)”
그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서 죄송하지만, 지금 그리신 그림을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
“(천천히 보세요.)”
그런 이유라면야 뭐.
나는 그에게 내 스케치북을 건네주었다.
그 백인이 송구하다는 듯 내 작품을 양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고 있는데, 한설 선배가 속닥였다.
“재하야. 너 의외로 영어 잘한다.”
“아버지의 지인이 이런 쪽으로 일을 하셨거든요.”
여기서 아버지의 지인은 나다.
가끔 외국에서 온 손님 접대하다 보니까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한설 선배는 작게 감탄하더니 말했다.
“떡잎이 남다르네. 너랑 여행 다니면 어디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
“······.”
아무튼, 저 백인은 내 스케치북을 한참이나 주의 깊게 살폈다.
“(흐음, 흠. 그렇군요. 음.)”
중간중간 묘한 감탄도 섞어 주는 게, 그림을 그린 장본인인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내 크로키가 그만큼 볼만했나.’
잘 모르겠다.
괜찮게 그리기는 한 것 같은데.
그저, 그가 내 그림을 맘에 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
“(실례지만, 나머지 페이지도 봐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는 이번에는 아예 잔디 위에 앉더니, 작정하고 관찰하듯 내 스케치북을 구경했다.
주위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거의 내 스케치북에 얼굴을 박은 듯했다.
‘볼 게 그렇게 많은가.’
조금 전에 크로키를 그리기는 했다만, 기본적으로 내 스케치가 잔뜩 그려진 스케치북이었다.
최근 그림부터 시작해, 던전 앤 스토리에 필요한 구상까지 이래저래 그렸다.
통일성이라고는 아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스케치북.
저 사람은 그것을 한참이나 꼼꼼히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후, 놀랍습니다. 그림 솜씨가 정말 훌륭하군요.)”
“(······ 과찬입니다.)”
“(아닙니다. 기술적인 완성도도 그렇지만,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하나하나가 작품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릴 수 없는 그림입니다.)”
기분이 묘하다.
외국까지 나와서 의도치 않게 그림을 보여주고, 예상치 못하게 칭찬을 듣고 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는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대체 누군데.’
뭔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건 알겠다.
그냥 애호가인가.
떨떠름한 눈길로 바라보는데, 그가 순간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제가 아직 자기소개도 안 했군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그가 내게 명함을 건넸다.
그런데, 그곳에 적힌 이름이 조금 화려했다.
[바젤 예술 대학교 현대 미술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루카스 프라토 교수]“······.”
대학 교수님씩이나 되는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