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57)
두 번 사는 미대생 57화(57/93)
*
그런 사람이 왜 여기서 계시데.
아참. 여기 바젤이지.
바젤에 바젤 예술 대학교 교수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우연이 좀 많이 겹친 것 같지만, 확률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바젤 예술 대학이라. 여기 꽤 유명한 곳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 스위스에 여행 간다고 들떠서 이리저리 검색하던 중 우연히 이름을 봤었다.
스위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 예대라고 하였던가.
적어도 세계적인 대학인 건 맞았다.
‘그런 사람이 내 작품을 칭찬이라.’
기쁘기에 앞서 당혹스러운 상황인데, 루카스 프라토 교수가 말을 이었다.
“(부족한 사람입니다만 교직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에 나와서 그림을 그리는 게 취미인데, 너무나도 특이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계시기에 호기심이 들어서 말을 걸었습니다.)”
“(아, 혹시 눈을 감고 그리는 거 말씀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하긴.
내 그림 그리는 방식이 독특하기는 했다.
눈을 감고 크로키를 그린다는 게, 미래에는 어느 정도 알려진 방식이기는 해도 아직 마이너한 것도 사실이니.
루카스 프라토 교수는 살짝 흥분한 듯 내게 물었다.
“(왜 그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셨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퍼포먼스? 아니면 뭔가 연습 목적?)”
“(······ 형태감과 관찰력을 기르는 데 아주 좋습니다.)”
“(아, 그렇군요. 눈을 감고 그림으로서 조금 더 또렷하게 상상을 해야 하게 된다거나. 집중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 한 방법 같습니다.)”
혼자서 열띤 목소리로 이래저래 떠들기를 한참, 그는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이런, 실례지만 혹시 예술을 전업으로 하시는 분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
이제야 내가 자기소개를 할 순간이 왔구나.
나는 살짝 목청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한국에서 왔는데, 그곳의 한국예술원이라는 곳에 다니고 있습니다.)”
“(한국예술원. 한국예술원.)”
루카스 프라토 교수는 그 이름을 몇 번 되새기더니, 기억이 난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름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한국예술원을요?)”
그가 내 모교의 이름을 안다는 게 신기한 상황.
신기한 마음에 되묻자 그가 말했다.
“(예. 그곳 출신의 학생이 가끔 저희 바젤 예술 대학에 유학을 오고는 합니다. 연구생으로도 있고 말입니다.”)
어쩐지.
유학 협정을 맺었구나.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싶은데 루카스 프라토 교수가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군요, 그쪽에서 온 학생들이 기본기가 대체로 좋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아까 그런 식의 훈련을 했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잠깐.
뭔가 오해한 듯하다.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거 저만 하는 건데.)”
“(예?)”
“(그냥 저만 합니다.)”
“(······.)”
그는 살짝 당황한 듯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군요. 혹시 어느 분에게 배우신 건지.)”
뭔가 캐묻는 듯 묻는다.
‘대답을 못 해 줄 것도 없다만, 조금 복잡해지는데.’
누구에게 배웠는가를 묻는다면, 전생에 한예원을 졸업한 뒤 처음으로 들어갔던 직장의 선배에게 배웠다.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그냥 적당히 둘러댈 생각으로 말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미술 교육기관에서 짧게 배웠는데, 그곳의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 그럼 한국의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방법일 수도 있겠군요.)”
“(······.)”
“(이런 교육 방식의 차이가 예술가의 기량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연구해 볼 일이군요.)”
아닌데.
하지만 굳이 반박하기도 어중간한 상황이라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모르겠다. 알아서 어떻게든 되겠지.’
지구 반대편 사람에게까지 하나하나 사정을 말하기에는 좀 너무 복잡해진다.
무엇보다도, 영어가 조금씩 꼬이는 상황이라 피곤하다.
마침 주변에서 눈치가 보이는 것도 있고.
‘저 사람들인가.’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일 지는 알 것도 같았다.
아까 루카스 프라토 교수가 제자들 데리고 자주 나온다고 했으니, 이 사람을 따라서 온 사람들이겠지.
아니면 그냥 소란스러워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거나.
‘외국 땅에서 눈에 띄는 것도 꼭 좋진 않을 것 같은데.’
부담스럽다.
나는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날 생각으로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말했다.
“(혹시 내일부터 있을 스위스 아트 페어에 참가하러 오신 겁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만.)”
“(그렇군요. 작품을 출품하시는지 여쭙고 싶군요.)”
나는 말해도 될까 하다가, 굳이 숨길 일은 아니다 싶어 한설 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이분과 함께 작품 몇 점을 걸 것 같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내일 저희 바젤 예술 대학에서도 부스를 나갈 생각입니다. 주로 대학생들의 작품을 실제로 출품해 보는 취지입니다만.)”
말은 쉽게 하지만 내실은 썩 만만치 않았다.
대학생 수준에서 스위스 아트 페어에 작품을 출품한다니.
스케일이 좀 컸다.
‘우리는 학교가 아니라 국가 단위로 몇몇 갤러리가 참가하는 정도인데. 여기는 꼭 학교 수업처럼 말하네.’
바젤 예술 대학.
여기 좋은 대학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루카스 프라토 교수가 말을 이었다.
“(이것도 인연이니, 시간이 괜찮으시거든 한 번 들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굳이 이것까지 거절하기는 조금 상황이 그랬다.
외국의 예술 유망주들과 사이를 만들어 둬서 나쁠 것도 없고.
“(그럼 또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나는 적당히 인사를 한 뒤 한설 선배에게 말했다.
“누나, 다른 곳 가서 마저 그리죠.”
“왜?”
“좀 눈치 보여요.”
“난 괜찮은데, 네가 그러면 그래.”
그녀도 대충 짐을 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다른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 누구야?”
“이쪽 대학에서 일하는 교수님이시래요.”
“아, 어쩐지. 그림 잘 그리실 것처럼 생기셨더라.”
“그게 어떻게 생긴 건데요?”
“그냥. 그런 감이 있어.”
이상한 감일세.
“그래서 뭐래?”
“내일 아트 페어 자기들도 참가한다고. 혹시 시간 되면 놀러 오래요.”
“자기들이 와야지 왜 우리한테 오라고 그런데.”
“선물이라도 하나 주려나 보죠.”
“그럴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렇게 시덥잖은 농담을 하면서 걷다 보니까 곧 다른 공원이 또 나타났다.
‘여기에도 사람 많네.’
역시 예술의 도시 바젤.
또 뭔가 일이 있을까 조마조마 기대하며 크로키를 그렸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전이 특이한 케이스였나 보다.
“크로키 진짜 잘하네.”
다만, 한설 선배가 계속해서 내 그림을 의식하며 말했다.
“왜 이렇게 잘 그려?”
“그리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요.”
“······.”
한설 선배는 뭔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은 네가 더 잘 그린다고 해서 기고만장하지는 마.”
기고만장한 적 없는데.
그보다, 내가 더 잘 그린다고 생각한 적조차 없는데.
참 복잡한 심경인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도 앞으로는 크로키 자주 그릴 거야. 나중에 누가 더 잘 그리나 보자.”
“예.”
“와, 건성건성 답하는 것 좀 봐.”
“나중에는 누나가 더 잘 그릴 거예요.”
“나 놀려?”
“진심인데.”
그녀는 묘하게 경쟁심이 불타오른 듯했다.
그렇게 그날 저녁.
한설 선배는 바깥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배 꺼졌다. 밥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요?”
“음. 점심에 느끼한 걸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외국 땅에 나와서 그런가. 오늘따라 한식이 땅기네.”
“국밥 고?”
“있으면 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
다음 날 오전.
나와 한설 선배는 스위스 바젤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행사장.
메세 바젤(Messe Basel)에 방문했다.
‘오늘부터 여기에 수만 명이 매일같이 방문한단 말이지.’
아직 개장도 안 했는데 내부는 벌써부터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서울게임쇼 때와도 같다.
하지만, 그 밀도는 차원이 달랐다.
‘작품들이 엄청 많네.’
대충 둘러봐도 확실히 수준이 높다.
이미 완성도에서는 끝장을 찍고 왔다는 느낌.
확실히 체감됐다.
‘여기가 세계 미술의 중심지다.’
그렇게 미로 같은 행사장을 한참이나 돌아다니자, 곧 JH 디자인과 그로브 170 그리고 헤븐즈 도어의 협동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 있다.”
심하윤 대표가 눈에 들어왔다.
“대표님!”
한참 일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하는데,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한테 말을 걸었다.
“재하 씨. 어제 잘 지냈어요?”
“덕분에요.”
뭐라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다짜고짜 물었다.
“둘이서 뭐 하고 다녔어요?”
“음, 그게.”
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림 그렸어요.”
“그리고요?”
“그림 그렸어요.”
“또?”
“그림이요.”
“······.”
심하윤 대표는 조금 실망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껏 둘이서 외국까지 왔는데, 그림밖에 안 그렸어요?”
“평소에도 잘 안 놀아서 노는 법을 까먹었나 봐요. 그림 그리는 게 그나마 제일 재밌더라고요.”
“······ 재밌었다면 됐지만······.”
어딘가 실망한 눈치였다.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됐어요. 이리 와서 일이나 도와요.”
“넵.”
< 바젤 예술 대학 > 끝
ⓒ 이한이™
< 막장 드라마 뺨치는 전개 >
스위스 아트 페어.
세계 예술의 중심지이자, 예술계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곳.
그곳을 두 발로 직접 둘러보며 내가 처음으로 느낀 사실은 이것이었다.
‘역시 국내와는 수준이 달라.’
차원이 달랐다.
엄밀히 말하자면, 국내에도 실력이 있는 작가들은 많았다.
하지만 작가란 기본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직종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전에 태어난 작가가 아무리 세기의 천재라고 한들, 현대 수준의 원근법을 구현할 수 있는가.]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만 보아도 요즘 중학생 수준의 원근법조차 다루지 못 하는 작가가 수두룩했다.
과연 그들이 재능이 부족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노력이 부족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그들은 그저, 원근법의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시대의 한국 예술계가 그렇겠지.’
재능, 특출났다.
노력은 더더욱 특출났다.
그런 사람들이 노력한들, 환경이 안 받쳐주는 이상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그 한계를 부수려면 해외로 나가야 한다.
‘한국은 아직 사고의 틀을 못 부순 사람이 많아.’
가끔 가다가 오사무엘 같은 돌연변이가 나오더라도 전체적인 평균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시스템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해외의 미술은 한국 미술의 영역을 한참 넘어, 이미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실은 미래에서 온 나이기에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깝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국내 예술계도 해외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길 수 있을까.
그게 가능했으면 좋겠다.
대충 이런 생각에 빠진 찰나였다.
“뭘 그렇게 곰곰이 구경해.”
한설 선배가 내 옆에서 중얼거렸다.
“아뇨. 그냥 이쪽 작품들을 보고 있으려니까 대단하다 싶어서요.”
“그래?”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구경을 온 보람이 있네요. 확실히 있어요.”
어떤 우연의 일치였을까.
바젤 예술 대학.
그들의 부스는, 놀랍게도 우리 부스에서 불과 20m가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림 괜찮기는 하네.”
“누나라면 사 가고 싶어요?”
“가격만 괜찮으면.”
나와 한설 선배는 본격적인 개장을 몇십 분 앞두고, 다른 부스를 방문해서 둘러보고 있는 참이었다.
‘이게 참가자의 특권이지.’
수만 명이 몰려올 때가 되면, 작품 하나를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도 없다.
발소리에 큐레이터 목소리에 시끌벅적할 게 뻔하다.
지금 볼 수 있을 때 봐 두는 게 좋지.
“누나, 지금 우리 관람 티켓이 수천만 원 하는 거예요.”
“더럽게 비싸네.”
“값어치는 하지 않아요?”
“경기 특등석이라고 보면 나쁘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떠들면서 작품을 관람하는 찰나였다.
“(즐겁게 봐 주시니 기쁘군요.)”
옆에 서 있던 루카스 프라토 교수가 흐뭇한 듯 중얼거렸다.
나도 반갑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안녕하세요.)”
“(와 주셔서 고맙군요. 저희 학생들의 실력은 어떤 것 같습니까.)”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의 작품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훌륭합니다. 기본기도 기본기지만, 발상이 더 대단하네요. 사고의 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바젤 예술 대학이라고 했던가.
누가 유럽 미술 교육의 선두주자 아니랄까 봐, 그 수준이 어지간히 남달랐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그런 총천연색 작품 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누가 그렸을까.’
고전적인 유화였다.
다른 작품들이 발상의 차원에서 수준이 높았다면, 저 작품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옛날 미술계의 고전적인 흐름을 계승한 듯한 작품이었다.
‘다른 작품들이랑은 시간대가 거꾸로 노네.’
페인트로 실사에 가깝게 그린 작품.
나는 그 작품을 가리키며 루카스 프라토 교수에게 물었다.
“(저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요?)”
“(음. 저 작품 말이군요.)”
그는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어째서일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뭔가 사연이 있는 그림인가 싶은데,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사실, 전 작가님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습니다.)”
“(······ 네?)”
거짓말이라.
그게 무슨 말이지.
나랑 대화하면서 딱히 거짓말이라고 할 게 있었나.
우리가 무슨 엄청난 대화를 나눴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루카스 프라토가 입을 열었다.
“(전 예전부터 한국예술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오늘 놀랄 일이 많네.
*
한국예술원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하지만 놀란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제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잖아. 유학생들 가끔 왔다고.’
이게 굳이 거짓말을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그냥 처음 보는 사람한테 좀 맞춰줬구나 싶을 뿐.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카스 프라토 교수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지금 작가님이 관심을 가진 작품이야말로, 바로 그 한국예술원에서 온 학생이 그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
저 겁나 잘 그린 작품이 한예원 학생이 그린 거라고.
이건 진짜 몰랐다.
예상도 못한 전개다.
막장 드라마 뺨치네.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돌돌 굴리다가 말했다.
“(유학생이 있었나 보네요.)”
“(예, 맞습니다. 한예원에서 온 유학생이 그린 작품입니다.)”
“(이거 참 해외에서 이렇게 인연이 닿았다니까 저도 기분이 묘하네요. 나중에 밥이나 한 끼 같이 했으면 좋겠네.)”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하려는데, 루카스 프라토 교수가 입을 열었다.
잠시 뒤.
나는 번개를 맞은 듯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서지원이라는 이름을 아시는지요?)”
“(······.)”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은 좁다.
그것도 매우, 매우 좁다.
내가 한설 선배나 지훈 선배를 만난 게 그러하며, 김종수 대표나 김봉식 아저씨를 만난 게 그러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 내에서의 일이었다.
설마 외국까지 나왔는데 저 이름을 다시 듣게 되다니.
이건 너무하잖아.
‘요즘은 잊고 살았는데.’
벌써 일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당황스럽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네, 서지원 학생과는 같은 학과 동기였습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연관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해 저희 측으로 새롭게 입학을 한 학생인데, 이전에 다녔던 학교가 한국예술원이더군요. 그쪽에서도 그림 솜씨가 걸출했던 것으로 압니다.)”
“(어쩌다가 유학을 오게 된 건가요?)”
“(서지원 본인에게 몇 번 물어봤습니다만, 썩 기분 좋은 이유는 아닌 것 같더군요. 한국이 좁아서 이곳으로 왔다는 말을 종종 했습니다.)”
한예원을 자퇴한 뒤 바젤 예술 대학에 입학한 건가.
대충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나와 트러블이 생긴 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유럽 쪽의 명문 대학으로 다시 입학했다.’
생각해 보면 아예 없을 일도 아니었다.
국내 대학에서 자퇴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일 자체야 미대생 중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게 서지원이라는 게 놀랍달까.
‘괜히 이종이 교수님이 말을 감추셨던 게 아니었네.’
자기 조카가 나 때문에 학교를 자퇴했다.
물론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나 때문은 아니고 본인 탓이겠지만, 어쨌든 자퇴를 하긴 했다.
나한테 감정이 복잡하겠지.
이종이 교수님은 그걸 아주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내게 잘 해주었던 셈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역시 인격자다.
나는 속으로 감정을 갈무리한 뒤 말했다.
“(혹시 서지원도 여기에 와 있나요?)”
“(오전 중에 잠시 들렀다가 작가님의 부스를 잠시 둘러보고는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래서 혹시 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어딘가 씁쓸했다.
일 년이나 지났으면 이제 슬슬 감정이 정리될 때가 됐을 텐데, 아직도 날 불편해 한다니.
물론 내 잘못은 아니다.
티끌만큼도 없다.
그저, 그녀가 스스로 족쇄를 달았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옛날 일에 그렇게 얽매이면 안 좋을 텐데.’
그렇게 나와 루카스 프라토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한설 선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
“누나. 혹시 서지원이라고 아세요?”
“음, 건너건너 들어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학교 안 나오는 애 아니야?”
“네. 맞아요.”
굳이 복잡한 뒷사정을 이야기할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한설 선배라면 털어놓을 만하지 않을까.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저랑 작품으로 경쟁하다가 감정 문제 생겨서 자퇴한 앤데요. 이쪽 학교로 입학했다나 봐요.”
“······ 뭐?”
내 이야기를 듣기를 잠시, 한설 선배는 벙찐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한예원도 좋은 학교인데 왜 그랬대.”
“학교에서 문제 생기면 학교 나가기 싫잖아요.”
“음. 남자 동기들은 군대 가던데.”
“서지원 걔 여자예요.”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성별도 잘 모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무관심했던 모양.
하긴, 이래야 한설 선배답다.
남한테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한설은 저벅저벅 걸어 오더니 벽에 걸린 그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걔 그림이야?”
“네.”
한설 선배는 그 그림을 천천히 살피기를 잠시.
툭 던지듯 말했다.
“잘 그렸네.”
한설 선배의 입에서 잘 그렸다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인즉슨, 정말 잘 그린 게 맞다는 말이었다.
“이 정도면 실기력으로는 과탑이겠다. 너랑 동기면 지금 2학년이겠네.”
“네. 그런데 학교를 일찍 입학해서 몇 살 더 어려요.”
“그런 애를 네가 이겼다고?”
“어쩌다 보니까요.”
이겼다는 게 그리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어린 애한테 경쟁심을 불태운 게 그리 좋은 일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한설 선배가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크, 우리 재하 장하다.”
그녀가 나한테 따봉을 날렸다.
“······.”
그것도 아주 자랑스러운 따봉.
나는 그걸 보면서 우두커니 굳어져 있다가 말했다.
“······ 괜찮아요?”
“뭐가.”
“남이랑 작품으로 감정 문제 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뭐?”
“좀 인간 관계가 불편해 질 수 있다거나.”
내 말에 한설 선배는 어쩌라는 듯 웃더니 말했다.
“나도 그래서 학교에 친구 없는데.”
“······.”
아 그렇지.
이 양반 이런 사람이었지.
한설 선배는 이걸로도 부족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남한테 열등감 생겨서 자퇴하면 누가 손해야? 자기만 손해지. 누가 그러면 개평이라도 챙겨준다디?”
“그래도.”
“야, 신경 쓰지 마.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 네가 뭘 신경 써? 어차피 네가 먼저 시비 건 것도 아닐 거 아니야.”
“그건 맞아요.”
“봐, 그럼 자기 잘못이지.”
한설 선배는 웃더니 말했다.
“자기 분에 자기가 못 이겨서 그랬다는데 동정심이라도 가져줘야 하나. 꼭 사람들이 남 싫어하려면 이상한 핑계가 많아요. 남한테 꿀리면 그만큼 노력을 더 하던가. 남 탓 하면서 도망쳤으면 거기서 끝난 거야. 난 그래놓고 뒤끝 품는 사람이 제일 싫더라.”
한설 선배가 혀를 차면서 말을 쏟아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선배가 진짜 마음가짐 하나는 기가 막히네.’
스트레스 안 받고 오래 살 것 같은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내게도 필요한 방식이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으면 나만 피곤하니 말이다.
“누나.”
“왜.”
“이 그림 팔릴 것 같아요?”
“팔릴 수도 있고. 안 팔릴 수도 있고.”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질문이 조금 모호했다.
나는 질문의 내용을 바꿔 보기로 했다.
“누나라면 이 그림 살 것 같아요?”
“아니.”
이번에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확답이 나왔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가관이었다.
“왜요?”
“내가 그려도 이만큼은 그려.”
“······.”
역시 재능 있는 사람들은 다르구나.
“진짜로요?”
“그냥 디테일만 엄청나게 판 그림이잖아. 당장은 어렵겠지만, 시간 좀 들이다 보면 될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한다.
뭐 어쩌겠는가.
한설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갑시다.”
“응.”
미련 없이 자리에서 떠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가슴이 홀가분해졌다.
< 막장 드라마 뺨치는 전개 > 끝
ⓒ 이한이™
< 어떤 점이 궁금하신가요 >
본격적인 개장까지 몇 분 남지 않은 시점.
심하윤 대표는 우리를 한 자리에 모으고는 말했다.
“각자 역할 분담을 제대로 숙지했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확인할게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선, 손님 접대는 전부 제가 맡을 거예요. 작품 안내나 가격 협상도 포함해서 전부 제가 담당할 겁니다.”
“······.”
심하윤 대표가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사실상 대표님이 혼자서 다 하는 거 아니야?’
우리가 할 일은 대체 뭐지.
그냥 여기 앉아 있다가 짐 옮길 때 노동력을 보태는 정도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심하윤 대표가 내 머릿속을 읽었다는 듯 말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제가 혼자서 전부 다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정답이다.
딱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도 역할은 있어요. 작품을 판매하다 보면 가끔 돌발 상황이 발생하거든요.”
“돌발 상황이요?”
“손님들 중에는 간혹 이 작품을 제작한 작가와 직접 소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계시거든요.”
아.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았다.
‘윤가영을 만난 재서 같은 느낌이겠군.’
나는 그 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럴 때 제가 나서서 소통하면 되는 건가요?”
“네. 정확해요. 물론 구체적인 업무 이야기는 제가 맡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재하 씨나 한설 씨는 어디까지나 제작자로서의 생각을 말해 주시면 돼요.”
그렇게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또 들어서 물었다.
“그럼 여기에 안 오신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죠? 김연우 작가님이나 김봉식 작가님. 오사무엘 작가님이라던가요.”
“그분들은 괜찮아요. 작가님들은 작가님들의 작품 앞에서 대기해 주시면 돼요. 아니면 다른 부스를 구경하다가, 제가 연락을 할 때 와 주셔도 좋고요.”
좋다.
이제 대충 감 잡았다.
“그럼, 본격적인 전시를 시작하죠.”
심하윤 대표가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기를 잠시.
우리에게 눈치를 주듯 말했다.
“얼른 손 안 포개고 뭐 하세요? 저 혼자 민망하게.”
“아.”
나랑 한설 선배는 차례대로 그녀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잠시 뒤.
“매진을 위하여!”
“위하여!”
본격적인 장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참. 매진이 뭐야. 고상한 맛이라고는 일절 없네.’
예술인이라면 예술인답게 좀 더 거창하고 고급스러운 멘트가 있을 텐데.
하긴, 이게 더 마음에 든다.
나는 문득 심하윤 대표를 다시 한번 불러 보고는 말했다.
“대표님.”
“네?”
“저희 작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
그녀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맡겨만 주세요.”
그녀가 주먹을 들어 올리더니 꽉 쥐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바로 저거지.
강석기 그 인간이랑은 근본이 다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