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58)
두 번 사는 미대생 58화(58/93)
*
본격적으로 관객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하고 불과 한 시간.
메세 바젤은 이내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북적해졌다.
처음 심하윤 대표가 했던 말이 무색하게, 나는 자리에 앉아서 구경하기만 바빴다.
“우리 부스에는 손님들이 잘 안 오네요.”
“어쩔 수 없어요. 우선은 유명한 부스 먼저 들리는 거죠. 행사는 길고 작품은 적으니까 차차 기회가 돌아올 거예요.”
예전 서울게임쇼 때와도 같은 모양.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구경거리는 많았다.
‘되게 국적이 다양하네.’
기본적으로 백인들이 주류였지만, 황인 손님들도 꽤 흔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슬쩍 중얼거렸다.
“황인 손님들은······ 뭔가 명품을 많이 걸친 느낌이네요.”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그래요?”
“네.”
심하윤 대표가 옆에서 설명했다.
“재하 씨가 정확하게 보셨어요. 동양인은 대개 명품을 많이 걸치고 있죠. 그런 경우에는 중국계가 많아요. 신흥 부유층이 주류인데, 보통 일부 손님들이 작품을 휩쓸어가고는 하죠.”
조금 속된 말로 졸부라는 말이었다.
“저희도 그럴까요?”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요. 중국계 컬렉터들은 작가의 커리어를 많이 따지거든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기 때문인가요? 내가 어떤 작가의 작품을 가지고 있다 같은.”
“그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투자 가치를 본다고 할까요.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자산 관리를 추구하는 거죠. ”
그렇게 말을 들으려니 뭔가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뭔가 우리의 가치를 재게 된다고 할까.
“아.”
심하윤 대표도 자기가 어떤 말을 한 건지 깨달았는지, 당황해서는 중얼거렸다.
“작가님의 상품성이 낮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물론 저희는 작가님의 진짜 가치를 알지만, 아무래도 여기서는 작가로서의 경력을 따지다 보니.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걱정하지 마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나는 큭큭 웃었다.
최근에 느낀 점인데, 이 사람 되게 웃기다.
굳이 내 기분에 작은 기스라도 날까 봐 주의하는 점이 특히나.
그보다는 아까 하던 말을 마저 듣고 싶은 참이었다.
“그럼 말인데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황인들은 어떤 사람이 많은지 알겠는데, 반대로 백인 손님들은 어때요?”
“음. 이건 제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심하윤 대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백인 손님들은 대게 작품 그 자체를 보는 느낌이 있어요.”
“작품 그 자체요?”
어딘가 솔깃한 말이었다.
“네. 단순히 투자 목적 외에도 실제로 감상하는 목적으로 구매하는 비율이 높아요. 작가의 이름을 덜 따진다고 할까요.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재하 씨가 한 번 맞춰 보실래요?”
난데없이 질문이 날아왔다.
심하윤 대표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가까우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흐음.”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물었다.
“한 번 자세히 말해 주실래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나는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유럽에서도 중심부인 스위스고, 기본적으로 국경이 맞닿은 국가 중에 예술이 발전한 나라가 많아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전부 부유한 국가들이죠.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그래요.”
“그렇죠.”
“그런데 유럽 국가들은 EU 협정 덕분에 차만 몰아도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스위스에 바로 입국할 수 있어요. 사실상 앞마당이죠. 조금 먼 앞마당.”
“그게 영향을 끼쳤다는 말인가요?”
“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고객이 많다고 해야 할까. 그들에게 이 아트 페어는 일상의 연장선인 거죠. 한 번쯤 가려면 살짝 무리해서 가 볼만 한.”
“재밌는 추측이네요.”
심하윤 대표는 이 이야기가 즐거운 듯 잠시 음미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중국계 손님들은요?”
“그쪽은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네요.”
묘하게 캐묻는다.
하지만 나름 재밌는 화제였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말했다.
“황인 손님이라면, 그쪽에서는 굳이 스위스까지 찾아온 경우가 되겠네요.”
“굳이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아시아에서 예술품의 메카라고 하면 어디죠?”
“아무래도 홍콩이죠.”
“맞아요. 홍콩이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을 통해 구태여 재확인했다.
사실 확신이 어려워서 떠봤는데, 맞는 모양이다.
“아시아 사람들, 특히 중국인들이라면 같은 비용에 훨씬 가까운 데다가 언어도 통하는 홍콩이 있는데, 굳이 스위스까지 올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여기에 있는 황인 손님들은 왜 굳이 스위스까지 왔을까요?”
“이건 아까 대표님께서 말씀 주셨던 것처럼 제 추측인데.”
나는 본론을 말하기 전에 헛기침을 뱉어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보기 바쁘던 한설 선배도 이쪽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굳이 먼 스위스까지 와서 작품을 구매할 만큼 전문적인 손님들인 거죠.”
“······ 아.”
심하윤 대표가 그럴듯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는 말을 이었다.
“정리하면 백인 손님 중에는 예술을 일상으로 접하는 일반층이 많으니 전문 컬렉터의 비율이 낮고, 황인 손님 중에는 일반층이 드물어서 상대적으로 전문 컬렉터의 비율이 높아졌다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인종의 성향보다는, 지리적인 이유가 먹힌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제 부족한 지리학적 단서를 이용한 단순한 추측임을 밝힙니다.”
“아니에요.”
심하윤 대표는 이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다는 듯 작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이었어요.”
“실제로도 그런가요?”
“그건 모르겠네요. 그래도 충분히 일리는 있는 것 같아요. 재하 씨의 말이 맞다면 반대로 홍콩 예술품 시장에서는 백인 손님 중전문 컬렉터의 비율이 높을 테니까요.”
그녀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지리학적인 접근이 재밌네요. 역시 한예원생이라 그런가, 이런 걸 잘 아네요. 학교에서 배웠나 봐요.”
“찍었습니다.”
“에이. 저 놀리는 거죠?”
그 순간이었다.
“아니에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한설이 개입하더니 말했다.
“재하가 원래 빈약한 근거로 약 파는 거 잘해요.”
“······.”
좀 좋게 말해주면 뭐가 덧나나.
조금 시무룩해졌는데 한설 선배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농담이야. 그래도 이번에는 꽤 그럴 듯했어. 다시 봤다.”
“그럼 이따 국밥 사줘요.”
“어제 그 한인 식당?”
“좋죠.”
어제 그 가게, 한국보다 가격이 3배는 돼도 나름 먹을 만했다.
‘국밥리에인 내 입맛을 만족시킬 정도라니. 대단하군.’
아무튼, 이런 잡담을 하고 있다 보니 슬슬 우리 쪽 부스에도 몇몇 손님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시기가 됐구나.’
유명 부스를 거친 손님들이 드디어 이쪽으로 눈길을 돌린 모양.
그중 한 명이 오사무엘의 작품을 한참이나 흥미롭게 살펴보더니, 심하윤 대표에게 말했다.
“(작품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잠시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재하 씨.”
“네.”
“다른 손님들이 와서 말을 걸거든 재량껏 이야기는 들어 줘요. 작품 판매에 관한 이야기면 기다리라고 했다가 절 부르세요. 손님이 기다리기 힘든 것 같으면 연락처를 남기고 가라고 하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손님이 트러블을 일으키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나는 끊고 말했다.
“스태프를 부르는 거 맞죠? 손님 기다리시겠어요. 걱정 마시고 일 보세요.”
“알았어요. 그럼 믿을게요.”
“네.”
심하윤 대표는 그렇게 손님에게 가더니,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작품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어떤 점이 궁금하신가요?)”
“(이쪽 작품입니다. 어떤 작품인지 자세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싶네요.)”
“(안목이 좋으시네요. 본 작품은 한국의 젊은 아티스트 오사무엘의 작품으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소재의 접근이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색채감과 심미적인 구도를 중시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소재의 활용이 눈에 띕니다.)”
심하윤 대표가 말을 쏟아내는데, 마치 세련된 오피스 우먼을 보는 것만 같았다.
평소 우리에게 보이는 그 실없는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
‘역시 프로는 프로라니까.’
새삼 그 사실을 느끼면서 자리에 앉아 있는 찰나였다.
한 백인 손님이 내게 다가왔다.
“(저기, 작품에 대해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가 날 보더니 물었다.
“(저쪽에 있는 작품들의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가 부스의 한쪽 벽을 가리키는데, 그곳에 걸린 작품은 다름 아닌.
‘내 작품이네.’
내 작품이었다.
나는 조금 전 심하윤 대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떤 점이 궁금하신가요?)”
< 어떤 점이 궁금하신가요 > 끝
ⓒ 이한이™
< 연인이 손을 잡고 걸을 때 >
두근.
가슴이 두근거린다.
지금까지도 분야를 막론하고 내 작품을 남에게 직접 설명하고 팔아본 적이야 몇 번이고 있었지만, 지금은 기분이 자못 남달랐다.
이유라면 알 것도 같다.
‘그만큼 내가 이 작품에 큰 애정을 쏟았다는 거겠지.’
어떤 작품이든, 아픈 만큼 사랑을 주게 된다.
자.
어디 한번 해 보자.
나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어떤 점이 궁금하신가요?)”
“(이 작품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가 가리킨 작품은, 내가 그린 작품 중 가장 민망한 물건이었다.
[연인이 손을 잡고 걸을 때]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고 걸을 때, 두 사람의 몸에서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가를 나타낸 작품이었다.
완전히 오리지널은 아니고, 미래의 유머 글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필 이 작품이네.’
나는 이 작품의 정체를 말하기에 앞서 작은 수치심을 느꼈지만, 원래 이런 건 티를 내면 지는 법이다.
스탠딩 코미디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쇼를 진행하는 당사자가 어색해하면 관객들도 웃을 수 없다.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본 작품은 제가 올해 직접 구상한 작품으로서, 연인들의 화학작용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작품입니다.)”
“(아, 작가님이셨군요.)”
“(맞습니다. 이 작품은 제가 지난 시즌에 만든 연작 중 하나입니다.)”
“(연작이라면, 다른 작품들과 같은 콘셉트를 공유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이 모든 작품은 전부 하나의 기획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잠시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어요?)”
나는 손님을 데리고 가장 왼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내가 가장 첫 번째로 구상하고 제작한 작품.
[아틀란티스]가 걸려 있었다.‘작품 하나를 보러 온 손님이라도, 더 많은 작품을 경험시키라고 했지.’
얼마 전에 큐레이터 서적을 읽고 인상 깊게 봐 두었던 부분이었다.
나는 손님에게 [아틀란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본 작품의 경우,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해변 그림에 불과합니다만.)”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외선 조명(블랙 라이트)을 꺼내고는, 작품에 비추었다.
다짜고짜 중앙부터 비춘 건 아니다.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시작해서, 점차 심해로 빛의 영역을 넓혔다.
사소한 연출.
곧 작품의 진짜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시다시피, 이 작품의 바닷속은 바깥과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 오.)”
지독한 반전에 손님이 조금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훨씬 어둡군요. 마치 크툴루에 등장하는 심해 도시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크툴루는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무서운 괴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공포 이야기 정도로만 안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본 작품의 핵심은 바깥과 안의 대조에 있습니다.)”
나는 이미 한 번 비췄던 자외선 조명을 치우며 말했다.
“(이렇게 보면 아름답기 짝이 없는 바닷가입니다. 모두가 즐거워 보이고, 마치 하늘이 축복을 내린 것만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바닷속은 다른가요?)”
“(예.)”
나는 조명을 틀어 다시 바닷속을 비추며 말했다.
“(이 바닷속 세상은, 사실 비극의 온상입니다.)”
“(······!)”
“(현대 사회에서 그 어떤 아름다운 인공물이더라도, 그 뒤에는 자연의 파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요즘 기업들이 아무리 자연을 아낀다고 한들, 근본적으로 얼마나 덜 파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바닷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 밑으로는 수재민들의 희생을 당연하다는 듯 깔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그에게 말했다.
“(문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알 바가 아닙니다.)”
“(······ 놀랍군요.)”
손님은 일견 감탄한 듯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캔버스가 아닌 벽에 그린 이유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그 부분에도 작품의 기획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기다리던 바였다.
나는 벽을 천천히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이 벽은 과거 한 차례 재개발의 여파로 깊은 곳에 침수되었던 지역에서 찾아낸 벽입니다.)”
“(······ 직접 잠수하신 건가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나는 살짝 웃고는 말했다.
“(한국에서는 과거 산업 부흥기 시절,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당해야 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 벽이 있었던 마을도 그렇습니다. 물길을 터야 한다는 명목하에 원주민들을 내쫓았고, 보상으로 극히 작은 액수를 지급했죠. 그런데, 그러한 희생도 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어째서죠?)”
“(그 물길이 지금은 막혔기 때문입니다.)”
“(······.)”
“(인공적으로 만든 강이었던 만큼 한 번 물길이 막히자 서서히 썩어들었고, 가뭄이 시작되자 서서히 밑에 잠겼던 잔재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어온 게······.)”
“(이 벽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쯤이면 배경 설명은 충분히 했다.
이제부터는 작품의 값어치를 올려줄 이야기를 할 차례.
“(오랫동안 수몰되었던 만큼 지역 전체를 통틀어서 기물 손상이 극심했습니다만,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탐사한 끝에 쓸만한 벽을 단 하나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이 벽입니다. 매우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놀랍군요. 작품에 이만한 정성을 들이다니······ 알면 알수록 특별한 작품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곳에 있는 연작 중에서도 이 작품을 최고로 칩니다.)”
이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모든 손가락을 물어서 똑같이 아플 수 있겠는가.
그중에서 조금이라도 더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었다.
내게는 그게 이 작품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이 모든 작품이 연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측면에서 이 작품이 가진 콘셉트가 궁금합니다.)”
“(아, 그 부분을 아직 설명을 안 드렸군요.)”
나는 작품을 설명하다가 살짝 외길로 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연작의 콘셉트는, 반전입니다.)”
“(반전이요?)”
“(예. 겉보기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작품이, 이 빛을 비추면, 반전이 드러나는 겁니다.)”
나는 부스를 천천히 걸으며 내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염색 공장의 아픔을 나타냈습니다. 겉보기에는 마냥 즐거워 보이는 소녀들이지만, 빛을 비추면 염색약에 덕지덕지 오염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군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나는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 그럼 아까 작품처럼 이쪽 벽에도 어떤 사연이 있겠군요.)”
“(예. 실제로 사고에 노출된 공사 현장에서 벽을 채취해 왔습니다. 체르노빌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만, 그것보다는 훨씬 안전합니다.)”
“(놀랍군요. 디테일이 실로 엄청납니다.)”
손님은 계속해서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내가 미리 의도했던 바였다.
‘역시 작품의 보는 재미를 추구하는 게 좋다니까.’
현대 미술의 종류는 다양하다.
딱 보기에도 끝장나게 잘 그린 작품이 있는가 하면, 무슨 내용인지 해설을 듣지 않고서야 도저히 못 알아먹을 작품도 있다.
하지만 어느 극단으로 치우치면 대중의 눈에서 벗어나게 된다.
‘단순히 잘 그리기만 한 작품은 널리고 널렸고, 너무 못 알아먹을 작품은 사기로 치부 당하기 좋지.’
나는 그 중간 지점을 겨냥했다.
딱 보기에도 그럭저럭 괜찮되, 알고 보면 더 재밌는 작품.
그게 내가 노리는 효과였다.
그렇게 열 개가 넘는 작품을 소개한 뒤였다.
“(의도치 않게 이 작품 설명을 가장 마지막으로 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이 부스에서 나를 찾게 했던 작품.
[연인이 손을 잡고 걸을 때]를 가리키며 말했다.“(웃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 위에 자외선 조명을 비추었다.
그 순간이었다.
“(푸훕.)”
손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아, 조금 놀랐습니다. 예. 반전이군요. 제대로 된 반전이었습니다.)”
그는 차마 웃음을 견디기 힘든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남자가 그, 음, 네. 피가 쏠린 게 맞지요?)”
“(아마도. 음. 아마 그게 맞을 겁니다.)”
여기서는 나도 모르게 살짝 말을 더듬었다.
내가 말하고도 위험할 뻔했다.
손님은 그 반응이 또 웃겼는지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진정하고는 말했다.
“(후우. 너무 좋은 작품입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예?)”
좋은 작품이면 좋은 작품이지, 큰일이 날 거는 뭐래.
잠깐 의아한데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게 워낙 사랑스러운 작품이라 아는 신혼부부에게 선물할까 했습니다만. 아, 반전을 몰랐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
그렇구나.
남한테 주려고 했구나.
‘가만. 그럼 내가 내 무덤을 판 거 아니야?’
말만 들으면 사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내가 내 입으로 못 가게 막은 건가.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손님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쓱쓱 훔치더니 말했다.
“(이 작품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너무 재밌는 작품이네요.)”
“(네?)”
이건 또 무슨 말씀이래.
“(손님. 조금 전에는 다른 부부에게 선물할 목적이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이런 말을 던지는데, 그가 말했다.
“(예. 그랬는데, 그냥 제 여자친구에게 선물해야겠습니다.)”
“(······.)”
그렇구나.
그럴 수 있어.
나는 새삼스러운 배신감을 느끼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럼 구매를 안내해 드려야겠는데, 잠시만요. 담당자분이 다른 곳을 안내하고 계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곧 부스 내에 비치한 의자에 가서 다소곳하게 기다리는데, 조금 떨어져서 우리를 보고 있던 한설 선배가 내게 와서는 물었다.
“너 지금 약 팔았지.”
“······.”
좀 깬다.
나름대로 영업 열심히 뛰었다고 자랑스러워하던 참이었다.
이만하면 멋있게 보일 거라고 자신했는데.
살짝 아쉬워서 하소연을 하려는데 한설 선배가 말을 이었다.
“왜 말이 없어. 사실대로 말해. 대체 뭘 했길래 작품 보러 온 손님이랑 같이 웃고 그래?”
“······.”
에헤이.
차마 사실대로 말하기는 좀 그렇다.
작품에서 피가 쏠려서 그렇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물론 한설 선배는 저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알고 있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언급하기는 조금 그렇다.
나는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손님에게 물건을 파는 것. 그게 영업이니까요.”
“약 판 거 맞네.”
“······.”
조금 서러운데.
뭐라 더 궤변을 말하려는 찰나였다.
“(혹시 그쪽 분과는 어떤 사이인가요?)”
아까 그 손님이 우리를 보며 웃다가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쌍무적 계약 관계라고 보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내가 영어로 이 단어를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는데 손님이 말했다.
“(음. 이해했습니다. 부부 사이군요.)”
“(······.)”
그건 아닌데.
말문이 턱턱 막히네.
‘부부관계도 쌍무적 계약 관계일 것 같기는 한데. 설마 내가 돌려서 농담을 던진 걸로 받아들인 건가?’
굳이 해명하기도 또 어색한데 손님은 우릴 보며 웃고 있고, 옆에는 한설 선배가 도끼눈을 뜨고 날 보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하다.
‘개판이네.’
문득 한설 선배가 내게 물었다.
“이거 은근 따돌림당하는 기분이네. 너 나한테 영어 가르쳐.”
“······.”
가르쳐 달라도 아니고, 가르쳐는 뭔가.
갑자기 웬 명령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다.
“누나 저 그래도 영어 강사 하기에는 몸값 높은데.”
“나도 몸값 높아.”
“······.”
이 누나, 어렵다.
그렇게 이도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재하 씨. 오래 기다렸죠?”
심하윤 대표가 돌아왔다.
아.
살았다.
나는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한숨을 돌리고는 말했다.
“아까 그 손님이랑 이야기는 잘 나누셨어요?”
“음. 그게요.”
그녀는 살짝 아쉽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더 보고 오시겠데요. 아마 안 사실 것 같네요.”
“저런.”
“재하 씨는요? 그러고 보니까 아까 누구랑 이야기하시는 것 같던데. 저 분 맞죠?”
“그게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 작품 사가시겠대요.”
“······ 예?”
심하윤 대표의 표정이 볼만하게 변했다.
< 연인이 손을 잡고 걸을 때 > 끝
ⓒ 이한이™
< 자유의 몸이 되었다 >
첫 번째 손님이 다녀갔다.
그는 미리 말했던 대로 내 작품 한 점을 즉석에서 구매하였다.
찌익.
곧 그 작품 옆으로 빨간색 스티커가 붙었다.
“첫날부터 바로 팔릴 줄은 몰랐네요.”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심하윤 대표가 한 말이었다.
“왜요?”
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안 팔릴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심하윤 대표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그냥 팔리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줄 알았어요. 앞에서는 산다고 말하더라도 우선 견적만 들어둔 다음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다시 방문해서 사 가는 사람이 많거든요.”
“왜 그렇게 하죠?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채가면 아쉽지 않나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같은 작품이라도 나중에 사면 더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도 있거든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데, 심하윤 대표가 설명을 이었다.
“첫날에 가격을 알아봐 두고, 마지막 날에 들러서 할인가에 달라고 한다던가.”
아.
이해 됐다.
‘그런 방법도 있었네.’
하긴, 딱히 불법도 아니겠다 흥정 요령이라고 생각하면 나쁠 건 없었다.
판매자 측에서도 재고를 남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건 그렇고.”
심하윤 대표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 손님이요. 작가님의 작품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래요?”
“네. 작품을 보는 눈이 막 반짝반짝 빛나던데. 모르셨어요?”
“······ 그랬던 것도 같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내 작품에 큰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심하윤 대표는 어딘가 크게 기분이 좋은 듯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갤러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 그런 손님이 있어요. 이 작품에 꽂혀서 도저히 어찌할 줄을 모르는 거죠. 당장이라도 가져가고 싶은 거예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남이 먼저 채갈까 봐 무섭고. 아트 페어는 말로는 고상해도 시장 같은 곳이라 감정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불리한 법인데, 그럴 여유도 없는 거죠.”
그렇게 듣고 보니까 어떤지 뿌듯했다.
내 작품을 그렇게까지 아껴 주는 사람이 가져갔다는 거 아닌가.
기왕 같은 가격에 팔 거라면, 그래도 내 작품을 더 아껴 주는 사람에게 팔고 싶은 게 작가의 마음이었다.
“제 작품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가졌다니까 마음이 놓이네요.”
“그렇죠? 막 투자 목적으로 사가는 손님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이라고 이게 더 기분 좋잖아요.”
심하윤 대표가 보람 가득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손님이 지은 표정이 구매자의 웃음이라면, 지금 대표님의 표정은 판매자의 웃음 아닐까.’
이 사람이 어떤 맛에 갤러리 일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문득 한 가지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그 작품이요.”
“네.”
“손님이랑 둘이서 따로 어디 가서 복잡하게 이야기를 나누던데, 결국 얼마에 팔린 거예요?”
그렇다.
나는 아직 가격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게 말인데요.”
심하윤 대표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 사백만 원이요?”
내 그림값이 그렇게 비쌌나.
“왜요?”
“아뇨.”
나는 떨떠름한 기분에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가격이 좀 세다 싶어서요.”
사백이라.
솔직히 말해서, 백만 원만 받아도 이득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왜냐.
내 예전 작품들이 오십만 원 정도 했으니까.
백만 원이면 두 배나 뛴 셈이니까, 이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백이라니.
이렇게 널뛰기해도 되나 싶은데, 심하윤 대표가 말했다.
“작품의 크기가 있잖아요. 또 소재도 그렇고, 특별함도 있고요. 대체 불가능하다는 점은 생각보다 정말 큰 무기에요.”
그러고 보니까 내 작품이 독특한 편이기는 했다.
“들인 시간도 꽤 되죠?”
“그건 그런데······ 그걸 생각해도 가격이 조금 나간다 싶어서요. 얼떨떨하네요.”
“쉽게 생각하세요. 그 손님은 사백이라는 가격이 적당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바로 사 가신 거예요. 아마 만족하실걸요. 굳이 저 가격이었던 이유를 더 찾자면, 아. 그렇네요.”
심하윤 대표가 살짝 손뼉을 치더니 말했다.
“작가님의 작품은 이미 홍콩에서 비싸게 팔렸던 전례가 있잖아요.”
“아.”
“그것도 말했거든요. 아마 작가님의 작품을 흔쾌히 가져간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거예요.”
심하윤 대표는 이렇게까지 말해놓고도 부족한지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여기 참가비만 생각해도 솔직히 그렇게 저렴한 가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유통비에 왕복 비행기에 부스 운영비에. 다 계산하면 사백도 저렴하게 먹힌 셈이죠.”
그렇게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 가격 측정하는 과정이 참 복잡하네.’
내게는 아직 감이 딱 오지 않는 일이다.
다만, 앞으로는 이런 행운이 다시 오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시작에 불과했다.
*
‘뭐지? 왜 이렇게 빨리 팔리지?’
행사를 시작하고 불과 여섯 시간.
내 작품 중 무려 다섯 점이 팔려 나갔다.
가져온 게 열다섯 점인데, 그중 무려 삼 분의 일이 하루 만에 팔린 셈.
앞으로 행사가 며칠이고 남았다는 점을 고려하거든 실로 파격적인 속도였다.
‘이게 스위스 아트 페어.’
역시 돈 많은 사람 많고, 또 작품 좋아하는 사람 많구나.
두렵기까지 하다.
이 밀폐된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한 번에 움직이고 있는 걸까.
그걸 체감하고 나니, 마치 자본주의 괴물의 뱃속에 들어온 기분마저 들었다.
한편, 한설의 작품이 더 충격이었다.
“이제 좀 홀가분하다.”
한설이 신나서 웃는데, 그녀의 작품.
개미굴은 무려 천만이라는 가격에 팔려 나갔다.
“손님이 통이 크네요.”
나도 살짝 놀랐는데, 한설 선배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 말했다.
“생각보다 싸게 팔린 거야.”
“그래요?”
“음, 내가 저 작품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랑 재료비를 따져 보면, 실질적으로 내가 본 이득은 잘 쳐 줘야 중소기업 초봉 정도일걸.”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한설 선배가 저 작품 하나 붙잡고 씨름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
“그렇게 보면 작품 가격이라는 게 은근 냉정하네요.”
“다 그래. 막상 안 팔렸으면 그냥 시간 날린 거였는데, 팔려도 작가한테는 별거 안 돌아와.”
“그럼 작가 몸값은 어떻게 높여요?”
“기다려야지. 내 작품이 어디 먼 경매장에서 엄청 높은 가격에 입찰 됐다는 소식이 들릴 때까지.”
거기서부터 시작인 모양.
문득 내 작품이 홍콩에서 좋은 가격에 팔린 게, 내게 어마어마한 명함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 부스에서 가장 놀라웠던 일이라면 역시 오사무엘의 작품이었다.
“설마 세 작품을 한 명이 다 사갈 줄이야.”
“로또 맞았네요.”
심하윤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오사무엘의 껌-아트 연작은 한 중국인이 한 번에 휩쓸어갔다.
“중국인은 주로 가치가 보증된 작품만 구매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박이라는 점을 참작하더라도 저 작품에서 그만한 값어치가 보였나 봐요.”
하긴, 워낙 독특하기는 했다.
누가 껌으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겠는가.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잘 없지.
‘귀찮아서라도 안 하겠다.’
어느 세월에 껌을 씹어서 작품 하나 만들겠는가.
아마 이 전시장 내에서도 의외성이라면 독보적인 수준 아닐까.
오사무엘의 턱 근육도 독보적일 것 같다.
‘이거 알려주면 신나서 콧대가 하늘 위까지 올라가겠네.’
지금도 남들이 자기 작품의 숨겨진 가치를 안 알아준다고 난리인데, 한 번에 팔린 걸 알거든 뭐라고 할까.
응.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행사 5일 중 불과 3일이 지났을 무렵.
우리는 설마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
“······ 매진 됐네요.”
“······.”
다 팔렸다.
단 하나의 작품도 남김없이, 전부 팔려 나갔다.
백동우 선배의 작품도, 김연우 선배의 작품도, 김봉식 아저씨의 작품도, 정상희 교수님의 작품도.
그리고 나와 한설 선배의 작품도.
도합 오십 점을 넘기는 작품이 전부 팔렸다.
‘이게 말이 되나?’
충격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
설마.
설마 했기로서니, 사흘에 매진이 날 줄이야.
이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
처음에는 좀 팔리는 것 같다 싶었는데, 나중에는 갈수록 심상치 않았다.
혹시나 해서 다른 부스를 둘러봤더니, 아직 절반도 채 안 팔린 곳이 다수였다.
그렇다.
우리 부스만 이런 것이었다.
“후후. 흐름을 탄 것 같네요. 딱지가 붙으니까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은 거죠.”
덕분에 심하윤 대표는 행복을 못 이겨서 죽으려는 것만 같았다.
“원래 이렇게 잘 팔리나요?”
“말했잖아요. 흐름이에요. 앞으로는 우리 갤러리 찾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지겠네요. 그냥 다음 아트 페어에도 참가해 버릴까 몰라. 지금부터 준비하는 건 어떨까요?”
“······ 그건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나도 모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이 사람, 신나서 또 일을 벌였다가 내년에는 큰 손해를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행복해 보이니까 됐다.
‘이번 아트 페어는 성황리에 끝났네.’
여기서 내 역할은 끝.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하나 싶은 찰나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심하윤 대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둘이서 그동안 부스 지키느라 고생 많았죠? 멀리까지 와서 놀고 싶었을 텐데 지루했을 거예요.”
“딱히······.”
“겸손할 필요 없어요. 이럴 때 놀아야죠. 또 언제 놀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둘이서 구경이라도 하다 오세요.”
“그래도.”
“같은 말에 세 번이나 거절하는 건 상대방을 무시하는 거래요.”
“······.”
그녀가 우리의 등을 떠밀 듯 말했다.
거의 억지로 보내려는 눈치.
안 그래도 슬슬 엉덩이가 아프던 참에 잘 반갑기는 했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도 있었다.
“대표님은요?”
“저는 여기서 계속 있어야죠.”
“다 팔렸는데도요?”
“그래서 더 그래요.”
심하윤 대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작품이 서류상으로는 팔렸다지만, 행사가 끝날 때까지는 여기에 계속 걸려 있을 예정이기도 하고. 이거 보고 문의할 사람들이 계속 있을 거예요. 작가님들 다음 작품을 선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아 그렇구나.
지금까지는 판매 진열대로서의 목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홍보용으로 남는다는 말이었다.
심하윤 대표도 홍보대사로 남고.
‘새삼 고맙네.’
사실, 내 눈에 뻔히 보이는 게 있었다.
‘대표님도 구경 다니고 싶으실 텐데.’
그렇다.
작품을 너무 좋아해서 갤러리 대표까지 하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여기는 세계 예술의 격전지.
어떻게 보면 나보다도 훨씬 큰 기대를 품고 왔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걸 알다 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내 작품을 열심히 팔아주기도 했고.’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네?”
“저랑 설이 누나랑 잠깐 둘러보고 오기는 할 건데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한 시간만 바짝 보고 올 테니까, 그다음부터는 대표님이 다녀오세요.”
그 말에 심하윤 대표가 살짝 의아해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전 여기를 봐야죠.”
“아, 그런 말은 하지 마요. 그냥 그렇게 해요. 아니면 저 화낼 겁니다.”
“그래도.”
나는 웃으며 말했다.
“같은 말에 세 번이나 거절하는 건 상대방을 무시하는 거래요.”
“······.”
그녀가 입을 닫았다.
자기 말을 되돌려 받았으니 반박하지 못하는 눈치.
“그럼 다녀올게요.”
나는 대충 여기까지만 말한 뒤, 도망치듯 부스를 빠져나왔다.
한설 선배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했어.”
“······.”
이 선배가 남 칭찬하는 거 오래간만에 보는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칭찬을 다 하네요.”
“뭐래. 나도 칭찬할 때는 해.”
그냥 그러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