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67)
두 번 사는 미대생 67화(67/93)
*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LA에 있는 어느 코리아타운.
그곳에는 한국인 계열 이민자들이 몰려서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문화라고 하면, 주로 본국의 문화였다.
몸이 떠났다고 마음마저 떠났겠는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에서 나왔을지언정, 그들은 한국에서 수입된 문화를 즐기면서 여가를 보내고는 했다.
“아저씨. 요즘 어떤 드라마가 재밌대요?”
“이게 최고지.”
드라마가 그중 하나였다.
한국의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볼 수 없는 그들을 위해, 한인 마트 내부에 입점한 DVD 전문 가게에서 드라마 녹화본을 빌려주고는 했다.
물론 불법 녹화본이었다.
“요즘은 사극이 인기네.”
“보다 보면 재밌더라.”
아예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드라마를 돌려 보면서 상영회를 가지고는 했는데, 인근 대학에 다니는 김시영도 그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이상했다.
“그게 뭐야?”
텀블러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겉에는 그럴듯한 일러스트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또 처음 보는 브랜드가 붙어 있었다.
김시영은 그걸 둘러보다가 말했다.
“헤븐즈 도어? 이게 뭔데? 한국에서 파는 브랜든가?”
“그런 것 같아.”
“여기도 좋은 브랜드는 많은데.”
“지금 이거 한국에서는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힘들다던데?”
“고작 이런 텀블러 하나가?”
“아빠가 보내줬어.”
“어쩐지 고급스럽더라.
“검색해 보니까 매진 났다더라.”
“흐음. 신기하네.”
한국에서 이런 문화가 있었던가.
물론 미국에서는 이미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당장 스타벅스가 시즌마다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도 각 주(州)마다 신상품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것들을 모조리 수집하는 컬렉터들도 심심찮게 보일 지경.
‘보다 보니까 예쁘네. 나도 부모님한테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김시영은 그 텀블러를 눈에 익혀 두었다.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한인촌을 중심으로 헤븐즈 도어 콜라보 상품이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시점에는 컬렉터들의 눈에도 들어갔다.
“토마스 킨케이드가 이런 콜라보 상품을 내놓았다고?”
앞서 설명했다시피, 토마스 킨케이드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하나였다.
그의 상품은 그가 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것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컬렉터들도 당연히 있었다.
콜라보레이션 한정판은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크게 뛸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레고와 스타워즈의 콜라보레이션 상품이 그러했다.
10만 원에 불과했던 장난감이,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300만 원에 가까운 가격까지 올라가는 일이 잦았다.
토마스 킨케이드도 유사했다.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
‘이런 제품이 나온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이 상품의 출처가 오묘했다.
“헤븐즈 도어라. 이런 제조사가 있었던가?”
“처음 들어보는데.”
어리둥절하다.
토마스 킨케이드와 콜라보를 진행할 정도라면 그래도 이름이 있는 회사일 텐데, 들어본 이야기가 일절 없다.
‘본인한테 동의를 안 받고 일방적으로 콜라보를 진행한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콜라보라는 게 꼭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좋게 말하면 일방적 콜라보, 다른 말로 하면 짝퉁이다.
또 이상한 점이 있었다.
토마스 킨케이드가 만든 상품이 있는가 하면, JH Lee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한정판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이었다.
‘JH Lee? 그게 누구지?’
상품의 출처에 한층 더 안개가 끼었다.
혹시나 해 검색해 봤더니 나오는 이름도 별거 없었다.
그냥저냥 기사 하나만 나왔다.
홍콩에서 적당히 비싼 가격으로 작품 하나를 팔았다는 기사가.
“······ 아, 모르겠군.”
결국, 그는 혼자 고민하는 대신 협력사에 문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서만 내놓은 한정판이라고요?”
토마스 킨케이드가 한국에서 한정판을 왜 내놓는가.
이상한 일이다.
한국으로 치면 원빈이 짐바브웨에 가서 패션 화보를 찍었다는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어쨌든 짝퉁은 아니라는 거지?’
그럼 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미리 쟁여서 한 몫 당겨 보자.’
되팔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나는 요즘 생각이 없다.
그냥 생각이 없다.
생각하기가 피곤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현실감이 사라졌다.
“이게 누구십니까. 한국 예술계의 미래 이재하 작가님 아니십니까.”
“조용히 해라, 박규태.”
“넵.”
그저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이 생각보다 높지는 않았네.’
그렇다.
나는 천장 코앞까지 확 떠버렸다.
헤븐즈 도어 콜라보 상품들은 매진행렬이 이어지다 못해, 한정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발주량을 몇 배로 늘렸다.
전시는 개최되고 벌써 2주일 가까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시장에는 여전히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다.
내 이름으로 올라오는 기사를 찾기도 이제 지겨워졌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한설 선배가 잡지를 읽던 중 말했다.
“야, 너 기사 또 나왔다.”
“진짜요? 보여주세요.”
지겹다고 했지, 보기 싫다고는 안 했다.
짜릿해.
늘 새로워.
관심이 최고야.
‘가만 보자.’
한설 선배에게 받은 기사를 확인하자 잡지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젊은 천재가 이뤄낸 쾌거] [한국 예술 문화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다] [세계로 나아가는 포문을 열다]이야.
그렇게 잘난 사람이 있었구나.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잘난 사람이 있었구나.
대단하네.
그런데 저게 내 이야기다.
‘내가 언제 천재가 됐지.’
어리둥절하다.
한예원에 잘나디잘난 천재들에게 축구장 자갈처럼 치이던 게 불과 어제만 같은데, 이제는 내가 천재란다.
그것도 한국 예술계의 희망이란다.
‘어처구니가 없네.’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기사 내용은 확인해 봤다.
딱히 기분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내 이름이니까 신기해서 읽는 거다.
그렇게 천천히 훑어내리기를 잠시.
곧 이상한 문항 하나를 읽었다.
“······.”
“왜 그래?”
우두커니 굳어 있는데 한설 선배가 내 어깨를 콕콕 찔렀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누나.”
“왜.”
“저······.”
잠시 뒤.
그녀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제가 미국에 진출했다는데요?”
“······.”
한설 선배가 얼음처럼 굳더니 말했다.
“언제?”
“몰라요.”
“······ 너 나 몰래 뭐 했지?”
“아뇨.”
“사실대로 말해.”
“누나는 저 뭐 하고 사는지 다 알잖아요. 맨날 학교 아니면 작업실 아니면 사무실에밖에 없었는데 제가 뭘 해요.”
“네 말은 신뢰할 수 없어. 너 옛날에도 글로브 170에서 전시한 거 나한테는 안 알려줬잖아.”
“······.”
치사하게 옛날 일을 꺼내서 들먹이네.
나는 항변하는 대신 하소연했다.
“히잉입니다.”
“죽는다.”
“넵.”
아무튼, 나야말로 이 기사의 신뢰성이 의심되는 참이었다.
조금 더 꼼꼼히 읽어 봤다.
[미국 LA에서도 그의 제품이 유통되고 있다고 알려졌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였다.] [인터넷 거래 사이트에서 국내 가격 10배에 팔려]대충 보아하니 내 콜라보 상품이 미국으로 나도 모르게 수출됐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국내 판매가 대비 10배나 되는 가격으로.
한국도 아닌 외국에서 그렇게까지 인기를 끄는 게 말이나 되는가.
“누나도 한 번 보세요.”
“음.”
한설 선배는 이 기사를 천천히 읽다가 말했다.
“이거 그냥 과장한 거 아니야?”
“그럴까요?”
“응. 많잖아. 현지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막 정복했다고 하는 그런 거. 길거리에서 공연 한 번 하면 월드투어 돌고 온 거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긴.
이런 매체에서 사소한 일을 부풀려서 한 철 가십거리로 써먹는 게 한두 번인가.
그렇게 적당히 생각하고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재하야, 메일 왔다.”
규태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메일? 무슨 메일.”
“네가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메일이 날아와서 읽어 봤는데.
그 출처가 좀 신비로웠다.
[야누스 코리아]익히 들어 본 브랜드였다.
야누스.
세계 최고의 스포츠웨어 브랜드였다.
< 해외 진출 > 끝
ⓒ 이한이
< 한 번 빨아먹기 좋은 코인 >
“이거 내가 아는 그 야누스 맞지?”
규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맞는 것 같은데.”
“와······ 살다 살다 야누스한테 다 메일을 받아 보네.”
단순히 기쁜 걸 넘어, 뭔가 좀 심하게 감동까지 받은 눈치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 세상에 패션 브랜드는 많고도 많다.
그중에서 스포츠웨어라는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게 야누스였다.
압도적인 세계 1위.
이뿐만이 아니다.
야누스라는 기업은, 패션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꿈의 기업이기도 했다.
보통 일반인들은 유럽의 명품 브랜드를 높게 치지만, 실제 취업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명성을 취할 것인가, 실리를 취할 것인가.’
명성이라면 고급 패션 브랜드가 물론 낫다.
하지만 빡빡한 사풍과 업무 난이도, 오랫동안 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진입장벽이 상당했다.
야누스는 완전히 반대였다.
‘워라밸(walk-life-balance)을 챙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의류 기업.’
패션에 관심이 있고 취업도 꿈꾸는 학부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에 그리는 게 야누스였다.
지금, 그 야누스가 우리에게 메일을 보냈다.
말이 시각디자인과지, 어지간한 패션디자인과 학부생보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규태라면 기뻐할 수밖에.
“혹시 콜라보 때문에 보낸 건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당장 짚이는 거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헤븐즈 도어에서 발매한 상품이 벌써 보름 가까이 매진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 미래의 허니버터칩 열풍과 같은 상황.
카페보다 콜라보에 훨씬 적극적인 의류 브랜드에서 간과할 리가.
“얼른 확인하자. 후, 숨 떨린다.”
“그래.”
나는 한 번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런데 그 내용물은 내가 예상했던 범주를 한참 떠나 있었다.
“······.”
“······.”
우리 둘 다 가만히 굳어져 있는데 한설 선배가 물어봤다.
“왜 그래?”
“그게요.”
나는 가까스로 충격에서 깨어나 입을 열었다.
“야누스 미국 본사에서 콜라보 제안이 들어왔어요.”
*
그것 아는가.
디자이너들을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림으로 푼다.
그런데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디자이너의 일이 무엇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 쌓인 걸 그림으로 푼다니.
이건 무한동력과도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다 흔히 하는 일이기도 하지.’
전생의 나도 주말만 되면 노트북 한 대와 연필, 드로잉북만 들고 전국 각지의 카페를 탐방하기를 즐겼는데, 이번 생에는 거의 헤븐즈 도어만 이용하고 있다.
내 가게라는 인식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카페의 수준 자체가 타 프랜차이즈와는 비교가 안 되기 때문.
‘여기도 인테리어가 좋네.’
종로에 있는 헤븐즈 도어 13호점.
이 매장은 타 헤븐즈 도어와 한가지 차별점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비즈니스 특화 매장이라는 점이 그러했다.
실내에 별도의 세미나실이 여덟 개나 갖춰져 있는데, 예약만 하면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덕분에 인근 비즈니스맨들의 수요를 쪼옥 빨아들이고 있는 중.
‘오경진 회장님이 역시 장사를 잘하신다니까.’
그렇다.
내가 권유했다.
스터디룸 사업 모델도 빨아들일 생각.
‘하나하나 성장시키는 맛이 있네.’
이대로만 쭉 간다면, 미래의 헤븐즈 도어는 최종적으로 카페와 갤러리, 스터디룸, 스터디카페까지 전부 통합시킨 브랜드로 성장하지 않을까.
예전이었으면 그냥 희망 사항이었을 텐데 이제는 슬슬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 두려웠다.
“2시 30분으로 예약한 이재하 고객님 맞으실까요?”
“네.”
그렇게 예약한 세미나실에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5번 세미나실 4시까지 이용 가능하시고요. 그리고 저······.”
직원이 잠시 나를 보고는 뭔가 결심한 듯 은밀하게 물었다.
“혹시 그, 작가님 맞으신가요?”
“네.”
“······!”
그 순간 직원은 환한 표정을 짓더니, 극히 조용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작가님. 죄송하지만 혹시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음. 이따가 나갈 때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의 얼굴이 방긋방긋 펴졌다.
내 사인 하나가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사람을 웃게 만들까.
썩 오묘한 기분이었다.
‘와, 이제 슬슬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네.’
원래부터 대외적으로 이런 일을 하긴 했지만, 얼굴은 비교적으로 덜 팔렸다.
그랬던 게 이번 일이 쐬기가 되어 한 방에 터졌다.
[천재 디자이너 겸 사업가. 이재하에 대해 분석한다.] [두 기업의 사장이자 학부생이자 작가인 그 남자]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이상한 제목의 특집 기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기쁘면서도 좀 떨떠름하다.
좀 과장이 심할뿐더러 내 얼굴이 노출되는 게 그렇다.
‘관심받는 건 좋지만 얼굴 팔리는 건 좀 그런데.’
그나마 아까 직원은 헤븐즈 도어의 직원인 데다가 내 이름까지 들었으니까 혹시 했던 거겠지.
하지만 미래에는 어떨까.
‘두렵다.’
나는 고개를 저어서 불안감을 떨쳐냈다.
그렇게 세미나실로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확 늘었네.’
사람이 좀 많이 늘었다.
예전에는 어디까지나 좀 잘나가는 프랜차이즈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대놓고 사람으로 붐볐다.
‘돈 많이 벌겠다.’
일반적인 커피 프랜차이즈와 스타벅스의 점포당 평균 수익이 몇 배씩 차이 난다고 했던가.
내가 조심스럽게 생각건대, 지금의 헤븐즈 도어라면 그에 전혀 밀리지 않을 것 같다.
“이거구나.”
“확실히 그림이 예쁘다.”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매장을 이용하며 예술 작품들에도 눈길을 주었다.
지금은 전시 기간이니 나와 토마스 킨케이드의 콜라보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지만, 매장에는 여전히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 있는 상황.
손님들은 그 작품들을 보며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림이 화사하다.”
“우리 집에도 이런 거 하나 가져다 두고 싶네.”
그들이 즐겁게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문화에 어떤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글거려서 소름이 돋았다.
‘나 주제에 무슨. 어림도 없다. 암.’
이런 잡생각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언제쯤 올라나.’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기를 한참이었다.
습관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살피며 크로키를 연습하고 있는데, 어느 양복 입은 사람 한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감이 왔다.
저 사람 같다.
“아.”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말했다.
“안녕하세요. 야누스 코리아의 진석진이라고 합니다.”
“JH 디자인의 이재하입니다. 반갑습니다.”
“잠깐 마실 것 좀 시키고 오겠습니다.”
그는 커피 한 잔을 시키더니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작가님, 이번 전시 잘 봤습니다. 반응도 굉장히 좋던데 축하드립니다.”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요즘 이런 축하 인사를 들을 일이 수십 번은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지간한 축하 인사에는 슬슬 익숙해진 상황.
한층 성장했다는 기분을 느끼며 있으려니, 진석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바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네.”
“이번에 야누스 본사에서 저희 야누스 코리아 한국 지사를 통해 작가님을 포함한 JH 디자인에게 콜라보 작업을 제안했습니다.”
그렇다.
나는 야누스와 공식적으로 콜라보를 진행하기에 앞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왔다.
진석진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국내에서도 작가님의 작품이 사랑받고 있습니다만, 해외에서도 반응이 좋은 점. 혹시 알고 계시나요?”
“음.”
나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기사에서 보기는 봤습니다만, 솔직히 믿기지는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거든, 딱히 현실적으로 느껴질 구석은 없었다.
내 작품이 국내에서 선풍적인 이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이다.
여기에 미국에서 잘나가고 있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의래 있는 언론의 과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야누스에서 연락을 준 걸 보니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나 봅니다.”
“네. 사실 저희도 깜짝 놀랐는데요. 아마 본사에서 작가님에게서 한 가지 가능성을 느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능성이요?”
“예.”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보통 콜라보라고 하면 이미 브랜드가 형성된 인물 혹은 기업과 진행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홍보 효과를 누리며 서로 상승효과를 유도하는 셈이니까요. 그렇죠?”
“네.”
“하지만 야누스는 조금 다릅니다. 여타 기업들과는 상당히 다른 콜라보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신진 기업 혹은 작가와 함께 브랜드를 키워나가는 겁니다.”
그가 밝게 웃더니 말했다.
“야누스에서 강조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신선하고, 밝고, 활동적인. 그야말로 스포츠웨어다운 이미지입니다.”
“그렇지요.”
“이런 브랜드 마케팅에서 이미 이미지가 형성된 스타는 그렇게 효과가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스폰서로서 스포츠 스타를 기용하더라도 신인 위주로 기용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도 같은 경우인가요?”
“예. 작가님 같은 경우에는 현재 대체 불가능한 신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선함이라.
내가 그렇게까지 뭐가 있는 인간인가.
잘 모르겠다.
이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예전에 한설 선배가 했던 말이 있다.
작품을 내놓는 건 작가 맘이고, 그걸 사가는 건 소비자 맘이라고.
그럼 됐다.
‘의심을 가질 필요가 있나.’
야누스에서 나를 선택했다면 그만한 분석과 판단을 거친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진석진이 말을 이었다.
“작가님께서는 현재 토마스 킨케이드와 함께 전시를 성공적으로 유치했다는 커리어를 가지고 있으며, 미국 LA 현지에서도 충분히 먹힐 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지라면.”
“입소문입니다.”
진석진이 웃고는 말했다.
“저희는 작가님께서 입소문을 타고 미국에 진출했다. 이런 마케팅을 하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어쩐지. 내 명성이 이런 브랜드에서 콜라보를 시도할 만한 수준인가 싶긴 했어.’
반대였다.
오히려 명성이 없기에 가능한 마케팅을 주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오디션에 등장한 아역 배우가 있다.
기존 성인 배우들에 못지않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으로 전 국민의 관심을 받더니, 끝내 국민 남동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아역 배우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정말로 실력이 뛰어난 걸까.
‘그럴 리가.’
아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연기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뛰어난 것이었다.
애당초 정말로 연기력이 뛰어난 거였다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잘나가야지.
그런 배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거의 다 반짝이지.’
나도 남들이 보기에는 같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동양의 국가에서 온 신인. 신인이지만 세계 유수의 화가가 주목하고 있다. 말 그대로 한 번 빨아먹기 좋은 코인이지.’
주식도 그러하지 않은가.
상장한 직후가 가장 몸값이 높다.
어디까지 주가가 치솟을지 모르기 때문.
그러다가 한 번 정점을 찍으면, 급격하게 하락세를 그린 뒤 서서히 진짜 가치에 맞는 주가로 향해가고는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시기이기에 가능한 마케팅이군.’
천재 마케팅이라고 할까.
야누스가 내게 바라는 것도 그런 일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않겠지.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려 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겠지.
“야누스는 신진 작가님과 콜라보를 진행하고, 함께 상생하는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밀어붙이려고 합니다.”
정확했다.
대충 이만하면 이야기는 나눌 만큼 나누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될까요?”
“그게 말입니다만.”
진석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혹시 미국 본사에 방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미국 본사에요?”
“네, 가능하면 조금 길게 머물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혹시 길게라면 어느 정도.”
“한 달 이상입니다.”
어.
이건 좀 그런데.
< 한 번 빨아먹기 좋은 코인 > 끝
ⓒ 이한이™
<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
“미국 본사요?”
살짝 당황한 마음에 물어보는데, 진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예. 이번 마케팅은 조금 더 대대적인 규모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대대적인 규모라면 어떤.”
“제품 설계와 작품 활동을 포함한 홍보 과정 일체를 함께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작가님께서 미국으로 오셔서 저희 측 전문가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협업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상당한 장기 프로젝트가 될 겁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본사에서 지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네.”
그가 내게 몇 장의 서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이거 한두 달에 끝날 내용이 아닌데?’
좀 많았다.
‘제품 디자인부터 패키지, 그리고 홍보용 작품 몇 개까지. 참 골고루도 담았네.’
적어도 몇 달 단위 프로젝트다.
내용 자체는 솔깃하다.
무엇을 하겠다는 지도 알 것 같다.
미국으로 불러와서 함께 일을 배우며 설계를 익히고, 함께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감독하며 마케팅용으로 이용하겠다.
이 말이겠지.
‘거의 스타 마케팅을 보는 것 같네.’
아니다.
아마 스타 마케팅이 맞겠지.
솔깃하다.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꼭 미국에 방문해야만 하나요?”
굳이 외국으로 가야 하냐는 말이었다.
난 지금도 한국에서 내 할 일을 잘만 하고 있지 않은가.
또 내 식구들도 여기에 다 있다.
해외 진출이 솔깃하다고는 하나, 국내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할 일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해외 진출이 단순히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고.’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기업들 사이에 퍼진 병이 하나 있다.
미국병.
어떻게든 미국으로만 나가면 잘 풀릴 것으로 생각하는 병이었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었다.
중국, 일본.
온갖 시장을 노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했던가.
망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차라리 성공하는 기업들을 보면 특별히 해외 시장에 공을 들였다기보다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팬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출되면서 그쪽으로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지.’
게임이 그러했다.
화장품이 그러했다.
음악이 그러했다.
‘전자제품이라면 또 몰라. 기술력으로 승부를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문화 예술이야.’
지금 당장은 환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내 작품이 해외에서 팔리고 있다는 환상.
그거 하나만 믿고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또 콜라보라는 거 자체가 중간에 터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그럼 난 뭐가 되나.
낙동강 오리알이다.
불확실한 프로젝트 하나 하겠다고 외국에 장기간 나가 있느니, 국내에 집중하는 게 낫다.
이게 내 생각이었다.
“죄송하지만 해외로 꼭 나가야 한다면,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진석진은 설마 내가 시큰둥한 표정을 보이는 데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작가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한국에서 작업하기는 어려울까요?”
“······ 본사에서는 꼭 작가님을 모셔오기를 바라서.”
“그렇다면 제 의견을 한 번 전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음.”
진석진은 한참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잘 안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후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거절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설령 일이 잘못 풀리더라도, 전 최대한 작가님의 편의를 봐 드리고 싶었다는 점을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 일인데요.”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합의를 거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아참. 작가님.”
“네?”
또 무슨 일이 남아 있는가 싶어서 돌아본 순간이었다.
그가 다소 부끄러운 눈치로 말했다.
“사인 한 장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인이요?”
“네. 저희 안사람이 작가님을 굉장히 좋아해서······.”
“······.”
내 몸값이 적당히 오르긴 했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두 장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진석진에게 사인 두 장을 해 준 뒤, 내친김에 아까 그 가게 직원에게 해 줄 사인도 그리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야누스와의 미팅은 끝났다.
*
“저 왔어요.”
사무실로 복귀해 식구들에게 오늘의 미팅 결과는 전했을 때, 식구들은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치였다.
“있는 기회를 내다 버렸다고?”
“버리다뇨. 선택하지 않은 거라고 해 주십시오.”
“그게 그거지.”
한설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래서 왜 거절했어? 네가 이유 없이 거절한 건 아닐 테고, 뭔가 생각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게 말이죠.”
나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좀 오랫동안 미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응.”
“거기에는 국밥 안 팔 것 같아서요.”
“······.”
한설 선배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진짜로?”
“아뇨. 당연히 농담이죠.”
“아 진짜. 네가 말하면 안 농담 같아.”
나는 큭큭 웃고는 말했다.
“좀 생각을 해 봤는데요. 한국에서 더 좋은 기회가 얼마든지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더 큰 시장에서 시작하는 거 좋다.
하지만, 한국이 그렇게 작은 시장은 아니다.
여기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진 뒤로 돌려도 상관없다.
왜.
아이돌 시장도 그러지 않았나.
미국에 진출하겠다고 기회를 찾던 사람들은 다 망했고, 성공할 사람들은 알아서 성공했다.
가서 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국내에 집중하고 싶다는 게 내 생각.
“사장님이 그러신다면 따라야지.”
의외로 지훈 선배는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형은 아쉽지 않아요?”
“뭐 우리가 저쪽에서 오란다고 와야 하나.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뭔가 이상한 이유다.
그래도 우리 편이니까 됐다.
하지만 규태는 내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눈치였다.
“아쉽다······ 그래도 야누스인데, 그 야누스인데, 엄청나게 뜰 기회였는데.”
“맞아. 야누스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큰 회사일수록 자기들이 갑이라는 걸 잘 알아. 그러니까 실컷 고생만 하다가 흐지부지됐을 수도 있지. 걔들한테 나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도 아쉬워서 그래.”
규태가 숨을 퍽퍽 몰아쉬었다.
나는 그 모습이 의아해서 물었다.
“야누스가 그렇게 좋아?”
“좋지. 나 여기에 안 왔으면 그쪽으로 취업 준비하려고 했었는데.”
아 어쩐지.
그런 이유라면 한층 아쉬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야. 괜찮아. 우리가 더 잘나가면 되는 일이야.”
“그게 가능할 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힘을 내요 슈퍼파워.”
“또 어디서 이상한 말 주워왔어.”
“그래도 말이야. 정말 모르는 거다. 미팅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혹시 알아? 언젠가는 저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올지.”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잘 아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차피 가능성 얼마 없으니까 그만 아쉬워하고 일하자고. 그 왜. 속담 있잖아. 죽은 자식 뭐시기 만지기라고.”
“······.”
규태가 시무룩해졌다.
나는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오늘은 규태 먹고 싶은 거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