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68)
두 번 사는 미대생 68화(68/93)
*
어찌 되었든, 시간은 흘러간다.
우리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간 내가 전시를 준비하는 사이 쌓인 일이 많았다.
새롭게 들어온 직원들 교육도 아직은 부족했고, 또 다른 회사들과의 협업도 조금씩은 밀려 있었다.
‘큰 기회 하나 날렸으니까, 그만큼 다른 일을 해야지.’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공개 베타 테스터를 모집한다고요?”
“그래.”
던전 앤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와, 언제 이렇게 개발이 진척됐대.”
베타 테스트라.
그럼 이제 정말로 정식 발매를 엿본다는 말이었다.
그래 봐야 앞으로 1년은 더 걸릴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네가 멀리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가 열심히 일한 덕이지. 후후.”
“와. 누가 들으면 제가 놀러 다녔던 건 줄 알겠네요.”
“응? 아니야?”
“사람이 진짜.”
코인 소프트는 1차 베타 테스트를 시작했다.
예전에 펀딩을 받을 때 공언했듯, 당시 고액의 후원액을 기꺼이 내주었던 사람들에게 베타 테스트 초대권을 배급했다.
응답률은 100%에 수렴했다.
그리고.
마침 또 다른 일도 함께 일어났다.
“야! 동민이 시험 잘 봤다!”
동민이가 수능을 심각할 정도로 잘 봤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반년 동안 구른 결과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평균 2등급.
상민과 지훈이 옆에 들러붙어 피땀을 흘린 결과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전부 형들 덕분이에요.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자기 자신도 안 믿긴다는 듯 기뻐하는 동민의 말에 지훈 선배는 거의 울려는 눈치였다.
“동민아······ 정말 잘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너는 최선을 다했어.”
“형 울어요?”
“아냐. 안 울어. 사나이가 왜 울어.”
여행까지 가서도 통화로 동민을 챙겨 주었던 선생다운 모습이었다.
반면, 또 다른 선생인 상민은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누가 가르쳤는데 2등급은 당연하지. 오히려 왜 1등급이 안 나왔는지 모르겠네. 이거 교과원에서 실수한 거 아냐?”
말이 저렇지 내심 뿌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기쁜 건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동민이가 열심히 하기는 했지.’
공부와 회사 일을 동시에 병행했다.
수험생이라면 스트레스가 심해 조금이라도 불만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일관되게 공손했다.
입시 잘 본 건 동민이거늘 내가 다 뿌듯하다.
그간 보육원에서 얻어먹은 반찬이 많기도 하고.
‘성적 잘 나왔으니까 원장님이 뭔가 맛있는 거 챙겨 주시지 않을까.’
예전에 동민이가 가져다준 소고기 장조림 맛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동민은 날 보고는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형.”
“왜.”
“솔직히 전 제가 올해에 이렇게 성적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형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보답할게요.”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썩 오묘했다.
이게 고3이 할 말인가.
나이 훨씬 더 먹고서도 게임만 하면서 부모 원망하는 경우도 많은데, 얘는 철이 좀 많이 들었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됐어, 임마. 그냥 나 고3 때 생각나서 도와준 거야.”
이게 진심이었다.
내가 퍽퍽한 집안 형편에 혼자서 죽도록 고생해서 준비했으니까, 동민이만큼은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준비하기를 바랐다.
대리만족이라고 해도 좋겠지.
실제로 동민이는 열심히 준비해 주었다.
내 얄팍한 기대감 정도는 충분히 만족시켜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정 고마우면 내년에도 여기서 알바 계속하던가.”
“당연하죠. 공짜로라도 일할게요.”
“응, 아니야. 시급 올려줄 거야.”
그렇게 낄낄 웃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대 입시는 수능 좀 봤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동민이가 2등급을 받았다고 했던가.
미대에 한해서라면 어지간한 대학은 전부 넣어볼 만한 성적이니, 이제 문제가 될 건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실기가 중요했다.
“동민아. 성적 나왔다고 방심하지 말고 앞으로는 실기 열심히 준비하자. 내일부터는 일은 아예 하지 말고 매일 출근해. 매일 봐 줄게.”
앞으로 실기 기간 두 달 동안 열심히 한다고 좋은 대학에 합격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동민이는 실기에서 나름의 강점을 가졌다.
‘그것도 아주 큰 재능이지.’
본인이 인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민이에게도 일종의 재능이 있었다.
바로 재미.
‘입시 그림만큼 지루한 것도 없는데, 이걸 본인이 즐기면서 혼자서 개선점을 찾고 있다니.’
스스로 즐기면서 발전한다.
한설 선배나 서지원같이 큼지막한 재능은 아니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질이었다.
입시 미술을 배우는 학생일수록 자주성을 잃고, 선생에게만 무조건 기대는 경우가 많았다.
동민이는 달랐다.
내버려 둬도 발전하고, 하나 짚어주면 거기서 더 발전했다.
확실하다.
평소 가르침에 큰 갈증을 느껴왔던 만큼, 가르침을 주자 마른 토양이 수분을 흡수하듯 순식간에 성장하는 것이었다.
‘입시생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
나 스스로 누군가의 모범이 되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가끔 받았을 정도.
“형.”
동민이는 크게 감명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열심히 할게요.”
“그럼 좋고.”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선순환을 느끼는 찰나였다.
며칠 뒤.
또 다른 긍정적인 연락이 다가왔다.
*
“TV 방송이요?”
“네, 지상파 방송국에서 찾아왔습니다. 드라마를 만들 거라고 하는데 그쪽에서 미술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교수님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하는데, 나는 가을 배를 오물거리다가 말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그러고 보니까 이 교수님 잘나가시는 분이기는 했지.’
왜, 옛날에 스테인드 글라스도 방송사 요청으로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잘 된 일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가지 호기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드라마라.
내가 드라마를 그렇게 즐긴 사람은 아니지만 굵직한 히트착 정도는 대충 외우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타이틀은 어떻게 된다고 해요?”
“음. 아직은 가제라고 했습니다만.”
그다음 순간이었다.
“스트로크라는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
순간적으로 눈이 뜨였다.
스트로크.
‘그거였어?’
모를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스트로크는 미대생들의 대학 생활을 그린 로맨스 드라마였는데, 국내에서 제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예 해외에까지 수출되어 그쪽에서 더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겨울 칸타타를 잇는 명작이라고 불렸지.’
덕분에 작중에 등장한 미술품들을 제작한 작가들이 큰 명성을 얻었던 것까지 기억났다.
또 한예원이 관광 명소가 됐던 것까지.
“그 드라마 제작진이 찾아왔다고요?”
눈을 크게 뜬 채로 물어보는데, 이종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작중에 등장하는 미술품을 실제로 제작하려고 한다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을 것 같더군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어떤······.”
“제가 요즘 바쁘다는 겁니다.”
이종이 교수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제가 안 되면 다른 사람이라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해서 한참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어떻겠습니까.”
순간적으로 심장이 멈췄다.
이거 설마, 설마 나한테 하는 말 맞겠지.
“재하 학생이라면 제가 믿고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네.
나는 뭐라고 고민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 인간 이재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회가 왔다.
야누스 외에도 또 다른 해외 진출의 기회가.
<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 끝
ⓒ 이한이™
< 재밌어질 것 같다 >
스트로크(stroke).
붓으로 강하게 한 번 긋는 기법.
드라마 스트로크는 미대를 배경으로 학생들의 청춘과 고뇌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이름을 실로 제대로 살렸다.
[청춘 멜로 드라마]스트로크 한 방으로 이 장르가 드라마계에 범람하게 되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참 대단했지.’
하물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중 등장하는 미술품들은 전부 실제 작가들의 협력을 받아 제작한 작품들이었는데, 이게 또 유명해졌다.
시청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게 또 미술학도들 사이에서는 어마어마한 화제였다.
‘그 사람들 로또 탔다고 말이 많았지.’
이 기회가 내게도 돌아왔다.
나는 결연한 각오가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환상의 무언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럼 제작진에게는 우선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예.”
자신 있다.
무조건 자신 있다.
*
며칠 뒤.
나는 스트로크의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와 미팅을 가지게 되었다.
장소는 이종이 교수님의 작업실로 정했다.
“안녕하세요.”
인타임 스튜디오의 각본가, 임겨울 작가가 처음으로 한 말은 이러했다.
“저 작가님 팬이에요!”
“······ 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내 팬이라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예기치 못한 사태.
“사실 작가님 전시회도 다녀왔거든요. 그리고 이거 작가님 텀블러 산 거.”
그녀는 카메라를 꺼내더니 전시 때 찍은 사진을 내게 마구 보여 주었다.
내 팬이라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와, 대체 몇 장을 찍은 거래.’
내가 다 놀랄 지경인데 임겨울 작가가 말을 이었다.
“둘러보고 너무 좋아서 세 번이나 더 들렸던 거 있죠? 나중에 사인 좀 해 주실래요?”
“그냥 지금 해 드릴게요.”
뜬금없는 사태에 일 이야기는 안 하고 펜만 놀리고 있는데, 그녀의 옆에 앉은 장창익 PD가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말했다.
“작가님, 임 작가가 원래 이래요. 미술 좋아해서 전시전 자주 돌아다니고, 또 자꾸 사 모으고. 이번 작품도 사실 임 작가가 작년부터 졸랐던 겁니다.”
“아, 그렇군요.”
미술을 좋아했으니까 미술 드라마를 찍는 거구나.
이것도 일종의 덕업일치 아닐까.
어쩐지 그동안의 한국 드라마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했다.
‘보통 한국 드라마에서 전문가가 등장하는 드라마라면 직업은 뒷전이고 로맨스가 중심이 될 때가 많았는데, 스트로크는 반대였지.’
직업이 중심에 로맨스는 곁들 뿐.
본격적인 예술 작품 이야기로 호평을 받았는데, 처음부터 작가가 이런 성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작 뒤에 숨겨진 제작 비화에 작게 감탄하는 사이 임 작가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요. 전 처음부터 작가님한테 맡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장 PD님이 엄청나게 반대하신 거 있죠?”
“네?”
장 PD가 날 섭외하기를 반대했다고?
뭔가 미움 산 건가 싶어 그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장 PD가 질색하더니 말했다.
“작가님 실력을 반대했던 게 아니라, 지금까지 쭉 맡겨왔던 사람한테 계속 맡겼던 겁니다. 이 교수님 말입니다. 그동안 저희 스튜디오 작품에 미술 쪽으로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아 어쩐지.
교수님을 먼저 섭외 리스트에 올렸다면 학부생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결국에는 이렇게 돌아왔죠. 이게 다 운명 아닐까요?”
임 작가가 배시시 웃었다.
묘하게 활달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 둘은 내게 작업을 맡기는 데는 아무런 불만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종이 교수님의 소개라면 믿고 맡길 만하겠지요. 그럼 이번 작품 설명부터 드려야겠는데, 한 번 보시죠.”
장 PD가 들고 온 서류 뭉치를 내게 돌렸다.
그 위에는 [스트로크(가제) 시놉시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받아든 종이를 손끝으로 살짝 훑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게 그 세기의 명작이구나.’
내가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장 PD는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작품은 임 작가가 평소부터 워낙 제안을 했어서 만든 거고, 저는 이런 쪽 예술은 잘 모릅니다. 작가님께서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시고 걸리는 부분이 있거든 말씀 주시면 됩니다.”
“네, 잠시만요.”
나는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아는 전생의 내용이랑은 내용이 아예 다르네?’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는데 임 작가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작가님?”
“아, 시놉시스를 보는 게 처음인데 이렇게 되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리면 될지 모르겠네요.”
대충 둘러대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시구나. 어차피 지금은 기본적인 구상만 있으니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아니다 싶은 부분은 고치면 되니까, 작가님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가감 없이 말씀 주세요.”
“제작 들어가면서 처음부터 아예 새로 쓰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나요?”
“PD님, 흔하죠?”
“흔하지. 지금 방영하고 있는 [꿈꾸는 정원]은 시놉시스만 스무 번 넘게 고쳤잖아.”
아하.
그렇게 듣고 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이게 단순 구상이고 여기서 수없이 고쳐서 전생의 그 스트로크가 됐다고 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스트로크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상당 부분 바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이거 재밌는데.’
비록 전생에 대박 친 내용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 의견이 실제 드라마에 반영될지도 모른다는 부분은 내 심장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디 보자.’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천천히 시놉시스를 훑었다.
–
[기획의도.]가. 현대인은 누구나 강렬한 스트로크를 꿈꾸며 살고 있다.
풋풋한 청춘들의 커피만큼 쓴 고뇌와 갈등, 그리고 사랑!
나. 네 명의 미술학도가 그려 나가는 멜로빛 대학 생활!
······
···
–
읽다 보니까 은근히 재밌다.
‘소설책 읽는 것 같네.’
드라마 시놉시스는 이런 느낌이구나.
큰 자본이 들어가는 만큼 딱딱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자유분방하다.
‘그래도 내용은 있을 건 다 있네.’
대충 보아하니, 서양화과에 다니고 있는 모범생 남자 주인공이 천재 여자 주인공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자기 색깔도 못 찾고 주위 흐름에만 휘둘리지만, 점차 여자 주인공에게 감화되어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내용.
‘여기에 첨예한 사각관계가 얽히고, 현실과 이상 속에서 타협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내가 아는 것과는 상당 부분 다르지만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가 그럴듯했다.
‘이대로 갔어도 재밌겠는데?’
전생에 내가 본 스트로크의 잔재가 초코 쿠키의 청크처럼 깨알같이 박혀 있었다.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하면서 읽고 있으려니 임 작가가 물었다.
“작가님, 소감은 어떠세요?”
“아.”
나는 순간 너무 깊게 몰입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말했다.
“재밌네요. 네, 재밌습니다. 꼭 한 번 참여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죠?”
“그럼 여기서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그게 말인데요.”
임 작가는 뿌듯한 표정으로 웃더니 말했다.
“작중에 등장하는 예술 작품들은 전부 실제로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요, 그 역할을 작가님에게 맡기고 싶어요.”
“음, 등장인물들이 극 중에서 어떤 작품을 제작할지는 이미 정해두신 건가요?”
“그건 작가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정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작품의 수가 좀 많이 나오겠네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적어도 수십 작품 이상이었다.
심심하면 나오는 게 미술품이었지.
나 혼자서 소화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되는데 임 작가가 말했다.
“작가님 혼자서는 힘들 수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작가님들을 섭외해 주실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오.
나 혼자서 전부 할 필요는 없는 거구나.
그렇다면 마침 좋은 생각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요. 혹시 제 친구들, 그러니까 다른 한예원 작가님들을 함께 소개해 드려도 될까요?”
“지금 바로요?”
“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말했다.
“마침 이 주변에 다 있어서요.”
뭔가 이 일, 재밌어질 것 같다.
*
일단 통화를 걸면 순식간이었다.
바쁘다던 사람들도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자 냉큼 달려왔다.
“소개해 드릴게요.”
나는 모인 식구들을 원형으로 의자에 앉힌 채 말했다.
“이쪽은 한설이라고 저희 4학년 조소과 선배님이세요.”
“한설입니다.”
“나무 조각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예요. 학교 내에서도 어마어마하게 유명하지만, 얼마 전에 스위스 아트 페어에 출품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셨어요.”
“호오. 그렇죠. 꼭 그림만 그리라는 법은 없죠.”
임 작가가 흥미로운 듯 웃는데 나는 그다음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말했다.
“이 사람은 오사무엘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정상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스위스 아트 페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다음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오사무엘입니다.”
오사무엘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서 깐죽거리려는데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왜.”
“미팅 중이잖아요. 앉으세요.”
“크큭.”
그 모습을 보며 임 작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후로도 규태와 지훈 선배, 가영을 그녀에게 차례차례 소개했다.
그럴 때마다 임 작가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전부 다 작가님이신가요?”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전시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 다 실력은 있습니다. 이건 전에 찍어둔 사진인데요.”
나는 미리 찍어 두었던 그들의 작품 사진을 임 작가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들을 돌려 보는 임 작가의 눈빛이 크게 변했다.
“실력은 정말 좋네요. 프로라고 해도 믿겠어요.”
“일단 프로가 맞긴 합니다.”
사실 이들의 실력은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니다.
이래 뵈어도 한예원에서는 손에 꼽을 아웃풋들만 모아둔 게 이들이니까.
임 작가는 싱글벙글 웃더니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쭙는 건데요, 그러고 보니까 작가님께서는 디자인 사무실이랑 게임 회사도 하고 계신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이분들은 그러면서 만나게 되신 건가요?”
“그런 사람도 있고, 그냥 학교 생활을 하다 보니까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만.”
“혹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야기요?”
내 개인 이야기를 해달라는 듯한 말에 의아해하는데,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네, 작품을 만드는 데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디테일은 살릴 구석이 많을수록 좋거든요.”
“그러시다면야. 그런데 조금 긴데 괜찮겠어요?”
“길면 더 좋죠. 저 시간 많으니까 걱정 마세요.”
“음, 그럼 알겠습니다.”
내 팬이라고 했던가.
임 작가가 눈을 반짝이는데, 나는 내가 한예원에 입학하고서부터 있었던 일을 차차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옆에 앉은 식구들이 적절하게 리액션을 넣어 주었다.
“거기서 재하 이 친구가 저를 다짜고짜 부려먹었죠.”
“오해입니다. 쌍무적 계약 관계였습니다.”
지훈 선배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한설 선배나 규태의 이야기도 나왔다.
“원래는 이 누나한테 전시전을 열어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점점 스케일이 커지더니 스위스 아트 페어까지 나가게 되고, 나중에는 토마스 킨케이드까지 합류했죠. 그게 작가님께서 아시는 그 전시전이었어요.”
“아, 그렇게 됐던 거구나.”
그렇게 일련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임 작가는 뭔가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뭐든 현실이 더하다더니, 드라마 한 편 본 느낌이네요.”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좀 안 평범하게 살긴 했지.
그런데 뭔가 기색이 이상했다.
임 작가가 팔짱을 끼면서 가만히 있는데, 머릿속으로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왜 이러지?’
그렇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작가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그냥 이 시놉시스는 집어치우고요.”
그녀는 시놉시스를 잡더니 찢어버리려는 듯 잡아당겼다.
“임 작가! 찢지 마! 찢지는 마!”
“아.”
장 PD의 만류로 시놉시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임 작가는 아쉬운 표정으로 시놉시스를 가방 안에 집어넣더니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요.”
“네.”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나는 정신이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예 작가님 이야기를 각색해서 작품을 새로 구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재밌어질 것 같다 > 끝
ⓒ 이한이™
< 피카소의 마음을 느끼면서. >
“저희 이야기를 각색해서 쓰겠다고요?”
생각지도 못 해봤던 말이었다.
아니.
애당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이상했다.
‘무슨 역사적인 인물도 아니고, 학부생 이야기를 가져가서 학부생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눈앞에 있다.
임 작가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흐흐 웃더니 말했다.
“작가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요. 드라마를 만들기에만 해도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몇몇 군더더기 빼고 조미료만 넣으면 이대로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그래도 중간에 게임 이야기는 빼죠. 그 부분은 조금 너무 나간 것 같고, 동네 카페 이야기랑 갤러리 전시 중심으로 다시 짜 보면 괜찮을 것 같네요.”
뭔가 이상하다.
처음에만 해도 농담인 줄 알았는데 몹시 진지해 보인다.
‘진짜로?’
내가 다 당황스럽다.
이 무슨 상상도 못 한 전개.
실화 베이스라고 하면 내 사생활이 온 천하에 밝혀지는 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임 작가.”
장 PD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임 작가를 보더니 말했다.
“일단 다 좋은데 말이야. 그거 국장님께서 허락 안 하실걸?”
“왜요?”
임 작가는 그 말이 아리송한 듯 물었다.
“실화 베이스면 더 좋지 않아요? 작가님 요즘 인기 많잖아요. 천재 작가의 숨겨진 이야기라고 홍보하면 기본은 깔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더 안 되는 거야.”
장 PD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실존 인물 바탕으로 작품 찍었다가 잘못하면 난리 나는 거 몰라? 이 사람아. 지난번에 한 번 대판 깨졌잖아. 등장한 줄도 몰랐던 사람이 고소하겠다고 방송국까지 찾아와서.”
“그런 일 없게끔 잘하면 되잖아요.”
“그랬다가 문제 생기면 책임은 누가 지고? 내가? 아니면 국장님이?”
듣자 하니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이은 추궁에 임 작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지금 PD님이 귀찮아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잘 아네.”
“이 작품 성공시킬 자신 있는데.”
“나도 있어.”
장 PD의 가드는 견고했다.
뭐라고 말해도 물리지 않을 것 같은 눈치에, 임 작가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럼 지금 시놉시스에서 적당히 각색만 넣는 정도도 안 될까요?”
“그건 임 작가가 쓰는 거 봐서. 하지만 실화만큼은 내가 두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절대 안 돼.”
“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작가님만 괜찮으시면 아예 작가님에게서 모티브를 조금씩 가져오고 싶은데, 어떨까요?”
“모티브라면 어떤 거 말씀이신가요?”
“에피소드까지는 힘들어도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조금씩 따 오는 거죠. 작가님께서 작중의 캐릭터가 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만드는 작품 정도는 같게요.”
아 그런 이야기였구나.
아까 실화를 그대로 가져오자는 것보다는 부담이 덜했다.
이 정도라면 할 만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생각 좀 해 볼게요.”
“예.”
임겨울 작가가 히히 웃는데, 나는 머릿속이 좀 복잡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가 등장인물 하나를 맡아서 작품을 온전히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정도만 해도 내 작품 홍보는 제대로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신작을 구상하던 참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심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아예 모르는 캐릭터에 맞춰서 내 손으로 작품을 제작하느니, 그냥 내 취향의 작품을 실컷 만들면 된다는 말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한설 선배를 바라봤다.
“왜?”
“그냥 봤어요.”
“실컷 봐.”
생각해 보니까 이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설이 누나가 여자 주인공이라고 치면, 작품 속 여자 주인공은 나무 조각을 제작해서 올리는 건가?’
아까 시놉시스에서 여자 주인공은 천재라는 설정이었지.
대충 맞아 떨어진다.
나는 좀 더 생각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전 솔직히 지금 이거 해 보고 싶거든요. 규태랑 형이랑 누나 생각은 어때요?”
“하는 게 이득 아니야?”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아.”
“좋지.”
전부 흥미로워하는 눈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음, 일단은 괜찮을 것 같네요.”
“그렇다네요. 장 PD님은요?”
“너무 큰 수정만 없다면야. 어디까지나 독단적인 진행은 금물이야.”
“들으셨죠?”
임 작가는 마저 웃더니 말했다.
“그럼 우리 같이 고민이나 해 봐요.”
본격적인 작품 이야기가 시작됐다.
*
“그럼 기대할게요. 작가님.”
임 작가는 얻을 걸 전부 얻었다는 듯 심히 밝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녀는 적당히 각색을 넣는 정도라고 했지만,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주 선 위에서 탭댄스를 추시네.’
사실상 캐릭터를 덧씌우는 수준까지 개조하려고 했다.
임 작가가 지르면 옆에서 장 PD가 뜯어말리는 과정의 무한 반복.
‘원래 작가 힘이 이렇게 강한가?’
내가 생각하는 PD와 작가의 관계와는 크게 달랐다.
아무래도 임 작가가 히트작을 여럿 낸 작가다 보니, 그녀의 발언권을 아예 무시하기는 힘든 모양.
그렇게 최종적으로 낸 결론은 이러했다.
‘각자 등장인물 하나씩 맡아서 깔끔하게 조지자!’
원작 스토리에서 큰 줄기는 유지하되 나머지 작품 이야기를 싹 고치는 것으로 합의가 나왔다.
이거 진짜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 싶은데, 임 작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동안 제가 얼마를 벌어다 줬는데, 이 정도도 안 시켜주면 그건 사람 우습게 보는 거죠.]농담인지 진담인지 무섭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나는 새로운 작품 기획에 빠지게 됐다.
‘서양화과 주인공이라.’
시놉시스만 보거든, 처음에는 모범생 같은 그림만 그리던 주인공이 차차 자기 색깔을 집어넣게 되는 이야기라고 했지.
그렇다면 시작은 극히 담백한 작품이 되어야 했다.
‘딱 미대 신입생이 그릴 법한 그림이라. 어떤 그림이 그런 느낌일까.’
어려운 이야기다.
그럴듯하게 잘 그리는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알지만, 역으로 못 그리게 그리라면 어려운 법이었다.
이건 피카소의 딜레마와도 같았다.
[라파엘처럼 그리는 데는 4년이면 충분했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나는 라파엘처럼 잘 그리지도 못하고, 피카소처럼 재능이 넘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딱 미대 신입생 수준으로 그리는 건 또 어려운 일이었다.
미대 신입생이 아니었던 게 이미 10년도 한참 넘었으니까.
‘미대 신입생 수준이라. 미대 신입생, 미대 신입생······.’
경직된 표현 방식.
딱딱한 발상.
잘 보이게 그리는 데만 치중된 그림.
대충 이 정도가 떠올랐다.
서지원의 그림에서 심각하게 다운그레이드시킨 그림이랄까.
어디 예시로 찾아볼 만한 그림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있네?’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