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72)
두 번 사는 미대생 72화(72/93)
*
유동석 MC는 언제 피곤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수목 드라마 스트로크의 주역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내 옆에 앉은 촬영진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뱉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행동.
나도 얼떨결에 따라서 했다.
왜.
잘 모를 때는 남들 하는 만큼만 해도 중간은 가는 법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건 그렇고 프로는 프로네.’
촬영진들의 얼굴이 한 방에 변했다.
또 유동석 MC도 변했다.
방송에 비추는 얼굴이 아예 따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동민 씨도 그랬지.’
평소에는 그냥 잘생긴 동네 친구 같다가도 연기만 시작하면 사람이 바뀌었다.
가면을 갈아 끼우는 것도 아니고 그게 된다.
그는 내가 대단하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내가 볼 때는 그가 신기했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곧 유동석 MC가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이번 수목 드라마, 스트로크는 방영 전부터 제작 비화가 아주 특별했다고 하는데요. 혹시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겨울 작가가 가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평소 인터뷰를 자주 해 봤는지 익숙한 눈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실 스트로크는 몇 년 전부터 기획한 작품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주 스캔들]을 촬영했을 때부터 구상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PD님을 열심히 졸랐죠.”
“PD님을 졸랐다는 건 그동안 거절을 당했다는 말이겠군요?”
“네, 그렇죠. 말을 꺼낼 때마다 계속 거절을 하더니, 나중에는 제가 자리만 만들면 도망가시던데요?”
“내가 언제 도망을 갔어. 그냥 말이 안 먹히니까 피한 거지.”
“그게 그거죠.”
아주 간략하게 꾸며둔 방청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동석 MC는 웃음이 사그라질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말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작품의 반응이 좋아서 한숨 돌리셨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지금까지의 드라마와는 달리 본격적인 미술 드라마를 꿈꾼다고 한 차례 포부를 밝히셨는데요. 사실 이렇게 말한 작품이 지금까지 한둘이 아니었죠.”
맞는 말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대개 소재만 다른 로맨스 드라마였다.
가끔 신파극이 섞이는 정도.
유동석 MC도 이 부분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래서 말만 예술 드라마 아니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청자들도 많았는데요, 어떤 부분에서 차별성이 있을지 시청자분들이 이해하실 수 있게끔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희도 그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은 참이었습니다.”
임 작가가 웃으면서 말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재하 작가님을 섭외했다는 점이 그랬습니다.”
“······.”
갑자기 나한테 화살이 돌아왔다.
‘나를 섭외했다는 게 이 드라마의 차별성이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한 마디 물어봐야겠다 싶은 찰나 유동석 MC는 차례를 주지 않고 말했다.
“아, 그렇지요. 얼마 전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던 이재하 작가님의 참여가 이번 드라마에서 또다시 큰 화제를 일으켰다지요? 단순히 자문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강동민이 입을 열었다.
“이번 작의 주인공 ‘신민호’의 모든 면을 작가님께서 직접 구상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또박또박하네.
이 사람도 인터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동석 MC가 마저 물었다.
“캐릭터를 직접 구상하셨다는 말씀은?”
“그 부분은 제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장 PD가 끼어들었다.
“보통 드라마를 제작할 때 자문위원은 어디까지나 조언을 주고받는 역할에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깊게 관여하지는 않죠. 조언을 받더라도 실제로 적용하는 건 10%가 채 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자문은 자문인 거죠.”
“이재하 작가님은 달랐군요.”
“예, 작품의 기획 과정부터 저희와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며 함께 작품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저희 임 작가가 이 부분에서 굉장한 열정을 보여줬는데요. 이 작가님과 일주일에도 미팅을 두세 번씩 가지면서 캐릭터를 함께 쌓아가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논의했습니다.”
내가 캐릭터를 함께 만들었다라.
뭔가 민망한 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또 아니었다.
‘거의 모든 장면을 나랑 상의하면서 진행했지.’
조금만 막히는 것 같으면 바로 미팅부터 했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처음 보여 주었던 시놉시스와는 아예 다른 작품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장 PD는 그걸로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작품과는 제작 과정부터 다릅니다. 그러니 결과물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지요. 특별할 수밖에 없겠군요.”
“예, 게다가 작가님께서는 아예 촬영장에도 오가면서 직접 제작에 참여하셨습니다.”
“촬영장까지요?”
이 말에는 유동석 MC도 조금은 놀란 눈치.
저게 연기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나는 이번에는 누가 대답할지 궁금해 주위를 둘러봤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곧 깨달았다.
‘나한테 대답하라는 거구나.’
하긴 너무 가만히 있기는 했지.
나는 뭐라도 말을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촬영장에 가끔 방문해서 PD님과 미술품 배치를 논의하고, 또 동민 씨와 함께 상의를 거쳤습니다.”
“네, 작가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동민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거들었다.
“이번 드라마는 제 연기 인생에서도 새로운 도전이라 막힐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작가님께서 생생한 조언을 주셨습니다. 원작자로서의 코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작자라서 가능한 게 있었군요.”
“예, 연기자 이상으로 신민호라는 캐릭터를 잘 알고 계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임 작가가 어떤 준비를 했으며, 장 PD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참여했고, 또 김동민 배우는 어떤 부분에 연기 중심을 두었는지.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내게 바턴이 돌아왔다.
같은 과정이 빼곡하게 반복되었다.
이쯤 되자 나도 슬슬 알 수밖에 없었다.
‘뭔가 떠먹여 주는 느낌인데.’
그렇다.
부모가 신생아에게 음식을 꼭꼭 씹어서 먹여 주듯, 모든 질문은 한 차례 대답하기 쉽게 가공돼서 내게로 돌아왔다.
그냥 날름 받아먹기만 하면 될 정도.
이렇게까지 날 챙겨주는 이유가 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보통 이런 인터뷰에서는 다 자기 분량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난리이지 않나?’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러했다.
연예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눈에 띄기 위해서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꺼낸다고.
그런데 이들은 조금 달랐다.
역으로 내게 시선을 몰아주는 듯했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건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떠먹여 주겠다니 거절하지 않는다.
“작가님께서 주인공 ‘신민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시청자들에게 한 마디를 해 주신다면?”
“가장 보편적인 미대생입니다.”
이제 굳었던 혀도 풀렸겠다, 나는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이에게 열등감 혹은 존경심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저앉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얻게 됩니다. 저는 화가란 곧 고민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주인공이 어떤 고민을 하는가가 이 드라마의 테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고뇌가 나오겠군요.”
“굳이 말하자면 이런 고민의 과정이야말로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작가님의 청춘을 엿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첫 지상파 인터뷰는 성공리에 끝났다.
*
인터뷰가 끝난 뒤 유동석 MC는 황급히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언제 활기찼냐는 듯 다시 초췌해진 안색이었다.
‘역시 프로는 프로가 맞네.’
우리만 남아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임겨울 작가가 물었다.
“어땠어요? 이번 인터뷰.”
아.
그러고 보니까 이번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MC가 어떤 질문을 하는지 천천히 관찰해 보시면 재밌는 걸 아실 수 있을 거예요.]관찰이라.
그러고 보니까 중간에 느낀 게 있기는 했지.
나는 그냥 느꼈던 바를 그대로 말했다.
“저한테 몰아주기를 하는 것 같던데요.”
“정확하게 보셨네요.”
임겨울 작가가 후후 웃더니 말했다.
“어때요, 재밌었죠?”
“왜 그랬어요?”
“작가님한테 질문을 몰아드렸던 거요?”
“네.”
“큰 이유는 없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드라마의 홍보 포인트를 잡을 때는, 가능한 한 머릿속에 한 방에 박히는 뭔가를 잡는 게 좋거든요.”
“그게 저였고요?”
“네. 그냥 로맨스 드라마는 흔하잖아요. 잘생긴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도 흔하고. 그런데 유명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주관한 드라마가 있다면 어떨까요? 한 번쯤 리모컨을 눌러볼 만하지 않을까요?”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도 같다.
미래의 드라마 중에서는 그런 게 있었다.
웹툰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였는데, 제작자가 직접 각본에 참가해서 if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작품이.
그거 하나만으로도 꽤 홍보 효과가 좋았지.
아마 이들도 내게 비슷한 효과를 바랐던 게 아닐까.
‘아니면 말고.’
그보다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오늘은 인터뷰를 위해 여기까지 온 게 맡기는 하다만, 또 다른 상의할 거리도 있었다.
나는 모두와 눈을 한 차례씩 마주치고는 말했다.
“다행히도 예술 드라마에 대한 대중의 반응 자체가 썩 괜찮다는 건 확인했어요.”
“그렇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슬슬 큰 작품 하나 내놓아 보죠.”
< 연가비담 > 끝
ⓒ 이한이™
작가의 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목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핸드폰을 쥐는 손이 뻐근하게 느껴졌던 게.
건초염인지 터널 증후군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뭔가 휘끼휘끼합니다
어쩌면 이번 주말부터 1일 1연재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남자 이한이, 정 휴재하고 싶으면 완결 치고 휴재할 겁니다
앞으로도 완결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취중진담 >
얼마 전 임겨울 작가가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제가 잘만 하면 드라마 외적으로도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죠?”
“네, 다 홍보하기 나름이니까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었다.
내가 어느 곳에서 특별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그럼 그 작품은 이미 그 자체로 [스트로크!]의 홍보물이 된다.
작품을 통해서 내용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즉, 지금부터는 내 행보 하나하나가 드라마의 홍보로 이어지는 셈이었다.
‘큰 작품을 만들어야겠어. 큰 작품.’
말 그대로 큰 작품이었다.
모두의 눈에 한 방에 들어오다 못해, 온갖 추측과 환상을 불러올 한 방.
하지만 단순히 눈에 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드라마 전개상으로 맞아떨어지는 작품을 만드는 게 최우선이야.’
우선순위를 잘 나눠야 한다.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럼 드라마 스토리를 먼저 생각하면서 같이 상의하는 게 맞겠지.’
임겨울 작가가 내게 작품을 천천히 만들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미리 만들어둔들 작품의 스토리가 조금만 변해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니.
아무튼,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짜 놓은 대본에서 주인공이 어디까지 했죠?”
“음, 대충 4~5편까지 갔죠. 여기서 주인공이 대학교에 입학해서 자기 한계를 느끼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청춘에 대한 열망은 느끼고 있고요.”
“청춘에 대한 열망이요?”
“남들처럼 놀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자기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니, 저 무리에 껴서 놀다가는 지금보다도 더 뒤처질까 봐 두려운 거죠.”
대충 흐름은 알 것 같다.
주인공은 성실한 학업과 캠퍼스 라이프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속된 말로 고구마가 가득한 상황.
“스토리만 보면 좀 답답한 감이 있네요.”
“그렇죠? 아마 지금 분량이 실제로 방영된다면 시청자들 반응이 안 좋을 거예요. 여차하면 주인공한테 큰 호감을 못 느끼고 하차하겠죠?”
“그럼 큰일 난 거 아닌가요?”
“맞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시청자들을 붙들어둘 수단을 마련해야겠죠?”
임겨울 작가가 즐거운 듯 중얼거렸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선택지가 마련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궁금하네요. 그 시청자들을 붙들어둘 수단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음, 우선 여기서 정공법이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정공법이요?”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을 방법이죠.”
임겨울 작가는 손가락을 들더니 말했다.
“첫 번째는, 주인공에게 활약을 주는 거죠.”
“활약이요?”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꼴 보기 싫은 꼰대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를 대신 혼내준다거나, 주인공이 멋진 작품을 만들어서 과 동기들에게 인정을 받는 거죠.”
아.
들으니까 바로 알 것 같다.
웹소설에서 말하는 사이다 같은 거구나.
그럼 이게 최선 아닌가 싶은데 임겨울 작가가 말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어요.”
“문제점이요?”
“아직 시청자들이 주인공에게 충분히 몰입하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죠.”
몰입이라.
어떤 말일까 싶은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필요하잖아요. 주인공의 활약이 시청자들에게 큰 재미를 주려면, 그 전에 앞서 기승을 먼저 탄탄하게 쌓아 둘 필요가 있어요.”
“음, 주인공이 대학교에 입학한 것만으로는 아직 모자란 건가요?”
“그렇죠. 솔직히 말해서 이제 막 프롤로그가 끝난 거랑 크게 다를 바 없으니까요.”
아직 프롤로그였구나.
이 드라마 전개 무지하게 느리네.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미래의 드라마 전개 속도가 유달리 빨라진 걸지도 모르겠다.
소설도 만화도 드라마도 소비자들의 성향은 시대가 흐르면서 바뀌는 법이니.
새삼 그 사실을 느끼고 있는데 임겨울 작가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게 갈등이에요.”
“갈등이라면, 인간관계로 막 서로 피곤해지고 그러는 거요?”
“바로 그거예요. 갈등은 모든 시나리오의 기본이에요. 등장인물 여럿을 두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거죠. 등장인물들은 갈등을 겪으면서 점점 성장하고, 갈등을 해소하면서 클라이막스를 보여주는 게 정석이에요.”
이렇게 들으니까 알 것도 같다.
“미국 영화를 보는 것 같네요.”
“맞아요. 현대 시나리오 이론은 거의 다 미국에서 발전했거든요.”
이후로도 그녀의 입에서 작법 이론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냥 기분 흐르는 대로 쓰는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공식이 있었구나.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지금 당장은 쓰기 힘든 방식이었다.
나는 그다음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 말씀만 들어 보면 주인공에게 활약을 주기는 아직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 같은데요. 맞나요?”
“그렇죠.”
“그럼 시청자의 하차를 막을 두 번째 방법은 뭔가요?”
그렇게 물어본 순간이었다.
임겨울 작가는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여기서 드라마의 마법이 펼쳐지는 거죠.”
“마법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그녀가 말했다.
“여자 주인공이요.”
“······ 아.”
그 이야기였구나.
나는 뭔가 깨달음을 얻은 기분으로 물었다.
“여자 주인공의 매력으로 하차를 막는 거군요.”
“네, 맞아요. 주인공이 지금 당장은 아무리 못난이라도, 여자 주인공이 충분히 매력적이면 시청자들은 일단 참아 주기 마련이에요. 드라마의 주 시청자들은 또 여자잖아요. 충분히 몰입할 수 있게끔 캐릭터를 조성하면 하차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요. 그럼 여주 때문에 보는 드라마로 발전하는 거죠.”
잠시 뒤 그녀가 내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이러다가 질릴 때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나는 곧바로 답했다.
“남자 주인공을 활약시키면 되겠네요.”
“딩동댕.”
그녀가 깔깔 웃었다.
“이게 드라마의 기본이에요. 갈등을 중심으로 끌고 가되, 답답할 때는 캐릭터로, 캐릭터가 떨어질 때면 활약하는 장면으로, 이렇게 완결까지 돌려막는 거죠.”
돌려막는다.
이 말을 들으니 그 무수했던 드라마의 맥락이 잡히는 듯했다.
아아.
막장 드라마라고 얕봐서 미안하다.
전부 숨겨진 기술이 있었구나.
아무튼,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슬슬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우선은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을 만나게 하고, 그걸 계기로 남자 주인공이 성장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면 되겠네요.”
그렇다.
여자 주인공으로 시청자를 붙들어두는 사이, 남자 주인공은 원기옥을 준비하면 된다.
임겨울 작가는 웃으며 말했다.
“정확해요.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드라마 작가 하셔도 되겠는데요?”
“본업이 있어서 사양하겠습니다.”
“아쉬워라.”
“아무튼, 여자 주인공을 통해서 남자 주인공이 성장한다면······.”
그 순간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개가 있었다.
다만, 이걸 드라마에서 통할지가 조금 의문일 뿐.
하지만 뭐.
다 연출하기 나름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작가님, 지금 제가 생각나는 전개가 하나 있는데요.”
*
며칠 뒤.
인타임 스튜디오는 한예원 교내의 어느 강의실을 통째로 대여했다.
[스트로크!]의 초반부 하이라이트, 과제 신을 촬영하기 위함이었다.‘이번 하나에 스트로크가 대박을 터뜨리냐 못 터뜨리냐가 정해진다.’
덕분에 촬영진들은 모두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드라마를 찍다 보면 가장 중요한 구간으로 간주하는 구간이 있는데, 흔히 2화가 그러하고 5화가 그러했다.
1화는 신작이니까 본다.
2화는 볼만하니까 본다.
하지만 5화부터는 이 드라마라서 본다.
‘어지간한 이변이 없는 이상 5화 이후로는 큰 변화 없이 완결까지 이어진다고 했지.’
말 그대로 이 초반 구간이 곧 드라마의 성적을 결정짓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5화로 진입하는 장면.
“자화상을 그리면 됩니다. 어떤 방식이든 자유롭게 고민하고 캔버스에 담아 보세요.”
교수 역을 맡은 배우가 담담하게 연기했다.
그렇다.
이번 과제는 자화상을 그려오는 과제.
얼핏 보기에는 그냥 보이는 대로 그리면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과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무려 발상이 좋으면 추가 점수를 준다는 항목이 붙어 있었기 때문.
‘여기서 주인공은 혼자서 뭘 그려야 하나 한참 동안 고민했지.’
각본상의 내용은 이미 완벽하게 파악했다.
과제 제출까지 불과 하루를 남긴 상황.
하지만 주인공은 아무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 수업으로 강박관념이 박혀서, 자기도 뭘 그려야 할지 모르는 바람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지.’
주인공은 홀로 공동 작업실에 박혀서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여기가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고구마 구간.
이제 여자 주인공을 투입할 차례가 됐다.
주인공이 야작을 하던 중 여자 주인공이 슬쩍 등장하는 것.
이어서 단둘이 작업을 진행하는 신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
52. 한예원 공동 작업실
[민호: (갑자기 등장한 나윤의 모습에 당황하며) 뭐, 뭐야?] [나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왜, 나는 오면 안 돼? 혼자 쓰는 곳도 아니잖아] [민호: 그건 그렇긴 한데······.] [나윤: (시큰둥하게 자리에 앉으며) 그러는 너는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과 동기들 다 선배들이 술 사준다고 불러서 놀러 간 거 몰라?] [민호: 나 술 안 마셔. 너야말로 여기 왜 왔는데.] [나윤: (한숨을 쉬곤) 선배 중에 불편한 사람이 있어서.] [민호: 누구?] [나윤: 그런 사람이 있어.] [민호: 그게 누군데.] [나윤: (민호를 흘끗 바라보고는) 너 눈치 없다는 말 자주 듣지?] [민호: ······ 아니거든?] [나윤: 맞네. 여자 비밀은 함부로 물어보는 거 아니야.]–
그렇게 둘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민호는 자기 작업을 하면서도 곁눈질로 나윤이 작업하는 모습을 계속 관찰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쓱싹쓱싹 그리는 모습에 당황한다.
그는 오늘만 해도 벌써 3시간째 아무것도 못 하고 앉아만 있었기 때문.
‘여기서 한 번 울컥하는데, 여자 주인공이 몰래 마시자면서 소주병을 들이밀지.’
–
민호: 나 술 안 마신다니까.
나윤: 그럼 계속 그러고 있게?
민호: 신경 쓰지 마.
나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잠깐 숨이라도 돌리면 뭐가 떠오를지도.
민호: (마지못해 받아들이듯) ······한 잔만 마시는 거야.
–
민호는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
나윤: 올, 잘 마시네.
민호: 놀리지 마
나윤: (깔깔 웃으며) 놀리는 거 아닌데?
민호: 놀리지 말라고.
나윤: 늘르즈 믈르그~.
–
그렇게 나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은근한 호감이 싹트기를 잠시.
조금 진지한 이야기가 나온다.
–
나윤: 너는 왜 맨날 그렇게 혼자 놀아?
민호: 놀러만 다니면 등록금 아깝잖아.
나윤: 평생 살면서 이렇게 놀 일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민호: ······ 적당히 마셔. 나 이제 그림 그릴 거야.
나윤: (피식 웃으며) 꼴값 떠네.
–
민호는 알딸딸한 정신 상태 그대로 붓을 잡는다.
그리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취한 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
그러다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잠든다.
눈을 뜨고 보니 나윤의 자취방.
‘이걸 계기로 과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갈등에 엮이게 되지. 과 선배는 주인공이 나윤과 사귀고 있다고 착각해서 견제하려 들고.’
전형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청춘 로맨스 전개다.
아무리 로맨스가 메인이 아니라고는 하나, 로맨스만큼 좋은 조미료는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주인공이 작업실에서 그린 한 점이었다.
그는 한예원에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교수에게 극찬을 듣게 된다.
자, 이제 전개는 준비되었다.
이제 내 작품만 그리면 되는 상황.
주인공 민호가 작중에서 어떤 그림을 그릴지도 전부 생각해 두었다.
‘어디 보자, 피카소 그림을 어디에 모아 뒀더라.’
나는 노트북 폴더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슬슬 타이밍이 왔다.
“작가님, 준비되셨어요?”
“네.”
지금부터는 나도 촬영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작품을 그린다.
< 취중진담 > 끝
ⓒ 이한이™
<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와 >
‘지금부터 시작이다.’
강동민이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했다.
그에 맞서 여자 주인공도 열연을 펼치는 상황.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은근히 감탄했다.
‘와, 역시 강동민이다. 잘생기기는 잘생겼네.’
임겨울 작가는 시청자들의 하차를 막을 방법으로 주인공의 활약과 캐릭터의 매력을 꼽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강동민의 비주얼도 하차를 막기에 충분했다.
‘뭐, 이건 둘째 치고 이제 슬슬 내 그림 그려야지.’
작중의 주인공(민호)이 취한 채로 그릴 작품.
이 작품은 작품을 촬영하는 동시에 내가 옆에서 함께 작업하기로 했다.
주인공이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내가 그리는 것.
나는 오늘 하루를 위해 이미 완성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작업해 보았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바둑으로 치면 복기하는 것에 가까웠다.
‘피카소 스타일로 그린다.’
그렇다.
이게 주인공이 선택한 자화상이었다.
피카소 스타일, 정확하게 말하면 입체파 스타일로 자기 자화상을 그리는 것.
뇌가 알코올에 절어 제대로 자기 모습을 인식할 수 없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입체파 그림이 나오는 셈이었다.
“작가님, 지금부터 그려 주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나는 재빨리 빈 도화지에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수채화로 그린다.
원래 이런 그림은 취향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주전공이 아닐지언정 어쨌든 학원 강사 일을 했던 나다.
남을 가르칠 만큼은 할 줄 알았다.
사락.
내가 붓을 놀리는데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촬영장 조명과 함께 수십 명의 눈빛이 내게 꽂히자, 그림을 그리는 감각이 살짝 분산되었다.
하지만 나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계속해서 손을 놀렸다.
‘이미 여러 번 그려 봤잖아. 신경쓸 거 없어.’
벽화를 그리면서 남의 시선 정도야 차고 넘칠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미 그려봤던 걸 다시 재연한다는 느낌으로 차분하게. 그래, 입시 미술 그림 그리는 애들의 마음가짐으로.’
나는 그림을 조금 완성한 상태에서 말했다.
“됐어요.”
“좋습니다. 바로 촬영 재개합시다.”
곧바로 다시 촬영이 진행되었다.
불과 몇 분에 불과한 촬영.
그 상태에서 나는 다시 그리다 만 수채화를 이어받았다.
다시 그렸다.
또 어느 정도 그리고 나면 촬영이 재개되었다.
“동민 씨, 여기에 붓 살짝만 그으세요.”
“네.”
배우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같은 작업이 수차례 반복되기를 한참.
강동민은 끝내 그림을 그리다가 말고 제자리에서 푹 엎어졌다.
그 연기와 동시에 오늘의 내 역할도 끝났다.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곧 사방에서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큐비즘, 수채화, 성공적.
*
저 촬영 뒤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후 촬영은 주인공이 교수에게 칭찬을 받는 장면 정도까지 진행한 뒤, 그동안 분주하게 돌아갔던 스튜디오는 귀신같이 움직임을 멈췄다.
‘드라마 촬영 현장은 언제나 정신없이 바쁜 거 아니었나?’
나는 그게 의아해서 임 작가에게 물어보았다.
“촬영 멈추고 아예 노는 건가요?”
“당장은 간을 보는 시기에요.”
“간이요?”
“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임겨울 작가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완전히 사전 제작해 두고 진행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실제 방영 들어가고 나서 시청자 반응 보면서 조금씩 조절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시청자들이 어떤 등장인물을 막 욕하면 빼야 하잖아요? 또 광고주 요청이 들어올 수도 있고요.”
“그랬다가 미리 촬영해둔 분량이 다 떨어지면요?”
“그때부터는 쪽대본이라도 던지면서 실시간으로 촬영할 수밖에 없죠.”
“······.”
“드라마 촬영이라는 게 원래 매주 살얼음판을 걷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능한 한 실수가 없게끔 조심할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대수로웠다.
‘그거 되게 위태로운 거 아냐?’
다음 주 방영 분량을 며칠 앞두고 새로 촬영하는 일도 잦다는 말이었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쉽지 않으리라는 게 느껴지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
“너무 걱정하지 마요.”
임겨울 작가가 웃더니 말했다.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니까요.”
뭐.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보다는 나도 이제 슬슬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쪽 동민이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이제 슬슬 실기 시험 날까지 1주일도 안 남았다.’
한예원 시험이 코앞이었다.
시험 결과가 나오기 전날이 [스트로크!]의 첫 방영일.
우연히도 시기가 맞물렸다.
‘서로 힘들겠네.’
동민이는 처음에만 해도 미대 입시생답지 않게 입시 미술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이제는 슬슬 심장이 쫄깃한 듯했다.
지원한 대학은 세 군데.
시민대, 건영대, 한예원이었다.
한예원이 일정상으로 가장 뒤였는데, 오늘은 앞서 시험 본 시민대 합격 발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덕분에 동민이는 오늘 그림에 집중하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 왜 그렇게 다리를 떠세요.”
동민이가 날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다리 떠는 게 혈액순환에 좋은 거야.”
“형.”
“왜.”
“저 그림 그리는 데 신경 쓰여요.”
“······.”
내가 애를 잘못 길렀구나.
아무튼, 솔직히 동민이의 지금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나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분명 잘 그린다.
아마도 같은 또래 사이에서는 월등히 잘 그리는 축일 터.
하지만 과연 전국 각지의 재수생들과 비교한다면 어떨까.
‘그때 실기 모의시험은 거의 또래 위주였지만, 실제 시험날에는 전국의 재수생이 달려든다.’
재수생만 달려들까.
대학 학부생이 슬쩍 넣어보는가 하면, 아예 현역으로 강사 일을 뛰고 있는 사람이 지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미대 입시는 이게 빡세단 말이지. 상도덕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또 오늘 발표가 나올 시민대는 대학 자체가 좀 특수했다.
전형적인 실기 중시 대학.
발상이고 나발이고 실기 외길을 파고든 학생들이 많이 붙는 학교였다.
‘동민이가 여기서 붙어주면 나도 걱정이 많이 줄어들 것 같은데.’
일단 시민대에 붙는다면 한예원도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뜻이니까.
또 떨어지더라도 일단 보험은 든 셈이라서 맘 편히 시험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아무튼, 생각할 게 많았다.
‘고민해서 나아질 일은 고민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던데.’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괜히 중얼거려 봤다.
“합격 발표는 왜 이렇게 안 올라와? 분명 정시에 올라온다더니.”
“일정 연기됐데요.”
“일 대충 하네.”
그래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심장만 졸이던 참이었다.
딸깍.
“합격 발표 나왔다!”
갑작스럽게 발표가 나왔다.
“형, 형, 잠시만요.”
태연한 척하던 동민이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달려왔다.
짜식.
역시 너도 긴장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급히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리스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합격이었다.
“붙었다!”
단 한 문장.
그 문장을 보자마자 가슴속에 먹먹하게 쌓여 있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씻겨나가며, 온몸으로 소름이 밀어닥쳤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뭐지?’
어째 동민이가 조용했다.
나보다 훨씬 더 기뻐해야 할 동민이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뭔가 자기 나름대로 느끼는 게 있는 모양.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싶다가, 그냥 말없이 어깨를 다독여 줬다.
“고생 많았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이미 내 자신을 내가 어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정상참작을 받아 마땅했다.
동민이도 그제야 몸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잘 보아하니 합격통지 페이지 하단에 뭐라고 적혀 있었다.
“어디 보자, 장학 대상자는······ 하단 링크의 합격증 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니, 합격자 중에서 상위권에 든 학생은 장학생이 된다고 했던가.
장학생이라.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다.
동민이가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웠던 게 이제 1년 조금 안 된다.
이런 상황에 무슨 장학금까지 바라겠는가.
턱걸이로 합격 마지노선만 넘겨도 정말 대단한 거지.
‘그러니까 이건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클릭하는 거야. 모바일 게임 무료 뽑기 이벤트에서 내가 울트라 레어를 붙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대충 그런 마음가짐으로 합격증 페이지 링크를 클릭한 순간이었다.
“······.”
숨이 멈췄다.
[상기 학생은 시민대학교 2004학년도 정시모집 입학 전형에 (우수) 장학생 전형으로 합격하였음을 통지함.]맞았다.
합격이 맞았다.
“······.”
“······.”
이번에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멍하니 모니터 화면만 보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두 번째로 경직에서 풀려난 뒤 내가 한 일은, 우수 장학생 전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타다닥.
대학 포털을 검색해 보자 금방 나왔다.
“1년 동안 학비 면제에, 입학 후 GPA에 따라 추가 면제를 신청할 수 있다.”
“······.”
확실했다.
학비 걱정 하나는 팍 줄었다.
그런데 동민이는 한참 전부터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대신 말을 해 줬다.
“이야, 축하한다. 동민아, 너 장학생이래. 이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겠네.”
“······ 감사합니다.”
보아하니 더 말을 걸었다가는 뭔가가 새어 나올 것 같아서 나도 가만히 있었다.
저 기분을 나도 모르지 않으니.
이미 한참 옛날 일이지만 한 번 입시를 해 본 사람으로서 모를 수가 없는 그 기분이었다.
‘아마 동민이도 평생 이날을 못 잊겠지.’
동민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다.
그냥 그러했다.
“지금 그리고 있는 것만 다 그리고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