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74)
두 번 사는 미대생 74화(74/93)
*
“전 스트로크의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홍경희 사장이 말을 이었다.
“첫 시청률에서 20% 가까이 달성했다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40%까지도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닙니다. 전 이런 문화 예술의 상업적 흥행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말투가 독특했다.
마치 입으로 칼럼을 읽는 것 같다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 오성 그룹도 예전부터 예술계에 다각적인 투자를 진행해 왔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녀가 말했다.
“저희 아버님부터 시작해서 오성 그룹의 구성원은 누구나 예술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현대 문화의 기저에는 언제나 예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예술을 이해하는 게 그 시작이라고 배웠습니다.”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예술을 알아야 사업도 잘할 수 있다, 정도 아닐까.
화법이 참 독특하네.
“하지만 현대 미술계에는 한 가지 진입장벽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시나요?”
홍경희 사장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일반인 중에는 미술을 지루하고 비싸기만 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제 생각에 이렇게 된 데는 미술계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중을 이해시키기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어느 순간부터 홀로 달려온 셈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미술은 곧 종말을 의미합니다. 미술은 조금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중성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네, 그래서 몇 가지 방법을 고민했고, 그중에 하나가 새로운 미술관의 설립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알 것도 같다.
오성 라온 미술관.
“라온 미술관, 저희가 새롭게 개관할 현대 대중 미술관입니다.”
아, 정확했다.
예지력 상승.
“라온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작품을 많이 유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접근성과 작품성을 함께 유치해서 함께 승리하는 그런 예술 문화의 형성을 노리고 있다고 할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술관이라는 건 대중들이 쉽게 발을 들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녀가 다소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좋은 전시를 유치한다고 한들 근본적으로 대중이 미술에 대해서 가진 거부감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이는 결국 제자리걸음에 불과합니다. 제아무리 잘난 스포츠라고 해도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단순 몸싸움에 불과하듯 말입니다.”
다소 냉철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어떤 예술이라고 해도 소비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한국 미술계는 소비자의 부재를 겪고 있다.
이유라면 여럿이 있겠지만, 확실한 건 십몇 년 뒤까지도 쭉 이어질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끔찍하기 짝이 없지.’
미술은 배고픈 일이다.
이 현실이 바뀌려면 우선 소비자가 많아져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수많은 시도가 오갔고 전부 실패했다.
그래서 반쯤 그들만의 리그로 자리 잡은 게 한국의 현대 미술이었다.
서글프지만 그게 한국 미술계였다.
‘망하지라도 않은 게 어디야. 아니다. 이미 너무 망해서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달랐습니다.”
홍경희 사장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가요?”
“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내 눈살이 다 꿈틀거리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작가님의 행보는 언제나 주의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
“갤러리 카페 프랜차이즈 헤븐즈 도어의 창립에 큰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죠.”
“또 해외 아트 페어 참가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으며, 또 컬렉터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습니다. 한발 나아가 국내에서 토마스 킨케이드와 함께 전시를 유치하기까지 했지요.”
듣자 하니 뭔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를 성공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수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예술을 대중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어떤 예술가도 해내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녀는 자기 말에 자기가 감동을 받은 듯 아예 손뼉까지 쳤다.
와.
라온 미술관 관장님께서 내 업적을 치하하고 있다.
뭔가 내가 엄청난 사람이 된 기분이다.
“살다 보니까 그만······.”
“여기에 스트로크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작가님께서는 단순히 예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닌데.
완전 아닌데.
그냥 일감 있다고 히히 신나서 달려갔더니 그게 이거였던 건데.
스트로크도 이종이 교수님이 나한테 떠먹여주신 건데.
내가 막 하려고 했던 거 아닌데.
그냥 미래에 대박 날 거 아니까 와! 대박! 하고 한 다리 얹은 건데.
“작가님께서는 그냥 화가가 아닙니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예술계 전체를 생각하며 작품 활동을 진행하고 계시는 겁니다.”
틀렸다.
이 사람 나를 제대로 오해하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개인의 영달을 중요시하는 나를, 무슨 문화계의 혁명가 정도로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하, 개판이네.’
망했다.
나를 너무 고평가하고 있다.
놀라운 건 장 PD와 임겨울 작가였다.
그들의 나를 보는 시선이 오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평소에는 그냥 친근하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살짝 존경의 빛마저 감돌았다.
‘세상에. 저런 얕은 말에 속아넘어간다고?’
세상이 제대로 말세다.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많다니.
문제는 나도 저 말에 살짝 홀릴 것만 같다는 사실이었다.
열혈 캐릭터들이 소리지르면서 싸우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다.
괜히 사업가가 아니다.
현실성 없는 말을 하는데도 이상한 설득력이 가득했다.
“작가님.”
홍경희 사장이 말을 이었다.
“이번 드라마는 한국 수천만 대중이 미술계에 관심을 갖게 할,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입니다. 그리고 또 작가님밖에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
“오성 그룹과 함께 큰 일을 한 번 해 보지 않으시겠어요?”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 빌드업을 정말 완벽하게 쌓았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 순간 나는 이기주의로 가득한 사람이 된다.
또 인타임 스튜디오도 난처해진다.
그렇다면 할 말은 따로 없었다.
나는 진중하게 홍경희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인간 이재하, 언제나 이런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
홍경희 사장과의 미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무언가를 끝내고 돌아온 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와, 인생이 꼬여도 제대로 꼬였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나.
나는 많은 사람에게 내 작품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또 오성 그룹의 제안이라길래, 뭔가 큰 작품 하나 만들자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국 미술계를 진흥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고 한다.
게다가 오성 그룹이 거기에 협력하는 형태로 진행하자고 한다.
‘아니, 오성 그룹만 빠져도 좀 마음 편히 구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쪽에서는 뭐든 좋으니 필요한 건 뭐든 말만 하라고 했지만, 그게 말대로 되겠는가.
같은 말을 해도 어린아이와 어른이 하는 말은 다른 법니다.
‘나 너 좋아.’
이 말을 어린아이들끼리 하면 귀엽다.
하지만 회사 부장이 신입사원한테 말하면 갑질이다. 성추행이다.
대한민국에 문화 혁명을 일으켜 보자는 말도 같았다.
미대생들끼리 술에 꼴아 담벼락에 토하면서 이야기하면 로망이다.
하지만 오성 그룹 사장이 20대 남짓 학부생한테 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신 나갈 것 같애.’
우주적인 규모의 갑질이 된다.
그런데 또 장 PD와 임 작가는 저 말을 감명깊게 들은 듯했다.
‘와, 표정만 보면 무슨 조국 해방의 사명을 짊어진 레지스탕스라도 보는 것 같네.’
내 심정이 이런데 임 작가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작가님, 저희 뭔가를 해 봐요.”
“뭔가요?”
“홍 사장님 말씀 듣고 생각했어요. 이번 드라마는 단순히 성공에서 그칠 게 아니라, 조금 더 큰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요.”
망했다.
이 사람도 뽕이 가득 찼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떠올렸다.
이 사람은 근본이 미술 덕후였다는 사실을.
‘애당초 나를 찾아온 게 미술 덕질하려고 찾아왔던 거였지.’
홍경희 사장과 통해버렸구나.
한 방에 통해버렸구나.
가슴이 아프다.
간에서 쓴 즙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그녀가 수첩을 꺼내더니 말했다.
“지금 대본은 7화까지 완성되어 있어요. 주인공이 대학 교수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인정을 받고, 또 사건에 휘말리는 부분까지에요.”
“그렇죠.”
“그 다음 스토리를 생각을 해 봐야겠는데요.”
“네.”
임겨울 작가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아까 홍 사장님이 새로 개관할 준비를 마쳤다는 미술관 있잖아요.”
“네, 라온 미술관.”
“드라마 속의 한예원 학생들이 거기서 엄청난 전시를 한 번 하게끔 유도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음.”
솔직히 말해서 나쁜 생각은 아니다.
제일 현실적인 형태의 PPL이기도 하였다.
어차피 이 드라마 방영이 끝난 다음에는 작중 등장하는 작품들을 가지고 전시를 열 생각이기도 했고.
‘차라리 계획이 앞당겨진 걸 수도 있어.’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럼 전 여기서 뭘 하면 될까요?”
“작가님께서는요.”
임겨울 작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시청자들의 발걸음을 옮길 명작을 만들어 주세요.”
< 나 너 좋아 > 끝
ⓒ 이한이™
< 혁명 >
시청자들의 발을 옮길 명작이라.
참으로 터무니없는 요구를 들어버렸다.
‘허허, 답이 없네.’
사람이 요구를 해도 어지간한 걸 요구해야지.
일개 학부생한테 무슨 저런 걸 요구하고 있냐.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가수도 공연에 10만 명 동원하기가 힘든데, 내가 무슨 수천만 명의 의식을 바꿔.
택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 라고 무작정 외면하기에는 솔깃하기도 한 게 사실이었다.
‘어쨋든 이번에 한 방만 잘하면 내가 역사를 쓰는 셈이잖아.’
솔직히 말해서, 모든 미술가들은 관종이다.
어쩔 수 없었다.
미술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해서 남을 설득하는 행위였다.
이걸 조금 원초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내가 만든 피규어 어때? 예쁘지?’
조금 자극적인 비유지만,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그러니 한국 인구 수천만을 감동시킬 작품을 만들라는 말이 상당히 솔깃한 제안인 게 사실이었다.
하물며 라온 미술관이다.
‘헤븐즈 도어에서 설계 조금 했던 게 스노우볼링이 돼서 지금은 한국 최대 예술가 집단이 됐어.’
그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일단 나는 상상도 못 했다.
하물며 라온 미술관은 어떨까.
명실상부하게 한국 최고의 사립 미술관이 될 게 분명한 미술관이었다.
내가 이곳에 빚을 지워두면, 훗날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남들은 여기에 작품 하나 소장시키기도 힘들다는데, 나는 그냥 우리집 안방처럼 들락날락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그 시작이 내 첫 작품이었다.
라온 미술관의 존재를 전국의 국민에게 알리고, 대중적인 전시 문화를 확산시킬 기념비적인 전시.
홍경희 사장은 그 시작으로 나를 지목한 셈이었다.
“······ 솔직히 말해서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임겨울 작가는 홀가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실패할 수도 있죠. 그런데 뭐든 다 시도는 해 봤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응, 아니야.
실패하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문제야.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판은 준비되었다.
시청률 20%짜리 드라마가 내 홍보 도구가 되었다.
한국 최고의 사립 미술관이 내 전용 전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 나 인간 이재하.
뭘 했다고 한국에서 가장 핫한 예술가가 준비되었다.
어쩔 수 없다.
“까짓 거, 함 해 보죠.”
하는 수밖에.
*
나는 모처럼 헤븐즈 도어에 찾아갔다.
“재하 왔어?”
“사장님 안녕하세요.”
“마침 잘 됐다. 내가 뭐라도 내 줄게.”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했던 고민이 있었다.
나도 그 고민을 시작했다.
‘대중의 이목을 유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수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또 수많은 방법론이 나왔지만, 수많은 사람이 실패한 고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따금 성공하는 방식도 있긴 했다.
‘우선은 성공 사례에서 가지고 오자.’
나는 가장 먼저 드로잉북을 꺼냈다.
옛날부터 늘 그랬지만, 생각을 정리할 때는 뭐라고 끄적이면서 하는 게 편했다.
사각 사각.
샤프심 종이 긁는 소리가 들려오며 가슴이 침착해졌다.
나는 곧 내 기억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대중의 발걸음을 움직일 예술이라고 했지. 대체 어떤 게 있을까.’
생각을 해 봤다.
대중에게 널리 잘 알려진 작품이 무조건 잘 먹히는 작품일까.
아니다.
이건 의문이 들었다.
한국 최고의 비디오 아트 전문가, 백남준의 작품이라고 해서 전시를 굳이 보러 가는 사람이 또 얼마나 있었던가.
그의 대표작 ‘다다익선’만 봐도 그렇다.
딱 봐서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또 그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하지만 그걸 보러 발을 옮기는 사람은 더, 더, 더, 더더욱 드물었다.
‘안타깝지만 이게 또 현실이지.’
단순히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곧 대중의 발걸음을 옮길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돈을 많이 번 작품인가?’
이 부분도 생각해 볼 일이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번 작품이 대중을 움직이게 하는 작품이던가.
제프 쿤스.
현대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앤디 워홀의 후계자라고 불리며, 또한 데미안 허스트와 함께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현대 미술가.
하지만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던가.
‘아니, 그건 또 아니지.’
오히려 쌈마이하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현대 미술을 비판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고는 하는 게 또 그였으니까.
나는 이쯤 되었을 때 생각했다.
‘그래, 기존의 방식으로는 안 돼. 내게 필요한 건 혁명이야.’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대중의 발걸음을 옮기게 할 혁명.
조금 유치한 말이지만, 나는 혁명의 예술가가 되어야 했다.
‘혁명, 사회적 메시지, 충격, 대중의 관심.’
곧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뱅크시.’
뱅크시.
아트 테러리스트, 뱅크시.
아무 건물에나 그림을 그려두고 도망가서, 어떻게든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무료.
공짜라는 사실이었다.
‘몰래 그림을 그려두고 도망가고, 대중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하며 즐기지.’
홍경희 사장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일단 퍼뜨리려면 무료가 좋다.
무료로 대중을 즐겁게 할 예술.
즉, 대관료는 안 받을 생각이다.
하지만 미술관에 전시해야 하지.
어떻게?
이건 곧 방법이 떠올랐다.
‘꼭 미술관 안에다가 작품을 전시하라는 법칙은 없지?’
바깥에 전시하면 그만이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마침 스트로크의 작중 스토리와도 크게 모순되지 않는 작품 방식이 있었다.
‘일단은 벽화다.’
벽화.
모든 운동 선수들이 기본기로 돌아가듯, 나도 벽화로 돌아왔다.
이미 한물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벽화라는 것은 도화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리는 도화지가 벽일 뿐, 그 방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특별한 예술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예술이라면, 또 마침 생각나는 게 있었다.
‘광고용 그림 중에 그런 게 있었지.’
그것 아는가.
한국은 옥외광고가 잘 발달하지 않은 나라지만, 서구에는 미래에도 벽에 그림을 그려서 광고를 진행하는 곳이 많았다.
또 그런 그림을 그리는 광고사도 많았다.
그런데, 다른 광고사와는 다른 전략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회사가 하나 있었다.
“어디 보자.”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드로잉북 위로 손을 놀렸다.
곧 매끈한 얼굴의 젊은이가 드러났다.
‘와, 나도 사람 그리는 실력 많이 늘었네.’
이번 생 들어서 2년 가까운 시간동안 열심히 그린 보람이 있다.
내심 으쓱하면서 그림 위로 계속해서 손을 놀리려는 순간이었다.
“뭐야, 사람 그렸어?”
“왁.”
“뭘 그렇게 놀라?”
사장님이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요.”
“엄한 생각 하고 있었나 보다.”
“들켰네요. 하지만 들어보세요.”
나는 내친 김에 그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제가 지금부터 마술을 보여드릴게요.”
“어떤 마술?”
“여기 이 젊은 남자가 점점 늙을 거예요.”
나는 말을 하면서 샤프를 계속 놀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 속 젊었던 얼굴이 점점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20대가 중년이 되었고, 중년이 다시 노년이 되었다.
늙었다.
지우개로 긁어서 지우고 다시 샤프로 그리는 과정의 반복에서, 젊은이는 노인으로 변모했다.
“오, 이거 재밌다.”
사장님이 감탄을 터뜨렸다.
“그렇죠?”
나는 일말의 뿌듯함을 느끼며 말했다.
“이번에는 또 다른 마술을 보여드릴게요.”
나는 다시 같은 젊은이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시도를 해 봤다.
‘수염을 그려보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수염이 자라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처음에는 푸릇푸릇한 기미만 남은 수염이었다.
잠시 뒤 딱 면도하기 좋은 수염까지 자랐다.
또 연필을 세밀하게 다루자 곧 야성미 넘치는 수준으로 수북해졌다.
“늑대인간 같네. 재하 최고.”
사장님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리더니 말했다.
“아, 손님 왔다.”
잘 보니 저쪽에 손님이 큭큭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사장님 구경하러 온 모양.
“일 보세요.”
“그래. 재하 파이팅.”
사장님은 다시 일을 하러 갔다.
아무튼, 나는 내가 그려둔 작품들을 천천히 다시 훑어보았다.
‘이거, 역시 좋다.’
같은 그림 위로 조금씩 만져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예술.
따로 지칭하는 이름은 없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대중성 하나는 확실하다.
사실, 이건 내 오리지널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벽화 전문 홍보 기업, 월캣(Wallcat).
그들의 홍보 방식이었다.
월캣은 벽화 하나로 한 해에만 수백억대의 매출을 올리는 광고 회사였는데, 이들의 특징은 간단했다.
‘그림을 그리는 모습 그 자체가 홍보효과가 된다.’
매일 그림을 조금씩 만지면서 짧게는 며칠부터 몇 달 간 그림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렇게 작업하는 모습은 인터넷에 쉬이 떠돌고, 또 인증샷 찍기 좋은 광경이 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장기적인 홍보가 되는 것.
“음.”
머릿속으로 고민해 봤다.
내가 이 작품을 라온 미술관 벽에 그린다고 치자.
드라마 시청자들은 매일 조금씩 변하는 그림을 보러 찾아오지 않을까.
오늘 이 그림이 내일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또 다음주에는 어떻게 변할까.
직접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기대해 보자면, 기왕 온 김에 다른 작품들도 보러 가겠지.
‘어쨌든 관객들의 발걸음을 움직일 작품이 맞긴 하네.’
아이디어는 좋다.
아니, 좋은 수준을 넘어 확신이 들었다.
예술과 상업은 한끝 차이라고 했던가.
내 생각에 이건 맞는 이야기였다.
‘예술에서 대중성이 좀 끝내주면 돈이 모이고, 그러면 상업이 되는 거지, 뭐.’
문제라면 이걸 어떻게 해야 드라마 안에 반영시킬 수 있을까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곧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게 좋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서 임 작가와 상의를 나누고 싶다.
‘그냥 만나서 이야기 하자.’
이번 촬영을 시작한 이래, 나는 처음으로 내쪽에서 미팅을 신청했다.
*
“작가님, 천재세요?”
임 작가가 처음으로 한 말은 이러했다.
“왜요.”
“상상도 못 했어요. 와, 너무 좋은데요? 작가님께서 드라마 작가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해맑게 웃는데, 나는 심히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일부러 나 띄워주는 건가, 아니면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좋은 아이디어인 건 사실이었다.
임 작가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부분이요. 주인공이 며칠동안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어요.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렇다.
내가 생각한 전개는 이러했다.
“주인공이 어마어마한 근성 가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남들은 다 작품 끝내고 돌아갔는데, 주인공 혼자서 계속 고민하면서 엎고 다시 그리고, 엎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는 거예요.”
주인공 민호는 어떤 과제를 받았다.
벽화 그리기 과제.
[벽화는 인류 미술사상 가장 오래 된 장르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조상들이 동굴 벽에 그렸던 작품은 벽화 아니었습니까?]어떻게든 벽화로 주목받는 작품을 그리는 게 과제였다.
그런데 과 동기들은 불과 하루, 짧게는 몇 시간만에 자기 작품을 끝내고 돌아갔다.
하지만 민호는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제 기간 내내 매일 와서 그림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렸다.
그렇게 일주일.
어느새 그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명물이 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 저거 어제는 다른 그림이었는데, 오늘은 또 저렇게 변했네.]그렇다.
민호의 성실함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한 것.
본인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빈약한 상상력과 우직하리만치 뛰어난 근성이 기적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며 과 동기들은 그를 재평가한다.
“어때요? 이 정도면 작품 내적으로도 나름 괜찮은 전개고, 외적으로도 홍보 좀 되지 않겠나요?”
내가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데, 임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제 직감이 맞았어요.”
“직감이요?”
“작가님을 섭외하는 게 정답이었다니까요.”
아, 또 이야기다.
나는 반박하려다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 미술계에 혁명을 일으키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겸손하기 싫다.
그렇게 며칠 뒤.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혁명 > 끝
ⓒ 이한이™
<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이번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일이 있었다.
“촬영 시기를 조율해야겠네요.”
드라마 촬영 일정과 벽화 작업 일정을 동기화시키는 일이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작품성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촬영진 전원의 일정을 나 개인을 위해 맞춰달라고 하는 말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지.’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해야만 하는 일이다.
아니, 무조건 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임 작가님, 상상해 보십시오. 전 국민이 스트로크를 보고 촬영 현장으로 구경하러 오는 모습을, 오성 그룹이 인타임 스튜디오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하는 그 순간을!”
“······ 전 외부 인력이라 인타임 스튜디오가 잘 되든 안 되든 큰 상관 없는데요.”
아.
이렇게 반박할 줄은 몰랐네.
“그럼 조금만 각도를 틀어봅시다. 스트로크가 시청률 30%를 돌파하고 마침내 40%를 돌파하는 그 순간을! 작가님께서 명실상부한 드라마의 여왕, 아니 여제로 자리매김하는 그 순간을!”
“그건 좀 솔깃하네요.”
“그렇죠?”
임 작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뻔뻔한 부탁인가?’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살짝 찔린다.
하지만 괜찮다.
먼저 뻔뻔하게 나한테 요구한 게 누군데.
나한테 명작 내놓으라고 닦달한 게 누군데.
작가가 무슨 도깨비 요술 방망이라도 되는 줄 알아?
달라고 하면 나오게.
물론 나오기는 나온다.
적절한 예산과 시간만 주면 말이지.
‘당신들은 내게 예산은 줬지만, 시간은 안 줬어. 이런 부탁 듣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말도 꺼내지 말았어야지!’
원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 한 방은 너 한 방으로 갚는 게 정석이다.
나는 그런 억하심정을 담아서 말했다.
“이번 작품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서요. 혹시 어려울까요?”
“으으······.”
임 작가가 신음을 흘리는데, 장 PD가 입을 열었다.
“작가님.”
“네.”
“벽화 완성까지 기간을 어느 정도 잡으실 예정인가요?”
“짧으면 일주에서, 길면 이주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주······ 대충 잡아서 드라마로 4편 분량이네요. 이거 진짜 어려운 일인데.”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임겨울 작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임 작가, 어때, 할 수 있겠어? 스토리 진도랑 큰 상관 없는 내용만 보여 주면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거 임 작가 주특기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임 작가 능력 좋다고 칭찬하는 거야.”
“······.”
임 작가는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말했다.
“정 안 될 일도 아니기는 해요. 그런데 사실 방영하다 보면 원래 있던 분량도 줄어드는 게 정석이잖아요. 여기서 오히려 늘리라고 요구하시다니. 작가님,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게 다 저희 성공을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JH 디자인과 인타임 스튜디오와 오성 그룹 모두의 영달을 위한 선택입니다.”
나 하나만 좋자고 이러는 건가.
같이 힘들자고 이러는 거지.
그 말에 장 PD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몰아쉬더니 말했다.
“들었지? 우리 이거 실패하면 안 돼. 작가님, 일단 최대한 맞춰는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작가님께서도 결과물로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저 인간 이재하,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믿습니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불합리한 프로젝트가 첫발을 내디뎠다.
매우 불안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