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76)
두 번 사는 미대생 76화(76/93)
*
‘와, 이게 되네.’
솔직히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다.
10화 남짓에 시청률 30%를 찍어 버리다니.
어마어마한 성장세다.
‘시작할 때 18%에, 자화상 에피소드 때 25%를 찍었지. 그리고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들어가자마자 30%라. 이거 말 되나?’
내가 드라마 애청자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별로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겁기 짝이 없었다.
[심상찮다.] [솔직히 수요일은 스트로크와 나머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전설이 된다] [솔직히 미술관 찾아가고 처음에 무슨 짓을 하나 되게 실망했는데, 그게 다 큰 그림인 줄은 몰랐다] [소름 쫙 돋았음.]아직 끝 아닌데.
이제 막 시작인데.
‘이거 나중에 진짜 시청률 더 오르는 거 아니야?’
당황스럽다.
나는 임 작가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작가님, 이게 원래 말이 됩니까?”
“······ 아니요.”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눈치로 중얼거렸다.
“원래 KBT는 주말드라마가 강세고, 수목 드라마는 버릴 때가 많았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요.”
“수목 드라마 버려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래도 수목 드라마는 다른 방송사랑 시간대가 겹쳐서 경쟁자가 많거든요. 그래서 적당한 거 내보내고, 진짜 야심작은 주말에 보낼 때가 많았죠.”
가만.
그 말은 설마.
“다른 방송사들은 다 울상이겠네요.”
“네, 스트로크에 시청자들 다 빨려서 죽으려고 하고 있을걸요.”
“······.”
미안하다.
의도한 건 아니다.
애초에 의도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이걸 의도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작가님 덕분이에요.”
임 작가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스트로크가 지금 성장세가 이어진다면 올해 작품 중 최고 히트작 반열에 오를 거예요. 아니, 이미 올랐어요.”
“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전국의 젊은 시청자들 수요를 전부 빨아들였다는 말이 있어요. 그쪽에서는 아예 당연하게 보는 수준이 됐다고 하네요. 과제도 안 하고 모여서 드라마만 본다나. 요즘 사람들이 수요일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스요일이요?”
“네, 스트로크 요일, 줄여서 스요일이요.”
요즘 한창 유행을 탄 말장난이었다.
원래는 인터넷 유저들이나 쓰던 게 예능에서 언급되면서 유명해졌다나.
아무튼, 지금 시점에서 스트로크는 수목 드라마의 절대강자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주역이 나였다.
‘세상이 어찌 될는지.’
나는 대충 벤치에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요즘 몸값이 너무 올라서 힘들어요.”
“몸값이요?”
임겨울 작가가 의아해하는데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감이 너무 심하게 늘었어요. 예전에는 벽화 주문이 한 달 정도까지는 밀려도, 그 이상 가는 경우는 잘 없었는데······.”
“지금은 좀 바뀌었나 봐요.”
“네, 어디 보자 요즘 대충 어디까지 갔더라.”
나는 대충 머릿속으로 기억을 굴려 봤다.
그리고 말했다.
“올해 초여름까지는 일정이 다 밀려 있네요.”
“······ 세상에.”
앞으로 반년 동안 일감이 꽉 찼다.
내가 직접 작업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 시키는 거라고 미리 말을 했는데도 그렇다.
‘이 시대의 한국 드라마, 정말 강하구나.’
30%면 동시 시청자 천만 명을 아득히 넘긴 수치다.
전생에 스트로크 흥행 영향을 제대로 받았을 작가들이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지 감이 온다.
작품 하나로 평생 돈 걱정 안 하게 됐을 정도라고 하니, 필시 어마어마했겠지.
‘가만,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만 끝낼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한국의 미술계의 문화를 바꾸느니 뭐라느니 했었지.
그래.
마침 딱 좋은 방법이 있지 않나.
인프라는 갖춰져 있고, 여기에 홍보만 하면 된다.
‘왜 지금까지 생각을 못 했지?’
오히려 지금까지 왜 가만히 있었나 싶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임 작가에게 물었다.
“저기 작가님.”
“네.”
“뭔가 제대로 할 방법이 떠올랐어요.”
< 스요일 > 끝
ⓒ 이한이™
< 할 일 없는 백수 많아요 >
이런 사자성어가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세 명의 사람이 모여 거짓말로 호랑이를 만든다는 말이었다.
‘한 명이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안 믿고, 두 명이 말해도 안 믿었다. 하지만 마침내 세 번째 사람이 나타나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지.’
위대한 사기극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마음 한뜻으로 거짓말을 하면 제아무리 허무맹랑한 말이라도 먹힌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소수만 통제하면 나머지 전원에게도 얼마든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지.’
마을 사람 전부를 속이기에 세 사람이면 충분하다.
현실에서도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30%가 사기를 잃으면 전투 수행이 불가능해진다거나, 전 국민의 10%를 고객으로 확보하면 전 국민을 상대로 장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거나.’
일부가 전체를 지배한다.
말이 길어졌는데, 요는 간단했다.
시청률 30%를 확보한 시점에서 내 메시지는 전 국민에게 닿는다는 말이었다.
“30%가 말이 30%지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작게 크게 관심을 주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임 작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작가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이 너무 당연한 말이라 당황스러운데······.”
“네, 맞아요. 당연한 말을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스트로크가 30%를 달성했죠?”
“그렇죠.”
“이만한 시청자를 확보한 순간, 이미 전 국민이 미술 문화에 관심을 품게 된 건 기정사실이라는 말이에요.”
“아.”
임겨울 작가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웃으며 말했다.
“이미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거죠. 앞으로는 전 국민이 스트로크에게 영향을 받을 거예요.”
실제로 그러했다.
드라마가 대중에게 영향을 준 사례는 차고도 넘쳤다.
한의학 드라마가 대박을 쳤더니, 전국 한의학과의 입결이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드라마가 대박이 터졌더니, 새로 개업하는 식당이 확 늘었다.
이태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입소문을 탔다.
전국 남자들이 주인공의 밤톨 머리를 따라 했다.
천재 바둑 기사가 드라마 속에 주인공으로 나왔다.
전국 바둑 기원에 활기가 돌았다.
같은 반응이 이미 [스트로크!]의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나타나고 있었다.
[드라마가 방송을 탄 뒤부터 미대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확 늘었습니다. 종일 입시 상담 때문에 입이 아플 정도군요.]학원가가 불타올랐다.
아마 미대 입결이 확 올라갈 터.
[저희 요즘 일정 꽉 찼어요. 작가님 때문인 거 아시죠?]갤러리에 손님이 갑자기 늘었다.
이 흐름이 계속 이어진다면 시장에 돈이 풀릴 터.
그럼 예술인들에게도 힘이 붙는다.
계속해서 선순환이 반복된다.
JH 디자인에 의뢰가 많아진 것도 처음에는 방송을 탄 효과라고 생각했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연쇄 효과의 한 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시청자들의 주목은 차고 넘치도록 끌어모았어요.”
나는 입을 열었다.
“미술을 퍼뜨리는 거 좋죠. 이제부터는 이렇게 생긴 관심을 어떻게 유도해야 할지가 관건이에요.”
“······ 뭔가 생각하시는 게 있나 봐요?”
“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앞으로 내 몇 마디가 한국 미술계의 문화를 바꿀 수 있다.
다소 오만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부터 이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한테는 정말로 한국 미술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
다름 아닌 홍경희 사장이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를 과대평가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어림도 없지. 미디어로 먹고사는 사람이 그 정도도 몰라서 아무 말 잔치를 했다고?’
아니다.
그녀는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했다.
오히려 내가 내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한국 문화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
그 분기점에 올랐다.
‘그래, 임요환이 세계 이스포츠 문화를 바꿨잖아. 나라고 못할 게 어디 있겠어.’
사람이 자기 말을 의심해서야 될 일도 안 된다.
그 게임이 무시당하던 시기에조차 청와대 초청에 프로게이머 복장으로 참석한 임요환처럼, 나도 내 행동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 미술 문화의 비전은 이래요.”
나는 그런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일부 엘리트 미술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문화가 아니라, 전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문화로 발전해야 해요.”
“생활 체육처럼이요?”
“네. 미술의 저변을 넓히는 거죠.”
임 작가의 예시가 좋았다.
아참.
바둑도 스포츠다.
“저기 고고하기 짝이 없는 미술을 이제 일반인의 생활 반경까지 끌어내리는 거예요. 캘리그라피, 서예, 도자기, 조각, 꽃꽂이, 핸드메이드 악세사리 등등 뭐든 좋아요. 생활 속에서 당장 손을 뻗거든 그 자리에 예술이 있게 하는 거죠.”
미술을 생활 속에 녹여내 버리자.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다.
왜냐, 나는 미래의 미술 문화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미술 문화와는 달리, 미래의 미술은 힐링이라는 기치 아래 가벼운 취미 생활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인터넷에 자기 작품을 보여주기 너무 좋은 세상이 됐지. 또 그렇게 힘을 얻어서 판매하는 사람도 많아졌어.’
비록 소소하지만 좋다.
그런 소소한 토양에서 높은 나무가 자라는 법이다.
옆 나라 일본만 봐도 그러하다.
화려한 미술 산업의 발전 밑에는, 생활의 영역까지 내려온 미술의 뒷받침이 존재했다.
‘동네에서 미술 행사가 발에 차일 만큼 널려 있지.’
그래.
이것도 일종의 트렌드였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거.
트랜드를 가져와서 적당히 버무려다가 팔아먹는 거.
지금이라고 못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한국이라고 안 될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이 지금이다.
“저희가 생각하는 문화의 미래를, 드라마 화면을 빌려서 전 국민에게 보여줘요.”
“대학생들끼리 막 이것저것 만들어서 장사하는 모습이요?”
“정확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굳이 현실적인 대학 생활일 필요는 없어요. 일반 대중이 보기에 매력적이면 돼요. 악세사리를 만들어서 인터넷 쇼핑몰을 열어도 좋을 것 같아요. 미술 교실을 운영하거나 도자기 공방을 열어도 좋고, 옷도 좋죠. 예술로 뭔가를 한다는 걸 보여주면 그만이에요. 당장 하고 싶은 그런 거요.”
굳이 현실적인 필요는 없다.
당장 실제 미대생의 생활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시청자가 보고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면 될 뿐이었다.
“재미는 있겠네요.”
임겨울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TV에서 그런 걸 봤다고 한들 현실에서 따라 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있을 텐데.”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원래 미술이 배우기도 어렵고, 또 배울 곳도 없지.
이 시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교육도 인프라가 받쳐줘야 하든 말든 하는 법이니까.’
지금 이대로 멋진 미술 문화를 보여줘 봐야, 모방할 환경이 안 받쳐주면 못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사실을 몰라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있어요.”
지금까지는 추상적인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현실적인 계획이다.
나는 그녀에게 던지듯 말했다.
“작가님, 혹시 헤븐즈 도어라고 아시나요?”
“······ 당연히 알죠?”
임겨울 작가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거기 갤러리랑 카페랑 동시에 하는 프랜차이즈잖아요. 작가님이 직접 디자인한.”
“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헤븐즈 도어에서 실제로 드라마 속에 등장한 클래스를 운영하는 거예요.”
“클래스요?”
“네, 수업.”
그녀가 살짝 놀라는데 내가 말을 이었다.
“캘리그라피가 드라마 속에 등장했다고 쳐요. 아무래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꽤 있겠죠. 최소한 어렵다는 이유로 피하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 글씨를 못 쓰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하지만 배우고 싶어도 가르쳐 줄 사람이 없겠죠.”
“거기서 헤븐즈 도어가 등장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헤븐즈 도어에서 전문가를 초청해서 클래스를 열고, 실제로 배울 기회를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는 거죠. 어때요. 드라마 속에 등장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면 한 번쯤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헤븐즈 도어를 단순히 카페로 규정짓지 않는다.
더 넓게 본다.
커뮤니티 공간.
함께 소통하는 공간으로 이용하는 게 어떨까.
‘외로운 현대인들은 소통을 갈구하고, 미술만큼 서로 소통하기 좋은 문화가 없어.’
나는 미술이야말로 또 하나의 대화라고 생각했다.
만화 속 검사들이 서로 칼을 맞대면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했듯, 미술로도 서로 교감할 수 있다.
아님 말고.
‘어차피 미래의 카페에서는 이런 종류의 클래스가 넘쳐났어. 특히 홍대 주변에서는 널렸지. 지금이라고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그 문화를 지금 이 시기에 꽃피운다.
더더욱 단단하게.
“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해 봐야 알겠네요.”
내 설명을 전부 들은 임겨울 작가는 아직 확신까지는 안 생기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다.
나야 저걸 이미 미래에서 겪어 봤으니까 가능성이 있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임겨울 작가는 지금 시대의 사람이다.
본 적이 없으면 확신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괜찮다.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안 받아들이면 그만이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일단 보여주면 그때부터는 먹힌다.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할 거예요. 그렇죠?”
“일단 전 그런 게 집 주변에 있다면 한 번 가보기는 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헤븐즈 도어인가 거기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선뜻 받아 줄까요? 또 작가님들이 거절하실 수도 있고요.”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원대한 계획을 꾸려 봐야, 저쪽에서 안 받아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그게 말인데요.”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할 일 없는 백수 많아요.”
“······.”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임 작가가 눈가를 실룩거렸다.
내 말에 짜게 식은 눈치.
하지만 진짜로 예술가의 태반은 백수인 걸 어떡해.
“백수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헤븐즈 도어는 국내에서 가장 방대한 예술인 인프라를 가지고 있어요. 예술가들에게 전시의 기회만 주는 게 아니라, 작업 공간과 업무 주선까지 진행하고 있죠. 이렇게 헤븐즈 도어에서 확보한 작가의 수만 세자릿수가 넘어요.”
자세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경진 회장 본인이 넘는다고 했으니까 넘는 거겠지.
“그리고 그렇게 모은 작가들의 대부분은 시간이 남아돕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단순히 꾸며낸 확신이 아니라, 진정한 확신이었다.
작가들은 대부분 할 일이 없다.
말 그대로 일이 없다.
그래서 논다.
“그러면서 또 돈은 없어요. 물론 돈 많은 예술가도 꽤 있죠. 하지만 예술로 돈 번 예술가들은 거의 없어요.”
“그 사람들한테 일자리를 주자는 건가요?”
“예,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사람 자체는 넘쳐납니다. 아마 분야별로 말만 하면 몇십 명씩 튀어나올걸요?”
예술인들은 대부분 인맥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컸다.
이 시대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도자기를 잘 아는 한 명과 인맥을 확보하거든, 그의 주변의 도자기 예술인들이 호박 넝쿨처럼 딸려 들어온다.
결국, 처음 한 걸음을 어떻게 내딛느냐의 문제인데, 이 부분은 헤븐즈 도어가 완벽하게 해소해 줄 수 있었다.
‘마침 오 회장님도 사업 확장에 욕심이 강한 것 같았지.’
사업 시작한 지 아직 2년도 안 지났는데 점포가 서른 개 가까이 된다.
전생의 그 카페 프랜차이즈의 황제 오경진이 맞다.
아마 기회만 있으면 전생처럼 점포를 천 단위로 꾸릴 생각도 있을 터.
‘계기만 주면 돼.’
그 계기를 내가 줄 수 있다.
줄 거다.
“저, 그 회장님은 작가님이 설득하실 수 있는 거 맞죠?”
“네, 아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일단 이야기를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길 찾는 거고요.”
“알았어요. 그럼 다 좋은데요.”
임겨울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우리 이거 원래는 24화에서 완결 내려고 했던 거 아시죠?”
“네.”
“작가님이 말씀하신 걸 다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장 PD님도 설득해야 하고, 앞으로는 바빠지겠어요. 배우분들도 불만이 나올 수 있고.”
그녀는 한숨을 푹푹 몰아쉬는데,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청률이 30%잖아요.”
“······.”
“그 왜, 옆 동네 무슨 드라마는 12화 미니시리즈로 시작해서 지금 120화째 방송하고 있다던데. 작가님도 한 번 도전해 보시죠.”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임 작가가 시무룩해졌다.
< 할 일 없는 백수 많아요 > 끝
ⓒ 이한이™
< 호혜적 이타주의 >
시간이 흐른다.
그에 맞춰 쌓아 두었던 드라마 방영분도 공개되었다.
“어떻게 해내기는 해냈네요.”
TV 스크린으로 결과물을 확인함과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2주 동안 이어진 공동 작업 및 촬영.
실로 힘들었던 일을 마쳤다는 생각에 뿌듯한데, 옆에 앉은 장 PD가 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과만 좋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너무 소리를 질렀기 때문.
아예 사람이 팍 늙어버린 모습이었다.
‘고생이 많으셨네.’
장 PD가 이번 장정의 최대 공로자였다.
무려 4화 가까이 이어진 벽화 에피소드를 촬영하는 동시에, 그는 장면을 쪼개서 여분 한 편을 더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거의 레고 조립하는 수준인데.’
촬영해둔 분량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건 감독들의 기본 소양이라지만, 이걸 드라마 방영하는 와중에 실시간으로 해내는 사람이 또 얼마나 있을까.
덕분에 편집팀도 함께 죽어라 갈려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마지막 한 편은 밥 먹는 시간도 아꼈다나.
‘시청률이 잘 나와서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내가 어디 어두운 산속에 묻혔을 수도 있겠어.’
요즘 편집팀 안색이 안 좋던데, 덕분에 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찔리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편집팀 직원분들이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예.”
“······.”
장 PD는 부인하지 않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한 번쯤 부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힘도 없는 모양.
하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그만한 노고를 보답하고도 남음이었다.
[현실에서 반전 준비한 거 진짜냐?]작중 반전이 공개된 순간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네] [나 지금 진심으로 소름 돋았어] [실시간) 부모님들 일어나서 박수침] [작가들이 괜히 작가가 아니구나] [스트로크는 정말 내 인생 드라마다] [지금까지 직업 스킨만 씌운 드라마랑은 다른 듯, 확실히 미술 작업 비중이 크다] [남주가 잘생겼고 여주는 쿨하고 서브남주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 [후배한테 개 발렸네. 나였으면 자퇴했다] [이재하 그는 정말 천재인가?] [피카소 패배 선언]화끈하다.
지금까지도 반응이 뜨거웠지만, 이번 화는 유독 더하다.
이제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체크하러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인터넷만 켜면 스트로크 이야기로 가득했기 때문.
[이번 주 스트로크는?] [제작자 오피셜 인터뷰 공개!] [전문가가 들려주는 스트로크 속 등장하는 작품 이야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어차피 어딜 가나 스트로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멀리 찾아볼 것도 없다.
‘방학이라 다행이야.’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드라마 방영과 동시에 좀 너무 이름값이 올랐다.
이제는 정말 학교 나가지도 못하지 않을까.
원래부터 방학만 되면 이상한 짓을 하고 돌아올 때가 많기는 했지만, 이번 방학은 유독 더했다.
이 상태로 3학년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만 해도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진짜 자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기왕이면 졸업장은 따고 싶은데.
아무튼, [스트로크!] 최신화는 30%를 조금 넘은 상태로 고공행진을 이어나갔다.
이제 시청자들의 기대치도 하늘 끝까지 오른 상황.
그리고 나도 직감했다.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가 됐지.’
본격적인 큰 그림을 그릴 때가 왔다.
*
임 작가와의 미팅 자리.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하게 말해둘게요.”
“네.”
“이번 작품의 피날레를 [아버지]로 하자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작가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임 작가가 싱글벙글 웃었다.
아무래도 그간 고생했던 일이 끝나니까 좀 살만한 모양.
‘미안하지만, 아직 쉬실 때가 아닙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마음속으로 3초 정도 사과했다.
3, 2, 1.
됐다.
이제 할 말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 스트로크 다음 에피소드로 카페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했잖아요.”
“그렇죠.”
“망해가는 카페를 찾아내서는, 거기에 주인공과 동기들이 함께 전시를 열어서 흥행시키는 내용이었죠.”
“네, 맞아요.”
이미 다음 주 대본도 거의 다 나와 있다.
당장 촬영만 시작하면 된다.
그 덕에 임 작가는 세상만사가 행복해진 눈치였다.
중간에 벽화 작업을 하며 고생을 했다 정도지, 이제부터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작업만 남았으니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물었다.
“작가님, 저희 다음 에피소드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이죠?”
“음, 장 PD님이랑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텐데 늦어도 모레부터는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며칠 안 남았군.
강행군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우리가 굳이 미팅을 가지고 있는 건, 아직 내가 구체적인 작품 기획을 덜 마쳤기 때문이었다.
이번 드라마의 핵심은 내 작품이다.
그러니 내 작품 제작 기획 없이는, 대본 집필을 끝마치기도 힘들다.
‘대본 집필은 아무리 늦어도 촬영 전 주까지는 끝마치는 게 좋다고 했지.’
드라마 촬영 현장의 상식이었다.
첫 방영 전까지 가능한 한 4화에서 5화까지의 분량을 마쳐 둔다.
방영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저장해 둔 분량을 갉아먹더라도, 촬영까지 일주일의 기간은 두도록 한다.
이게 심리적인 마지노선이었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놔도 막상 방영을 시작하면, 점점 대본이 줄어 나중에는 촬영 전날 대본을 넘기거나 현장에서 쪽대본으로 주고받는 경우가 생겼다.
‘심하면 핸드폰 문자로 한두 줄씩 툭툭 던진다고 했나?’
이러면 사고가 안 생기기가 어렵다.
‘드라마 작가도 안 보이는 곳에서 치열하게 싸운다는 거겠지.’
더욱이 이번에는 내가 중간에 끼었다.
임 작가가 큰 틀에서 대본을 써 두면, 여기에 나와 함께 상의하며 마지막으로 다듬는다.
그리고 다음 주 현장에서 촬영한다.
나는 그렇게 남긴 일주일 사이에 작품을 제작한다.
이게 이상적인 흐름이었다.
그래.
이상적이란 말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이상이니까.
‘다시 한번 묵념.’
나는 임겨울 작가를 위해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기도를 해 주었다.
3, 2, 1.
끝.
이제 시작하자.
나는 아마존 늪을 건너는 카피바라의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본 다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 네?”
임겨울 작가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마치 현실에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침공한 광경을 목도한 것만 같은 모습.
“엎자······ 고요? 갑자기?”
“아예 엎자는 건 아닙니다.”
“그럼요?”
“반만 엎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그거 같은데······ 사람을 반만 죽인다고 안 죽는 거 아니잖아요.”
웬 질 나쁜 농담이냐고 따지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나는 할 말을 이었다.
“작가님, 제가 이번 작품을 만들다가 생각한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렇게 잠시.
임 작가는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작가님.”
“네.”
“보통 드라마 대본 한 편을 쓰는 데 보통 얼마나 걸리는지 아시나요?”
“일주일에 한두 편이니까, 좀 오래 걸리겠죠?”
“아니에요. 제가 진짜 진짜 빨리 쓰는 편인데, 하루 10시간씩 꼬박 달라붙어도 일주일에 완고 두 편 분량 쓰기가 힘들어요.”
“······.”
힘듦이 사무친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이번 벽화 에피소드 때문에 있던 비축도 날려 먹고, 사실상 아예 새로 쓰면서 죽을 뻔했죠. 그래도 전 사람답게 살려고 가까스로 일주일 여유를 만들었어요. 전 글 쓰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임 작가님 고생하신 거 제가 잘 알죠.”
“아는데 그러세요?”
임 작가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렇게 가까스로 확보한 일주일 여유인데, 그걸 엎고 다시 쓰자고요?”
처량하다.
많이 찔린다.
하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엎어야만 할 정도로 무조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하진 않잖아요. 저 진짜 생명을 갈아가면서 일했는데.”
“시청률 30%.”
“아무리 시청률이 나와도 그렇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녀가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이건 심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 의견을 무시해도 그만인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자문은 자문일 뿐,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다.
그냥 맘에 안 드는 의견은 못 들은 채 그녀 마음대로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내 팬이라서 그렇군.’
나라는 작가에게 무한한 호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타고난 예술에 대한 사랑과 문화계를 개혁한다는 자부심까지.
또 몇 년을 기다린 예술 드라마 촬영까지.
그녀가 무리한 일정을 어떻게든 소화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요인이 복잡하게 맞물려 화학적인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과가 아니야.’
화학 작용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다.
적절한 보수와 시간만이 작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
여기서 임 작가는 시간을 빼앗겼다.
그래서 고통스러워하는 거겠지.
아마 돈을 더 챙겨준들 사람이 변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 아는가.
보수라는 게 꼭 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임 작가님.”
나는 입을 열었다.
“실화 기반으로 촬영합시다.”
“······!”
그 순간이었다.
임 작가가 눈을 크게 떴다.
“실화······ 기반이요?”
“네, 제 이야기를 그냥 팍팍 가져다가 씁시다. 헤븐즈 도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도 작중에 써먹고, 그냥 막 가져다가 써요. 다 알려드릴게요. 궁금한 거 많았죠? 제 사생활까지 모조리 다 알려드립니다. 주변 사람들도 다 필요한 만큼 소개해드릴 테니까 인터뷰 막 하세요!”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의 가장 큰 절망을 맛보는 듯했는데, 이제는 좋으면서도 어찌할 줄 몰라서 눈만 깜빡거린다.
느낌이 왔다.
신나셨구나.
‘하긴, 아이돌 팬한테 아이돌 당사자가 자기 썰 풀어 줄 테니까 만화로 그려도 된다고 하면 신나서 어쩔 줄 모르겠지.’
지금 임 작가도 사실상 같은 상황 아닐까.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논다고 말해도 좋다.
맞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을 두고 서로 수요와 공급이 맞을 때는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호혜적 이타주의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희생이라고 하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우리 임 작가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나는 조금 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듯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제가 다 도와드립니다.”
“그래도 실화 기반 에피소드라면 장 PD님이 반대하시지 않을지······ PD님도 갑자기 노선 변경하면 위에서 깨질 텐데······.”
그녀가 일말의 주저를 하는데,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제가 같이 설득할게요.”
“작가님이요?”
“저 이제 발언력 좀 되잖아요? 여차하면 주변 사람들 각서까지 싹 다 받아올 수 있습니다.”
실화는 필요하다.
왜 필요하냐 하면,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실화 기반 각색이라면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가상 속 스포츠 선수의 일화와 진짜 스포츠 선수의 일화는 엄밀히 다르지.’
지금 나라는 사람에게는 어지간한 연예인을 한참 넘는 이목이 쏠려 있다.
이 이목을 현명하게 활용하려면, 실화만 한 게 없다.
헤븐즈 도어의 창립으로 이어진 실화.
그걸 제대로 풀자.
‘이만한 디테일은 또 없다.’
나는 대충 그런 마음가짐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전설이 될 겁니다.”
“······.”
반응이 없다.
내가 말해놓고도 좀 너무 나갔나 싶은 참인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틀.”
“이틀이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데, 그녀가 말했다.
“이틀이면 한 편 쓸 수 있어요.”
“······!”
사실상 동의.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일을 일로 하려면 힘들어도, 일을 취미로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나는 그녀의 이번 작업을 취미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이제부터는 달리기만 하면 된다.
임 작가의 하늘 끝까지 올라간 뽕이 가라앉기 전에, 최대한 달리면 된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앉아 보세요. 제가 지금부터 끝내주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테니.”
< 호혜적 이타주의 > 끝
ⓒ 이한이™
< 성실한 사람 >
실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가 왜 힘을 얻는가.
이 일에 관해서라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세상 모든 이야기는 있을 것 같은 이야기라서 힘이 있는 거야.’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가 원래 그러했다.
어떤 이야기를 보아도 몰입하며 상상하고 내 옆에 있을 것처럼 받아들인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이상, 현실에 기반해서 사고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가상의 작품을 보더라도, 현실과의 공통점을 따라 즐기는 게 인간이었다.
여기서 실화가 가진 힘이 두드러졌다.
‘사실이다.’
그냥 사실이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나와 같은 지구상에,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살아갔던 사람이 있다.
그런 사실을 즐기면서 감동하고 전율하는 게 실화의 힘이었다.
‘따로 고생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홍보력을 깔고 간다는 장점도 있고.’
천만 명의 팬을 보유한 록밴드가 있다.
그 밴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는데, 안 보겠는가?
쌀알을 곱씹듯 꼼꼼하게 봐야지.
덕분에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실화 기반 영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포드 페라리, 보헤미안 랩소디, 캐치 미 이프유 캔, 엽문 등등 실화는 그 자체로 엄청난 힘을 가지지.’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다.
엽문.
중국의 전설적인 무술가를 소재로 한 영화로서, 무려 6부작이나 나올 정도의 히트작이었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이게 실화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아니, 그럴 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였다.
영화만 보면 엽문이 중국에서 고통받으며 살다가 일제에 저항해서 싸운 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실제 역사에서 엽문은 일본 제국이 아닌 자국 정부를 피해서 홍콩으로 피난했다.
처음부터 일본인 경찰들과 싸웠던 이야기 따위는 없었다.
엽문이라는 인물이 등장할 뿐, 실제 이야기와는 90% 다른 허구.
그게 엽문이라는 영화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지.’
관객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라고 생각하면서 즐겼고, 실제 역사라고 생각하면서 즐겼으니.
‘뭐, 어차피 현실이랑 영화가 조금 다른 건 감수하면서 보는 거고.’
결국에 중요한 건 실화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점이다.
실제로는 허구가 깔려 있더라도 큰 상관 없다.
이 부분에서 나도 생각했다.
‘드라마에 내 이야기 중 10%를 녹여서 쓰고, 실화 기반으로 각색했다고 홍보한다면 어떨까.’
아마 무조건 이득 아닐까.
하물며 헤븐즈 도어라는 프랜차이즈의 홍보 효과까지 동시에 누릴 수 있다.
그래.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 안 할 이유라고는 단 한 점도 없었다.
“저기, 작가님.”
임겨울 작가가 입을 열었다.
“네.”
“대본을 고치는 건 좋지만, 현실적으로 아예 엎는 데는 무리가 있어요.”
“그런가요?”
“네, 어찌 되었든 방송국과 미리 상의를 마친 시놉시스가 있기도 하고, 또 전체적인 스토리 흐름을 고려해야 하거든요. 아까는 좀 흥분해서 너무 나간 감이 있지만······ 아무튼 그래요.”
그녀가 눈을 꼭 감은 채로 말했다.
머리가 식고 나니 완전히 실화 베이스로 쓴다는 게 무리라는 사실을 느낀 모양.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나도 이 정도는 미리 짐작했고.’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실화라고 느끼는 게 중요하지, 정말로 실화를 쓸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나도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말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실화라는 뉘앙스만 전달할 수 있으면 돼요.”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드라마로 써먹어야 하는 이상 많이 잘리기는 할 거예요. 원래 대본에서 크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어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임겨울 작가는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으, 작가님한테 민감한 이야기를 다 들어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실례지만, 사실 저는 지금도 실화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구성하는 건 반대하는 편이에요.”
“······.”
된다면서.
갑자기 왜 안 돼.
그렇게 살짝 어처구니가 없으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기 힘드실 수도 있지만, 이게 뒤에서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사정이요?”
“그, 저희 장 PD님이 그 실화는 안 된다고 질색하셨잖아요.”
“하셨죠.”
“그 일 때문이에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까 실화 드라마랑 관련된 사건이 뭐가 있다고 했었지.’
내심 궁금하던 참이었다.
이 사람들이 왜 실화를 거부하나.
원래 드라마라면 실화 베이스로 만든 작품들 많지 않나.
무슨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재밌는 소재를 버리고 사서 고생하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마침 기회가 돼서 물어보니,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예전에 인타임 스튜디오에서 만든 드라마 중에서 [거리의 주먹]이라는 작품이 있었거든요.”
“네.”
“혹시 김두한이라고 아세요?”
“아.”
김두한.
한국인이라면 모르기 힘든 이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싸움으로 유명한 사람이요.”
“네, 좋은 말도 있고, 나쁜 말도 있는 사람이죠.”
논란이 많은 사람이었다.
흔한 정치 깡패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나름대로 일제에 저항한 영웅이라는 사람도 있었지.
‘원래 이런 이야기는 깊게 따지면 손해 본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어서 바로 본론을 물어봤다.
“아무튼, 그 사람이 왜요?”
“그게 김두한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워낙 많았잖아요.”
“그렇죠.”
“이게 문제였는데요.”
임 작가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저희 드라마에 등장한 사람 중에서 김두한의 머나먼 부하쯤 되는 사람이 있었나 봐요.”
“부하요? 그게 누군데요?”
“이름도 잘 모르겠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튼 있었데요.”
그래.
아무튼 있었다고 치자.
그래서 그 사람이 뭔가 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임겨울 작가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 사람 후손이 자기 조상님 모욕했다면서 스튜디오로 찾아와서 칼부림 부렸어요.”
“······.”
아, 칼부림.
그렇구나.
진짜로 깡패가 찾아왔구나.
‘어떻게 해야 전개가 이렇게 빠지지?’
나는 기대했던 뒷사정이 상상 이상이라 당황하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경찰 부르니까 얌전해지더라고요.”
이야.
여기까지 깡패랑 똑같네.
나는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부림 때문에 실화 기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였군요.”
“네, 아무래도 피곤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지만, 나는 내친김에 더 물었다.
“그럼 법적인 문제는 없는 거고요?”
“네, 애초에 실존 인물을 다뤄도 사회적 흐름과 작품의 주제의식에 큰 문제가 없으면 명예훼손에 걸리지도 않아요.”
생각했던 것보다는 법이 유한가 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었다.
“그럼 저희는 큰 문제 없지 않을까요? 칼부림을 부릴 만큼 문제가 될 일도 없고, 작중에서 특별히 나쁘게 묘사될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아마 그렇기는 할 거예요.”
“문제가 따로 있을까요?”
“음, 일종의 불문율 같은 거죠. 문제 되기 싫으니까, 불씨를 남기지 말라. 왜, 오이밭에서 신발 끈 고쳐 신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럼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이 맞죠. 그런데 그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이 조금 윗사람이라서 그래요.”
“어느 쪽인데요?”
“그게요.”
그녀가 헛기침을 뱉더니 말했다.
“KBT 드라마본부 본부장이요.”
“······.”
와.
조금 높은 사람이었네.
높으신 분이 싫어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나는 쉬이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내 원대한 계획 속에는 실화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한 실화 바탕으로 해 보고 싶기는 한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참이었다.
아.
뭔가가 떠올랐다.
“그 사람이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제가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작가님이요?”
임겨울 작가가 깜짝 놀라는데, 나는 그냥 밀어붙이려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라도 나눠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 음.”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방송국 구조는 아시죠?”
“장 PD님 위로 국장이 있고, 또 본부장이 있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아마 요청한다고 해도 바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한 번 제안만 해 보는건요?”
“거절당해도 저는 몰라요.”
“네.”
그렇게 어설프게 대본 이야기를 끝내며 미팅 자리가 끝났다.
그날 저녁.
나는 장 PD가 분노했다는 말과 함께 어찌 되었든 허락은 떨어졌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