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1)
두 번 사는 미대생 81화(81/93)
*
내가 어떻게든 뉴욕에 도착하고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정보 퍼지는 걸 조심해야겠구나.’
작가 이재하가 미국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여기서 뭔가 새로운 전시를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니면 외국 무슨 유명 인사의 초청을 받았다니, 무슨 사업을 벌인다는 말도 있었다.
다양하다.
그래서 심하윤 대표와 상의한 끝에, 차라리 대놓고 공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작가 이재하, 뉴욕 뉴 뮤지엄에서 전시를 가지기로 해] [작품의 테마는 스트로크? 아니, 작가 이재하 그 자체] [미국 진출에 의의를 두는 것 아니야. 그저 좋은 갤러리에 좋은 작품을 걸고 싶을 뿐] [작가 본연의 자세를 중시하겠다고 밝혀]그로브 170이 내 대변인처럼 활동해 주었다.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그로브 170 소속은 아닌데, 거의 소속 작가 같은 느낌이네.’
암묵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심 대표도 처음에는 어색해하더니 이제는 퍽 능숙해졌다.
지금도 그녀와 현지의 어느 카페에 앉아 있었다.
업무 문제로 우리보다는 그녀가 먼저 도착했기 때문.
곧 심하윤 대표가 말했다.
“작가님도 슬슬 조심하셔야 해요.”
“왜요?”
“안티가 붙기 좋은 시기거든요.”
“작가한테도 안티가 붙나요?”
“붙기 좋죠.”
그런가.
아직 잘 모르겠는데.
심하윤 대표가 노트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원래 안티가 붙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음.”
“초등학교 때 반에 사십 명 있으면 그중에 이유 없이 사이 나쁜 친구도 한둘은 있잖아요. 그런 거예요. 팬이 만 명이면 안티도 최소 백 이백 명은 붙는 거죠.”
“이유 없는 안티라······.”
“작가님 같은 경우에는 요즘 슬슬 그런 말이 나오고 있어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스타가 아니냐, 다 마케팅 아니냐, 그런 거죠. 예술이잖아요. 작가님이 어떤 생각으로 예술을 하든, 조금만 악의적으로 보면 까이기 좋아요. 피카소도 겉멋에 찌들었다고 까이는 세상인데요.”
썩 복잡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뭐, 그런가 보네요.”
“작가님은 괜찮으신가 봐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 사람들이 절 싫어한다고 제가 뭐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해 줘야 하는 이유도 없고.”
지금의 나는 멘탈이 썩 튼튼했다.
왜냐.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제일 멘탈 튼튼한 사람이 내 아군이기 때문이었다.
‘한설 선배가 인터넷에서 자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겠지. 너 알아서 열심히 키보드 두드려 봐라, 그래 봐야 내 솜씨가 줄어들기라도 하냐. 네 손만 아프지.’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싫어하는 사람을 굳이 이길 필요는 없다.
이겨 내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다.
꼭 이런 부분에서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렇다면 정답은 자명했다.
그냥 신경을 안 쓰면 됐다.
‘좋아, 이제 끝.’
나는 안티들에 대한 생각을 고이 접어서 가슴 속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까 짜증이 났다.
‘나는 한설 선배가 아니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던 고민을 다시 꺼내서 찬찬히 생각해 봤다.
‘내가 운빨이라고?’
그래.
그 부분은 인정한다.
운이 좋았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작품을 비웃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이를 으득 갈고는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짜증이 확 나네요. 그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못 하게 더 성공해 버리죠. 미국에서 더 끝내주는 전시를 하고, 더 잘난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면 그때는 아무런 말도 못 할 거 아니에요.”
“맞아요. 바로 그 자세예요.”
심하윤 대표가 씨익 웃었다.
“적당히 뜬 사람은 무시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예 뜬 사람한테는 아무런 말도 못 하죠. 모든 예술가가 다 그랬어요. 처음에는 거품이라고 외면하다가도 나중에 가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죠.”
나도 심히 공감하는 말이었다.
전생에 VTS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적당히 떴을 때만 해도 거품이라며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슨 한국계 그룹이 영미권에서 인기를 얻느냐.
그게 다 엔터에서 거짓말하는 거다.
그런 식의 반응이 많았지.
하지만 빌보드를 부술 때부터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무도 입을 못 열었지.’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
대중의 인식은 한순간에 바꾸는 게 아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쌓아 가서 언젠가 인정받는 거다.
지금부터 있을 일도 그 초석이었다.
뉴 뮤지엄 측의 대표 큐레이터, 리사 필립스를 만날 순간이 왔다.
‘자, 이제 시작이야.’
그런데 심하윤 대표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들고 오신 건 뭐예요?”
“아, 이거요?”
나는 손에 든 봉투를 들며 말했다.
“JH 디자인 선물 종합 세트요.”
“······.”
“텀블러에 담요, 티셔츠, 펜 같은 사은품을 튼실하게 담았습니다. 봐요, 디자인도 예쁘게 뽑혔죠?”
심 대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 사은품 > 끝
ⓒ 이한이™
< 리사 필립스 >
“미술 시장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요.”
심하윤 대표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이는데 말이 없다.
그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 이거 나한테 맞춰보라는 거구나.’
나는 적당히 넘겨짚고 입을 열었다.
“작가랑 갤러리 그리고 소비자요?”
“네.”
나도 흔히 아는 이야기였다.
작가는 작품을 만든다.
갤러리는 유능한 작가를 발굴한 뒤 마케팅을 진행한다.
그렇게 생산된 작품을 소비자가 구매한다.
미술 시장은 이 셋의 조화로 굴러갔다.
“그런데 말이죠.”
심 대표는 엄격 근엄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미술 시장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죠. 그게 뭘까요?”
“음.”
나는 심 대표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소비자가 극단적으로 적다는 거죠.”
“정답이에요.”
심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작가도 적고 갤러리도 적은데, 소비자는 그것보다도 더 적어요. 수요와 공급이 제대로 무너졌죠.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는 시장이에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분위기라고 해도 시장인 이상 돈이 흘러야 뭘 하든 말든 하는데, 소비자가 없는 시장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 리가 없어요.”
“말이 안 되는 시장이네요.”
“맞아요.”
심 대표뿐만 아니라 나도 평소에 자주 했던 생각이었다.
한국 미술 시장은 기형적이다.
“그런데도 이런 시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작가와 큐레이터가 적자를 감수했기 때문이었죠.”
“밑지면서 장사하는 거군요.”
“네, 대부분 이게 손해라는 걸 알아요. 그래도 그냥 하는 거죠.”
소비자가 턱없이 적은데도 어떻게 시장이 유지된다.
이런 시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시장 자체가 지독한 열정페이를 깔고 갔기 때문이었다.
‘돈은 못 벌어도 좋다! 설령 굶어 죽더라도 그냥 예술 하다가 죽고 싶다!’
손해를 볼 걸 기꺼이 감수한다.
자본주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말 그대로 기형적인 시장이었다.
‘이런 말을 왜 하지?’
언뜻 당연해 보이는 말에 의문이 생기려는 찰나 심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미국은 달라요.”
“어떻게 다르죠?”
“한 번 작가님이 맞춰 보실래요?”
“음.”
자꾸 질문하는 식으로 뭘 던지신다.
재미가 붙으셨군.
하지만 나도 이 상황이 재밌는 건 사실이었다.
‘원래 업계인들 사이에서는 시장 이야기만큼 재밌는 게 없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미국 시장은 소비자가 많지 않을까요?”
“정답이에요. 역시 작가님이시네요.”
심 대표는 웃더니 말했다.
“미국은 현대 미술의 중심지고, 뉴욕은 거기서도 또 최심부예요. 단순 시장 규모만 봤을 때 한국의 100배에 근접할 정도예요. 당연히 작가와 소비자가 넘쳐나죠.”
“음, 갤러리는요?”
“이 부분이 중요해요.”
그녀는 한 차례 호흡을 고르더니 말했다.
“미국 시장에서는 갤러리가 강해요.”
“강하다고요?”
“말 그대로예요. 모든 갤러리가 부유한 건 아니지만, 유명 갤러리들은 어지간한 기업 못지않은 부를 자랑하죠. 전 세계의 재능 넘치는 작가들이 줄을 서 있어요.”
작가 – 큐레이터 – 소비자 사이의 균형이 깨졌다.
이 말이 보여주는 바는 극명했다.
“큐레이터의 힘이 어마어마하게 강하겠군요.”
“네, 맞아요.”
심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저 하늘의 별 같은 작가가 아닌 이상, 누구나 큐레이터의 말 한마디에 껌뻑 죽는 신세예요. 미국에서 잘나가는 갤러리 큐레이터의 힘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죠. 큐레이터의 선택 하나로 작가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가 하면, 큐레이터의 주목을 못 받은 작가는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가난에 시달려요.”
흔히 있는 이야기였다.
작가의 실력은 어디에서 전시했는가로 증명되기 마련이었다.
좋은 미술관에서 한 번 전시를 가지면 그대로 출셋길을 걷는 셈이었다.
그 반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음, 첫 단추가 중요하겠네요.”
“맞아요. 그러니까 조금 뒤에 있을 미팅이 중요한 거죠.”
심 대표는 숨을 한 차례 고르더니 말했다.
“뉴 뮤지엄이 아무리 MOMA나 구겐하임 같은 유명 갤러리에 비해서 밀린다고는 해도, 그래도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주목하는 곳이에요. 특히 이곳의 큐레이터인 리사 필립스, 그 사람의 눈에만 들면 미국에서 뜨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쉬운 일은 아니겠네요.”
“네.”
그녀가 긍정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사 필립스라는 사람.
이 사람은 왜 나를 선택했을까.
‘날 키워서 팔아 보려고?’
그걸 고민하고 있으려니 곧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보아하니 큰 키의 백인 여성이었다.
나는 물었다.
“혹시 리사 필립스 씨인가요?”
“예.”
그녀가 싱긋 웃었다.
*
리사 필립스.
미국의 유명 큐레이터이자, 유명 미술관인 뉴 뮤지엄의 대표.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작가님, 혹시 저희 뉴 뮤지엄을 둘러보신 적 있으셨나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도착한 지 아직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작업실과 숙소를 구하고는 계속 미술관만 돌아다녔다.
뉴 뮤지엄도 당연히 구경했다.
‘내가 아는 그 건물은 없어서 아쉬웠지.’
앞으로 몇 년 뒤, 뉴 뮤지엄은 건물을 새롭게 지으며 미국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적어도 모든 미술관 중 건물 하나만큼은 가장 유명해진다.
“그렇군요, 소감은 어떠셨나요?”
리사 필립스가 내 감상을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적절할까 고민하다가 말했다.
“현대적이었습니다.”
그렇다.
현대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뉴 뮤지엄을 묘사하는 말로서 가장 적절한 대답이었다.
뉴 뮤지엄의 뉴는 현대 미술을 중시한다는 뜻의 뉴이니까.
리사 필립스도 내 말이 흡족한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 뉴 뮤지엄은 아주 예전부터 작가님을 꼭 한번 초대하고 싶었답니다.”
“저를요?”
예상치 못한 말에 조금 놀라는데, 그녀가 말했다.
“예, 물론이죠. 아주 예전부터 작가님이야말로 저희 뉴 뮤지엄에 가장 잘 맞는 작가님이라고 생각했는걸요.”
뉴 뮤지엄에 잘 맞는 작가라.
그게 무슨 말인가 찰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모든 미술관이 다 그렇겠지만, 저희 뉴 뮤지엄에서도 미술관 차원에서 지향하는 방향성이 있어요.”
“방향성이라면?”
“요즘 작가의, 최근 만든 최신 작품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뉴 뮤지엄의 창립자이신 마샤 터커 대표님께서 그렇게 정했어요. 현시대의 살아있는 예술가들을 조명해야 한다고 말이죠.”
“예전에는 안 그랬나 봐요?”
“그게 그랬죠.”
리사 필립스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존의 미술관들은 이미 죽은 예술가들이나 오래된 예술가들에게만 관심을 쏟았어요. 현대 미술을 자칭하는 미술관들까지 말이에요. 마샤 터커 대표님은 그 행태에 크게 실망하셨어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느끼셨겠군요.”
“예, 정확해요. 그래서 뉴 뮤지엄을 차리신 거예요.”
그녀가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뉴 뮤지엄은 기존 미술관들과는 달라요.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 미술을 중요시하고 있죠. 이름만 현대 미술이지, 검증된 작가들만 모시려고 하는 다른 미술관과는 태생이 다릅니다. 현대 미술의 발전과 발굴이야말로 곧 우리의 사명이에요. 마샤 터커 대표님의 의지를 이은 거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기 미술관에 관한 진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그 좋은 기운이 내게도 느껴진다.
언제나 진심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연스레 뉴 뮤지엄이라는 미술관에 대해서도 호감이 생겨났다.
‘젊은 느낌이네.’
문득 뉴 뮤지엄이 나를 반겼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작가님은 그런 면에서 우리 뉴 뮤지엄의 취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작가님이시죠.”
“그런가요?”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실제로 작품을 봐야 알겠지만, 작가님의 행보는 뭐라고 해야 할까. 상업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상업적이면 안 될까요?”
“아니요. 저희 뉴 뮤지엄은 대중에게 친숙한 예술가분들도 여럿 후원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런 작품이 있겠네요.”
그녀가 어느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낙서로 가득 찬 미술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냥 낙서가 아니었다.
전시장 전체가 낙서로 가득했다.
건물 기둥과 벽면 그리고 바닥과 천장까지.
아는 작품이었다.
“관람객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군요.”
“예, 작가와 관람객들이 다함께 자유롭게 낙서해서 만들었죠. 낙서까지 포함해서 공간 전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여겼던 거예요.”
확실히 기존 예술과는 느낌이 달랐다.
고전적인 미술관에서 이런 시도는 기대할 수 없겠지.
‘말 그대로 뉴 뮤지엄이네.’
그렇게 느낀 순간이었다.
리사 필립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이야기는 이만하면 되었고, 슬슬 작가님의 작품을 직접 한번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심하윤 대표를 바라봤다.
일정 관련해서는 그녀가 전담했기 때문.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함께 가시죠.”
*
뉴욕 맨해튼의 어느 구석에 위치하는 창고 겸 작업실.
우리가 뉴욕에 머무는 동안 쓰게끔 심하윤 대표가 구해준 장소였다.
그곳에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했다.
“누님, 거기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응, 내 작품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네 작품은 네가 알아서 해.”
“언제는 봐 달라면서요.”
“내가 봐 달라고 했지 참견하라고 했니?”
한설 선배와 규태가 왁자지껄 떠들면서 작업물을 만들고 있었다.
‘얼씨구.’
오죽 난장판이면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게 그들만의 작업물은 아니었다.
내가 이번 전시를 위해 협조를 부탁한 작업물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저 없는 동안 너무 풀어진 거 아니에요?”
“모처럼 선후배의 기강이나 한번 잡아 볼까?”
“아뇨.”
“그럼 얼른 이리 와서 좀 봐 봐, 내 말이 맞아? 아니면 규태 말이 맞아?”
“음.”
가까이 다가가서 한설 선배가 만지던 작품을 바라봤다.
서울 거리를 입체적으로 꾸며낸 예술품.
그렇다.
이건 내가 그들에게 주문한 조각이었다.
기획은 내가, 제작은 모두가 함께.
사실상 우리 셋의 합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때?”
한설 선배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 내 의도에서는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완전히 엇나갔네.’
내가 처음 의도했던 그 작품은 아니다.
좀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이게 꼭 나쁜 방향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손을 타니까 또 다른 의미에서 좋은 작품이 되었다.
‘이걸 어쩐다.’
지금이라도 고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뒤늦게 작업실로 들어온 리사 필립스가 중얼거렸다.
“놀랍군요.”
그녀는 나를 지나쳐 작업실 안을 성큼성큼 걸어다니며 구경했다.
“누구?”
“뉴 뮤지엄 큐레이터요.”
“높으신 분이네.”
“누나랑은 다르게 키가 좀 크시긴 하죠.”
“씨.”
“쉿. 욕은 안 돼요.”
“쉿이 영어로 욕인 거 몰라?”
“어휘력이 많이 느셨네요.”
그렇게 한설 선배와 떠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리사 필립스가 우리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여기에 있는 작품들이 전부 작가님의 작품인가요?”
“제 것도 있고······.”
나는 나머지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의 작품도 있고요.”
“흠, 개인전이 아니군요.”
“개인전이 맞긴 해요. 그런데 저라는 개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 두 사람이 빠질 수는 없거든요.”
말 그대로였다.
이재하라는 작가의 작품은 나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저 두 사람의 협조가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함께 온 상황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기왕 하는 전시니까 좋게 봐 줬으면 좋겠는데.’
사실 리사 필립스가 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지 좀 긴장되는 참이었다.
며칠간 뉴욕 시내의 미술관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확실히 느꼈다.
이곳은 세계 미술의 중심이 맞았다.
‘한국 최고 수준으로 꼽힐 미술관이 이곳에는 10개도 넘게 있어.’
라온 미술관만 해도 그렇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이곳의 흔한 미술관에도 비할 바도 못 되었다.
시설의 문제가 아니었다.
작품의 문제였다.
한국과 적어도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고 느껴질 정도.
그렇기에 리사 필립스가 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궁금했다.
“어떠신가요?”
“흐음.”
내 물음에 리사 필립스는 오묘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역시 제 눈이 맞았네요.”
< 리사 필립스 > 끝
ⓒ 이한이™
< 니 하오 >
리사 필립스가 중얼거렸다.
“역시 제 눈이 맞았네요. 훌륭해요. 저희 뉴 뮤지엄에 딱 맞는 작품들이예요.”
호평이었다.
나는 속에서 쾌재를 내질렀다.
세계적인 큐레이터가 단번에 호평을 내렸다.
남의 평가에 목맬 단계는 넘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당장 비행기에서 꼬맹이에게 칭찬을 받은 것만 해도 그렇지 않았나.
짜릿하다.
늘 새롭다.
칭찬이 최고다.
‘좋아, 일단 기본적인 단계는 지났다 치고, 이제부터 하는 말이 중요하다.’
리사 필립스는 천천히 작업실을 걸어다니면서 중얼거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림의 기본에 충실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기본이요?”
“예, 뎃생력이나 색채 감각 같은 거죠. 요즘 젊은 작가들을 보면 부족한 기본기를 창의력이라는 허울 뒤에 숨기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작가님은 그 부분에서 성실해요.”
리사 필립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성실하다는 건 정말 큰 무기죠. 어설픈 작품으로 어설픈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진짜배기는 속지 않거든요. 진짜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에게 작가님의 작품 속 성실함이 빛을 바랄 겁니다.”
그런가.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둘러본 미술관의 작가들은 실력 면에서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누구 하나 괴물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나는 그 부분이 의아해서 물었다.
“요즘 작가들 중에 좀 부족한 사람이 많은가 봐요?”
“요즘 작가라기보다는, 신인들 사이에서 그렇지요. 뉴 뮤지엄이 신인에게 관대하다는 말이 있다 보니 유독 그쪽으로 만만하게 보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어진 말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신인 발굴 이야기였구나.
하기사, 너무 대단한 곳들은 또 신인 발굴에서 고생할 일도 없겠지.
애초에 탑 오브 탑이라고 불릴 사람들이 줄을 섰을 테니까.
그렇게 혼자 되새기고 있는데 리사 필립스가 입을 열었다.
“흠, 이번 전시전의 메인 콘셉트 말인데, 혹시 제가 추측하는 게 맞을까요?”
“어떻게 보셨나요?”
“제 생각에는.”
리사 필립스가 중얼거렸다.
“시간을 나타내신 것 같네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정확하게 보셨네요.”
“역시 그렇군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연출해 봤어요.”
그렇다.
이게 내가 이번 전시에서 필살기로 생각한 것이었다.
시간을 나타낸다.
유리에 비친 광경으로 미래를 보여준다.
호수에 비친 모습으로도 보여준다.
구름으로도 보여준다.
어떻게든 시간의 흐름을 그림 속에 나타냈다.
“누가 봐도 감성이 와닿는 게 마음이 들어요. 이 작품이 특별히 마음에 드네요.”
리사 필립스가 한 작품을 가리켰다.
문 하나를 기점으로 내부는 흑백으로, 바깥은 컬러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리사 필립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따온 장면 맞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사 필립스가 정확하게 봤다.
이 작품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 맞았다.
그것도 아주 먼 옛날에 나온 오즈의 마법사였다.
1930년대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
그 작품에서 특히나 유명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흑백영화 속 주인공이 문을 열었더니 세상이 컬러로 전환되는 장면이었다.
‘기술의 발전을 나타낸 장면이었지.’
당시 흑백영화가 지배적이었던 세상이었기에 가능한 연출이었다.
지금 봐도 놀라운 연출.
그 시대 사람들이 봤을 때 느꼈을 감동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예술에는 원래 이런 부분이 잦았다.
그 시대 사람들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이 있다.
미래의 사람들은 옛 시대 사람들이 느낀 작품을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소설과도 같지.’
당장 양산형 판타지 소설들이 그러했다.
누군가는 그 소설들을 두고 유치한 소설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지나치게 흥미 본위의 내용들은 지금 보면 난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시대에 그 소설을 읽었을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재밌으니까 읽었겠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숨죽이면서 읽었을 것이다.
나도 이러한 시대의 재미를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마법을 불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색채감이 독특한데, 이쪽 컬러 묘사는 어떻게 한 거죠?”
“테이프로 했습니다.”
그렇다.
유독 강렬한 컬러의 정체는 테이프였다.
오래간만에 테이프 아트를 한 번 시도해 봤다.
‘나 자신을 테이프로 나타낸다면, 테이프를 빼놓을 수는 없지.’
규태가 옛날 내 과거를 언급했을 때 떠올렸다.
다시 한번 써먹어 보자고.
기왕 써먹는 거 더 효과적으로 써먹어 보자고.
그게 지금 눈앞의 이 작품이었다.
“산업혁명기답게 칙칙하니 흑백으료 묘사된 세상과 살짝 과장된 정도로 찬란한 세상. 시간의 대비를 극한으로 살렸죠.”
예전 벽화 때나 지금이나 내 그림의 정체성은 반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자도 그중 하나였다.
그게 먹히기는 했는지 리사 필립스가 손뼉을 쳤다.
“좋네요, 좋아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받을지 아주 잘 알 것 같아요. 흠, 강렬하네요. 눈에 박힙니다. 아마 한 번 보면 다시 잊기 어려울 작품들이에요.”
물론이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이쪽 작품을 봐 주시겠어요?”
그리고 잠시 뒤.
“이건······.”
리사 필립스가 오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전적이군요.”
*
며칠 뒤, 나는 본격적으로 작품 설치에 나섰다.
작품들의 가짓수가 많다 보니 배치 그 자체만으로도 꽤 큰 일인 상황.
그냥 미술관에 맡겨도 되겠지만, 효과적인 전시를 위해서 내가 좀 더 수고하기로 했다.
‘기대되네.’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데 마음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미 내 작품의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내 작품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오겠다는 사람까지 나타난 상황.
[나는 보고 온다] [한국에서 이재하 보기도 힘든 데 지금이라도 봐 둬야지] [차라리 지금 보는 게 낫지, 나중에는 진짜 보고 싶어도 못 볼 수도 있음] [나 지난 번 전시는 입장 줄만 한 시간 동안 섰다] [그래도 미국까지 다녀오는 건 오바 아님?] [난 미국 사는데] [그건 몰랐네]틈새시장을 노리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현명한 전략이다.
비행기값이 좀 아프긴 하겠지만, 다음에는 비행기값을 내더라도 못 볼 수도 있다.
‘애초에 작가의 전시라는 게 일년 내내 하는 일이 아니니까.’
어떤 작가는 몇 년씩 잠수탔다가 한 번 나타나서 작품을 전시하고 사라지고는 했다.
당장 유명 작가들의 태반이 그렇다.
한 번 작품이 안 나온다 싶으면 잠적해 버린다.
송태엽도 그러했다.
나라고 안 그럴리는 없지.
‘뭐, 멘탈 조절도 프로의 소양이지만.’
나는 오래오래 갈 생각이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좋은 아이디어가 흘러 넘쳤다.
‘생각해 보면 난 디자이너보다 작가 체질일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한설 선배가 말을 걸었다.
나는 감수성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제 꽤 귀한 몸이 되었구나 싶어서요.”
“풉.”
한설 선배가 웃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지는 거다.
나는 이기고 싶은 사람이기에 한발 더 나아가며 말했다.
“누나도 제가 있을 때 잘하세요. 저 나중에는 진짜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야, 나는 안 그럴 것 같아?”
음.
생각해 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설 선배라면 충분히 유명해질 능력이 있다.
이번 생에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더 빠르게 뜨겠지.
‘이러다가 언제 자기 작품 만들겠다면서 홀연히 잠적 타는 거 아냐?’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얼마면 돼요?”
“뭐가.”
“누나 월급이요.”
“지분으로 줘야지 어딜 날로 먹으려고.”
“씁, 스톡 옵션은 좀 비싼데.”
“지훈이 오빠 같은 소리는 그만 하고, 그보다 요즘 왜 이렇게 건방져졌어?”
“그러면 안 돼요?”
“아니, 맨날 주눅든 것보다는 이게 낫네. 옛날에 그 무슨 일만 있으면 찌들찌들하게 굴던 이재하가 아니야.”
그녀는 옛날의 내가 떠오르는지 큭큭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번 전시 어떨 것 같아?”
“글쎄요. 아마 성공하지 않을까요?”
“성공의 기준은?”
“여기 작품들이 전부 팔리는 거죠.”
“흐음, 쉽지 않겠네.”
“인생이 다 그렇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늘 새로운 일이 들이닥쳐요.”
“그건 네가 맨날 이상한 일을 벌이니까 그러는 거고.”
“같은 일만 하면 재미 없잖아요.”
“그것도 그래.”
한설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누나는 이번 전시에서 어떤 작품이 제일 반응 좋을 것 같아요.”
“저거.”
한설 선배는 단 한 치의 주저도 없이 한 작품을 가리켰다.
그 작품은, 얼마 전에 리사 필립스가 특히나 높게 쳤던 작품이었다.
“타임머신 말이죠?”
“응.”
타임머신.
공중전화 부스였다.
그런데 그냥 공중전화 부스가 아니다.
흑백 영화에 나올 것처럼 흑연을 전체적으로 칠한 공중전화 부스인데, 이번 전시에서 내가 특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였다.
“딱 봐도 특이하기는 하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작품을 만들었어?”
나는 씨익 웃고는 말했다.
“그냥 딱 보기에는 단순한공중전화 부스에 불과하죠. 하지만 여기에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적으면 달라져요.”
“어떻게?”
“미래에 전하는 메시지가 담긴 타임머신이 되는 거죠.”
“흠.”
한설 선배가 의아해하는데,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제 생각에 공중전화 부스는 향후 20년 뒤쯤에는 말끔히 사라질 거예요.”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그녀가 웃는데 나는 확고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진짜로 사라질걸요.”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사라진다.
기사를 봤다.
당장 2020년쯤 되면 뉴욕 시에서 공식적으로 공중전화 부스를 전부 철거하게 된다.
‘그럼 그 시대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공중전화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자라겠지.’
그래서 나는 미국에 오자 마자 공중전화 부스부터 하나 구해왔다.
겉면은 흑백역화 속에 등장할 것만 같이 회색으로 칠했다.
그 옆에 관객들이 자기 이름과 메시지를 남길 수 있게끔 색연필을 비치해 두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금 독특한 작품에 불과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미래의 사람들은 이 전시품을 보면서 과거를 느낄 거예요.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값어치가 올라가겠죠.”
이것도 내 예전 행적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는 헤븐즈 도어 매 점포마다 우드슬랩 테이블 하나를 배치하게끔 했는데, 그 모든 테이블에는 내 마크와 제작년도가 적혀 있었다.
이제 슬슬 시간의 값어치가 붙기 시작한 상황.
미술품이라고 같은 일을 못할 이유가 뭔가.
“······ 그렇게 듣고 보니까 썩 나쁠 건 없을 것도 같고.”
결국 한설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내 말을 인정한 것 같진 않지만, 그녀가 저 정도의 액션을 취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전 정말로 기대돼요.”
“뭐가?”
“미래의 사람들이 이 전시를 어떻게 평가할지가요.”
나는 이 작품에서 미래를 그려놨다.
그리고 그 미래의 태반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제 몸값은 확 뛰겠죠. 흐흠.”
“그래, 한번 잘 해 봐.”
“잘할 겁니다.”
그렇게 떠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 음?’
옆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어느 덩치 큰 백인 남성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건가 싶은데, 그가 입을 열었다.
“Ni hao?”
“······.”
< 니 하오 > 끝
ⓒ 이한이™
< 핵폭탄 >
‘니 하오? 안녕이라는 말인가?’
갑작스럽게 머리가 굳었다.
눈앞의 백인이 날 보고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이 사람 중국계인가.
아니면 우릴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건가.
아마 후자겠지.
이 시절의 한국인은 존재감이라고 할 게 없었으니까.
미국에서 동양인 하면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 둘 중 하나였던 시대였다.
그냥 한국인의 존재감이 이 모양이었다.
‘그립다, VTS. 그립다, 강남스타일.’
그래서 다짜고짜 저렇게 말을 건 것인가 싶은 참이었다.
옆에서 또 다른 중국어가 튀어나왔다.
“ni shi shei? na guo ren? ni hui shuo yingyu ma?”
한설 선배였다.
그녀의 입에서 유창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중국어가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살짝 당황스러워서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중국어 할 줄 알아요?”
“나 학교에서 중국어 수업 들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사무실 들어올 때 가끔 중국어로 말 한마디씩 툭툭 던지고는 했었지.
머릿속으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장난치려고 그런 건가 싶었는데, 나름대로 진지했구나.
“멋집니다.”
내가 따봉을 날리는데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원래 외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배움은 채울수록 손해 볼 게 없음이야.”
의외로 학구열이 가득한 말씀.
그렇게 작은 감탄을 하고 있는데 백인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오우, 실례했습니다. 저 중국어 할 줄 몰라요.”
뭐야.
영어 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