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3)
두 번 사는 미대생 83화(83/93)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좀 당황스럽네요.”
“그렇게 당황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토마스 킨케이드는 능글능글 웃으며 말했다.
“전 언제나 작가님의 편이니까요.”
“아니, 방에서 속옷만 입고 있는데 갑자기 옆집 사람이 들이닥친 기분이에요. 그래서 어떤 일이신가요?”
“친구 만나는 김에 놀러왔습니다.”
“그 친구가 이쪽 분이겠군요.”
“예.”
그 친구란 제임스 울프를 의미했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침 같이 있던 와중이었어서 함께 왔습니다.”
“······.”
그렇게 쉽게 말하다니.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제임스 울프는 뉴욕에서 예술가 후원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토마스 킨케이드는 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지. 그러니까 둘이 모르는 사이라면 그게 더 이상할 거야.’
하지만 왜 지금 같이 나타났는가.
그게 궁금한 참인데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아주 오래전부터 작가님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예, 정확히는 이 친구와 함께 전시를 가지셨을 때부터였죠.”
“빛과 그림자 전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그가 흐뭇하게 웃더니 말했다.
“언제가 되었든 작가님의 작품을 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상황이 안 따라주더군요. 워낙 작품이 안 풀려서. 그러던 찰나에 이렇게 뉴욕으로 직접 와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치 날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듯한 말투였다.
고개를 돌려 심하윤 대표를 바라보니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대표님 말씀을 믿어요.”
그러고 있으려니 곧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전 제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작품만 구매합니다. 그쪽 분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습니다. 그보다 제가 바라는 건 미리 전달해 두었는데, 작가님께서도 들어보셨겠지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제 작품을 전부 구매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게 제 목적입니다.”
“전시장은 충분히 둘러보셨나요?”
“사람이 많을 때 쫓기듯 구경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앞으로 천천히 구경하면 되겠지요.”
그렇지.
사 간 다음에 혼자서 느긋하게 구경하면 그만이기는 하지.
‘이미 자기가 사갈 걸 확정해 둔 것처럼 말하네.’
참으로 느긋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는 양손으로 깍지를 끼더니 내게 물었다.
“일단 가격을 협상하기는 해야겠는데, 혹시 바라시는 가격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군요.”
“음.”
나는 성급히 대답하는 대신 심하윤 대표를 바라봤다.
아무리 내가 그로브 170 소속은 아니라고는 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내 매니저는 그녀였다.
이런 실무적인 부분은 그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애초에 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내 작품들도 조급한 마음에 미리 팔아치웠겠지. 가격도 크게 못 받았을 테고, 미국 진출도 피곤했을 거야.’
미술계에서 꼭 매니저가 필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홍경희 관장의 말마따나 작가 중에는 어수룩한 사람이 많다.
나도 내가 모를 뿐 그런 사람일 수 있었다.
‘어떤 분야든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할 때 실수하기 쉽지.’
리스크는 줄일수록 좋다.
그러니 이런 협상은 믿을 수 있는 진짜 전문가에게 위임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내 뒤통수는 안 칠 사람.’
그게 심 대표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저보다는 이분과 대화를 나누시면 좋을 것 같아요.”
“좋습니다.”
내 말에 제임스 울프가 흔쾌히 심하윤 대표를 바라봤다.
잠시 두 사람 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눈싸움이 오가기를 잠시.
심 대표가 입을 열었다.
“현재 전시된 작품을 전부 합쳐서 280만 달러에 넘기고 싶어요.”
그 말에 내 눈이 커졌다.
‘와, 되게 세게 부르시네.’
280만 달러.
한화로 30억에 달하는 액수였다.
지금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의 수가 40점을 조금 넘으니, 평균적으로 7천만 원이 넘는 가격을 제시한 셈.
하지만 나는 이 가격이 진짜 가격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떠보기겠지.’
원래 협상이 그렇다.
한참 높은 액수를 부르고, 거기서 서서히 낮추며 바라는 금액으로 이끌어나가는 게 정석이다.
‘아마 제임스 울프도 한참 낮은 가격을 부르겠지.’
그 중간지점.
그쯤이 내 작품의 진짜 구매 가격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좋습니다.”
제임스 울프가 웃으며 말했다.
“280만 달러는 깔끔하지 못하군요. 20만 달러를 우선 예치금으로 지급한 뒤, 전시가 끝난 후 총 300만 달러에 전부 가져가는 것으로 하지요.”
“······.”
뭔가가 일어났다.
< 뉴욕의 로렌초 > 끝
ⓒ 이한이™
< Radioactive >
당황스럽다.
아니, 당황해야 한다.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
‘다짜고짜 다 사가겠다고? 그것도 웃돈을 붙여서?’
300만 달러다.
강남에 아파트를 구매하더라도 여러 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미술관과 수수료를 나누고, 심하윤 대표에게 나눠주고 하면 내게 떨어지는 수입은 꽤 적을 터.
그래도 아파트 몇 채 값은 넉넉하다.
하지만 이건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돈이란 것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
애초에 이번 삶에서 나는 돈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정말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사람, 나를 대체 얼마나 고평가하는 거지?’
눈앞의 이 컬렉터, 제임스 울프가 나를 그만큼 고평가했다는 사실이었다.
‘30억이면 어지간한 유명 화가의 작품이라도 여러 점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야. 아무리 내 작품이 몇십 점이라지만, 그걸 한 번에 사겠다고?’
뉴욕의 로렌초라고 했던가.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통이 큰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제임스 울프는 즐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미 작품을 사간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죠?”
“아, 그건 아직······.”
심 대표가 말을 흐렸다.
작품 구매 문의가 몇 차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원래 전시 초기에는 탐색전에 가까웠다.
충분히 작품의 반응을 지켜볼 시간이 필요하니 섣부르게 구매하지 않는다.
‘유명한 작가라도 작품이 팔릴 때까지 몇 달씩 필요한 경우가 많지. 작품의 가격이 오를지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평생에 걸쳐 상품성이 보증된 작가들이나 초기에 팔리고는 했다.
물론 박서보 같은 장인은 전시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전부 매진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아직 문의만 있는 상태였다.
“다행이군요.”
제임스 울프는 한층 마음에 들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킨케이드 씨, 그렇죠?”
“후우.”
“제가 이겼습니다.”
토마스 킨케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못 말리겠군.”
“보세요. 이게 당신과 제 차이입니다. 과감해야 할 순간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거.”
그가 껄껄 웃는데, 마치 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다는 듯했다.
나는 그게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내기라도 하셨나 봐요.”
“예, 그렇습니다.”
토마스 킨케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작가님의 작품이 한 작품이라도 팔렸을 거라는 데 걸었고, 이 사람은 아직 안 팔렸을 거라는 데 걸었죠.”
“······.”
이게 의미가 있는 내기일까 싶다.
하지만 여기서 이 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토마스 킨케이드는 나를 검증된 작가로 생각하고 있고, 제임스 울프는 아직 그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군.’
여기서 두 사람의 차이가 나타났다.
물론 내 추측일 뿐이다.
“그럼 이번 전시가 끝나는 대로 작품을 인계 받고 싶은데, 흠.”
그렇게 대충 이야기가 끝났다 싶은 순간이었다.
제임스 울프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뭔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에 의아한데, 그가 입을 열었다.
“기왕 작품을 구매하는 거 작가님에게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역시.
나는 그제야 내가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는 걸 직감했다.
이 사람은 사업가다.
정말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게 호의를 베풀었을 리가 없지.
나는 입을 열었다.
“부탁이요?”
“예, 작은 부탁입니다.”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내게는 그리 들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 사람, 아직 도장을 찍진 않았어.’
거래를 무르려면 언제든 무를 수 있다.
내게 뭔가 제안을 하려는 거 아닐까.
어쩌면 작품 구매는 그저 선수금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라는 작가에게 임팩트 있는 자기소개를 하기 위한 선수금.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작가님과 저녁 식사라도 한끼 같이 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
예?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뭐 엄청난 부탁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저녁 식사 한끼라니.
내 표정이 퍽 우스웠는지 제임스 울프는 낄낄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의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혼자 가기에는 아쉬운 식당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유능한 예술가와 함께하는 식사는 제 몇 안 되는 취미라서 말입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토마스 킨케이드를 바라봤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이 친구가 좀 사람이 가볍기는 하지만, 일단 거짓말은 아닙니다.”
“아, 예.”
토마스 킨케이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식사 한 끼라.
별것도 아니다.
어차피 밥은 먹으려면 먹는 거고, 유명한 컬렉터와 한 끼 식사를 나눌 수 있다면 오히려 내게도 이득 아니겠는가.
‘실리콘 밸리의 재벌과 나누는 식사 한 끼다. 원래는 몇백만 원을 내고 먹더라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능하면 작가님과 단둘이 식사를 나누고 싶군요.”
“단둘이요?”
“예,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말입니다.”
어딘가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심하윤 대표를 바라봤다.
그녀는 날 진지하게 바라봤다.
‘작가님, 이 기회 놓치지 마세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식사는 어디서 하는 건가요?”
“미리 예약해 둔 곳이 있습니다.”
“예약이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는 기분이 들었다.
너랑 나랑 지금 처음 만났잖아.
그런데 무슨 예약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임스 울프가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센트럴 파크 앞 네스타운 호텔에서 뵙겠습니다.”
*
점심부터 쭉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전시가 잘 풀릴 거라고 내심 바라기는 했다.
잘하면 매진되지 않을까.
심 대표의 말마따나 5천이 넘는 가격이라도 한 점 쯤은 팔리는 거 아닐까.
내심 그런 기대를 품었지.
하지만 한 방에 전부 팔릴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진짜 세상 일은 모르겠네.’
돈이라는 것에 꽤 초연해진 이번 삶이지만, 미국 재벌의 금전감각이라는 건 그런 나를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받는 걸까. 국밥? 초밥? 똠양꿍? 스테이크? 설마 캐비어나 제비집?’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먹어볼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런 걸 먹는 게 아닐까.
좋다.
남의 돈으로 먹을 걸 생각하니까 더 좋다.
생각하다 보니 침이 흐를 것만 같아 열심히 자제하는 참이었다.
“작가님.”
눈앞에서 어느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저기, 작가님, 괜찮으세요?”
“아,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나는 인터뷰를 받고 있었다.
그것도 한인 신문 ‘뉴욕일보’의 기자에게 단독취재를 받는 상황이었다.
‘일단 이건 어떻게 해 놓고 가자.’
정신을 가다듬는데 기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 전시전에 우리 한인들이 거는 기대가 엄청난데요, 혹시 알고 계셨나요?”
“네, 전시장에서 한인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회장에서 예상치 못하게 한국어를 많이 들으니까 기뻤습니다. 제 이야기가 이미 기사로 나왔다는 것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랐고요.”
“급한 대로 기사를 내놓기는 했습니다만, 작가님과 이렇게 좋은 시기에 인터뷰를 할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싱글벙글 웃었다.
좋은 취재감이라고 생각한 모양.
“예술가로서 미국에 진출한 한국인이 지금까지 많지 않았습니다. 사실 분야를 막론하고 진출한 한국인 자체가 적지요. 특히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은 사람은 더더욱 적습니다.”
“······ 그렇군요.”
굳이 강조해 주니까 왠지 낯부끄럽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흠, 흠.”
헛기침을 뱉으려니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이번 미국행에서 바라시는 목표가 따로 있으신가요?”
음.
이건 대답하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바라는 목표라.
사실 이미 달성해 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멀리 보고 답해야 했다.
‘세계 미술 시장을 정복하겠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웃겨서 피식 웃었다.
이제 막 몇천짜리 작품을 파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세상에는 아직 작품 하나에 억대로 파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왜.
영국 yBa의 데미안 허스트를 봐도 그렇다.
작품 하나에 수백억에도 팔지 않던가.
트레이시 에민도 그렇다.
몇억짜리 작품을 턱턱 내놓는다.
‘그러고 보니까 그 나의 침대라는 작품이 꽤 유명해졌었지.’
나의 침대.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한 점이었다.
피폐하게 살아가는 여인의 흔적이 가득한 침대로서, 주위에 피임약, 콘돔, 술병, 피가 묻은 속옷 등 과감하기 짝이 없는 장치를 배치했다.
이거 하나로 그녀는 일약 영국 미술계의 스타로 부상했다.
하지만 당시 워낙 논란이 심했던 탓일까.
평론가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고 보니까 터너 상도 못 받았다고 했던가.’
터너 상.
영국 최고의 미술상이자, 세계 최고의 미술상으로 꼽히는 상이었다.
당시에는 트레이시 에민이 상도 못 받았으면서 주목을 독차지해서 수상자가 묻혔을 정도라고 했다.
그래.
나도 그런 상 하나 받아본다면 어떨까.
터너 상은 못 받는다.
난 영국인이 아니니까.
피쉬 앤 칩스는 질색이다.
‘그렇다면 남는 건 휴고 보스 상밖에 없지.’
휴고 보스 상.
터너 상과 더불어 세계 최고로 꼽히는 상이었다.
좋다.
우선은 그걸 목표로 삼자.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휴고 보스 상을 받고 싶습니다.”
“음. 목표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기자는 감명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핵폭탄이라고 불리는 이재하 작가님답게······.”
“잠시만요.”
뭔가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핵폭탄이요? 그건 또 뭐죠?”
어딘가 이상하다 싶어서 되묻는데, 기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최근 작가님의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말입니다만.”
“······ 핵폭탄이요?”
“예, 핵폭탄입니다.”
정신이 멍해졌다.
사람 앞에 왜 그런 별명이 붙어.
무협지도 아니고.
아니, 별명이 붙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핵폭탄이야.’
더 그럴듯한 거 많잖아.
뉴욕의 로렌초라던가.
다빈치의 환생이라던가.
빛의 화가라던가.
아니, 저런 거창한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핵폭탄은 너무하잖아.
‘이게 다 그 사람 탓이야.’
그 뉴욕 데일리 기자, 이름이 오즈본 레이놀즈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 원망스러워졌다.
내 앞에서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가 어쩌고 저쩌고 해놓고 기사 제목은 핵폭탄이라고 박았지.
‘그것 덕분에 내 이미지에 핵폭탄이 붙었다고?’
어이가 없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기레기는 있다.
눈가를 꾹꾹 누르면서 참는데 한설 선배가 큭큭 웃더니 말했다.
“이열, 레디오엑티브.”
“하지 마요.”
“왜, 어감도 좋은데.”
와.
환장하겠네.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기자에게 말했다.
“시간의 마술사로 갑시다.”
“예? 하지만 핵폭탄이 좀 더 입에 착착 감기는데······.”
“아뇨, 어색해 죽겠습니다.”
“음, 일단은 알겠습니다.”
기자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번 전시전에서 작품이 잘 팔렸으면 좋겠네요.”
그 순간이었다.
나는 말했다.
“아, 그게 말인데요. 이미 다 팔렸어요.”
“······ 예?”
그가 잘못들었다는 듯 되물어서 한 번 더 말해주었다.
“다 팔렸어요. 매진됐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쯤 매진 딱지가 붙지 싶네요.”
“······.”
그 말에 기자는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만히 있기를 잠시.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핵폭탄 리······.”
아니.
그거 좀 하지 말라니까.
< Radioactive > 끝
ⓒ 이한이™
< 파리의 심판 >
기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내 별명이 그렇게 퍼져 있었다.
[핵폭탄] [코리안 폭격기] [아토믹 리]이상한 별명이다.
사람 이름 앞에 저런 단어가 붙는다니.
‘무슨 대충 망한 세계의 세기말 패왕도 아니고.’
심 대표가 말하길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하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하였다.
백 명이 좋은 말을 해도 한 명이 나쁜 말을 하면 그게 정신을 좀먹는다고 했던가.
–
“작가들을 보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다가 자기 작품을 망치는 사람이 많아요. 아무리 천재 소리 듣는 사람이라도 그래요.”
“천재라도요?”
“대중을 상대로 하면 어쩔 수 없어요. 데미안 허스트를 보세요. 장사꾼이라고 무시당하잖아요. 앤디 워홀도 그래요. 피카소도 그렇죠.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음, 확실히 그렇네요.”
“작가님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이상, 작가님이 무슨 일을 하든 안 좋게 보는 사람은 무조건 나와요. 소방관도 철밥통이라고 욕하는 세상인데요. 거기에 휘둘리지 마세요. 작가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
나는 저 조언을 찰떡처럼 따랐다.
네티즌들이 어떻게 말하든 일부러 신경 끄고 있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이런 별명이 붙어 버리다니.
‘왜 하필 저런 별명이야.’
심지어 반응이 좋아서 더 문제였다.
[남조선의 핵폭탄 맛 좀 보라우] [내래, 미국 동무들에게 따끔한 김치 맛을 보여 주갔어] [뉴욕은 아토믹 리가 지배한다]네티즌들이 드립 경연 대회를 열고 있었다.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안다.
저거 나 칭찬하려고 저러는 거 아니다. 그냥 저러고 노는 게 네티즌들의 문화다.
‘나도 한때는 그림자를 그리는 화가라고 불릴 때가 있었는데.’
미국 오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저러는가.
저것도 한철 유행이겠지.
그래야만 한다.
제발.
오늘 인터뷰했던 기사가 올라가고 나면 그때는 또 반응이 달라지겠지.
뉴욕 뉴 뮤지엄에서 매진을 기록한 작가, 이재하.
그런 이름으로 알려지기를 바랐다.
그렇게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으려니 한설 선배가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렇게 축 쳐져 있어.”
“사람 이름 앞에 핵폭탄이 붙는다잖아요.”
“······ 욕 별로 없으면 됐지.”
“차라리 욕을 해 줬으면 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네요.”
“욕해 줄까?”
“그건 좀.”
한설 선배가 깔깔 웃었다.
아무튼, 전시 자체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관객들은 계속해서 몰려왔다.
전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최고다.
‘에휴, 뭐 그래도 이름이 안 알려지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적당히 합리화를 거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한설 선배가 입을 열었다.
“날도 날인데 쇼핑이나 하러 가자.”
“쇼핑이요?”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너 이따가 중요한 자리에 사람 만나러 간다며.”
“그렇죠.”
“거기에 지금 옷 입고 갈거야? 물감에 흑연 덕지덕지 묻어 있는데?”
“······ 아.”
나는 그녀의 말에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바라봤다.
내 기준으로 볼 때 그렇게 더러운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군데군데 오염된 흔적이 보였다.
작업하면서 뭐가 계속 묻었다.
열심히 빨아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
“제 작가로서의 아이덴티티인데.”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옷이나 고르러 가자.”
“그래요.”
나는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첫 휴식이네.’
*
그날 저녁.
나는 적당히 양복을 차려입고 네스타운 호텔로 향했다.
네스타운 호텔이라.
인터넷에서 보니까 뉴욕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 수준의 초호화 호텔이라고 하는데, 딱 봐도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네.’
여기서 숨이 막힌다는 건 호텔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 산 옷 때문에 숨이 막혔다.
평소에 잘 입지도 않았던 턱시도 차림이 몸에 안 맞았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옷을 잘도 입고 다니지?’
답답하다.
작업에 익숙하다 보니 편한 옷만 입고 다니는 데 적응한 탓이었다.
늘 대충 입었지.
한설 선배가 골라준 게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런 옷은 안 입었을 터.
그래도 예쁘긴 하니까 만족이다.
‘성공한 사업가를 보는 것 같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꽤 그럴듯했다.
그렇게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으려니 뒤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란 롤스로이스 차량이었다.
‘우와, 롤스로이스는 살면서 처음 보는데.’
고급차량의 대명사 아닌가.
가장 저렴한 차도 수억에 달한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미래에는 그런 말이 있었다.
‘롤스로이스에는 자동 운전 기능이 필요 없다.’
왜냐.
롤스로이스를 몰 정도의 사람이라면 어차피 운전기사가 붙으니까.
아무튼, 그쯤 되는 차가 앞에 서 있으니 주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나만 놀란 게 아닌 모양이다.
‘이런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아마 돈 하나는 무지하게 많겠지.
그렇게 일말의 생각을 하는 찰나였다.
위잉.
그 창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익숙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런 사람이구나.’
제임스 울프였다.
그가 내게 물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뇨, 지금 막 왔습니다.”
나는 슬쩍 네스타운 호텔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식사하는 건가요?”
그럼 내가 좀 기쁠 것 같다.
그런데 제임스 울프는 내 말에 피식 웃더니 말했다.
“여기서요? 네스타운 호텔에서? 설마요, 그럴 리가 없지요.”
어.
여기서 먹는 거 아닌가.
엄청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임스 울프가 말했다.
“타시죠. 좋은 장소를 알아봐 뒀습니다.”
“······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 느꼈다.
카 시트부터 남다르다.
‘와, 이거 진짜 괜찮은데.’
평소 차 욕심이 없었는데, 이 차를 타 보니까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나도 슬슬 좋은 차 한 대쯤은 몰고 다녀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카 시트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출발하죠.”
“네.”
운전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우리를 태운 차량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차 뽑는다. 무조건 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