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4)
두 번 사는 미대생 84화(84/93)
*
결과적으로 말해서, 제임스 울프의 스케일은 내가 생각했던 걸 한참 뛰어넘었다.
‘예약을 해 뒀다는 게 이런 예약일 줄은 몰랐네.’
뉴욕 허드슨 강을 마주한 고층빌딩.
그곳의 한 층을 통째로 쓴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왜냐.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제임스 울프가 통째로 전세 냈으니까.
‘이야, 이게 되네.’
이건 몰랐지 뭐야.
예약을 했다길래 어디 맛집에서 저녁 타임 예약했는 줄 알았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호화롭네요. 창밖 경치도 좋고.”
“앞으로 자주 오실 겁니다.”
제임스 울프가 싱글벙글 웃었다.
“종종 오시나 봐요?”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이 있을 때 종종 들리는 장소입니다. 여기 요리사 실력이 좋거든요.”
“요리사요?”
“마르코 카푸어라는 사람입니다. 괜찮은 요리를 할 줄 압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하지만 제임스 울프가 칭찬한 사람이니 실력이 좋긴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나온 요리들은 하나같이 특별하기 짝이 없었다.
전채 요리부터 시작해서 메인 요리까지 생전 처음 맛보는 맛의 향연.
‘맛있긴 맛있네.’
정확히 말하자면 엄청 맛있다기 보다는 특이했다.
살면서 안 먹어본 맛이라고나 할까.
‘살짝 기름진 게 국밥이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면 가끔 와서 먹을 만하겠다.’
나중에 식구들도 한 번 데리고 와야지.
그렇게 식사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이 요리요?”
“예.”
나는 고개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맛있네요.”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제임스 울프는 그저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사실, 제가 지금까지 이곳에 데려온 예술가는 작가님을 포함해서 총 열 명이 안 됩니다.”
“음.”
“물론 토마스 킨케이드 그 친구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렇군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그만큼 귀한 대접을 해 준 거니까 감사한 줄 알아라.
그런 말인가.
사실 나름대로 떠오르는 바는 있었다.
‘돼지고기를 사 주는 사람은 그냥 좋은 사람이지만, 소고기를 사 주는 사람은 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
내가 조금 전에 먹은 스테이크는 분명 소고기 스테이크였다.
그 말인즉슨, 이 남자는 내게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었다.
‘자, 어디 제안을 한 번 꺼내 봐라.’
그렇게 제임스 울프의 속을 떠보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영국의 찰스 사치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글쎄요.”
요즘 이 이름을 자주 듣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돈 많은 사람 아닌가요? 영국에서 작가들 키워서 집단 하나 만든 사람이잖아요.”
“예, 찰스 사치는 yBa의 창립자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이지요.”
“그 이상이요?”
“영국 미술계는 찰스 사치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웃더니 말했다.
“찰스 사치의 자본, 찰스 사치의 홍보, 찰스 사치의 갤러리, 찰스 사치의 인간관계, 무엇 하나 대단하기 짝이 없죠.”
대뜸 칭찬을 늘어놓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싶은데 그가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찰스 사치처럼 되고 싶습니다.”
“······ 그렇군요.”
“예.”
제임스 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한 나라의 예술가들을 육성하다 못해, 전 세계의 에술계를 쥐락펴락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나름대로 멋지기는 하네요.”
“어마어마한 겁니다. 그야말로 찰스 사치는 세계 최고의 컬렉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누군가는 그를 두고 현대의 메디치라고 말하지만, 제 생각에는 다릅니다. 메디치가 중세의 찰스 사치인 겁니다. 전 그를 존경합니다. 그처럼 되고 싶습니다.”
제임스 울프가 계속해서 떠드는데, 나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람, 단순하기 짝이 없다.’
찰스 사치처럼 되고 싶다는 말에서 순수하기 짝이 없는 느낌이 흘러넘쳤다.
마치 초등학교에서 학생이 자기는 나중에 커서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제임스 울프는 초등학생과 한 가지가 달랐다.
‘실제로 그만한 능력이 된다는 거지.’
대충 알아보니 미국의 유망한 작가들의 작품이라면 다 한두 점씩은 소장하고 있다고 했던가.
‘투자한 기업들도 나중에는 크면 크지, 더 작아질 회사들은 아니고.’
어쩌면 정말로 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듣고 있는데 제임스 울프가 말했다.
“미국 미술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큽니다. 영국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질적인 면에서 영국 미술 시장에 비해 살짝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지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음.”
대답을 고민하는데, 그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케팅입니다.”
마케팅이라.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yBa 자체가 마케팅을 끝장나게 잘한 집단이 맞으니까.
‘실력도 실력이지만 마케팅이 중요하긴 하지. 예술처럼 절대적인 척도가 없는 장르라면 더더욱.’
와인만 봐도 그러하다.
프랑스 와인이 최고급 와인의 대명사로 통하는데, 실제로는 어떻던가.
품질로는 미국 와인에게 따라 잡힌 지 한참이었다.
이는 [파리의 심판] 사건이 증명하는 바였다.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훨씬 저렴한 미국 와인에 처절하리만치 쓸려나갔던가.’
프랑스 평론가들은 이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고는 몇 년 뒤 두 번째 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그때는 더 큰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시장이 바뀌었던가.
아니다.
프랑스 와인은 여전히 고급 와인의 대명사다.
미국 와인은 가성비로 먹는 와인이다.
‘결국, 술도 그렇고 미술도 그렇고 마케팅이 좀 크다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전 영국에 찰스 사치와 yBa가 있듯, 미국에서도 그 이상의 예술가 집단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 파리의 심판 > 끝
ⓒ 이한이™
< Outstanding >
뜬금없는 고백이다.
자기가 찰스 사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찰스 사치처럼 자기만의 예술가 사단을 꾸리고 싶단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질 이야기였다.
‘사실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될 것 같긴 했지만.’
내심 짐작하고 있던 바이기는 했다.
찰스 사치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럼 yBa를 빼놓을 수 없었겠지.
‘새로운 작가 사단의 탄생인가? 거기에 날 영입하려는 거고?’
머릿속으로 이래저래 추측하고 있으려니 제임스 울프가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미디어와 자본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찰스 사치는 영국 미술 시장에서도 그만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예, 영국 미술 시장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미국 시장에서 제가 전폭적으로 후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흥분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나는 슬쩍 물컵을 기울이며 말했다.
“폭발하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제임스 울프가 신명 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앞으로 미국 미술계는 많이 바뀔 겁니다. 경매, 전시, 의류업계와의 콜라보, 잡지, 교육기관 등 미술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서 제가 적극적으로 후원할 겁니다.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세계 미술 시장에 다시 한번 르네상스가 펼쳐지는 겁니다. 제 손으로 말입니다.”
말을 듣고 있으려니 솔깃하기는 했다.
사실, 그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건 내가 꿈꿔왔던 일이기도 했고.
‘JH 디자인을 혼자서 다 해 먹는 회사로 키우려고 했지.’
한국에서는 어찌저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이다.
제임스 울프는 이걸 미국에서 예술 특화로 시도하려는 것.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똑같다.
“레코드 회사가 아티스트들을 영입해서 자사의 레이블을 꾸리듯, 이번에는 제가 예술가들에게 특화된 브랜드를 창설할 겁니다.”
“yBa처럼 말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가 더 웃더니 말했다.
“그 브랜드의 이름은, 팀 아티펙스입니다.”
“팀 아티펙스요?”
마치 스포츠팀 이름이었다.
숨겨진 의미가 있는 말인가 싶은데 제임스 울프가 말을 이었다.
“아티펙스는 라틴어로 예술가를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예술가들이 모인 팀 아티펙스는, 앞으로 세계 미술 시장을 주도할 브랜드가 되겠죠.”
말 자체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듣고 있으려니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팀 아티펙스라고 했나. 전생에는 한 번도 못 들어봤던 말인데.’
예술에 관심이 많은 내가 못 들어봤다.
그렇다면 아마 어떤 일이 생겼던 게 아닐까.
성립 직전에 문제가 생겨서 해체됐다거나.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고.
예술가들끼리 모여서 일 하나 벌이자고 으쌰으쌰 해놓고, 당장 코앞에서 시들시들해지는 일은 흔하디흔하다.
애초에 제임스 울프가 찰스 사치처럼 됐다면 내가 그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겠지.
‘뭐, 굳이 당사자한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만.’
전생에는 안 됐더라도, 이번 생에는 잘 되면 그만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팀 아티펙스라는 곳에 제가 들어오길 바라는 거겠군요.”
“정확합니다.”
제임스 울프가 씨익 웃었다.
“작가님께서는 팀 아티펙스의 창립 멤버로서, 앞으로 들어올 예술가들에게 우리 색깔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 팀이 어떤 일을 할 건지. 원래 브랜드라는 게 시작이 중요합니다. 싸구려 브랜드로 시작해서 고급이 되긴 극히 어렵지요. 팀 아티펙스에 참여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느낌을 줘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동참했나요?”
“우선은 토마스 킨케이드 그 친구가 참여하기로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 외에도 대략 스무 명가량의 협조를 구한 상태입니다.”
음.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팀 아티펙스라고 했나.
토마스 킨케이드를 영업했다는 걸 보니, 여기가 yBa처럼 무조건 고급진 예술만 추구하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우선은 주요 갤러리와 경매 업체의 협력을 얻어 두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저희와 함께하신다면 장기적으로 큰 메리트를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솔깃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내 작품을 고가에 구매해 간 것도 이 사람 나름의 전략일 수 있겠네.’
작품은 첫 구매가가 높아야 앞으로 몸값을 올리기도 쉬웠다.
예를 들자면 트레이시 에민이 그러했다.
예술가로서 딱히 별 주목도 못 받았던 그녀가, 찰스 사치와 만나 수억에 작품을 거래하기 시작하자 바로 몸값이 급상승했다.
‘쿠사마 야요이 같은 일반적인 예술인이 몸값을 천천히 올린 거에 비하면 지나치게 빨랐지.’
그렇게 따지면 내 작품을 300만 달러나 주고 구매한 건 합리적인 결단이었다.
또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행동이기도 했다.
훗날 내 몸값을 구매가 이상으로 올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걸 테니까.
‘단순히 돈 많은 아저씨의 돈 자랑은 아니라는 거지.’
내가 그라고 생각해 보자.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이번 일을 대서특필하지 않을까.
뉴 뮤지엄에서 매진을 기록한 슈퍼스타.
구매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왜 하필 저죠?”
그렇다.
왜 나를 영입하려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가님께서 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그럴듯한 사람들도 많지 않나요? 더 큰 갤러리에도 많고.”
“그렇죠. 이미 커리어만 말하자면, 작가님보다 우수한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제임스 울프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널렸다니.
적나라하게 말하니까 조금 명치가 아프다 싶은데,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커리어라는 건 원래 적당한 재능과 시간만 있다면 일정 수준까지는 쌓을 수 있는 겁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 그게 진짜지요. 누구나 이류는 될 수 있지만, 일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가요?”
“예, ”
그렇다면 내게는 다른 무언가가 있단 말인가.
곧 그가 말했다.
“작가님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 그렇죠.”
나름대로 알아보기는 했나 보다.
“yBa의 트레이시 에민이 작가로서 주목을 받기까지 13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작가님과는 딱 10년 차이지요.”
그렇게 보니까 내가 정말 빨리 성장하긴 했구나 싶다.
제임스 울프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앞으로 10년 뒤, 작가님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사실, 이번 생에 들어서 내가 좀 빠르게 성장하긴 했다는 건 자주 느끼는 바였다.
‘한 40살 먹어서 적당한 기업 하나 운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난 아직 학부 3학년생에 불과하지.’
좀 지나치게 빠르다.
제임스 울프의 도움이 따른다면 더 빨라지겠지.
“뭐, 그런 겁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는 웃더니 말했다.
“전 지금의 작가님을 보고 투자하는 게 아닙니다. 10년 뒤의 작가님을 보고 투자하는 거지요. 전 어떤 일이든 10년 뒤를 보고 투자했습니다. 그게 제 대답입니다.”
이쯤 되면 나름대로 이해는 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거기에 들어간다고 치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작가님이 잘하시는 일을 알아봐야겠지요.”
이후로는 좀 더 실무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일을 하는 게 좋겠는가.
그런 이야기.
제임스 울프는 그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렇게 이야기가 오가기를 한참.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신인한테 너무 바람을 불어넣으시네요.”
“그래서 안 할 겁니까?”
“아뇨, 해야죠.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그가 의아해하는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도 나름대로 가능성 있는 아티스트들을 좀 알고 있거든요.”
“흠.”
그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말했다.
“실력 있는 작가는 누구나 환영이지만, 아무나 받겠다는 건 아닙니다. 저희 브랜드도 중요하기 때문에.”
“네, 어디까지나 직접 보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도 당장 팀에 들어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따로 매니저가 있거든요.”
일단은 심 대표와 상의를 해 볼 일이다.
혼자 잘났다고 놀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좀 그렇지 않은가.
“일단은 그렇게 알겠습니다.”
제임스 울프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작가님께서는 저희와 함께하게 되시리라는 직감이 드는군요.”
*
며칠 뒤.
인터넷에 화끈한 기사가 올라왔다.
[작가 이재하, 뉴 뮤지엄에서 가진 전시품 완판] [구매자는 불명] [가능성을 보고 결정했다고 밝혀] [짜고 치는 극인가? 아니면 정말로 미술계의 초인인가] [정부는 대한민국의 자랑 이재하의 병역을 면제해 줘야 한다]오래간만에 등장한 스타의 등장으로 인터넷이 화끈화끈했다.
이 시기의 한국은 해외 시장에서 인정받는 데 큰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의미 없다.
해외, 특히 미국에서 성공해야 진짜 성공이다.
이런 로망이 지배적이었다.
비록 이재하가 해외 시장에 진출은 했다고는 하지만 성공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 완판 소식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보라니까. 잘 될 거라고 했잖아. 누가 이재하 거품이라고 했냐.] [아직은 모르지. 아까 올라온 기사에서도 그랬잖아. 짜고 치는 걸 수도 있다고. 작품을 헐값에 올렸을지 누가 알아?] [판매액은 30억 원을 넘겼다던데?] [300만 달러 아님?] [300만 달러가 30억이야 멍청아] [내가 본 데서는 50억이었음] [이 모자란 것들은 자기들끼리도 의견 통일이 안 되네] [원 히트 원더일 줄 누가 알아? 아직은 더 봐야 한다.]인터넷이 시종일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아무리 논쟁을 해도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유라면 다양했다.
일반인들이 생각보다 미술 시장 시스템을 잘 모르는 게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로는 이재하의 커리어가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도 기사 올라왔다잖아] [링크 줘 봐] [옛다. http:www.nla······.] [번역은 알아서 하시고?] [링크만 가져다 줬으면 됐지 아주 떠먹여 달라고 하네 ㅋㅋㅋㅋㅋ] [응 자신 없어서 발 빼는 거 뻔히 보여 ㅋㅋㅋㅋㅋ] [저기 기사에서 outstanding이라고 하잖아. 대단했다는 거 아님?] [outstanding에는 뛰어나다는 뜻 외에도 그냥 툭 튀었다는 뜻도 있다. 그냥 길거리에 돌부리 튀어나와 있어도 outstanding임]사실 네티즌들에게 이런 자잘한 진실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한몫했다.
다만, 뉴 뮤지엄에서 전시를 갖기 전보다는 여론이 이재하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 이재하랑 같은 학과인데 1학년 때부터 괴물이었다. 학과에서 혼자 따로 놀았음. 과제 하나 하겠다고 그게 지금 프랜차이즈 카페로 키운 거는 앎?] [또 그 소리냐 ㅋㅋㅋㅋ 그것도 방송국에서 드라마 홍보하려고 구라 친 거잖아 ㅋㅋㅋㅋㅋ 같은 말 하고 또 하고 지겨워 죽겠네 ㅋㅋㅋㅋ] [ㅇㅇ 나도 네 지능이 지겨움] [저 새끼 맨날 이재하 욕하고 다니는 사람임. 내가 닉네임 외워 뒀다.]그렇게 이야기가 뜨거워지다 못해 지옥불까지 오가는 사이.
미국에서는 또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
“긴장돼 죽겠네요. 으음.”
“괜찮아요.”
심하윤 대표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당당하게. 그냥 아침방송 나갔다 온다는 생각으로.”
“방송이잖아요.”
나는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나는 미국 최대 방송국, ABS의 방송에 나갈 예정이었다.
뉴 뮤지엄에서 완판을 기록한 화제의 작가이기 때문.
물론 제임스 울프의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디어 천국 미국에서 방송 데뷔라.
긴장된다.
‘힘내자, 한국에서는 이미 여러 번 나와 봤잖아. 그냥 미국이라서 그렇지, 앞으로는 자주 나올 일이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튜디오 커튼을 걷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이었다.
덩치 큰 빨간 머리 사회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소개합니다! 뉴욕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제의 예술가, 뉴클리어 리!”
“······.”
덕분에 긴장이 확 사라졌다.
돌겠네.
< Outstanding > 끝
ⓒ 이한이™
< 도널드 트럼프 >
ABS.
미국 최대 방송사로 꼽히는 곳.
이곳의 저녁 10시부터 시작하는 방송인 엘더 쇼는 미국 최고의 토크쇼로도 유명했다.
‘한국에서도 유머 자료로 많이 돌아다녔지.’
나도 많이 봤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직접 출연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지금 나를 무려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고 있단 말이지.’
일개 토크쇼를 300만 명이 시청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300만은 어디까지나 미국에서 시청하는 사람들의 수에 불과했다.
미디어 천국 미국의 무서움이 이것이었다.
전국으로 퍼져나간다는 것.
미국에서 한 번 잘나가는 방송은 전 세계에서 무려 1억 명의 시청자를 확보한 것과 같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였다.
‘그래서 다 아득바득 미국으로 진출하려고 그렇게 난리인가.’
그래.
내가 그렇게 되었다.
아무튼, 이 토크쇼의 호스트, 엘더 핸드릭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 작가님을 뉴욕 시민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이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는 안 들어도 뻔하다.
3, 2, 1.
숫자를 세고 있으려니 그가 입을 열었다.
“핵폭탄이라고 부릅니다.”
예언 성공.
“그는 마치 핵폭탄같이 등장해 뉴욕 미술 시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뉴욕 데일리 뉴스의 오스본 기자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 작가님은 실제로 그만한 위력을 보여 주셨죠. 무려 첫 주에 작품을 완판하면서 말입니다. 그것도 300만 달러에! 축하드립니다. 제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버셨군요.”
관중석에서 감탄이 번져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도 터져 나왔다.
‘월급은 이겼지만, 연봉은 못 이겼다는 거 아니야?’
대단하군.
내가 어깨를 으쓱하고 있으려니 엘더 핸드릭이 말을 이었다.
“우리 시청자들은 작가님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궁금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준비했지요. 이봐요, 지미, 그 그림 좀 가져와 볼래요?”
그 말에 어느 남자가 커다란 액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내 작품이 담긴 액자였다.
그것도 크로키 느낌을 살려서 가볍게, 하지만 섬세하게 그린 그림.
방청객들이 감탄을 터뜨리는데 엘더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작가님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이 작품을 확보하기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힘들게 일합니다.”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슬슬 내 차례가 왔다는 말이겠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실 이번 쇼는 말 그대로 쇼였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각자 어떤 대화를 나눌지,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전부 정하고 시작했다.
왜냐.
처음부터 나라는 작가를 홍보하기 위한 무대로 기획됐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울프, 생각보다 정말 힘이 강한 사람이야.’
그의 권유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단순히 미술 좋아하는 실리콘 밸리 재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이었다.
말 한마디에 ABS 엘더 쇼에 자리를 만들다니.
엘더 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미국의 미디어를 지배한다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
미디어를 다루겠다는 그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제 눈에는 이 작품이 미국의 미래로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물어보고 싶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품을 흩어보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제 작품에서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일단 보는 사람들이 재밌어야 한다는 겁니다.”
“재미, 재미는 늘 중요하죠. 그런데 좀 더 작가적인 그런 건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런 것 있잖습니까. 시청자들을 계몽할 위대한 사상!”
“미술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개인적으로 좋은 투자 상품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예, 사실 요즘 작품들은 작품의 본질보다는 앞에 붙은 가격표에 무게가 쏠린 느낌이 있습니다. 작품을 보고 놀라기 전에 가격대를 보고 놀라죠.”
“300만 달러라던가 말이죠?”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데 나는 말했다.
“예, 아마 사람들은 앞으로 절 300만 달러의 사나이로 생각하겠죠. 그래서 전 생각했습니다.”
나는 잠시 호흡을 다시고는 말했다.
“가격보다 작품의 재미가 먼저 떠오를 미술을 만들어 보자고 말입니다.”
이게 중요하다.
yBs의 트레이시 에민 좋지.
하지만 그녀의 예술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혐오하듯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예 작품으로도 여기지 않는 사람도 많지.’
관심 없는 사람이 볼 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비싼 돈 주고 판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대중들은 오죽할까.
그녀의 대표작인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꼴 좋다고 비웃던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과연 르네상스의 명화가 똑같이 소실되었다고 해도 같은 반응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게 그녀의 작품이 가진 한계였다.
‘물론 예술가가 대중의 시선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내 취향은 또 그게 아니거든.’
대중에게 사랑받고 싶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고 싶다.
토마스 킨케이드의 그것과도 비슷했다.
어쩌면 그도 내게서 자신과 같은 기질을 느꼈기에 친근하게 접근했을지도 모르는 일.
“제 작품은 솔직합니다. 누가 보든 어떤 작품인지 그 재미를 알 수 있게끔 설계했습니다.”
“이 작품에도 그 설계라는 게 있겠군요.”
“예, 예를 들어 이 작품을 보면.”
나는 내 그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미래를 그렸습니다. 어떻습니까.”
“흠, 확실히 있을 법하군요.”
“제 이번 전시의 콘셉트도 같았습니다. 미래를 넘나드는 재미를 주고 싶었습니다.”
“오호.”
엘더는 웃더니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로 일어날 법한 미래를 그리신 것 같은데, 그럼 반대로 가장 일어나기 힘들 미래도 한번 보고 싶군요.”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오, 어떻게 말이죠?”
“노트와 연필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뒀습니다. 지미, 가지고 오세요.”
곧 아까 그 남자가 커다란 이젤과 스케치북을 가지고 왔다.
즉석에서 한번 그려 보라는 말이었다.
나는 조금 놀란 척했다.
물론, 미리 상의했던 진행 그대로였다.
‘보여 주기 좋은 작품을 그려달라고 했지.’
이 자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중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당연히 대중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좋은 그림을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흥미를 꼭 작품 내적으로만 유도할 필요는 없다.
현장에서 직접 그리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림을 일정 이상으로 잘 그리면,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쇼가 된다.’
나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대중에게 감탄을 일으킬 한 장을.
사삭.
곧 내 손이 스케치북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방청객들의 표정이 점차 변해갔다.
“오.”
“설마.”
“저거 내가 아는 그 사람 맞지?”
소란스러운 와중에 나는 그림을 완성했다.
그렇게 잠시.
도화지 위에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이 그려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하게 잘 그린 그림.
그런데 그 집무실에 앉은 사람이 좀 독특했다.
자본주의의 상징.
도널드 트럼프가 앉아 있었다.
“오우.”
엘더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 사람, 설마 제가 아는 그 사람은 아니겠죠?”
“아마 맞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자본주의로 흘러가는 미국의 수장 자리에 가장 자본주의다운 인물이 앉는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담아서 그렸습니다.”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전형적인 부자이기도 했다.
‘심심하면 사건을 일으키고, 문제 되는 발언을 터뜨리고, 유명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도 좋아하지.’
그런 그가 백악관 집무실에 앉게 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아무도 없었다.
당사자조차 몰랐을 터.
‘근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다시 삼키며 말했다.
“감상을 들려주세요.”
“흠.”
내 말에 엘더는 그 작품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소를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지배하는 미국이라니, 끔찍하군요. 오, 저는 아무런 말도 한 적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본 방송과 방송국은 정말 이 그림과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그의 과장된 말투에 방청객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함께 웃은 뒤 말했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생각할 겁니다. 트럼프가 지배하는 미국을 말입니다. 망할까요? 망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더 성공할 수도 있고요.”
“음, 확실한 건 이 그림은 비싼 가격에 팔릴 것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본인이 사 갈 수도 있겠군요.”
“그것도 한 가지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죠. 당사자가 이 방송을 보고 제게 연락을 준다면 말입니다. 보고 있죠? 기다리고 있습니다.”
“ABS는 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기를 잠시.
엘더 핸드릭은 날 보며 물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는 알았습니다.”
“예.”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떤 작품 활동을 하실지 살짝 귀띔해 줄 수 있겠나요?”
다분히 상업적인 질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나라는 작가에 대해서 시청자들에게 설명했다.
이제는 내가 앞으로 할 일을 말할 차례다.
나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원래 이런 건 비밀인데.”
“그러지 마시고 저희 방송에서 시원하게 말씀하시면 작가님에게도 홍보가 되니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제 시청률과 커리어도 그렇고 말입니다.”
“음, 그럼 살짝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오.”
나는 슬쩍 그에게 귓속말하듯 최대한 조용히 말했다.
“다음 전시는 가까운 시일 내에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엘더 핸드릭은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질렀다.
“센트럴 파크!”
방청객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퍼져나갔다.
“오, 실례, 제가 너무 놀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전시죠?”
“그건 비밀입니다.”
“너무하군요. 여러분, 너무한 뉴클리어 리였습니다.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토크쇼가 끝났다.
스튜디오에서 빠져나갈 무렵, 내 머릿속은 내가 실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
인터넷이 다시 한번 화끈하게 불타올랐다.
[이재하 엘더 쇼에 출연했다는데?] [이게 왜 진짜?] [거기 완전 스타들만 나가는 곳이잖아] [이재하가 그럴 체급이었나?] [즉석에서 그림 그리는 거 봤냐? 보면서 깜짝 놀랐다. 진짜 잘 그리기는 하더라]나라는 사람이 엘더 쇼에 출연했다는 게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뉴 뮤지엄은 아는 사람만 아는 미술관이지만, 엘더 쇼는 미국 미디어의 중심이다.
당연히 여파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 돈으로 매수했겠지] [이재하가 ABS 매수함? 아주 그냥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라] [돈으로 엘더 쇼에 출연할 수 있으면 그것도 실력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엘더 쇼가 원래 시청률만 되면 아무나 다 데려다가 방송하는 거 모름?] [그래서 너 데려다가 놓으면 사람들이 볼 것 같냐?] [쟤 원래부터 악플만 달던 사람임] [한심하다. 누구는 전시에서 인정받고 미국 TV에도 나왔는데 누구는 키보드 붙잡고 뒷담이나 까고 있네]이제는 어지간한 비평도 우스갯소리로 치부될 지경.
그런 글들을 읽고 있는데, 한설 선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심 대표님이 화내신다?”
“화낼 여력이 없으실걸요?”
“왜?”
“저 작품 판 거 수입 심 대표님한테도 돌아가거든요.”
그렇다.
들어온 300만 달러 중 미술관과 내게 돌아온 돈을 제외하고 일부는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일부라고 해도 원금이 크다 보니까 그것만 해도 몇억.
심하윤 대표의 표정은 요즘 싱글벙글하기 그지없었다.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아파트 한 채 사려고 알아보시나 보던데요.”
“······.”
한설 선배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작업실 한 편을 턱짓하며 물었다.
“그래, 그래서 이번 전시는 이걸로 진행하려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작가로서의 로망이라는 게 있잖아요. 옛날부터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는데, 슬슬 때가 온 거죠.”
< 도널드 트럼프 > 끝
ⓒ 이한이™
< 설렁탕 >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로망이 몇 개 있다.
돈 걱정 안 하고 만들기.
큰 거 만들기.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기.
중요한 건 스케일이다.
하지만 대다수 작가에게 이는 어디까지나 로망에 지나지 않았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지.’
유명 작가라도 수십 년을 가난에 허덕일 때가 많았다.
과거 만들었던 작품이 경매에서 비싼 가격에 팔리더라도, 그건 작가의 부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 앞에서 로망은 로망에서 그칠 뿐이지. 실현하기 어려우니까 로망일 수도 있고.’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라졌다.
로망을 현실로 바꿀 기회가 다가왔다.
얼마 전 제임스 울프와 만났을 때 내가 내걸었던 조건이 하나 있었다.
–
“센트럴 파크에서 전시를 열고 싶어요.”
“센트럴 파크라면, 설마 뉴욕 센트럴 파크를 말하는 겁니까?”
“네, 뉴욕의 심장부죠. 거기서 대규모 야외 전시를 열고 싶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겁니다.”
“흠······.”
“이게 제가 팀 아티펙스에 들어가는 조건이에요.”
–
센트럴 파크에서 대규모로 전시를 열고 싶다는 말.
이 말에 제임스 울프도 꽤 주저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직 가능성이 큰 작가일 뿐, 아직 정점에 올랐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사실 거절당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는 생각으로 지른 제안이기도 했다.
‘어차피 팀 아티펙스인지 뭔지, 전생에 못 들어본 걸 보면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었겠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내 마음에 여유를 주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마는 거고.’
큰 떡밥이라고 해서 무조건 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큰 떡밥이기에 더 조심한다.
망둑어는 떡밥 없이 바늘만 던져도 문다지만, 나는 국밥 정도는 던져야 문다.
내 제안에 제임스 울프도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단번에 받아들일 줄 알았던 모양.
하지만 결국 내 요구대로 진행됐다.
‘좋습니다, 작가라면 그 정도의 포부는 있어야지요.’
그렇게 나는 센트럴 파크를 무대로 전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전역은 아니었다.
공원 자체가 워낙 넓다 보니까 중앙 저수지를 비롯한 일부 구역만 간신히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 가까이 걸릴 규모였다.
“참 신기해.”
한설 선배가 중얼거렸다.
“어떤 게요?”
“그 사람 있잖아. 너한테 뭘 보고 이런 전시를 허락해 준 건지 그게 신기해.”
“글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제 몸값이 많이 올라갔다는 증거겠죠. 제가 이렇게 잘나가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개평이라도 받고 싶으시면 지금부터 잘 보여 두세요.”
“웃겨.”
한설 선배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왜 이거야?”
그녀가 내가 만들고 있는 작품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기둥이 몇 개씩 세워져 있었다.
단순히 크기만 한 기둥이 아니었다.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면서도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한국다운 거 하나 해 보려고요.”
“한국다운 거?”
내 말에 한설 선배는 의아한 듯 물었다.
“너 미국 오기 전에는 한국다운 거 안 한다면서. 국가적인 건 고려하지 않고 어디서나 먹힐 예술을 할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때는 그게 맞았죠.”
“지금은 아니라는 거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제가 한국인이라는 데 이목이 쏠려 있어요. 그렇다면 굳이 한국다운 소재를 피할 필요가 없죠.”
그렇다.
이미 세간에서는 나를 한국인 작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그런 이유로 주목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 한국다운 소재를 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한국다운 소재이기에 독특한 느낌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 문, 홍살문(紅箭門)은 그중에서도 극히 한국다운 작품이에요.”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
홍살문이 그런 작품이었다.
“그거 아세요? 홍살문은 사실 문의 기능이 없는 문이에요.”
“문의 기능?”
“바깥과 안을 차단하는 거요. 홍살문은 그냥 뻥 뚫려 있으니까 문의 기능이 없는 거죠.”
그냥 지나가고 싶으면 지나가면 된다.
문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홍살문은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문이 맞기도 해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그녀에게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부와 바깥을 다른 공간으로 나누는 거죠.”
격리하지 않는다.
다만, 나눈다.
나는 이 부분을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홍살문은 예로부터 귀한 장소 앞에 세우는 문이었어요. 관아, 궁궐, 서원, 묘지 등 특별한 장소 앞에 세워서 지금부터 이 장소가 신성한 장소라는 걸 알리는 역할을 했죠.”
“종교적인 건가?”
“원래는 그랬어요. 홍살문은 인도의 토라나(Torana)라는 문에서 기원한 건데, 이게 또 불교적인 장치였거든요. 물론 홍살문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별로 없어요. 그냥 기념품 같은 느낌에 가깝죠. 나라에서 일 잘한 신하한테 주는 상이기도 했고요.”
“흐음, 신기하네. 역사 수업 같기도 하고.”
한설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거 일본에도 비슷한 거 있지 않나?”
“맞아요.”
나는 부인하지 않고 말했다.
“일본에는 토리이(鳥居)라는 이름으로 전파됐죠. 거기서도 홍살문과 의미는 비슷해요. 토리이는 신사 앞에 세워두는데,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구역이라는 걸 나타내는 거예요.”
“그럼 넌 홍살문을 세워서 센트럴 파크를 신성한 구역으로 만들 생각이고?”
“정답이에요.”
나는 씨익 웃고는 말했다.
“뉴욕 센트럴 파크 전역을 무대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느낀 건데요. 솔직히 무리수더라고요.”
“그래?”
“네, 말은 좋았는데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어요.”
“어떤 문제?”
“센트럴 파크가 좀 지나치게 넓었다는 거죠.”
이게 좀 큰 문제였다.
물리적으로 큰 문제.
“작품을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커다란 야외 전시라면 더더욱 그렇죠. 작품 하나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언제 기다려서 그런 전시를 하겠어요? 방학 끝나면 다시 학교 다녀야 되는데.”
“이상한 구석에서 성실하네.”
“그냥 성실하다고 칭찬해 줘요. 아무튼, 전시 구역을 저수지 주변으로 한정해도 넓더라고요.”
“아, 이제 알겠다.”
한설 선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홍살문을 센트럴 파크 여기저기에 세워서 센트럴 파크 전역을 무대로 삼았다고 말장난을 하려는 거지?”
“말장난이라뇨. 진심인데.”
진심이다.
시간을 두고 겨루는 데 이만한 건 없다.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남다른 기분을 느낄걸요. 여기서부터는 코리안 트레디셔널 에리어다 그거죠. 작품 몇 개 설치하고 전역을 무대로 쓰는 건데, 꽤 가성비가 좋아요. 그리고 이게 전부는 아니에요.”
“또 뭐가 있어?”
“주문해 둔 게 있어요.”
나는 마저 웃고 말했다.
“청사초롱이라고 하는 건데, 조선식 등불이죠. 그 왜 있잖아요. 들고 다니면 은은하게 빛나는 거. 그걸 공원 전체에 배치할 거예요. 수백 개 이상.”
“아하, 부족한 스케일은 빛으로 때우겠다는 거네.”
“맞아요. 코리안 일루미네이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말마따나 시간 싸움이었다.
청사초롱은 한국에서 대규모로 생산되고 있다.
이걸 수입해서 뉴욕 센트럴 파크 내부에 배치해서 쓸 예정이었다.
당연하지만 여기에서 필요한 비용은 전부 제임스 울프에게 받아냈다.
“일반 방문객들한테도 판매할 겁니다. 조선식 불꽃 축제라고 하면 느낌이 맞겠네요.”
“흠, 아이디어 자체는 좋은 것 같은데.”
“좋을 수밖에 없죠.”
센트럴 파크 입구마다 홍살문을 배치해서 이 구역이 특별한 구역이라는 걸 알린다.
내부에는 청사초롱을 잔뜩 배치해서 분위기를 살린다.
‘산책하기 딱 좋을걸?’
한정된 제작 기간을 최대한 살린 작품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는 거예요. 바깥은 뉴욕이지만, 여기서부터는 조선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강조하는 거죠.”
“아이디어가 괜찮네.”
“그렇죠? 사실 시간만 맞으면 더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벽을 구해와서 시라도 몇 구절 적어 둔다거나.”
그렇게 뿌듯해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거 다 좋은데 한 가지가 걱정된다.”
규태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뭐가?”
의아하다.
규태가 지적을 하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싶은데, 그가 말했다.
“초롱이라면 불을 켠다는 거잖아.”
“그렇지.”
“공원에서 불 켜면 불나지 않을까?”
화재가 일어날 수 있다.
규태치고는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하지만 나라고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요즘은 다 안에 전구 넣어서 쓴대.”
“음.”
규태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더니 중얼거렸다.
“과학의 승리네.”
“그렇지.”
역사는 나아간다.
또 과학도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