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5)
두 번 사는 미대생 85화(85/93)
*
이번 전시의 이름이 확정되었다.
[Time in Korea].이번 전시의 이름이었다.
미래의 성공한 어느 만화에서 이름을 따 왔다.
그리고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거 개학하기 전까지 전부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당연하지만 나는 학부생이다.
이번 행사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교를 마저 다닐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장 미국에서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
“이번 전시의 콘셉트는 공간과 시간의 조화입니다.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또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줄 수 있게끔 할 겁니다.”
인터뷰가 많았다.
제임스 울프가 미디어를 강조한 만큼 적극적인 홍보에 힘을 썼는데, 덕분에 하루에 많을 때는 인터뷰만 다섯 곳을 돌아야 했다.
동시에 작품 제작에도 힘을 기울였다.
아무리 짧은 시간에 제작할 수 있게끔 소재를 신중히 선택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양이 양이니만큼 단기간에 끝날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네, 그 일은 형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강연 의뢰요? 그건 한국에 돌아가서 제가 따로 미팅을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JH 디자인 업무도 밀렸다.
결론적으로 나는 바빠졌다.
이 일이 끝나는가 하면 저 일이 밀어닥치고, 저 일이 끝나면 또 다음 일이 왔다.
‘일 적게 하려고 직원들 뽑은 건데.’
슬프다.
JH 디자인 일이 줄은 건 좋았는데, 다른 곳에서 일이 늘면서 균형을 되찾았다.
하루하루 피로가 쌓여 간다.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간다.’
종일 바쁘게 일하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고, 깨어나면 바로 일어나서 다시 일하러 가는 나날의 반복.
그 나날 속에서 나는 조금 지쳤다.
그렇게 일에 빠져 살다가 졸고 있는 순간이었다.
“야.”
“으음.”
“야, 일어나.”
“5분만 더······.”
“너 10분 전에도 그 말 했어.”
그랬나.
워낙 정신이 없어서 몰랐네.
“흐아암.”
기지개를 켜고 나니 한설 선배가 옆에서 서 있었다.
“왜 자는 사람을 깨우고 그래요.”
“곧 가게 문 닫으니까 그렇지.”
“가게 문이요?”
“나 같으면 물어볼 시간에 일어나겠다. 내가 어련히 알아봐 둔 가게가 있으니까 얼른 일어나.”
“으음, 알았어요.”
나는 어찌 되었든 그녀의 말대로 일어났다.
“우리 어디 가는데요?”
내 질문에 한설 선배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알려줄 거지롱.”
“······.”
이거 당황스럽네.
아무튼, 그렇게 작업실을 나온 뒤 그녀는 바로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어느 주소를 말했다.
“맨해튼 32번가로 가 주세요.”
택시가 부드럽게 밤길을 내달리는데, 창밖으로 전등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저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청사초롱을 배치해야 그럴듯할까 계속 고민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한설 선배가 말했다.
“잠깐 눈이나 더 붙여.”
“네.”
나는 자던 잠을 다시 잤다.
그리고 눈을 뜨자.
택시가 어느 가게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는.’
한설 선배가 중얼거렸다.
“여기가 맛집이라더라.”
눈앞의 가게.
그곳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태평 설렁탕]그 단어를 보자마자 솜털이 곤두서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뉴욕에 오고 나서 그간 쌓였던 서러움이 한순간에 풀리는 기분.
“뭐해.”
한설 선배가 택시 문을 열면서 말했다.
“가라, 이재하.”
“넵.”
< 설렁탕 > 끝
ⓒ 이한이™
< 팀 아티펙스 >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이유 모를 피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식생활이었다.
‘외국 나가서 괜히 밥 잘 먹으라는 게 아니지.’
이제는 식사도 작품 활동의 과정으로 간주했다.
스포츠 선수들이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식단을 지키는 것과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외국으로 나와서 식단이 바뀌니 활기를 잃었던 것.
식단을 한식 위주로 다시 꾸리자, 내 작업 과정도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다.
“예전보다 느낌이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규태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나는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밥을 잘 먹어서 그래.”
“겨우 밥 하나로?”
“신토불이라잖아. 게임 속 캐릭터도 기술을 쓰려면 MP가 필요한 법인데, 나도 GP가 필요하지.”
“설마 그거 국밥 포인트?”
“잘 아네.”
“······.”
규태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자기 관리도 실력이야.’
한층 편안해진 마음으로 만든 홍살문은 예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그럴듯했다.
그리고 다른 작업물들도 그러했다.
“이것 좀 봐 주라.”
규태가 독특한 시도를 했다.
옷을 만들었다.
나는 그가 넘긴 옷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말했다.
“괜찮네.”
“진짜로?”
“아마도.”
규태가 보여준 옷은 정말로 그럴듯했다.
“한복이랑 현대 의상을 섞은 거지?”
“응.”
규태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나는 살짝 감탄해 버리고 말았다.
‘묘한 구석에서 창의력이 좋단 말이지.’
소가죽으로 만든 한복이라.
‘귀족스러운 느낌이 물씬 드네. 살짝 고딕풍이기도 하고.’
규태가 또 어떤 신비로운 뻘짓을 하나 지켜봤더니, 대뜸 이런 게 튀어나왔다.
내 두 눈으로 보기 전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으리라.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규태는 심심하면 계속 뭘 가지고 왔다.
“또 만들어 봤다.”
“또?”
“할 일이 없어서 그런다.”
계속 뭐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쌓인 게 벌써 여러 벌.
보고 있으려니 그냥 묵혀 두기에는 어딘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쯤 나도 결심했다.
‘슬슬 규태한테도 뭐 하나 해 줄 때가 됐지.’
비행기에서부터 생각했던 일이 있었다.
미국 일이 잘 풀리거든, 규태에게도 좋은 자리 하나 만들어 주자고.
왜.
예전에 야누스와의 콜라보 일도 내가 걷어찼던 것 아니었는가.
그때 규태가 아쉬워했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마침 뭐라도 해 주고 싶었던 참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흠.”
작업물을 보고 싶다며 내 작업실로 찾아온 제임스 울프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한국의 전통 양식인가요?”
“홍살문이라고 하는 물건이에요.”
“음, 느낌 있군요.”
반응이 좋다.
그는 이번에는 내가 보여준 옷을 천천히 돌아보더니 다시 말했다.
“이건 한국 전통 복장인가요?”
그렇다.
규태가 그렸던 작업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한복이라고 합니다.”
“한복.”
“거기에 현대적인 감성을 섞었습니다. 당장 뉴욕 길거리에서 입어도 좋을 느낌으로요.”
내가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규태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전시가 한국 전통 예술품을 콘셉트로 삼은 만큼, 이런 의상도 써먹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마련했습니다. 기왕 한국적인 작가라고 소개한 상황이니, 한 번 이쪽으로 밀어 보려고요.”
“좋군요.”
제임스 울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한국적인 거라면 역시 핵폭······.”
“그거 말고요.”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자른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런 옷을 단발적인 프로젝트로 끝내기는 좀 아쉽더라고요. 작품이 좀 괜찮다 보니까요.”
“확실히 참신하기는 합니다. 요즘 전통 의상에 현대 트렌드를 접목하는 시도가 잦은데, 그중에서도 괜찮은 편 같군요.”
“이 친구가 평소부터 원래 의상 쪽으로 관심이 많았거든요. 더 있는데 한 번 보실래요?”
“전 환영입니다.”
“잠시만요. 보여드릴 테니까 천천히 보세요.”
나는 그에게 규태의 스케치북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걸 읽는 제임스 울프의 얼굴에 점차 감탄이 번져나갔다.
“호오······ 이건······ 좋군요. 하나같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반응이 좋다.
동시에 내 가슴에도 뿌듯한 감정이 올라왔다.
‘지난 몇 년간 규태가 열심히 공부하기는 했지.’
원래부터 동대문 의류 시장에서 자란 그다.
한예원에 입학한 뒤로도 계속해서 옷을 관찰했고, 그렇게 자라난 그의 감성에 JH 디자인의 아이덴티티가 깃들며 점차 꽃을 피워냈다.
‘옷에 들어가는 패턴이 벽화를 닮았어.’
그렇다.
규태는 그간 JH 디자인에서 벽화 일을 하면서 내가 만들어 둔 패턴을 달달 외웠는데, 그게 그의 의상 디자인에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내가 만든 것과 아예 같다는 건 또 아니었다.
규태는 나아가 그걸 자기만의 색깔로 발전시켰다.
‘원본이 좋으니까 세련됐네.’
내 콧대가 적당히 올라가는 걸 참기 어렵다.
그의 노력을 아는 나이니만큼, 그가 칭찬받는 건 날 칭찬하는 것과도 같았다.
“흠, 으음, 흠.”
제임스 울프는 감탄하면서도 스케치북을 천천히 넘기기를 한참.
스케치북을 천천히 덮으며 말했다.
“이쪽 분과 직접 대화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영어는 하실 줄 아나요?”
“잘한다고는 못하겠는데, 어느 정도는요.”
“듣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아마도요?”
“알겠습니다.”
그는 대뜸 고개를 끄덕이고는 규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잠깐 저랑 둘이서 대화 좀 나누시지요.”
“네?”
“듣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임스 울프의 말에 규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도 살짝 놀랐다.
‘이 사람, 무조건 둘이서 대화 나누는 게 취향인가 보내.’
나 때도 그랬는데, 규태에게도 그러는 건가.
솔직한 마음으로는 엿듣고 싶다.
조금 옆에서 도와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이 사람 나름의 사업 방식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설마 내가 중간에 끼어 있는데 등쳐먹을 리도 없고, 이제부터는 규태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으음.”
규태는 제임스 울프와 나를 번갈아서 바라봤다.
나는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잠깐만······.”
규태는 마지못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약 10분이 흘렀다.
규태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뭔가 좋은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표정이 좀 이상했다.
‘저거 신났네.’
내가 어깨를 으쓱하는데, 규태가 다짜고짜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를 껴안으려는 듯 팔을 벌렸다.
그래서 피했다.
“아, 왜.”
규태가 어이없어하는데,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림도 없지. 나는 나보다 수입이 적은 남자의 포옹은 받지 않는다.”
“······.”
“푸흐흐.”
대충 분위기를 알았는지 제임스 울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아, 너무 재밌어서 웃었습니다.”
“무슨 좋은 이야기가 있었나 봐요?”
“예, 구체적인 사항은 비밀입니다만.”
둘이서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를 나눴기에 저러는지 모르겠다.
뭐.
알아서 잘 했겠지.
비밀이라면 비밀인 거다.
‘나중에 규태 옆구리 찔러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임스 울프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오늘 여기에 온 건 작가님에게 드릴 말씀도 있어서인데.”
“저한테 할 말이요?”
“예.”
할 말이 또 남았나.
“저기 작품 확인하는 것 때문인가요?”
“그것도 있습니다만, 팀 아티펙스와 관련된 일도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팀 아티펙스.
기다렸던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동안 너무 아무런 말도 없어서 의아하던 참이었다.
드디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언제 대중에 공개하나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바람만 집어넣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
마침 잘 됐다.
드디어 일이 생겼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제임스 울프가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팀 아티펙스의 멤버들과 작은 파티가 있습니다.”
“파티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만나서 서로 얼굴 정도를 익히는 자리입니다. 마침 작가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많으니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여기 사람들을 만나는구나.’
내가 그에게 들은 팀 아티펙스는 단순한 예술가 모임이 아니었다.
작가들만 모인 것도 아니다.
배우, 가수, 화가, 디자이너를 막론하고 각 분야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창작자들을 전부 모았다고 하였다.
‘이번 모임에 과연 어떤 사람들이 나오는 걸까.’
그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기대되는데 제임스 울프가 말을 이었다.
“파티는 다음 주 토요일 저녁입니다. 시간만 괜찮으시다면 가능한 한 꼭 참여해서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심심하던 참에 마침 잘 됐다.
*
뭐든 그렇다.
목표가 생기면 중간 과정은 재빠르게 지나간다.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센트럴 파크 전시를 일주일 앞두었을 무렵.
나는 제임스 울프가 앞서 언급했던 그 파티에 참석했다.
물론 나 혼자서는 아니었다.
“그만 좀 떨어라.”
“누, 누님, 이 상황에 어떻게 안, 안 떨어요.”
“정신 사나워.”
규태 그리고 한설 선배와 함께 방문했다.
그런데 규태는 긴장하다 못해 떨다시피 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긴장되나?’
내가 다 의아할 정도인데 규태는 어느 남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사람 하밋 닐이잖아.”
그곳을 가리키니 어느 노인이 서 있었다.
위에는 청자켓을, 아래로도 청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청청 패션.
어지간히 몸매 좋은 모델이 입어도 안구 테러가 된다는 그 패션을, 적어도 70은 족히 넘긴 것 같은 노인이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또 어울렸다.
‘이야, 핏 죽이네.’
나는 살짝 감탄하면서 말했다.
“저 사람이 누군데?”
“하밋 닐을 모른다고?”
규태가 화들짝 놀라서는 말했다.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의 기본 양식을 만든 사람인데?”
“이 옷?”
“그래! 세계 2차대전 전후 현대 의상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게 저 사람인데, 정말로 하밋 닐을 모른다고?”
“아니, 당연히 모르지.”
“모르면 안 되지.”
“모를 수도 있지. 내가 의상 디자인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코코 샤넬이나 칼 라커펠트라면 모르겠다.”
“하밋 닐은 의류 산업에 미친 영향으로는 그 두 사람보다 훨씬 큰 사람이야!”
규태답지 않은 기세에 나까지 잠깐 움찔했다.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나.’
하지만 애초에 자기 분야가 아니라면 관심을 가진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옷이라는 분야가 원래 유독 그랬다.
아는 사람들만 잘 안다.
모르는 사람은 절대 모른다.
‘뭐, 규태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 테니 저 사람이 대단하긴 한 사람인가 보지.’
어찌 되었든 규태에게 저 하밋 닐이라는 사람은 거의 슈퍼스타에 가까운 눈치였다.
나는 규태에게 슬쩍 말했다.
“나중에 가서 연락처라도 물어보는 건 어때.”
“나 따위가?”
“······”
어지간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 앞으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또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기회가 몇 번 있을 것 같아? 있을 때 잡아야지. 지금 전 세계에 의상 디자인 지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지? 그중에서 하밋 닐과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질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날릴 거야?”
“으으, 으으으······.”
내가 말을 이을수록 규태의 눈알이 핑핑 돌았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나, 다녀온다.”
“옳지.”
그렇게 규태가 하밋 닐에게 다가가서 말을 붙이는 걸 보면서 흐뭇하게 웃는데, 문득 내 눈에도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 사람.’
파티장 한쪽에 좀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나와도 이미 한 번 만나본 사람이었다.
‘와, 여기서 다시 만난다고?’
드로잉의 신, 애슐리 크루거였다.
< 팀 아티펙스 > 끝
ⓒ 이한이™
< 작가를 착취하는 작가 >
‘애슐리 크루거를 여기서 만난다고?’
깜짝 놀랐다.
애슐리 크루거.
전 세계에서 드로잉 실력으로는 가장 유명한 남자.
나는 오래전 한국에서 그의 드로잉 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오경진 회장이 일을 잘 해줘서 고맙다면서 티켓을 구해다 줬었지.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연락처도 따로 받았었는데, 까먹고 연락을 안 줬었네.’
규태를 놀릴 때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놓치는 기회가 있었구나.
아무튼, 저쪽에 내 우상이 걸어 다니고 있다.
왠지 모를 감회에 사로잡혀 있는데, 막상 다가가서 말을 붙이기는 또 어색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하지?’
다가가서 할 말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규태에게 아까 그 하밋 닐이라는 사람이 우상이었듯, 내게는 애슐리 크루거가 우상이었다.
어쩔 수 없다.
전생을 통틀어 내 드로잉은 애슐리의 그림자를 천천히 따라왔다.
이래저래 내 색깔이 섞이다 보니 다소 달라졌지만, 내 안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애슐리 크루거였다.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하지? 내가 당신 덕분에 이만큼 컸다고? 아니야. 내가 무슨 애도 아니잖아. 그럼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아니야, 그것도 뜬금없어.’
그렇게 한참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돌리는 참이었다.
“오.”
어느새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규태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애슐리잖아.”
규태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기겁해서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야, 야, 하지 마.”
“응? 왜.”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 됐어.”
“웃기시네. 언제는 나보고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을 것 같냐고 그렇게 잘난 척해 놓고는, 이제 자기 차례가 되니까 발을 빼?”
치사하게 정설을 내뱉다니.
규태는 피식피식 웃는데, 기분이 영 새삼스러웠다.
그런데 이게 은근히 소란스러웠나 보다.
순간 애슐리가 이쪽을 바라봤다.
‘헉.’
긴장이 과해서 순간적으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데 그가 말했다.
“미스터 이?”
그 순간 내 표정에 안도의 한숨이 번져나갔다.
미스터 이.
몇 년 전 그가 나를 불러줬던 그 이름이었다.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
적어도 핵폭탄은 아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내쉬고는 말했다.
“오래간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몇 년 만이죠?”
*
막상 대화를 트자 할 말이 조금 많았다.
“놀랍군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이가 토마스 킨케이드와 전시를 함께 열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설마 그 일이 그렇게 연결이 될 줄이야.”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세상일이 다 이런가 봐요. 뒤죽박죽이네요.”
딱 한 번 만났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람이 굉장히 오랜 시간 만났던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어쩌다 보니까 미국으로 와서 전시를 열게 된 일.
“제 갤러리 대표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미국까지 따라와서 일을 봐 주시고,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에요.”
“예, 매니저는 중요합니다. 혼자서 다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치기 마련이지요. 고립되기 좋은 직업일수록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잘 대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게 다 나중에 재산이 됩니다. 주제를 넘는 참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애슐리는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말했다.
“그건 그렇고 대단하군요. 그때도 미스터 이라면 뭐가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설마 미국에서 그렇게 잘 해쳐 나오시고는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요.”
정말로 몰랐다.
내 눈앞에 내 우상이 앉아 있다.
나는 한때 애슐리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존경하게 되었을 무렵,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랬던 것이 이번 생에는 드로잉쇼의 관객으로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래.
이제 나는 그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입장으로 섰다.
‘내가 많이 성장했구나.’
정신적인 스승을 마주한 기분은 그러했다.
“애슐리 씨도 팀 아티펙스에 들어오신 건가요?”
“예, 공연 쪽으로 후원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승낙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미스터 이는 팀 아티펙스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음.”
잘 아는가를 묻는다면, 솔직히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당장 애슐리가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도 몰랐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잘 몰라요. 초대받은 것도 최근이라서요. 그냥 잘나가는 예술인들 모인 자리라는 것 정도만 압니다.”
“그렇군요.”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실 그게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지금 이곳에도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좀 많지 않습니까?”
“네, 솔직히 많이 놀랐네요. 설마 애슐리 씨를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후후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아직 진짜는 안 왔군요.”
“진짜요?”
나는 조금 놀랐다.
진짜라.
그럼 남은 사람들은 가짜란 말인가.
실력 넘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설마 이 이상이 있나.
의아한 마음으로 되묻는데 그가 말했다.
“예, 진짜가 있습니다. 팀 아티펙스의 간판이 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사실 오늘은 저도 그 사람을 보려고 여기에 나온 참이었습니다만.”
“그게 누구죠?”
“저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애슐리가 웃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에 한층 더 의아해졌다.
드로잉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있다니.
애슐리가 겸손한 성격이라는 걸 고려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또 있나 싶었다.
‘설마 토마스 킨케이드를 말하는 건가?’
아니다.
잘 보아하니 저쪽 구석에서 껄껄 웃으며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마시던 와인 잔을 슬쩍 숨겼다.
‘아니, 술 좀 끊으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나중에 다시 쪼아야겠다.
아무튼, 애슐리는 모르는 게 이상하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흠, 정말로 못 들어보셨나 보군요.”
“네, 아직 들은 게 많지 않아서.”
“알겠습니다.”
그는 헛기침을 뱉더니 말했다.
“아직은 비밀인데, 어차피 금방 알게 될 테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다음 순간이었다.
“리처드 아이브스라고 아십니까?”
애슐리 크루거의 말에 나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끼면서 말했다.
리처드 아이브스.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리처드 아이브스라면, 설마 그 배우 겸 작가 겸 가수 말하는 거 맞나요?”
“잘 아시나 봅니다.”
나는 그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리처드 아이브스.
그 사람은, 21세기 미술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악인이었으니까.
*
미술계에는 원래 빌런이 많다.
성격이 배배 꼬인 작가 정도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 많다.
잘 모르면서 비방부터 하고 보는 관객도 그렇다.
전시 예술을 보러 가서 전시품을 파괴하는 사람도 꽤 흔했다.
그리고 또 작가를 착취하는 갤러리도 그러하다.
‘생각할수록 계속 튀어나오네.’
요컨대, 미술계에는 빌런이 많았다.
정말 많았다.
타 업계와 비교해서도 걸출할 지경.
자랑스럽다.
그런데 이런 바닥에서 최악의 빌런으로 꼽히는 사람이 있었다.
리처드 아이브스.
그였다.
‘설마 리처드 아이브스가 팀 아티펙스에 참여했을 줄이야.’
그제야 팀 아티펙스의 숨겨진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돈 많은 재벌이 잘난 작가들을 모아놓고 만든 팀이 왜 제대로 날개도 못 펴고 저물었는가.
리처드 아이브스가 끼었다고 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작가를 착취하는 작가.’
리처드 아이브스의 대표적인 별명이었다.
그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 많았다.
‘공장을 만들어서 작가들을 감금하고, 작품이 나올 때까지 학대했다고 했었나.’
유능한 신인 작가에게 접근한다.
리처드 아이브스는 원래 유명한 거물이니, 신인 작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어느 정도 친해졌다 싶으면, 이미 거미줄 위에 올라간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미술계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아무런 반항도 못 하게끔 철저하게 입을 막는다. 필요하다면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철저하게 상대를 억압한 상태에서, 리처드 아이브스 자신을 위해 작품을 쏟아내는 기계로 써먹었다.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방에서 나오지 못한다.
밥도 주지 않는다.
바깥과 통신할 수단도 빼앗는다.
‘핸드폰을 빼앗아서 자기가 당사자인 척했다고 했지.’
작가들은 원래 조금만 우울하다 싶으면 잠적을 타는 일이 많다.
리처드 아이브스는 이 사실을 역이용했다.
그렇게 감금당한 작가들이 어떻게든 연명하려면 작품을 만드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
리처드 아이브스는 이렇게 현대의 미술 노예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발표했다.
‘당연히 천재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지.’
그는 천의 화가라고도 불렸는데, 한 사람이 해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화풍을 소화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다.
애초에 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수많은 작가를 착취한 게 몇 년.
점차 이 사실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물 위로 올라왔고, 리처드 아이브스는 홀로 모든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섰다.
그래.
리처드 아이브스는 몰락할 미래가 정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팀 아티펙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면······ 제임스 울프 그 사람이 사업을 접더라도 이상하지 않아.’
한 번 똥물이 튀긴 상황에서 같은 일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미술사에 남을 만큼 성대한 실패를 경험했으니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지.
이뿐이랴.
다시 시작하려고 한들, 작가들부터 제임스 울프를 두고 리처드 아이브스와 내통했다고 의심했을 수도 있다.
아니, 당장 나부터가 의심스럽다.
‘어디까지 엮인 거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한데 옆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만졌다.
“괜찮아?”
“아.”
움찔하고 보니 한설 선배였다.
“안 돌아오길래 봤더니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이런 자리가 불편하면 그냥 나가도 되고.”
그럴까.
그냥 여기서 도망갈까.
또 모른다.
내가 지금이라도 손을 끊는다면, 팀 아티펙스와 관련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나도 받아먹은 게 있었다.
‘오히려 공범 취급을 받을 수도 있어.’
돌이켜 보거든, 나는 이미 뉴욕 센트럴 파크 전시까지 약속받은 상태였다.
제임스 울프가 내게 거는 기대가 좀 컸다.
신인 작가인 나한테 그만큼 퍼줬다.
아마 다른 작가들도 이래저래 받은 게 좀 있지 않을까.
‘다 알면서 묵인한 건가? 아니면 정말로 몰랐던 건가?’
한 번 의심을 시작하자 밑도 끝도 없다.
내가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는데 한설 선배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아 진짜, 사람 답답하게 만드네. 네가 무슨 회사에서 권고사직 당한 가장이야?”
“······.”
이야.
비유력이 기똥차네.
“맞고 말할래? 아니면 그냥 말할래?”
“저기요, 누나.”
나는 고개를 저어서 털어내고는 말했다.
“누나는요. 나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나쁜 사람?”
한설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막 남을 착취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공범일 수도 있어요.”
“그런 나쁜 사람이 있어?”
“아뇨, 만약에 있다고 가정하고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한설 선배는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하더니 말했다.
“내부고발해야지.”
“······.”
“공범으로 엮이기 싫으면 먼저 터뜨려야지. 알면서도 가만히 있으면 공범 맞잖아.”
응.
그 말이 맞긴 하네.
가만히 있으면 공범 맞지.
크, 내가 그걸 몰랐네.
‘가만 보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봤다.
리처드 아이브스.
그 사람의 범죄행각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일단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최근에 확 뜬 신인 작가.
그게 나니까.
‘그래, 못할 거 뭐야. 한 번 해 보자.’
정신이 돌아왔다.
< 작가를 착취하는 작가 > 끝
ⓒ 이한이™
< 리처드 아이브스 >
미래에 유명해진 말이 있다.
쓰레기는 먼저 본 사람이 치우는 게 맞다.
그런데 쓰레기가 대놓고 쓰레기라면 좀 쉽다.
하지만 여기 이 자리에 리처드 아이브스가 쓰레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얼마 안 되겠지.’
어디까지 엮였을지 모른다.
그래도 가만히 있겠는가.
남들이 안 치운다면 내가 치우는 수밖에.
가만히 있어서 공범자 취급을 받느니, 먼저 명치를 치는 게 맞다.
나는 대충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상황이 받쳐줄 때 이야기.
‘지금의 리처드 아이브스는 존경받는 예술인이야.’
온갖 예술 장르를 섭렵하면서 현대의 다빈치 정도 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난데없이 경찰에 신고한들 씨알이나 먹힐 리가.
오히려 내가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좋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선은 리처드 아이브스와 가까워진 다음에 생각한다.’
자세한 건 그다음 이야기다.
나는 대충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누나.”
“왜.”
“어디서 이상한 사람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마세요.”
“······.”
한설 선배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초등학생 이후로 이런 말 듣기는 처음이네.”
“푸훕.”
규태까지 같이 웃길래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웃지 마. 네 이야기야.”
“어? 응.”
아무튼, 당장 리처드 아이브스가 파티장에 없는 이상 내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밖에 달리 없었다.
‘늦네.’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 보면 가끔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긴 했다.
“반갑습니다. 윌리엄 앳킨스입니다.”
누구 하나 유명한 예술계 인사들.
아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모르더라도 배경이 어마어마한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서는 독특한 사람도 있었다.
“아, 전시 재밌게 봤습니다. 질 다비라고 합니다. 지난 전시는 잘 봤습니다.”
머리를 길게 늘여서 묶은 사람이었는데, 자기소개를 하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훈수를 놓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작가님의 작품 구상 자체는 나무랄 게 없었습니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예, 소재의 한계가 보인다고 할까요. 더 폭넓은 소재를 다루다 보면 작가님의 작품 세계도······.”
“흠, 그렇군요.”
“더욱이 작품의 터치가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뻣뻣합니다.”
“아하.”
“개선하면 나아질 부분이 보이기에 아쉽습니다. 아마 본인도 느끼고 있으셨을 테지요?”
“음.”
적당히 응수를 해 주니 계속 말을 쏟아낸다.
보통 작가들끼리 초면에 지적을 하나.
이제 미국 문화인가.
‘그런데 이 사람 유명하기는 한가?’
빌 자비라고 했었나.
이름도 잘 안 떠오른다.
잘 모르는 사람의 지적을 계속 듣다 보니까 슬슬 거슬릴 지경.
살짝 멍멍이 소리로 들리는 부분도 있었다.
머리카락도 그러고 보니까 좀 개털 같고.
‘그래도 파티장 분위기가 있으니까 면박은 주면 안 되겠고, 화장실이라도 다녀온다고 말하고 빠질까.’
그렇게 대충 한 귀로 흘리며 고민하는 참이었다.
‘어?’
회장 사람들의 이목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파티장 끝으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늦게 끝나서 그만.”
리처드 아이브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