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8)
두 번 사는 미대생 88화(88/93)
*
앤서니 에드워드.
프랑스계 미국인.
영화 속 흡혈귀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젊은 화가였다.
그가 삐쩍 마른 몰골로 묵묵하게 붓질을 하고 있었다.
스륵, 스륵.
그런데 얼핏 보기에 다른 작가들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 사람에게는, 단 한 가지 커다란 특징이 있었다.
‘전생에 리처드 아이브스를 내부고발한 사람이다.’
리처드 아이브스를 찌르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사실에 주목했다.
왜냐.
실제로 둘러봤더니 이곳 사람들은 다 마약에 중독된 상태였다.
내가 알기로 마약 중독자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
내가 도와주려고 해도 막상 저쪽에서 호응을 안 해주면 막상 꽝이겠지.
하지만 앤서니 에드워드는 다르다.
저 사람은 이 지옥 같은 곳에서도 스스로 빠져나올 의지를 갖춘 사람이었다.
‘저 사람에게 협력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가만히 서 있으려니 리처드가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그게요.”
나는 고민하다가 리처드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이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 앤서니 말이군요.”
리처드는 마치 물건을 자랑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로 유화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유화의 매력을 한껏 살린 두꺼운 터치가 장점이지요. 혹시 흥미 있으십니까?”
그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화를 한번 나눠 보고 싶습니다만.”
“흐음.”
리처드 아이브스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원래 작업 시간에는 일에만 집중하는 게 규칙입니다만, 작가님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그는 기꺼이 문의 잠금을 풀더니 말했다.
“제가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하실 수 있겠군요. 그럼 전 기왕 온 김에 잠시 다른 작업물의 진척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천천히 대화 나누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순순히 비켜주는군.
나는 살짝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끼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적막이 찾아온 방 안.
그곳에서 앤서니가 그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시선도 주지 않는다.
마치 날 투명인간 취급하는 눈치.
“후우.”
나는 심호흡을 다지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최대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앤서니 에드워드 맞죠?”
아무런 반응도 없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약 탓인가, 성격 탓인가.
아니면 달리 이유가 있는 건가.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감시하려고 도청 장치라도 설치해 뒀을 수 있어.’
대체 어디에.
주위를 둘러봐도 마땅히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행동을 조심해야겠다.’
지금 내 행동이 어디에서 녹음, 촬영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으로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림을 좀 오래 그리셨나 봐요?”
동시에 이젤에 놓인 붓을 집었다.
그리고 캔버스에 작게 적었다.
[언제부터 갇혀 있었죠?]그 순간이었다.
“······!”
앤서니 에드워드가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빙고.’
나는 내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앤서니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적어놓은 글씨 위에 붓을 저어 페인트로 덮고는 적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렸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억나지 않습니다.]좋다.
일단 기본적인 단계는 넘겼다.
‘우선 방 입구 쪽이랑 감시 카메라가 있을 법한 곳은 피해야 한다.’
나는 코트를 입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입구 쪽은 등으로 가린 채, 붓으로 캔버스에 글씨를 쓰며 그와 필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 그렇군요. 터치에서 작가님의 솜씨가 느껴집니다.”
[좋습니다. 여기서 나가고 싶습니까?]“노력했습니다.”
[예.]“이건 어떤 작품인가요?”
[절 믿을 수 있겠습니까?]“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려 했습니다. 특히 환희를 말입니다.”
[안 믿어봤자 제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그런데 그다음 순간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 봤자 폐기당할 뿐입니다.] [폐기요?]다소 섬뜩한 단어에 우뚝 굳었는데, 앤서니가 마저 붓을 움직였다.
[써먹을 수 없게 된 사람은 바깥에 내놓습니다. 적어도 약은 안 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 정말 막장이구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화라도 잘 통한다는 것.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자포자기한 상태라니.
어이가 없군.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설득하는 데 시간을 빨리느니 이게 더 낫다.
나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림이 대단하네요. 리처드가 좋게 보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녹음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도 녹화 중입니다.]“그가 제 이야기를 하던가요?”
[도와줄 사람은 있습니까?]“조금이요.”
[있습니다.]그 말에 그는 살짝 안도한 듯하더니 붓을 움직였다.
“리처드는 대단한 작가입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네, 저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민 중입니다.]대화만으로 당장 뭘 어떻게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어설프게 데리고 빠져나가려고 했다가 자칫하면 서로 위험에 빠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가.
‘당연히 있지.’
내 나름대로 준비해 왔다.
< 지하 > 끝
ⓒ 이한이™
< 특종 >
전생에 앤서니 에드워드가 리처드 아이브스를 고발할 때 써먹은 방법이 있었다.
‘통신 수단도 없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없는데, 잘도 성공했지.’
어떻게 해냈는가.
그 방법은 간단했다.
앤서니는 작은 종이쪼가리 위에 연필로 글씨를 썼다.
이어서 그 종이를 그대로 캔버스에 덧댄 뒤, 위에 뻑뻑하게 유화 물감을 발랐다.
사실상 그림을 두 겹으로 그린 것.
누군가가 이 메시지를 눈치챈 뒤에야 리처드 아이브스의 행각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 이 방법을 쓰긴 어렵겠지.’
리처드의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판화로 찍어낸 에디션들을 포함하자면 유화 작품만 수백 개는 되겠지.
그중에서 어떻게 한 점을 찾아내겠는가.
‘내가 그 작품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런 방법에 기대기는 어려워.’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슬쩍 코트 안주머니를 만져서 그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살짝 내비쳤다.
최근 개발된 초소형 카메라.
초소형이라고는 해도 미래의 스마트폰 크기의 4분의 1쯤 되는 크기이다.
그 렌즈가 코트 안쪽 주머니의 단추처럼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규태가 은근 이런 거 잘한단 말이야.’
그렇다.
규태가 적당히 옷을 꿰매서 그럴듯하게 감춰 주었다.
물론 미친놈 취급을 받긴 했다.
–
“네가 무슨 심부름센터 직원도 아니고 이런 게 무슨 이런 게 필요해?”
“사람한테 로망이라는 게 있잖아.”
“너 도촬하는 로망 있냐?”
“······.”
“이거 범죄자의 상이네.”
–
나는 그걸 앤서니에게 살짝 보여주며 캔버스 화면을 슬쩍 가리켰다.
동시에 적었다.
[여기에 할 말을 적으세요.]앤서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곳에 페인트로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여기는 리처드 아이브스의 주택입니다. 전 화가 앤서니 에드워드입니다. 감금당했습니다. 도와주세요.]그는 이어서 페인트 위에 손가락으로 짧게 지문을 남겼다.
이어서 나는 그의 얼굴도 촬영했다.
‘됐다. 이 정도면 우선은 충분하다.’
이제는 빠져나가서 신고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증거가 아예 없다면 모를까.
일단 실종된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경찰들도 한 번쯤은 고려해 주겠지.
무시하더라도 상관없다.
따로 마련해 둔 연락책이 있으니까.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그렇게 말하며 조금 더 필담을 나누려는 순간이었다.
툭.
앤서니가 내 어깨를 살짝 쳤다.
뒤를 돌아보니 문 앞으로 리처드 아이브스의 얼굴이 보였다.
앤서니의 반응을 보니 다행히도 아직 들키지는 않은 눈치.
나는 붓으로 필담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지우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너무 즐거워서 그만 시간을 뺏었군요. 다시 뵙겠습니다.”
“예.”
그렇게 나는 그의 작업실에서 빠져 나왔다.
문이 잠겨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어차피 잠겨 있었더라도 어떻게든 됐겠지만 말이야.’
아무런 생각도 없이 들어온 게 아니다.
여기는 외국.
내 행선지도 주변에 밝혀 두었다.
더욱이 나는 외국인이다.
다짜고짜 감금해서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물론 위험을 감수한 건 내 선택이었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리처드 아이브스가 내게 말했다.
“유익한 시간 보내셨습니까?”
“예.”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작업실을 운영할 수도 있겠군요. 많이 참고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날이 많이 늦었군요. 슬슬 돌아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나도 이런 소름 끼치는 장소에서 더 시간을 보내는 건 사양이다.
당장이라도 빠져나가서 식구들 얼굴을 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보여주신 것 같던데.”
“······!”
순간적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젠장.
보고 있었던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안주머니요?”
“예, 작가님께서 앤서니에게 뭔가를 보여준 것 같기에.”
“그것 말이군요.”
나는 슬쩍 코트를 열어서 그 안을 리처드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명함을 꺼냈다.
“명함 들고 다니거든요.”
JH 디자인에서 내 이름으로 뽑은 명함이었다.
그걸 보여준 순간이었다.
리처드 아이브스가 내 어깨로 손을 뻗었다.
“······.”
나는 본능적으로 피했다.
그러자 리처드 아이브스가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물었다.
“왜 그러시죠?”
“제가 누가 저 만지는 걸 조금 싫어해서.”
“코트만 조금 보겠습니다.”
“친구한테 빌린 옷이라서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데, 리처드 아이브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전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망했군.
완전히 조졌다.
저 눈빛 좀 봐.
사람 한둘 담가 본 눈빛이 아니네.
어떻게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 응?’
리처드 아이브스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그 안에서 총을 꺼냈다.
‘총?’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아 그렇지.
여기 미국이지.
그 사실을 나도 모르게 까먹고 있었네.
하긴.
리처드 이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리 자기 집이라지만 노예 소굴 들어오면서 호신용품 하나 안 들고 왔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총은 너무하지 않나?’
이야.
소리가 새어나가는 걸 싫어하는 게 맞았네.
총은 어쩔 수 없지.
‘당장이라도 도망쳐야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왔다.
마치 육식 동물을 코앞에 마주한 듯, 죽음의 공포를 눈앞에 두자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저 사람이 방아쇠 한 번 누르면 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에 몸이 상상 이상으로 떨리는데, 리처드 아이브스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긴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여기서 나가더라도 한참을 걸어야 사람이 살만한 장소가 나올 겁니다.”
“······.”
“계속 이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가 총구를 내 미간에 정확하게 겨눴다.
나도 모르게 질겁한 참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안에서 앤서니가 튀어나오며 외쳤다.
“도망가세요! 얼른!”
“······!”
그가 리처드 아이브스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리처드의 몸이 휘청이는 순간, 내 몸에 걸렸던 긴장이 풀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
“허억, 헉, 허억.”
이렇게까지 정신없이 달려본 게 얼마 만인가.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운동 좀 하고 살걸.’
뒤늦게 지훈 선배가 잔소리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동 좀 하라고 매일 지적했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가진 게 비루한 몸뚱이밖에 없다.
그럼 있는 거라도 어거지로 써야지.
“제길, 제기랄, 제길.”
숨은 벅찬데 있는 욕 없는 욕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망할 미국.’
짧은 기간이었지만 미국에 머무르며 나름대로 애정이 붙은 참이었다.
그게 총기를 보자마자 바로 식어버렸다.
‘한국 최고다! 코리아 만세! 만만세! 김치 좋아요! VTS 사랑해요!’
그렇게 계속해서 뛰쳐나가는데, 아까 들렸던 총성이 머릿속에 계속 밟혔다.
총소리가 들렸고 앤소니의 고통 섞인 비명도 들렸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고 있으려니 곧 가택의 문이 눈에 들어왔다.
됐다.
이제 탈출이다!
······ 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나를 반겨준 건 넓고도 넓은 정원이었다.
‘미친.’
왜 사람 사는 곳이 이 모양인가.
땅이 남아도나.
다시 한번 미국이 싫어졌다.
‘여기서 가까운 인가까지 걸어서 최소 20분 넘게 걸렸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다리를 멈추면 등 뒤에 리처드가 서 있을 것 같아 숨을 헐떡이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탕!
총성과 함께 주위로 돌멩이가 튀겼다.
“미친!”
워낙 상황이 긴박하니 머릿속으로 생각한 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등골이 쭈뼛 섰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한참 멀어진 리처드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한두 번 총을 더 쏘려는 듯하더니, 장탄이 다 떨어진 듯 총을 다시 호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갔다.
이대로 순순히 놓아주려는 건 아닐 터.
아마 차를 타려는 게 아닐까.
맞았다.
마당에 주차된 차에 들어가더니 시동을 걸었다.
‘이야, 나 예언자 해도 되겠다.’
이대로 날 치어 죽이기도 하려는 건가.
진짜 끝났다 싶은 순간이었다.
저 앞쪽에서 차가 빵빵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낡은 SUV가 주차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똥차.
하지만 내 눈에는 이게 세상의 그 어느 고급 스포츠카보다도 멋있게 느껴졌다.
‘왔구나!’
나는 손을 붕붕 휘둘렀다.
그러자 그 SUV가 바로 내 앞으로 달려와서 멈춰 서더니 창문을 내렸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에요?”
오스본 레이놀즈였다.
뉴욕 데일리의 기자이자, 나한테 핵폭탄이라는 이상한 별명을 지어준 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는 몇 안 되는 비빌 구석이었다.
그래.
내가 부른 사람이었다.
‘문화부 기자니까 문화계 소식에 환장하지. 지금 나는 뉴욕에서 제일 화끈한 기삿감인데 여기에 리처드 아이브스까지 섞인다? 말 그대로 최고지.’
그래서 불렀다.
내가 언제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찾아오라고.
기삿감 하나 던져 주겠다고.
특종 냄새를 따라 찾아온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기삿감 준다고 사람 불러놓고서 이건 또 뭡니까?”
나는 차 문을 열어서 타고는 말했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일단 달려요!”
“예? 어디로요?”
“사람 많은 곳으로요!”
“뉴욕에서 사람 많은 곳이 한두 곳인가?”
“좀 달리기나 해요!”
“네.”
그는 급하게 엑셀을 밟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백미러를 보며 당황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차는 대체 뭔데 저희를 막 쫓아옵니까?”
“리처드 아이브스예요.”
“예? 리처드 아이브스요?”
오스본 레이놀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는 리처드 아이브스 맞죠? 작가 겸 배우 겸 가수.”
“네, 저 사람이 정신이 나가서 저한테 총 쏘고 차로 치려고 하고 난리 났어요.”
“대체 왜요?”
“저한테 비밀을 하나 들켰거든요. 지하에서 마약 공장을 돌리고 있었어요.”
“마약 공장이요?”
엄연히 말하자면 마약과 노예 공장이다.
하지만 딱히 정정하기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오스본 레이놀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특종이네요!”
“······.”
이거 신났네.
기자답다.
“증거자료는요?”
“다 촬영했어요.”
“후우, 좋습니다. 그럼 이대로 가서 기사만 내면 되겠네요. 이거 뉴욕 데일리 멍청한 편집부장한테 한 방······.”
“그만하고 운전에 집중하세요.”
뒤를 보아하니 리처드 아이브스의 차가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었다.
딱 봐도 고급 세단이다.
오스본 레이놀즈의 싸구려 SUV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 이거 차가 낡아서.”
“이번에 운전 잘하시면 제가 이깟 차 새로 뽑아 드립니다.”
“오, 약속한 겁니다.”
오스본 레이놀즈는 그 말 한마디에 표정이 바뀌더니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몸이 관성에 못 이겨 앞으로 쭉 쏠리는데, 머릿속으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데자부!]정신 나갈 것 같다.
미국에 좀 적응하는가 싶었더니, 마약에 총기에 자동차 추격전이다.
‘무슨 GTA도 아니고.’
결심했다.
나는 미국이 싫다.
한국이 사람 살기에는 차라리 낫다.
그렇게 생각을 포기하고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이미 시내로 나온 상태였다.
리처드 아이브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때요?”
오스본 레이놀즈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차 새로 뽑아주기로 한 거 기억하죠?”
“······”
나는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카탈로그는 천천히 확인하시고, 우선 핵폭탄 하나 떨궈 봅시다.”
“오, 핵폭탄 좋죠.”
“일단 경찰부터 부르고요.”
*
다음날.
미술계 전체를 요동치게 하는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뉴욕 데일리 단독 보도) 미술계 거장, 마약 유통 및 살인미수 의혹]< 특종 > 끝
ⓒ 이한이
< [RIP Nuclear Lee] >
뉴욕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리처드 아이브스, 마약 유통 의혹]미술계의 거물이자 명배우이자 가수인 리처드 아이브스.
그가 마약 및 착취 의혹에 휩싸였다.
[미술 거장 총기사고 일으켜] [자택에 다수의 사람을 감금한 것으로 알려져] [화가, 작곡가 다수 발견]화려하다.
내가 떨어뜨린 핵폭탄이지만 장난 아니다.
하지만 나 혼자서 이뤄낸 업적은 아니고, 뉴욕 데일리의 오스본 레이놀즈 기자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참 아무렇지도 않게 기사를 퍼뜨리네.’
사실 처음에는 긴장도 했다.
아무리 좋은 기삿감이 있더라도, 편집 과정에서 시간을 지체하면 의미가 없기 때문.
하지만 뉴욕 데일리는 일단 퍼뜨리고 본다는 생각으로 퍼뜨리고 봤다.
‘역시 황색 언론의 조상님이다.’
대단하다.
이렇게 퍼진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용의자는 도주 중] [리처드 아이브스의 미술품 전부 압류 및 조사 착수] [저택에 숨겨진 피해자 있을 수 있어] [시신 탐색에 나서] [파도 파도 끝이 없어, 동료 작가들 당혹스러워]원래 사소한 사고 하나도 조사하는 데 몇 달이 걸리는 법인데, 리처드 아이브스는 그 이상이었다.
한 사람이 저질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워낙 많다 보니, 조사하는 과정만 해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 과정에서 역효과도 나타났다.
[유명 작가의 작품을 둘러싸고 대작 논란] [과연 집단 창작형 작가들의 작품은 정당한가] [허울만 좋은 그 이름. 스튜디오형 집단 창작.] [현대 미술은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금자탑인가]리처드 아이브스 뿐만이 아닌, 다른 작가들에게도 불똥이 튄 것.
특히 공장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피해를 봤다.
토마스 킨케이드나 앤디 워홀같이 대놓고 공장식 창작을 긍정하는 작가들은 괜찮다.
문제는 알음알음 공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예술품이라는 게 거품 아니냐] [작가 본인도 아니고 남의 손으로 만든 걸 뭐하러 돈 주고 삼?] [다 호구들이었던 거지] [구매자들은 소송 안 함?]그렇다.
과거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볼 수 있었던 저것들이, 이제는 대중의 시선에 드러나며 전면적으로 문제시되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오히려 이게 진짜 파동이 아닌가 싶을 정도.
덕분에 TV에서는 연일 이 화제로 토론을 나누기 바빴다.
당장 내 앞에서 돌아가고 있는 TV 방송만 해도 그러했다.
(이번 미술계 대작 논란을 두고 미술계의 권위자, 싱싱자이엔 미술관의 진리엔 관장님을 모셨습니다.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솔직히 말해서 이런 형태의 작품 제작은 미술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이미 현대 미디어 산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화부터 시작해서 영화까지 그렇지 않습니까. 스필버그 영화를 보면서 정말로 스필버그 감독 한 사람이 전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미술은 해당 작가가 만들었다고 인식하는 게 보편적이지 않나요?)
(일반 대중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비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인식이었지요.)
(그럼 지금 형태의 창작을 이어나가도 아무런 문제 없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앞으로는 작품 제작에 참여한 작가의 이름을 함께 기재하는 둥 개선 방안을 찾아 나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대학원생이 참여한 논문에 공동저자로 표기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오.
여긴 공동저자 넣어주나.
한국은 교수가 싫으면 안 넣어주던데.
‘역시 선진국은 선진국이다.’
그렇게 감탄하는 사이에 게스트로 초청된 교수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암암리에 묵인했던 게 컸습니다만, 이제는 미술계도 서서히 따라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조 작가가 작품에 참여한다면, 그 이름도 적히는 게 맞습니다.)
작품 제작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술계에서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기는 했다.
이 시대만 그런 게 아니다.
내가 겪은 미래에서도 마찬가지였지.
‘그랬던 게 이번 생에는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네.’
내가 미술계의 악습을 하나 지운 건가.
기분이 남다르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리모콘을 돌렸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비슷한 화제로 떠들고 있었다.
(다들 리처드 아이브스가 마약을 악용했다는 데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잘못됐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진짜로 주목해야 할 건 마약이 어떻게 유통되어서 어디까지 퍼졌는가입니다. 시청자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시다시피 리처드 아이브스는 미술에서 음악, 영화까지 넘나드는 예술인이었습니다. 과연 미술계만 마약이 유통되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도 중간 유통책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넓게 퍼졌을 수 있겠군요.)
(예, 여기서 나아가서 미국 내부의 마약 유통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들어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사회입니까?)
또 리처드 아이브스 이야기다.
다루는 이야기의 쟁점이 다를 뿐, 어디나 다 리처드 아이브스의 이야기였다.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배신당한 기분이에요.]팬들의 슬픔.
[설마 제가 소장한 작품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럼 해당 작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앞으로도 쭉 소장할 생각입니다. 이 또한 미술사의 한 족적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니까요.]리처드 아이브스의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온 사회가 다 기다렸다는 듯 씹고 맛보기에 바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사태의 최대 공로자인 이재하 작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내 이야기도 많았다.
[공개적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만, 매니저 측에서는 심신 안정을 위해 휴식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현재 뉴욕 시민들은 센트럴 파크에 방문해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게 자그마한 보답이 되길 바랍니다.]원래부터 화제였던 내 이름은, 이번 사태를 타고 한층 더 유명해졌다.
뭐라고 해야 하나.
슈퍼스타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히어로가 된 기분이다.
미술계의 악습 하나를 도려낸 히어로.
덕분에 괜히 내 기분만 심란해졌다.
‘이젠 길거리에 걸어다니기도 힘들겠네.’
나한테 이목이 엄청나게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한두 곳 들어온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첫날 이후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가장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
왜냐.
‘이 사람이 위급한데 양심이 있으면 그럴 수가 없지.’
앤소니 에드워드가 지금 내 앞 병상에 누워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일어나실지.’
그가 내 앞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총탄을 전신 각 부위에 네 발이나 박히면서도 끝까지 리처드 아이브스를 붙잡고 늘어졌다고 했던가.
놀랍다.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몸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알 것 같다.
‘처음부터 살 생각을 버리고 있었겠지. 대단한 사람이야. 나보다도 훨씬 더.’
대중은 나를 최고 공로자라고 밝혔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디까지나 이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나는 매일같이 방문해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
앤소니 에드워드가 눈을 떴다.
나는 그제야 한참 동안 입안에서만 되새겼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