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15)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15화(115/190)
115화 징조
아람코의 베트남 프로젝트는 순조로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미세한 조정이 있었지만, 합의각서(MOA)는 원안대로 체결되었다.
그와 별도로, 사우디-베트남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첫발을 내딛기 위한 준비 역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양국 경제협력 조사를 목적으로 조인트 스터디(joint study) 팀이 꾸려졌고, 다음 달에는 담당 부처장들의 회동이 하노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덩달아 삼전 그룹의 하노이 배터리 R&D 센터 확장 프로젝트 역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MOU가 체결되기 무섭게 건설 업체 선정에서부터 지분 협상, 비용 분담 등 협의가 진행됐다.
베트남 경험이 많은 대기업답게 그룹 내 법무팀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하여 김앤강에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챙겨봐야 하는 사건들은 물론 많았다.
치료를 잘하는 병원에 환자가 끊이지 않는 것처럼 해결 잘하는 로펌에도 사건은 끊이지 않는 법.
매일 같이 쳐내는 사건의 수만큼 새로운 분쟁들이 들어온다.
범상의 책상 위에서도 매일 같이 새로운 기록들이 올라왔다.
잘하는 어쏘에게도 역시 일감은 끊이지 않는다.
하영은 그런 범상의 손금을 봐주고 있었다.
“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탄식이었지만, 범상은 하영의 입에서 새어 나온 소리를 들었다.
“왜요?”
“손이 거칠어요. 상처도 많고. 기록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거 아니에요?”
골무를 끼고 종이들을 넘겨도 하루에 수백 장, 수천 장씩 넘기다 보면 손가락 끝들이 건조해진다.
고무 골무를 오래 끼고 있으면 답답하니, 그냥 빼고 볼 때도 많다.
그러다 보면 베이기도 하고 거스러미가 생기기도 한다.
범상의 손가락도 다들 바 없다.
하지만, 방금 하영의 입에서 나온 탄식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범상의 생명선을 보고 있었다.
다른 말을 둘러댔지만, 이미 범상이 눈치를 챈 이후였다.
“왜요? 일찍 죽는데요?”
“네에? 아니요.”
“도 변호사님 방금 제 생명선 보고 있으셨잖아요.”
“아닌데.”
“그럼요?”
“여기 상처 보고 있었는데요. 손에 상처가 많아서.”
범상은 하영이 가리킨 것을 봤다.
있다. 오른손 손바닥 위, 다른 선들보다 조금은 짙은 선 하나.
‘이건 언제 생긴 거지?’
얼핏 보기에는 손금 같은데, 자세히 보면 상처인 듯싶다.
최근 중장비를 많이 다루다가 상처가 이곳저곳 났는데, 그때 생긴 건가?
생명선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게 나쁜 뜻이래요?”
“아니요.”
“그럼 좋은 뜻이에요?”
“몰라요.”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서 그런가, 감정을 쉬 들키는 사람이 아님에도, 어색함이 묻어난다. 하영은 잡고 있던 범상의 오른손을 슬며시 놓았다.
“진짜 안 가르쳐주실 거예요?”
“뭘요?”
“이 선의 의미.”
“그거 상처 같은데. 상처는 손금 하고 상관이 없대요.”
시치미를 떼는 그녀의 표정이 귀엽다.
범상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럼 내가 찾아봐야겠다. 아까 슬쩍 보셨던 사이트 이름이 뭐였더라···.”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단 하영의 표정이 또 어떻게 변할까가 더 기대된다.
앞에 앉은 하영의 얼굴을 보아가며 범상은 ‘손금’, ‘생명선’ 등의 단어를 검색창에 쳤다.
하영은 아닌 척, 갑자기 사건 얘기를 꺼냈다.
“아, 근데 있잖아요. 이번에 들어온 사건 너무 웃기지 않아요?”
웃긴다.
그녀가.
범상도 대충 짐작은 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는 걸 보니, 분명 안 좋은 뜻일 게 뻔하다는 것쯤은.
그런데···
「장해선(障害線):
굵고 진한 장해선이 생명선을 가로지르고 있다면 그것은 살면서 심각한 질병이나 재해를 겪게 될 것임을 암시하며, 그로 인해 생명선이 끊어졌다면 그러한 고난이 죽음을 초래할 수 있음을 뜻한다.」
생각보다 더 좋지 않다.
범상은 오른손 손바닥을 다시 내려다봤다.
상처인지 원래 있었던 손금인지 모르겠지만, 굵고 진한 금이 생명선을 끊어놓았다.
【115화 – 징조】
“아.”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넘기던 최재민은 따끔한 기분이 든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잠시 뒤,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서 붉은 액체가 스며 나온다.
종이에 베었다.
책상 위에 놓아둔 티슈 곽에서 한 장을 꺼내 피를 닦아낸 최재민은 깨끗해진 손가락을 살폈다.
1초도 안 되어 다시 스며 나오는 피.
상처가 깊은 모양이다.
가만히 두면 기록에 묻을 듯싶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여기 대일밴드 좀.”
재민은 비서에게 반창고를 부탁했다.
그사이에도 지혈을 계속하며 상처를 확인하는 재민의 눈에 책상 위 쌓여있는 서류철들이 들어왔다.
많다.
주니어 파트너 때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죽겠는데 참···.’
종이에 손가락만 베어도 일에 차질이 생긴다.
재민은 손가락을 꾹 눌렀다.
똑똑-
“들어와.”
“변호사님, 잠깐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대일밴드를 가지고 돌아온 비서인 줄 알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니어 어쏘 장석훈이었다.
유학을 다녀온 그는 이제 주니어 파트너 승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왜? 뭔데?”
“어, 다치셨습니까?”
책상 위에 피 묻은 휴지가 놓여있다.
“별거 아니야. 손 좀 벴어.”
“아이고.”
“신경 쓸 거 없어. 밴드 가지고 오라고 했어. 무슨 일이야?”
“아, 다른 게 아니라···.”
잠시 머뭇거리던 장석훈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음···저···변호사님, 이번 달 말까지만 나오고, 그만두려고 합니다.”
‘뭐라고?’
갑작스러운 후배의 퇴사 통지에 최재민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 위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나름 그래도 아끼는 후배였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아, 그런 거는 아니고요. 그냥 좀 개인적으로 일이 좀 생겨서···.”
“무슨 일?”
“그게, 변호사님한테 다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냥, 잠깐 좀 쉬면서 생각도 좀 정리하고 싶고 해서요. 죄송합니다.”
최재민은 장석훈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 막 시니어 파트너가 된 그에게 이런 경험이 많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밑에 후배들이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왔을 때, 진짜 무슨 일이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짬은 되는 그였다.
“그래?”
“네···.”
잡을 수 있는 단계는 넘었다.
이미 나가기로 결정을 내린 변호사의 표정이다.
“알았어.”
“죄송합니다.”
똑똑-
“변호사님, 밴드 가지고 왔···. 아, 회의 중이셨나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제야 반창고를 가지러 간 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아니야. 들어와. 장 변호사, 알았어. 이번 달 말?”
“네···.”
“그렇게 해.”
“네, 죄송합니다.”
장석훈은 비서가 나가기 전에 서둘러 시니어 파트너의 방을 나갔다.
분위기가 애매하다는 걸 눈치챈 비서는 책상 위에 반창고와 소독 연고를 두고 얼른 돌아섰다.
최재민은 그런 비서를 불러세웠다.
“김 과장.”
“네, 변호사님.”
“장석훈 변호사한테 배당 간 사건들 목록 좀 뽑아줘.”
한 문장의 지시였지만, 김 과장은 눈치챘다. 조금 전 장석훈과 최재민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퇴직 통보.
“네, 알겠습니다.”
어디든 사람은 늘 들어가고 나간다.
알바 한두 명 쓰는 작은 가게도, 수만 명이 다니는 대기업도, 국내 1위 로펌도.
유학을 다녀와서 주니어 파트너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어쏘가 퇴사를 통보했다.
몸이 아픈 것이었으면 사정을 먼저 이야기했을 것이고, 말하기 힘든 피치 못할 집안 사정이 있었다면 술을 마시자고 했을 것이다.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어쏘가 당장 이번 달에 그만두겠다고 하는 건 이유가 하나밖에 없다.
다른 로펌에 스카우트되었다는 것.
로펌은 이직률이 높은 조직이다.
특히나 유학을 다녀온 직후의 어쏘들은 기회가 많다.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진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로펌에 막 입사한 신입 변호사는 일차적으로 유학을 목표로 한다.
5년, 6년 버텨서 안식년이라는 달콤한 휴식(?)과 함께 학비 및 생활비를 지원받아 해외 로스쿨에서 석사 학위까지 따올 수 있는 기회.
좀 더 노력한다면 그 1년 안에 다른 나라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할 수도 있다.
재작년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국내 변호사 장석훈은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렇게 일차 목표를 달성한 시니어 어쏘는 이제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한다.
로펌에 남아서 위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직할 것이지.
유학까지 보내준 로펌을 왜 떠나냐고?
유학을 보내줬다고 무조건 파트너를 시켜주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원래는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유학을 다녀와도,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따와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장석훈의 주니어 파트너 승진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약속했다. 연말에 그렇게 해주겠다고.
그럼에도 나가는 건, 더 좋은 조건이 들어왔다는 걸 의미했다.
어디가 최고인 김앤강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냐고?
조건에는 연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앤강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 로펌은 거의 없지만, 다른 걸 약속해 줄 수 있다.
경쟁이 심한 김앤강에서는 해줄 수 없는 것들.
시니어 파트너 자리 보장 같은.
그런 보장을 해주지 않았다고 해도, 본인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미리 다른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나가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장석훈은 김앤강에서 자신의 한계를 봤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시장에서 가장 비싼 몸값일 때 나가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재민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본인도 그 고민을 안 해본 것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유학 후 최소 1년은 로펌에 남아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음에도 보내주려는 것이다.
어차피 맘 떠난 변호사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렇다고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특히나 시니어 파트너 성일용의 퇴사 이후로 국제중재팀 수장을 맡은 최재민은 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이럴 때 한창 일해줘야 할 장석훈 같은 연차가 나간다는 건 뼈저린 전략 손실임이 틀림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최재민은 비서가 가져다 둔 반창고를 왼쪽에 붙이고 있었다.
띠리링- 띠리링-
사건은 꼭 이럴 때 터진다.
띠리링- 띠리링-
그제야 반창고를 잘못 붙였다는 걸 깨달은 최재민은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KLS에너지 윤 부장님이 전화하셨어요. 연결해 드릴까요?
“연결해.”
재민은 재빨리 머릿속을 비우고 클라이언트 전화를 받았다.
연결음과 함께 KLS에너지 윤경철 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네, 최재민입니다.”
-변호사님, 안녕하셨습니까? KLS에너지 윤경철입니다.
“안녕하셨어요, 윤 부장님.”
-네, 별일 없으시죠?
“네, 부장님도 별일 없으신가요?”
-저야 뭐 늘 같죠. 근데, 회사에 일이 좀 생겼습니다. 내일 오전 중에 찾아뵈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홉 시쯤 어떠신가요?
인사는 밝았지만, 일이 생겼다는 말은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다음 날 아침 9시에 찾아온다는 건 미룰 수 없는 용무가 있는 것이 뻔했다.
“내일 오전이요? 아, 그러시면, 8시 반쯤은 어떠실까요? 제가 9시 반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네, 좋습니다. 그럼 8시 반에 광화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의사들에게 가장 긴장되는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게 대답했다.
자신이 치료한 환자가 며칠 뒤에 다시 병원에 실려 오면 순간 뒷목이 뻣뻣해진다고.
변호사들도 비슷하다.
잘 마무리해서 종결된 줄만 알았던 사건이 다시 살아 돌아왔을 때.
뒷목이 뻣뻣해진다.
-2년 전 변호사님이 해결해 주셨던 사건 있지 않습니까? KLS에너지 미시간주 공장 폭발 사건.
“네.”
-그거 관련해서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순간, 최재민은 뒷목이 뻣뻣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