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23)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23화(123/190)
123화 죽음이라는 매개체
오늘처럼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아닌가? 부슬비였나.
나이가 드는 건 참 곤욕스러운 일이다.
기억이 제멋대로다.
나를 잊어버리게 된다.
특별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긴 시간을 지속해 온 존재의 기억은 특별하다.
많은 것이 빠르게 사라지는 세상에서 오래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부서지지 않고 저기 그대로 있는 저 바위조차도.
이십여 년 전,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한 남자를 만났다.
‘만났다’라는 표현은 이상한가, 그래봤자 고작 몇 분이었고, 나눈 대화라고 해 봤자 몇 마디뿐이었는데.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그는 나를 구해주었다.
“변호사님.”
“···.”
“선배님, 저 조상호입니다. 알아보시겠어요?”
“어, 어, 조 변호사, 어서 와.”
오랫동안 그곳에 묵묵히 서 있던 산이 무너지고 있다.
【123화 – 죽음이라는 매개체】
고현대학병원,
VIP 병실.
“하루빨리 쾌차하시고요.”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한테 쾌차는 무슨.”
“아이- 왜 그러십니까? 일어나셔야지요.”
“가봐.”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선배님.”
“올 필요 없어. 오늘 얼굴 봤으니까 됐어.”
“또 오겠습니다. 그럼, 쉬시고요.”
“고마워.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여줘서.”
조상호는 병상에 누워있는 선배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그의 뒤로 김욱현이 따라 나왔다.
“차장님이 여전히 변호사님 곁에 계시네요.”
“네.”
지금은 학교에 몸담고 있지만, 한때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었다.
선배가 입원했다는 이야기는 1년 전쯤 들었는데,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최근에 들었다.
강태산을 오랜만에 보는 조상호는 흠칫 놀랐다. 몰골이 너무 안 좋아 보인다.
그나마 이야기를 나누고 나올 때는 오히려 괜찮아 보였다.
“변호사님의 가족분들은···?”
“미국에 계십니다. 따님들은 지난달에 나왔다 가셨고요.”
“사모님은···?”
“사모님도 미국에 계시고요. 사모님도 얼마 전에 나왔다 가셨고요.”
외로운 사람.
예전부터 그랬다.
일밖에 몰랐던 선배였다. 그렇게 잔소리해 댈 거면 이혼해 줄 테니까, 딸들 데리고 미국 가서 살라고 했다는 일화는 후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그래도 차장님이 계시니까, 제 마음이 다 편하네요.”
“이 나이에 저 같은 놈이 갈 데도 없는데요, 뭐.”
김욱현 차장.
한 20년 됐나? 25년?
사무실 운전기사라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선배의 곁에는 이 사람이 있었다.
얼핏 전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강태산과 좋은 얼굴로 멀어진 사이는 아니었다.
사무실 나올 때, 강태산에게 크게 실망했고, 고성까지 지르며 틀어진 건 아니었어도, 그 후로 한 10년간은 우연히 마주쳐도 피했던 조상호였다.
죽음이란, 참 얄궂은 매개체다.
멀어졌던 사이도 가깝게 당겨준다.
차장님이 계셔서 다행이라고 한 말, 진심이었다.
조상호는 병문안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현재로서는 간이식밖에는 답이 없는 건가요?”
“네.”
“저런··· 어쩌다 참···”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거냐, 가족 중엔 기증자가 없느냐 등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조상호는 묻지 않았다.
조금 전 병실 안에서 강태산의 표정이 다 말해주었다.
있다 한들 받지 않을 그였다.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이미 죽음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또 오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멀리 못 나가서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법조계의 큰 별이 깜빡이고 있다.
칭송하든, 혐오하든, 대한민국 법률시장이 현재 모습을 갖추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로펌이자 사법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로펌의 두 수장 중 한 명.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한 발 떨어져 나와 보니 알겠다.
김앤강이 얼마나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지.
잘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에 달린 것.
김앤강을 바라보는 법대 교수 조상호의 마음은 복합적이었다.
침상 위의 강태산처럼.
그때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었냐고 묻고 싶지만, 죽음을 앞둔 그에게 그런 걸 물어볼 수 없는 것처럼.
조상호는 궁금했다.
앞으로 김앤강이 어떻게 될지,
산이 무너진 다음에도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
“네? 이재를 영입하실 생각이시라고요?!”
이정후의 호출에 양호락은 사직빌딩 9층을 찾았다.
법무법인 이재 대표 석윤재 변호사를 만났다는 말에 이미 흠칫했는데,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법무법인 이재를 흡수하겠다는 말에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양호락은 확인을 구했다.
“석 변호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뭐라긴 뭐래, 관심 없다고 하지.”
당연한 답변.
둘 사이가 어떻게 틀어졌는데.
십여 년 전 일이다.
당시 석윤재는 기업법무팀의 시니어 파트너였는데, 담당하고 있던 클라이언트 회사의 법무팀 팀장이 퇴사하면서 폭탄을 터트렸다.
석윤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경영자 집안 갑질에 배임, 탈세, 그리고 뇌물까지.
종합세트였다.
석윤재는 이정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정후는 이정후답게 하나, 하나 정리해 나갔다.
언론이 갑질 이슈에 집중할 때, 뇌물 혐의부터 풀어나갔다.
그러곤 탈세, 배임, 하나씩 해결책을 찾았다.
양호락도 그때 상황을 잘 안다. 배임 이슈 관련해서 해당 사건에 참여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갑질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결과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검찰 조사부터 항소심 끝날 때까지 대략 1년 남짓을 감옥에 있었던 회장은 풀려났다.
되려 고발한 법무팀장은 업무 관련하여 후배가 있는 로펌에서 향응을 받은 혐의가 인정되어 1년간 형을 살아야 했다.
그 사건 이후 이정후는 석윤재한테서 해당 클라이언트 기업을 ‘빼앗았다.’
석윤재의 관점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애초에 석윤재가 영업하여 데려온 클라이언트였으니까.
게다가, 잘나가던 판사였던 그를 김앤강으로 스카우트한 사람이 이정후였다. 사적인 감정은 배신에 가까웠을 수도.
하지만, 제삼자의 관점으로 봤을 땐, ‘빼앗길’만 한 사건이었다.
애초에 법무팀장이 그런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석윤재에도 책임이 있었다.
법무팀장이 석윤재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애초에 그 인맥으로 클라이언트가 되었던 것이었고, 같은 이유로 그러한 사건이 터진 것.
김앤강이었으니까, 이정후였으니까, 로펌에 피해 없이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석윤재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수습을 끝난 후, 이정후는 석윤재한테서 클라이언트를 ‘빼앗아’ 양호락에게 ‘주었다.’
양호락은 이정후가 왜 이재를 데리고 들어오고 싶은지 안다.
최재민 때문이다.
그리고 왜 자신한테 이 이야기를 해주는지도.
석윤재 때문이다.
석윤재가 들어온다고 하면 껄끄러워질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니까.
“양 변호사는 어떻게 생각해?”
사무실 흡수·합병은 법조계에서 흔한 일이다.
작은 사무실들은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 큰 사무실들은 덩치를 더 키우기 위해서, 늘 고려하는 일이다.
현재 매출 규모로 대한민국 10위 안에 있는 대형 로펌 중 일곱이 대규모 합병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1위 김앤강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면, 2위와 3위가 합병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2위와 3위의 대표들이 만나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경쟁 로펌의 인력들을 ‘빼앗아’ 오고 싶어 한다.
특히 탄탄한 클라이언트를 데리고 있는 변호사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하지만, 합병이 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융화하지 못하면 분열이 일어나고, 심한 경우 파멸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렇게 뭉쳤다 쪼개진 로펌들도 많다.
“들어온다고만 하면 사무실에는 좋은 일이 아닐까요?”
반신반의의 양호락은 그렇게 대답했다.
석윤재가 과연 순순히 들어올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확정도 되지 않은 일을 이정후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일까?
석윤재가 들어오면 껄끄러워할까 봐?
그럴 리가.
그렇다면, 떠 보는 거?
아니.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양호락은 이정후라는 사람을 잘 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계획이 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에게 왜 석윤재를 만났다고 밝혔는지는 눈치챘다.
이정후는 석윤재를 설득할 것이고, 아마도 십중팔구 석윤재는 김앤강에 돌아온다.
그때를 준비해 두라는 뜻.
석윤재가 결정했다고 100명이나 되는 이재의 변호사 전부가 다 올지는 미지수.
하지만 반 이상은 올 것이고, 그중에는 성일용도 포함될 것이다.
설득하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까?
급하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이정후라고 해도 혼자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늘’을 만나시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양 변호사가 내 뜻을 알아줘서 다행이야.”
대단한 사람이다.
잘잘못을 떠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지난 십 년간 앙숙처럼 지냈던 후배에게 먼저 손을 내밀다니.
김앤강 사건이라면, 이정후 사건이라면, 이빨을 물고 들러붙었던 후배였다.
합의로 쉽게 끝낼 수도 있는 사건을 악착같이 소송으로 끌고 갔고, 지면 법률 비용을 안 받는 조건으로 3심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한동안은 사적인 자리에서 험담을 늘어놓는 건 물론,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 같은 데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무안하리만큼 대놓고 이정후를 무시했었다.
그런 사람까지 다시 품어야 할 만큼 두려운 것이 무언이란 말인가.
이정후의 방을 나서는 양호락은 문득 십 년 뒤 사무실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
“콜록! 콜록!”
“괜찮으세요? 물 좀 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창밖을 보고 있던 강태산은 그날 일을 떠올렸다.
한범상의 아버지 한유일을 만났던 날.
비가 오던 날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앞을 지나고 있던 개 한 마리를 제때 보지 못했다.
급하게 핸들을 꺾는 바람에 빗길에 차가 미끄러졌다.
서산의 한 장례식에 갔다가 올라오던 길.
가드레일 덕에 도랑에 빠지는 일을 모면했지만, 차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서서 강태산은 자신의 차를 바라봤다.
한적한 도로 위 망가진 차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꼭 자기 모습 같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소송은 졌고,
암에 걸렸고,
의뢰인은 자살했다.
그냥 도랑에 빠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겠지만, 핑곗거리가 생길 테니···
그만큼 바닥에 빠진 상태였다.
바로 그때,
끼이이이익-
뒤에서 달려온 차가 그를 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떨어졌다.
신기하게도 정신은 말짱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는 없었는데, 아프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그를 도로 밖으로 끌어 옮겼다.
그 당시에는 자신을 친 운전자인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운전자는 그대로 도망쳤고,
나중에 경찰이 뺑소니범을 잡았다.
그때 그 뺑소니범이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욱현이다.
분명 당시에는 정신이 말짱했었는데, 며칠 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땐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과 그렇지 않은 장면이 교차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가 갑자기 튀어나온 개의 주인인지도 모르겠다.
아닐지도. 기억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의 얼굴 역시 몇 년 전 병원 로비에서 우연히 한범상을 보고 확실히 떠올랐다.
그래도,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난다.
「“당신은···누구신가요?”
“저는 한유일이라고 합니다.”」
한유일.
비가 오는 날, 민가 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 위, 어디선가 나타난 그 사람이 자신을 구했다.
모든 게 더 가물가물해지고 있는 이 순간, 강태산은 그날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다시 희미해지기 전에 말해주어야겠다.
“욱현이.”
“네, 변호사님.”
“가서, 한범상 변호사 좀 불러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