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26)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26화(126/190)
126화 새로운 빌런
국내 대형 로펌들의 홈페이지를 가보면, 취급 업무가 분야별, 산업별, 지역별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서 분야별로 나누어 놓은 페이지를 클릭해서 찾아보면, ‘소송’ 혹은 ‘송무’라고 구분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왜지?
변호사들은 애초에 소송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게 왜 별도로 구분되어야 하는 업무인 거지?
“또 병신 글을 써놨네.”
센터게이트빌딩 5층, 회의실,
국내소송팀 주니어 파트너 유장희는 처음 보는 한범상이 있건 말건 상관치 않는다.
회의에 참석한 시니어 어쏘 노해규의 준비서면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말했다.
“하아- 참-”
“죄송합니다.”
“노 변호사.”
“네.”
“내가 많은 걸 바래? 많은 걸 바라는 거야?”
“아닙니다.”
“노 변호사, 변호사 된 지 몇 년 됐지?”
“······5년···됐습니다.”
“5년씩이나 됐는데, 아직도 준비서면 하나 제대로 써오지 못하면, 변호사 왜 해?”
“···죄송합니다.”
“이러면 오늘 회의하는 게 의미 없···하- 참, 됐다. 다시 써 와.”
유장희는 어쏘가 올린 준비서면을 내던지든 책상 위에 툭 놓고는 범상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휙 나가 버렸다.
회의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126화 – 새로운 빌런】
점심시간,
범상은 하영에게 물었다.
[범상: 도 변호사님, 혹시 점심 약속 있으세요?] [하영: 아니요.] [범상: 같이 하실래요?] [하영: 좋아요.] [하영: 근데, 두 시에 변론기일이 있어서 빨리 먹고 들어오기는 해야 하는데.] [범상: 현동이네?] [하영: 콜.] [하영: 5분 뒤, 로비?] [범상: 콜.]···
15분 뒤,
현동이네.
“치즈 라볶이 나왔습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현동이네>는 시간이 없을 때나 야근할 때 종종 시켜 먹는 분식집이다.
주문한 지 5분 만에 모든 음식이 나왔다.
“아- 맛있겠다.”
“도 변호사님, 이거.”
“아! 고맙습니다.”
젓가락과 숟가락부터 들고 있던 하영은 얼른 내려놓고 범상이 내민 앞치마를 받았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걸 깜빡했다.
“아참, 오늘 국내소송팀 유장희 변호사님이랑 회의하셨죠?”
“네.”
“어땠어요? 그분도 무섭다고 소문나신 분인데.”
“뭐, 무서웠어요.”
담백한 대답.
하영은 범상을 바라봤다.
말만 그럴 뿐, 무서웠던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익숙하다.
저 여유로운 표정.
“전혀 그랬던 사람 같지 않은데.”
“아닌데. 무서웠는데.”
많이 편해진 말투들.
하영은 배시시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김앤강에 저보다 먼저 들어왔던 학교 선배 한 분이 소송팀에 조인했는데, 2년도 못 버티고 나갔어요. 유 변호사님 때문에.”
“아- 진짜요?”
“네. 잘 맞으면 괜찮다고는 하는데,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특히 서면을 못 써가면 정말 벌레 취급한다고 하더라고요.”
하영의 설명에 범상은 오전 회의할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벌레까지는 모르겠지만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무시한 건 맞다.
범상은 문득 궁금해졌다.
“국내 소송에서 서면을 쓸 때, 어떤 특정 방식이 있나요?”
서면(書面).
한자를 풀어 해석해 보면 ‘글이 쓰인 면 혹은 종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법적 절차에서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서면으로 제출하세요.
-제출한 서면으로 갈음하겠습니다.
법정에서 저런 말들을 들었다면, 그건 ‘주장을 문서로 내라’ 혹은 ‘주장을 낸 문서로 대신하겠다’라는 뜻이다.
“방식이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아이랙(IRAC)이라고 해서 브리프(brief)를 쓰는 방식이 정해져 있잖아요.”
즉, 서면은 법률적 주장이 담긴 문서이다.
영어로는 브리프(brief) 혹은 플리딩즈(pleadings).
미국 소송에 제출하는 브리프 혹은 플리딩즈는 작성 방식이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Issue(쟁점)
Rule(규정)
Application/Analysis(적용/분석)
Conclusion(결론)
앞 자를 따서 아이랙(IRAC).
이는 당사자 이름이나 날짜 등이 문서 어디에 기재되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양식과는 다르다.
소송 당사자 간에 다툼이 되고 있는 법적 쟁점에 대해 관련 법 규정을 명시하고 해당 법이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분석한 뒤, 결론에 주장을 담는 영미법식 분석구조.
이는 단순히 브리프나 플리딩즈에만 사용되는 구조가 아니다.
약간씩의 변형은 있어도, 내부용으로 쓰이는 의견서나, 판사가 쓰는 판결문에도 역시 같은 방식이 사용된다.
영미계 로스쿨에 입학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자 변호사시험 필기시험에도 출제가 되는 것으로, ‘변호사의 작문법’ 혹은 ‘변호사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범상은 국제법률대학원을 나왔기에 국내 소송용 서면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반면, 국내법 로스쿨 졸업 후 예일대 로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딴 하영은 서면과 브리핑에 둘 다에 대해 잘 알았다.
“비슷해요. 아이랙이라고 딱 정해진 표현은 없지만, 쟁점을 먼저 명시하고 관련 법 조항 쓰고 판례들 비교, 분석하고 결론.”
“그래요?”
“근데, 영미법에도 말은 아이랙이라고 해도 변형해서 쓰잖아요? 한국도 마찬가지로 그때마다 변주를 주는 것 같아요.”
사실이다.
때로는, ‘CRAC’라 해서 쟁점 언급 후 주장하는 결론(conclusion)부터 먼저 말하는 방식도 있고, ‘MIRAT’라 하여 사실관계(Material facts)부터 서술하는 방식도 있다.
그 안의 담긴 ‘주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발전되어 온 ‘틀’들.
“근데, 국내 소송 서면은 왜요?”
“오전 미팅에서 유장희 변호사님이 국내 어쏘 변호사님이 써온 준비서면을 두고 조금은 심한 말씀들을 하셔서 물어봤어요.”
“역시.”
사실 국내법 서면에 대해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영에게 확인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뿐.
그리고 부탁을 하고 싶어서였다.
“도 변호사님.”
“왜요?”
“괜찮으시면 도 변호사님이 그간 쓰신 서면들을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제 서면이요? 당연히 되죠. 그걸 뭘 물어요. 우리 팀 서버에 들어가면 다 있는데.”
“그래도. 정 대리님한테 도 변호사님이 작성했던 서면들 전부를 뽑아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실까 봐.”
이런 스타일이라는 걸 알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제가 했던 사건들 전부를요?”
이 남자는 뭐든지 전부다.
-*-
같은 시각,
사무실 근처의 중식당.
국내소송팀 주니어 파트너 유장희는 같은 팀 동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왔어?”
“내 거 시켜놨어?”
“시켜는 놨는데, 면발이 다 굳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정장 재킷을 옷걸이 건 유장희는 여유롭게 앉아 젓가락을 들어 면발을 건드려 본다.
동기의 말대로 굳어있다.
“그렇게 나쁜 거 같지는 않네. 소스 부으면 비벼져. 그냥 먹어.”
띵동-
유장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벨을 누른다.
“네, 부르셨어요.”
“이거 면이 너무 굳었어.”
“네?”
“면이 굳었다고. 다시 내와.”
“아···잠시만요.”
이런 경험이 처음인 점원.
유장희는 매니저에게 물어보려 서둘러 돌아나가려는 점원을 불러세웠다.
“저기.”
“네.”
“일 한지 얼마 안 돼?”
“네? 아···네.”
“이거 가지고 가.”
그러곤, 굳은 면 사리가 담긴 접시를 가리켰다.
“아···네.”
잠시 머뭇거린 점원은 유장희가 시키는 대로 접시를 가지고 나갔다.
3분 뒤쯤, 식당 매니저가 새로 데친 따뜻한 면을 가지도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저희 점원이 새로 온 아이라 잘 몰라서···여기 있습니다.”
매니저는 친절한 얼굴로 유장희에게 인사를 건넨 뒤, 면 사리가 남긴 그릇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 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없습니다.”
“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매니저는 익숙한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매니저가 나가자, 자리에 있던 동기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게도 역시나 익숙한 광경이지만, 잘 적응이 안 되는 성격이다.
“본인이 시켜달라고 해서 미리 시켰더니. 그럴 거면 와서 시키지. 미안하게끔.”
“내버려도, 유 변 원래 저런 거 몰랐어?”
“자기가 늦게 와놓고 저러니까 그렇지. 괜히 대신 시킨 우리가 미안하잖아.”
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유장희는 다시 한번 반문했다.
“그게 왜 미안해?”
“안 미안해?”
“뭐가 미안해?”
“아예 그렇게 조금이라도 굳은 면이 먹기 싫으면 미리 주문해달라고 하지 말던가.”
“매니저는 아무 말 하지 않는데, 뭐가 문제야?”
“예의니까 그렇지.”
다른 성격의 사람들.
전에 넘어간 적이 있어도 다시 보면 거슬릴 때가 있다.
동기는 그날따라 유장희의 행동이 거슬렸다.
“예의? 지금 나더러 예의가 없었다고 하는 거야? 뭐가 예의가 없었다는 거지?”
“미안한 마음이 없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왜 미안해해야 하냐고?”
“주문한 사람이 시간에 맞춰 못 봐서 음식이 그렇게 된 걸 가지고···아니다. 됐다. 식사해.”
하지만, 곧바로 기억났다.
예전에 이런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유장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벨을 눌렀다.
띵동-
동기는 후회했다.
괜히 트집을 잡았다.
이런 사람이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몇 초 뒤, 매니저가 들어왔다.
“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아까 가져가신 면은 버리셨죠?”
“네?”
“제가 젓가락으로 건드렸어요. 버리세요.”
“아, 그거요? 네, 그렇게 했습니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사리값은 청구하세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늦어서 다시 주문한 거니까 그렇게 하세요.”
“왜 그러세요, 변호사님. 저희가 시간을 잘못 맞췄죠. 그런 거는 언제든 다시 주문하셔도 됩니다.”
매니저는 그 뒤로 몇 번이고 더 사양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됐나? 이 정도면?”
유장희가 묻자, 말을 꺼냈던 동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말리는 성격이다.
“진짜 대단하다.”
“뭐가?”
“몰라서 물어? 아니다. 됐다. 아니야. 먹어.”
논쟁을 그만하고 먹으려던 유장희는 밥맛이 떨어졌다.
한마디 해야겠다.
밥맛을 떨어뜨린 동기에게.
“매사 그렇게 쓸데없이 남을 배려하니까, 김 변이 소송에서 맨날 지는 거야.”
“뭐어?”
“아, 또- 왜들 그래? 오랜만에 같이 모여서.”
“유 변, 방금 그게 무슨 소리야?”
“애당초 이 식당에 자주 오고, 연말 회식을 여기서 잡는 이유가 눈치가 빨라서야. 다른 데보다 음식이 잘해서가 아니라고. 그마저도 없으면 올 이유가 없지. 가격도 근처 비슷한 데보다 비싼데. 자주 이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사장이 그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니까, 십 년, 이십 년 여기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거고.”
“야아- 짜장면 10,000원에 손님한테 이런 요구까지 받아줘야 하는 거면, 15,000원 받으면 떠먹어 줘야겠네.”
“아직도 본질을 이해 못 했네.”
“본질이 뭔데?”
“어떤 식으로도 받는 돈의 가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게 맛이 됐든, 서비스가 됐든.”
“그래서, 여기는 맛이 별로니까 서비스라도 좋아야 한다?”
동기의 질문에 유장희는 한심한 듯 그를 바라봤다.
“김 변 같은 파트너가 바로 사무실 어쏘들의 질을 떨어뜨리는 거야.”
“뭐라고?! 유 변, 지금 말 다 했어?!”
사람 신경 건드리는 데에는 재주가 있는 유장희였다.
동기는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를 노려봤다.
보다 못한 다른 동기가 나서 둘을 말렸다.
“자자- 그만! 가뜩이나 사무실 분위기 이상해서, 오랜만에 모여서 그 얘기 좀 하자고 했더니, 여기서 이러면 어떡하자는 거야. 유 변, 그만해. 짜장면 먹다가 어쏘들 퀄리티 얘기가 왜 나와.”
“아무리 동기 사이라고 해도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김 변도 그만해.”
“아니, 먼저···.”
“알았어. 그만해. 짬뽕 먹어.”
동기는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반면에, 유장희는 사라졌던 입맛이 조금은 돌아왔다.
말리는 동기는 가만히 있다가는 또다시 다툼이 일어날까,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아참- 그 친구는 어때?”
“누구?”
“빅 마운틴 낙하산. 한범상 변호사였던가?”
‘변호사’라는 호칭에 유장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국내 로펌에서 일하는 외국계 변호사에게, 특히나 해외 국가의 실무 경험이 없는 어쏘에게 ‘변호사’라는 호칭을 쓰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