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27)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27화(127/190)
127화 배틀그라운드
전쟁에 있어서 전장을 고르는 일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전장(戰場),
싸움을 치르는 장소,
배틀그라운드.
소송을 하는 데에 있어도 전장은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포럼(forum)’이라고 하고,
전장을 선택하는 일을 ‘포럼 쇼핑(forum shopping)’이라 한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이 건은 국내 소송보다 싱가포르 중재가 유리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장희 변호사님은 나를 변호사라 부르지 않았다.
아니, 아예 부르지 않았다.
‘저기’, 지시할 것이 있거나 물어볼 것이 있으면 언제나 그렇게 시작했다.
“허-. 저기, 그런 조언이 필요해서 회의에 참석하라고 한 거 아니니까, 싱가포르 중재 진행 상황에 대해서만 보고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먼저 내뱉은 유장희 변호사님은 인상을 찌푸리며 명령했다.
딱히 그게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어쏘에게 예의 같은 걸 차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파악했으니까.
단순히 자격을 인정해 주지 않고, 호칭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유장희 변호사님에게 서운하거나 반감이 생긴 건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급’을 나누고 ‘편’을 가르는 행동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쯤은 학창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
대한민국 최고 로펌이라는 이곳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입사하자마자 눈치챘다.
도대기 변호사님도, 백인찬 변호사님도, 최재민 변호사님도, 모두 그랬다.
어렵게 노력해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실력 없이 자리에 올라온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감한다.
누군들 좋아할 수 있겠나.
인정받을 만한 실력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내 포장지가 하찮아 보이는 것도.
“저기.”
근데, 지금도 정말 내 포장지가 그렇게 하찮아 보이는 건가?
“네.”
‘변호사’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외국법 자문가가 한마디 끼어든 것이 매우 기분 나빴던 모양이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려던 유 변호사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이 사건에 대해서 뭘 알지?”
“기록은 다 봤습니다.”
“허허, 그래서? 그래서, 다 안다?”
그런 그의 기분 나쁜 시선을 똑바로 응시한 채 답했다.
“기록에 없어서 제가 놓친 부분이 없다면, 제 생각에는 싱가포르 중재에서 영국법으로 상대하는 것이 좀 더 유리할 것 같습니다.”
포장지가 어떻든 간에 이젠 이런 사람들에게 인정받느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
【127화 – 전장(戰場)】
국내 기업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
원인은 해외 프로젝트 관련해서 체결된 공급 계약.
국내 기업들임에도 관련 프로젝트가 해외 사업이라서 공급 계약서상의 관할과 준거법은 싱가포르 중재와 영국법으로 체결되었다.
「관할: 분쟁 시, 해당 분쟁을 재판할 수 있는 법원 혹은 기관
준거법: 분쟁을 재판하는 데에 있어 적용될 법률」
그렇다고 해서 계약서상 합의한 관할과 준거법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들의 의사가 우선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분쟁 해결 절차에는 여러 예외적 상황이 존재 한다.
한국 국적의 남녀가 미국 땅에서 혼인하면서, 이혼 시 재판 관할을 미국 법원으로 하고 준거법 역시 미국법으로 약정하는 혼전 계약서를 체결한다고, 해당 혼전 계약서를 한국법상 인정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일반 계약 역시 당사자들의 합의가 절대적인 건 아니다.
그러한 합의를 피해갈 방법은 있다.
고로, 포럼 쇼핑이라 표현이 나온 것이다.
이번 사건은 싱가포르 중재와 영국법 조항이 있음에도 국내에서 제기되었다.
여러 이유 중에서 가장 크게 작용한 요소는 아무래도 비용이었다.
유장희는 국내법상 해당 중재 조항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클라이언트에 조언했고, 국내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한 조언에 따라 클라이언트는 상대방 기업을 국내 법원에 제소했고,
그러자, 상대방 기업은 싱가포르 중재를 제기하며 국내 법원은 계약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관할이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래서, 현재 상황은 한국과 싱가포르에 재판/중재가 모두 걸린 상태.
“그래서 국내 소송 포기하고 싱가포르 중재로 하자?”
싱가포르 중재 진행 상황이나 보고하고 국내소송팀에서 작성하는 의견서 번역이나 검토하라고 참여시킨 국제중재팀 어쏘가 감히 소송 전략에 대해서 의견을 냈다.
그것도 전장(戰場)을 선택하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마음에 드는 어쏘가 그랬어도 언짢았을 텐데, ‘변호사’로 인정하기도 싫은 외국 변이, 그것도 회사에 소문이 자자한 낙하산이.
유장희는 한범상의 발언이 몹시 거슬렸다.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고, 이왕 양쪽에 모두 제기된 상황에서 싱가포르 중재원을 메인 포럼으로 고려해 보는 안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발언 내용보다 더 거슬리는 건 그의 담담하고도 당당한 태도였다.
마치 그런 권리가 자신한테 있다는 듯한.
유장희는 그런 범상을 광기에 가까운 눈빛으로 뚫어지라 노려봤다.
시선을 돌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돌리지 않는다.
더 미치게 만든다.
“나쁘지 않은 거야? 아니면 그게 낫다는 거야?”
어느 쪽으로 답하듯 쏘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도, 당연히 전자라고 답할 거라 예상하고 물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건방진 어쏘가 망설임 하나 없이 후자를 답했다.
“솔직히 제가 보기에는 싱가포르 중재가 클라이언트에게 더 유리한 포럼인 것 같습니다.”
‘이 새끼 봐라?’
유장희는 이제 치아까지 드러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어이가 없어서 올라간 입꼬리가 아니다.
노여움이다.
회의실 안에는 싸하다 못해 냉기가 돌 정도였고,
같이 참석한 소송팀 어쏘의 고개는 이제 거의 책상 밑으로 들어갈 지경이었다.
“하하하- 재미있네. 하나만 묻지. 그쪽이 영국 변호사야?”
“아닙니다.”
“그럼, 한국 변호사야?”
“아닙니다. 워싱턴주 변호사입니다.”
“그러니까, 영국 변호사 자격도 없고, 한국법도 모르는 미국 워싱턴주 어쏘 변호사가 지금 나한테 ‘싱가포르 중재가 국내 소송보다 낫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클라이언트를 설득해서 싱가포르 중재원에서 다투자고 해라.’ 그거야?”
“···.”
“말해봐. 왜 갑자기 말을 못 해?”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선배의 유치한 기싸움에 무작정 끌려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유장희의 광기 어린 두 눈을 응시한 범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변호사님 사건이니까, 결정은 변호사님께서 하시는 거지만, 만약 제 클라이언트였다면 저는 싱가포르 중재원에서 다투자고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유장희는 폭발하게 했다.
처음 ‘강태산의 낙하산’에 대한 말들이 사무실 내에 돌았을 때, 유장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변호사로 인정도 하지 않는 실무 경험 전혀 없는, 자격증만 있는 ‘외국 변호사’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해상팀 백 변호사님이 인정을 했네’, ‘삼전 특허 소송에서 활약을 했네’, ‘아람코가 찾았네’ 했을 때도 유장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봤자, 대표가 떨군 ‘낙하산 외국 변호사’.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외국 변호사 없이는 돌아가도 한국 변호사가 없으면 존재 자체를 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로펌이니까.
그렇지만, 끊임없이 도는 말들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김앤강 내 국제중재와 국외 소송 파트가 점점 커지고, 김한 대표 변호사가 외국 파트를 담당하는 변호사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한 모양새가 계속되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렀다.
어떤 놈인지 한번 보려고.
국내 소송을 주로 하기에 같이 일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적당한 사건이 들어왔다.
국제중재팀에 한범상을 요청했다.
첫인상은 평범했다.
여느 어쏘처럼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그저 그런, 괜한 호들갑.
김한 대표 변호사의 아드님께서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위에서 밀어준 걸 가지고 마치 ‘아드님’의 능력인 것처럼.
유장희는 그때처럼 무시해 주고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본인 클라이언트였으면 그렇게 안 했다?”
“네.”
“그 대답, 책임질 수 있어?”
“네.”
“대답은 잘하네. 뭘, 어떻게 질 건데? 사건 다 망쳐놓고, 사표라도 쓰게?”
“변호사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건도 패소한 적이 없으십니까?”
“뭐라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뭘?”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신다면, 싱가포르 중재에서 꼭 승소하겠습니다.”
“존중하기 싫다면?”
“그렇다면, 굳이 저한테 이런 질문들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이전 미팅 때와는 분위기가 변했다.
아니, 어쩌면 숨기고 있었는 지도.
그 모습에 유장희는 억누르고 있던 반사회적 기질을 해방시켰다.
“다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진짜 변호사라도 된 줄 아나 보네.”
“진짜 변호사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유감이네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저와 의견이 다르니, 최 변호사님께 말씀드려서 저는 이 사건에서 빠지겠습니다.”
감히 어쏘가 지정한 사건에서 빠지겠다고?
유장희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좋아. 그래, 그럼, 뜻대로 해 봐.”
“무슨 말씀이시죠?”
“싱가포르 중재원에서 하자고.”
“감사합니다.”
“대신 지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책임져야 할 거야.”
“졌다고 사표 같은 건 쓸 생각이 없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러면 무슨 말씀이신가요?”
“지금부터 이 사건 관련해서 모든 의견서랑 결정은 국제중재팀 최재민 변호사 이름으로 나갈 거야.”
“최재민 변호사님 이름으로요?”
“그럼, 뭐? 국내 변호사 자격증도 없는 워싱턴주법 자문사 이름으로 나갈 줄 알았어? 왜? 같은 팀 파트너 변호사 설득시킬 자신도 없으면서 내 앞에서만 그렇게 당당한 거였어?”
이렇게 된 거 유장희는 타겟을 국제중재팀으로 잡았다.
자기보다도 기수가 어린 최재민이 시니어 파트너가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최근 들어 사무실 내에서 부각되고 있는 국제중재팀 자체가 거슬렸다.
“그 정도도 못 할 것 같으면 입 다물고 나가.”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겠다’라는 거야? 아니면, 빠지겠다는 거야?”
“최 변호사님께 의논드리고 확답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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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게이트빌딩 12층,
국제중재팀 시니어 파트너 최재민의 방.
[범상: 변호사님, 좀 전 회의 때, 말씀드렸던 판례들 방금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검토하시고 말씀해 주십시오.]조금 전, 범상으로부터 유장희와 회의 때 주고받은 설전(?)에 대해 보고받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최애’ 어쏘는 준비된 자료와 함께 자신의 견해를 완벽하게 설명했다.
아무리 ‘최애’의 완벽한 설명이라고 해도 확인은 해야 하는 법.
최재민은 메일 박스를 열어 판례들을 검토했다.
“흠···.”
한범상의 의견이 정확하다.
한 80% 정도 확률로 싱가포르 중재가 클라이언트에게 더 유리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도 싱가포르 중재로 하자고 결정하기에 망설여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비용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이 국내소송팀 사건이라는 점이다.
과연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더 유리한 건지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확률은 확률일 뿐. 유장희가 실력이 없는 변호사가 아니었기에, 국내 소송에서 쉽게 승소한다면 국내 소송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기에···.
그건 뚜껑을 까봐야 하는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하나가 더 우려된다.
국내소송팀은 로펌의 터줏대감 같은 팀이다.
‘김’과 ‘강’을 제외하고 가장 기수가 높으신 ‘신선’이 있는 곳.
국제중재팀 시니어 파트너 이름을 걸라는 유장희의 요청은 잘못되었을 시에 시끄럽게 만들겠다는 의도가 너무나도 빤히 보였다.
‘그걸 한 변이 모르지 않을 텐데···.’
백 명 가까이 되는 국제중재팀의 시니어 파트너로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
띠리링- 띠리링-
-네.
“유 변호사님, 최재민 변호사입니다. 잠깐 통화 괜찮으신가요?”
고민 끝에 최재민은 결정했다.
-네, 괜찮아요.
“그 사건, 이제 제 이름으로 내보내겠습니다.”
싱가포르 중재를 전장으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