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33)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33화(133/190)
【133화 – 자충수】
“대한민국의 변호사시죠? 언제 변호사가 되셨죠?”
홍콩 빅토리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투 익스체인지 스퀘어 빌딩 38층.
“그러면 20년 가까운 경력이네요. 맞나요?”
골리앗건설 대 이성그룹 중재기일 두 번째 날,
한범상은 증인석에 앉은 유장희에게 영어로 질문했다.
···
“미스터 유, 관련 한국소송에 이성그룹의 정관이 제출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네.”
“그렇다면, 미스터 유는 이성그룹의 정관을 읽어보셨나요?”
클라이언트인 골리앗건설의 법무팀 담당자가 방청석에서 지켜보고 있는 상황.
새파랗게(?) 어린 어쏘가, 그것도 같은 사무실의 외국 변호사가 자신을 증인석으로 불러놓고 한국법에 관해 묻고 있는 이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다.
사무실 같았으면 ‘뭔 그런 병신 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라고 단번에 쏘아줬을 텐데···
유장희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참았다.
대답 대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범상을 쳐다봤다.
긍정의 의미, 쓸데없는 거 자꾸 묻지 말고 넘어가라는 무언의 명령.
그러나, 새파랗게(?) 어린 같은 사무실의 어쏘는 서열을 벗어놓고 올라왔다. 다시 한번 정중히 요구한다.
“미스터 유, 확실하게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건방진 새끼.’ 동시통역사가 있었지만, 유장희는 영어로 직접 대답했다.
“네, 검토했습니다.”
“꼼꼼히 검토하셨나요?”
사실상 똑같은 질문.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유장희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청구인 측 대리인석에 앉아있는 영국 변호사에게 향했다.
‘이딴 질문은 니가 알아서 쳐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의미였다.
알아들은 영국 변호사는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심판관님, 지금 피청구인의 대리인은 같은 질문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미스터 한, 증인으로 나와 있지만, 미스터 유 역시 변호사입니다. 일반 증인들 대하듯 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동일한 취지의 질문은 피해주세요.”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의미 있으려면, 증인이 본 사건의 사실관계에 대해 놓친 것 없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꼼꼼하게 질문했습니다.”
심판관의 주의에도 범상은 차분하게 증인신문을 이어갔다.
5년 차 어쏘치고는 너무나 여유롭고 능숙한 변론이 감탄스러울 법도 했지만, 정작 유장희는 인지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해 주시죠, 미스터 유. 이성그룹의 정관을 꼼꼼하게 검토하셨습니까?”
“네.”
“왜 확인하셨나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대표 권한을 확인하기 위해서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정관 내용 중, 자회사 이행보증장 같은 경우, 대표 권한으로 발행할 수 있다는 조항도 확인하셨겠네요?”
“네,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해당 정관 내용이 이 사건 이행보증장 발행 이후에 변경된 조항이라는 사실도 확인하셨나요?”
“?”
“그건 모르셨나요?”
“!”
이전까지 애 다루듯 뻔하고 지루한 질문들이 십여 분간 계속되었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쑥 들어왔다.
“미스터 유, 해당 정관 내용이 이 사건의 이행보증장 발행 이후에 변경된 조항이라는 점도 확인하셨냐고 물었습니다.”
“···.”
처음 듣는 내용이다.
유장희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클라이언트 앞에서 놓친 게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 도무지 왜 한국법으로 하자고 했는지 감이 오지 않던 한범상의 전략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미스터 유, 대답해 주시죠. 이행보증장 발행 당시, 이성그룹 정관상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사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놓친 디테일이 있다는 사실에 유장희는 순간 머리가 급격히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음···음···”
당황하니 어떤 수를 두어야 할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
대형 프로젝트가 대부분 그러하듯 계약은 여러 번 수정되었다.
초기에 논의되었던 부분에서 지나치게 이탈한 계약을 이성중공업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정과 관련해서 골리앗건설과 이성중공업은 끝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이후 이성중공업은 골리앗건설에 계약 파기 의사를 전달했다.
안타깝게도 이성중공업의 계약 파기는 매끄럽지 못했다.
영국법상 계약을 파기할 때는 그 방법을 포함해서 매우 신중해야 하는데, 이성중공업은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판단하고 섣불리 계약 파기 서신을 보내버린 것이었다.
영국의 상법은 절차적인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설사 상대방의 무리한 계약 수정 요구가 정당한 파기 사유 중 하나일지라도, 성급히 계약 파기 의사를 표명하면 역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것이 영국법상의 포지션이다.
그에 반해 한국법은 좀 더 전체적인 맥락을 살피는 편이다.
계약 파기의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 흠결이 좀 있었다고 해도, 파기의 원인이 상대방에 있음이 명확하면 약간의 흠결 정도는 공평성을 고려하여 넘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가 국제 분쟁에서는 결과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그렇기에 준거법 결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심판관님, 이의 있습니다! 피청구인의 대리인은 기존에 제출한 신문 사안과는 전혀 다른 질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증인은 그에 대해 사전에 고지받지 못했으면, 제대로 준비할 기회가 없어···.”
“심판관님, 증인은 19년 차의 한국 변호사입니다. 저는 한국법에 관해 묻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피청구인도 그런 목적으로 증인을 이번 기일에 소환한 것이고요.”
“인정합니다. 미스터 유, 한국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계약이면 이사회 결의안을 요청·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실무라는 피청구인 측 대리인의 주장이 사실인가요?”
“···.”
한범상의 다음 질문이 무엇일지 아는 유장희는 머뭇거렸다.
식은땀이 흐른다.
왜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을까?
지금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미스터 유, 증언을 거부하겠습니까?”
“···.”
「정관(定款),
회사 등 법인의 조직 및 활동을 정한 근본 규칙.
한국법상, 정관은 발기인들 간의 회사 설립에 관한 합의 계약을 담고 있고, 또한 회사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 대표 등 임원들의 권리와 의무, 주주의 권리와 의무 등을 포함할 수 있다.」
외국 회사와 계약하는 데에 있어서 그 회사의 정관 내용까지 샅샅이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표의 직인이나 사인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표현대리에 있어서 권한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주장만으로도 요건이 충족되니까.
문제는, 골리앗건설이 매우 신중했고 과실이 없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계약 당시, 한국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고 요건들을 확인했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당시 자문한 로펌이 김앤강은 아니었지만, 그 같은 전략을 짠 건 유장희였다.
준거법이 한국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강조했던 사실이었다.
따라서, 조금 전 질문에 일반적인 실무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한국소송에서 자신이 한 주장과 배척됐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실무라고 대답해버리면, 한국 변호사한테까지 자문받아 계약을 체결한 골리앗건설은 표현대리 주장 관련해서 ‘선의의 제삼자’가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꼴이었다.
해당 한국 변호사의 과실을 이성그룹에 물을 순 없는 것이기에.
‘왜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분쟁 초기 당연한 것으로 넘겼기 때문이었다.
표현대리의 요건이 갖춰졌다고 단정하고 공격했다.
상대방 역시 그렇다고 여기고 아예 준거법 바꿔 싸우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서로 머리 위에 칼에만 신경을 쓴 것이었다.
내려친 사람도, 막고 있는 사람도.
사실상 날이 서 있지도 않은 칼인지도 모른 채.
“미스터 유?”
“···.”
“미스터 유!”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한국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19년 차 변호사로서 너무나 수치스러운 도피였지만, 어느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영국법이었으면 이사회 결의안이니 정관이나 하는 문제를 논의할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이렇게 증언 거부로 넘어간다 한들, 이미 한국법으로 정해진 상황에서, 한범상의 단순한 공격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스터 한, 추가로 질문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유장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낱 외국 변호사에게 한국법으로 밀렸다.
-*-
두 달 뒤.
광화문 센터게이트빌딩 12층.
홍콩 중재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대수롭지 않은 척,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처럼 굴었지만, 최재민은 내심 초조했다.
당연했다.
생사가 갈린 일인데.
물론 패배한다면 어떻게 상황을 돌릴지 생각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런 끔찍한 상황에 내몰리고 싶지는 않다.
승소율 100% 변호사가 존재하지 않듯, 소송에도 역시 100% 확신할 수 있는 결과 따위는 없다.
만약 그렇게 확신하는 변호사가 있다면 그는 사기꾼이다.
법은 오차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규칙이 아니며, 사실관계는 언제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변수를 제공한다.
이번 사건도 그랬다.
복잡한 사건이었다.
골리앗건설과 이성중공업 사이의 계약에 이성그룹.
전자들의 계약은 홍콩 중재에 영국법이라고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되어 제공된 이행보증장은 “관련 계약의 관할과 준거법을 따른다.”라고만 되어있을 뿐, 명시적으로 “홍콩 중재”, “영국법”이라고 쓰여있지 않았다.
어느 나라 법에는 그렇게만 쓰여있어도 본 계약상의 관할과 준거법을 인정한다.
하지만, 한국법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법 조항이 있냐고?
명확한 조항은 없다.
판례가 있다.
경험이 없으면 알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본 계약은 홍콩 중재와 영국법인데, 관련 이행보증장은 관할과 준거법에 대한 분쟁이 생겨버렸다.
그렇게 이 포럼, 저 포럼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중간에 변호사도 바뀌었다.
이성중공업과 골리앗건설 분쟁을 맡았던 변호사와 이성그룹과 골리앗건설 분쟁을 맡은 변호사도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최재민은 결정권을 한범상에게 맡겼다.
누구보다 믿는 어쏘였지만, 중간중간 스며 나오는 우려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두 번째 기일 직전, 통화한 지 한 시간 만에 다시 전화가 와,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자고 했을 때는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아주 기발하고 현명한 전략 수정이었다.
그 뒤로 유장희가 몇 번이나 찾아왔다.
마지막에는 합의 이야기까지 꺼냈다.
거절했다.
똑똑-
“네.”
“변호사님.”
기다리던 한범상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서류가 들려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서류가 무엇인지 안다.
“어떻게 됐어?”
승소를 100% 확신할 순 없지만, 최재민은 99% 기대하고 있었다.
“이겼습니다. 골리앗 쪽 청구 금액 전액 불인정했습니다.”
“예스!”
최재민은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어쏘 앞에서 조금은 촐싹맞아 보였지만, 그만큼 간절했던 승리였다.
이제 잡으러 간다.
그래서 합의 제안도 거절했다.
평범한 수도 때에 따라선 신의 한 수가 된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 그거 하나 제대로 챙겨보지 않고 뭐했어! 그래 놓고도 니들이 변호사야! 이제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최재민이 국내소송팀 회의실로 찾아갔을 때, 유장희는 푸닥거리 중이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최재민을 잡아먹을 듯 째려봤지만, 대치가 길어져봤자 민망해질 건 자신이었다.
유장희는 어쏘들을 내보냈다.
“적당히 하시죠.”
최재민은 나가는 어쏘들 뒤로 문이 닫힌 뒤에 입을 열었다.
“흥.”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왔는지 안다.
똥 씹은 표정이 된 유장희는 얼굴을 돌렸다.
최재민은 그런 그의 앞에 중재 판정문을 툭 내려놓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항소할 거야.”
“쉽게 말씀하시네요.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아시고 말씀하시는 거죠?”
애초에 중재로 가는 이유가 3심까지 끝내야 최종 판결을 받을 수 있는 법원 절차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국제중재원에서 내린 판정을 항소하려면, 먼저 관할 법원으로부터 정식 허락(leave)을 받아야 하고, 그 후에도 절차가 단순하지 않다.
항소를 받은 법원은 본안을 보기 전에 중재 판정이나 절차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먼저 검토한다.
문제가 없으면 허락을 해주었어도 기각이다.
길고 비싼 절차가 시작되는 것이다.
“더 민망해지시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협조적이지 않은 상대에겐 법원의 판결을 집행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압류할 재산을 찾아야 하고, 강제집행 절차를 밟아야 한다.
중재판정에는 거기에 스텝이 하나 더 들어간다.
압류할 수 있기 전, 집행 판결을 먼저 받아야 한다.
더 많은 시간과 비용.
최재민은 클라이언트를 생각해 사무실 선배에게 기회를 줬다.
“건방진 새끼.”
그걸 발로 차버리는 유장희였다.
합의까지 하자고 찾아와 놓고선···
하긴, 결과가 나오기 전과 완패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겠지.
여차하면 말프랙티스(malpractice, 변호사 과실)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수 있는 판국이니까.
“허허, 또 선을 넘으시네. 그런 말까지 해놓고, 사무실에 남아있으면 뭐다?”
“뭐?”
최재민은 회의실을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누가 병신인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