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58)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58화(158/190)
【158화 – 리시브, 토스 그리고 스파이크】
일주일 뒤,
강남 지하의 모 술집.
여창욱은 BMP 파리바 웨일스 손해보험에 영업부 이사로 재임 중인 후배 정진수를 만났다.
“성가신 것들. 하라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지들이 무슨 해결사인 줄 아나.”
“왜 그러십니까, 전무님? 또 누가 전무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나요?”
“있어, 건방진 것들이.”
같은 회사 박진우와 김앤강을 두고 하는 말.
여창욱은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후배는 그런 선배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술을 따른다. 안 좋은 소식이 있는 눈치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 이사가 마침 딱 전화를 줬네.”
“그러셨습니까? 제가 전무님의 마음을 읽었네요. 하하. 근데, 무슨 일로···.”
여창욱은 말을 잇기 전 후배가 따른 양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요청할 것이 있다.
“배상책임보험 말이야.”
앞뒤 설명 없이 나온 단어이지만, 정진수는 여창욱이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 단번에 알아듣는다.
효경인더스트리가 BMP 파리바 보험의 고객이 된 이유가 바로 둘의 관계 때문이었다.
여창욱과 정진수의 사적인 인맥으로 시작됐고, 그 인맥은 또 다른 비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상황이 조금 꼬였어.”
“네? 어떻게···?”
“내가 일전에 조만간 최 전무 거는 지급해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잖아? 그것도 홀드 해. 일단은 내가 다시 말하기 전까지 BMP 파리바에서는 최 전무랑 김영준 팀장 법률 비용을 지원하지 마.”
“아···.”
사실 정진수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보자고 한 것이었다.
정진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되잖아.”
“그게···.”
BMP 파리바가 여태껏 임원책임배상보험 상의 법률 비용 지급 의무를 거부하고 있었던 데에는 여창욱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여창욱은 미국 FBI 조사 대응 관련 법률 비용을 개인에게 전과함으로써 최현중과 김영준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먼저 금전적으로 힘들게 하여, 회사가 시킨 것이 아닌 독단적으로 한 행동이었다는 진술서에 사인하게 만들려고 한 것.
뻔하디뻔한 수법이지만, 이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애초에 대표의 승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최현중은 당연히 살려주려는 의도였다.
다만, 김영준을 압박하는 데에 있어서 최현중이 필요했기에 일단은 둘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험을 방해하는 중이었다.
대신 최현중에게는 김영준을 설득하는 조건으로 보전해 주겠다고 약속한 상태.
그와 관련해서 여창욱은 BMP 파리바 보험의 후배 정진수에게 언질을 줘놓았었다.
자신의 큐사인에 따라 움직이도록.
김영준 팀장이 진술서에 사인한 후에 임원배상책임보험 상의 커버를 제공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법무팀에서 더는 곤란할 것 같다고···.”
김앤강이 나타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더는 법률 비용 지급을 보류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그러니까, 그게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지금까지 문제없었잖아. 조금만 더 보류하라는데, 왜 갑자기 어렵다는 건데? 문제가 뭐야?”
“김앤강에서 재보험사에 분쟁 관련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재보험사 법무팀이 연락해 와서는, 당장 지급하지만 않으면, 지연으로 인한 이자 및 손해는 일절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실력 있는 변호사라고 하면, 대부분 생각지도 못한 법의 맹점을 발견하거나 기발한 소송 전략을 짜는 변호사를 떠올리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진짜 실력 있는 변호사는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밤이고 낮이고 꼼꼼하게 팩트를 체크하는 변호사이다.
1998년, 신시내티의 대형 로펌 변호사였던 로버트 빌로트는 할머니의 소개로 웨스트 버지니아에 사는 농부로부터 사건 하나를 의뢰받는다.
마을에 화학공장이 하나 들어섰는데 그 이후로 소들이 죽어 나간다는 하소연이었다.
귀찮았지만 로버트는 할머니를 생각해서 사건을 수임했다.
처음에는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소들에 대한 적당한 보상만 받아내면 종결될 거로 여겼다.
로버트 빌로트는 화학공장 측 변호사를 만나본 뒤, 회사를 상대로 작은 클레임 소송을 제기했다.
합의를 위한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작은 손해배상 클레임인 줄 알고 수임한 사건은 그 인생뿐만 아니라 전 미국을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디스커버리를 통해 관련 자료를 받아본 로버트는 자료 안에서 이상한 정보를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퍼플루오로옥타노익 에시드(PFOA),
과불화옥탄산. 한때 프라이팬 코팅에 사용되었던 화합물로 갑상샘질환 및 기형아 출산율을 높이는 발암성 화학물질.
이 사건 이후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당시 보내준 자료만으로 그 화학물질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로버트는 화학공장을 소유한 대기업에 추가 자료를 요청해야 했다.
당연히 반가워할 리 없는 기업.
논쟁이 오갔고 소송 외적인 압박이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친기업 성향이었던 소속 로펌과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화학공장 측 변호사는 혼자 서는 도저히 검토할 수 없는 양의 자료들을 쓰레기 버리듯 그에게 던져댔고,
소속 로펌 내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린 로버트는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클라이언트들은 돈 없는 가난한 농부들이었고,
그들 역시 보상이나 좀 받아보려고 시작한 소송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매우 부당한 무언가를 본 로버트는 모든 걸 덮는 조건으로 합의할 순 없었다.
수많은 회유와 압박 속에서 혼자만의 긴 싸움을 시작했다.
한 명이었던 청구인은 수천,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에게 수임료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기업은 모든 수법을 동원해 소송을 지연시켰다.
지쳐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은 아무런 보상 없이 수년간 계속됐다.
그에게 처음으로 이 사건을 가져왔던 의뢰인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로버트 빌로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그마치 7년. 그렇게 길고 긴 외로운 싸움을 치른 후에야 그는 법원으로부터 그가 옳았다는 첫 번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이 바로 전미를 충격에 빠뜨렸던 악명 높은 테플론 사건이다.
로버트 빌로트가 막대한 자본의 거대한 대기업을 상대로 혼자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하나다.
법의 맹점을 파고든 것도, 기막힌 소송 전략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끈질기게 증거자료를 검토했다.
당연히 혼자는 검토하지 못할 것 같은 자료들을 밤이고 낮이고 들여다봤다.
누구는 정의로운 인간의 투쟁이라고 칭송하고,
또 누구는 그저 얻어걸린 집착이 나은 결과라고 헐뜯을 수 있지만,
그건 다 의견일 뿐.
팩트는, 그는 수십 명의 대기업 변호사들조차 확인하지 못한, 절대 혼자 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방대한 자료 속에서 ‘악마’를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도 변호사,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아냈어?”
효경인더스트리가 접촉한 듀혼 전(全) 직원의 형사 조사 기록에서 기막힌 사실을 하영이 발견했다.
검사와의 플리바겐(plea bargain: 유죄 자백을 대가로 형량을 조정하는 제도)을 통해서 벌금형으로 풀려난 듀혼의 전 직원.
그와 협상할 때 사용했던 증거 중 하나가 그것을 수집하는 데에 있어서 합법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증거였고,
FBI가 해당 증거를 기반으로 그를 접촉한 효경인더스트리 임직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유죄 자백을 한 듀혼 전 직원에게는 의미가 없지만, 현재 조사 중인 효경인더스트리 임직원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팩트.
증거 수집 절차를 매우 중요시하는 미국 형사 절차에서 조사 자체를 뒤엎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냥 혹시 놓친 게 있을까 계속 봤습니다.”
“왜?”
“지금 준비하는 박사논문하고도 관련이 있고···.”
자기가 고집을 피워 맡게 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뭐가 됐든, 팩트는, 그녀가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밤이고 낮이고 검토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낸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기가 막히게 잘 썼네.’
하영이 BMP 파리바의 재보험사에 보낸 내용증명을 검토하던 재민은 그녀의 명문(明文)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재다능한 그녀이지만 그녀가 제일 잘하는 건 확실히 글이다.
정말 똑 부러진다.
제대로 된 변호사라면 이런 글을 받고 뜨끔하지 않기 힘들다.
재보험사에 내용증명을 보내는 전력은 재민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너무 바빴다.
누군지 확인도 해야 하고, 재보험 계약도 검토해야 하고, 관할도 확인해야 하고,
뉴욕과 LA 사무실 개소부터 이 사건, 저 사건 봐야 할 것들이 많은 와중에 효경인더스트리 내부 상황까지.
거기다 최애의 어쏘 둘은 원래 공부를 해야 하는 중이고···.
재민은 일단 뉴욕에서 화이트 앤 체이스와의 협상에 집중한 뒤에 다른 것들을 풀어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른 매듭들을 풀고 있었다.
‘최애’가 ‘최애’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혼자였으면 몇 년이 걸렸을지 모르는 사건.
아니, 여창욱 같은 인물이 효경 내부에 있는 한 어려웠을 것이다.
졸지에 수월해졌다.
[재민: 김 과장, 나 한국행 비행기표 좌석 좀 예약해 줘.」 [비서: 언제로 발권할까요?] [재민: 최대한 빨리. 내일도 상관없어.]한국에서 돌아온 범상과 하영으로부터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를 들은 최재민은 인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범상이 리시브해 하영이 토스한 공,
스파이크를 때려야 끝이 난다.
변호사로서의 능력은 자신만큼 올라온 둘이었지만,
시니어로서 아직 가르쳐줄 게 한두 개는 남아있다.
이런 일은 빌런을 조져야 끝난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걸 하러 간다.
-*-
마포,
효경인더스트리 본사,
전략기획팀 전무실.
「“재보험사 측에서 그렇게 나온 이상, 저희 법무팀 의견이, 효경에서 아예 청구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더는 법률 비용 지급을 보류하기 힘들 것 같다고···”」
여창욱은 어젯밤 술집에서 후배한테 들은 말을 상기했다.
‘지가 누군 때문에 이사까지 올라갔는데, 그딴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법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둥,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는 둥,
주저리주저리 늘어놨지만, 그런 설명들이 여창욱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법이 어떻든, 그쪽 내부 상황이 어떻든, BMP 파리바가 최형중과 김영준의 법률 방어 비용을 지급하기 시작하면, 그의 ‘꼬리 자르기’ 전략은 꼬인다.
그 와중에 김앤강이 듀혼이랑 합의라도 해버리면, 자기가 그전까지 했던 일들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어쩌면 단순히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
띠리링-
-네, 전무님.
“사장님, 출근하셨어?”
-잠시만요. ······ 네, 출근하셨습니다.
여창욱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사장실로 갈 생각이다.
이렇게 된 이상, 중상모략을 써서라도 박진우를 내치고 김앤강을 떨궈내야 한다.
-저기요, 잠시만요. 이러시면 곤란합···.
바로 그 순간,
덜컥-
“안녕하셨습니까, 전무님.”
“자네는···.”
전무실 안으로 김앤강의 스파이커가 들어왔다.
마무리 최재민
“육사 나오셨죠? 졸업 후 군에는 그렇게 오래 안 계셨던 것 같던데, 몇 사단에 계셨습니까?”
효경인더스트리 전략기획팀 전무실.
갑자기 들이닥친 최재민이 자신의 이력을 읊을 때까지만 해도 여창욱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왜? 이제 와서 연줄이라도 대보려고? 그러는 자넨 어딜 나왔어? 법무관?”
“저는 43사단에서 육군 보병, 만기 전역했습니다.”
“사시를 늦게 패스했나? 동두천?”
“퇴역하신 지 오래되셨는데도 잘 아시네요.”
여창욱이 섬유·화학 회사인 효경인더스트리에서 전무라는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에는 그의 이력과 인맥이 한몫 톡톡히 했다.
효경인더스트리가 이렇게까지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전,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은 대한민국육군이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가 바로 여창욱이었다.
지금이야, 국방부 예산 지출에 대한 감사가 어느 정도 되고 있지만, 2015년 이전에는 사실상 인맥으로 돌아가는 곳이 바로 방위산업, ‘군납’이다.
“몇 년 도에 복무했어? 거기 사단장님이 우리 선배님이셨는데.”
“그런 분들이 한둘이시겠습니까. 아무리 육사 출신이라고 해도 십 년도 안 계셨던데, 꽤 높으신 분들하고도 친분이 있으셨습니다.”
군 이야기를 꺼내길래 여창욱은 최재민이 고개를 숙이러 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말투가 이상하다.
표정도 거슬린다.
“자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역시 단도직입적이시네요. 저도 사설이 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BMP 파리바 웨일스 손해보험의 정진수 이사님을 아시죠?”
“···.”
“잘 아시겠죠.”
“무슨 뜻이야?”
“정 이사님도 전무님의 육사 후배이시지 않습니까. 중간에 자퇴하기는 했지만.”
그런 의미로 물은 게 아니다.
여창욱은 어젯밤 술집에서 정진수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김앤강에서 재보험사에 분쟁 관련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재보험사 법무팀이 연락해 와서는, 당장 지급하지만 않으면, 지연으로 인한 이자 및 손해는 일절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그제야 최재민이 왜 찾아왔는지를 알 것 같다.
여창욱은 살짝이 느껴지려던 호감을 거두어들였다.
말이 통할 것 같은 자라고 느꼈는데, 아니다.
협박하러 온 놈이다.
“원하는 게 뭐야?”
“확실히 눈치가 빠르시네요.”
“내가 이래서 변호사 놈들을 싫어해. 머리에 뭐 좀 들었다고 혓바닥이 길어. 어른이 물으면 즉각 대답하면 될 것을.”
“하하하- 맞습니다. 저희는 시간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라서요.”
“건방지게 어디서···.”
여창욱은 자기 앞에 서 있는 변호사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여유로운 미소로 대응하는 최재민.
완전히 다르게 생겼는데, 얼마 전에 찾아왔던 한범상과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물러나 주셔야겠습니다.”
협박 카드가 나왔다.
너무나 황당하다.
여창욱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허헛, 김앤강 변호사들이 원래 다 이런가? 얼마 전에 찾아온 놈도 경우가 없더니만··· 내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러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박 이사한테 뭐라도 받았어? 앞으로 효경 사건들 그쪽에 몰아준다고 했어?”
“듀혼하고의 이번 분쟁을 잘 마무리 지으면, 다음 사건들이야 자연히 저희한테 오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아니네. 그걸 원했으면 나를 찾아왔어야지. 박 이사가 아니라.”
“그랬으면, 감옥에 갔겠죠.”
“뭐?”
감옥이라는 단어에 웃고 있던 여창욱의 얼굴이 다시 싹 굳는다.
그에 반해 최재민의 표정은 들어왔을 때보다 더 여유롭다.
“이번 일 관련해서 정진수 이사를 상대로 BMP 파리바 손해보험 측 내부감사가 진행될 겁니다. 혹시 정 이사님한테 뭐 들은 거 없으신가요? 우리 사무실의 변호사가 아주 살벌한 글을 내용증명으로 보냈는데.”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법률 비용 지급 거절은 억지가 좀 심했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변호사는 혓바닥이 길어서 싫다고 하셨나요? 저는 오리발을 더 싫어합니다.”
“뭐가 어째?!”
굳은 여창욱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험한 말이 나오기 전, 최재민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설명했다.
“김앤강에서 일하면 좋은 점은 대한민국 최고 기업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나쁜 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안의 비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도 알게 된다는 거죠. 알지만, 모른 척해야 하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
“잘 아시겠죠. 산증인이신데.”
“흥,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그따위 얄팍한 협박에 벌벌 길 줄 알아? 자네, 실력에 비해 평판이 높구먼. 그걸 알면서 감히 나를 찾아와 혓바닥을 놀리는 걸 보면. 내가 쓰는 보험회사의 감사 따위에 내가 긴장이라도 할 줄 알았어?”
“아니요. 근데,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까불기는, 감히 어디서···.”
“정 이사님이 로비한 데가 효경만 있을 거로 생각하시진 않으시죠? 정 이사가 특별하게 챙기신 분이 여 전무님만은 아니거든요.”
“···.”
“방산기업 풍전의 이건우 실장을 아시나요? 제가 복무한 43사단 이충식 사단장님의 큰 아드님. 풍전의 보험 계약을 따온 사람이 정진수 이사입니다. 정진수 이사가 어떤 식으로 영업하는지는 여 전무님이 더 잘 아실 거고. 아, 그 소식은 들으셨나요? 이충식 사단장님께서 이번에 도지사 출마하신다는 소식. 하긴, 이미 알고 계시겠죠. 워낙 선후배 관계가 돈.독.한 육사 사나회 출신들이시니까.”
!!
“그걸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여창욱은 놀랐다.
최재민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방금 말씀드렸는데요. 김앤강 변호사를 20년 가까이 하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만만하게 봤다.
박진우가 데려온 변호사는 이제 막 파트너가 된 여변호사였고, 그 위의 시니어라고 해서 알아보니, 실력은 있다곤 하지만 변호사 다섯 명도 안 되는 미국 사무실로 밀려난(?) 인사인 줄 알았는데···
“변호사라는 놈이 사건 하면서 알게 된 그런 기밀들로 협박이나 하고.”
“정확히 말하면 법으로 보호되는 기밀들은 아닙니다만···뭐, 저도 자랑스럽지는 않습니다. 근데, 상황이 상황이고, 상대가 상대인지라.”
대답하는 최재민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나는 여창욱. 목 주위가 붉어진다. 가뜩이나 가무잡잡한 피부. 뿔만 없을 뿐. 도깨비 같다.
“너 원하는 게 뭐야?”
“말씀드렸는데요.”
“헛소리 집어치우고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제가 원하는 걸 가지고 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뭐가 어째?”
“지금, 조용히 물러나시는 게 제일 깔끔할 겁니다.”
언젠가 누군가한테 이런 말을 들을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회사에 공(功)도 많지만, 죄(罪)도 많은,
편(便)도 많지만, 적(敵)도 많은 여창욱이었다.
그게 고용한 로펌의 변호사일 줄을 상상도 못 했다.
“정말 사건 때문에 이러는 거야?”
“뭐 그렇다고 해두죠.”
“자존심?”
“그것도 얼추 있고요.”
“니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딱히 뭐가 있어서 뱉은 말이 아니었다.
저런 표현이, 저런 협박이 입에 밴 사람.
늘 통해왔다.
기수가 곧 권력이었던 조직에 있었고, 그 후엔 그 인맥으로 회사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시절을 살아온 괴물.
최재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전무님.”
“그래? 그럼, 어디 맘대로 해 봐. 감사? 우리 회사의 을(乙)인 보험사 감사 따위를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
“전무님께서 지금 머리가 너무 뜨거우셔서 상황 파악을 정확하게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돌아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죠.”
“건방진 새끼.”
“BMP 파리바 웨일스의 내부감사를 두려워하셔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커질지를 두려워하셔야 한다는 뜻이었지.”
“내가 입맛 뻥긋하면 어떻게 될 사람이 여의도에, 용산에 한 둘인 줄 알아? ”
“하실 배짱은 있으시고요?”
“!!!”
조롱하듯 묻는 최재민의 두 눈이 순간 번쩍였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검사가 눈앞의 범죄자를 쥐새끼 보듯 바라볼 때나 나오는 것과 비슷한 눈빛.
그 순간, 여창욱은 그가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자기 앞에 서 있는 변호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를 다 읽어버렸다.
그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이번 판에서 잃은 게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지금 조용히 물러나시면, 적어도 회사에서 대우에 맞게 환송해 주겠죠.”
하지만, 지저분해지면··· 입을 나불대면···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은 하나 없다.
반면에 눈앞에 변호사가 속해 있는 대한민국 1위 로펌 김앤강은,
“썩어 문드러진 회사의 사건 하나 망쳤다고, 타격 같은 걸 받을 데가 아닙니다.”
썩어 문드러진 회사는 아니다.
모든 기업이 그렇듯 깨끗한 면과 지저분한 면이 공존할 뿐.
여창욱과 함께 그 지저분한 역사가 도려내지면 효경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지 못한다면, 썩음을 안고 문드러지는 수밖에.
여창욱은 처음 상대해 보는 젊은 기백에 피로감이 밀려왔다.
만만케 본 것이 후회됐다.
고인 곳에 너무 오래 있다가 보니 감이 떨어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세상이 바뀌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나회>라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걸까?’
‘대표와는 이미 이야기를 끝내고 찾아온 걸까?’
‘혹시 검찰에 연줄이 있는 걸까?’
‘아니면, 더 ‘높으신 분’들 중···?‘
여러 질문이 들었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여전히 그것이었다.
“하나만 묻지. 정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박 이사랑 친분이라도 있는 거야?”
“없습니다.”
“그러면 왜···?”
최재민은 대답을 해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알려준다.
“동기는 전무님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
“위로 올라가는 데에 저한테 필요한 사람들이라서요.”
여창욱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최재민이 말한 “필요한 사람들”이 누군지를.
···
최재민이 돌아가고 여창욱은 몇 군데 전화를 돌렸다.
그중에는 BMP 파리바 웨일스의 정진수도, 도지사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이충식도 포함되었다.
사실확인이 끝났다.
최재민이 옳았다.
뜨거워졌던 머리가 식으니, 직면한 현실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졌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아쉽다.
김앤강의 전략 수정을 받아들였으면, 자신의 공(功)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점점 줄어드는 입지에 아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갈 때가 됐다.
띠리링- 띠리링-
-안녕하십니까, 효경인더스트리 사장실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나 여 전문데, 사장님 자리에 계신가?”
최재민이 틀렸다.
끝까지 노욕을 부린 늙은이에게 박수와 환송은 없다.
-네, 전무님. 계십니다.
“그럼, 5분 뒤에 올라간다고 말씀도 전해드려.”
쓸쓸한 퇴장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