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60)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60화(160/190)
【160화 – 새로운 공간, 새로운 관계】
무언가에 적응했다는 말은 능숙해졌다는 말과 상통한다.
두 세계에 적응한 나는 아공간 사용에 능숙해졌다.
이 안에 있는 동안은 다른 시공간의 사람이 된다.
“야옹-”
“잘 있었어, 나비야?”
“멍멍, 웡웡, 워프워프···.”
“잘 있었어, 니들도?”
아무리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도 스트레스는 없다.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복잡한 문제들도 책상에 앉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실마리가 보인다.
이제는 슬슬 재미있기까지 하다.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퍼즐 조각들을 감(感)만으로 하나둘 움직이다가 맞추고 있는 그림의 한 부분이 나타났을 때의 희열.
짜릿하다.
효경인더스트리의 여창욱 전무가 퇴사했다.
내막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게 되었다.
최재민 변호사님이 찾아갔다는 이야기.
최 변호사님이 여창욱 전무의 비리를 어떻게 알아내셨는지를.
방해꾼이 사라지니, 핸들링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렇다고 복잡한 사건이 하루아침에 단순해진 것은 아니었다.
화이트 앤드 체이스와 협상이 남아있었고,
FBI 조사 방어가 남아있었다.
스트레스는 없다.
풀어낼 거다.
우리가.
늘 혼자 하는 게 익숙했는데, 어느새 팀이 생겨있었다.
인정받으려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내 뒤에 누가 있고, 내 옆에 누가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일들이 아닌 같이 무언가를 쌓아가는 경험.
특별했다.
앞으로는 좀 더 과감하게 휘둘러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든든했다.
더 빨리 달리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끼약-
“짹짹짹-”
“조롱이도 왔어?”
매번 봐도 신기하다.
그림처럼 하늘에 멈춰있던 녀석이 내가 들어오면 움직이는 모습.
이곳에도 파트너들이 있다.
내 옆에서, 내 위에서 나를 지켜주는 녀석들.
나와 함께 가는 녀석들.
아공간에 들어오는 건 시간 여행과 비슷하다.
나는 이곳에 들어와 일을 한다.
그 기간이 짧아도, 길어도 큰 차이는 없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시간차는 의미 없게 된다.
나는 분명 이곳에 오래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분명 방금 들어왔다.
“오케이. 다 끝냈다.”
학교 캠퍼스 내에서 열리는 와인 앤 치즈 이벤트에 참석하러 가려던 중, 아람코의 앤드류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키나와 원유저장 설비 관련해서 로컬 변호사의 의견서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
원래는 메일이 잘 들어왔는지만 확인하고 와인 앤 치즈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최 변호사님으로부터도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갔다 와서 할 수도 있었지만···
들어왔다.
오늘은 꼭 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있다.
해놓고 가야 마음이 편할 듯 싶었다.
“그럼, 잘들 놀고···아니지, 꼼짝 말고 있어. 또 올 거니까.”
“야옹- 야옹-”
속을 알 수 없는 기지배.
막상 같이 있을 때는 단청 피우고 있다가, 나간다고만 하면 다가와 놀아달라고 한다.
“야, 너는 혼자 어디에 가 있다가 꼭 나간다고 하면 이러더라.”
“야옹-”
“알았어, 알았어. 다음번엔 들어와서 놀아줄게.”
이 멋진 곳에 그녀와 함께 들어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한 지는 꽤 됐다.
-*-
하버드 로스쿨,
파운드 홀.
와인 앤 치즈 이벤트.
“알렉스, 이 친구예요. 내가 말한 아람코를 대리하고 있는 변호사. 토랜스 정유시설 딜 관련해서.”
“안녕하십니까, 한이라고 합니다. 범상 한 김앤강 변호사입니다.”
새로운 공간에 가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롭스 앤 그레이의 파트너 알렉스 켈러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켈러.”
“김앤강을 알아요. 이번에 뉴욕에 사무실도 냈죠?”
“네, 오픈했습니다.”
“기사로 봤어요. 예전에 같이 일한 적도 있고. 혹시 케빈 정 변호사를 아나요?”
로스쿨에서 학업만큼이나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와인 앤 치즈(Wine & Cheese) 이벤트이다.
업계 사람들을 네트워킹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준다.
결국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장 중요한 건 인맥이 된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네트워크.
그런 면에 있어서 하버드 로스쿨 와인 앤 치즈는 최상의 장소이다.
“혹시 특허분쟁팀에 계셨던 욱진 정 변호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한국 변호사님들의 영어 이름은 익숙하지 않아서요.”
“특허팀은 맞아요. 키는 한 이 정도 되고, 안경을 쓰고, 목소리가 약간 딥한···.”
“맞는 거 같군요. 네, 특허팀 정 변호사님을 압니다. 저도 같이 일했었습니다.”
“지금은 인하우스 카운슬로 옮겼던 것 같던데.”
“네, IT 회사의 사내 변호사 자리로 이직하셨습니다.”
“괜찮은 변호사님이었는데···같이 일했다고요? 그럼, 혹시 미스터 한도 특허 전문 변호사인가요?”
그냥 스치는 인연 속에서도 중요한 인간관계를 만들 기회는 늘 우리 주위에 있다.
성공하려면 그걸 잡아야 한다.
“네, 혹시 한국 특허 관련해서 의뢰할 사건이 있거나 자문이 필요하면 연락해 주십시오.”
.
.
.
도착해서는 정신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정신없이 명함을 교환했다.
그건 이벤트에 같이 참석한 하영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범상과 하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코너로 모였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있으면서도 레이더 한쪽은 상대에게 가 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
서로를 찾는다.
“완전히 날아다니시던데.”
“도 변호사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예요?”
“아닌데, 진짠데.”
와인 때문인가 하영의 얼굴이 발그스레 달아올라 있다.
“많이 마셨어요?”
“어머, 혹시 저 빨개요? 아, 어떡해··· 많이 안 마셨는데. 빈속에 마셔서···많이 빨개요?”
“완전.”
“정말요?!”
“아니요. 살짝. 귀여워요.”
“놀리지 마요.”
“놀리는 거 아닌데.”
“한 변님도 빨갛거든요.”
둘 다 뉴욕에서 올라와서 잠깐 쉬었다가 바로 이곳에 왔다.
배가 고프다.
제법 괜찮은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여러 사람과 대화해야 해서 건드릴 수도 없었다.
“나갈까요? 인사해야 할 사람들하고는 다 인사한 거 같은데.”
“그럴까요?”
“배 고프죠? 우리 뭐 먹으러 갈까요?”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매콤한 김치찌개 먹고 싶다.”
“갈까요?”
“지금?”
“저번에 갔던 알스톤의 한식당은 꽤 늦게까지 하는 것 같던데.”
“아, 거기요?”
“네. 갈까요?”
“좋아요!”
갑자기 기운이 난다.
하지만, 하영은 곧바로 기억났다.
“아아아- 안 될 것 같아요.”
“왜요?”
“한 변님, 메일 못 봤죠? 최 변호사님한테서 온 메일. 미팅 끝나고 사무실 들어가셔서 바로 보내셨었어요. 화이트 앤 체이스에서 제시한 자료들하고 박 이사님이 보내준 숫자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아, 그거요. 봤어요.”
와인 앤 치즈에 오기 직전에.
“최 변호사님 성격상 내일 오후에는 화상 통화하자고 연락이 올 것 같아요. 근데, 저 오전에 담당 교수님하고 미팅이 있어서···지금 들어가서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요. 도 변호사님은 안 봐도 돼요.”
“왜요?”
“그거 제가 검토했어요.”
“네? 언제요?”
“오기 전에.”
“그걸 다?”
“네.”
“피이- 말도 안 돼.”
“진짠데.”
빼죽 나온 입술, 가늘어진 눈.
과하게 귀여운 표정이 지어진다.
당연히 하영은 믿을 수 없다.
“거짓말. 같이 해요.”
“진짜예요.”
“아, 알았다. 한 변님이 김치찌개가 진짜 먹고 싶구나?”
“김치찌개는 도 변호사님이 먼저 꺼냈는데.”
“오케이. 콜. 까짓거 먹고 와서 새벽에 보면 되죠. 우린 불굴의 K-직장인! 가요!”
“하하- 불굴의 K-직장인. 갈까요, 그럼.”
둘 다 가고 싶었다.
김치찌개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 시간을 지속하고 싶은.
“아!”
그 순간, 창밖으로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가 떨어졌다.
“어, 눈이다.”
“눈이네요.”
···
···
“많이 올 것 같은데.”
“그렇죠?”
···
···
“그럼, 그냥··· 우리 집에 가서 끓여 먹을까요?”
“그럴까요?”
“그래요.”
“좋아요.”
···
···
“근데, 집에 김치 있어요?”
“아, 맞다. 떨어졌다. 한 변호사님도 없어요?”
“네···.”
“흠···어쩌지···.”
“김치찌개 라면은 있는데··· 라면 먹을래요?”
라면···이요?
“좋아요.”
풀냄새가 나는 남자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좀 전까지 12시를 가리키고 있던 시침이 어느새 1시를 가리켰다.
창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다.
김치라면 냄새가 가득했던 아파트 안은 이제 다시 은은한 풀내음이 난다.
“눈이 많이 내렸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계속 내리면 내일은 길이 엄청나게 막힐 것 같은데···.”
“이렇게 계속 내리면 내일 아무 데도 못 갈 것 같은데요.”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굵고 탐스러운 하얀 눈송이들.
식당으로 향하지 않고 집으로 오기를 잘했다.
이미 차도 위가 하얗다.
“밤새 온다고 하는데요.”
“예상 강설량이 20인치나 되네요.”
씻고 편한 복장으로 범상의 아파트에 다시 모인 범상과 하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핸드폰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하곤, 다시 하염없이 내리는 창밖의 눈들을 구경한다.
뭐지?
왜 기대에 차 있는 거지?
천천히 내리는 눈송이들.
그 하얀 입자들이 밤거리의 불빛을 아련하게 반사한다.
삭막하게만 보였던 도시가 어느새 눈을 떼기 쉽지 않은 풍경이 되어 있다.
“이러면, 내일 교수님하고 미팅이 캔슬되려나···.”
“그러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아마도?”
···
···
“많이 온다.”
“진짜로.”
분명 내일은 정신없는 날이 될 것 같은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편안하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진 순간,
범상이 물었다.
“자고···갈래요?”
오래 기다렸다.
“눈이···오니까요?”
초속 5센티미터로 다가오는 남자를.
“···네, 눈이 오니까···”
하영은 답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말로.
“좋아해요.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