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17)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17화(17/190)
【017화 – 타격감 제로】
“오셨습니까.”
“나 커피.”
“네.”
“땡큐.”
출근한 최재민은 컴퓨터를 켰다.
회사 메일 계정에 접속한 그는 어젯밤 앨런 앤 오버리에 번역 문서가 발송되었는지부터 확인했다.
한국시간 새벽 여섯 시경에 발송됐다.
재민은 메일에 첨부된 워드 파일을 클릭했다.
90페이지가 조금 넘는 파일.
진짜 번역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첫 몇 페이지를 검토한 재민은 만족스럽다. 깔끔하다.
문득 의문이 든다.
‘이렇게 하룻밤 만에 할 수 있는 놈이 왜 그걸 질질 끌고 있었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근데, 그보다 조금 더 이상한 게 있다.
양이 적다. 하룻밤에 90페이지를 번역한 게 적다는 게 아니라, 원자료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주고받은 메일이다 보니까 중간중간 중복되는 게 많다고 해도 이렇게나 줄까?
“변호사님, 커피 여기 있습니다.”
“김 과장, 한 변호사 출근했어?”
“네.”
“지금 내 방으로 오라고 해줘.”
재민은 범상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눈이 때꾼해 보인다.
재민은 범상이 밤새워 번역하느라 잠을 못 잤다고 여겼다.
“아침에 보냈데?”
“네.”
“근데, 번역 양이 그게 맞아? 내가 다 검토하지는 않았는데, 원자료가 한 500페이지가량 되잖아. 번역은 90페이지밖에 안 되던데?”
“원자료 대부분이 답장 쓰기로 서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이메일들이라 중복된 내용이 많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의 회의록에 대한 코멘트들을 적어 넣은 서류들도 많았고요.”
“코멘트들은 다 달랐을 거 아니야. 그건 다 들어가야 하는데.”
“네, 코멘트들을 빠짐없이 번역했습니다. 보기 쉽게 동일한 내용의 회의록 중에서 코멘트와 관련 없는 부분은 번역에서 중략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90페이지는 절대 적은 양이 아니다.
또한, 동일한 내용들은 중략하는 게 훨씬 더 검토를 수월하게 해준다.
번역 업체에 맡겼으면 무작정 다 하고 비용을 청구했을 것이다.
그럼, 시간만 더 오래 걸렸을 거고.
“수고했어.”
“아닙니다.”
“피곤해 보이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가 봐.”
“넵.”
재민은 만족스러웠다.
재배당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지만, 이 정도 지연은 큰 문젯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깔끔하게 처리됐다.
그러자, 아까 들었던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근데, 저렇게 빠릿빠릿하게 할 수 있으면서 애초에 왜 미적댄 거지?’
그 질문의 답에 대한 힌트는 영국에서 날아왔다.
징징- 징징-
「찰스 플레처
앨런 앤 오버리」
“찰스, 이 시간까지 일하는 거야? 거기 새벽 한 시잖아.”
-한국 변호사들만 야근하는 거 아니야. 우리도 필요할 때는 한다고. 회사지?
“그럼.”
-이메일 받았고 검토 중이야. 의견서는 오늘 한국시간 클로징 전에 보내줄게.
“가능하겠어?”
-가능해. 보내준 번역이 클린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검토가 훨씬 수월해졌어. 네가 직접 한 거야?
“아니. 근데 그건 왜 물어?”
-우리가 찾고 있는 내용이 하이라이트로 부각되어 있길래, 사건을 잘 아는 변호사가 한 줄 알았지. 아무튼 앞으로 한두 시간 안에 끝내서 보내줄게. 늦어도 거기 저녁 6시 전까지는 될 거야.
“오케이. 기대하겠어.”
딸깍.
통화를 마친 재민은 범상이 보낸 메일과 첨부 서류를 다시 검토했다.
그러곤 비서에게 종이 기록파일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범상에게 재배당 시점을 전후로 파일을 검토하기 위해서.
-*-
낙하산, 낙하산, 낙하산.
도하영은 진절머리가 났다.
“솔직히 불공정한 거는 맞잖아. 못 들어올 사람이 들어온 거고.”
“신입 변호사를 이렇게 밀어준 적도 없지 않아? 박사님 아드님 들어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BS지.”
“크큭- 근데, 그거 알아? 직원들도 BS라고 하는 거.”
“진짜? 어떻게?”
“마이클이 비서 앞에서 그렇게 불렀나 봐.”
“뜻도 가르쳐주고?”
“에이- 설마 뜻은 안 가르쳐줬겠지.”
도대체 언제까지 이걸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는 건지.
아무리 무료한 직장생활, 없는 씹을 거리도 찾아 씹어대는 게 점심시간 낙이라고 한들, 직원들 앞에서까지 ‘BS’, ‘BS’ 해대는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건 더 이상 불공정에 대한 성토가 아니라 시기와 질투고 모함과 선동이었다.
[하영: 한 변호사님, 혹시 오늘 약속 있으세요?] [범상: 아니요.] [하영: 그럼, 저랑 저녁 같이하실래요?] [범상: 네? 아, 네, 좋습니다.]약속을 정한 하영은 근처 조용한 식당에 예약을 잡았다.
···
저녁 시간, 범상과 하영은 광화문 근처 조용한 일식당을 찾았다.
그렇게 고급스러운 데는 아니었지만, 방이 있는 곳이었다.
점원이 주문을 받고 나가자, 범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변호사님한테 밥 한번 사려고 했는데,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오해하신 거 같은데, 그러려고 저녁을 하자고 한 건 아니에요.”
“그런가요? 하하, 뭐가 됐든, 이건 제가 사겠습니다.”
“아니요. 어차피 경비 처리되는데 왜 한 변호사님이 사나요?”
“그렇기는 한데, 그러지 않으면 밥을 살 기회가···.”
‘나한테 밥을 왜 사려는 거지? 딱히 얻어먹을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게 그 자리의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괜찮아요.”
“그럼, 커피라도 사겠습니다.”
평소 말수가 없길래 엄청 내향적인 사람인가 했는데, 막상 대화를 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교성이 있다. 뭐, 많다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단둘만의 자리가 어색하지 않았다.
적당한 순간에 점원이 들어와 음식을 놓고 가거나 물을 주러 와서 그런 것도 있었다.
대충 더 이상 방해받지 않을 것 같은 순간, 하영은 하려던 말을 꺼냈다.
“한 변호사님.”
“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주제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괜찮습니다.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한 변호사님은 한 변호사님에 대한 소문을 아시나요?”
“아···네.”
안다고?
“정확하게 뭐라고들 하는지는 모르지만. 대충은.”
담담하게 물었어도 고민을 많이 하고 꺼낸 얘기였다.
원래 남의 일에 끼어드는 타입도 아니고.
안다고 답하니, 이야기하기가 편해졌다.
“그럼, 제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불편하시면 불편하시다고 얘기해도 되고요.”
“아닙니다. 물어보셔도 됩니다.”
“강태산 대표변호사님하고 무슨 특별한 사이라도 되시나요?”
“아니요.”
그럼 됐다. 하영은 더 이상 물을 생각 없다. 그런데···
“그래도 제가 낙하산인 건 사실이니까요.”
범상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다.
“네?”
“음···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제가 김앤강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1년 반 전쯤에 DC 바를 패스하고 호기로운 마음에 지원서를 넣기는 했지만, 그때는 아무런 답변도 못 받았었거든요. 근데, 몇 개월 만에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붙고 나서 얼핏 듣게 됐습니다, 강태산 대표변호사님의 입김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작용했다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조명 아래 하영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럼, 강태산 변호사님하고는 모르는 사이이신가요?”
“네, 뵌 적도 없습니다.”
“한 번도?”
“네. 솔직히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도 모르는걸요.”
‘예스!’
기쁘기까지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든 그들이 틀렸고, 자신이 옳았다는 게 증명됐다.
“그러면 낙하산이 아니죠. 지원서를 넣었고 회사가 연락한 거니까. 한 변호사님 쪽에서 청탁한 것도 아니고.”
“제 입장에서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객관적으로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하면 안 되죠!”
순간 욱했다.
자기가 겪었던 일들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감정이입이 된 것도 있지만, 범상의 대답이 답답했다.
“친절하시네요.”
“네?”
“고맙습니다. 국제중재팀에 처음 왔을 때도 많이 도와주셨는데, 제 사정도 들어주시고. 경비 처리되는 건 알지만, 오늘 이밥은 제가 사면 안 될까요?”
그런데, 답답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느긋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특유의 그 여유로움이 있다.
‘뭐지? 정말 변변찮은 변 마이클 같은 놈이 본인 뒤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지는 알고도 저러는 거야?’
웬만하면 신경 끄고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하영은 남자가 더 궁금해졌다.
평소 그녀라면 하지 않을 말까지 튀어나온다.
“리크루트팀 도대기 변호사님이 제 작은아버지예요.”
“아! 진짜요? 몰랐어요.”
“딱히 비밀은 아니에요. 회사 변호사님들은 거의 아세요.”
“아- 그랬구나.”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작은아버지가 그런 분은 아니세요. 위에 잘 보이려고 실력도 없는 낙하산을 국제중재팀에 보내지 않으세요. 물어본 건 아니지만, 분명 한 변호사님이 자질 있다고 판단하셔서, 최재민 변호사님한테 부탁하신 걸 거예요.”
“···.”
“그렇다고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좋은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타이밍 좋게 점원이 들어왔다.
범상은 점원이 나간 후 대화를 이어갔다.
“도 변호사님은 참 좋으신 분 같아요.”
“제가요? 딱히···.”
“도대기 변호사님도 친절하셨는데.”
“네? 작은아버지가 친절하다고요?”
그럴 리가.
“네.”
대화의 방향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회사로 돌아왔을 때, 하영은 식사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한 말이 살짝 부끄럽기는 했어도.
-*-
김앤강 사무실,
GL 디스플레이 중재 사건 종이 기록파일을 검토하던 최재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기록을 다 이렇게 검토했다. 오고 간 서신이나 회의록을 차곡차곡 편철한 기록파일을 일일이 뒤져가면서.
웬만한 사건도 뚱뚱한 기록철이 십여 개 넘고, 큰 사건은 수십 개가 넘어가기도 했다.
종이를 오죽 많이 쓰면 프린터 대여 회사에서 로펌에 영업이 들어올까.
지금은 사무실이 전면 전자화가 되어서 종이 기록파일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을 뿐, 아무도 보지 않는다.
사실 이것도 만들지 말자는 걸 나이 든 선배 변호사들이 그래도 종이 기록 한 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전통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간 없어질 문화다.
앨런 앤 오버리의 찰스 플레처 변호사와 통화를 마친 최재민은 GL 디스플레이 중재 사건의 종이 기록파일을 달라고 해서 검토했다.
전체를 다 본 것은 아니고, 한범상에게 재배당한 시점 전후로 살펴봤다.
종이 기록파일의 장점은 서류가 시간순으로 편철된다는 점이다.
물론 전자파일들도 날짜 기준으로 정렬할 수 있지만, 그래도 시간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에는 이편이 좀 더 직관적이다.
또 하나, 종이 기록파일에는 해당 사건에 배당된 변호사들이 개인적인 용도로 작성해 놓은 노트나 메모들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어쏘 변호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건을 배당받으면 사건의 배경 사실과 이슈 등을 정리해 놓은 메모를 작성해 기록파일에 넣어두어야 한다.
그러한 메모는 개인용이지만 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건을 하는 파트너 변호사 그리고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가면 동료 어쏘 변호사를 위해 작성하는 것이다.
기록에는 한범상이 작성해 둔 메모가 있었다.
사건의 배경 사실, 법적 이슈들, 현재까지 진행 상황,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게 아니라 기록 보관용으로 만든 것.
그 메모에는 앨런 앤 오버리의 이번 번역 요청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사건을 배당받고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메모를 작성하면서 번역 요청이 있었다는 것을 빠뜨렸다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대충 파악했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변, 잠깐 내 방.”
최재민은 변 마이클을 방으로 불렀다.
압도적으로 여유로운 파장의 시작
학교 다닐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조별 과제를 시켜대는지를.
사회에 나와서 알았다.
“대한민국 최고 로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그걸 가만히 뒀어?”
실무에선 더한 놈들하고 같이 일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더 최악인 건,
“아니, 가서 싸다구를 날려줬지.”
“진짜?”
“진짜겠냐?”
“에이- 뭐야. 그래서 진짜 어떻게 했는데?”
조별 과제처럼 그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볼 일이 없는 게 아니라, 수년, 아니 어쩌면 십수 년 같이 일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해서 올렸지.”
“야, 가서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누구한테?”
“그 위에 변호사. 파트너라고 했던가? 그래, 너네 파트너 변호사한테.”
“뭐라고? ‘얘가 늦게 알려줬어요’라고? 그럼, 퍽이나 ‘그래? 알았어. 내가 그놈한테 가서 따질게.’ 그러겠다. 야, 어떤 조원 때문에 조별 과제를 못 해가면 교수님이 ‘아, 그래, 걔 때문에 못 했구나.’ 하고 점수 따로 주냐?”
“몰라. 난 대학을 안 다녀봐서.”
“그 팀은 그냥 전부 다 F인 거야.”
변 마이클이 나중에 알려줬다고 한 번쯤 언급하고 넘어갔을 수는 있었겠지.
그런들 뭐가 달라졌을까?
범상은 회의적이다.
“그래도 그냥 당하기만 하면 더 할 거 아니야. 알잖아, 그런 놈들 습성.”
안다.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점점 더 깊숙이 선을 넘어온다는 것을.
“그러니까 확실하게 보여줘야지.”
“뭘?”
“뭘?”
“응. 뭘?”
“음···압도적인 시간의 차이를.”
“응? 이상한데···그거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 아니냐?”
“그러니까, 뭐든 압도적이야 한다고. 누구한테 한 방을 먹일 땐 제대로 된 크리티컬 힛을 먹어야 하는 법이지. 시시한 거 고자질해봤자, 의미 없다.”
회사는 직원들 간의 미묘한 관계에 개입하지 않는다.
일만 제대로 처리되면 그만이다.
로펌이라고 다를 건 없겠지. 지들끼리 왕따를 하든, 연애를 하든. 일만 제대로 해온다면.
사실이다. 다만, 범상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나루호도···”
“야, 기중아, 너 오늘 가게 안 보지? PC방 갈래?”
“너 일 많은 거 아니었어?”
“많아.”
“놀면서도 할 수 있다는 얘기냐?”
“이따 집에 가서 하면 돼.”
“뭔지 모르겠지만 압도적으로 여유롭군. 콜!”
그건 최재민이라는 사람의 성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