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23)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23화(23/190)
【023화 – 미시간 출장】
“여론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어요. 다들 이런 불행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공장이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를 바라지만, 사고에 대한 만족스러운 후속 조처가 조속히 이뤄지지 않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점점 줄어든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라요.”
“감사합니다. 저희 클라이언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지사님께서 그간 공장 편에 서서 피해자들을 많이 진정시켜 주셨다는 것을. 될 수 있으면 이번 출장에서 피해자들과 어느 정도 합의를 보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딱히 내용이 있는 미팅은 아니었지만, 주지사와의 미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갈등을 가장 계산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었고, 의도한다면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틀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지사와의 미팅은 점잖게 진행됐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반면, 피해자 대표들과의 미팅은 살벌했다.
“지금 뭐하는 거죠? 사고 난 지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대로 된 보상 하나 없고. 도대체 이런 미팅만 몇 번째입니까!”
“당신들 뭐야? 변호사? 왜 온다는 사장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여기도 많은 변호사가 한국에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사장 오라고 해!”
최재민 변호사가 줬던 주의가 정확했다.
각자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연달아 하는 미팅들.
모드 전환이 재빠르지 않으면 실수가 딱 좋은 상황이었다.
6년 차인 장석훈 변호사도 긴장했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최재민 변호사는 아니었다.
마치 몇 번 와본 사람 같았다.
경력에서 나오는 노련함은 그런 상황에서 더 빛을 발했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희를 만나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지 변호사를 통해서 들으셨겠지만, 이번에 저희가 온 이유는 이 사건 보상에 대해 마무리 짓기 위해서입니다. 합의에 필요한 권한을 받아서 왔으니까,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즉각 수용하고, 그럴 수 없는 것들은 왜 그런지 납득하실 수 있을 때까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피해자들의 고성과 욕설이 잠시 잠잠해진 틈, 최재민은 차분하게 첫마디를 꺼냈다.
그러곤 현재의 회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중간중간 ‘헛소리하지 마’, ‘필요 없어. 돌아가.’ 등 욕설 섞인 방해가 있었지만, 그의 침착함을 흔들지는 못했다.
단단한 목소리가 감정적인 목소리들을 눌렀다.
그렇다고 ‘나는 감정 없는 변호사일 뿐이야.’ 하는 바이브를 보내는 게 아니었다. 정말 이 사건을 해결하려 온 사람처럼 신뢰가 느껴졌다.
범상은 감탄했다.
그가 왜 국제중재팀의 에이스라고 불리는지, 왜 시니어 파트너가 이 사건을 그에게 맡겼는지, 왜 시간당 900불짜리 변호사인지를 옆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
피해자 대표단과의 미팅은 5차까지 이어졌다.
“장 변호사, 어제 KLS에 보고한 법적 손해배상액 외 추가 보상금 있잖아. 이따 한국 오픈하면 윤 과장님한테 연락해서 내부적으로 어떻게 결정 났는지 확인해. 만약 아직 결정 못 내렸으면, 오전 중에 내려서 연락 달라고 해.”
“네.”
“도 변, 도 변호사는 피해자들 목록 중에서 이미 합의한 사람들 따로 뽑아. 만약 회사에서 추가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면, 기존에 합의한 피해자들에게도 추가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는지, 해야 하면 그 규모는 얼마가 될 건지 확인해.”
“네.”
“한 변호사는 MG하고 체결한 JVA 상에서 추가 보상금도 책임 분할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한 판례들이 있는지 찾아봐.”
“네.”
피곤한 프로세스였다.
때로는 몇 시간째 같은 말만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 그러기도 했다.
똑같은 말의 반복.
피해자들의 처지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입장의 차이였을 뿐.
법적 책임 한도, 그 이상을 원하는 피해자들, 그 이상을 주고 싶어도 배임 등의 문제로 인한 한계, 버팅 기는 보험회사, 한 발짝 떨어져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MG.
그래도 협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최재민은 한 명씩 설득해 나갔다.
그리고 5일째 되는 날, 한국 변호사들은 디트로이트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확정된 합의 조건들과 함께.
“다들 수고했어.”
“변호사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근사한데 데려가서 랍스터 꼬리에 스테이크라도 썰어야겠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스테이크는 내일 MG하고 미팅 후에 먹자고.”
“네.”
“그럼, 푹 자고 내일 봐.”
“넵.”
5일간에 체력과 감정 모든 면에서 소모적인 미팅을 끝내고 나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결과가 나쁘지 않아 성취감에 나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출장에 가장 어려운 미팅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장 변호사님, 변호사님은 식사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도 좀 쉬어야겠어. 그냥 방에서 시켜 먹을래.”
그래도 몇 살 어리다고 주니어들은 에너지가 남아있다.
범상과 하영은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지난 며칠간 지겹게 먹은 햄버거, 샌드위치였지만, 마땅히 다른 초이스가 없었다.
샐러드 하나와 햄버거 그리고,
“맥주 한잔할래요?”
“좋죠.”
음료를 주문했다.
그렇게 끼니를 때우며 둘은 5일간의 뭉쳐있던 긴장을 풀었다.
‘비즈니스석을 타고 가는 줄은 알았는데, 방도 각자 쓸 줄은 몰랐다.’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에서부터 처음 본 주니어 파트너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까지.
일부러 사건 관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이 했다. 그리고 내일 또 해야 하니까.
“내일 미팅 끝나고는 뭐 할 거예요?”
“끝나고 시간이 있을까요?”
“장 변호사님 말씀이 내일 MG하고 미팅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 같다고 하시던데.”
“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시간이 남으면, 음··· 모르겠네요. 시간이 남을 거라고 생각해 보지 못해서? 도 변호사님은 어디 가실 데 있어요?”
“아니요. 저도 없어요. 그냥 몇 주간 일만 했더니 온 김에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면서 디트로이트 시내 관광 같은 거 해도 좋을 것 같고 그래서요. 시간이 남으면 코메리카 파크에서 메이저리그 경기 같은 거 볼 수 있으면 최고일 것 같긴 한데.”
“야구 좋아하세요?”
“네. 뭐 잘 아는 건 아닌데. 친구들하고 보러 가는 거 좋아해요. 뻥 뚫린 경기장을 보고만 있어도 스트레스가 풀리니까. 변호사님은요? 야구 안 좋아해요?”
“딱히···한 번 가봤나?”
“아, 진짜? 재미있는데. 규칙을 몰라도 재미있어요.”
“규칙 정도는 알아요. 팀이나 선수들을 몰라서 그렇지.”
“저도 뭐 아는 선수들만 알지 자세하게는 몰라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개인적인 취미생활까지 알게 된다.
어느덧 열시.
범상은 하영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미팅 자료를 좀 더 보고 잘지 고민하던 범상은 대신 구글 검색창을 열어 타입했다.
「Used books detroit」
(중고 서적 디트로이트)
‘내일 시간이 남는다고?’
미팅 자료는 이미 충분히 봤다. 아공간 속에서.
-*-
한때는 미국에서 가장 부자 도시였던 디트로이트.
지금은 높은 실업률과 심한 빈부 격차로 고통을 앓고 있는 도시.
랜싱을 출발해 디트로이트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여러 풍경을 지나쳤다.
최재민 변호사님이 왜 이곳이 가장 미국다운 곳이라 말했는지 얼핏 이해가 가는 듯했다.
MG 사(社) 빌딩은 디트로이트 시내의 가장 중심인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 위치했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최.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전화로 통화했죠. 내가 MG의 제너럴 카운슬(General counsel, 법무이사) 토마스 뮐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토마스. 제가 재민 최입니다. 편하게 ‘제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이쪽은 저희 로펌 어쏘시어트들입니다.”
앞에서 인사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양쪽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회의실을 들어가는 순간 눈치챘다.
미팅 후 여가 시간 따위는 있지 않을 거라는 걸.
MG 사(社)측 로펌 변호사들을 포함해 총 열세 명의 변호사들과 실무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민은 범상을 옆으로 앉히며 조용히 한국말로 속삭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한 변. 이게 진짜니까.)”
“(네.)”
범상은 조사한 판례들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것들이 이 협상의 승패를 가룰 김앤강 국제중재팀의 무기였다.
포토그래픽 메모리와는 다른 종류의 능력
협상은 소송이 아니다.
승패를 가르지 않는다.
하지만, 협상이 끝났을 때, 승자와 패자는 있다.
“제이, 유감이지만, 우리는 KLS 에너지가 피해자들과 한 합의에 관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건 KLS 에너지의 책임이고 MG의 입장은 이번 사고 관련해서 책임이 없다는 겁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이메일과 전화로 협상해 왔다.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쟁점이었다.
그래서 출장을 온 것이기도 했다.
피해자들과의 회의에서 법적 손해보상금 외 추가 지급분만 잘 마무리되면 그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마무리를 지으려고.
그런데, 막상 피해자와 합의를 마치고 오니 상대방의 말이 달라졌다.
철 냄새가 나는 회의실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지난주에 전화로 이야기한 것과 상반되는 이야기인데요.”
“아니요. 제이, 나와 기억이 다르군요. 그때도 분명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을 뿐이지 확정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어요. 리멤버?”
제너럴 카운슬 토마스 뮐러가 웃으며 답했다.
머리가 하얀, 60살쯤 되어 보이는 MG의 법무이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바꿨다.
분명히 출장 전에 한 마지막 통화에서는 잠정적으로 합의한 사안들을 이번에 기록으로 남기자고 했었다.
그러나, 최재민은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질 생각 없다. 어차피 변호사끼리 말로만 한 것들. 법정에서 쓸 수도 없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MG의 새.로.운. 포지션은 뭐죠?”
“방금 말씀드렸듯이 MG의 입장은 KLS 에너지의 피해자 협상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그.전.과. 같.은. 입장이에요.”
“그냥 그게 끝인가요? MG도 KLS와의 소송을 원하지는 않을 텐데요.”
이대로 나가면 소송이다.
그러면 승패를 가르기 위해서 칼을 뽑는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진행돼도 김앤강에는 나쁠 거 없다.
하지만, 최재민은 그런 변호사가 아니었다.
머리가 검은, 이제 40살 반쯤 넘은 김앤강의 주니어 파트너는 차가운 시선으로 대응했다.
이런 식이면 칼을 뽑겠다는 눈빛.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MG에 끌려갈 생각 없다.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던 토마스 뮐러는,
“물론이에요. 합작회사가 망한 것도 아니고, 사고 한번 났다고 KLS 에너지와 이런 일로 소송전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저희 역시 추호도 없어요.”
라고 말하곤 옆에 있던 로펌 변호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MG가 고용한 로펌 변호사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두툼한 서류철을 앞으로 밀었다.
토마스 뮐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보내준 의견서에 대한 저희의 답변입니다. 미리 전해줬으면 좋았겠지만, 워낙 검토할 양이 많은 터라···이해해 주세요.”
최재민은 상대방 로펌 변호사가 내민 두툼한 서류철을 한번 보고는 다시 싸늘한 시선으로 토마스 뮐러를 응시했다.
말은 안 했지만 봐봤자 이쪽의 견해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MG의 법무이사가 그 표정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옆자리에 있던 인하우스 카운슬(Inhouse counsel, 사내 변호사) 쪽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이번엔 사내 변호사가 얇은 서류철을 그에게 건넸다.
법무이사는 그것을 받아 최재민에게 직접 내밀었다.
“이건 뭐죠?”
“KLS와의 합작회사를 통해서 추가로 진행하고 싶은 프로젝트입니다. 조금 전 KLS 이사하고 통화했어요. 당신에게 주라고 하더군요.”
최재민은 그제야 그 미팅의 진짜 목적을 이해했다.
그건 ‘갑’이 누군지를 보여주려는 자리였다.
단어만 다를 뿐, 그러한 관계는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