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24)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24화(24/190)
【024화 – 포토그래픽 메모리와는 다른 종류의 능력】
MG와의 미팅 후,
김앤강 변호사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호텔에 돌아왔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한 채 짐 싸서 돌아갈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민이 한국에 있는 KLS 담당자와 통화하는 사이, 하영은 선배 변호사에게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그녀의 질문은 범상이 의문스러워하는 것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미팅하자고 했을 때 왜 동의한 건가요? 전화로 자기네 입장은 다르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보여주려는 거지.”
“뭐를요?”
“자기네가 위에 있다는 거를.”
얼핏 이해는 가면서도 동시에 MG 같은 큰 회사가 이런 짓을 하는 게 실망스럽다.
“큰 기업들도 똑같아. 격식만 차릴 뿐이지 결국은 다 비즈니스맨들이야.”
회사의 이익이 최우선인 사람들. 최우선으로 해야만 하는 사람들.
일부러 피해자들과의 합의가 끝난 이 시점을 노렸다.
MG 또한 피해자들과의 분쟁이 빨리 끝나기를 원하는 건 사실이니까.
다만, KLS 에너지가 주도적으로 해결하기를 기다렸고 독려하는 척하다가, 피해자와의 협상이 끝난 듯 보이자, 바로 말을 바꾼 것이다. 그러고는 선심 쓰는 척 다른 발주 계약을 내밀었고.
「우리랑 계속 비즈니스 안 할 거야? 할 거면 이번 거는 그냥 니들이 책임지지?」
비즈니스 관계에서 딱히 창의적인 전술은 아니지만 매우 효과적인 전술.
당연한 듯 설명했어도 석훈 역시 짜증이 난 듯했다.
이러면 어렵게 이뤄낸 피해자들과의 합의도 물 건너가게 생겼기에.
KLS 에너지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MG의 새 계약을 받고 독박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결정권이 없는 어쏘들이 침울해하고 있는 사이, 통화를 마친 최재민이 돌아왔다.
‘을’도 짜증이 난 듯했다.
“다들 비행기표 미뤄. 내일 오전에 MG랑 미팅 한 번 더 하고 가야 할 것 같게 생겼으니까.”
그냥 당하고 있을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고무적이었다.
“장 변호사는 지금 토마스 뮐러한테, 아니다, 그 영감하고는 내가 통화해. 장 변호사는 의견서 사본을 호니그만(KLS 에너지의 현지 로펌)에 보내서 의견 달라고 해, 앞으로 3시간 안에. 도 변, 도 변은 MG가 준 새 프로젝트 검토해. KLS 윤 과장이 두 시간 뒤에 전화할 거야. 한 변은 의견서 검토하고 우리가 못 찾은 판례가 있으면 찾아봐. 지금이 11시 반이니까 3시 반에 다시 내 방으로.”
“네!”
“예!”
“네.”
“시간 없어. 이번에 이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고 가야지, 안 그러면 지난 한 달간 일한 게 헛수고가 될 수도 있어.”
얘기했던가?
로펌의 변호사들은 늘 시간에 쫓긴다고.
범상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
두껍다.
방으로 돌아온 범상은 곧바로 서류철을 열었다.
상대방 로펌 변호사의 주장이 담긴 30장짜리 의견서와 해당 주장을 뒷받침하는 200장가량의 판례 사본들.
영미법은 판례 싸움이다. 특히 상법은 누가 더 관련성 있는 판례를 더 많이 찾아오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세 시간 만에 이걸 다 검토하고 판례 서치까지 할 수 있을까?’
떨렸다.
오랜만에 쫓기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은 또렷했다.
범상은 숨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검토를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열 장, 스무 장, 서른 장···
일부러 더 집중해서 읽느라 느렸던 속도가 열 번째 장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속도가 붙는다.
신기하게도 집중력은 더 높아진다.
이상하다.
뭔가 되게 논리적이기는 한데 알고 있는 것과 부합하지 않는 그런 이격감이 든다.
‘뭐지?’
마치 정말 그럴싸한 헛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기분. 논리에 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거 같은데···
‘아!’
기억났다.
그들이 첨부한 판례들을 본 기억이.
지난 한 달간 지겹게 찾아본 관련 판례 중에 있던 것들이었다.
포토그래픽 메모리.
한번 본 것을 사진으로 찍듯이 머릿속에 저장해 두는 순간 기억 능력.
범상에게 그런 초인적 능력은 없다.
하지만, 다른 능력이 있다.
머릿속에 인이 박일 정도로 보고 또 볼 수 있는
시간.
선명하게 기억한다.
집에 가져와 아공간에서 읽었던 그 판례들을, 그리고 왜 그 판례들을 무시했는지도.
범상은 렉시스넥시스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 판례들의 평석이 담긴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를 검색했다.
‘찾았다!’
범상은 찾은 평석(논문)을 출력해 파트너의 방으로 달려갔다.
···
똑똑-
“누구야?”
“변호사님, 한범상입니다.”
덜컥.
방문을 연 최재민의 미간에는 짙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주름이었다.
“무슨 일?”
“상대방 의견서를 검토했습니다.”
‘벌써?’ 재민은 반사적으로 시계를 봤다. 세 시가 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솔직히 반갑지 않다.
당연했다. 지금은 주어진 업무를 빨리했다고 와서 자랑할 순간이 아니었기에.
제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어쏘라고 할지언정 이 상황에서 1년 차 어쏘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는 파트너는 없다.
“이따 세 시에 와. 그때 다 같이 회의할 거니까.”
차갑게 대꾸한 최재민은 방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럼, 이것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최재민은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비슷한 상황을 언제 겪었던 것 같은데···.
“이게 뭔데?”
“하버드 로 리뷰에 올라온 평석입니다.”
“하버드 로 리뷰 평석? 거기에 뭐가 있는데?”
로 리뷰(Law Review)란, 로스쿨 학생들이 발행하는 전문 법률 저널이다.
주로 법학 교수나 판검사들 혹은 실무에서 일하는 변호사들이 쓴 논문이나 그러한 형식을 따르는 글들이 실리는 잡지로, 하버드나 예일 등 명망 있는 로스쿨 로 리뷰에 실린 평석들은 판례들만큼이나 높게 평가되는 것이 실정이다.
“오늘 MG 측에서 받아온 의견서에 인용된 판례들에 대한 평석입니다.”
당연히 우리 측 주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 가져왔겠지.
재민은 그래도 확인했다.
그런 게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으나, 1년 차 어쏘가 230페이지나 되는 의견서를 검토한 뒤 세 시간 만에 찾아왔다는 것이 더 믿기 어려웠다.
“거기 뭐라고 쓰여있는데?”
“MG 측 변호사가 인용한 카일슨 케이스랑 크로프트 컴퍼니 케이스는 계약 당사자들의 책임 분할을 판단하는 데 있어 통합 조항의 효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아니라, 통합 조항의 효력이 미치는 부분을 구분할 때 최종 합의서를 우선하여 봐야 한다는 뜻일 뿐 사전의 다른 합의나 협상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게 맞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로프트 컴퍼니 케이스의 경우 그렇기에 항소심에서 합의했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진짜야? 진짜 그렇게 쓰여있어?”
“네.”
“평석을 쓴 사람은?”
“뉴욕주 연방법원 블레어 마셜 판사입니다.”
이제 방문을 활짝 연 최재민은 범상의 손에 들린 하버드 로 리뷰 평석을 낚아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기 좋게 해당 부분만 하이라이트 되어 있다.
‘새끼, 일 한번 맘에 들게 하네.’
언제 사라졌는지 미간에 있던 주름도 사라졌다.
단숨에 읽어 내려간 재민은 토마스 뮐러의 전략이 뭔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짧은 시간 안에 이런 평석을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MG가 고용한 로펌 변호사들이 이런 게 있다는 걸 몰랐을 리 없었다.
토마스 뮐러는 분명히 이 평석을 봤다.
“그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한테 당할 뻔했네. 오케이. 한 변, 가서 장 변이랑 도 변 불러와.”
“지금요?”
“응, 지금. 하던 거 두고 그냥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변은···.”
일단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고민한다.
‘이런 1년차에게 시켜도 될까?’
될 것 같다.
기대를 걸어본다.
“참석하지 않아도 돼. 나중에 따로 브리핑해 줄 테니까. 대신, 지금 가서 계약서 초안 작성해.”
“계약서요?”
“이번 피해자 합의 관련해서 MG가 KLS 에너지와 함께 책임을 공동으로 분담하겠다는 계약서 초안. 비즈니스맨처럼 협상을 하겠다면, 이쪽도 그렇게 해야지. 내일 아침 9시에 미팅이야. 늦어도 나한테 자정까지는 줘야 해. 할 수 있겠어?”
10시간 남았다.
할 수 있다.
이럴 때는 못 해도 하는 거다.
“네. 열 시까지 드리겠습니다.”
범상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이상하게 자신감이 든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
다음 날 아침,
MG 빌딩의 회의실.
어제와 똑같은 상황.
근데 서로 표정이 바뀌었다.
“어제 회의 끝나고 의뢰인하고 통화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MG가 그러한 입장을 고수하겠다면, KLS 에너지는 소송을 제기할 생각입니다.”
“그거 유감이네요.”
“이건 어제 주신 의견서에 대한 저희 측 의견입니다. 그리고 공동 책임 인정에 대한 합의서 초안도 첨부했습니다. 내일 아침 출국 전까지 연락하시면, 책임 배분 비율에 관해서 좀 더 회의할 여지는 있습니다.”
MG 법무이사 토마스 뮐러는 최재민이 내민 서류철을 열어보았다.
의견서 따위는 없었다.
하버드 로 리뷰 평석 사본 하나 달랑 들어있다.
30장짜리 합의서 초안과 함께.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
이름값
변호사만큼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족속도 없다.
그냥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하면 뭐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에 잡은 미팅이 아니었다.
한 달간 매일 같이 서신을 주고받고 이견을 조율한 뒤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졌다고 생각했기에 멀리서 찾아와 만난 것이었다.
박 터지게 논쟁하러 온 것이 아니고, 결론을 지으려고 온 것이었다.
물론 쟁의가 아예 없을 거로 생각지 않았다. 다만, 책임 여부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아닌 분담 금액을 두고 타협하는 협상을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왔더니, 상대가 말을 바꾸고 다른 카드를 내놨다.
“하마터면 그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한테 당할 뻔했어.”
미팅 전 승자와 패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MG의 책임 분담 관련해서 김앤강 측에서 낸 주장이 더 설득이 있었으니까.
MG의 법무이사 토마스 뮐러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쇼’를 벌인 것이었다. 열세 명의 변호사 군단을 옆에 세워놓고.
“피해자 측과 합의가 끝나면 우리가 압박을 느낄 거라 생각해서 블러핑을 한 거지.”
그걸 뒤집어 보려고 마지막 수를 써본 것이었다.
KLS 에너지가 피해자 측과 합의하고 나면 시간상 자기네가 유리한 시점이 올 거라는 걸 알고, ‘갑’의 위치를 이용해 판을 뒤집어 볼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KLS 에너지 측 변호사들이 자기네들 주장을 깨부술 수 있는 평석을 찾아낼 가능성도 알았다.
그래서 이 순간을 노렸겠지. 피해자들과 힘겨운 협상을 끝낸 직후,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변호사들의 심리를 이용해 먹으려고.
그래서 유선상에서는 더 변호사처럼 굴었던 것이었다. 사실은 뼛속까지 비즈니스맨이 되어버린 사내 변호사일 뿐인데.
“한 변 덕에 잘 넘겼어.”
범상이 찾아낸 하버드 로 리뷰 평석이 꼬일 뻔했던 상황을 살렸다.
그리고 김앤강의 체면을 살렸다.
늦게 찾았으면 곤란한 상황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KLS 에너지가 MG의 새 계약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에 찾았다면, 왜 이걸 이제야 찾았냐는 의뢰인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
MG와의 협상은 그 뒤로도 사흘간 계속됐다.
닷새 일정을 예상하고 온 미시간 출장은 열흘을 넘어버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협상이 끝난 뒤,
“다들 수고했어. 서울 가서 한잔해. 스테이크고 뭐고,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 시간들을 보상받을 수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