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25)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25화(25/190)
【025화 – 이름값】
호텔 방,
범상이 찾아낸 하버드 로 리뷰 평석을 정독하고 있던 하영의 입에서 자연스레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래도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아니라고?!”
폰트 크기 ‘6’의 빡빡한 글씨체로 된 판례 사본들을 포함해 200장이 넘는 의견서를 두 시간 만에 다 읽고, 그와 관련된 하버드 로 리뷰 평석을 찾아냈는데.
게다가 범상이 찾아낸 평석은 8년 전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기억하고 있냐고?”
출장 일정이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졌다.
최재민은 고생한 어쏘들에게 하루의 휴가를 허했다.
그래 놓고 정작 본인은 더 이상 “미국 냄새”을 못 견디겠다며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구매해 떠났다. 그것도 직항이 없어 캐나다 경유를 타고.
장석훈 변호사는 온 김에 입학이 예정된 학교를 둘러보고 가겠다고 개인 휴가를 당겨서 보스턴으로 날아갔다.
까톡, 까톡-
[도하석: 누나] [도하석: 표 구했어.]침대 옆에 놓아둔 전화기가 울렸다. 동생이다.
[도하영: 오! 구했어?] [도하영: 오늘 경기지?] [도하석: 오늘 코메리카 파크, 뉴욕 양키스 1시 5분 경기] [도하영: 좌석은 어디야?] [도하석: 모르지 나야. 크렉스리스트에서 한 좌석 파는 거 겨우 찾았는데.] [도하석: 어퍼 덱 뭐라고 쓰여있네. 별로 안 좋은 자리인 듯. 이메일로 보내놨으니까. 티켓 봐.] [도하영: ㅇㅋ] [도하영: 땡큐] [도하석: 근데 진짜 혼자 보러 갈 거야?] [도하영: 응] [도하석: 하여간 유별나] [도하영: 티켓값은 방학 때 한국 들어오면 줄게. 국제송금이라 까다로워] [도하석: 돈은 됐고. 나 한국 과자랑 라면이랑 필요한 거 좀 부쳐줘. 리스트는 티켓 보낸 이메일에 적었어] [도하영: 귀찮아. 걍 돈으로 줄게] [도하석: 노! 공부하는 동생한테 MLB 티켓이나 구하라고 시킨 게 누군데!!!!].
.
.
[도하석: 누나?].
.
.
[도하석: 뭐야] [도하석: 톡 하다 말고 어디 갔어?] [도하석: 또 읽씹이냐!] [도하석: 아아아아아아아 진짜!] [도하석: 야! 도하영!]열한 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코메리카 파크는 호텔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 시 경기면 천천히 준비해도 시간은 충분.
하영은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가려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
보상으로 받은 휴가,
범상은 느긋하게 일어났다.
딱히 디트로이트 관광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최 변호사님을 따라 그냥 귀국할까, 고민도 했는데, 경유는 싫었다.
넓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유튜브를 시청하던 범상은 시계를 봤다.
‘벌써 열한 시네.“
보고 있으면 시간이 참 잘 간다.
불현듯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공간에 있으면 오락하고 만화 보고 지겨울 때까지 하고 나와도 현실에선 1초도 흐르지 않는데···
범상은 유튜브를 끄고 지난번에 찾아봤던 디트로이트 시내 헌책방의 연락처를 다시 검색했다.
제법 큰 데가 근처에 있었다.
띠리링- 띠리링-
-헬로우. 킹 제임스 유즈드 북스. 뭘 도와드릴까요?
“하이. 거기 스토어에 혹시 법 관련 서적들도 있나요?”
-법 관련 서적들이요? 제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특별하게 찾는 거는 없고, 톰슨 로이터나 스윗 앤 맥스웰 같은 법 전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면 어떤 것이든지요. 교과서든 판례 북이든요. 지난 에디션도 상관없고요.”
-잠시만요. 톰슨 로이터······인텔렉츄얼 프로퍼티 디스퓨트(지식재산권 분쟁)? 그런 제목의 책이 한 권 있기는 있네요.
“아, 그래요? 혹시 다른 책은 없나요?”
-잠시만요. 스윗 앤···스윗 앤 뭐라고 하셨죠?
친절한 점원은 그 뒤로 몇 권을 더 검색해 줬다.
많지는 않다.
실무자들이 보는 전문 법 서적들은 희귀하다.
딱딱한 표지로 양장한 두꺼운 책들.
로스쿨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다.
워낙 방대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담고 있어서 교수님들도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강의에 사용하거나 좀 더 쉬운(?) 교과서들을 이용한다.
게다가 무지하게 비싸다. 보통 한 권에 몇십만 원씩하고 백만 원이 넘는 것들도 많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따로 빼놓을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바로 가게로 갈 거라서요.”
-넵. 알겠습니다.
김앤강 사무실에도 분야별로 제법 갖춰져 있기는 했다.
하지만, 변호사들이 워낙 많다 보니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집에 가져가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해상법 책은 해상팀 회의실에, 회사법 책은 기업법무팀 회의실에, 어떨 때는 시니어 파트너 변호사의 방에 보관되어 있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나뉘어 보관하다 보니 찾기가 썩 편하지 않았다.
인터넷이 안 되는 아공간에서 일을 하려면 책이 필수.
아공간에 혼자만의 도서관을 만들고 싶은 범상은 나갈 채비를 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난 에디션 중고 법 서적들은 인터넷에서도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구한다고 해도 워낙 무거워 배송이 상상 초월로 비싸다.
두세 권이라도 구해갈 수 있으면 좋을 듯싶다.
“한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도 변호사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가던 길, 범상은 로비에서 하영을 마주쳤다.
“네. 식사하셨어요?”
“아니요. 이제 하려고요.”
“저돈데. 같이 하실래요?”
“아, 저는 근처 중고 서점에 먼저 다녀올 생각이라서요. 갔다가 그 근처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호텔 음식이 좀 질려서요.”
“아, 그러셨구나···근데, 중고 서점이요?”
“네, 살 책이 좀 있어서요.”
‘책? 중고 책? 출장 와서 휴가 날에?’ 참 알면 알수록 ‘이름값’을 못 하는 남자다.
“혹시 가시려는 서점 옆에 괜찮은 커피숍이 있나요?”
“안 그래도 가면서 찾아보려고요.”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네? 아, 네, 뭐, 저는 딱히 상관없는···.”
“혼자 보내시려는 거였으면 말고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책 좀 들어주시면 점심이랑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좋아요. 그럴게요.”
하영은 계획을 바꿨다.
‘그나저나 책을 들어달라고? 이건 또 뭔 소리지?’
-*-
징징- 징징-
밴쿠버 공항,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재민은 발신자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윤 과장입니다.
“네, 과장님.”
-장 변호사님하고 문자 했는데 변호사님은 밴쿠버 경유해서 돌아오고 계신다고 들어서 전화드려 봤습니다. 통화 괜찮으신가요? 찾아보니까 지금 밴쿠버는 오후 3시인 거 같아서요.
“네, 괜찮습니다.”
한국 KLS 에너지의 담당자.
-보내주신 합의서에서 조금 의문스러운 점들이 추가로 생겨서요. 괜찮으시면 지금 좀 여쭈어봐도 될까요?
“네.”
재민은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MG와 체결한 합의서를 띄웠다.
-혹시 계약서 보실 수 있으신가요? 다름이 아니라, 23조 7항에 보면···
이미 다 설명했던 부분.
이해한다. 어려운 조항이다.
재민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차근차근 다시 설명해 나갔다.
-아, 아, 이제 이해가 가네요!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전에 한번 설명해 주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오전에 사장님 보고가 있는데, 갑자기 전화해서 물어보셔서···.
그러고 보니 한국은 아직 출근 시간 전이다.
이것이 K-직장. 워라밸이니 뭐니 해도 바삐 돌아가는 곳은 여전히 바삐 돌아간다.
“보딩하려면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았으니까, 보시다가 궁금하신 게 있으면 또 전화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이번에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장님께서, 이번에 김앤강에 제대로 반하셨어요. 일 처리 확실하시다고. 국내 최고 이름값 한다고.
맨날 보수가 비싸다고 불평하던 KLS 에너지 대표였다.
이해한다. 소위 2위라고 불리는 대형 로펌보다도 1.5 배가 비싸니까. 거기에 담당했던 변호사는 사랑의 도피나 하고 앉아있었으니.
“윤 과장님이 중간에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잘 끝나서 다행일 뿐입니다. 변호사님, 저희 이사님께서 조만간 이번 사건 맡으신 중재팀 변호사님들하고 술자리 한번 갖자고 하시는데, 언제가 편하실까요?
“미리 알려주시면 저희가 스케줄 맞추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다음 주 중으로 한번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 내일 몇 시 도착이신가요? 다섯 시쯤 맞나요?
“잘 아시네요.”
-아, 맞군요. 그럼 도착해서 잘 쉬시고, 제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딸각.
좀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통화를 끊고 나니, 급 피곤이 몰려온다.
눈을 감은 최재민의 귓가에 조금 전 KLS 담당자가 한 말이 맴돌았다.
“사장님께서, 이번에 김앤강에 제대로 반하셨어요. 일 처리 확실하시다고. 국내 최고 이름값 한다고.”
때론 돈보다 더 기분 좋은 것들이 있다.
‘이름값을 했다.’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다.
결국엔 다 잘 끝나서 망정이지, 돌이켜보면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피식-
그 이름값을 이번엔 듣보 로스쿨 출신 낙하산 덕에 지킬 수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최재민은 졸린 눈을 다시 떴다.
삼십 분만 참았다가 자야겠다.
마지막까지 이름값을 하려 한다.
발전하고 있다
“이걸 다 사시게요?”
“예상했던 것보다 좀 많네요.”
“여기 있는 것들 대부분 지난 에디션 책들인데.”
“그래서 사려고요. 지금 거의 정가에 1/20 가격도 안 되거든요. 한국에서는 너무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그래도 이건······.”
하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카트 위에 책들을 바라봤다.
질문이 많은데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게요. 좀 많네요.”
‘네, 많아요!’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다음 남자의 말이 끄덕이던 그녀의 고개를 45도쯤에서 멈추게 만들었다.
“가방을 먼저 사 와야겠어요. 같이 가실래요?”
“네? 아, 네.”
“도 변호사님.”
“네.”
“죄송한 부탁인데···.”
“말씀하세요.”
“한국 들어갈 때, 책 몇 권 좀 부탁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가방 하나에는 안 들어갈 것 같아서. 물론, 곤란하다고 하셔도 됩니다.”
“그건 곤란할 것 없죠. 그럴게요. 근데, 이 정도 책들이면 그건 곤란할 것 같네요.”
“네? 그럼, 뭐가···?”
“점심 한 번으로는 곤란하고 저녁도 사세요.”
“아! 네! 사야죠! 물론이죠. 드시고 싶으신 거 말씀하시면, 제가 사겠습니다.”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다.
하영은 그가 골라놓은 책들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거의 법 관련 서적들.
한 권만 빼고.
“그런데요, 한 변호사님.”
“네.”
“집짓기 책은 왜요?”
구판 교과서들을 사는 이유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궁금했다. 도대체 변호사가 왜 집 짓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을 사려는 거지?
“할 수 있으면 한 번 해보려고요.”
“집짓기를요?”
“네. 헤헤.”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 순간 하영은 눈앞에 남자가 정말 미치도록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