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28)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28화(28/190)
【028화 – 이행불능】
김앤강,
국제중재팀 중회의실 2.
“자, 다들 왔지.”
“아니요. 한 변호사가 아직 안 왔습니다.”
하영이 중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장석훈 변호사가 이미 와 있었다.
몇 분 뒤, 최재민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기록에 철할 게 좀 있어서···.”
한범상은 그 뒤로 들어왔다.
최재민은 범상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윗자리에 앉았다.
범상은 하영의 옆으로 앉았다.
“다들 파일 검토했어?”
“네.”
어제 들어온 사건.
총 다섯 명의 변호사가 붙었다.
주니어 파트너 최재민, 시니어 어쏘 장석훈, 주니어 어쏘들 도하영과 한범상, 그리고 시니어 파트너 성일용.
하지만 이 사건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쓸 사람은 도하영과 한범상 그리고 최재민이었다.
“도 변호사, 장 변호사가 유학 가면 도 변이 맡아서 해야 하니까, 꼼꼼하게 팔로우업해.”
“네.”
시니어 파트너가 사건을 직접 핸들하는 일은 없다.
로펌 내 그들의 주된 역할은 사건을 유치하는 일이다.
당연히 예외는 있다. 해상팀 시니어 파트너 백인찬 변호사 같은 분은 여전히 어쏘처럼 서면도 쓰고 조사도 직접 한다.
“그렇다고, 도 변한테 다 맡기고 손 놓고 있지 말고.”
“네.”
장석훈에게 하는 말이었다.
“회의 끝나면 효경에 전화해서 추가로 필요한 자료들 요청해.”
“네.”
“자, 그럼 볼까? 장 변, H345-0812 사건의 이슈가 뭐야?”
로펌 내에서 사건을 부르는 방법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의뢰인이나 상대방 당사자 이름으로 사건을 지칭하는 법이고 (예, KLS 에너지 중재건), 다른 하나는 사건 번호로 부르는 법이다.
코드로 되어있으니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별거 없다. 앞은 의뢰인을 암호화 해놓은 것이고 뒤는 사건이 들어온 시점일 뿐.
‘H345’는 국제중재팀이 ㈜효경에 붙여놓은 번호이고, ‘0812’는 8월 들어온 열두 번째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예상치 못한 시장 악화가 과연 프러스트레이션(frustration, 이행불능)에 해당하는지입니다.”
“준거법은?”
“뉴욕주법입니다.”
“중재지는?”
“ICC요.”
“도 변호사, 사실관계 정리됐어?”
“네.”
“어떻게 돼?”
“당사자들은 국내 회사 효경과 미국 어라이즌 머티리얼이고, 분쟁이 있는 계약은 2020년 7월 13일 자 N66 원사 공급계약으로······.”
첫 미팅은 길지 않다.
사건을 배당받은 변호사들이 기록을 숙지하고 있는지, 추가로 요청해야 하는 정보는 뭐가 있는지 등만을 확인하는 자리.
어쏘들이 사건의 배경과 일정들을 잘 파악하고 있는 듯 보이자, 재민은 각 어쏘에게 지시를 내리고 미팅을 끝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변, 한 변은 프러스트레이션 이슈 관련해서 비슷한 판례들 있으면 찾아서 철해놔.”
“네, 알겠습니다.”
“미국 쪽 판례만 보지 말고 커먼로 계열 국가들에서 나온 판례들 다 찾아봐.”
“네.”
“오늘 퇴근 전까지.”
“네.”
···
미팅에서 돌아온 하영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다른 사건 관련해서 쓰고 있던 의견서 워드 파일.
‘어디까지 썼더라?’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영은 다시 문서 처음 부분으로 간다.
끊어진 생각을 이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꼬르륵-
이번에는 허기가 그녀를 방해한다.
12시 30분.
아침을 안 먹었더니,
꼬르륵-
도저히 안 되겠다.
오늘 퇴근 전까지 올려야 하는 의견서지만 일단은 간단하게라도 뭘 먹어야겠다.
‘같이 먹자고 할까?’
하영은 메신저에서 표시된 범상의 이름을 봤다.
아니다.
같이 먹으면 시간이 많이 허비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쪽도 지금 리서치 폭탄을 맞아서 정신없을 게 뻔하다.
하영은 대충 샌드위치 하나 사서 돌아오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사무실을 나가기 전, 옆방에 들렀다. 그 역시 바쁠 테니 원하면 하나 사다 주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랬는데,
“한 변호사님이요?”
“네. 어디 가셨어요?”
“방금 식사하러 가신다고 나가셨는데.”
비서가 대신 알려줬다.
하영은 범상이 없는 방 안을 아쉬운 표정으로 한 번 더 보고는 건물 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들어왔을 땐, 범상은 아직이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두 시가 되어가는 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김앤강 변호사들의 점심시간은 유동적이다.
공식적으로는 12시 반으로 되어있지만, 업무가 있으면 더 늦게 갈 수도 있고 기일이나 미팅 같은 스케줄이 이른 오후에 있으면 더 일찍 먹을 수도 있다.
식사 시간도 마찬가지다. 원칙은 한 시간이지만, 바쁘면 몇십 분 만에 먹고 돌아와 일하기도 하고 (못 먹기도 하고), 클라이언트와의 식사 같은 상황이 있으면 두어 시간이 넘어갈 때도 있다.
물론 식사 시간 규정까지 깐깐하게 체크하는 파트너가 있다.
대부분은 월 180시간을 채우면 터치하지 않는 편이다.
최재민은 후자 타입이었다. 일만 제때제때 해오면 식사 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것 정도는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 업무 중간에 개인 일을 봐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내린 지시를 제때제때 완수하려면, 절대 그렇게 설렁설렁할 수 없다.
한범상 변호사는 2시 15분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 많은 일을 받고서 이렇게 느긋하게 식사하러 갔다 왔다고? 시간이 촉박할 텐데···.’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신경 꺼, 도하영! 넌 니 일이나 해!’
하영은 정신을 차리고 하던 일로 돌아갔다.
옆 방 변호사가 궁금했지만, 집중해야 할 때 못 할 때 구분 못 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7시.
‘다했다!’
하영은 완성된 의견서를 부랴부랴 재민의 이메일로 보냈다.
너무 집중했더니 정신이 몽롱하다.
목 주변도 딱딱하게 굳었다.
“아아하-”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어 한껏 스트레칭을 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사건을 들여다보기 전 저녁 식사를 하러 다녀올 생각이다.
다시금 일하느라 눌러두었던 생각이 피어오른다.
하영은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옆방 문을 노크했다.
똑똑-
“바빠요? 식사 안 해요?”
“도 변호사님, 지금 식사하러 가세요?”
“그러려고요. 아까 점심도 샌드위치로 때워서. 그때 같이 가자고 했던 베트남 식당에 갈까 하는데. 바쁘면 혼자 가고요.”
“아— 죄송해요. 다음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걸 한 시간 안에 끝내야 해서···.”
‘그렇지. 이래야 맞지.’
언제나 느긋해 보였던 그.
미시간 출장에서 그나마 조금 다급해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솔직히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다급이라 할 수 없었다.
자기 혼자 몇 시간 만에 상대방 의견서 완독하고 두세 스텝 앞서 일하고 있어 놓고선.
그건 다급이 아니라 앞서 빨리 달리는 거였다.
하영은 범상이 아까 점심때 뺄 수 없는 일정이 있었고, 그래서 늦었고, 그 결과 지금 H345-0812 사건 리서치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으로 추측했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제가 도울 게 있으면 얘기해요. 로스쿨 다닐 때 프러스트레이션(계약이행 불능) 이슈 관련해서 교수님 논문 리서치를 도와준 적이 있어서 마일스톤 케이스들은 금방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네?”
“지금 효경 케이스 판례 리서치 하는 거 아니에요? 최 변호사님이 퇴근 전까지 해놓으라고 하신?”
“아, 효경 케이스요? 아니요. 그건 다 찾아서 기록에 철해놨고, 지금은 특허팀에서 받은 사건 관련해서 리서치 중이에요.”
“네?!”
“프러스트레이션 관련해서 리서치하신 적이 계시는구나. 아, 그럼 괜찮으시면, 식사하고 돌아오셔서 제가 찾아 정리한 것 중에 빠진 게 있는지 한번 검토해 주시겠어요? 혹시 몰라서.”
도하영은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럽다.
평소 남의 일에 오지랖을 떠는 그녀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네···그럴게요. 그럼···.”
그녀는 수고하라는 말도 못 하고 재빨리 범상의 방을 지나쳤다.
빨개진 얼굴이 화끈거렸다.
콩닥콩닥 심장도 빨리 뛰기 시작했다.
-*-
국제중재팀,
최재민의 방.
똑똑-
“네-”
“변호사님.”
여덟 시가 넘은 시각, 장석훈이 찾아왔다.
퇴근하려던 최재민은 잠시 정리하던 것을 멈췄다.
“왜?”
“퇴근하시려던 건가요?”
“응. 약속이 있어서. 무슨 일이야?”
“방금 효경 법무팀 이 차장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요.”
“효경? 어라이즌 머티리얼 건?”
“네.”
목소리에서 살짝 촉박함이 느껴진다.
재민은 들었던 브리프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내일 급하게 미팅을 좀 할 수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내일? 언제? 금요일에 하기로 했잖아.”
“네. 내일 오전에요. 아까는 그렇게 얘기했는데, 조금 전에 어라이즌 측에서 연락이 와서 합의 제안을 해왔다고 하는데요. 조건이 좋아서 효경 영업팀 쪽에서는 웬만하면 중재 가지 말고 합의하는 게 어떻겠냐고 푸시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래?”
“네.”
미팅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프러스트레이션(frustration) 이슈에 대한 리서치가 필요했다.
프러스트레이션(frustration):
계약 체결 이후, 계약 당사자의 잘못 없이, 상황이나 조건이 계약 당시에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계약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상태.
계약이행 불능이라고도 함.
예를 들면, 다가오는 여름 예년과 같은 관광객 수를 예상하고 재료들을 선주문 해놨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전염병이 퍼져 관광객 수가 터무니 없이 떨어진 경우, 프러스트레이션 법리에 따르면, 주문자는 코비드로 계약 목적 달성이 불가능해졌으므로 계약 취소를 주장할 수 있다.
어라이즌 머티리얼은 시장 악화를 프러스트레이션의 이유로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어라이즌 머티리얼의 합의 조건을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하고, 그러려면 판례 리서치가 우선되어야 했다.
“알았어.”
재민은 이제 입었던 재킷을 벗었다.
“그럼, 미팅 가능하다고 답할까요?”
“열한 시까지 가겠다고 해.”
“네, 알겠습니다.”
“5분 뒤에 회의 좀 할까.”
“네.”
“그리고 한 변이랑 도 변도 참석하라고 해. 자리에 있지?”
“알아보겠습니다.”
재민은 석훈을 내보내고 비서를 찾았다.
퇴근했다.
잠깐 여덟 시라는 걸 잊어버렸다.
친구들에게 한 시간 정도 늦을 거라는 문자를 보냈다.
5분 뒤,
재민은 어쏘들이 다 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중회의실 2의 문을 열었다.
근데, 한범상이 없다.
“한 변 어디 갔어?”
“그게···.”
“퇴근했어? 전화해. 다시, 불러.”
“지금 특허팀 사건 미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최재민의 미간에 생긴 주름의 골이 깊어진다.
하영의 심장이 또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진득한 성격
여러 파트너가 일을 주고 싶어 한다는 건 분명 부러운 일이다.
그건 실력을 인정한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하지만, 여러 파트너로부터 일을 받으면 이게 문제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이 온다.
스케줄이 꼬인다.
“죄송합니다. 특허팀 미팅이 원래부터 잡혀있어서요.”
“한 변, 한 변 모토가 그거라며? ‘이 문이 닫히면, 저 문이 열린다.’”
“···.”
“그렇게 말했다는데, 입사 면접에서. 아니야?”
“맞습니다.”
“그 말뜻을 역으로 해석하면 뭐가 되는 줄 알아? ‘저쪽 문을 열고 나가면 이제 이쪽 문으로 못 들어온다’야.”
“···네.”
그리고 파트너들은 절대 서로 얘기해서 어쏘의 스케줄을 조정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어쏘의 몫이다.
“분명히 말했어. 내 사건 뒤로 밀리는 거 안 참는다고.”
“네.”
“나가. 회의 중이었어. 끝나고, 도 변한테 들어.”
“네.”
급하게 회의하자고 주니어 파트너가 어쏘들을 소집했는데, 한 변이 참석하지 못했다. 이유는 특허팀 사건 미팅에 들어가서였다.
다행히 15분 뒤에 메시지를 보고 들어왔다.
하지만, 최재민의 화를 삭이진 못했다.
미팅에 제때 참석하지 못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갑자기 잡은 미팅. 그렇게 비상식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오전에 시킨 리서치를 끝내놓지 않아서였다.
그땐 최재민뿐만 아니라 하영도 그런 줄 알았다.
“기록이 어디 갔나 했더니, 이 대리님이 분권하느라고 자기 자리에 놓아두셨네요. 효경 어라이즌 사건 기록 여기 있습니다. 옆방에 있을 테니까, 검토하시면서 제가 추가로 해야 할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회의가 끝나고 찾지 못했던 효경 사건 기록을 범상이 가져다주었다.
하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자기도 1년차 때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위로를 해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범상이 가져온 기록철 때문에 하려던 말을 잃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기록의 양 때문이었다.
“효경에서 추가로 들어온 서류가 있었어요? 못 봤는데.”
분명 오전에는 한 권도 안 되는 분량이었는데, 어느새 세 권이 되어있었다.
“아니요. 프러스트레이션 이슈 관련해서 찾은 판례들을 다 철하다 보니까, 이렇게 늘어났네요.”
판례들을 찾아서 철해놨다고?
“그리고 이거.”
“이게 뭔데요?”
“판례들 보고, 이번 사건의 승소 가능성을 나름대로 제가 판단해 본 건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의견서는 처음 써본 거라서 많이 부족할 거예요. 가차 없이 빨간 줄 그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나간 범상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하영은 순간 멍했다.
뭐부터 봐야 할지 모르겠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이걸 다 해놨으면 왜 좀 전에 최 변호사님한테 해명하지 않았지?’
제일 먼저 든 질문이었다.
지금은 물을 타이밍을 놓쳐버렸지만,
나중에 꼭 물어보리라.
하영은 범상이 주고 간 의견서부터 읽어 내려갔다.
그러곤 기록에 철 되어있는 판례들을 검토했다.
그녀가 추가하거나 뺄 건 없었다.
그러니 이제 또 다른 의문이 든다.
‘도대체 이런 실력을 가진 사람이 왜 서명대 로스쿨에 들어간 거지?’
그것도 나중에 꼭 물어보리라.
하영은 한범상 변호사가 회의 전에 이미 조사를 끝내놓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적은 포스트잇을 기록철 맨 위에 붙였다.
그런 뒤, 퇴근한 최재민 변호사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볼 수 있게.
[하영: 의견서 잘 봤어요] [하영: 잘 쓰셨던데요] [범상: 저 지금 놀리시는 건가요?] [하영: 진담인데] [범상: 그렇담 감사합니다] [하영: 퇴근하실 거예요?] [하영: 지금 하실 거면 그때 그 바에서 한잔하고 갈래요?] [범상: 한잔 좋을 것 같네요] [범상: 오늘 좀 정신없었는데]그랬다고?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