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38)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38화(38/190)
【038화 – 노장의 마지막 어쏘】
현진상선 회생 건으로 내부 회의를 하러 가려는 찰나, 동기 이정후 변호사가 방으로 찾아왔다.
백인찬은 회의를 미루고 이정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뭔 소리야? 양보하라니.”
“현진상선 회생절차를 구조조정팀에서 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백 프로가 양보해. 회생절차 신청 전에 결정된 사안이야.”
대한민국 1위 로펌이다 보니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원고와 피고가 동시에 의뢰한다든지, 채권자와 채무자가 동시에 찾아온다든지.
그럴 때는 이렇게 내부적으로 이해관계 충돌이 생긴다.
그러한 충돌의 가장 원론적인 해결 방식은 ‘퍼스트 컴, 퍼스트 서브드 (First Come, First Served)’, 1초라도 먼저 온 클라이언트의 대리를 맡는 게 원칙이다.
다만, 원칙은 원칙일 뿐, 예외는 늘 존재한다.
“무슨 소리야? 언제부터 구조조정팀에서 현진상선을 대리했다고. 거기는 대서양이잖아.”
기존 클라이언트와 새로운 클라이언트가 같이 의뢰해 왔다면, 당연히 전자를 우선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당사자들이 알려진 상황에선 누가 의뢰를 해올 것인지 대충 예측할 수 있기에, 만약에 새로운 클라이언트가 해당 사건 관련해서 의뢰를 먼저 문의한다면, 보통 기존 클라이언트에 양해를 구하는 척 의사를 물어보기도 한다.
즉, ‘퍼스트 컴, 퍼스트 서브드’ 원칙의 예외는 ‘단골우선주의’이다.
“백 프로, 현진상선 살아날 거야. 구조조정팀에서 맡아야 해.”
앞뒤 설명 다 떼고 말했지만, 백인찬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챘다.
정치에 관심 없는 그도 그 정도는 안다. 해운업계에 관련된 일이었다.
김앤강 구조조정팀에서 맡아야지만 현진상선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
경영권을 쥐고 있던 형수에게서 동생이 그것을 빼앗아 오는 순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모르겠고. 하던 대로 해. 5년 전에도 그랬잖아. 이번에 클럽들 사건 못 하면 기존 클라이언트 다 뺏겨. 새 클라이언트 하나 잡자고 그런 멍청한 결정하는 게 누구야? 자네야?”
기존 현진상선 경영진은 국내 변호사 규모 2위 법무법인 대서양을 사용해 왔다.
그래서 며칠 전, 회생절차 신청도 대서양에서 맡았다.
하지만, 다음 주쯤, 인수인계가 진행될 것이다.
그 전에 백인찬을 설득해야 한다. 괜히 이 일을 두고 시끄러운 말들이 나오지 않게 말이다.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
“변호사님이 결정했어.”
성도 붙이지 않고 그냥 ‘변호사님’이라고 했지만, 백인찬은 이정후가 누굴 두고 하는 말인지 안다.
이정후는 확실하게 다시 말했다.
“‘박사님’이 결정한 일이라고.”
백인찬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두꺼운 피부가 불뚝불뚝 움찔거렸다.
“백 프로, 해상팀도 현진이 회생하는 게 장기적으로 봐서는 더 좋은 일이잖아. 백 프로가 이번에는 양보해.”
“···.”
“어차피 해상팀 혼자서 할 수 있는 사건도 아니고. 5년 전에도 소송팀에서 인원 끌어다 한 거잖아. 대의(大義)를 보자고.”
마치 무슨 나라를 구하는 사람처럼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단순했다.
구조조정팀을 우선하겠다는 뜻이었다.
왜?
그쪽이 펌에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되니까. 적어도 그게 경영진의 판단이었다.
백인찬은 앞에 있는 책상을 당장이라도 들어 엎을 듯이 이정후를 노려봤다.
이정후는 눈썹 하나도 까닥하지 않는다.
‘하늘’이 재가한 사안이다.
한때 호랑이라고 불렸을 만큼 무서웠던 백인찬이라고 해도 별수 없다.
이정후는 더 온화한 목소리로 현진상선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
그날 저녁, 해상팀 주니어 파트너 윤상호는 같은 팀 송은지 변호사를 데리고 회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식당을 찾았다.
“에이씨-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어디 마땅히 할 데가 없다.
점원이 가져오기 무섭게 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마신 윤상호는 한탄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서, 백 변호사님은 뭐라고 하셨대요?”
“몰라, 말씀 안 하셔. 그런 거는 또 말 안 하시는 분이잖아.”
상남자들이 그렇다.
거침없다가도 졌다고 생각하면 닫힌 입술을 열지 않는다.
“뻔하지 뭐. 또 옛날 얘기했겠지.”
“옛날얘기요?”
“옛날에 백 변호사님 젊으셨을 때, 암에 걸리셨던 적이 있었어.”
“그랬잖아요.”
“그때 김한 변호, ‘박사님’이 도와주셨대.”
이름을 말하려던 윤상호는 주위를 둘러보고 별명으로 대신했다. 주위에 같은 회사 사람은 없었지만, 다른 사무실 변호사들도 종종 오는 가게였다.
“치료받고 오실 때까지 기다려준 거요?”
“그래, 그거.”
은혜로운 일이 맞기는 하다.
아무리 실력 있는 후배 변호사라고 해도 치료비를 내주고, 완치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은 고마운 일이고 은혜 갚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20년도 넘은 일이잖아요. 이 정도 했으면 백 변호사님이 그 은혜 다 갚은 거 아닌가.”
“다 갚았지! 갚고도 남았어! 솔직히 지금이야 업계가 쪼그라들어서 이렇지만, 80, 90년대는 김앤강 매출 TOP3 팀이었어. 2000년대도 나쁘지 않았고. 지금 김앤강이 이렇게 클 수 있었던 주춧돌 같은 팀이었다니까! 우리 해상팀이!”
어느새 빈 두 번째 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윤상호는 허공에 삿대질까지 해가며 울분을 토해냈다.
송은지 역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깔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힘없는 주니어 파트너들의 푸념일 뿐.
소주 세 병을 나눠 마시며 한참을 떠들었다.
해상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자기들의 수장이 한때는 김앤강의 ‘신선’들조차 함부로 못 대하는 얼마나 멋진 ‘호걸’이었는지···
그들도 목격하지 못한, 들어 아는 이야기들까지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풀린다.
다만, 술기운이 차오르고 소주의 쓴맛이 느껴질 때쯤, 다시 현실감이 찾아온다. 씁쓸하다.
“백 변호사님이 나간다고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
“······.”
“야, 송! 나는 우리 백 변호사님이 나가자고 하잖아? 바로 나간다.”
“저도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김앤강? 김앤강? 야, 원래 해상팀은 김앤강의 해상팀이 아니라 백인찬의 해상팀이었어. 지금 나가시잖아? 클라이언트 다 따라와.”
“그렇죠? 진짜 산드로고 샘이고 백 변호사님한테 충성 장난 아니잖아요.”
“산드로랑 샘만 그런 줄 알아? 클럽들 다 알아. 지금 김앤강에서 백 변호사님 연배에 서면 쓰시는 분 계시는 줄 알아? 없어. 사건도 안 봐. 그냥 타이틀만 변호사지. 다 영업만 하시잖아. 진짜 변호사는 우리 백 변호사님이지. 그러니까, 20년, 30년 전에 백 변호사님하고 같이 현장 다니면서 클레임하던 담당자들이 지금 클럽 책임자고 바이스(vice) 돼서도 백 변호사님만 찾는 거잖아. 그런데, 뭐? 양보? 야, 송, 백 변호사님이 나가서 사무실 차린다고 하잖아? 업계 지각 변동이야. 난리 나!”
선배의 거침없는 항변에 후배는 속이 시원하다. 원래 안 그런 사람이 그러니 더 그런 것도 있다.
-야, 해상, 그거 이제 한물가지 않았어?
-우리나라 해운회사들 다 망해가는데 비전은 있는 거야?
-해상팀이 따로 있을 이유가 있어? 그냥 보험 파트나 국제중재팀 안에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비록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 않을망정, 프라이드조차 없으면 지킬 수 없는 팀이었기에.
“아, 진짜, 지금 이충현 변호사만 자리에 있었어도 어떻게 해보자고 우겨보겠는데···.”
“연락해 보면 안 될까요? 조금 있으면 거기 봄방학일 텐데.”
“백 변호사님이 싫다고 하실 거야. 아까 잠깐 얘기했는데, 위의 결정을 받아들이실 것 같은 분위기야.”
“아······.”
해상팀의 주니어 파트너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패배처럼 느껴진다.
아직 싸울 수 있는데, 코치도 아닌 사람이 링 위로 흰 수건을 던져버린 느낌이다.
-*-
같은 시간,
사무실.
백인찬은 글씨가 빡빡하게 채워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마지막의 이정후가 한 말 때문에 삼십 분째 다음 문장을 쓰지 못하고 있다.
「“백 프로,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감정적으로 굴지 말라고. 해상팀에만 있는 일 아니잖아.”
“안 되겠어. 김 변호사님하고 내가 직접 얘기해 봐야겠어.”
“자네가 그래야 하면 그래야지. 근데, 백 프로, 내가 이 얘기까지는 안 전하려고 했는데···.”
“뭐?”
“이제 좀 넘겨.”
“?”
“언제까지 서면 직접 쓰고 법정에 직접 나갈 거야. 후배들한테 기회 줘야지. 윤상호가 자네 밑에서 17년이야. 그쯤 되면 다른 팀 주니어들은 나가서 클라이언트랑 골프 치고 이제 밑에 애들 줄 사건들 따와. 자네나 나나 나이가 몇 인데. 인수인계 안 할 거야? 이렇게 정말 해상팀을 어디 뒷방 팀 만들 거야? 젊었을 때도 그렇고, 김 변호사님이 자네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때는 김앤강의 엘리트 중 엘리트만 있었던 팀이었는데.
특허팀, 국제중재팀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 해외 쪽 일이 들어오면 무작정 해상팀에 들고 왔을 때가 있었는데.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백인찬은 패배감이 들었다.
자질 없는 놈 쳐내고, 인성 안 된 놈 쳐내고, 근본 모르는 놈 쳐내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다.
고작 4명 밖에 없는 팀에 5년 차 밑 어쏘는 있지도 않다.
‘내가 잘못한 걸까?’
그래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나이 들어버린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자신을 믿고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미안함이 몰려온다.
한때는 아닌 건 아니라고, 다들 무서워서 벌벌 기는 선배들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질렀던 그였는데···
그게 벌써 20년 전 이야기다.
팔목이 저리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방을 나가고 싶지 않다.
그때,
똑똑.
“변호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인찬의 방으로 한범상이 들어왔다.
한범상이라는 변수
“어, 좀 할 일이 남아있어서. 왜? 무슨 일이야, 한 변? 나한테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아까 윤 변호사님이랑 잠깐 얘기했는데요. 현진상선 회생 건 때문에 바빠지실 것 같다고···.”
“현진상선?”
“네, 그래서 괜찮으면 이충현 변호사님 돌아오실 때까지만이라도 해상팀 사건 좀 같이하면 안 되겠냐고 하셔서요.”
“윤 변이 자네한테 그랬어?”
“네, 아까 저녁 드시러 가시기 전에 잠깐.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셨는데, 제가 다른 선약이 좀 있어서 못 했습니다.”
저녁 전이면 이미 현진상선 회생 관련해서 클럽들의 의뢰를 받지 못할 것 같다고 얘기한 이후다.
“바쁜가 보네. 잘나가나 봐, 한 변.”
“아닙니다.”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들어보니까, 특허팀 사건도 받는다면서?”
“안 바쁩니다.”
백인찬은 담담하게 대답하는 범상의 얼굴을 쳐다봤다.
자랑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겸손을 떠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냥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담백했다.
“그래?”
“네.”
“근데?”
“사건 좀 주십시오.”
“뭐?”
“회생 사건도 해보고 싶습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백인찬은 덩치가 좋은 남자였다. 키가 아주 큰 것은 아니었지만, 한창 일을 많이 할 때는 100kg쯤 나갔다. 또래 중에서는 거구에 속했다.
게다가 피부도 까무잡잡했고 뭐든 짙고 두꺼웠다.
그에 비하면 자신 앞에 서 있는 어린 어쏘는 왜소했다.
키는 비슷한 듯싶은데 몸무게는 한 60kg쯤 나갈까? 아니, 마르고 길어서 그렇지, 180cm까지는 안 될 듯싶다.
하얗고 순한 얼굴이라 자신하고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범상에게서 젊은 시절의 자신이 보였다.
“회생 사건이 해보고 싶다고?”
“네.”
“그럼, 구조조정팀을 가야지. 왜 나한테 왔어?”
“외국 변호사라서요.”
국내 구조조정팀에서 외국 변호사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맞다. 이 녀석은 외국 변호사였지.’
잠깐 헷갈렸다.
백인찬은 늦은 밤, 자신을 찾아온 한범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신기한 놈이다.
1년 전 봤을 때랑 분위기가 다르다.
고작 1년밖에 안 다닌 놈한테 연륜이라고 하면 우습지만,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한 3~4년쯤 다닌 놈 같다.
이제는 제법 자신감도 있어 보인다. 이 시간에 다른 팀 시니어 파트너를 찾아와 사건을 달라고 할 줄도 알고.
싹이 보인다.
아니, 싹은 전에도 보였다.
이놈은 크게 될 놈이다.
“그래? 그럼, 줄게. 근데 뭐 일 많다고 징징거리면 그때는 중재팀이고 특허팀이고 내가 너 여기 못 다니게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여유로운 젊은 패기가 꺼져가던 노변의 심장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씨를 지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