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5)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5화(5/190)
【005화 – 일만 시간의 법칙】
“한범상 씨?”
“네.”
“작년에 우리 회사에 지원하셨죠?”
면접은 생각보다 상냥(?)했다.
까다로운 질문들을 무자비하게 던져댈 거라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인적 사항들에 관해서만 확인하는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상한 질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태산 변호사님하고 사이가 어떻게 돼요? 개인적으로 알아요?”
“네? 강태산 변호사님이요?”
“아님, 집안끼리 알고 지내는 사이라든가.”
“아···혹시 김앤강의 대표변호사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니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요.”
또한, 왜 나한테 면접 연락이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약간은 풀리기도 했다.
지난여름 미국 워싱턴DC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날, 같이 시험을 본 동기·선배들이랑 술자리를 가졌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로스쿨 출신들이었어도 우린 그날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처럼 신이 났고, 김앤강에 지원해 보자는 말까지 나왔었다.
농담이었다. 하버드, 예일 등 미국 변호사협회가 승인하는 탑 14 로스쿨 출신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김앤강에 국내 소재 국제법률로스쿨 출신이 붙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그날 난 용감했다. 술기운도 있었고.
그 새벽, 집에 돌아와 김앤강 웹사이트 ‘Foreign Attorney(외국인 변호사)’ 지원 페이지를 통해 커버레터와 이력서 등을 제출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고 애썼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대략 한 5분간 이불킥을 하고는 이 일에 대해 아무한테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거절 이메일은커녕 서류를 잘 받았다는 답변도. 그렇게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 회사에 대해서 궁금한 거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음 주부터 나와요.”
“네?”
“왜요? 다음 주는 곤란해요? 그럼, 다다음 주부터 나와도 되고.”
“아니요, 전혀 곤란하지 않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는 걸로.”
취직됐다.
사실 궁금한 거는 많았다.
‘왜 이제 와서 연락을 주신 거지?’
‘급하게 뽑는 거라고 해도 다른 지원자들도 많았을 텐데 왜 나한테 연락을 주신 거지?’
‘강태산 변호사님을 아냐고 물으신 이유가 무엇이지?’.
하지만, 그런 것들을 꼬치꼬치 물을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은 감사하고 기회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누구 말대로 판검사 2년만 하다 나와도 인생이 달라진다고, 김앤강도 그런 곳이었으니까. 2년만 버티면 변호사로서 커리어가 달라지는 곳.
“예! 감사합니다!”
넙죽 인사를 한 뒤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로펌 생활. 아니, 김앤강 생활.
한 달 동안 나는 근 5,000페이지가 넘는 번역을 했다.
“이 번역을 진짜 사흘 만에 한범상 씨가 전부 혼자 했다고?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지금? 한범상 씨라고 하면 믿겠어?”
리크루트팀 도대기 변호사님.
검사 출신 12년 차 파트너.
6년 차 때 컬럼비아대 로스쿨 LLM(법학석사) 수료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 취득.
나중에 알게 됐다, 이분이 김앤강의 엘리트 중 엘리트라는 사실을. 대형 로펌의 리크루트팀은 일종의 경영수업으로 훗날 매니지먼트 레벨로 올라가려면 필수적으로 거치는 루트인 것을.
하지만, 그때는 그저 나를 가장 못마땅해하는 상사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그건 아닙니다. chatGPT를 활용해서 혼자 한 번역입니다.”
솔직히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속도로 번역을 해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시작부터 말도 안 되는 업무를 맡긴 건 그였고, 일주일 안에 번역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600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넘겨줬다.
도 변호사님이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건 면접 때부터 알고 있었다.
삶의 모토가 뭐냐는 질문에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입니다’라고 답했더니, 그는 “삶의 태도가 너무 안이한 거 아니야”라고 혼잣말이 아닌 혼잣말을 내뱉고는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었다.
어딜 가나 까다로운 상사들은 있기 마련.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는 최대한 얌전히 분위기 파악부터 한 후 차근차근 일을 배워가려고 했었다. 눈에 띄지 않게, 무던하게.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바뀔 수밖에 없었다.
출근 첫날, 도 변호사님이 왜 나를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이유를 알았다. 그들에게 난 ‘낙하산’이었다.
“좋아, 그럼. 여기 또 급하게 30페이지 번역할 문서가 있는데, 바로 좀 해와. 몇백 페이지짜리 번역도 사흘이면 끝내는 사람이니까, 30페이지 정도는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하겠지? 두 시간 뒤에 가지고 와.”
답답했다.
‘왜 다들 나를 낙하산으로 보는 거지?’
‘우리 집안은 김앤강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집안이 아니라고요!’
하소연할 데는커녕 왜 그렇게 생각들을 하시는지 물어볼 데도 없었다.
답답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그래? 다들 나를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여기서 내가 일도 못 하고 쭈뼛거리면 그들은 나와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은 허위 사실을 옳다고 믿을 게 뻔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입사 후 저에게 주신 일은 번역밖에 없었습니다.”
“인턴도 안 하고 들어온 신입에게 덜컥 사건이라도 맡길 줄 알았어?”
“면접 때는 경력을 인정해 준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나는 아니야.”
“알겠습니다.”
“뭘?”
“한 달 동안 5,000페이지 번역을 시키셨는데, 첫 번역 때부터 계속 제가 혼자 한 것이 맞냐고 확인하시길래, 저는 제가 번역을 잘해서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제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일 처리를 하는 거라고 계속 의심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아.”
“그게 왜 의심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만약 제 학력이나 경력 때문이라면, 조금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부당한 일이 아닌가요?”
“그게 왜 부당하지? 나는 한범상 씨를 몰라. 그러니까, 한범상 씨가 여태까지 걸어온 길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그런데, 한범상 씨가 지금까지 이뤄온 것들을 보면, 과연 우리 펌에서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라도 갖췄는지가 심히 의심스러워.”
“그러면 저를 왜 뽑으셨나요?”
“내 결정이 아니었어. 아니, 내가 물어보고 싶어. 한범상 씨는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강태산 변호사님하고 무슨 관계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맹세할 수 있습니다. 뵌 적도 없고, 집안끼리 무슨 사이 같은 거는 더더욱 아닙니다.”
참고 있던 것을 물었다.
도대기 변호사님은 내 눈이 뚫어져라 쳐다봤고,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미스터리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난 굳이 강태산 변호사님한테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은 없는데. 정히 궁금하면 한범상 씨가 찾아 뵙고 물어보든가.”
“···.
“그렇지. 그게 현명하지. 자, 그럼, 이 이슈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쪽팔려서 나갈 게 아니라면, 어쩌겠어, 이렇게 된 이상 한범상 씨가 증명하는 수밖에. 본인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 한범상 씨 학력이나 경력으로는 절대 여기 들어올 수 없는 거라는 걸.”
날카로웠다.
틀린 말이 없었다.
법무법인 양아의 고민수 변호사는 지극히 감정적인 상사였다. 감정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초기에는 그래서 힘들었는데, 그런 사람이라는 걸 파악하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상대하기 쉬웠다. 기분 나쁠 때는 피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도대기 변호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차갑고 집요했다.
이런 사람을 납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눈앞에서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그럼, 여기서 하겠습니다.”
“뭐?”
“증명하라고 하셨으니까, 방금 주신 번역일, 변호사님 방에서 해도 되겠습니까?”
자그마치 5,000페이지다.
현실에서는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지만, 아공간에서는 근 일 년이 흘렀다.
그래, 맞다.
내 영어 실력이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들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 1년 가까이 나는 죽어라 법률 서류만 번역했다.
일만 시간이 법칙이라고들 한다.
자신 있었다.
30페이지짜리 영문 계약서 정도는 한 시간 만에도 할 수 있다.
“다했습니다.”
“······.”
-*-
정확히 58분이 걸렸다.
조금 전 한범상이 번역하고 간 30페이지짜리 계약서를 검토하던 도대기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눈앞에서 증명해 보였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변호사라고 뽑은 사람의 번역 실력을 검증하고 있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도대기는 그만큼 한범상을 무시했었다.
그제야 그를 그렇게나 무시한 데 대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많이는 아니고 살짝.
하지만, 그의 일이 그런 거였다.
실력검증.
능력이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조직의 암 덩어리가 될 뿐이니까. 그런 자들은 아예 뽑지 않는 게 최선이고, 실수로라도 뽑았다면 빨리 제거해야 하는 일이 그가 리크루트팀의 외국 변호사 담당으로서 해야 할 임무였다.
띠리링- 띠리링-
그는 해상팀 윤상호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윤상호입니다.
“변호사님, 저 도대기입니다.”
-어, 도 변호사. 웬일이야?
“얼마 전에 한국어 영어 둘 다 잘하는 변호사나 인턴이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어, 있어?
“네, 새로 들어온 워싱턴DC 변호사가 한 명 있는데요.”
도대기는 마음을 바꿨다.
100% 암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한범상에게 기회를 줘볼 생각이다.
-*-
한범상의 집.
“엄마, 나 왔어.”
“그래, 왔니. 밥은?”
“엄마도 참. 지금이 몇 신데 밥을 안 먹어. 먹었어.”
“요새 좀 마른 거 같으니까 그러지. 잘 챙겨 먹어.”
“알았어.”
“그래, 그럼, 올라가 쉬어. 아참- 근데 너 혹시 뭐 실수로라도 물 틀어놓은 적 있니?”
“응? 아니. 왜?”
“이번 달 수도세가 너무 나왔어. 구청에 가서 따져야 하나.”
아공간 100 ~일만 시간들을 투자해 마스터하고 싶은 100가지~
어렸을 적, 푹 빠져 했던 롤플레잉게임에는 ‘잡 시스템(Job System)’이라는 것이 있었다.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잡(Job, 직업)을 선택한 뒤 레벨업을 통해 육성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이 특별했던 이유는, 게임 중간에 캐릭터의 직업을 변경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플레이하던 캐릭터는 다른 능력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게임의 서사를 따라가는 것보다 그게 더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을 마총사로 키워 파황격 스킬을 마스터했고, 다음에는 부직업으로 소환사를 선택해 용왕 바하무트를 부렸고.
그러고 나서도 질리지 않아 이미 끝판왕을 깼음에도 도적, 음유시인 등 다양한 직업을 선택해 캐릭터를 키웠었다.
정말이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플레이했었다.
솔직히 말해, 언제까지 시킬지 모르는 번역일이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 도대기 변호사, 당신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봅시다.’
오기 같은 것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쌓이고 쌓인 시간은 배신하지 않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번역가가 되어 있었다.
짜릿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번 계기가 아니었으면 이 방의 진정한 용도를 깨닫는 데 오래 걸렸을지도 몰랐기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금요일 저녁, 일찍 퇴근하고 돌아온 나는 ‘아버지의 아공간’에 들어가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공간 100 ~일만 시간을 투자해 마스터하고 싶은 100가지~
1.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플레이하기
2. 읽다 만 만화책들 끝내기
3. 할리 데이비드슨 몰아보기
4. 최고의 삼계탕을 끓인다.
5. 5개 국어 공부하기
6.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잭슨 폴락 퍼즐을 맞춘다.
7. 드럼 배워보기
8. ······」
비록 스무 개를 채우지 못하고 아이디어가 떨어졌어도 괜찮았다.
리스트를 채우는 일도 재미의 한 부분이니까.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처음 이 공간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지만, 그때는 두려움이 더 컸다면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설렘이다.
까톡-
[범상: 내일 뭐 하냐?] [범상: 가게 봐?] [기중: 아니.] [기중: 왜?] [범상: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자.] [기중: 그래.] [기중: 어디?]그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세팅이 있다.
좀 더 큰 공간과 약간의 공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추가 가구들도.
다행히 김앤강의 연봉은 넉넉하고도 남았다.
[범상: 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