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54)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54화(54/190)
【054화 –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만은 아닌】
시니어 파트너 양호락이 이번에는 번역이나 회계 검토가 아닌 일을 줘보라고 지시했다. 아예 새 사건을 정식으로 배당하라고 했다.
일하는 걸 제대로 한번 보겠다는 의미.
이성훈은 한범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 들어온 사건 관련해서 갖는 첫 미팅에 참석하라고.
그런데, 한범상이 사무실로 올라왔다. 바빠서 사건을 못 받겠단다.
기업법무팀 주니어 파트너 이성훈은 난감했다.
‘쩝, 타이밍하고는···하- 참, 근데, 곤란하게 됐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 팀, 저 팀에서 사건을 받는 변호사들과 일할 때 간혹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사실 이래서 여러 팀에서 사건을 받는 변호사들은 기피 대상이다.
바쁠 때 다른 팀 사건 때문에 못 하겠다고 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이 팀, 저 팀에서 사건을 줘보려고 했다가도 이런 상황이 자꾸 발생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을 잘하는 것과 상관없이 해당 변호사에게는 부탁하지 않게 된다.
일을 잘하는 것에 우선하는 것이 필요할 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실력 있는 어쏘가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을 여러 팀에서 받다가 오히려 더 빨리 경쟁에서 도태되는 예도 있다.
그래서 선배들은 조언한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도 그냥 빨리 분야를 정해서 팀으로 들어가라고.
그리고 대부분은 그렇게 한다.
이는 로펌 내 외국 변호사에게도 해당하는 조언이다.
외국 변호사는 국내 변호사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여러 팀과 일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팀을 정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같다. 정말 일을 너무 잘해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될 정도가 아니라면, 정기적으로 사건을 주는 소속팀이 없는 외국 변호사 역시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범상의 거절은 현명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성훈의 처지에서만 난감할 뿐이지.
국내 변호사였다면 어떻게 기수라도 언급하면서 협박, 회유, 설득을 시도해 보겠는데···
한범상은 외국 변호사였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해상팀, 국제중재팀, 하물며 특허분쟁팀까지, 세 팀에서 사건들을 받으면서 월 300시간 쓰고 있는 어쏘.
뭔 소리를 한들 씨알이 먹히겠냐.
어깨가 축 늘어진 이성훈은 양호락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변호사님, 이성훈입니다.”
···
“그래서, 한범상 변호사가 미팅에 참석 못 하겠다고 했다고?”
“네.”
“알았어. 나가 봐.”
이성훈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양호락은 그를 내보내고 곧바로 한범상을 불렀다.
띠리링-
-네, 변호사님.
“한범상 변호사더러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네, 변호사님.
딸깍.
잠시 후, 한범상이 방으로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어, 거기 좀 앉아.”
“네.”
양호락은 책상에서 나와 한범상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상석에 앉기가 무섭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성훈 변호사한테 들었어. 신건 못 받겠다고?”
“네.”
“바빠?”
“네. 조금.”
“일정 조정해 줄 테니까, 그냥 하는 게 어때?”
“죄송합니다.”
명령조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양호락의 두 눈이 커진다.
살짝 당돌함이 느껴졌다.
“왜? 해보니까 기업법무팀 일과는 맞지 않는 거 같아서?”
“아니요. 아직 제대로 사건을 해보지를 않아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왜?”
“저도 모르게 욕심이 생겨서 주시는 일들을 다 받아서 했는데, 지금은 기존에 배우고 있는 분야에 좀 더 집중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해상이랑 국제중재 사건에 집중하겠다?”
“특허분쟁 사건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결과만 보면 양호락이 원했던 건 이것이었다.
하지만, 한범상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상기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도망치듯 퇴사하는 패배감 찌든 어쏘의 모습이어야 하는 놈이 ‘나 당신 일 안 받아’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나가 봐.”
“네.”
-*-
“후—”
코너에 몰리거나 긴장되는 순간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타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사람을 상대할 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양호락 변호사님을 만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참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일평생 평범했던 나였다.
성적도 중간, 외모도 중간, 스펙도 중간.
누군가가 나를 정말 필요해서 찾은 건 엄마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이 아버지의 아공간을 발견한 뒤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좋았다.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반에서 1등 하는 아이들의 느낌이 이런 거였나?’
더 잘하고 싶고.
계속 1등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딱히 눈에 띄어야지 하는 마음은 없었다.
아, 물론 백인찬 변호사님이 아월리 레이트를 올려야 한다며 편을 들어주었을 때, 에이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부끄럽지만, 마치 스포츠 에이전트가 선수 연봉 협상을 대신해 주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었다.
살짝 붕 뜬 게 사실이었다.
법무법인 양아에서 시간당 십만 원이었던 내가 3년도 안 돼 시간당 칠십만 원 변호사가 되었으니···
막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낙하산’이라는 걸 잠시 잊어버렸다.
양호락 변호사님을 상대하면서, 신기성 전무와의 미팅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나는 ‘낙하산’이다.
내가 요구한 것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내가 나한테 당당할 수 있는 근거일 뿐.
다른 사람들은 그런 해명 따위 관심 없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것은 증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두 번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비굴하게 굴 생각은 없다.
나는 ‘낙하산’이다.
‘강태산의 낙하산.’
이유가 무엇이든 나를 그 프레임에만 가둬놓고 대할 생각이면, 나 역시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할 생각 없다.
그냥 ‘강태산의 낙하산’답게 구는 수밖에.
그게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백인찬: 한 변호사, 혹시 내일 오전에 시간 되나? 현진상선 회생절차 관련해서 관리인하고 DIP 파이낸스 논의가 있는데, 같이 갈 수 있어?]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계속 증명해 보일 것이다.
[한범상: 네, 갈 수 있습니다.]똑똑-
메신저로 백인찬과 이야기하는 도중, 최재민이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 변, 내일 오전까지 급하게 써줘야 하는 계약서가 하나 있는데 가능하겠어?”
“네, 물론입니다.”
띠리링- 띠리링-
최재민이 나가자마자, 울리는 전화.
“네, 한범상입니다.”
-한 변호사, 난데. 잠깐 특허팀 회의실로 와줄 수 있겠어? 여기 화이젠 담당자가 오셔서 설명하고 하고 있는데, 한 변이 있으면 좋겠는데.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나도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
사직빌딩 10층,
오랜만에 출근한 강태산은 창밖에 풍경을 바라봤다.
북악산에 연두색 잎이 가득하다.
언제나 그렇듯 계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산 위 나무들이다.
이곳에서 선배 김한과 함께 김앤강 법률사무소를 시작한 것이 벌써 근 50년 전.
반세기 동안, 이 책상에 앉아 매해 풍경이 바뀌는 것을 봐왔다.
같으면서도 같지 않다.
그는 알았을까? 반세기 후, 고작 열두 명으로 시작한 사무실이 이렇게까지 큰 조직이 되어 있을 줄을.
몰랐다.
턱수염이 아직 새까맣게 나던 시절, 삼겹살 구워지는 불판 앞에서 농담 삼아 얘기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의 조직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뿌듯하면서도 마냥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왜일까?
강태산은 김앤강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그가 그리던 로펌은 아니다.
어쩌면 그가 그렸던 로펌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하지만, 어느새 윗사람이 되어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다.
좀 더 일찍 관여했어야 했나? 회한이 든다.
시간이 없다.
작년에 본 풍경이 새롭게 느껴지는 강태산은 오른쪽 약지에 낀 금반지를 엄지로 굴렸다.
생각이 많아지려 할 때 하는 습관이다.
왠지 올해 여름은 뜨거울 것 같다.
똑똑-
“네-.”
방주인의 묵직한 목소리가 전해지자, 밖에 있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오셨다는 말 듣고 바로 올라왔어요. 괜찮으신가요?”
바로 밑에 층에 있는 이정후.
“응. 괜찮아. 자네는?”
“저야 뭐, 똑같죠.”
“우리 나이에는 똑같은 게 좋은 거지. 아닌가? 자네는 아직 어린가?”
“어리다고요? 하하하- 변호사님, 제 큰손주 놈이 이번에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하하하.”
“그래?”
“네. 하하하.”
이 녀석도 한때는 열정 가득한 젊은 변호사였었는데.
한때는 우리 모두 그랬지.
이제는 거대한 조직을 지키고자 온 힘을 쓰고 있다.
녀석은 녀석의 방식대로, 나는 나의 방식대로.
과연 우리가 여전히 변호사들일까?
“그래서, 무슨 일을 상의하러 왔어?”
강태산도 안다.
이정후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이정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해 말에 정말 은퇴하실 건가요?”
걱정스러운 듯 물었지만, 확답을 얻으려는 질문이었다.
“왜? 내가 번복이라도 할까 봐? 걱정 말아, 이 사람아, 그런 일 없을 거니까.”
“번복하셔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습니다, 선배님.”
“그럼, 그럴까?”
“그럼, 다들 한번 모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싫어서도 번복 안 해.”
“그래도 작게라도 은퇴식은 하셔야죠.”
그런 거 안 한다.
뭐 자랑스럽다고.
강태산은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한범상은 어떻게 하고 있어? 양호락 변호사 파트에서 일을 줘봤다면서.”
강태산의 발언에 이정후의 두 눈이 빤짝했다.
움직이지만 않을 뿐이지 다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 55화
고양이, 물고기 그리고 새로운 취미
바다같이 넓은 ‘호수’의 반대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담수(淡水)라서 ‘호수’라고 했을 뿐, 현실 세계의 바다보다 클 수도 있었다.
‘도대체 이곳은 얼마나 넓을까?’
오토바이가 생기면 당장이라도 다 탐험하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완전 충전에 50km까지 밖에 가지 못하는 전기 오토바이로 닿을 수 있는 곳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내연기관으로 구매할 걸 그랬나?’
크게 달라질 것 없을 것 같다.
아공간에 기름을 들고 들어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차치하더라고, 돌아올 때 필요한 기름을 고려하면 갈 수 있는 거리는 100km~150km가 맥스였다.
북쪽의 산은 족히 300km는 떨어져 있는 듯했다.
여분의 기름을 챙겨서 어찌저찌 산자락에 닿는다고 해도 돌아올 때 걸어와야 하는 문제는 여전했다.
그에 비해 호수는 가까이 있었다.
집에서 1.2km 거리.
동쪽 숲의 경계는 집에서 5.1km로 떨어져 있었다.
남쪽 평원으로도 달려봤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평원에는 풀과 나무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없어 보였다.
25km쯤 갔다가 돌아왔다.
‘배터리 교체형이었으면 좋았을걸.’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곳을 나 혼자 전부 탐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전기로 나는 비행기가 있고, 그것을 내가 조종할 수 있다고 한들, 쉽지 않을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탐험을 떠난 것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안에 무언가가 움찔거린다.
저 너머에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임을 이해해도 말이다.
열어보지 못한 붉은색 문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어떤 문을 여셨을까?’
‘붉은색 문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그리곤 사라진다. 아무리 복잡한 생각일지라도.
좋다.
이런 곳이 내 옥탑방 안에 있어서.
‘그나저나, 얘는 또 어디 갔지?’
쿵! 쿵! 쿵!
“나비야- 나비야-”
아, 얼마 전, 나는 고양이 한 마리를 이곳에 데리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