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57)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57화(57/190)
【057화 – 1,140억 원의 무게】
김앤강, 해상팀 회의실,
관리인 미팅에서 돌아온 백인찬은 해상팀 모두를 소집해 놓고 그가 듣고 온 것들을 브리핑했다.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침묵했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침묵했다.
김앤강 해상팀에서 대리하고 있는 채권들은 대부분 구상채권들과 손해배상채권들이었다.
그러니까, SC 케인이 제시한 프로포절을 받아들인다면, 원금의 95%를 포기해야 했고, 그나마 받을 수 있는 5%도 이자 없이 향후 10년을 기다려야 완제 받게 되는 것이었다.
황당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황당한 것은 아니다.
98% 삭감, 99% 삭감 계획도 본 적이 있다.
“파산 시에는 어떻게 된다고 하던가요?”
“파산으로 가면, 일반 채권자들은 받을 게 없을 거래.”
“전혀요?”
“전혀. 현시점에서 파산으로 가면, 우선순위 채권들부터 상환하고 파산절차 비용 정산 후에는 아무것도 남을 게 없다네.”
연 매출 7조가 넘는 국내 2위. 세계 9위 선박회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리먼 브러더스 사태를 소재로 한 2016년 할리우드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를 보면 답이 나온다.
은행권에서 20년, 30년씩 일한 베테랑들이 도대체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영화 내내 여기저기 질문하고 돌아다닌다.
가장 똑똑하다는 그래서 그 암울한 사태 속에서도 큰돈을 번 주인공들 역시도 지표를 통해 결과만 예측했을 뿐,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위 질문에 대한 답도 같다.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결정은 언제까지 내려야 하는 건가요?”
“한 달?”
“한 달이요?! 한 달은 너무 짧은데요. 관리인 리포트가 이제 나왔는데, 한 달 만에 검토하고 결정하라는 건 좀 너무한데요.”
“자금이 바로 투입되지 않으면, 용선계약들 다 파기되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회생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진다는 게 설명이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정식으로 회생 계획도 제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달 만에 그렇게 중대한 결정을 하라는 건 좀···.”
“어쩌겠어. 이제 칼자루를 쥔 거는 저쪽인데.”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절차에 들어가기 전에는 제발 좀 봐달라고 채권자들에게 굽신거리고 다니던 채무자였는데.
절차에 들어가는 순간, 채무자와 채권자의 위치가 달라진다.
이제는 채권자가 아쉽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면 살려야 하는 것은 맞는데, ‘아니꼬우면 배 째’라는 식의 태도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해상팀 회의실에 짜증 섞인 침묵이 흘렀다.
감정이 섞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원래 회생절차는 장부를 다 까고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도와주십시오’ 해야 하는 절차이다. 그게 법의 취지이다.
하지만, 법이 대부분 그렇듯 취지대로 사용되지 않는다.
상대방 측에서 너무 정보를 주지 않아 짜증이 났고,
그런데, 또 법대로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윤상호의 질문.
긴 침묵 끝에 백인찬은 대답했다.
“노태규 변호사를 한번 만나야겠어. 이대로는 클라이언트한테 보고나갈 수 있는 게 없어. 한 변호사, 내일은 시간을 좀 비워두라고. 나랑 같이 가게.”
“네, 변호사님.”
-*-
다음 날, 오전,
백인찬 변호사는 한범상과 함께 법무법인 광종의 사무실을 찾았다.
관리인의 변호사로서 사실상 회생절차를 주도하고 있는 로펌이었다.
“백 변호사님, 어서 오십시오.”
노태규 변호사가 그들을 반겼다.
얼마 전까지 같은 사무실에 있었던 그는 이제 법무법인 광종 기업법무팀 구조조정 파트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그의 뒤로 주르륵 들어온 변호사들 역시 모두 김앤강에 있었던 주니어 변호사와 어쏘 변호사들이다.
백인찬은 사내 정치 따위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오죽하며 회사에 돌아다니는 소문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노태규가 이정후를 통해서 해상팀을 밀어내고 이 회생사건을 맡으려고 했다는 둥 하는 소문도 정작 그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소문에 관심이 없었고, 그런 소문을 감히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했다가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가서 사건이나 하나 더 보라고 타박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노태규와 그의 팀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백인찬은 감이 왔다.
‘이거 쉽지 않겠구나.’
정치적 감각이 없을 뿐이지 사건에 관한 촉은 아주 좋은 양반이다.
웃고 있는 상대가 진짜 웃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1초 만에 파악한다.
“노 변호사도 알지, 우리 팀 한범상 변호사.”
“네,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를 한 적은 없는 것 같네요. 한범상 변호사님, 노태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한범상입니다.”
양측의 수장들을 필두로 인사와 명함 교환하기가 끝난 후, 곧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가 시작되자, 백인찬의 언어가 높임말로 바뀌었다.
더 이상 후배 변호사가 아닌 상대방의 대리인으로 존중하겠다는 의미였다.
“노 변호사님, 어제 관리인 미팅에는 참석하지 않으셨던데.”
“네. 저희가 참석할 단계는 아닌 것 같아서요. 기술적인 부분이라 저희가 참석해서 더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없고요.”
백인찬은 안다, 사실상 SC 케인과의 딜을 끌어낸 사람이 노태규임을.
그가 이 계획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기업구조조정 전문이 아닌 해상 전문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10년 차, 15년 차 변호사쯤으로 취급하자, 백인찬은 먼저 칼을 뽑아 들었다. 가뜩이나 묵직한 목소리가 더 무거워진다.
“뭐,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는 우리 쪽 채권자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칼자루가 채무자 쪽에 넘어갔다고 해서, 채권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같이 죽자’는 저쪽의 공격도 되지만 이쪽의 공격도 된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하지 않겠습니다”처럼 들린다.
개회사 선언과 같은 백인찬의 발언에 노태규가 억지로 웃음을 유지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이렇게 찾아오신 거 보면, 뭔가 협상의 여지가 있어서 오신 게 아니신가요?”
“관리인 미팅에서 나온 정보만 가지고는 SC 케인의 제안에 동의해 주기가 어렵겠다는 말을 하려고 왔습니다.”
“아, 네.”
“설명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그렇게 도출한 계획의 근거를 좀 보여주시죠. 그래야 우리도 돌아가서 우리 클라이언트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이 간다면 설득할 수 있으니까.”
사실, 보여주려고 했던 것들은, 이미 관리인 미팅 때 다 보여줬다.
원래는 더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백인찬의 표정을 본 노태규는 마음을 바꾸었다.
“음···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관리인이랑 현진상선 측이랑 의논을 좀 더 해서 백 변호사님께서 납득하실 수 있을 만한 자료들을 한번 취합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래 거장들의 싸움은 이런 것인가.
핏줄 터지는 공방이라도 터질듯싶어, 잔뜩 긴장하고 간 한범상은 예상외로 짧게 끝난 미팅에 살짝 허무함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2년 차인 그가 이런 미팅에 경험이 없어서였다.
···
미팅을 끝내고 돌아가 차 안,
백인찬은 아끼는 후배에게 이 상황의 심각성에 관해서 설명해 준다.
“한 변호사.”
“네.”
“우리가 대리하고 있는 채권액이 총 얼마지?”
“9,180만 달러입니다.”
“한화 1,200억 원이야. 그렇지?”
“네.”
“그럼, SC 케인 쪽에서 제시한 프로포절에 동의하면, 얼마가 증발하는 거야?”
“원금만 1,140억 원의 채무가 사라지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의뢰인들을 대신해서 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야.”
그래, 그런 것이었다.
해외 채권자 클라이언트들은 대한민국의 회생절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러 번 설명해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복잡한 프로세스이고, 일반적인 상식으론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논리이니까.
-거지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받을 돈이 있는 내가 왜 채무자를 위해 그렇게나 많이 양보해야 한다는 말이야?
법이 그렇다는 걸 설명해 줘도 쉽게 납득이 가지를 않는다.
결국 이 절차에서 그들이 궁금한 건 하나뿐이다.
-그게 정말이야? 저들이 말한 계획에 동의하지 않으면 한 푼도 건질 수 없다라는 게. 그거 정확한 거지? 나는 관리인이고 대한민국 법원이고 못 믿겠고, 내가 너희 김앤강을 믿고 이 터무니없이 불공평한 계획에 동의해도 괜찮은 거지? 이 계획이 나를 위한 ‘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인 거 확실하지?
김앤강이 청구하는 비용의 1/10도 안 되는 값에 채권 신고를 해주는 로펌도 많다.
그럼에도, 채무자에게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싼 비용을 치르고 김앤강을 선택하는 이유는 하나다.
저 질문에 대한 정답을 듣기 위해서이다.
「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The best of the best).」
백인찬과 해상팀은 지금 클라이언트를 대신해서 그러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김앤강의 결정을 따를 것이니까.
원금 1,140억 원짜리 결정.
「뭐,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는 우리 쪽 채권자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한범상은 그제야 왜 평소보다 백인찬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는지 깨달았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영화 <빅 쇼트>에서 자신들의 예측이 맞았다고 환호하던 애송이 천재 펀드매니저들한테 웃긴 일이 아니니까 웃지 말라고 소리치던 브래드 피트의 캐릭터가 떠올랐다.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다. 이제 범상도 1,140억 원의 무게가 어깨 위에 느껴졌다.
-*-
법무법인 광종,
백인찬과 한범상을 사무실 밖으로 배웅하고 돌아온 뒤, 노태규와 그의 팀 변호사들은 회의실에 다시 모였다.
주니어 파트너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어떤 자료들을 더 주실 생각인가요? 이 시점에서 딱히 더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사실이었다.
일단은 95% 삭감을 제안했지만, 더 줄 수 있는 여력이 있다.
현진상선 회계자료에서 SC 케인이 뽑아 정리한 자료들을 넘기면, 포지션을 들킬 수도 있었다.
이것은 협상이다.
95%로 시작해서 92%로 가고 90%쯤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것이 목표.
하지만, 결렬되면 아무 의미 없어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협상이 그러하듯, 이번 역시 결국 심리 게임이다.
노태규는 조금 전 백인찬이 한 말의 무게를 가늠했다.
「뭐,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는 우리 쪽 채권자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진심이다.
이렇게는 절대 동의 해주지 않을 사람이다.
같이 죽을 순 없다.
노태규는 현진상선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그도 산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인찬을 넘어야 한다.
“다 줘.”
“네?”
“현진상선 회계자료 있잖아. 다 넘겨.”
“전부 다요?”
“응. SC 케인 분석자료를 빼고, 원자료들만 넘겨. 까라고 했으니, 까지 뭐. 다 주면 자기들도 뭐라고 못할 거 아니야.”
“아···네.”
“대신 민감한 내부 자료라 김앤강에만 주는 거라고 하고, 검토 기간은 2주밖에 줄 수 없다고 해. 그 안에 결정 못 하면, SC 케인은 빠질 거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노태규는 결정했다.
4명 밖에 없는 팀에게 원하는 것을 주는 대신 시간을 빼앗을 생각이다.
“그리고 김앤강이 대리하고 있는 선박 보험회사들에 슬쩍 흘려. 우리가 김앤강을 설득하려고 백인찬 변호사님에게만 특별하게 자료를 다 넘겨준 것 같다고.”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 58화
유레카!
일주일 뒤,
법무법인 광종, 기업법무팀.
띠리링- 띠리링-
노태규는 김앤강 해상팀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법률사무소 김앤강, 백인찬 변호사 사무실입니다.
“백 변호사님 자리에 계시나요? 현진상선 회생절차 관련해서 확인할 것이 좀 있어서 전화를 드렸는데.
-실례지만, 어디시라고 전해드리면 될까요?”
“법무법인 광종의 노태규 변호사라면 아실 겁니다.”
-네, 잠시만요.
잠시 후, 돌아온 비서는 “연결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그러곤 심드렁하게까지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노 변호사.
“백 변호사님, 노태규 변호사입니다. 어떻게, 보내드린 현진 회계자료 검토는 잘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어, 뭐, 검토하고 있어.
공적인 사안을 논의하는 통화였지만, 후배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백인찬은 굳이 높임말로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프-더-레코드로 부탁할 것이 있었다.
아쉬운 게 있으니 친근하게 말하려는 게 의도이기는 한데,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건,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사실.
“그럼, 일주일 뒤에 잡힌 미팅은 그대로 진행되는 걸로 SC 케인 측에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자리에서 잠정적으로라도 결정을 지어야 할 것 같아서, SC 케인 측 대표도 참석하라고 하려고 합니다.”
-아, SC 케인 측 대표도 참석한다고? 거기 본사가 홍콩에 있다고 했던 가?
“네.”
-그러면 좋기는 하겠네. 그런데···
“그러면, 그렇게 어레인지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노 변호사.
노태규를 부르는 백인찬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네, 변호사님.”
-검토하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분량이 좀 많아. 예상했던 것보다 좀 많이.
“네, 좀 그렇죠? 저도 나중에 보고 듣고 알았습니다. 하하.”
-그래서 말인데···
“네, 변호사님.”
-회의를 한 2주 정도만 더 미루면 안 될까?
백인찬의 요청에 노태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당당하게 요청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그러지 못하는 것은, 서류를 받았을 때 당연히 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옛날 사람.’
조그마한 USB 드라이브 딸랑 하나 건네주었더니, 몇천 장쯤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 성냥값보다 작은 물건 안에 자그마치 현진상선의 10년 치 회계자료와 계약서 등이 다 들어가 있다.
종이로 치면 수십만 장이다.
노태규는 목소리를 깔았다.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벌써 선사들이 싱가포르랑 케이프타운 항에서 현진상선의 배들을 잡으려고 하고 있어서요. 시간을 더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게 문제라면, 내가 클럽들을(선박 보험회사들을) 통해서 선사들에 양해를···.
“곤란할 것 같습니다.”
-?
“변호사님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김앤강이 대리하는 채권자들 말고도 다른 채권자들도 있고, 그들 중 하나라도 액션을 취하면, 이게 체인 리액션처럼 우르르 달려들 게 뻔해서요. 변호사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랬다가 자칫 잘못하면 선박 운용에 문제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회생절차 전체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을. 제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현진상선에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SC 케인 측이 콕 짚어 말한 우려입니다. 다음 달 초까지 채권자들 동의 못 얻으면 손 떼겠다고 이미 통보를 해왔습니다. 저야 충분히 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서요. 이해해 주십시오, 변호사님.”
-······.
긴 침묵이 흘렀다.
가능성만 놓고 본다면야 노태규가 언급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를 파악할 수 있으려면, 먼저 현진상선의 현 재무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받은 자료들을 검토·분석해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양이 너무 많다.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변호사님이 정히 힘들다고 하시면, 어렵겠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제가 SC 케인 측에 요구해서 어떻게든 벌어보겠습니다. 제가 거기 데이비드 창 대표하고 전에 일한 적이 몇 번 있어서요.”
자존심이 상하는 배려.
그러나 그마저도 아쉬운 상황.
백인찬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게 해줘.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화요일 말고 다음 주 목요일에 지난번처럼 저희 사무실에서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SC 케인 측에도 참석하라고 오늘 요청 넣어놓겠습니다.”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노태규는 참고 있던 미소를 마음껏 지었다.
만족스럽다.
극비 자료들이니 해상팀 외 인원에게는 유출이 돼서는 안 된다고 조건을 내걸었지만, 약속을 깨고 김앤강 회계팀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백인찬이 어떤 인물인지 알았기에 줬다.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양반. 거칠고 투박하고 무례해도 비겁하지는 않다.
사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회계팀에 주기 어려울 거라는 확신은 어느 정도 있었다.
저 정도 자료를 2주 만에 검토하게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회계 인력이 소모될 거고, 가뜩이나 원금의 95%가 삭감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 비용을 승인할 채권자 의뢰인들은 거의 없었기에.
10억 원 중 5천만 원밖에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단돈 10만 원도 추가로 쓰고 싶지 않은 것이 채권자의 심리.
그렇다고 5천만 원을 포기할 수도 없다.
「자, 어떻게 할래. 지금 합의하면 5천 만 원을 줄게. 근데,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
정보의 불균형을 이용하고 시간으로 압박한다.
이게 회생의 병법이다.
노태규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홍콩 SC 케인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
띠리링- 띠리링-
-헬로.
“하이, 데이비드.”
통화하는 노태규의 목소리는 이미 승자의 톤을 냈다.
-굿 뉴스?
“굿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