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75)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75화(75/190)
【075화 – 어떤 파동은 느리게 온다】
현진모터스 본사,
프레젠테이션 날.
거대한 ‘ㄷ’자 모양 책상에 붙어 있는 좌석만 50개.
대회의실 안이 가득 찼다. 현진모터스 사람들과 코너스톤 사람들 거기에 진원테크, LKT 그리고 그들을 대리하는 로펌 변호사들까지.
벽 쪽으로 간이 의자까지 마련해서 겨우 손님들을 수용했다.
“안녕하십니까. LKT 심원준 과장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진원테크 노경오 차장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안녕하세요, 김 변호사님. 잘 지내시죠?”
“어이쿠, 여기서 이렇게 보네.”
구면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분주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직원들은 프레젠테이션에 필요한 이것, 저것들을 준비한다.
오기 전에 한차례 세팅을 끝냈지만, 명단에 없는 사람이 참석하기도 하고, 자리 변경 등 조정이 필요한 것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변수는 늘 존재한 법이기에.
“안녕하십니까. 현진모터스 경영전략팀 이태현 팀장입니다. 일단 오시기로 한 분들은 다 오신 것 같은데, 오늘 미팅 일정을 확인한 뒤, 곧바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저희 현진모터스는···”
회의가 시작됐다.
···
40분쯤 뒤.
“이상으로 저희 진원테크의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겠습니다.”
현진모터스의 뜻대로 진원테크는 UAM 컨소시엄 시스템 관리회사 선정을 위한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했다.
많은 준비를 해왔다.
비겁한 수를 쓰기는 했어도 역량이 부족한 회사는 아니다.
인천시로 테스팅베드를 변경할 시 조정되어야 할 부분들부터 인천국제공항을 필두로 모인 태한 컨소시엄과 어떻게 경쟁할 것인지 등 꼼꼼하게 준비해 왔고, 정말이지 저렇게 해도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낮은 비용을 산정해 왔다.
“혹시 프레젠테이션 내용 중에, 아니면, 그것이 아니라도 저희 진원테크의 비전이나 기술 관련해서 질문 있으시면 망설이지 마시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깔끔한 프레젠테이션. 딱히 흠잡을 덴 없다. 궁금한 것도 없다.
현진모터스 담당자 측에서 진원테크가 제시한 낮은 비용의 현실성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발표자는 즉각 즉각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게 질의 시간까지 끝나자, 참석자들은 짧게 손뼉을 쳤다.
칭찬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다음 프레젠테이션을 듣자는 일종의 슬레이트 치기 같은 것이었다.
“자, 다음은 LKT 프레젠테이션입니다.”
진행을 맡은 현진모터스 경영전략팀 팀장의 큐사인이 떨어지자, LKT 측 실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담당자들.
가져온 노트북을 스크린에 연결하고, 발표 자료를 체크하고, 옷매무새도 확인하고.
그들은 알까?
이 자리가 어차피 서로의 1차 지명들을 탈락시키기 위한 쇼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고.
알아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이 있고, 애초에 그러한 열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고.
변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시작하기 전, LKT 측 발표자는 김앤강 변호사들이 앉아있는 쪽을 향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눈짓을 보냈다. 한범상과 나눈 교감이었다.
이 발표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고맙다는 의미였다.
그 변수를 위해 끝까지 열심히 조언해 준 변호사에게.
“안녕하십니까. LKT TF팀 팀장 우진한입니다. 발표를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먼저 설명해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프레젠테이션은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상을 마지막에 주는 시상식도 아니고, 기다려 주는 코어 팬들이 있는 연말 콘서트도 아니다.
같은 주제를 두고 경쟁업체들이 하는 발표는 어쩔 수 없이 겹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비슷할 수밖에 없다. 순서가 밀릴수록 지루해진다.
그래서 진원테크가 그렇게 자신들이 먼저 하겠다고 떼를 쓴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보여드릴 저희 LKT 프레젠테이션은 ‘인천시를 테스팅베드로 변경했을 때 UAM 시스템 관리가 어떻게 바뀌어져야 하는지’에 포커스를 두지 않고, ‘인천시가 가진 장점들을 어떻게 하면 울산시에 도입·시행할 수 있을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LKT 우진한 팀장의 첫마디에 진원테크 프레젠테이션 후 산만해진 회의실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몇몇은 인상은 찌푸렸지만, 대부분의 얼굴엔 물음표가 떴다.
‘뭐지?’ ‘뭐 하자는 거지?’
술렁거렸다.
내용을 떠나 일단 성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계획된 것이었다.
“···저희가 그렇게 한 이유는, 인천은 현진-코너스톤 UAM 프로젝트에 매력적인 도시가 아닐뿐더러 이미 인천을 선점한 한국항공우주연구소-인천국제공항의 태한 컨소시엄과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기에···”
LKT는 현진과 코너스톤의 기싸움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전략을 짰다.
인천에선 한국항공우주연구소-인천국제공항의 태한 컨소시엄을 상대로 승산이 없었다.
결국 진원테크와의 역량을 비교하기 위해서 이런 ‘시험문제’를 낸 것인데, 그 답에서 진원테크보다 몇 점 더 우월하게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들도 눈치챘다.
그래서 사실 자존심을 지키는 셈 치고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하지 말자는 말도 내부에서 나왔었다. 열정 많고 프라이드가 센 젊은 실무진들은 이것도 일종의 갑질이라며 씩씩거렸다.
다른 컨소시엄에 참여하면 되는 거 아니냐며 볼멘 목소리를 냈다.
경영진들은 그런 그들을 다독여 프레젠테이션을 준비시켰다.
다른 컨소시엄?
그런 건 없다.
이미 플레이어들이 세팅된 태한 컨소시엄을 제외하면, 현진 컨소시엄이 가장 큰 컨소시엄이었다.
그 밑으로는 들러리들일 뿐. 경쟁 상대가 안 된다.
사업이다. ‘무시’나 ‘수모’ 따위에 그만둘 정도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을 따내는 일에 정치적인 요인이 전혀 작용할 줄 몰랐을까.
경영진들은 이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을 따낼 수만 있다면,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해야 하는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다. 일을 따낼 수 있다면 말이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바뀐 걸 느꼈다. LKT 대표단은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현진모터스 측을 마주 봤다.
‘우리는 우리의 게임을 하겠습니다. 당신들의 게임에 놀아나지 않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려서 따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그랬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삼십 분 남짓 되는 프레젠테이션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발표자의 질문에 선뜻 아무도 손을 들지 못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 프레젠테이션이었기에, 회의실에 복잡한 의미의 침묵이 흘렀다.
누가 먼저 할지 서로 눈치를 보던 와중, 코너스톤 CFO 개리 터커가 손가락을 올렸다.
“네, 미스터 터커.”
LKT의 의도를 어느 정도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보고 받지 않은 그였다.
엄연히 다른 회사.
물론 그가 추천한 회사이고 코너스톤의 1순위 선택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고, 현진이 끝까지 반대하면 굳이 핏대를 세워가며 싸울 생각도 없다.
전부가 비즈니스일 뿐. 상황과 조건이 맞으면 한 편이고, 다르면 상대가 되는.
“프레젠테이션 잘 봤어요. 다만, LKT의 의도는 알겠는데, 그래도 인천시를 테스팅베드로 할지 말지는 현진과 우리 코너스톤의 결정이에요. 우리도 태한 컨소시엄과 경쟁이라든지 하는 부분은 충분히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프레젠테이션을 요구한 건, 진원테크와의 역량을 비교하기 위해서예요. 이러면, 비교하기 어려워지는 건 알고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 거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 터커. 그래서, 저희는 인천시를 테스팅베드로 바꾸는 조건으로도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습니다.”
“그랬다고요? 내가 중간에 존 게 아니라면 그러한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저희는 이 소중한 기회를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자 하는 저희의 비전을 보여주는 데에 쓰기로 했고, 그래서 조금 전 보신 프레젠테이션의 초점을 거기에 맞췄을 뿐입니다. 인천시 테스팅베드 조건으로 시도해 본 시뮬레이션의 결과와 그에 따른 저희 제안서는 회의 끝나고 문서로 드리겠습니다.”
“아, 그렇게 준비하셨다? 오케이, 그거면 되겠네. 알았어요.”
답변이 만족스러운 개리 터커는 현진모터스의 구태현 대표를 보며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나는 더 이상 질문이 없는데, 그쪽은?’이라는 표정.
구태현 대표는 박성욱 상무를 봤다. 질문을 하라는 눈빛.
근데, 이것 참 곤란하게 됐다.
질문을 하자니, LKT에 설명할 기회를 주는 꼴이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안 하자니, 그것도 모양새가 좋지는 않다.
사실 제일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개리 터커가 먼저 종결지어 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언급하기도 애매하다.
박성욱은 괜한 트집을 잡아본다.
“그러면 LKT는 태한 컨소시엄을 상대로 현진 UAM 컨소시엄의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건가요?”
“인천을 테스팅베드로 결정하신다면, 쉽지 않을 경쟁이 될 거라는 게 저희의 판단입니다.”
“그건 그렇게 듣기 좋은 답변은 아닌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희의 솔직한 의견입니다. 단, 귀사가 저희 LKT를 서비스 관리회사로 선정하시고 인천시로 결정하신다면, 저희는 그 결정을 존중하고 저희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서포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태한 컨소시엄을 상대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할 건지 보여달라고 요구한 프레젠테이션인데 이러면···.”
“저희 프레젠테이션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죄송합니다. 다음번에 또 이런 기회에 있을지 몰라서 저희의 비전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발표를 준비하려다 보니까, 차선보다는 최선에 집중했습니다.”
박성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발표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맞은 편 LKT 대표진에게로 돌렸다.
‘이게 뭡니까?’라는 핀잔을 담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LKT 대표진들은 ‘싫으면 어쩔 수 없죠.’라는 표정으로 응대하고 나왔다.
박성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지었어도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각자 다른 의도가 있어서 표정들이 달랐을 뿐, 기억에 남을 내용이었다.
어차피 결과를 정해놓고 시작한 쇼였는데,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한 자리였는데,
그게 아닌 게 되어버렸다. 다만, 그 순간에만 명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이것으로 양사의 프레젠테이션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0분 정도 휴식 시간을 가진 뒤, 오늘 회의 마무리하겠습니다.”
시작 때처럼 회의는 담담하게 끝났다.
현진모터스와 코너스톤은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결과는 사흘 뒤 진원테크와 LKT에 통보되었다.
「둘 다 아웃.」
결과는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현진모터스는 LKT를 내쳤고, 코너스톤은 진원테크를 내쳤다.
하지만, 그 후로 상황과 조건이 바뀐다.
기싸움이 끝나고, 실리를 따져야 하는 순간이 왔고.
2차 선택 업체들의 보고서를 본 현진모터스는 기억 속에 남은 인상 깊은 LKT의 프레젠테이션이 아쉬워졌다.
다른 상황과 다른 조건.
그 싸움은 끝났다.
코너스톤은 이제 세계시스템을 추천하고 있었기에, 현진모터스가 LKT를 언급한다고 해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말들이 나온다.
아니 먼저 언급한다면 더 이상 코너스톤의 기세에 눌려 하는 선택이 아니지 않는가.
아, 물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하지만, 그게 또 비즈니스다.
그리고 그건 시간 많은 누군가의 노력이 열심히 던져 만들어 낸 파동이었다.
-*-
한 달 뒤,
현진모터스는 LKT 프레젠테이션을 재검토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앞에서는 담담하게 좋다고 했지만, 사실상의 승리였다.
띠리링- 띠리링-
김앤강 파이낸스팀 시니어 파트너 김창균은 코너스톤 CFO 개리 터커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LKT UAM TF팀에서 연락이 왔다.
“변호사님, 소식 들으셨죠?”
“네, 이사님,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직 결정된 거도 아닌데요.”
“그래도 말입니다. 현진 측에서 먼저 제안해 온 거니 된 거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한데···잘 준비해야겠지요.”
“네, 응원하겠습니다.”
그냥 인사를 하러 전화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런데요, 변호사님. 뭐 좀 하나 여쭈어보려고요.”
“네.”
“저희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김앤강을 선임하게 되면, 코너스톤하고 무슨 이해관계 충돌이 생기는 건가요?”
“아, 아니요. 딱히 그런 거는 아닙니다만···.”
“사실 지난번 프레젠테이션 때 도움을 많이 받아서요. 사장님께서 컨소시엄에 참여하게 되면 어차피 같은 배를 타게 되는 거 아니냐시면서, 저희도 김앤강을 선임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요. 혹시 그렇게 되면, 그러니까 저희가 변호사님을 선임할 수 있는 건지 여쭈어보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자문을 의뢰하는 전화였다.
“컨소시엄 구성이 아닌 프로젝트 진행에 관한 거라면 자문할 수 있습니다. 다만, 관례상, 코너스톤 측에 양해를 구해야 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그럼 혹시 김 변호사님께서 그래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프레젠테이션 직후에는 결과가 좋다고는 할 수 없어서 제대로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사실 이번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뭐가···?”
“한범상 변호사님께서 보내주신 자료가 아주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실무진에서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역시 이 정도 전문지식이 있어야 국내 1위 로펌의 파이낸스팀 변호사라면서, 하하하.”
“아···.”
“저도 이번에 다시 준비하면서 한 변호사님이 주신 자료들을 다시 보고 있는데, 이 분야에 저희만큼이나 해박하시던데요. 기술적인 것도 그렇고, 태한 컨소시엄이나 다른 경쟁업체들이 낸 보고서들도 정확하게 알고 계시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랬습니까?”
“네!”
LKT TF팀 이사는 그 뒤로도 한범상에 대한 칭찬을 몇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의도는 확실했다. 만약 공동 자문을 맡기로 한다면, 자기들 일에도 한범상 변호사를 배정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딸깍.
전화를 끊은 김창균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한범상이 LKT에 자기가 정리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그였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던 그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김창균은 훅 스위치를 누른 후, 비서를 호출했다.
-네, 변호사님.
“한 변호사 방에 있으면 잠깐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변호사님, 오늘 한 변호사님 휴가 쓰셨는데요.
“휴가? 알았어.”
김창균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쉬웠다. 이런 일은 바로바로 인정하고 치하해야 하는데···
「DECEMBER」
책상 위 달력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벌써 12월이야?’
그 순간, 미뤄두고 있던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수화기를 들려던 김창균은 대신 사내 메신저에 타입했다.
[창균: 공 변호사, 잠깐 내 방으로 올라와. 우리 어쏘들 성과급 관련해서 회의할 게 있잖아.]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 76화
또 다른 문 III
하루 휴가를 냈다.
가볼 데가 있었다.
그 전에 먼저 엄마를 모시고 을지로에 있는 경양식 집을 찾았다. 오래된 가게라 촌스럽고 허름했다.
“어머, 이 빵 좀 봐. 옛날에 먹던 그 맛이네!”
“뭘 그 맛이야. 딱 봐도 요새 스타일 브리오슈 빵이네.”
살림살이가 넉넉해졌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대출을 알아봐야 하나 싶었는데.
“여기 엄청 맛있다.”
“아우- 참 맛있기는 뭐가 맛있어. 그냥 옛날식 돈가스집이구먼.”
매달 천만 원이 넘게 들어오니 하고 싶은 걸 다하고도 저금할 수 있는 돈이 남았다.
한 1년 정도는 금도 사야 했고 아공간 살림살이를 늘리느라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했는데, 작년 이맘때쯤 나온 두둑한 연말 상여금과 15% 넘게 오른 연봉 덕에 이제는 먹고 싶은 것 정도는 맘껏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얘는 지가 오자고 해놓고 왜 퉁퉁거려.”
더 맛있는 거, 더 좋은 거 사주고 싶은데, 엄마가 자꾸 이런 데만 찾으니까 그렇지.
“아들 돈 잘 벌어.”
“누가 뭐래? 그래도 나는 이게 저번에 니가 사준 그 미셸인지 뭔지 하는 초밥보다 훨씬 맛있어. 맛만 좋다, 얘.”
지난번에는 예약 없이는 먹기 힘든,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초밥집을 모시고 갔었다.
그리고 지지난번에는 한우 스테이크집.
엄마는 메뉴판을 열기가 무섭게 인상부터 썼다.
날생선은 별로라는 둥, 고기는 집에서 구워 먹는 게 제일 맛있다는 둥, 식사 내내 투덜거렸다.
아니, 날생선을 안 좋아하시는 분이 회덮밥을 그렇게 좋아하시나? 시장 고깃집 사장님이 숯불 향을 잘 내서 성공하신 거라며!
안다. 아들이 힘들게 번 돈으로 그런 비싼 거 먹는 게 못마땅하신 거라는 걸.
“아우- 맛있어. 마카로니 샐러드에 이 소스 뭐니? 왜 이렇게 맛있니?”
“마요네즈야! 그냥 오뚜기 마요네즈!”
“아닌데, 그냥 마요네즈는 이렇게 담백하지 않은데.”
“하프 마요인가 보지!”
“아우- 알았어. 얘는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비후까스 먹다 말고.”
하지만, 이제 막 성공이라는 걸 하고 있는 아들은 엄마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걸 사드리고 싶다. 그것이 가성비 나쁜 사치라도.
“다음번에는 랍스터 먹으러 가는 거다.”
“아우, 싫어. 엄마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너나 많이 먹어.”
흥, 안 좋아하기는. 새우, 게 다 좋아하면서.
“근데, 너 저금은 잘하고 있는 거지?”
“왜 돈 필요해?”
“얘는 뭐 돈 얘기만 물어보면 돈 필요하냬. 너 장가가고 집 사려면 이런 데 돈 쓰지 말고, 저금해야 하니까 그렇지.”
자꾸 아파트 사서 장가가라고 하니까 그러지.
“잘 모으고 있습니다요, 어머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자꾸 나 몰래 뭘 사 가지고 오는 거 같으니까 그렇지.”
“엄마 몰래 사 가지고 오는 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흥, 내가 모를 줄 알고. 너 저번에 책이라고 하더니만, 드론인지 뭔지 그거였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바닥에 영수증이 떨어져 있더라.”
“크크큭- 다음에 조심해야겠네.”
“너 돈 모아야 해.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아.”
“아이고, 알았어요. 잘 모으고 있어요.”
나름대로 투자(?)도 잘하고 있고.
“그래? 그래서, 얼마나 있는데? 통장에 한 오천만 원은 있니?”
“뭐야? 엄마, 진짜 돈 필요한 거야?”
“저기 아래 대박부동산 성준 엄마가 그러는데, 사거리에 있는 동아아파트에 괜찮은 매물이 하나 나왔대. 24평인데 전세 끼고 사면···.”
“아우- 됐어.”
“잘 생각해 봐. 엄마한테 있는 삼천이랑 보태면···.”
“알았어! 오케이! 내가 한번 물어볼게. 우리 사무실에 부동산에 대해 진짜 잘 아시는 변호사님이 계시거든. 부동산의 신이라고 불리시는 분이야. 내가 그분한테 물어볼게. 아무렴 그분이 성준이 어머님보다 잘 아시지 않겠어?”
거짓말이다. 그런 분이 진짜 계시는지는 몰라도, 나는 모른다.
안다고 해도 물어볼 생각도 없고.
왜냐고?
알아보고 있는 땅이 있다.
안 그래도, 엄마랑 데이트 끝나고 보러 갈 예정이다.
그래서 쓴 휴가였다.
[의정부 부동산: 변호사님, 오늘 이따 세 시에 오시는 거 변동 없으시죠?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