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77)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77화(77/190)
【077화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다음날,
광화문 근처 죽집.
“형.”
“범상아, 여기.”
시간이란 참 특별한 매개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시간만이 만들어 줄 수 있다.
“근데 왜 죽집이에요?”
“이 집 맛있어.”
“그래요?”
“뭐 먹을래?”
“저는 뭐 김치낙지죽 같은 거···”
“여긴 그런 거 없어.”
“아, 그래요?”
그제야 벽에 걸린 메뉴판을 쳐다봤다.
정말이다. 그런 메뉴가 없다.
전복죽, 녹두죽, 발아현미죽··· 전부 건강식이다.
“그렇네. 뭐가 맛있어요?”
“다 맛있어. 심심하니.”
“심심하니 맛있다고요?”
“진짜야. 나오는 반찬들 간은 잘 되어 있어서 같이 먹기 딱 좋아.”
“그럼, 저는 평원얼큰죽 먹을게요.”
“오케이. 여기요. 평원얼큰죽 하나랑요. 소고기두부죽 하나요.”
어젯밤 나는 아일랜드에서 형의 문자를 받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포털 이용이었다.
어디로든 아공간을 나가는 순간, 현실 세계의 시간은 다시 흐른다는 사실을 파악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창고이다 보니 잠시 잊어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창고에는 왜 자꾸 나가 있냐고?
일단 신기했다.
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다른 나라인 것이.
비록 그것이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꽉 막힌 창고 안이어도.
공기가 다르다고나 할까?
다른 이유는 아버지의 또 다른 유산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놓친 게 있을까 샅샅이 살펴보고 싶었다.
딱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어제 일 덕분에 앞으로는 조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공간으로 나갈 때는 로밍을 끄기.」
확실히 각인되었다.
‘포털’들을 이용할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을.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이 안 보일지언정, 내가 출입하는 순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근데, 광화문에는 무슨 일이 있어서 아침부터 오셨어요?”
“건강검진 받으러.”
“건강검진이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는 아니죠?”
“아니야, 아니야. 정기건강검진. 작년에 제출했어야 했는데, 못해서 늦게 받는 거야. 건강해. 아, 뭐, 콜레스테롤 수치 조금 높은 거. 지방간이 조금 있고. 아, 요산 수치도 조금 높다더라. 이번에도 비슷할 거야. 아마도?”
“건강한 거 맞으세요? 하하.”
“나 정도면 건강한 거지. 근데 너야말로 좋아 보인다. 대형 다니는 후배나 동기들 보면 아주 몰골이 말이 아니던데. 너는 어째 고대로냐? 얼굴에 윤이 나네. 피부과 다녀?”
“아니요.”
“당연히 아니겠지. 김앤강 다니는 변호사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근데, 요새도 매일 야근하는 거 아니었어?”
“네. 뭐, 야근도 하고. 근데 주로 집에 가져가서 일해요. 그게 편해서.”
“그래? 그래도 스트레스 주는 사람은 없나 보다?”
“네, 딱히.”
“김앤강이 좋은 데인 거냐, 아님, 네가 성격이 좋은 거냐?”
“처음에는 대부분 쌀쌀맞으시기는 한데, 같이 일하다 보면 다들 합리적이셔요.”
몇몇을 제외하곤.
“그건 네가 일을 잘해서 그런 거겠지. 일 못 해봐라. 아우 엄청 스트레스 줄 걸.”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 근데, 정기건강검진을 받으러 여기까지 오세요? 회사 근처도 있지 않나요?”
“요기 위, 서대문역에 종합병원 하나 있잖아.”
“오성병원이요?”
“응. 결혼 전에 혼자 살 때 마포에 잠깐 살았는데, 맨 처음 건강검진 받은 곳이 거기다 보니까, 그냥 계속 같은 곳에서 받게 되네. 무엇보다도, 회사 근처에서 받으면 자꾸 전화 와. 점심 전에 들어오냐고. 여기 잘 아는 의사가 있다고 뻥쳤어. 좋지, 뭐, 덕분에 너랑 이렇게 식사도 하고.”
“아-”
그렇게 좋은 형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널따란 사기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죽이 나왔다.
푸짐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죽이다.
그런데, 맛있다. 편하다. 실컷 먹어도 거북함 따위 없을 것 같은.
“괜찮네요.”
“괜찮지?”
“네.”
“누구는 뭐 내시경을 하고도 바로 짬뽕 먹고 그런다는데, 나는 그래도 요거는 하나 지켜. 검진 후 흰죽.”
“맛있어요.”
김앤강에 입사한 지 2년 남짓.
근처 맛집이라는 가게들은 다 가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비밀들은 늘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것처럼.
“이래 봬도 30년이나 된 가게야. 맛이 없을 수가 없지.”
“와- 그렇게나 오래됐어요?”
“저기 문에 쓰여있잖아.”
형이 가리킨 곳에는 개업 연도가 적혀있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신 해와 같은 연도.
별 의미 없는 우연이었겠지만, 괜히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중에 엄마랑 한번 와봐야겠다. 회사 근처 오실 일이 생기면.”
“어르신들이 이런 거 좋아하시지. 나도 예전에 우리 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여기서 몇 번 포장해서 가지고 간 적이 있어. 아직도 말씀하셔. 맛있었다고.”
“근데, 그렇게 오래된 가게치고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 음식도 괜찮은데. 회사에서 누가 얘기한 것도 못 들어봤고.”
“요새 사람들한테 인기 있는 음식은 아니니까. 간도 많이 약하고. 아는 사람들만 오는 거지.”
“하긴.”
“그래도 여기 한때는 꽤 유명했었어. 20년인가 25년 전에는 일본 잡지에도 소개되고 그랬어.”
“그래요?”
“그럴걸.”
“아, 그래서 문에 일본어가 적혀있었구나.”
“저번에 사장님이 누구랑 통화하는 걸 얼핏 들으니까, 자식들한테 물려줄 생각 없다고 하시던데. 어쩌면 몇 년 후에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 가게 안을 둘러보니 뭔가 아련한 감이 든다.
미래가 그리운 느낌이라고 할까.
어쩌면 오지 않을 미래를 보고 싶은 마음···
“아, 잘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갖는 담백한 사람과의 담백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깨끗하게 비우고 가게를 나왔다.
나오는 길, 문에 적힌 일본어가 다시 한번 내 눈에 들어온다.
몇 달 전 형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맞다. <나니와 금융도>. 형, 그 만화책은 국내에서는 발간된 적이 없던데요?”
“어? 그래? 없어?”
“네.”
“그럼 내가 어떻게··· 아, 맞네. 나도 일본 유학 시절에 본 거네.”
일본에서 2년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무열이 형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뭐예요. 엄청 찾았는데.”
“말을 하지, 그랬으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어떻게 지금이라도 구해봐 줘? 관심 있어?”
“진짜요? 근데, 어차피 일본어로 되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럼, 제가 어떻게 봐요.”
“배워.”
“네?”
“일본어 배우라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한자를 알면 좀 더 쉽고. 한번 배워 봐.”
일본어를?
···
무열이 형과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헤어지기 전 형과 나눈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만화책 하나를 보겠다고 일본어를 배우라고? 에이-’
처음에는 농담처럼 듣고 넘겼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상의 동기가 필요하지 않은 나였다.
「만화책을 보려고 일본어를 배운다.」 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아공간 속 시간’ 사용법이냔 말인가.
파이널판타지 시리즈 플레이 시간만 해도 수천 시간인데,
‘아니, 왜 내가 진작에 그 생각을 안 했지?’
사실 다른 언어를 배워 보겠다고 이미 적어놓기는 했었다. 다만, 구체적이지 않게 「5개 국어 공부하기」라고, 막연히 적어놓았더니, 동기부여가 안 돼 실행을 안 하고 있었을 뿐.
나는 곧바로 다음 엔트리를 적어 넣었다.
<일만 시간을 투자해 마스터하고 싶은 100가지>
38. 일본어 배우기
쓰윽-
그 순간, 모니터 한쪽 코너에 올라오는 메시지.
[공유찬: 한 변, 베트남 쇼핑몰 분쟁 사건 기록 검토했으면, 한 30분 뒤에 잠깐 미팅 좀 할까?] [범상: 네, 알겠습니다.]사실 아직 안 봤다.
근데, 30분이면 재빨리 검토하고 미팅에 참석할 수 있다.
문득, 이 사무실 안에서도 아공간 안으로 통할 수 있는 ‘포털’이 생기면 진짜 좋겠는데 하는 망상이 떠올랐다.
그 망상은 더 큰, 또 다른 꿈으로 커진다.
‘혹시 내가 파트너가 돼서 지분이 생기면 내 개인 사무실에도···.’
포털이 생길까?
가슴을 뛰게 만드는 상상이었다.
-*-
고현대학병원,
강태산은 주치의를 찾아왔다.
“위치가 안 좋기는 한데, 종양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수술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말이 바뀌었다.
몇 달 전에는 약물치료로 완치될 수 있을 것처럼 말했는데, 이제는 수술이 필요하단다.
오진은 아니다.
병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사건과 같다. 변수는 늘 존재하는 법.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 입원하면 돼?”
“하루라도 빨리 입원하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알았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변호사님. 쉬운 수술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심각한 상황은 아닙니다.”
“걱정 안 해, 이 사람.”
37년 전에도 이곳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때는 지금 주치의의 담당 교수였던 사람에게 들었다.
그는 이제 은퇴했고, 강태산은 그의 제자에게 진료를 받고 있다.
“그럼, 입원 날짜를 정할까요?”
“그러지.”
“이번 주 금요일은 어떠신가요?”
“의사가 그러라는데 내가 할 말이 있나. 금요일날 아무 때나 오면 돼?”
“네, 그럼, 준비해 두겠습니다.”
사실상 강태산도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그를 기다리는 사건이나 기일은 없다.
다만, 김앤강의 설립한 파트너로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몇 개 남아있다.
그중 하나는 은인의 아들 한범상을 만나는 일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강태산은 고민 중이다.
수술 전에 만나야 하는 것인지가.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 78화
동시에 두 곳에 있어야 한다면
똑똑-
“한 변호···어, 아직 출근 안 하셨나?”
늘 일찍 출근하는 그였기에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자리에 없다.
머쓱해진 도하영이 혼잣말을 내뱉자, 뒤에서 비서가 설명했다.
“한 변호사님 베트남 출장 가셨어요.”
“아, 그래요?”
“네, 오늘 아침 비행기로 가셨어요.”
“그렇구나···언제 오세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급하게 정해진 거라서. 알아볼까요? 혹시 뭐 전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아니요. 제가 까톡으로 할게요.”
“네.”
하영은 다시 한번 범상의 빈 책상을 보고는 그의 방을 나왔다. 급하게 정해졌다고는 하지만, 살짝 서운한 거는 어쩔 수 없다.
당연히 그녀에게 보고할 일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그의 스케줄이 알고 싶을 뿐.
그러고는 이제 걱정이 든다.
같이 하는 중재 건도 다음 주에 출장인데, 과연 몰려드는 일을 그가 잘할 수 있을지가.
물론 늘 잘하는 그였으나, 그에게 요구되는 업무들의 레벨이 점점 더 올라가고 있다는 게 옆에서 지켜보는 하영에게도 느껴졌다.
까톡-
핸드폰에 문자를 입력하던 그녀는 시계를 봤다.
시간상 체크인 중이거나 비행기 탑승 중일 듯싶다.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타입하던 그녀는 쓰던 문자들을 지우고,
[하영: 편할 때 문자주세요.]라고 보내고 핸드폰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