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8)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8화(8/190)
【008화 – 무덤에서 살아 돌아오려면】
“그 외국 변이 해상팀에 지원했어?”
“지원한 건 아닌 것 같고, 해상팀에 요새 일이 너무 많아서 리크루트팀에 요청했다고 들었어요.”
‘낙하산’이 해상팀에 들어갔다는 말에 이제 막 1년차 딱지 뗀 변호사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건 나가라는 거지?”
“왜 꼭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면 해상팀에도 누구 아는 사람이 있나? 혹시 백 변호사님하고도 아는 사이인가?”
“그건 아닌 것 같던데.”
“그걸 도 변호사가 어떻게 알아?”
“그 외국 변호사님이 해상팀에 일하게 된다는 말을 백 변호사님한테 들었어요. 아시는 것 같지는 않던데.”
동기 변호사들은 도하영을 쳐다봤다.
그중 하나는 ‘도 변호사는 해상팀 백인찬 파트너 변호사님하고도 얘기하는 사이야?’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모든 팀에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그녀는 셀럽이나 다름없었다. 해상팀이고 중재팀이고 모두가 데려가고 싶어 하는 인재였다.
“맞다. 도 변, 인턴 때 해상팀에서도 일했던 적 있었지?”
“일했다기보단 경험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로스쿨 재학 시절 방학 때 잠깐 있었으니까.”
엘리트 법조인 코스를 밟았다고나 할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었다.
동기들은 다시 한범상으로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나가라는 거야? 아니면 엘리트라는 거야?”
“설마 후자겠어.”
“그럼, 역시 나가라는 거? 대표변호사의 지시를 대놓고 반대하기는 뭐하니까, 제 발로 나가게 만들려는 도대기 변호사님의 계획?”
동기의 거침없는 발언에 오히려 다른 동기가 도하영의 표정을 힐끔 확인했다.
그녀는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무실에서는 선배 변호사일 뿐이다.
“그런데 해상팀이 엘리트인 거는 맞는 거야?”
“그건 맞지.”
“진짜?”
“응. 거기 백 변호사님이 서울대 수석에 연수원 수석 먹고 나오신 거는 들었지?”
“그건 들었지.”
“그 밑으로 윤상호 변호사님도 연수원 성적 상위 1%였대.”
“아-.”
“윤상호 변호사님이 영국하고 홍콩 변호사 자격증 있는 거는 알아?”
“헉, 둘 다? 몰랐네.”
“거기 송은지 변호사님도 2000년도인가 2001년도 수능 만점자일걸.”
“엘리트 맞네. 그런데 거기는 왜 신임 변호사들의 무덤이 된 거야? 그렇게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일이 너무 많아서?”
“일이 많은 것도 많은 건데. 같이 일하면 자괴감이 들어서 견디질 못한대. 원래 천재들은 범재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잖아.”
“에이- 설마.”
“진짜래. 다들 너무 바빠서 일도 안 가르쳐주고 그냥 불구덩이에 냅다 던지는 스타일인데, 살아남지 못하면 나가라고도 하지 않고 그냥 다음부터 일을 안 준대.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헐. 신입인데도?”
“신입이든 경력이든 똑같이. 어찌 됐든 인센티브가 세니까 나름 영어가 되는 국내 변들이 도전했다가 진절머리를 흔들고 나가고, 외국 변들은 업무 스타일을 견디지 못해서 나가고. 근데, 요새는 더 빡셀 텐데.”
“왜?”
“거기 제일 나중에 조인한 이충현 변호사님이 작년에 영국으로 유학 갔잖아. 가뜩이나 빠듯하게 돌아가는 팀인데, 결원이 생겼으니···그래서 지원 요청한 건가?”
“근데, 해상팀은 왜 그렇게 타이트하게 가는 거야? 인센티브도 좋다면서.”
“방금 말했잖아. 엘리트들만 모여서 불구덩이에 던지는 스타일이라고. 이미 알만한 신입들은 다 알고 있고, 몰랐던 신입들도 오리엔테이션 때 간 보고 아예 지원을 안 하는 거지. 그래도 했던 신입들은 다 이직했고. 그래서 신임 변호사들의 무덤. 5년 전에 이충현 변호사님이 조인한 게 마지막일걸. 맞지, 도 변호사?”
대충 정확했다.
다만 ‘신임 변호사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은 최근에 붙은 게 아니다.
오래전 백인찬 변호사님의 성격이 불같으셨을 때 붙은 별명이었다.
즉, 그때는 더 했다는 말이다. 신임만 오지 않는 게 아니라 경력자들도 오기 싫어한다.
“와- 조인했더니 위로 다 파트너 변호사만 있어.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다시 들어도 가기 싫네.”
“연봉을 두 배 준다고 하면?”
“그래도 난 싫어. 아무튼 나가라는 거 맞네. 서명대 출신을 거기로 보낸 거 보면.”
“그렇다니까.”
동기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도하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아는 작은아버지 도대기 변호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다급하게 요청했다고 해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해상팀에 보낼 것 같지 않았다.
‘내 생각엔 오히려 기회를 주시는 것 같은데···.’
-*-
“한 변호사.”
“네.”
“잠깐 내 방으로.”
김앤강 해상팀 사무실,
점심시간을 앞두고 백인찬 변호사님의 호출을 받았다.
“지난주에 회의했던 MV Stellar Ace 충돌 사건 있잖아. 그거 영문 합의계약서 초안은 어떻게 됐어? 이따 오후에 상대방 선주 측하고 영상 회의하기로 했는데. 다 돼가?”
“네?”
“왜? 문제 있어?”
“그거 따로 내부 회의하기로···.”
문제 있다.
지난주 회의가 끝나고 합의계약서 관련해서 내부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백 변호사님이 바쁘셔서 지금까지 못 했다.
“내가 그랬던가?”
“예.”
“흠. 어쩔 수 없지 뭐. 일단 일정은 잡혔으니까, 스케줄대로 하자고. 할 수 있는 만큼 초안 잡아서 올려.”
“네?”
“어렵지 않아. 파일에 보면 예전에 비슷한 사건에서 사용한 템플릿이 있을 거야. 그거 토대로 작성하면 돼.”
파일? 무슨 파일?
템플릿? 그런 거 없던데···
“모르겠으면 윤 변한테 물어봐.”
“아···네···그럼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한국 시각으로 여섯 시에 통화하기로 했으니까, 늦어도 다섯 시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으면 여섯 시에 줘도 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으면 여섯 시에 줘도 된다니. 농담인가?’
아닌 듯싶었다.
백인찬 변호사님의 얼굴에는 한 톨의 미소도 없었다.
“아···.”
“왜? 못하겠어?”
“아닙니다!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점심 약속 후에 오후 일정이 있어서 나갔다 올 거니까. 다섯 시에 보자고.”
“···네.”
솔직히 처음에는 화가 났다.
‘아니, 이 사람들 도대체 뭐야! 일을 시키려면 가르쳐주고 시키든가. 마치 뭐 내가 여기서 몇 년씩 일했던 사람처럼 일을 시키면 어떡하냐고.’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건이 너무 많아 신입을 교육할 시간조차 없는 것을.
이게 그들의 업무 스타일인 것을.
업무를 받자마자 윤상호 변호사님 사무실을 찾았다.
윤 변호사님도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물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안 계셨다.
“윤 변호사님, 벌써 점심 식사 가셨나요?”
“아니요. 부산 가셨는데요. 부산지법에 기일이 있으셔서.”
“네에?!”
미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점심시간 내내 백 변호사님이 언급하신 파일과 템플릿을 찾았다.
해상팀 공유 폴더를 한 시간이나 뒤진 끝에 겨우 비슷한 사건 파일과 템플릿을 찾을 수 있었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을 건드려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나는 너무 초보였다.
두 시가 넘어갔다.
한 자도 쓰지 못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해놓지 못할 게 뻔했다.
‘정신 차려, 한범상! 네가 제일 많이 갖고 있는 게 시간이잖아!’
지난 삼 주간 누군가 가르쳐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초보니까 당연히 누가 가르쳐줄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게 아닌데···.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무열이 형, 저 범상인데요.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왜?
“형, 해상법에 대해 알려면 무슨 책들을 공부해야 하나요?”
인맥도 없고 학벌도 없는 생짜 외국 변호사가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는 국제 중재와 해상밖에 없다고 말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앤강에 들어온 이후 얼마 전에도 통화를 했었다.
그는 현재 나무해운 사내 변호사로 재직 중이었다.
-너 김앤강 해상팀으로 들어갔어?
“들어간 거는 아니고 인턴처럼 일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해상법 어렵지?
“네. 미치겠어요.”
-크크큭- 나도 그랬지.
“제가 해상에 대해서 너무 문외한이어서 더 그런 거 같아요.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교과서 없으세요?”
“있지. 일단, <해황기>라는 만화가 있어. 그걸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봐.
“네? 만화요?”
-날 믿고, 일단 그거부터 봐. 그다음에는 최종현 변호사님이 저술하신 <해상법상론>이랑 권창영 변호사님이 저술하신 <선원법해설>을 정독해. 한 세 번쯤 읽으면 이해가 되기 시작할 거고, 열 번쯤 읽으면 그제야 해상법이 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다음에 이본 바아츠 영국 교수가 쓴 를 읽어 보고, 그다음에는···.
리스트는 끝이 없었다.
‘하긴 그렇겠지. 국제상법에 근간이 되는 법인데.’
선배는 내 상황을 오해했다.
급하게 읽고 파악할 수 있는 교과서가 필요해 물은 건데, 일 년쯤 공부해야 할 분량의 서적들을 나열했다.
상관없었다.
나는 무열이 형이 불러주는 책들을 꼼꼼하게 적어 내려갔다.
그러곤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선배가 말한 책들은 해상팀 대회의실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에 전부 꽂혀있었다. <해황기>를 제외하고는.
책장에서 그 책들을 전부 빼냈다.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을 분량.
소송기록을 담는 보자기에 쌌다.
“변호사님, 뭐 하세요?”
“저 잠깐 집에 다녀올게요.”
“댁에요? 그 책들을 다 들고요?”
“다섯 시 전에는 들어올 거니까 혹시 그 전에 백 변호사님이 저 찾으시면 그렇게 전해주세요.”
“네? 아··· 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
집에 들어가기 전, 동네 만화방에도 들렀다.
“여기 <해황기>라는 만화책 있나요?”
“네, 있어요.”
“몇 권이죠?”
“45권이요.”
“그거 다 대여할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기본기를 쌓고 나올 생각이다.
근면과 성실은 통한다
“어딜 갔다고?”
외부 미팅에서 일찍 돌아온 백인찬은 한범상을 찾았다.
시켜놓은 업무가 마음에 걸렸다.
너무 코 받쳐서 합의서 초안을 받으면 수정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어느 정도 모양새만 갖춰놓았으면 직접 완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뭐? 집?”
황당했다.
이건 뭐지?
일을 시켜놨더니 집에 갔다.
요새 변호사고 뭐고, 다 MZ, MZ 떠들어 대더니만 그런 놈이 들어온 건가?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화조차 나지 않았다.
“전화 넣어볼까요?”
“아냐, 됐어. 들어오면 내 방으로···아니다, 됐다.”
백인찬은 관심을 끊어버렸다.
어차피 해상팀에 데리고 들어올 놈도 아니고, 번역은 곧잘 하는 거 같으니까, 한 석달 알바 쓰는 셈 치고 굴리다 도대기에게 다시 보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실망스러웠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는데.
인찬은 사무실에 들어가 범상에게 시켰던 합의서 초안을 직접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으니, 한 시간쯤 뒤, 5시 30분에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헉, 헉, 헉.”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신입은 그래도 자기 잘못했다는 걸 알기는 아는 모양이었다.
원래는 이유를 묻지도 않으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이유가 살짝 궁금해졌다.
“자네 지금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집에, 헉, 헉, 집에 다녀왔습니다하, 하, 하-”
“왜? 어머니라도 쓰러지셨어?”
“네? 아니요! 어머니는 괜찮으십니다하, 하- 여기! 시키신 영문 합의서허 여기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백인찬의 이마에 주름이 파였다. 예상하지 못했다.
집에 가서 해왔다는 거야 지금?
뭐가 됐든, 나이가 드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게 별로 달갑지 않다.
“죄송합니다. 오다가 택시 안에서 수정을 좀 하느라고 수기로 된 부분도 있는데, 5분만 주시면 바로 정리해서···.”
합의서 프린트물 여백에 깨알같이 쓰여 있는 수기 첨자들.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내 나이가 육십하고도 넷이다, 이놈아. 돋보기를 껴도 안 보일 것 같은 거를 어디···.
예전 같았으면 ‘너 같은 건 변호사도 아니야, 이 멍청한 새끼야!’ ‘당장 꺼져,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라며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이젠 그런 열정도 없다.
“됐어. 두고 나가.”
애초에 안 될 놈들은 욕을 해도 안 되고, 그나마 싹이 보여 욕 퍼부어 가며 가르쳐준 놈들은, 머리 굵어지니 다 저 잘났다고 나갔다.
그런 열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 나이가 육십에 이르면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고 하셨다.
정말이지 아무리 짜증 나는 말을 들어도 이제 귓등으로 흘릴 줄 알게 되었다.
“저기···변호사님.”
그런데 신입은 마치 백인찬의 일갑자(一甲子) 참을성을 테스트해 보겠다는 것처럼 들러붙었다.
“뭐? 할 말이 남았어?”
“정말 5분만 주시면, 바로 타이프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한 변호사.”
“네.”
“내가 멍청한 변호사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했던 말 또 하게 하는 놈이야. 바빠. 나가.”
“넵. 죄송합니다. 그럼···이따가 영상회의에는 예정대로 참석하면 될까요?”
뭐지, 이 새끼는? 이게 정말 신문에서만 읽었던 요새 애들인가? 김앤강에도 결국 이런 놈들이 들어온 건가?
“됐으니까, 한 변호사는 가서 일 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에 가든지. 회의는 나 혼자 참석해.”
“아······”
“뭐해! 빨리 안 나가고.”
“저기······.”
백인찬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한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오랜만에 쌍욕이 튀어나올 뻔한 순간,
“늦은 건 정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작성했습니다. 한 번만 검토해 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대꾸가 돌아왔다.
“뭐?”
“영국법상 상계권은 커먼로, 그러니까 보통법상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형평적 상계권과 1735년 제정된 영국 상계법 법령에 따른 독립적 상계권, 이렇게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 같은데요. 석광현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2016년 논문 <영국법이 준거법인 채권 간의 소송상 상계에 관한 국제사법의 제문제>을 보면, 전자는 실체법적인 제도이고 후자는 절차법적 제도로서···.”
생뚱맞게 시작한 영국법 관련 질문. 다급해서 그런다는 게 보였다.
게다가 장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뭣도 모르는 놈이 아는 체나 하려고 지껄이는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놈들이 있다. 어디서 본 몇 구절 가지고 마치 해상법에 대해 좀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가라’들.
국내 민사 소송하던 것들이 해상사건들이 돈 좀 된다고 하니까 기웃거릴 때 쓰는 방법.
취직이 간절한 로스쿨 인턴생들이 해상팀에 들어오겠다고 교과서 한 권 읽고 와서 억지로 해대는 보여주기식 질문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들러붙고 있는 한범상이 하는 질문은 그런 알맹이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반면, 국내법상 상계권은 절차법상 제도인데, 합의서상 관할법원을 런던국제해사중재원으로 정하고 준거법을 국내법으로 지정하면, 사고 관련 채권들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지만, 협의 중에 나왔던 타 트랜잭션 관련 채권들 상계는 별도로 준거법을 확실하게 명시해 줘야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첫 번째 생각이고요. 그리고···.”
백인찬은 범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물론 그에겐 어려운 질문들이 아니었다. 실무적으로 그런 경우 명확한 의사 표시만 있으면 준거법이 영국법이든, 국내법이든 상계 인정이 된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 자체가 해상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해상법만 판다고 해도 1년 정도는 제대로 공부해야 할 수 있는 것들인데···
더 놀라운 건 그가 외국 변호사라는 점이었다.
“석광현 교수의 논문을 읽었다고?”
“네.”
“이 합의서 작성 때문에?”
“네.”
순간 녀석의 대답이 진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 들었지만, 백인찬의 시야에 벽시계의 시곗바늘이 들어왔다.
5시 50분. 영국과 영상회의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알았어. 나가 봐.”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제야 돌아서 나가는 한범상.
백인찬은 그의 처진 어깨를 끝까지 바라봤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일을 시켰더니 집에 간 놈이 30분이나 늦게 합의서를 가지고 와서는 봐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곤 안 봐주니까 저렇게 실망한 뒷모습을 하고 있다.
“도대체 뭐야, 저놈은.”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왔다.